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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writing'에 해당되는 글 235

  1. 2017.10.15 미샤의 안무 데뷔 - 루슬란과 류드밀라 20
  2. 2017.09.08 트로이라는 남자,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를 불러내는 행위, 과정의 메모 22
  3. 2017.09.02 5년 후의 라라, 프랑스 단파 라디오, 나무 십자가 22
  4. 2017.08.22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4(완결). 에벨 + 짧은 메모 21
  5. 2017.08.21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3 : 일린 18
  6. 2017.08.20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2 : 미샤 24
  7. 2017.08.19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1 : 에벨리나 22
  8. 2017.08.12 유배된 미샤와 감시요원 베르닌의 첫 대면 16
  9. 2017.08.05 면회 - 발광 페인트 토마토 수프 24
  10. 2017.06.17 애송이 신임감독과 폐위된 후계자의 면담 28
  11. 2017.06.13 모든 장미가 시들지만 12
  12. 2017.06.12 논쟁하는 미샤와 일린, 백야와 페트루슈카, 회색 고양이 28
  13. 2017.05.22 지나이다의 회상, 보드카, 진짜 중요한 것 28
  14. 2017.03.26 파이프. 운하의 검은 물. 레닌그라드. 몇년 전의 메모 25
  15. 2017.03.20 모스크바 요양소, 재판 18
  16. 2017.03.08 나는 그의 말투로 시작했다 16
  17. 2017.03.05 모스크바에 있는 것들, 오직 불길 23
  18. 2017.02.27 산문시와 연애시, 모스크바의 작은 호텔 방에서, 앨런 긴스버그 26
  19. 2017.01.10 그는 남몰래, 그리고 여전히 글을 쓴다 20
  20. 2017.01.05 다리 난간에서 춤추기, 모든 사원이 우아하고 쓸쓸하다 26
  21. 2016.12.31 눈 깜박여봐, 그럼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22
  22. 2016.12.29 투명함과 어둠 사이에서 18
  23. 2016.12.25 런던에서 걸려온 전화 18
  24. 2016.12.13 미네르바 조각상, 깊은 연못, 요 며칠 글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아마 30
  25. 2016.12.10 보드카를 따지 않는 건 죄악, 옷 빌려입기, 위선자 30








예전에 이 폴더에 미샤와 그의 극장 동기 레냐(내 약혼자 아님), 그리고 궁전광장과 백야,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단편 Illuminated wall 전문과 배경 사진들을 올린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385)



그 단편은 아주 오래 전,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향수를 담아서 썼던 글인데 초창기에 내가 구상했던 미샤가 등장했다. 거기 등장하는 미샤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미샤와는 많이 닮은 동시에 약간은 다른 면도 있다.



그 단편은 1975년 여름, 소련 레닌그라드(지금의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권력자의 별장에 춤추러 오라는 명령을 받은 미샤는 그것을 어기고 백야의 레닌그라드 거리를 쏘다니고 궁전광장에서 춤을 춘다. 그때 그는 동료인 레냐에게 자신이 푸쉬킨의 원작을 바탕으로 안무를 할 거라고 얘기하고 광장에서 그 춤의 일부를 보여준다. 그 작품은 푸쉬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나의 옛 단편에서 미샤는 루슬란의 적수인 악당 로그다이의 춤을 보여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미샤가 처음으로 안무하게 되는 발레는 그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루슬란과 로그다이, 파를라프, 라트미르 4인의 기사들만 등장하는 40분짜리 단막 발레.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고 미샤를 불러낸 후, 나는 장편 하나를 썼다. 미샤의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꽤 긴 소설이었는데 거기서 나는 미샤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안무하게 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미샤가 그 작품을 안무하는 과정 일부와 작품을 실제로 무대에 올리는 장면이다. 이 소설은 발레계 인물이 아닌 트로이의 시점에서 전개되므로 안무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여기 나온 정도만 적었다.



...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푸쉬킨이 불과 스무살때 썼던 근사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러시아 동화로 읽은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도 잘 읽어보면 그냥 동화는 아니다. 꽤나 멋지고 매력적인 작품이다.




안 읽으신 분들을 위해 아주 간단한 줄거리(스포일러 있습니다) : 영웅 루슬란이 아름다운 왕녀 류드밀라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수염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가 나타나 류드밀라를 납치한다. 류드밀라의 아버지는 비탄에 빠져 루슬란을 탓하고, 류드밀라를 구해오는 남자에게 그녀와 결혼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4명의 기사가 길을 떠난다. 주인공인 루슬란. 음침하고 파괴적인 로그다이. 좀 비겁한 파를라프. 세속적이고 선량한 라트미르. 이야기는 이 네명의 모험을 번갈아 보여주고, 동시에 마법사의 성에 갇혀버린 류드밀라의 모험도 같이 그려낸다(사실 류드밀라 얘기가 제일 재미있고 생기넘친다. 푸쉬킨은 생기 넘치는 씩씩한 아가씨 묘사를 참 잘한다) 이러저러하여 루슬란은 결국 마법사를 물리치고 류드밀라를 구해낸다. 그 와중에 루슬란을 죽이려고 달려들던 로그다이는 결투에 패해서 죽고(물귀신에게 영혼 끌려감 ㅠㅠ), 라트미르는 온갖 여색과 사치를 즐긴 끝에 도를 깨쳐서 소박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비겁한 파를라프는 마녀의 도움으로 막판에 루슬란을 궁지에 몰아넣고 류드밀라를 탈취하려다 결국 실패하게 된다.



미샤는 이 재미나는 이야기 전체를 어린이 발레처럼 안무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가 어떻게 안무했는지는 아래 발췌본에 나와 있다.



...



에피소드 도입부에 언급되는 알렉산더 트로치는 영국 현대 작가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는 전에 올린 적이 있다.



보리스 아사예프는 키로프 발레단 예술감독, 이반 노비코프는 볼쇼이 발레단 행정감독이다. 물론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냈음.



...



맨 위 화보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은 David Paitschadse.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런던에 가기 전에 딱 한번 트로이의 집에 찾아왔다. 알렉산더 트로치의 소설과 오스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 때문이었다. 트로치 소설에 대해서는 30분 정도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맨 처음 함께 읽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얘기가 잘 통했다. 미샤는 레딩 감옥의 발라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트로이에게 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와일드 작품을 가져왔을 때는 항상 그랬다.



 “ 낭송 테이프 구해다줄까? ”




 “ 난 네가 읽어주는 게 더 좋아. ”



 미샤는 잠시 소파에 앉아 트로이가 시를 읽어주는 것을 듣다가 창가로 가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 적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아마 백야 안무의 일부일 거라고 생각하며 트로이는 계속해서 시를 읽었다.



 한참 읽다가 트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큰 소리로 물었다.



 “ 그게 뭐야? 그게 춤이야? ”



 미샤는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듯 계속해서 움직였다. 전신을 너무 지독하게 경련하며 바닥에 몸을 굴리고 있어서 트로이는 순간 그가 간질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질렸다.



 “ 어디 아파? ”



 무릎으로 바닥을 찧어대면서 미샤가 말했다.



