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냐와 허브 차, 로켓, 아리나 프로호로브나를 위한 숄 about writing2023. 4. 22. 21:12
역시 작년 말에 끝낸 중편의 일부 발췌. 마지막 파트의 초입부이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게냐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서 계단으로 자기 방까지 걸어올라가고 이웃 여자 마냐와 마주친다. 제냐는 게냐의 본명인 예브게니의 보다 흔한 애칭이다. 게냐는 친한 사이에서는 자기를 제냐보다는 게냐로 불러주기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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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 있었다. 2층과 3층 사이 계단참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창녀 마냐가 나를 보더니 휘파람을 불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한 달 전과 마찬가지로 배지가 덕지덕지 붙은 가짜 가죽 재킷과 얼룩덜룩한 꽃무늬 숄을 어깨에 뒤집어쓴 채 보라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어제 나갔다가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서른을 조금 넘겼지만 거의 우리 엄마만큼 나이가 들어 보였다. 아마 무대 분장보다 더 짙게 칠한 아이라인과 자주색 립스틱 때문일 것이다. 하긴 난 그녀의 맨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 오, 이게 누구야. 제냐, 왕자님. 하도 얼굴을 못 봐서 미국에라도 간 줄 알았네. ”
“ 안녕하세요, 마냐. ”
“ 담배 피울래? ”
“ 안 피우는 거 아시잖아요. ”
“ 맞아, 몸 쓰는 직업이니까. 그럼 잘래? ”
“ 아뇨. ”
“ 알지? 너하곤 언제든지 해줄 수 있어. 말만 해. ”
“ 잘 자요, 마냐. ”
“ 튕기기는. 오늘은 여자도 없으면서. ”
나는 마냐를 뒤로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문득 침실에서라면 마냐의 맨얼굴을 볼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몇 년 전 내가 리다와 문 앞에서 키스를 하고 있을 때도 복도를 지나가다 휘파람을 불었고, 다음날 내게 빌렸던 스패너를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이상한 허브가 가득 든 차를 한 주전자 끓여왔다. 리다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마냐가 돌아가자 그 구질구질한 할머니 같은 차 따윈 개수대에 쏟아버리라고 투덜댔다. 그날 저녁 주전자를 돌려주러 갔을 때 마냐는 예의 두꺼운 아이라인을 칠한 눈꺼풀을 깜박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 제냐. 그 여자 진짜 별로야. 사람 깔아뭉개는 표정하고는. 분명히 노브이 루스키를 물어서 도망갈 거야. 척 보면 알아, 비싼 걸 좋아하는 여자야. 그런 여자 따윈 차버려. 자는 건 아무하고나 괜찮잖아. 필요하면 내가 해줄게. 너한테는 싸게 해줄 수 있어. 한 번쯤은 공짜로.
마냐는 미샤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도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녀는 휘파람을 부는 대신 ‘어머나 세상에!’ 하고 진심으로 놀란 듯한 감탄사를 내뱉었고 이번엔 아무런 핑곗거리조차 없이 그 이상한 허브차에 더해 툴라산 비스킷까지 가져왔다. 미샤는 예의 바르게 그녀와 차를 마셨다. 비스킷은 쪼개서 절반은 나에게 주고 자기는 그 나머지를 먹는 척만 했다. 마냐는 미샤가 전화를 걸러 1층에 내려간 틈을 타서 내게 바짝 다가앉아 두 눈과 온몸을 불태우며 물었다. 저 사람 누구야, 제냐? 세상에, 로켓이네! 저 새까만 눈 좀 봐! 완전 섹스 사말룟이야! 저 사람한테는 풀 패키지로 해줄 수 있어. 앞으로 하고 뒤로 하고 입으로 하고, 하고 싶은 건 다! 지금도 해줄 수 있어, 네가 자리 좀 비켜주면. 아니면 셋이 해도 돼. 공짜야, 저 사람한텐. 얘기 좀 해줄래? 내가 해줄 수 있다고, 나 잘한다고. 응? 그녀의 호들갑도 호들갑이었지만 그 섹스 사말룟(Sex Самолёт)이라는 조어가 너무 기가 막혀서 나는 웃어버렸다. 왜 직접 얘기하지 않느냐고 묻자 마냐는 짙은 화장 사이로도 얼굴을 확 붉히며 ‘부끄럽거든, 진짜 하고 싶을 때는’이라고 대꾸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우리 집에 자주 기웃거렸지만 다시는 섹스 사말룟과 재회하지 못했다. 애초에 미샤는 그렇게 자주 들르지도 않았고 아랫집 창녀가 덮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내 경고 덕분에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마냐는 한동안 나와 마주칠 때마다 ‘그 섹시한 남자는 잘 지내? 다시 안 와? 하고 묻곤 했다. 그녀가 나와 미샤의 관계를 알아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냥 친구나 동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랫집이라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옆집이었다면, 얄팍한 합판으로 조각낸 옛 코무날카답게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을 테고 호기심과 욕정으로 불타는 마냐의 귀에는 모든 게 다 들렸을 테니까. 그리고 미샤는 조심하려고 애쓰긴 했지만 소리를 죽이는 데는 서툴렀으니까. 옆집 노파가 아흔 살이 넘어서 귀가 먹었다는 게 다행이다. 나는 그 노파와 제대로 인사를 해본 적도 없었지만 미샤는 두어 번 그녀의 짐을 들어다 주기도 했고 심지어 노인네가 문을 열지 못해 끙끙거리자 열쇠에 기름칠을 해주기까지 했다. 도쿄에서 돌아올 때 면세점에서 자기 어머니에게 드릴 스카프를 사면서 ‘아, 이건 아리나 프로호로브나한테 갖다주면 되겠네’라며 두툼한 숄을 하나 더 사기까지 했다. 다음날 내가 집에 갔다 오겠다고 했을 때 미샤가 그 숄을 건네줘서 비로소 옆집 노파의 이름을 알았다. 마치 우리 엄마나 할머니를 챙기듯이 굴었다. 막상 그는 우리 엄마를 만나본 적이 없고 아마 영영 만나지도 않겠지만.
..
노브이 루스키는 90년대 소련 붕괴 후 급작스럽게 부를 축적한 신흥 러시아 부자들에 대한 당시 신조어이다. 직역하면 신러시아인이란 뜻임. 소설에서 게냐의 전 애인인 리다는 정말로 노브이 루스키 사업가와 결혼했다.
사말룟(Самолёт)은 러시아어로 '비행기'라는 뜻이다. 이 대화에서 마냐는 자기 마음대로 조어를 하고 있다. (미샤의 매력에 완전히 넋이 나간 나머지)
툴라산 비스킷은 당밀로 만든 두툼한 비스킷으로 툴라의 특산품이다. 코무날카는 소련 특유의 공동 아파트. 이 소설은 90년대 후반의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주인공인 게냐는 소련 시절 코무날카였다가 90년대 들어 다시 벽을 세워서 원룸 스튜디오들로 분할된 허름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위 사진은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만, 몇년 전 블라디보스톡에 처음 갔을 때 머물렀던 숙소 맞은편 아파트 건물. 이런 건물은 페테르부르크에도 많았다.
맨 위 사진은 그때 머물렀던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러시아 옛날 건물 엘리베이터는 정말 살벌하다. 좁고, 어두침침하고, 문이 쾅쾅 닫히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고, 고장도 자주 난다. 그래서 게냐도 고장난 엘리베이터 때문에 계단을 걸어올라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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