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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writing'에 해당되는 글 235

  1. 2020.09.05 쓰는 중 - 섞어 먹는 건 안 좋아하는 사람 + 2
  2. 2020.08.30 쓰는 중 - 아무 때나 와도 되는 미샤와 모레 와야 하는 트로이 + 6
  3. 2020.08.23 쓰는 중 - 의사 선생에겐 어쩐지 불공평한 관심사들 + 2
  4. 2020.08.16 잠시 - 예전의 글 : 료샤와 타타 5
  5. 2020.08.08 루빈슈테인 거리 사진 한 장 2
  6. 2020.08.01 잠시 - 백조를 준비하는 지나 + 2
  7. 2020.07.12 잠시 - 연말 저녁 어둠에 잠긴 거리 + 4
  8. 2020.07.05 잠시 - 장을 보러 간 코스챠 2
  9. 2020.06.22 지금은 사라진 에벨의 안쪽 테이블에서 + 당시 쓰던 것 6
  10. 2020.06.14 겨울, 눈과 얼음 + 6
  11. 2020.06.03 아스토리야 호텔 + 쓰는 중 4
  12. 2020.05.30 극장에서 나와 걸어가는 길 + 2
  13. 2020.05.27 페테르부르크 317주년 + 2
  14. 2020.04.25 fragments - Ночь, Ленинград
  15. 2020.04.25 note - Ночь, Ленинград
  16. 2020.04.25 Ночь, Ленинград (02)
  17. 2020.04.25 Ночь, Ленинград (01) 2
  18. 2020.04.19 잠시 - 유라의 보르쉬 수프 + 8
  19. 2020.04.15 인터뷰가 끝난 후 - 노치, 울리차, 포나리 카페
  20. 2020.04.12 글을 마친 직후, 짧은 메모
  21. 2020.04.09 쓰는 중 - 양배추 수프 냄비와 커틀릿 접시 + 5
  22. 2020.04.05 쓰는 중 - 그가 좋아하는 장소와 광경들
  23. 2020.03.28 쓰는 중 - 의자, 부채와 스카프 4
  24. 2020.03.24 트로이네 집 - 고로호바야 거리 3 + 모이카 운하와 붉은 교각
  25. 2020.03.22 쓰는 중 - 먼저 적었던 문장들 4

 

 

 

 

 

아직 쓰고 있다. 오후에 일곱번째 에피소드를 반 페이지 정도 이어서 썼다. 이미 토요일이 다 갔기 때문에 주말 내로 이야기를 마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오늘 스케치 폴더에 올린 밀크폼 티 해프닝(https://tveye.tistory.com/10480) 때문에 생각나서. 다섯번째 에피소드인 유라의 이야기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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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피야에 대한 예의로 비스킷을 쪼개서 조금 먹었다. 과자는 물론 맛있었지만 위스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원래 그는 술에 안주를 곁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술은 술, 빵은 빵, 고기는 고기, 수프는 수프인 것이다. 맛이 섞이는 것은 질색이다. 예전에 그런 말을 했더니 미샤는 그럼 왜 부체르브로드는 먹어? 샐러드는 왜 먹고?’ 라고 말꼬리를 잡으며 늘어졌다. 미샤와는 뭐가 됐든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어려웠지만 어차피 싸가지없는 애새끼에 뇌세포가 생기다 만 놈이라고 생각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

 

 

 

 

 

 

 

엄청 짧은 문단 하나만 발췌했다. 지난번에 발췌했던 이야기(https://tveye.tistory.com/10459)가 이 문단 다음에 이어진다.

 

 

부체르브로드는 흑빵에 각종 토핑을 얹어먹는 러시아식 오픈 샌드위치이다.

 

 

미샤가 나오는 글들은 원체 길기도 하고 여러 종류를 많이 써서 등장인물들도 많다. 그 중에서도 유라는 나와 공통점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건만... 가만히 보니 유라는 내 친척인 것이었음... 섞어먹는 거 싫어하는 것이....  (그러나 나는 미샤만큼이나 알콜바보인 관계로... 술에는 안주가 없으면 못 견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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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계속 쓰는 중이다. 어제 여섯번째 이야기를 마쳤고 이제 마지막 순서인 일곱번째 에피소드를 쓰기 시작했다. 쓰다 보니 짝수 에피소드들이 홀수 에피소드들보다 길이가 두배 가까이 긴 편이다. 우연이라기보다는 인물과 각 이야기의 특성도 있고 리듬감 때문에 그렇게 배치한 이유도 있다. 하여튼 여섯번째 이야기는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절친한 문학서클 멤버들이 모여 새해 파티를 하는 장면들이라 쓰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또 즐거웠다.

 

 

발췌한 부분은 여섯번째 이야기의 후반부 일부. 새해 샴페인을 마신 후 트로이와 미샤, 그리고 이고리가 대화를 나눈다. 이고리는 트로이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장편에 간간이 등장했던 인물로 이 문학서클을 조직한 네 명 중 하나이다. 영화학교를 졸업했고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70년대 초중반에는 레닌그라드 국영영화사인 렌필름에서 촬영 및 편집기사로 일하고 있다. 왜 렌필름이냐면 레닌그라드 필름이기 때문임. (그래서 모스크바에 있는 영화사는 모스필름이다) 예전 글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미샤는 이고리와도 친해서 가끔 렌필름 영화사에 있는 이고리의 편집실에 들러 금지 영화도 몰래 보고 쪽잠을 자기도 한다. 사실 미샤의 아버지도 다큐멘터리 감독이었고 국영채널을 비롯해 렌필름에서도 오랫동안 일했던 경력이 있다.

 

 

사진은 18년 1월 1일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찍은 카페 간판과 새해 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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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새해에 블라디보스톡에 갔을 때 간단히 구상했고 중간에 좀 미뤄두다가 여름이 되기 전에 쓰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여섯번째 에피소드를 쓰고 있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완성하고 싶지만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전에 이 폴더에 몇번 각 에피소드의 파편들을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 세 개의 문단은 다섯번째 에피소드에서 발췌했다. 다섯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리 아스케로프라는 의사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통 유라로 불린다. 미샤와는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사람은 전에 발췌한 여러 이야기들에서 조금씩 등장한 적이 있고 서무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도 나왔었다. (레닌그라드에 출장간 단추 베르닌을 진찰해주고 '서무 따위가 모든 일을 책임질 필요 없다', '네 몸 네가 챙겨라', '운동 좀 해라' 등등 뼈때리는 말을 늘어놓았음 ㅋ) 미샤 역시 평소 그를 유라라고 부르지만 의사 선생이라고 부를 때도 많다. 절반쯤은 애정, 절반은 농담을 섞어서.