 “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읽어. ”


 “ 그게 백야야? ”


 “ 아니, 루슬란과 류드밀라야. 그냥 읽어. ”


 “ 왜 와일드를 들으면서 푸시킨 시를 춰? ”


 “ 도움이 돼. 제발 읽어. ” 
 




 그래서 트로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계속 읽었다. 나중에는 아예 등을 돌리고 읽었다. 낭송을 끝내고 뒤를 돌아보니 미샤가 소파에 거꾸로 누워 머리를 바닥에 댄 채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 일린의 새 작품이야? ”




 “ 내가 만드는 거야. 좀 됐어. ”




 “ 안무를 한다고? ”




 “ 응, 5월에 올릴 거야. ”




 “ 전혀 몰랐다, 그쪽에도 관심 있는 줄은. 일린 때문에 자극받았어? ”




 “ 아니, 작년 여름에 골자는 잡았는데 계속 정신이 없어서 손 놓고 있었어. ”




 “ 지금이 제일 바쁜 거 아냐? ”




 “ 바쁘지. ”




 미샤는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다리를 길게 뻗고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셔츠가 말려 올라가며 등이 반쯤 노출되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 사이로 척추 마디들이 가지런하게 튀어 올랐다. 트로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 뼈가 다 불거지네, 너무 무리하고 있는 거 아냐? 잘 챙겨먹고 다녀. ”




 “ 바빠서 그래. 백야 올리고 나면 나아질 거야. ”




 “ 백야에 런던도 모자라서 그 오싹한 춤까지. ”




 “ 별로 오싹하지 않아, 아까 그 부분만 좀 그래. ”




 “ 무슨 장면이었는데? ” 




 “ 비겁한 짓이 일어나는 장면. 그래서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거야. ”




 “ 루슬란과 류드밀라라며? ”




 “ 아, 근데 류드밀라는 안 나올 거야. 아까 그건 파를라프의 춤이야. ”




 “ 뭐, 자고 있는 사람 칼로 찌르고 여자 뺏는 그 놈? ”




 “ 응, 기분 나쁘게 출 만하지? ”
 




 트로이는 창가로 가서 전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사왔던 치킨 샌드위치와 며칠 동안 굴러다니고 있던 오렌지를 가져왔다.



 “ 좀 먹어라, 맛은 별로 없을 테지만. ”




 
 미샤가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벗기고 반으로 쪼갰지만 입에 가져가지는 않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 왜, 변했어? 차가운데 놔둬서 괜찮을 텐데. ”




 “ 있다가 먹을게. ”




 “ 그럼 오렌지라도 먹어. ”




 미샤가 오렌지 껍질을 까서 먹기 시작했다.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기계적으로 먹는 게 분명했지만 어쨌든 뭔가를 입에 넣고 있었으므로 트로이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얼굴이 더 갸름해져서 얼핏 돌아보면 우물처럼 깊은 눈만 보일 지경이었다. 한동안 가위질도 하지 않았는지 길게 자라난 머리칼이 귀를 덮고 목덜미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다. 구겨진 셔츠와 낡은 청바지를 입고 바닥에 앉아 오렌지를 먹고 있는 그 야윈 모습을 보니 근육질의 클래식 무용수라기보다는 미국 음악 잡지에나 나오는 깡마른 락 가수에나 어울릴 것 같았다. 저질스럽고 별 뜻도 없는 가사로 노래하고 기타를 치고 가죽옷을 입고 그루피들과 난잡하게 뒤엉키고 타락한 자본주의 제국의 소산인 마약이나 찔러 넣는 인간들. 그러나 미샤 뿐만 아니라 그와 갈랴와 이고리, 다른 친구들도, 심지어 알리사까지도 그자들의 음반을 모았다.



 “ 일린과는 그래도 잘 맞는 것 같네. 이제 집에도 잘 들어가고. ”



 트로이는 자신이 왜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비이성적인 질투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샤를 볼 때마다 그 조그맣고 사근사근한 남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스탄카는 좋아. 얘기가 잘 통해. ”




 “ 지나가 불편해 하지 않아? ”




 “ 지나는 남자들과 잘 지내. 나하고도 사는데 뭐. ”




 “ 그 사람은 혼자 온 거야? 가족은 없어? ”



 그는 차마 ‘그 자식하고도 같이 자고 있어?’ 라고 묻지 못했다.



 미샤는 그의 소리 없는 질문을 눈치 채지 못한 듯 했다. 하긴 알아차렸어도 내색하지 않을 게 뻔했다.



 “ 혼자 왔어. 공연 날 모스크바에서 애들이 올지도 모르지만. ”




 “ 애들? 결혼했어? ”




 “ 했었지, 두 번. 애들은 첫 부인한테서 난 거고. 큰 애가 벌써 열 살인가 그럴 걸. ” 




 “ 별로 애 아버지처럼 안 보이던데. ”




 “ 뭐 자기가 키우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바가노바에서 특강해주는 거 보니까 어린애들 잘 다루던데. ”




 
 그래서 미샤가 고집을 부려도 잘 받아넘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일린이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희미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확신은 서지 않았다.



 “ 지금 안무하는 그 춤도 일린이 도와줘? ”




 
 미샤가 반쯤 먹은 오렌지를 남은 껍질에 싼 채 샌드위치 옆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씨앗을 두어 개 뱉더니 바닥에 놓고 무심하게 굴렸다.



 “ 아니. 스탄카와 나는 많이 달라. ”




 “ 잘 맞는 줄 알았는데? ”




 “ 스탄카가 잘 맞춰주는 거지. 춤에 접근하는 방식은 달라. ”




 “ 일린이 감상적이라는 거야? ”



 미샤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 아, 예리한데. 어떤 사람은 솜사탕처럼 부드럽다고 했지. ”



 물론 트로이는 마로조프와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 백야 자체가 감상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소설이잖아. ”




 “ 음, 스탄카가 그런 쪽을 좋아하긴 하지. 착하고 밝아, 사람을 잘 믿고 포용력도 있고. ”




 “ 그럼 왜 페트루슈카는 그렇게 만든 거야? ”




 “ 나한테 맞춰준 거지. 페트루슈카는 그 사람 원래 작업과는 색깔이 많이 달라. ”




 “ 난 네가 그렇게 우울한 걸 추는 게 싫어. ”




 미샤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 낯설고 쓸쓸하게 보였다. 종종 그 얼굴에는 따뜻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세공된 짐승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표정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이 아니라 세월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사원의 유물처럼 보였다. 트로이는 그런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막 트로이가 오한으로 몸을 움츠렸을 때 미샤가 다가와 그의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머리를 쓸면서 뺨을 비볐다. 
 


 “ 런던 갔다 와서 봐. ”



 미샤가 외투를 껴입고 혹한의 거리로 나간 후 트로이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실 바닥에는 반쯤 먹은 오렌지, 두 개의 매끄러운 씨앗, 그리고 반으로 쪼갠 채 입도 대지 않은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는 미샤가 잊고 간 흰색 울 스카프가 걸쳐져 있었다. 그는 차나 커피도 없이 샌드위치를 모두 먹어치우고 남은 오렌지 반쪽도 먹었다. 그리고 두 개의 오렌지 씨앗도 알약처럼 털어 넣은 후 씹지 않고 삼켰다.



 그날 밤 그는 그 울 스카프를 두르고 잤다. 무겁게 밀려드는 야생 꿀 냄새를 맡으면서. 꿈속에서 그는 암청색 단추가 세 개 달린 흰 스웨터 위로 짙은 녹색 목도리를 느슨하게 늘어뜨린 채 눈보라와 안개 속을 걷고 있는 미샤 야스민을 보았다.




 ...




 5월에 미샤는 안무가로 데뷔했다. 일린이 총연출을 맡아 세 개의 모던 발레 작품을 소개한 ‘새로운 발레의 밤’에서 마지막 순서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올렸다. 막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강력한 후원자들이나 팬들조차도 미샤가 안무를 시도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품고 있었다. 뛰어난 무용수와 뛰어난 안무가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안전한 데뷔 방법은 유명한 원작을 간단하게 손봐 재안무한다거나 짧고 서정적인 음악을 써서 무용수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가벼운 소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샤 야스민은 4명의 젊은 무용수를 기용해 팽팽한 플롯의 40분짜리 드라마를 만들었다. 가벼운 음악 대신 보로딘과 무소르그스키를 사용했고 순수한 움직임 자체를 위한 동작은 전혀 쓰지 않았다. 무용수들의 모든 움직임은 철저하게 주제와 플롯에 따라 흘러갔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미샤의 첫 안무작이 일린의 스타일과 비슷할 것이라고 내다보았지만 막상 무대에 올라온 작품은 완급 조절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 40분 내내 격정적으로 내달렸다. 그 작품은 잘 짜인 연극처럼 시종일관 관객들의 감정을 철사처럼 죄어대며 흥분 상태로 몰아갔다. 그 무대에서 부드러운 로맨스나 우아한 감상주의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미샤는 젊은 안무가가 빠지기 쉬운 무모하고 비논리적인 실험주의도 피해갔다. 독설가인 루바노프스카야조차 ‘매우 성공적인 데뷔작’이라는 표제와 함께 미샤가 소위 ‘새로운 춤’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의미한 연출가의 자기 독백에 매몰되지 않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알맞은 형식으로 풀어냈다고 평가했다.



