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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2. 11. 21:44

말보로 2, 텔레빅 대신 보그 + about writing2024. 2. 11. 21:44

 
 
 
지난번에 발췌했던 말보로 파트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조금 더 올려본다. 단편의 퇴고는 지난주까지 다 마쳤고 지금은 새 글을 쓰고 싶어서 이것저것 생각해보는 중이다. 마냐는 옥상에서 미샤와 함께 담배를 피우고 불쑥 질문을 한다. 
 
 
이 이야기는 1997년 4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샤는 이제 자기 발레단을 운영하고 있고 국내외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게냐는 마린스키에서 몇년 춤추다 미샤의 발레단으로 이적해서 주역 무용수를 맡고 있다. 나는 게냐를 주인공으로 이 97년을 다룬 단편과 중편을 썼다. 이 90년대 이야기는 그전까지 70~80년대의 미샤를 다뤘던 것과는 쓰는 방식이나 감각이 상당히 달랐다. 
 
 

이 에피소드는 지난번 발췌문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얘기라 중간 문단을 겹쳐두었다. 앞부분은 아래 링크에. 제냐(게냐), 리디야, 바냐가 누구인지도 앞부분에 적어두었다. 

 
 
 
moonage daydream :: 마지막 말보로, 제목 + (tistory.com)

마지막 말보로, 제목 +

2주 전에 마친 글을 퇴고 중인데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많이 손을 보고 있지는 않다. 발췌한 파트는 글의 중반부. 새벽에 옥상에서 마주친 마냐가 미샤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다. 이 글은

tvey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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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는 그가 제냐의 방에 있었을 거라고, 창문을 열어서 찬바람이 들어오면 제냐가 깰까 봐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냐와 내 방은 거의 완전히 똑같거든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원룸 끝에 아주 좁은 베란다로 나가는 창문이 달려있어서 창을 열면 그대로 바람이 들어와요. 우리 층이랑 걔네 층은 주인이 같으니까요. 방 다섯 개짜리 코무날카 두 개를 조각조각 쪼개서 세를 놨는데 당연히 화장실과 샤워부스가 딸린 쪽이 더 비싸죠. 나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샤워부스가 딸린 방에 살고 있어요. 차를 권하러 들렀을 때 보니 제냐네 방도 나랑 똑같았어요. 훨씬 더 썰렁하긴 했지만요. 아무래도 사내애가 사는 곳이고 제냐는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침대도 내 것보다 작았어요. 제냐는 그렇게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데. 그 방에는 소파도 없었어요. 의자 몇 개랑 식탁만 있었죠. 아마 제냐는 그 좁은 침대에서 그 금발머리 리디야를 꼭 끌어안고 자곤 했겠죠. 어쩌면 이 사람도. 하지만 성인 남자 둘이 그 좁은 침대에서 자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아마 제냐 몸 위에 반쯤은 올라탄 채 자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둘이 바냐 말대로 정말 그런 사이라면. 그러자 나는 정말로 궁금했던 질문을 불쑥 내뱉고 말았어요.

 

 

바냐가 그랬어요, 당신이 제냐 애인이라고. 정말이에요? ”

 

바냐가 누구예요? ”

 

제냐 동생. 본 적 없어요? ”

 

동생이 있는 건 알아요. ”

 

 

 

그는 화를 낼 수도 있었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어요. 사실 화를 내는 쪽이 더 그럴싸하죠. 스트레이트라면 꼭지가 돌 거고 진짜로 그런취향이라면 들키지 않기 위해 더욱 화를 낼 테니까. 바냐는 그런 게 유행이라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건 그저 영화나 방송, 잡지랑 신문에서나 뻔뻔하게 떠드는 거죠. 아니면 내가 호객하러 가는 거리 한켠에 있는 그쪽 구역애들이나 가능한 거죠. 이렇게 번듯한 남자들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아요.

 

 

미샤는 여전히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는 담배를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가 도로 내려놓으면서 말을 이었어요.

 

 

글쎄요. 애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좋아하죠. ”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했어요. 지하철에서 나오는 안내방송처럼, 1 더하기 12라고 아주 명백한 사실을 읽어주는 것처럼. 반쯤은 짐작했고 믿고 있었으면서도 가슴 한가운데를 바늘 같은 걸로 콱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 사람은 나랑 절대 안 자 줄 거야라는 생각에 아주 잠깐 울고 싶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나는 자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내가 그랬잖아요, 직업이 그렇다고 해서 그걸 정말로 밝히는 여자는 아니라고. 그런 건 아닌데 좀 울고 싶어진 건 맞아요. 솔직히 말하면요, 이 남자가 그런 쪽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와 잘 것 같지는 않았어요. 이 짓거리로 십 년 동안 밥벌이를 해왔다면 그런 것 정도는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실망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맞아요, 난 실망하거나 속상한 게 아니었어요. 하지만 가슴이 뜨끔거리며 철렁한 느낌은 남아 있었어요. 그러다 또 궁금해서 물었어요.