 

 

 

사족. 이 사람의 성인 아스케로프는 옛날에 등장인물들 이름 지을 때 너무 피곤해져서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오페라, 오케스트라 단원들, 행정직원들 성을 쫙 펴놓고 리듬과 어감을 생각하며 골라낼 때 붙인 것이다. 그런데 순전히 발음과 리듬이 좋았을 뿐 이 성의 진짜 소유자인 무용수는 별로 내 맘에 드는 타입이 아니었건만, 그 무용수는 이후 프린시펄이 되었다 ㅋㅋ 그래서 아래 글에 언급했듯 발레에는 거의 무지한 상태인 이 의사 선생은 마린스키 수석무용수의 성을 달고 있게 되었다 흐흑... (마린스키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금세 눈치챘겠지만 그 무용수 이름은 티무르 아스케로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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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위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는 잡동사니들을 대충 정리하면서 그는 텔레비전을 힐끗 보았다. 연말이라 그런지 키로프 극장의 발레 공연이 방영되고 있었다. 눈에 익은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서 안경을 추켜올리고 자세히 봤더니 화면 안에서 미샤가 예쁜 빨강머리 아가씨를 두 팔로 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발레나 클래식 음악, 연극 등 극장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호두까기 인형과 백조의 호수를 구분하지도 못했다. 미샤는 학생 시절 그의 집에 발레 음악 테이프를 가져와서 틀어놓고 팔짝팔짝 뛰고 몸을 꺾고 빙글빙글 돌면서 연습을 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건 콩쿠르 직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고 평소에는 브이소츠키나 외국 음반들을 가져왔다. 아스케로프는 브이소츠키는 괜찮았지만 외국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다. 미샤의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없었다. 미샤는 기분 상해하지도 않았다. ‘상관없어. 나한테만 관심 있으면 되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니 전문 분야에 대해서라면 서로 공평하게 무관심해 주면 좋으련만 미샤는 아스케로프의 집에 오면 화보가 많은 해부학 서적과 주해도 따위를 지치지도 않고 눈을 반짝이며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건 뭐고 저건 뭔지, 저 근육이 뒤틀리면 이 뼈는 어떻게 되는지, 그쪽 신경은 이쪽 근육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달라고 아주 하잘것없는 질문들로 유치원생처럼 그를 들들 볶아댔다. 선생 노릇은 질색이니 그런 건 국립대학 의학부에 가서 청강이라도 하라고 벌컥 화를 내면 미샤는 뭐하러, 눈앞에 진짜 의사 선생이 있는데 라고 대꾸하며 결국은 궁금증에 대해 전부 대답을 얻어내곤 했다.

 

 

 

 텔레비전 화면 속의 미샤는 조명 때문인지 실제보다 뿌옇고 창백하고 심지어 거의 공기처럼 투명하게 보였다. 지치지도 않고 빨강머리 소녀를 들어 올리고 빙그르르 돌리고 바닥에서 허공을 오갔다. 푸르스름한 나비 두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돌려 아가뇩 잡지를 읽기 시작했고 이따금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맨 위와 아래의 사진들은 디아나 비슈뇨바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화보. Alex Gouliaev의 사진. 유라는 구분하지 못했지만, 그가 보고 있던 미샤의 공연이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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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0. 8. 16. 19:29

잠시 - 예전의 글 : 료샤와 타타 about writing2020. 8. 16. 19:29

 

 

 

 

아래 발췌한 글은 몇년 전까지 쓰다가 잘 풀리지 않아 중단해 놓고 기다리는 중인 가브릴로프 본편의 첫 장 일부이다. 화자는 가브릴로프 시립극장 발레단의 무용수인 알렉세이. 애칭은 료샤. 내 친구 료샤랑은 상관없고 이 이름이 캐릭터와 잘 어울렸기 때문에 붙였다. 가브릴로프 본편은 1부 100여페이지, 2부 약간을 쓴 후 멈춰 있는데 언젠가 이어서 쓰기는 할 것이다. 반드시. 사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구상한 게 바로 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이 본편이 안 풀려서 외전도 여러 편 썼고 다른 글들도 여럿 썼다. 그 중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게 이 블로그에도 떡하니 폴더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임. 이 본편의 완전 외전 패러디로 웃기게 쓴 건데 정작 그건 거의 40개 가까운 에피소드들을 쓰고 ㅠㅠ

 

 

그래서 서무 시리즈엔 가브릴로프 본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쏠쏠하게 나왔는데(심지어 본편에선 아직 쓰지도 않았던 인물들도 미리 나왔다) 이 시리즈에서도 본편 중요 인물 두명은 패러디하지 않았다. 하나는 지난번 발췌한 적이 있는 미샤의 화가 친구 키라이고 한명은 이 료샤이다. 같이 나오는 데니스와 타타(본명은 타마라이고 타타는 애칭이다)는 서무 시리즈에 종종 등장했었다. 발레단의 스타 커플이었는데 본편에서도 그렇다. 료샤는 그들의 친구로 학창 시절부터 소설의 현재까지 소위 '삼총사'인데 두 친구에 비해 승급도 늦고 인정도 못 받는 편이다. 이 사람은 맨처음 가브릴로프 본편을 구상했을 때부터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소설 자체도 이 사람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발췌한 부분은 신임감독인 미샤가 소집한 배역 오디션이 있는 날, 극장에 도착한 삼총사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카페에 들러 간단한 아침을 먹는 장면이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티무르 보리소비치도 서무 시리즈에 나왔었다(무려 베르닌에게 돈키호테 배역을 지도하던 사람!) 티무르 보리소비치와 나누는 대화는 주로 데니스의 대사들이다.

 

 

부체르브로드는 오픈 샌드위치. 칼바사는 햄.

 

 

료샤는 알렉세이, 타타는 타마라, 덴카는 데니스의 애칭이다. 미셴카는 물론 미샤(본명은 미하일)의 애칭.

 

 

 

어쩐지 오늘은 이 이야기를 올려보고 싶어서 발췌해본다. 사진은, 딱 맞진 않지만 하여튼 그냥 글만 올리면 심심하니까. 출처는 마린스키의 브 콘탁테 계정에서 옛날에 갈무리한 극장 카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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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타타의 뒤를 따라 극장 카페로 들어갔다. 데니스의 우울한 예상은 물론 들어맞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음식도 거의 없었다. 칼바사와 오이가 얹혀 있는 부체르브로드 세 조각과 삶은 마카로니 한 접시, 홍차 두 잔과 내가 마실 우유를 간신히 긁어모았다. 아직 9시 반도 안 됐기 때문에 자리는 거의 다 차 있었다. 그래도 타타는 솜씨 좋게 비집고 들어가서 우리 자리 쪽으로 다가갔다. 가운데 창가 자리. 다행히 거기 앉아 있는 건 티무르 보리소비치였고 찻잔도 거의 비어 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가 인사를 하자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저런 노인네가 오전 수업 시간만 되면 호랑이처럼 돌변한다는 것은 정말 인생의 수수께끼였다.

 

 

 우리는 티무르 보리소비치와 합석했다. 중앙아시아 출신 노인네답게 그는 우리의 접시를 보더니 혀를 찼다.