 미샤는 푸시킨의 그 유명한 서사시 전체를 다루지 않았다. 수염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도, 동굴의 은자와 황야의 거대한 머리도, 마녀 나이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가장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제목과는 달리 미샤의 작품에 류드밀라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샤는 오직 네 명의 기사들만을 골랐다. 루슬란, 로그다이, 라트미르, 파를라프. 납치된 류드밀라를 찾아 떠난 경쟁자들. 주인공은 여전히 루슬란이었고 그의 존재는 작품 전체의 축을 이루고 있었지만 미샤는 4명의 인물들에게 동등한 무게를 부여했다. 격정적인 2인무와 4인무, 독무를 통해 발레는 그 인물들에게 내재된 감정의 본질을 그렸다. 전형적인 영웅 주인공인 루슬란의 용기와 고결함, 파멸로 치닫게 될 로그다이의 증오와 분노, 환락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을 택하는 라트미르의 중용과 우정, 그리고 언제나 도망치면서 기회를 노리는 파를라프의 비겁함과 공포.



 그건 자칫하면 매우 작위적이고 추상적인 묘사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무대를 보면서 트로이는 왜 미샤가 자신은 일린에게 의지하지 않는다고 그토록 단호하게 얘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미샤에게는 추상적인 개념과 감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오랫동안 트로이는 미샤의 그 능력이 자신의 육체와 움직임에 한정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날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보면서 트로이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샤는 인간 내부로부터 실질적인 움직임을 끄집어내고 형식을 부여할 줄 알았다. 그건 창작자의 능력이었다. 관객들은 리브레토가 적힌 팸플릿을 읽지 않고도 루슬란과 로그다이, 라트미르와 파를라프가 왜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건 논리적이고 계산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으로 날아오는 메시지들이었다.



 미샤는 루슬란을 추지 않았다. 고전적이며 우아한 레오니드 핀스키에게 그 역을 주었다. 2년 선배이자 성격 연기에 능한 안톤 볼로호프에게 까다로운 파를라프 역을 맡겼고 약간 수도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잘생긴 이오시프 본다렌코에게 라트미르를 추게 했다. 미샤 자신은 로그다이를 췄다. 트로이는 그 어둡고 파괴적인 배역이 미샤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무대 위에서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역을 출 때마다 관객들이 그토록 강력한 열광에 빠져드는 것이 싫었다. 루슬란과의 격투에서 살해당하는 그 검은 기사의 최후가 너무나 냉혹하고 처참해서 트로이는 가슴 깊이 공포를 느꼈다. 그 두려움이 지나치게 실질적이고 불쾌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 며칠 후 미샤를 만났을 때 왜 너는 항상 무대에서 죽는 역을 고르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 그런 역은 몇 개 없는데... 고전 레퍼토리는 아사예프가 맡기는 거고. ”




 “ 네가 안무한 것도 그랬잖아. 로그다이를 췄잖아. ”




 “ 음, 난 사실 파를라프를 출까 했어. 근데 아사예프가 루슬란을 추든가 로그다이를 추지 않으면 무대에 올려주지 않겠다고 협박했어. 루슬란은 레냐에게 주기로 약속했었거든. ”




 “ 넌 파를라프를 추기엔 너무 눈에 띄어, 어울리지도 않고. 관객들도 이입이 잘 안됐을 걸,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겁쟁이 야스민은. ”




 “ 언제나 비겁한 자가 끝까지 살아남아. ”



 미샤는 예의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하얀 알약을 꺼내 삼킨 후 덧붙였다.



 “ 하긴 로그다이를 제일 먼저 안무하긴 했어. 가장 쉬웠고. 제일 어려웠던 건 라트미르였어. 이오시프가 아니었으면 스탄카에게 춰달라고 했을지도 몰라. 이젠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져서 어려웠겠지만. ”




 발레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호소력 있게 표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흘러갔다. 종반부에서 로그다이는 살해당해 어두운 강물 속으로 사라지고 라트미르는 우정의 키스와 함께 루슬란과 작별했다. 주인공 루슬란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류드밀라에 대한 사랑으로 무장한 채 환희에 차 퇴장하고 어둠이 가득한 무대 위에는 슬금슬금 기어나와 주변을 배회하는 파를라프만이 남았다.



 미샤가 류드밀라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일린이 나스첸카의 첫사랑을 생략했을 때와는 달리 매우 영리한 선택이라는 평을 받았다. 루바노프스카야는 예의 그 평론에서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류드밀라의 존재야말로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썼다. 그녀는 보통 미샤에게 적대적인 입장이었으므로 공연이 정말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세레브랴코프는 믿었던 루바노프스카야의 호의적 평에 당황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지적한 것은 미샤가 데뷔작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가끔 과격한 연출을 선보였다는 것뿐이었다.



 관객들은 그 작품에 매료되었다. 젊은 무용수의 첫 안무작에는 과분할 정도로 열정적인 호응이 쏟아졌다. 꽤 많은 사람들이 보리스 아사예프에게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계속해서 키로프 무대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편지를 썼다. 아사예프는 그 반응에 흡족해하며 6월말 백야 축제에 그 작품을 다시 올리기로 결정했다. 이반 노비코프는 그리고로비치와 함께 오직 그 공연을 보기 위해 5월에 다시 레닌그라드에 들렀는데, 아사예프를 구슬려 크레믈린 축제와 볼쇼이 무대에서 각각 한 번씩 루슬란을 올리기로 했다. 볼쇼이에서 밀어 넣은 일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던 보리스 아사예프로서는 ‘우리 골칫거리’가 ‘우리 자랑거리’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미샤에게 괜찮은 작품을 하나 더 안무한다면 다음 시즌 무대에 올려주겠다고 제안했다.



 

...




위의 발췌본은 사실 두가지 장에서 각각 가져왔다. 앞부분의 트로이와 미샤의 대화, 그리고 뒷부분의 미샤의 데뷔 이야기 사이에는 미샤의 런던 공연과 알리사의 이야기, 그리고 일린이 미샤와 지나를 위해 안무해준 백야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여기서는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대한 이야기만 발췌했다.



..




미샤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안무에 대해서는 전에 세가지 정도의 이야기를 올린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385 : 빛나는 벽(illuminated wall) 전문.



http://tveye.tistory.com/5589 : 벨스키와의 면회
(여기서 미샤가 '그 순진하고 무해한 루슬란'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http://tveye.tistory.com/6138  : 별장의 스비제르스키와 미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가 미샤의 수첩을 훔쳐본 후 그의 춤연습을 보면서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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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와 미샤의 대화에 등장하는 '페트루슈카'는 일린이 미샤의 영국 무대를 위해 안무해준 솔로이다. 포킨의 원작을 각색해 꼭두각시 인형 페트루슈카의 독백 장면만 재안무한 작품인데 물론 이것도 내가 만든 버전임. 미샤가 일린과 함께 이 작품을 연습하는 장면과, 영국에서 이 공연을 보고 알리사가 소회를 밝히는 장면을 각각 발췌한 적이 있다.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6544 페트루슈카를 연습하는 미샤와 일린


http://tveye.tistory.com/5178 알리사의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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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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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몇년 전 나는 미샤의 10대 후반에서부터 20대 초반까지, 발레학교 상급생에서 키로프 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춤추던 초기 4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꽤 긴 소설을 썼었다. 원래 쓰려던 소설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다시 글을 쓰기로 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가브릴로프 본편을 구상했었다. 워밍업으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미샤가 비행기에서 나누는 대화를 주축으로 한 단편 Frost를 먼저 썼고(이 글에 대해서는 여러번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 후 가브릴로프 본편을 시작하려고 플롯과 인물들을 직조하기 시작했다. 트로이는 이 시기에 떠오른 인물이다. 떠오르기보다는 거의 필연적으로 왔다.