 

 

나는이죠? 제냐는 당신을 안 좋아해요? ”

 

,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난 옛날부터 사람들 마음 같은 건 전혀 모르는 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

 

그럼 물어보면 되잖아요. ”

 

그런가. ”

 

 

 

미샤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어요. 이번에는 상당히 길게 빨아들였고 연기도 멋지게 뿜어냈어요. 마치 그 사람이 몸 전체로 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어요. 연기를 뿜어내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떠는 느낌이었지요. 그러면서 그 사람이 눈으로 웃었는데 그 한 모금으로 말보로 한 갑을 다 피운 것처럼 행복해 보였어요. 1초도 안 돼서 다시 기침을 하기 시작했지만요. 이번 기침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손에서 담배를 다시 빼앗아서 바닥과 벽 사이에 비벼서 껐어요. 그리고는 그 사람이 또 아까워하는 눈으로 쳐다볼까 봐 선수를 쳤어요.

 

 

이제 됐어요. 말보로는 당신한테 안 맞는 거예요. ”

 

안 맞는 것치곤 너무 좋은데. ”

 

마지막으로 담배 피운 게 언제예요? ”

 

“ 3년쯤 됐나? , 아니다. 작년 가을. 그건 별로였어요. ”

 

왜요? 그때도 감기에 걸렸나요? ”

 

사진 찍으려고 피운 거라서. 그런 사진을 찍을 때는 멋있는 척하라고 하거든요. ”

 

 

 

그래요, 생각났어요. 바냐가 잡지들이랑 영화에 대해서도 말해줬네요. 나는 이 사람이 조명 아래에서 값비싼 명품 옷을 걸치고 외제 담배를 피우며 멋있는 사진들을 찍는 모습을 상상했어요. 텔레빅이나 리자 같은 촌스러운 잡지 말고, 코스모폴리탄이나 보그 뭐 그런, 뉴라가 훔쳐 와서 같이 돌려봤던 그 번쩍번쩍 광이 나는 잡지 말이에요. 우리는 그 잡지에서 떠드는 소리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여튼 거기 나오는 옷들이랑 화장품은 전부 다 참 근사했어요. 사진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는데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싸서 그저 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요. 그 비싼 것들을 걸친 화보 속의 여자들은 쭉쭉빵빵했고 남자들은 섹시했죠. 그런 남자가 이 옥상에 올라와 말보로를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고 기침을 하고 있다니 우스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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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빅'은 당시 페테르부르크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일정표와 연예 소식을 수록하고 있던 주간지였다. 나와 쥬인은 매주마다 슈퍼나 가판대에서 이 텔레빅(표기법 대신 진짜 발음대로 하자면 쩰레빅)을 사서 줄을 쳐가며 주중의 영화와 재밌는 방송을 체크했다. 소련 붕괴 후 몇년 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온갖 외설적인 방송들이 둑이 터진듯 흘러나오던 시기였다. 그 당시엔 인터넷도 거의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으니 텔레비전과 온갖 이상한 방송이야말로 우리의 노어 실력을 함양하는데 크게 한몫 하는 놈들이었다(...라고 쓰지만 그저 우리는 재미있고 말초적인 뭔가를 보며 빈둥거리고 싶었을 뿐) 이 텔레빅에는 내가 좋아하던 가수의 사진과 가십도 자주 실렸다. 싸구려 잡지였고 지질은 아주아주 안 좋았다. 이미지를 검색해보니 몇개 안 뜬다. 위의 이미지는 그나마 하나 건진 것. '리자'는 엘르나 엘르걸, 보그 등을 따라서 만든 러시아 여성잡지인데 역시나 촌스러웠다. 리자는 사본 적이 없다만. 하여튼 텔레빅과 리자는 나에게 저 90년대 후반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말보로에 대해서라면. 난 흡연을 하지 않는다만 하여튼 이 글에는 몇가지 소재가 나오는데 말보로도 그 중 하나라 여러번 반복해 쓰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아 담배 좀 피울 줄 알면 좋았겠군' 하는 생각도 좀 들었다 ㅎㅎ (실지로는 미샤처럼 담배 못 피우는 인간) 저 당시에는 러시아 경제가 워낙 안 좋았고 자본주의의 폭풍과 범죄와 폭등하는 물가로 다들 난리였던 시기였다. 러시아에 연수나 유학을 갈 때면 선배들에게서 알음알음 노하우를 듣곤 했는데 각박한 이 동네에서 인간관계의 기름칠을 위해서라면 뇌물이 필수라는 것, 그 뇌물이란 굳이 현금일 필요도 없으며 3개를 명심하라는 것이었다. 그 3개는 담배, 초콜릿, 스타킹이었다. 나는 스타킹을 몇 팩 챙겨갔지만 숫기가 없어서 그것을 활용해보지는 못했고(결국 내가 줄창 신었다. 추워서 내복 대용으로), 초콜릿은 기숙사 수위 아주머니에게 써봤다(무시무시하던 아주머니가 천사처럼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가장 잘 통하는 건 담배, 특히 말보로였다. 그래서 무역회사 다니는 남자 선배들이나 아저씨들은 면세에서 말보로나 양담배를 사가곤 했다. 그러니 말보로를 턱 건네준 마냐는 정말 미샤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 정작 미샤는 사실 체질적으로도 그렇고, 수용소 이후에는 더욱 담배를 못 피우게 되었다만, 하여튼 그래도 호시탐탐 담배 피우고 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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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