 

 

 “ 아침에는 고기를 좀 먹어야지. 부체르브로드 한쪽 먹고 어떻게 힘을 쓰려고. 닭고기 수프라도 시켜오지 그랬나. ”

 

 

 “ 수프는 다 떨어졌어요, 티무르 보리소비치. 있는 거 전부 쓸어온 거예요. ”

 

 

 “ 그럼 아침에 좀 더 빨리 나오든가. 아니면 집에서 챙겨 먹고 다녀! 안 그래도 오후에 오디션도 두 개나 보면서. ”

 

 

 “ 점심 때 많이 먹으면 되죠. ”

 

 

 “ 자네 농담이지? 잔뜩 먹고 나서 새 감독 앞에서 주테를 하겠다고? 몸이 무거워서 제대로 뛰기나 하겠나? 가뜩이나 덩치도 큰 친구가. 미셴카가 키로프에서 주테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어제 보여준 것처럼 뛰었다간 미셴카가 그 자리에서 자네 역 뺏아 버릴 거야. ”

 

 

 “ 제발 좌절시키지 말아 주세요, 티무르 보리소비치. 가뜩이나 지금 남자애들은 전부 불안해하고 있다고요. 그 사람하고 우리를 비교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런 생각하면 잘 뛰려다가도 미끄러지겠어요. ”

 

 

 

 티무르 보리소비치는 껄껄 웃었다. 괜한 걱정을 한다며 데니스의 뒤통수를 가볍게 탁 치더니 다른 손으로 창틀의 천사를 쓱 문질렀다. 그게 우리의 행운을 빌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적인 행위인지 궁금했다. 그는 남은 차 한 모금을 훌쩍 마신 후 먼저 일어났다. 그동안 데니스는 마카로니 접시를 끌어당겨 거의 사흘은 굶은 사람처럼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타타는 내게 부체르브로드를 쥐어 주고 우유 컵도 밀어주었다. 타타에게는 언제나 어딘가 엄마 같은 면이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에도 항상 나와 데니스를 따라다니며 간식을 챙겨주고 모자를 뒤집어씌우고 목도리를 칭칭 감아 주었다. 우리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훨씬 빨리 철이 들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동생을 돌보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저 여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타타의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와 데니스도 장례식에 갔었다. 학교 친구들 모두가 갔다. 타타는 울어서 눈이 빨갰지만 우리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고 애썼다. 위로하는 데니스에게는 엄마가 다행히 많이 아프지 않았다고, 자기와 동생에게 키스를 하고 웃으면서 떠나셨다고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을 때, 접시를 하나 떨어뜨려 깼을 때 타타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엄마가 좋아하던 접시였다면서 슬피 울었다. 나는 타타를 안아주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땐 겨우 열네 살이었으니까. 그저 그녀를 꼭 안고 머리를 쓸어주었을 뿐이었다. 타타는 오랫동안 울었지만 거실을 정리하던 데니스가 부엌으로 들어왔을 때는 눈물을 쓱 닦고 급하게 깨진 접시조각들을 치웠다. 그러다 손을 다쳤다. 손가락을 지혈해주고 반창고를 붙여줬을 때 타타는 내 손을 꼭 쥐며 간절하게 말했다. 덴카한테는 내가 울었다고 말하지 마.  그날 이후 나는 내내 사랑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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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0. 8. 8. 23:02

루빈슈테인 거리 사진 한 장 about writing2020. 8. 8. 23:02

 

 

사진은 2016년 6월에 찍은 것.

 

 

쓰고 있는 글들에 이따금 등장하는 거리이다. 미샤와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라가 루빈슈테인 거리에 있는 시립병원 의사이기 때문이다. 지금 쓰는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유라라서 문득 생각나 사진 한 장 올려봄.

 

 

그런데 사실은 이 거리에는 시립병원이 없다. 그 병원은 내가 허구로 집어넣은 것이다. 이 거리는 매우 좁은 편이고 최근에는 페테르부르크의 바와 카페, 레스토랑들이 밀집한 '힙한' 곳으로 유명해졌다. 그래도 조그만 병원이 한개 있긴 해서 산책하다 찍어둔 그 병원 사진 :)

 

 

그리고 이 루빈슈테인 거리에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망명 전까지 살았던 집이 있다 :) 몇년 전 그 건물 앞에 도블라토프 동상과 언더우드 타자기 기념비가 세워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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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0. 8. 1. 16:45

잠시 - 백조를 준비하는 지나 + about writing2020. 8. 1. 16:45

 

 

 

 

5월부터 꾸준히 쓰고 있긴 한데 속도가 느려서 아직 중반부에 머물러 있는 글이다. 일곱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 쓰는 건 네번째 이야기로 지나가 1인칭으로 얘기한다. 이 에피소드만 1인칭이다. 지나의 시점에서 썼던 글은 옛날에 데이터 구축용으로 썼던 단편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쓰는 과정은 나름대로 재미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지나와 미샤가 같이 췄던 배역들에 대해 높은 분들의 칭찬을 받는 장면 + 백조의 호수 데뷔를 앞둔 지나에 대한 얘기 약간.

 

 

불리첸코와 바랸체바는 당 간부. 마이야는 예전에 발췌했던 글에 몇번 언급됐던 미샤의 열렬한 팬이자 후원자. 레냐는 내 약혼자(ㅋ) 레냐가 아니고 미샤와 지나의 발레학교 동기이자 친구인 레냐. 전에 이 폴더에 올렸던 단편 illuminated wall의 화자이기도 했다.

 

 

글만 올리자니 심심해서, 마린스키 백조의 호수 전경 사진 한컷 걸어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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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합류한 불리첸코가 몇 주 전에 있었던 우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데뷔 무대 얘기를 꺼냈고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바랸체바는 열 시에 국영 채널에서 그 공연 필름을 방영해줄 거라고 말했다. 렌필름에서 녹화를 해가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방송으로 풀 거란 생각은 못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바랸체바는 자기가 힘을 좀 썼다고 웃으며 대꾸했다. 농담인지 아닌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도 남을 여자이긴 했다. 테이블에 모여든 높은 분들은 한동안 미샤와 내가 같이 췄던 배역들에 대해 열띤 찬사를 주고받았다. 당장이라도 저 빨강머리는 별로라니까!’ 하고 외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이야만 빼고.

 

 

이야기는 어느새 2주 후로 다가온 나의 백조의 호수 데뷔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쿨리마코프는 나의 오딜이 너무나 기대된다고 했고 마이야는 결국 그러게, 오딜은 정말 잘 어울릴 거야. 오데트는 글쎄, 연습을 많이 해야겠지 하고 공격을 해왔다. 뭐 극장에서도 수차례 들었던 말이고 나도 동의하는 얘기라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 솔직히 오딜이 더 쉬웠고 오데트는 어려웠다. 그래도 미샤가 백조의 호수를 이미 여러 번 춰 본 데다 나와는 호흡이 잘 맞아서 다행이었다. 오데트 등장 장면을 연습하다 실수를 했을 때 미샤는 그렇게 파닥거리면서 나타나면 벌써 석궁에 맞았겠다 라고 농담을 하면서도 내 팔 동작을 고쳐주었다. 싸가지는 없지만 이 녀석에겐 의외로 선생님들보다 더 효율적이고 정확하게 교정을 해주는 능력이 있다. 그 장면을 구경하던 레냐가 지나 오데트는 화살에 맞아도 끄떡없이 지그프리드를 쪼아버릴 것 같아 라고 끼어들어서 정작 나는 우스워 죽을 뻔했는데 미샤는 지나 잘하고 있으니까 넌 조용히 해 라고 꾸짖었다. 자기가 농담을 시작한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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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금 쓰고 있는 글은 새해 전날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들 중에는 서로 아는 사람들도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어젯밤 세번째 이야기를 마쳤고 오늘부터는 네번째 이야기로 넘어간다.

 

 

세번째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네프스키 대로로 나와 트롤리 버스를 타러 가는 장면이 나온다. 어제 그 부분을 쓰면서 떠올렸던 풍경들과 감정들이 있는데, 그것에 완벽하게 딱 들어맞는 사진들은 없지만 그래도 몇년 전 겨울의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을 올려본다. 2016년 12월. 맨 위 사진은 카잔 성당 앞의 새해 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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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어둑어둑했다. 새해 트리와 장식 전구들이 여기저기서 깜박이고 있었지만 눈부시게 반짝이기에는 아직 어둠이 모자랐다. 네프스키 대로로 나왔을 때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했다. 베라는 목도리를 여미면서 모자를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트롤리버스가 왔다. 버스는 만원이었지만 운 좋게 자리가 나서 앉을 수 있었다.