그리고 어쩌면 쓸데없이, 어쩌면 과잉, 혹은 게으름, 주제일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트로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을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하고 왜 이렇게 이야기할까. 그것은 내가 미샤 야스민이란 인물에게 다가갔던 과정과 조금 비슷했다.



그때는 글을 쓰기가 좀 힘든 시기였다. 역설적으로 글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트로이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아니, 트로이의 렌즈를 통해 미샤라는 인물에 대해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완성된 소설은 내밀했고 여기저기 금이 가 있는 유리조각 같았고 조용했고 동시에 시끄러웠다. 나는 트로이를 심리적 화자로 등장시켰고 다분히 고의적으로 미샤의 곁을 맴돌게 했다. 그는 행성이 되었고 때로는 그보다도 못한 위성이 되었다. 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들 모두가 항성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이지만 분명한 이유로 '트로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아래 발췌문에 나온다.



아래 발췌문은 이 소설의 1부 3장, 아주 초반부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소설에서는 트로이라고 불리며 오로지 미샤 야스민으로부터만 '안드레이'라고 불리는 인물에 대한 간략한 소개의 장이다. 사실 이것은 내가 일반적으로 인물에 대해 쓰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떤 등장인물에 대해 이런 식으로 줄줄이 설명하는 것은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런 방식이 필요했다. 오직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에 대해서만.



발췌된 글 말미에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라는 인물을 어떻게 불러냈는지에 대한 짧은 메모가 붙어 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이즈마일로프 사원, 별칭으로는 트로이츠키 사원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식을 올렸던 사원. 그리고 내가 트로이의 이름을 따온 곳이다. 그의 성은 이 사원에서 가져왔다. 그의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아래 발췌문에 나온다. 맨 위와 아래의 트로이츠키 사원 사진은 둘다 웹에서 가져옴(내가 이렇게 잘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ㅎㅎ)



갈랴, 알리사 등은 모두 트로이의 친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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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다. 보통 그 정도로 키가 큰 사람들은 시선을 끌기 마련이지만 트로이츠키는 그렇지 않다. 아마 그의 별 특징 없는 머리색과 흐릿한 얼굴 윤곽, 언제나 앞으로 굽어 있는 어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197센티미터의 키에 언제나 뻣뻣하게 뒤엉키는 긴 팔다리를 늘어뜨린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드문드문 섞인 우중충하고 어두운 금발을 전형적인 문과 대학원생 스타일로 멋대가리 없이 짧게 깎은 데다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결국은 어딘가가 구겨지고 마는 셔츠와 소매가 접히는 재킷을 입고 다닌다. 구두 뒤축은 언제나 찌그러져 있고 바짓단에는 자주 진창 얼룩이 진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왼쪽 발을 살짝 끌면서 걷는다.




   
 부드러운 잿빛 눈의 뼈대가 굵고 조금 야윈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낮으며 부드러운 편이지만 무릎을 떨리게 할 만큼 섹시하지도 않고 콤소몰 중창단에 들어갈 만큼 근사한 것도 아니다. 딱히 안타까워할 일은 아니다, 그는 당과 강령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영웅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사고를 친 적도 없고 경찰서에 끌려간 적은 더더욱 없다. 그가 알기로는 KGB 요원을 달고 다닌 적도 없다. 물론 밝은 대낮에 마주친다 해도 그는 그게 보안요원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에게는 예리한 직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49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중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고 아버지는 수학 교수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레닌그라드를 떠나서 산 적이 없다. 해외에 가본 적도 없다. 이혼 후 리가의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여름 방학 때 두어 번 그곳에 가본 적이 있지만 물론 연방은 해외가 아니다.



 껑충한 키 때문에 그는 농구나 배구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실상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모든 종류의 운동에 소질이 없으며 피오네르 캠프 교사는 그에게 수영을 가르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종류의 교육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지금 그가 친구들과 흑해에 가서 물에 몸을 띄울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책임감 강한 교사 덕분이다. 어린 시절 그는 기다랗게 튀어나온 자기 다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아무도 그에게 별명을 붙여준 적이 없지만 트로이츠키는 남몰래 자신을 회색 거미라고 생각하며 우울해하곤 한다.



 그는 별다른 노력 없이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 진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언제나 5점을 받는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좋은 점수를 받는 학생이었다. 교사들은 그를 모범생이라고 여겼지만 특별히 사랑하거나 챙겨주지는 않았다. 그는 평균 이상의 언어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고 작문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학부를 선택해야 할 때 같은 반 단짝이었던 알리사가 외국어학부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자고 꼬드겼다. 트로이츠키는 친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데다 오래 전부터 영미 문학에 대한 은밀한 사랑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러기로 했다. 그의 부모는 어쨌든 유망한 학과이므로 찬성했다.



 영어권 국가에 나가본 적이 없고 원어민에게 교습을 받은 적이 없는 것을 감안한다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의 영어 실력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담당 교수 스베들로프는 그에게 넌지시 KGB 관련 진로를 추천한 적이 있다. 트로이츠키는 나름대로는 외교적인 태도로 품위 있게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일 년 동안 교수는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마쳤을 때 스베들로프는 다시 한 번 그 제안을 하게 된다.



 트로이츠키가 해외 진출과 출세가 반쯤 보장된 그 길을 택하지 않은 것은 그가 격렬한 반 소비에트 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레닌그라드와 친구들 때문이다. 그리고 절반쯤은 미샤 야스민 때문이다. 몇 년 후 그는 동베를린과 오슬로 측으로부터 연구직 초청을 받게 되지만 고민 끝에 그 기회를 거절하게 될 것이다. 그때 미샤 야스민이란 이름은 어느 정도도 아니고 절반도 아닐 것이다. 그 이유의 완벽한 전부를 차지할 것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딱히 그리스 신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멸망한 고대 국가 트로이를 동경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성을 따서 트로이라고 불러달라고 청했을 뿐이다. 톨스토이를 좋아했던 그의 부모가 ‘전쟁과 평화‘의 안드레이 공작에서 그의 이름을 가져왔다. 트로이츠키는 톨스토이를 싫어하며 안드레이 공작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인물의 따분하고 비관적인 회의주의 때문이 아니라 그를 집어삼킨 길고 고통스러우며 무의미한 죽음 때문이다.



 그의 선량한 친구들은 부탁을 받아들여 그를 트로이라고 부른다. 멸망한 고대 국가의 러시아식 이름은 트로야이지 트로이가 아니며, 더구나 트로이란 별명은 트로이카, 즉 기껏 3점짜리 점수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친구를 그렇게 부를 수 없다는 갈랴 예피모바만 빼고. 트로이츠키는 오랜 친구 갈랴가 자신을 안드류샤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지만 내심 그렇게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드물게 미샤 야스민이 그를 안드레이라고 부르는 순간이면 트로이츠키는 톨스토이와 죽은 공작에 대한 자신의 뿌리 깊은 혐오를 완전히 망각한다.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남몰래 습작을 한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모눈 공책에 시를 써 왔고 가끔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완성된 소설은 거의 없다. 피오네르 시절 그는 영웅도시 레닌그라드와 폭격에서 청동기사상을 구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날랐던 시민들에 대한 시를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알리사를 제외한 모임 친구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는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걱정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의 수많은 시들과 미완성 소설이 적힌 노트들을 들춰보았던 건 알리사와 미샤 야스민 뿐이다.



 알리사와는 중고등학교 시절 서로의 습작 노트를 공유하며 토론하던 사이지만 트로이츠키는 항상 알리사가 순수 문학보다는 풍자와 비판을 더 좋아한다는 것과 그녀가 언젠가는 글쓰기를 그만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리사는 대학에 진학한 후 더 이상 습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서와 토론은 여전히 좋아해서 그와 함께 모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트로이츠키에게 요즘 쓰는 글이 있으면 좀 보여 달라고 습관처럼 말을 걸지만 그는 번역 필사본과 평론, 영문학 수업과 관련된 메모가 아니면 더 이상 알리사에게도 자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이 매우 흐릿하며 끈질기게 노력하고 매달려야만 간신히 조그만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불꽃을 가지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건 미지근하고 어둡게 깜박이는 촛불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우울증에 잠겨 한밤중에 네바 강으로 가서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샤 야스민은 알리사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그때 트로이츠키는 논문이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식히려고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미샤는 언제나처럼 불쑥 들렀다가 뒤집혀진 책상 서랍과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상자들 사이에서 펼쳐진 모눈 공책을 발견하고 모든 금서와 사미즈다트 애호가답게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뒤늦게 트로이츠키가 그 재앙을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어 뛰어왔을 때 미샤는 유일하게 깨끗한 공간인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공책을 네 권 째 읽고 있었다. 트로이츠키가 얼굴이 붉어져서 심하게 말을 더듬거리며 공책을 빼앗았을 때 미샤 야스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영어로 쓰면 바깥에서 출판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때 미샤가 시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재능에 대해 침묵해 준 것에 대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다.



 몇 년 후 미샤 야스민이 드라마 극장 무대에 프로코피예프 음악을 짜깁기한 15분짜리 모던 발레를 안무해 올렸을 때 그는 트로이츠키의 노트에 적혀 있던 시 몇 편을 제멋대로 해체하고 오려붙여 브이소츠키 풍의 발라드를 만들어 에피그라프처럼 삽입했다. 그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의 생애에서 분명 가장 영광스런 순간 중 하나였다.




 트로이츠키는 여전히 글을 쓴다. 때로는 자신의 문장과 단어와 인물에 홀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따금 그는 사랑의 시를 쓴다. 밤이 지나고 나면 그 자신조차 다시 읽기 부끄러운 시들을.




 ...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학교의 몇몇 여학생들과 연상의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여자들은 그가 자상하고 선량한 남자이지만 수줍음이 많아 좀처럼 사귀자는 말을 먼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이따금 끼는 안경이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공부벌레이며 어디를 가나 나서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친구를 배신하거나 꼭 필요한 순간 그 자리에 없는 얄미운 부류에는 절대 속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는 남성적 매력이 넘치는 섹시한 상대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안정적인 파트너로 보인다. 즉 연애 상대라기보다는 결혼 상대로 적합한 남자이다.




 트로이츠키는 오랜 기간 동안 여자를 사귄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주변 사람들은 그와 알리사가 커플이라고 오해하곤 했다. 사실 그들은 아주 친한 친구였을 뿐이며 트로이츠키는 단 한번도 알리사에게 연애 감정이나 성적 충동을 느낀 적이 없다. 알리사는 일 년에 두어 번씩 남자친구를 바꿨고 가끔은 트로이츠키에게 자신의 연애사를 상담하기도 했다. 알리사는 석사를 마친 후 아버지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하지만 6개월 만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후 알리사는 곧장 트로이츠키의 아파트로 와서 밤새 울고는 기분 전환을 하겠다며 냉장고를 몽땅 뒤집어 일주일 동안 먹어도 모자랄 만큼의 보르쉬와 펠메니, 감자 샐러드, 다진 고기파이와 버섯파이, 온갖 종류의 피클, 꼬치구이, 콤포트, 거의 보드카 도수에 육박하는 정체불명의 강력한 펀치를 만들어 놓고 떠난다. 그 산더미 같은 음식들을 처리하기 위해 트로이츠키는 모임 장소를 갈랴의 집에서 자기 아파트로 바꿔야 할 것이다.



 알리사 외에도 그에게는 여자 친구들이 많지만 애인은 없다. 그가 가장 오래 사귀었던 여자는 대학원 동기인 이라 티호노바였지만 그것도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친구들은 가끔 그에게 여자를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소심증을 극복해보라고 각종 조언을 해주지만 그럴 때마다 트로이츠키는 언젠가 자기 짝을 만나면 결혼할 거라고 판에 박힌 대답을 하며 넘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자신이 결코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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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노트는 2013년 1월 말에 이 소설을 마치고 퇴고를 거듭한 후 쓴 후기의 일부이다. 이 노트에서 나는 그로부터 몇달 전,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하고 트로이란 인물을 떠올렸을 때의 메모를 그대로 첨부했다. 그리고 이 메모는 위에 발췌했던 실제 소설의 일부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기도 했다.




<2012년 가을의 메모에 대한 2013년 1월의 노트> 





 .... 소설을 시작할 때 나는 트로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메모를 적었다. 두 번째 단락은 1부 3장에서 그에 대한 소개를 할 때 거의 그대로 집어넣었다.




 나는 적당한 만큼의 엘리트이며 적당한 만큼 재능이 있고 그래서 우울하게도 사실은 평범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인물을 만들기로 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이며 1949년생이다. 배경은 1971년~ 1977년의 레닌그라드이다. 트로이츠키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박사 과정을 밟는 일종의 지식인이며 회색 종자다.
  


 키가 껑충하게 큰 그는 어깨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다니며 긴 팔다리가 언제나 볼품없이 뒤엉키는 나무인형 같은 사람이다. 새치가 섞인 우중충한 블론드를 당시 소련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멋없이 짧게 깎고 있으며 부드러운 잿빛 눈을 가진 남자, 두세 명만 옆에 있어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다. 아마 당신은 네프스키 거리나 국립대학 앞 강변을 걷다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와 수십 차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이나 파티에서 당신에게 그를 소개해준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를 한 후 돌아서자마자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에게는 내부에 은밀한 뭔가가 있으며 그건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의 평범한 대학생 청년도 마찬가지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불꽃과 빛을 타고 나며 누군가는 굳어져가는 촛농에 남아 있는 희미한 온기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물론 후자이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어둠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며 물론, 욕망과 사랑도 있다. 사실 그건 아주 강력한 것이다. 결코 우스꽝스럽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다. 
  


 글을 쓰는 입장에서든 읽는 입장에서든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렇게 어려운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재능은 우리들 많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흐릿하고 나약하기 때문이다.



 'Frost'와는 달리 나는 3인칭을 골랐다. 따라서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드미트리 마로조프처럼 관대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전이는 있을 것이다. 그것도 강력하게. 이번에는 관대함과 전이 사이의 틈새를 따라가는 글쓰기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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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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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간만에 전에 쓴 본편 중 일부를 발췌해 본다. 전에 종종 올렸던 수용소 중편 중 제3부, 미샤의 절친한 벗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그를 면회하는 장면 중 일부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그 부분을 먼저 읽고 여기로 넘어오면 된다.

 

앞부분 : http://tveye.tistory.com/5551 (수용소 면회실에서, 얼룩들)

 

 

 

이 이야기는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그 부분의 후반부 문단 몇개와 대화 몇개는 지금 올리는 이야기 맨 앞과 겹친다. 잘라내자니 앞이 너무 휑해져서.

 

 

고문을 당해 피폐해진 미샤 때문에 일린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미샤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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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발췌한 이야기 후반부에는 일린의 딸인 라라가 등장한다. 라라는 예전에 올렸던 부활절 단편 Jewels의 1인칭 화자로 나왔던 인물이다. 일린의 큰딸로 그 이야기에서는 열살짜리 소녀로 등장했었다. 이 수용소 이야기는 jewels에서 5년 후를 다루고 있으므로 라라는 이제 15세의 사춘기 소녀이다.