 

 

 

 

 

 

 

 

네프스키 대로의 어느 트롤리버스 정류장. 연말이라 전구 장식이 달려 있다. 발췌한 글의 베라 역시 저 트롤리버스를 탔을 것이다. 시간적 배경은 다르지만 방향도 번호도 같다. 다만 베라가 버스를 탄 정거장은 여기서 두어 정거장 더 지나야 나온다.

 

 

 

 

 

 

간밤에는 저 글을 쓰고 나서 그런지 겨울의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던 시간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났다. 오후의 어둑어둑함부터 습기와 바람, 눈, 얼어붙은 진창, 파이프에 매달린 크고 작은 고드름들, 그리고 모자와 코트로 온몸을 감싸고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이 사진은 궁전광장에서 네프스키 대로로 나오는 방향에서 찍음.

 

 

 

 

 

이건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에서 이삭 광장으로 접어드는 모퉁이에서. 오른편에 이삭 성당의 실루엣이 보인다.

 

 

 

 

 

여기는 고로호바야 거리. 새해맞이 전구 장식들이 달려 있지만 아직 불이 켜지기 직전이었다. 이 거리 풍경은 내가 종종 올리곤 했다. 트로이네 아파트가 이쪽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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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7. 5. 20:26

잠시 - 장을 보러 간 코스챠 about writing2020. 7. 5. 20:26

 

 

 

4월에 꽤 열성적으로 썼던 글을 마친 후 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다가 5월부터 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좀 쉬어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쓰는 글이라 집중력이 떨어져서 속도가 느리다만 하여튼 조금씩 쓰고 있다. 7개 정도의 짧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단편인데 지금은 세번째 이야기를 쓰고 있다. 배경은 70년대 어느 새해 전날. 레닌그라드.

 

 

 

아래는 첫번째 에피소드 앞부분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코스챠라는 순둥이 청년인데 예전에 트로이와 미샤의 이야기들에서 이름이 한두번 언급된 적이 있다. 트로이의 문학 모임 고정 멤버이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코스챠가 이 문학 모임의 대모인 갈랴와 함께 장을 보러 가는 얘기이다. 굉장히 가볍게 썼다. 길이도 짧다. 코스챠가 첫번째 주인공이 된 이유는.... 이 서클 고정멤버들 중 유일하게 차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서. (뭐 그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지만 ㅎㅎ) 그래도 살다보니 얘가 비록 초미니 에피소드이지만 주인공으로도 등장하게 되었다 :)

 

 

 

사진은 70년대의 레닌그라드 어느 시장 풍경.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아침에 그는 근처에 사는 타냐를 태우고 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주차도 한참 걸렸다. 솜씨 좋게 새치기를 해서 차를 세워놓고 나오니 갈랴가 장바구니를 들고 하염없이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코스챠는 전날 밤의 슬픔이 새삼 떠오르며 부아가 치밀었다.

 

 

    “ , 열 시 반까지 오라면서 넌 삼십 분이나 늦게 오냐! 나보고는 차 가지고 일찍 와야 되니까 술도 마시지 말라고 해놓고. ”

 

 

다 계산한 거야. 어차피 주차하는데 그 정도 걸릴 거니까 시간 맞춰서 온 거지. ”

 

 

 

 코스챠는 뭐라고 항의를 해보려 했지만 갈랴를 말로 이길 자신도 없었고 또 가만히 생각해보니 틀린 얘기도 아니어서 그냥 납득했다. 그저 보드카 딱 한 잔밖에 못 마시고 쫓겨난 것만이 서러울 뿐이었다. 트로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자기 역성을 들어 주었을 텐데 싶었지만, 그 녀석은 장 보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서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새해 파티 준비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트로이에게는 다른 면에서 장점이 많았으므로 코스챠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도 이게 벌써 몇 년째인가, 이제 이렇게 짐꾼과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것은 막내인 미샤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 꼬맹이는 술도 안 마시니 더욱 안성맞춤일 텐데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발레 광팬인 타냐가 어디 감히 왕자님에게 허드렛일을 시키려고 하느냐며 두들겨 패려고 할 것 같아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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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2013년에 카페 에벨에서 찍은 것이다. 당시 나는 프라하에서 2월과 3월을 보냈다. 잠시 휴직을 한 상태였다. 내가 빌렸던 아파트에서 나와 아주 좁은 골목 하나만 통과하면 카페 에벨이 있었다. 평균 이틀에 한번은 에벨에 갔다. 딱 하나뿐인 창가 자리에 앉으면 행복했지만 글을 쓰기에는 이 테이블이 가장 좋았다. 견고하고 넓은 사각형의 테이블, 편한 의자, 그리고 가장 안쪽이라 등을 기대고 앉으면 카페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체코어와 영어, 이따금 러시아어, 그리고 드물게 중국어나 다른 나라 말들이 들려왔다.

 

 

프라하의 2월과 3월은 머무르기에 별로 좋은 시기가 아니다. 날씨는 춥고 을씨년스럽다. 한겨울의 매력도 없다. 모든 것이 어중간하고 음습하다. 하지만 이 당시의 기억은 지금 나에게 매우 소중하게 남아 있다. 이때 나는 수용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다. 주로 여기, 카페 에벨에서. 오후에.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서는 밤중부터 새벽 늦게까지, 내 생애에서 가장 널찍한 아파트를 혼자 쓰면서, 싸늘하고 추운 거실에 놓여 있는 아주 큰 이케아 테이블 앞에 앉아 어둑어둑한 램프 불빛 아래에서 썼다. 거실은 커다란 창문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덕분에 낮에는 바깥 풍경을 보기 좋았지만 밤과 새벽엔 어두웠고 바람이 들어와서 추웠다. 늦은 오후 에벨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좀 쉬다가 밤이 되면 새벽까지 다시 썼다. 이것이 내가 프라하에 대해 품고 있는 가장 소중하고 내밀한 기억이다.

 

 

이제 레테조바 거리의 이 카페 에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두어 달 전 코로나 때문에 경영난이 심각해져서 이 지점은 문을 닫았고 카프로바와 바르톨로메이스카 거리의 두 군데만 남았다. 나에게 카페 에벨의 진수는 언제나 이곳, 이 자리와 이 색채, 그리고 타이핑을 하던 저 자리들이기 때문에 너무나 안타깝고 슬펐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변하고 또 사라진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저때 어떤 내용을 쓰고 있었나 궁금해서 사진을 크게 확대해 노트북 모니터를 살펴보았다. 글씨가 흐릿해서 잘 안 보이지만 내가 쓴 글이니 알아볼 수 있었다. 1부 앞부분이었고 슈스코프에 대해 쓰고 있었다. 수용소의 2인자이자 실질적 권력자, 심리교화를 담당하는 역겨운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평범한 간수 청년에 대해서도.

 

 

오랜 기억이고 여전히 생생하다. 저 자리와 저 순간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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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4. 21:36

겨울, 눈과 얼음 + about writing2020. 6. 14. 21:36

 

 

 

한겨울,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페테르부르크를 걸으며 찍은 사진 몇 장. 맨 마지막의 성에 낀 창문 사진을 빼고는 모두 2016년 12월에 찍은 것이다.

 

 

아래는 두어 달 전에 쓴 단편 후반부에서 발췌한 문장 몇 개. 미샤가 자신의 도시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에 대해, 겨울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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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습기. 안개. 바람. 그리고 겨울이 온다. 길고 무겁고 조용하게. 빛은 아주 짧게 머문다. 얼음 위로 눈이 쌓이고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햇살이 투명하고 차갑게 번쩍였다 사라진다. 운 좋은 날이면 우리에게 주어진 낮의 전부, 통틀어 하루 네 시간 동안 파란 하늘과 칼날 같은 햇살 아래 꽁꽁 얼고 온통 지저분해진 포석을 밟으며 운하를 따라 산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건 정말로 드문 행복이다. 기나긴 겨울 동안 그런 날은 거의 오지 않는다. 여름과 빛, 겨울과 어둠. 우리의 도시는 너무나 극단적이라 포용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

 

 

 

 

 

마지막의 이 사진은 훨씬 오래됐다. 2010년 2월에 찍었다. 버스를 타고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갔고 볼쇼이 대로에서 내렸다. 사진은 내리기 직전, 버스 창 너머를 바라보며 찍은 것이다. 창문에 온통 얼음과 성에가 얼어붙어 있었다. 몇년 후 나는 Frost라는 단편을 쓰면서 이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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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3. 22:06

아스토리야 호텔 + 쓰는 중 about writing2020. 6. 3. 22:06




얼마전부터 쓰기 시작한 글은 여러 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금 쓰고 있는 에피소드는 공간적 배경이 바로 이곳 아스토리야 호텔 방이다. 사진은 18년 가을에 갔을 때 찍음. 물론 글의 배경은 소련 시절이라 이 풍경은 당시 인테리어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하여튼.






좋아하는 호텔이고 그랜드 호텔 유럽과 더불어 옛날 이 도시에 처음 갔던 시절 소녀의 로망이었던 곳이다.






창밖으론 이삭 성당이 보인다. 더 좋은 방에 묵으면 테라스가 있고 이삭 성당도 제대로 보인다. 나야 그런 방엔 못 묵어봤지만 사진은 많이 봤고 (부르주아 친구) 료샤도 테라스 있는 방이 좋다고 말해주었다.



쓰고 있는 글에서 나오는 방도 테라스 딸린 방은 아니다. (가격 때문은 아니고 보안상의 이유로) 아마 딱 이런 정도 풍경이 보이는 방일 거라고 생각하며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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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30. 22:32

극장에서 나와 걸어가는 길 + about writing2020. 5. 30. 22:32

 




모이카 운하. 가운데 너머로 이삭성당의 황금 쿠폴이 보인다. 작년 7월 초. 밤. 백야.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 본 후 걸어서 돌아가던 길. 이렇게 운하를 끝까지 따라갈 수도 있고 저 다리를 건너가서 골목으로 들어가 건물들로 둘러싸인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로 꺾을 수도 있다. 버스는 후자의 길을 따른다.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는 꽤 길다. 그 거리로 들어가면 나보코프 박물관을 지나쳐서 이삭 성당과 아스토리야 호텔에 다다른다. 공연 후 내 여정은 보통 여기서 끝난다. 그 호텔이나 근처 숙소에 머무를 때 이렇게 걷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에서 미샤는 조금 더 걸어서 고로호바야 거리로 접어들고 트로이의 작은 아파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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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 Ночь, Ленинград  (0) 20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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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7. 22:50

페테르부르크 317주년 + about writing2020. 5. 27. 22:50

 

 

이 도시는 텅 비었고 동시에 온전하게 꽉 차 있다. 빛이고 어둠이다. 실체 없는 그림자이다. 모든 것이 번쩍이는 투명한 섬광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돌아온다. 거대하고 무관심하고 부드럽게. 숨을 수 없다. 하지만 드러나지도 않는다. 밤도 없고 낮도 없다. 무거운 물결들로 가득한 네바 강과 검게 내려온 하늘을 구분할 수도 없다.

 

 

..

 

 

오늘은 페테르부르크가 317주년이 되는 날이다. 기념으로 백야의 청동기사상 사진 한 장 올려본다. 2015년 7월 한밤중에 산책하며 찍은 사진.

 

 

..

 

 

맨 위 문장들은 최근 썼던 단편에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미샤가 자신의 도시인 레닌그라드(지금의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이야기하는 파트에서 일부 발췌했다.

 

 

...

 

 

 

아주 오래 전, 맨 처음 페테르부르크에서 머물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때, 친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며 말했었다. 뻬쩨르(페테르부르크) 300주년에 꼭 궁전광장에서 다시 만나!

 

 

300주년은 2003년이었다. 우리는 그때 궁전광장에서 재회하지 못했다. 내가 다시 그 도시로 돌아간 것은 그 이후였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후에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매년 뻬쩨르에 간다. 하지만 그 친구들과 궁전광장에서 재회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맘때가 되면, 이 도시의 생일이 되면 나는 항상 저 문장을 그대로 떠올린다. 뻬쩨르 300주년에 궁전광장에서 만나! 시기는 지나갔고 모든 것이 변하고 또 흘러간다. 하지만 저 말을 했을 때의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다. 생생하게.

 

 

...

 

 

발로쟈 슈클랴로프님도 자기 인스타에 뻬쩨르 생일을 기념해 찍은 영상 클립을 올렸다. 모이카 운하변에 있는 켐펜스키 모이카 호텔 옥상에서 찍은 비디오인데 매우 아름답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분의 인스타에 가보시길.

 

** 추가 : 그 영상은 여기 : https://tveye.tistory.com/1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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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5. 17:14

fragments - Ночь, Ленинград 2020. 4. 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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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5. 17:14

note - Ночь, Ленинград 2020. 4. 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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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5. 17:14

Ночь, Ленинград (02) 2020. 4. 2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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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5. 17:13

Ночь, Ленинград (01) 2020. 4. 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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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9. 21:31

잠시 - 유라의 보르쉬 수프 + about writing2020. 4. 19. 21:31

 

 

 

지난주 일요일에 좀 긴 단편을 하나 끝마쳤고 지금은 퇴고 중이다. 쓰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조금씩 발췌한 적이 있다. 오늘은 다 쓴 후 일부 발췌. 화자는 미샤.

 

 

보르쉬는 비트와 쇠고기, 양배추, 양파와 감자 등을 넣고 끓이는 수프이다. 내 글에 자주 등장했던 음식이고, 내가 러시아 갈때마다 꼭 먹는 수프이다.

 

 

유라는 레닌그라드 시립병원의 의사이다. 트로이가 화자로 나오는 레닌그라드 본편에 등장했었고 패러디 외전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한번 나왔다. 단추 청년 베르닌이 선배들 모시고 출장 갔을 때 왕재수 미샤의 부탁으로 편지 전해주러 찾아갔던 의사 선생님이었음.  