 

 

사실은 jewels보다 이 소설을 먼저 썼고 라라도 여기서 제일 먼저 등장했다. 그 후 어린 라라는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면서 라라를 일인칭 화자로 만들어 jewels를 쓰게 된 것이었다.

 

 

'나스챠'는 일린의 전 부인이자 라라의 엄마이다. 라라는 엄마 나스챠와 새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아냐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나이다는 본편에 등장하는 미샤의 파트너인 '그' 지나이다('지나와 말썽쟁이'의 그 지나이기도 합니다), 마르가리타와 이그나트는 일린의 볼쇼이 동료이다. 후자 두명은 jewels에서 일린네 집에 모여 같이 부활절 달걀 색칠하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세자르 모렐은 프랑스 출신의 위대한 안무가로 미샤의 춤에 매료되어 그를 위해 여러개의 작품을 안무해주었던 인물이다. 물론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다.

 

 

 

jewels와 거기서 파생된 밑자료 half 소설인 dolls의 링크는 포스팅 맨 아래에 붙여 두었다.

 

 

맨 위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의 알렉산드르 기념원주 천사 조각상. 예전에 올린 단편 illuminated wall에서 미샤가 저 천사 원주 아래에서 춤을 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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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애의 손을 떼어내는 대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정수리까지 치솟았던 열기와 분노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폭발할 듯한 감정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심장 한가운데 그대로 고여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그런 분노와 증오를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샤는 내가 잠잠해지자 한숨을 내쉬었고 손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여름이 아니었다면 벗어줄 재킷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스카프를 다시 주워 그 애의 목과 어깨에 둘러 줘야 했다. 마치 자주색의 죽은 뱀을 둘러주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미샤는 추워서 그런지 스카프를 감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초점이 흐릿한 검은 눈만이 불안하게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감시자들이 들어와 나를 끌어내 체포할까봐 두려운 것 같았다. 그 애가, 나의 미셴카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그 어떤 권위와 위협 앞에서도 굴복할 줄 모르던 미샤 야스민이 그런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다니, 두려움으로 내 입을 막고 몸을 떨다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건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난 거의 넘어갈 뻔 했다. 그 애의 몸에서 발산되는 불처럼 뜨거운 열기와 죽어 넘어진 페트루슈카를 연상시킬 정도로 심한 경련이 아니었다면 분명 난 꿈에서 깨어나려고 몸부림쳤을 것이다.

 

 


 나는 한 팔을 미샤의 팔 아래로 넣어 그의 몸을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다른 팔을 뻗어 허리에 둘렀다. 그러자 경련이 조금 잦아들었다.

 

 

 “ 어깨에 기대. 그럼 좀 편해질 거야. ”

 

 

 “ 네 어깨는 작은데. ”

 

 

 “ 그래도 너 하나쯤은 기대게 해 줄 수 있어. 전에도 그랬잖아. ”

 

 

 “ 그랬지. ”

 

 

 미샤가 순순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짧은 머리칼이 얇은 셔츠를 파고들며 살갗을 찔렀다. 그 애의 이마와 뺨이 닿은 자리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웠다.

 

 

 

 “ 걱정하지 마. 날 체포하지는 않을 테니까. 벨스키가 보냈다고 했잖아. ”

 

 

 “ 왜 흥분하는 거야? 제일 안전할 줄 알고 네 이름 댔는데. 좀 무서운걸. ”

 

 

 “ 난 약과야. 지나가 왔으면 더 소리 지르고 화냈을 걸. ”

 

 

 “ 지나가 그러는 건 무섭지 않아. 걘 조용한 게 무섭지. 넌 반대잖아. 내 앞에서 화낸 적 없었는데. ”

 

 

 “ 너한테 화내는 게 아냐. ”

 

 

 “ 음, 나한테 화를 내면 안되지. 그럼 라라에게 이를 거야. ”

 

 

 “ 지금 농담한 거야? ”

 

 

 “ 미안, 여전히 재미없어서. ”

 

 

 나는 그의 허리에 두른 팔을 좀 더 바짝 끌어당겼다. 발레리나의 조그맣고 야윈 몸을 품에 안은 것 같았다. 이제 그 애의 열기가 퍼져 와서 내 온몸도 불을 놓은 것처럼 뜨거웠다. 주사를 놓든 약을 먹이든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저 문을 열면 그 혐오스러운 알렉산드르 크냐제프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와 뱀처럼 웃으며 ‘역시 30분을 다 채우기란 무리였겠죠. 이 친구 상태가 아주 안 좋아서’ 라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떠들어댈 것이 분명했다. 그놈들의 손에 미샤를 돌려보내느니 아프더라도 단 5분, 10분이라도 더 내 어깨에 기대 있게 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다. 미샤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자기 몸을 완전히 내 팔에 맡기고 있었다. 등을 두어 번 쓸자 스웨터 아래로 뼈마디가 그대로 만져졌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다시 한 번, 그러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 얘기해봐, 미셴카. 그자들이 어떻게 했는지. ”

 

 

 “ 왜? 네겐 그런 게 중요해? ”

 

 

 “ 응. ”

 

 

 “ 왜 중요하지? 어차피 해결되는 일도 없는데. ”

 

 

 “ 그냥 얘기해봐. ”

 

 

 “ 기억이 잘 안나. ”

 

 

 “ 넌 대답하기 싫으면 항상 그렇게 얘기하잖아. ”

 

 

 “ 그럼 양치기 소년인가. ”

 

 

 

 미샤는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그 애가 어떻게 아직도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 근데 정말이야, 스탄카. 기억이 나지 않아. 그자들 이름도 생각이 안나. 주사는 좀 맞았던 것 같아. 아팠던 것 같기도 해. 잘 모르겠어. ”

 

 

 “ 피 흘리고 있었어. ”

 

 

 “ 누가? ”

 

 

 “ 너. 사진에서 봤어. ”

 

 

 “ 무슨 사진? ”

 

 

 

 그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레닌그라드로 소환된 후 파리가 얼마나 시끌시끌했는지. 해외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지식인들, 사상가들, 인권단체들이 그의 구명을 위해 어떤 시위를 벌였는지. 오히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 있던 우리들보다도 그쪽 사람들이 재판에 대한 정보를 더 먼저 알아냈다.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있던 라라는 단파 라디오로 프랑스 방송을 잡아냈지만 그 아이의 프랑스어 실력은 뉴스를 이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라라는 수차례 반복되는 미샤의 이름과 몇몇 단어밖에 알아듣지 못했고 새벽에 엉엉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 아빠, 프랑스 라디오에서 미셴카 얘길 하고 있어. 심각한 얘기 같은데 못 알아들었어. 방금 엄마가 라디오 뺏아갔어. 그런 거 들으면 잡혀간대. 어떻게 해, 못 알아들었어... 그 주파수 기억도 안나. 다시 못 찾을 거야... 무서운 얘기였으면 어떻게 하지? 뉴스였어. 자꾸 이름이 나왔어. 나쁜 일인 거야? 미셴카에게 나쁜 일 생긴 거야? 아빠, 구해줘. 그 사람 구해줘. 제발 어떻게 좀 해봐, 아빠 아는 의원님들에게 부탁 좀 해봐... ”

 

 

 

 라라를 달래고 안심시킨 후 나는 볼쇼이 발레교사인 마르가리타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집으로 와 달라고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극장에서 프랑스통으로 불렸고 원어민처럼 불어를 구사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마르가리타는 동료인 이그나트를 데리고 왔다. 둘 다 미샤가 볼쇼이에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들어오자마자 마르가리타는 문을 잠그고 창문마다 커튼을 친 후 싱크대와 욕실의 물을 틀어놓았다. 그녀는 내가 왜 전화를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그 뉴스 듣고 있었어. 안 그래도 여기 오려던 중이었어. ”

 

 

 “ 난 라라가 전화해서 알았어. 내용이 뭐였어? 안 좋은 얘기였어?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

 

 

 “ 재판 얘기였어. 파리에서 정보를 입수했대. ”

 

 

 

 그때까지 우리는 미샤가 비공개 재판을 받아 어딘가에 수감되었다는 사실밖에 모르고 있었다. 그 프랑스 방송은 훨씬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허술하고 형식적인 재판 절차에 대해 지적했고, 재판정에 소환된 증인들의 이름까지 몇 명 폭로했다. 모두 당 강경파의 측근들과 미샤의 격렬한 반대파들이었다. 그런데 그자들이 증언대에 올라가 온갖 밀고와 음해를 쏟아 붓는 동안 그 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우리들, 제대로 된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은 단 한 명도 소환되지 않았다. 우리는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알았다.