 

 

오늘 이웃님과 톡으로 재미나는 얘기를 나눴는데 그러다 먹을 것들 얘기가 나오고... 너무 보르쉬가 먹고 싶어져서 이 부분 발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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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라는 날 거실로 데려가서 사과 주스를 마시게 했고 보르쉬 한 그릇과 흑빵을 주면서 먹으라고 했어. 수프는 진했고 약간 달콤했어. 채 썬 비트가 가득 들어 있었고 양배추는 흐물흐물하고 부드러웠어, 고기는 아주 작게 다져져 있었어. 몇 숟가락 먹자 온몸에 따뜻한 피가 도는 것 같았어. 그 맛은 아주 익숙했어. 유라는 요리를 잘해. 의대에 가기 전에 식당에서 일 년 넘게 일했다고 했어.

 

 

 “ 언제 끓였어? ”

 

 “ 너 자는 동안. ”

 

 

 흑빵은 아주 촉촉했어. 귀퉁이를 떼어내 보르쉬에 담그자 금세 핏빛처럼 붉은 얼룩이 짙게 번지기 시작했어.  보르쉬 먹어, 철분이 많으니까. 다량의 출혈에 특히 좋지.  누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유라는 아니었어. 유라는 말하는 대신 수프를 직접 만들어서 먹이는 사람이야.

 

 

 나는 수프 한 입, 빵 한 입 번갈아 가며 아주 천천히 먹었어. 유라는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도 더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어. 대신 주스를 다 마시라고 했을 뿐이야. 주스는 보르쉬만큼 맛있지 않았어. 가게에서 사온 거니까.

 

 

 “ 넌 저녁 먹었어? ”

 

 “ 당연히 먹었지. ”

 

 “ 그럼 이제 차 마실까? ”

 

 “ 차는 안돼. 카페인은 꿈도 꾸지 마. ”

 

 “ 의사 선생 역시 가차없군. ”

 

 

 먹고 나니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다시 졸음이 몰려왔어. 시계를 보니 자정이었어. 자고 싶지 않았어. 움직이고 싶었어. 펄쩍 뛰어오르고 빙글빙글 돌고 싶었어. 소파와 창문까지의 거리를 재보았어. 예전에는 딱 한 번 뛰어올랐다 내려오면 창문 바로 앞에 멈추었지. 지금은 그러지 못해. 뛰는 것도, 도는 것도, 춤이라면, 아무것도. 하지만 걸을 수는 있어. 그래서 난 창문까지 걸었어. 걷는 동안 몇 발짝인지 세었어. 단숨에 날아오를 수 있었던 거리.

 

 

 

..

 

 

 

 

 

사진은 둘다 2013년, 뻬쩨르의 맛있는 러시아 음식점인 '고골'의 보르쉬. 여기 보르쉬가 제일 맛있다. 한 그릇 먹고 나면 몸이 정말 따뜻해짐. 글에서 유라는 흑빵이랑 같이 줬지만 여기는 고급 레스토랑이므로 제대로 된 뽐뿌슈까(마늘 브리오쉬)랑 같이 나옴. 스메타나(사워크림)는 따로 종지에 나온다. 러시아 사람들은 저것을 푹푹 퍼서 수프에 잔뜩 넣고 풀어먹는데 나는 그냥 한스푼 정도만 넣는다. 스메타나를 넣으면 새빨갛던 수프 색이 핑크색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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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단편을 하나 마친 후 이제 퇴고를 시작했다. 퇴고와 후기 등 후속 작업이 이어져야 하는 시기인데 일도 새로 시작했고 2집 이사도 마무리해야 해서 좀 정신이 없다. 이 시기는 실제로 글을 쓰는 시간 이상으로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려는 중이다.

 

 

아래의 이야기는 이번에 쓴 글이 아니고 몇년 전 쓰다 중단된 가브릴로프 본편의 일부이다. 사실 이번에 쓴 단편도 크게 보면 이 본편에 속해 있다. 프리퀄이라 해야 시간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맞겠지만. 하여튼 언제나 이 본편을 다시 이어서 쓰고 싶은데 참 어렵다. 그래서 이 본편에서 명랑만화처럼 평행 외전 새끼를 쳐서 서무의 슬픔 시리즈가 왕창 나오기까지 했음.

 

 

아래 글을 올리기 전에, 몇년 전 바로 앞부분을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미샤가 지방 소도시(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미샤의 코믹 패러디 버전인 왕재수는 '시골!' 하고 부른다) 가브릴로프에 와서 시립극장 감독을 맡게 된다. 가브릴로프 시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문예 월간지 편집장인 릴리아나 비슈네바(애칭은 렐랴. 맞다,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맨날 미샤 꼬시려고 하다 헛물만 켜는 그 엄친딸 렐랴이다)가 신임 감독인 미샤와 인터뷰를 한다. 전에 올렸던 부분은 그 인터뷰의 일부이다.

 

링크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114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간 사람, 렐랴의 인터뷰)

 

 

이번에 발췌한 이야기는 지난번 올렸던 파트에서 곧장 이어진다. 인터뷰와 화보 촬영을 마친 후, 렐랴는 미샤와 사적으로 더 친해지고 싶어서 좀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 주보프는 앞의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사진 작가이다.

 

 

* '노치, 울리차, 포나리'는 러시아 모더니즘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아주 유명한 시의 앞구절이다. 원래는 '노치, 울리차, 포나리, 아프테카'(Ночь, улица, фонарь, аптека)가 첫 행이고 이 구절을 모르는 러시아인은 거의 없을만큼 유명한 시이다. 뜻은 '밤, 거리, 가로등, 약국'. 이 소설에서 나는 아프테카(약국)를 들어낸 나머지만 카페 이름으로 붙였다. 그 이유는 이 카페가 '포나르나야 울리차', 즉 가로등 램프 거리에 있기 때문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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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촬영을 끝낸 후 주보프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서둘러 나갔다. 어서 빨리 필름을 현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렐랴는 스카프를 고쳐 매면서 내심 미샤가 차를 마시자고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시 반이었고 그녀가 사전에 세심하게 계산한 대로 차를 마실 시간이었다. 월요일이라 극장 카페 차이카는 문을 열지 않았으므로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는 아늑한 카페인 ‘노치, 울리차, 포나리’가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가브릴로프에서는 가장 유행이 빠르고 근사한 곳이었으니까. 레닌그라드에서 온 예술가에게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시를 인용한 간판이 매달린 카페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샤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까지 바래다주면서 10월에 공연을 보러 오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바심이 난 렐랴는 살짝 그를 떠보았다.

 

 

 “ 혹시 우리 인터뷰 때문에 출근하신 건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다른 날로 잡는 건데. ”

 

 “ 아니에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인터뷰가 아니었어도 나왔을 거예요. 오디션도 그렇고 할 일이 많거든요. ”

 

 “ 그냥 렐랴라고 부르세요. 여기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르거든요.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쉴 땐 쉬어줘야 해요. 햇볕도 실컷 쬐고. 아직은 날씨가 좋지만 금방 환절기가 되면서 추워지거든요. ”

 

 “ 여기 날씨는 레닌그라드보다 훨씬 좋은데요. ”

 

 “ 일조량이 더 많으니까요. 그래도 10월이 되면 날씨가 확 달라질 거예요. 지금은 버섯과 나무열매가 한창 맛있을 때죠. 저도 얼마 전에 다차에서 버섯파이와 버찌 잼을 잔뜩 만들었어요. 차에 곁들이기엔 그만이죠. 그러고 보니 차 마실 시간이 다 됐네요. 혹시 이 근처에 있는 ‘노치, 울리차, 포나리’에 가 보셨나요? ”

 

 “ 아뇨. 서점인가요? ”

 

 “ 카페예요. 19~20세기 시집이 많아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몸도 데울 겸 잠깐 같이 가 보실래요? ”

 

 

 미샤는 아주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주보프의 포즈 요청을 거절했을 때만큼 정중하고 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어려우니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얘기했다. 렐랴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렇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미샤는 정말 바쁜 것 같았고 거절하는 태도도 매우 신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매력이 단숨에 통하지 않았다는 데 놀랐을 뿐이었다. 이제껏 렐랴는 그런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레닌그라드 출신답게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면 톱스타였기 때문에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렐랴는 미녀 앞에서 모든 남자들은 다 똑같아진다고 생각해왔고 아직 그 믿음을 버릴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렐랴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하지만 미샤가 차 문을 열어주었을 때 몇 마디를 덧붙였다.

 

 

 “ 오늘이 월요일이라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전 인터뷰 장소를 바꾸자고 했을지도 몰라요. ”

 

 “ 블로크 시가 적힌 카페로요? ”

 

 “ 어디든. 다른 날이었다면 콜랴나 잔나가 끼어들었을지도 모르니까요. ”

 

 “ 콜랴가 누구죠? 잔나는 우리 사무국장일 테고. ”

 

 “ 니콜라이 레베진스키. 그 사람 요즘 심기가 안 좋거든요. 왜인지는 대충 얘기 들으셨겠죠? 전임 감독 체제에서 가장 큰소리치던 사람이었어요. 의회에 로비도 많이 했었죠. 그 사람은 조심하는 게 좋아요. 겉과 속이 다르니까요. ”

   

 

 극장 내부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미샤는 인터뷰 때와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렐랴는 긴 속눈썹 사이로 아름다운 회색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 제 말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미셴카. 전 오래 전부터 당신 팬이었거든요. 볼쇼이와 키로프에도 무대를 보러 갔었어요. 전 당신이 극장을 바꿔놓았으면 좋겠어요. 고여 있는 물 같은 곳이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그저 시골 극장에 지나지 않아요. 전 우리 극장에서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신 춤을 다시 보고 싶어요. 그래서 힘닿는 대로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에요. 저는 레베진스키와도 친분이 있어요. 그는 사악한 사람은 아니에요, 자존심과 명예욕이 아주 강할 뿐이죠. 그러니 아무런 대가 없이 당신에게 쉽사리 협조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사람과 틀어지면 골치 아파질 거예요. 잔나도 마찬가지고. 둘이 아주 친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를 어르고 달래서 포섭하든지, 아니면 아예 잘라내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 시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아요. ‘우리 편’, ‘우리 사람’이란 개념이 너무 확실하거든요. 아마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전 그렇게 할 수 있고요. 이래봬도 전 여기 예술계에서 발이 아주 넓거든요. 그러니 절 친구로 생각하시고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

 

 

 미샤는 그녀의 일렁이는 듯한 회색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고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키스를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또렷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다.

 

 

 “ 고마워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미 많은 도움이 된 것 같군요. 그럼 다음 주에 뵙죠. 안녕히 가세요. ”

 

 

 

 극장에서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렐랴의 머릿속을 산란하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건 ‘노치, 울리차, 포나리’ 카페도, 자신의 조언에 대한 미샤의 반응도, 심지어 그가 키스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곰씹다가 머리가 아파진 나머지 렐랴는 차를 몰다 하마터면 광장으로 곧장 직진해 레닌 동상을 들이받을 뻔 했다.

 

 

  ..

 

 

 

* 렐랴의 본명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비슈네바인데 중간의 페트로브나는 부칭이다. 러시아 이름은 가운데에 아버지 이름을 변형한 부칭이 붙는다. 남자는 ~비치, 여자는 ~브나 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페트로브나는 표트르의 딸이란 뜻이고-액센트 위치 때문에 표트로브나가 아니라 페트로브나가 됨- 미샤 같은 경우는 아빠 이름이 세르게이라서 부칭이 세르게예비치이다. 존대하는 사이이거나 공식적으로 예의를 차릴 때는 상대를 부를 때 이름과 부칭을 같이 붙여 부른다. 친해지면 보통은 애칭을 부른다. 내 친구 료샤도 본명은 알렉세이임. 미샤도 본명 미하일의 애칭.

 

 

* 사진은 2016년 가을, 프라하의 우 크노플리치쿠 카페 창가. 조그만 램프가 달려 있어서 올려봤다 :) 렐랴가 얘기하는 노치 울리차 포나리 카페는 이 카페보다는 좀더 인텔리겐치야 분위기가 풍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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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2. 18:34

글을 마친 직후, 짧은 메모 about writing2020. 4. 12. 18:34

 

 

 

 

1월 중순부터 쓰던 글을 조금 전에 마무리했다. 퇴고 과정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일단 여기서 잠시 멈춘다. 이 글은 북을 치는 것처럼 썼다. 하나의 글을 마친 직후면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특히 이런 종류의 글일 경우에는 더. 고양과 추락, 그 모든 것이 공존한다. 

 

 

 

이제 따뜻한 물로 씻고 머리를 감고 저녁을 먹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잠시 내버려둔 후, 손과 가슴과 머리가 점차 본래의 속도로 돌아가고 열기가 식을 때까지 좀 기다려야 한다. 퇴고는 그 후에.

 

 

 

... 사진은 @iamzatulivetrov. 석양에 잠긴 네바 강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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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쓰는 중이다.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한동안 멈춰 있었지만 어젯밤에 그래도 몇 줄을 이어서 썼다. 얼마 되지 않지만 중요한 문장들이었고 맨처음 구상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내일을 잘 버티고 나면 주말에 부디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서적으로도 그렇고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발췌한 두 문단은 초반부. 미샤가 레닌그라드의 자기 아파트와 검열꾼들에 대해, 그리고 무대 파트너이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 지나에 대해 얘기한다. 그리고 음식 얘기 아주 조금. 이 소설 속에서 미샤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아주 드문 일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구석구석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꾸려야 할 짐이란 건 애초부터 없었어. 이 집은 검열과 수색에 대해서라면 심지어 나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놈들은 작년 겨울부터는 몰래 뒤지는 척하는 것도 집어치웠어. 노골적으로 불쑥 들어와 뒤지고 탈탈 털고 압수하고 또 압수했어. 처음엔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강요했지만 나중엔 종이쪽지 한 장 들이대지 않았어. 네바 강의 갈매기들처럼 뻔질나게, 자연스럽게 드나들었어.

 

 

한번은 지나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그 작자들이 들이닥쳤었지. 그때 지나는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올리비에 샐러드와 양배추 수프 한 냄비, 기름기로 반질반질한 커틀릿이 담긴 접시를 내 코앞에 들이밀며 한번만 더 밥을 굶고 다니면 내 모가지를 자르겠다고 협박하고 있었어. 그 커틀릿 접시는 미사일처럼 날아가 뚱보 보안요원의 이마를 제대로 강타했지. 아마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지나는 그 얼간이의 대머리를 수프 냄비에 처넣었을 거야. 지나는 너무 화가 나서 내가 ‘투포환 선수가 됐으면 금메달 땄을 텐데, 발레는 올림픽에 못 나가잖아’ 라고 농담하는 것도 들어주지 않았어. 하도 지나가 펄펄 뛰어서 그날 왔던 놈들은 검열도 압수도 다 포기하고 대신 내 서류에 빨간 줄을 몇 개 더 긋고 도장도 한 개 찍었어. 접시를 던진 건 내가 아니었는데.