 

 

 그 라디오 방송은 미샤의 자기 변론이 겨우 2분도 안되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밝혔고 30분도 걸리지 않아 판결이 내려졌다는 얘기와 더불어 당 내 강경파 일부는 훨씬 가혹한 처벌을 주장했기 때문에 재판 결과에 실망했다는 정보를 흘리기까지 했다. 순진한 이그나트는 모스크바에 있는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파리에서 이 모든 끔찍한 사실들을 알아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벨벳 덮개를 뒤집어씌운 어항 안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이었으니까.

 

 

 그 방송을 듣고서야 우리는 그 애가 7년형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반체제 선동과 당에 대한 불복종, 체제 전복 위협 등 그 애에게 씌워진 죄목은 끝이 없었다. 이후 파리에서 조직된 구명위원회의 팸플릿에 따르면 그 더러운 놈들은 스파이 죄목까지 씌우려고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마지막에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 그건 르 피가로와 뉴욕 타임즈 등 유명 일간지에 컬러로 실렸다. 마르가리타가 이즈베스티야 뭉치 안에 르 피가로를 숨긴 채 사색이 되어 달려왔을 때 우리 집에는 이미 여러 가지 경로로 그 사진을 입수한 지인들이 다섯 명이나 와 있었다. 극장 직원들과 예술가들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까봐 걱정에 빠진 노비코프가 감시받고 있을지도 모르니 한동안 모여 다니지 말라고 전화로 경고하지 않았다면 아마 미샤의 지인이나 팬들 여럿이 더 몰려왔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미샤와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는.

 

 

 

 누구도 그 사진의 출처를 알지 못했다. 신문사들은 익명으로 사진을 제공받았다고 입을 모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은 총 세 장이었는데 두 장은 측면이었고 한 장은 정면이었다.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그 애를 들어 옮기고 있었다. 측면 사진 한 장은 산소마스크를 쓰고 팔목에 튜브를 꽂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정면 사진을 보았을 때 내 머리 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자들이 결국 저 애를 죽였구나...

 

 

 

 사진 속에서 그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진 채 머리를 젖히고 있었다. 들쭉날쭉하게 잘린 검은 머리칼이 이마 위에 유화 페인트처럼 불규칙하게 엉겨 있었고 피부는 시체처럼 푸른빛이 도는 흰색이었다. 감긴 눈 아래로 속눈썹이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검은 페인트를 칠한 듯 무겁게 처진 채 마구 뒤엉켜 있었다. 코와 입에서 시작되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는 너무 붉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그 애의 팔과 다리가 나무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의료 요원들은 그 애를 죽은 짐승처럼 들어 옮기고 있었다. 
 

 

 

 


 그날 지나이다가 모스크바로 왔다. 키로프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딤카 아르부조프와 함께였다. 그녀는 이제 울지도 않았고 흥분하거나 공포에 질리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분노해 있었던 것이다.

 

 

 “ 세자르 모렐이 내일 모스크바에 올 거예요. 파리 공산당원 자격으로. 로쉬도 함께 입국하려고 했지만 물론 거절당했어요. ”

 

 

 “ 그자들은 세자르가 와도 만나주지 않을 거야. ”

 

 

 

 실제로 그랬다. 당에서는 형식적인 예의와 절차를 갖춰 모렐을 맞이했지만 그의 면담 요청은 거부했고 그가 직접 가져온 파리 공산당 지부와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탄원서도 무시했다. 그 유명한 인물이, 전후 30여년 이상 유럽 무용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 거장, 한결같이 사회주의를 지지하며 열렬한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던 세자르 모렐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왔는데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모스크바에서는 모렐을 초청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모렐이 미샤의 춤을 보고 반해서 그를 위한 작품을 안무해 볼쇼이로 날아왔을 때 당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고 모렐을 서방의 공산 영웅이자 진정한 예술가로 숭배하고 떠받들었던 것이다.

 

 

 지나이다는 키로프를 비롯한 레닌그라드 극장들에서 미샤를 위한 탄원서에 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 그렇게 구명 운동을 하고 있는데 동료들이 모른 척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치를 떨었다. 나도 볼쇼이와 므하트를 포함한 몇몇 극장에서 서명을 받았다. 그건 꽤 위험한 일이었고 후환이 생길 가능성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날 우리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같은 시각에 성명을 발표하고 당에 탄원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성명서를 낭독하는 중에 보안위원회에서 들이닥쳤다. 나는 다섯 시간 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심문 없이 풀려났다. 탄원서는 압수당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연행되었던 지나는 한 시간도 안 되어 풀려났고 아무 것도 압수당하지 않았다. 이후 나는 벨스키가 나를 풀어주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나 쪽은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힘을 쓴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나는 미샤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진이 공개되고 이곳에서 자행되는 끔찍하고 더러운 일들이 서방 제국주의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 좋은 먹잇감이 된 상황에서 그자들이 미샤를 살려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외 언론들에서는 미샤가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해 중태에 빠져 있다고 떠들었고 모스크바 측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다. 미하일 야스민은 반체제 선동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소비에트 법률에 따라 정상적으로 수감되어 있으니 남의 나라 일에 쓸데없는 참견 따위는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라라는 나스챠에게 한동안 아빠와 지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나스챠는 그 애를 보내주지 않았다. 내가 그 애를 위험에 빠뜨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디오를 숨겼고 딸아이의 스크랩북들도 몽땅 태워버렸다. 한 번만 더 집에서 미샤의 이름을 거론하거나 외국 신문 따위가 발견되면 일 년 동안 외출을 금지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딸아이가 울면서 전화했을 때 내가 나스챠와 이혼했던 이유를 생생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

 

 

 

 라라는 학교를 빼먹고 극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열다섯 살도 채 안된 아이가 어디서 정보를 입수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라라는 이미 사진과 기사를 보았고 내가 잠깐 연행되었던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잠을 못 자고 너무 울어서 얼굴이 퀭했다. 라라는 내가 무용수들을 데리고 월말에 올릴 작품 리허설을 하는 동안 얌전하게 복도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내가 나왔을 때 딸아이는 바람처럼 달려와 두 팔로 날 끌어안았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에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애였다.

 

 

 “ 아빠, 아빠! 너무 무서웠어! 아빠가 미셴카처럼 끌려갈까봐, 못 돌아올까봐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 ”

 

 

 

 내 품 안에 파고든 라라의 심장이 너무 팔딱거려서 조그만 새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라라는 흐느껴 울면서 나를 더 꼭 껴안았다.

 

 

 

 “ 그래도 그 사람 살아 있는 거지? 죽는 거 아니지? 그냥 조금 아프기만 한 거지? 아빠, 기도해. 아침에, 자기 전에. 미샤 구해달라고 기도해, 그럼 괜찮을지도 몰라. 나 계속 하고 있어, 엄마 몰래. 내 친구들도 같이 하고 있어. 아냐한테는 얘기 못 했어, 사진 보면 충격 받을까봐. 근데 아냐가 어제는 갑자기 우리 같이 별장에 갔던 얘길 하면서 다시 가고 싶다고, 미셴카 보고 싶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으면서 라라가 주머니에서 나무로 깎은 십자가를 꺼내 내 팔목에 걸어주었다.