 

 

 

..

 

 

사진은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의 The Repa에 갔을 때 먹었던 양배추 수프. 지나가 가져온 양배추 수프는 저렇게 우아하고 근사해보이진 않았겠지만... 하여튼 지나의 양배추 수프는 법랑 냄비에 가득 들어 있었을 것이다 :) 커틀릿 사진도 올릴까 하다가 사진첩 뒤지기 귀찮아서 양배추 수프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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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바빠서 몇줄 못 썼지만, 어쨌든 계속 쓰는 중이다. 후반부의 문단 하나 발췌. 화자는 여전히 미샤. 자기가 좋아했던 장소와 광경들에 대해 얘기한다. 글에 언급되는 안드레이는 미샤의 레닌그라드 친구인 트로이. 안드레이는 그의 본명이다. 미샤만 이 이름을 부른다. 트로이의 아파트는 이 폴더에 여러번 올렸던 고로호바야 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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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안드레이가 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문을 열고 소리 없이 발끝으로 선 채 천천히 들어간다. 발레리나들도 나의 스텝에 놀랄 것이다. 안드레이가 자고 있지 않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특히 그가 식탁 앞에 앉아 책을 읽으며 강의 준비를 하거나 뭔가를 쓰고 있으면 더욱. 그는 첨탑처럼 키가 커서 머리 위로 셔츠를 뒤집어쓸 때면 팔이 끝없이 뻗어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나를 위해 창가에 있던 소파를 치웠다. 나는 창틀을 붙잡고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작은 동작들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따금 어깨 너머로 식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안드레이가 보이면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지고 몸이 더욱 가벼워지면서 살짝 뛰어오르기만 해도 오랫동안 하늘에 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뛰지는 않는다. 안드레이의 거실은 좁고 바닥과 천장 모두 낡았기 때문이다.

 

 

..

 

 

사진은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걷다가 찍은 건물 현관문. 트로이의 아파트도 이런 무거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두컴컴한 현관이 나오고 여기를 통과해 복도로 가서 아주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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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8. 22:19

쓰는 중 - 의자, 부채와 스카프 about writing2020. 3. 28. 22:19

 

 

 

 

계속 쓰는 중이다. 아마 대여섯 페이지 정도 더 쓰면 끝나지 않을까 싶다.

 

 

발췌한 문단은 후반부의 일부. 화자는 미샤. 자신과 지나가 함께 살았던 시절에 대해 얘기한다. 첫번째와 두번째 문장에서 언급되는 책들과 등받이 없는 의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앞에 따로 나온다. 여기서는 뒷부분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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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재에 그 책들을 꽂아두었지.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는 생각보다 유용했어. 책이 갈수록 늘어나서 그 방에 큰 의자를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야. 우린 그 둥근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싸우기도 했지. 친구들이 많이 놀러 오면 그 의자들도 꺼내서 거실로 가져갔어. 내 친구들은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것도 개의치 않았지만 그래도 의자가 있으면 더 좋아했거든. 때로 난 바를 붙잡고 연습하다 흥이 나면 방과 방을 돌아다니며 춤을 췄고 의자를 계단처럼 딛고 뛰어올랐지. 지나는 나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밥 먹어라 넥타이 좀 매라 매일같이 야단을 쳤지만 춤추는 건 꾸짖지 않았지. 보통은 자기도 같이 췄으니까. 우리 빨간 머리 공주님은 푸에테를 추다 숨이 차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키트리처럼 부채를 펼쳐 바람을 파닥거렸고 난 옆에서 투우사 춤을 췄어. 망토 대신 스카프를 펄럭이면서. 이런 내 스카프들을 굼 백화점에 보내겠다고 하다니.

 

 

..

 

 

부채 이미지는 러시아 웹에서 가져옴. 이미지에 캡션이 좀 희미하게 달려 있다.

 

 

 

 

 

미샤와 지나의 서재에 있던 의자는 등받이가 없다만... 하여튼 그냥 지나가기 아쉬워서 의자 두개 있는 사진 한장. 작년 여름 뻬쩨르, 내가 좋아하는 뽀드삐스니예 이즈다니야 서점 앞의 의자. 이건 내가 찍은 사진. 마침 서점이니까 안으로 들어가면 책들도 가득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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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2017-19 페테르부르크 폴더에 올린 고로호바야 거리 시리즈 3. 이번엔 writing 폴더에 올려봄. 가운데 멀리 황금빛 해군성이 보인다. 이쪽이 트로이네 집이 있는 방향. 오른쪽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하며 썼다.

 

 

 

 

다리 건너편 풍경도 하나. 역시 잘보면 가운데 끝에 해군성 첨탑이 보인다.

 

 

 

 

이 거리를 가로질러 모이카 운하가 흐르고 있다. 운하에 놓여 있는 다리. 이름은 끄라스느이 모스트(Красный Мост) 붉은 다리란 뜻이다. 난간이 붉게 칠해져 있어서. 가로의 고로호바야 방향 대신 운하 따라 세로로 쭉 올라가면 시느이 모스트(Синий Мост)가 나온다. 푸른 다리란 뜻이다. 당연히 파랗게 칠해져 있다 :)

 

미샤가 이 다리를 뻔질나게 건너다녔다. 극장 가는 길 중 하나임.

 

 



 

끄라스느이 모스트에서 바라본 모이카 운하. 역광이 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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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2. 15:57

쓰는 중 - 먼저 적었던 문장들 about writing2020. 3. 22. 15:57

 

 

 

계속 쓰고 있다. 이 글은 1월에 구상했고 1월말부터 쓰기 시작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적었던 문장들이 있다. 보통 그런 식으로 쓴다. 이미지. 단어 몇개. 이어서 대화나 문장들. 그것들과 함께 시작한다.

 

 

아래 발췌한 문단은 중반에 삽입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쓴 문장들이다. 이런 문장들은 순서와 흐름이 왔을 때 집어넣고 단어나 표현 몇몇은 바꾸게 된다. 화자는 미샤. 크냐제프는 모스크바 KGB 실무팀 책임자. 벨스키는 예전에 여러번 등장했던 정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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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타고 온 거야, 비행기? ”

 

아니, 차 타고 왔어. ”

 

 

관용차. 벨스키가 준비해 준 거라고 크냐제프가 그랬지. 높은 분들이 편찮으실 때 타는 차. 당과 인민의 이름으로 경비를 치르겠지. 재판과 주삿바늘과 그 모든 화학 물질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엔가 나는 이 모든 연극 짓거리에 낭비하고 있는 세금이 아깝지 않으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아. 어쩌면 정말로 물어봤을지도 모르지. 기억은 나지 않아. 누군가는 기억하겠지. 끝없는 장광설을 늘어놓던 대머리, 아니면 오른쪽 손등에 타원형의 검은 반점과 구불구불한 금색 털이 두 올 돋아 있던 작자, 그자는 주사를 놓을 때마다 웃고 있었어. 결국 난 적어도 하나쯤은 당과 인민에 충실했던 셈이야. 국가의 이름으로 봉사하는 살인자들에게 진정한 행복감을 안겨주고 있었으니까.

 

 

...

 

 

 

사진은 1970년대 키예프의 거리 풍경. 글과 딱 맞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이미지가 좀 어울리는 것 같아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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