 

 

 “ 이거 내가 만들었어, 아빠도 하나 가지고 있어. 여기 입 맞추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들어 주실지도 몰라. 꼭 해야 해, 최소한 하루에 두 번. 바빠도 두 번은 꼭 기도해야 돼, 아빠. 약속해. ”

 

 

 

 그래서 나는 약속했다. 하루에 두 번, 아니, 사실은 틈나는 대로 기도했다. 나는 단 한 번도 독실한 신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건 라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살짝 비스듬하게 깎인 나무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기도를 되풀이하는 순간이면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어쩌면 우리의 별 것 아닌 신앙, 이성과 과학과 당의 탄압 속에서 옛 시대의 그림자처럼 변해버린 낡은 정교가 결국 옳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벨스키가 내게 전화를 했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미샤, 만신창이가 되어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그래도 내 어깨에 기댄 채 여전히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있는 내 친구의 옆에 앉아 있으니까.

 

 

 


 미샤는 다시 한 번 물었다.

 

 

 “ 스탄카, 무슨 사진? ”

 

 

 나는 소파와 벽과 책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청 장치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긴 나 같은 일반인에게 그런 대단한 장치가 보일 리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아는 얘기였다.

 

 

 

 “ 의료진이 너 옮기는 사진. 누가 몰래 찍어서 파리와 뉴욕에 보냈어. 그것 때문에 해외에서 난리였어. ”

 

 

 “ 아, 그랬군. ”

 

 

 “ 벨스키가 말 안 해줬어? ”

 

 

 “ 사진 얘긴 안 해줬어. 내 허락도 없이 그런 걸 찍다니. ”

 

 

 “ 누가 찍었는지는 모르는 걸.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쨌든, 그 사진에서 너 피 흘리고 있었어. 그래서 맞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

 

 

 “ 엄청 보기 싫게 나왔겠네. 태워버려. ”

 

 

 “ 외신에 다 났는데 어떻게 태워. 뉴욕에서 그걸로 전시도 했어. ”

 

 

 “ 라라한테 절대 보여주지 마. ”

 

 

 “ 아, 그래. ”

 

 

 

 미샤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내게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에어컨을 꺼줘야 할 것 같았지만 단 일 초도 그 애를 소파에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얹자 금방이라도 물집이 잡힐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

 

 

 

 

맨 위 메모에서 언급했던 jewels와 dolls 링크는 여기.

 

 

부활절 단편 Jewels

1장 : http://tveye.tistory.com/3390
2장 : http://tveye.tistory.com/3391
3장 : http://tveye.tistory.com/3393 
4장 : http://tveye.tistory.com/3394
5장 : http://tveye.tistory.com/3395

 

 

밑자료 half : Dolls


01. 에벨리나(http://tveye.tistory.com/6960),
02. 미샤(http://tveye.tistory.com/6964)
03. 일린(http://tveye.tistory.com/6969)
04. 에벨: http://tveye.tistory.com/6972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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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21. 21:52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3 : 일린 2017. 8. 2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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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20. 21:58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2 : 미샤 2017. 8. 20.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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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19. 23:55

Dolls(부활절 이야기 half) 01 : 에벨리나 2017. 8. 1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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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고 있는 글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몇년 째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랫동안 멈춰 있어. 중간중간 다른 글들을 써서 마치기도 하고 미완으로 남겨두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정말로' 쓰고 있는 글은 하나야.' 라고. 그게 바로 가브릴로프 본편이다.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구상했고 계속해서 머릿속과 마음속에 아주 깊게 자리잡고 있는 글이다.

 

 

다른 글들은 사실 다 여기서 새끼친 것들이다. 서무 시리즈도. 게다가 트로이를 내세운 장편 역시 사실은 이 본편에서 나왔다. 트로이는 원래 이 본편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었는데 플롯을 구상하면서 '그런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할까?' 라는 의문을 품었고 결국 그의 목소리와 그의 시선을 빌려 꽤나 긴 소설을 썼었다. 최근 여러번 발췌한 미샤의 수용소 단편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을 위한 프리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본편은 이미 몇년째 120여페이지에 머물러 있다. 뒤를 이어서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고, 사실 전체 플롯과 구조, 메인이 되는 이야기들과 작은 에피소드들도 근 7~80% 정도는 모두 구상되어 있는데 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는 보통 글을 자유롭게 춤추듯이 쓰는 것을 좋아하고 한번 몰입하면 쉽게 써나가는 편인데 이 가브릴로프 본편만은 그렇지 않다. 이 글은 아마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여기에만 집중했을 때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년 동안 나는 너무 여러가지로 산란해져 있었고 특히 회사 때문에 더욱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이 본편을 꼭 쓰기는 할 것이다. 언제가 됐든 마칠 것이다. 그럴 거란 사실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이 가브릴로프 본편의 2장이다. 1장은 미샤가 부임해오는 극장의 무용수 하나의 시선으로 전개되었고 이 2장은 기차로 가브릴로프에 호송된 미샤가 그의 KGB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과 처음 대면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맞다, 서무 시리즈의 그 다닐 베르닌, 단추청년, 왕재수 미샤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집사 베르닌이다. 하지만 본편의 베르닌은 서무 시리즈에서 희화화시킨 단추 베르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사실 진짜인데...어느새 그는 단추청년이 되었지 ㅠㅠ 이 장면 중 중간 정도는 전에 좀 발췌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첫 대면 에피소드를 온전하게 올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기 다시 올려본다.

 

 

..

 

 

맨 위 사진은 가브릴로프...는 당연히 아니고, 2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찍은 사진. 레트니 사드(여름 정원). 발췌한 에피소드에서 미샤와 베르닌이 숲을 지나 시내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서 뭔가 숲 느낌 나는 사진이 어울릴 것 같아서 올려봄.

 

 

...

 

 

가브릴로프는 물론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도시이다. 하지만, 드넓은 러시아(및 구소련) 땅 어딘가에 이 이름 붙은 소도시가 실제로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이름이고... 대천사 가브리엘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이 가브릴로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보안위원회에 제출할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꽤 두툼한 보안 서약 서류에 서명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지만 다닐 베르닌은 거의 친절하기까지 한 어조로 서류에 그가 가브릴로프에서 지켜야 할 사항들이 나열되어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미샤가 서류를 들춰볼 기색을 보이지 않자 베르닌은 허가 없이는 시계를 넘어갈 수 없으며 모든 시외전화는 보안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상대의 침묵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서류의 제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했다. 약 20페이지 가량의 서류는 갱지에 타이핑되어 있었고 노끈으로 허술하게 묶여 있었다.

 

 

“ 붉은 담장 도착하기 전에 차 안에서 읽어두는 게 좋을 걸요. 일단 제출하고 나면 내용 확인할 기회 없을 테니까. ”

 

 

미샤는 서류를 읽는 대신 붉은 담장이 뭐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가브릴로프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처음 했던 말일 것이다. 기차역에서 베르닌에게 인계된 이래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 아, 그렇지. 당신은 여기 사람이 아닌데. 붉은 담장은 말이죠, 우리 사무실을 가리키는 겁니다. 오해는 말아요, 담장이 있긴 하지만 붉은색은 아니니까요. 크라스나야 강변에 있어서 그런 겁니다. 모스크바에서는 루뱐카라고 부르듯이. 뭐 그런 식인 거죠. 쓸데없는 설명인가요?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약 10여분 정도 기다렸고 그가 전혀 서류를 읽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맨 마지막 장을 펼쳐주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미샤가 서명을 한 후 펜과 서류를 돌려주자 베르닌은 그것들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으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 의외인데. 전 사실 서류를 한 부 더 준비했답니다. ”

 

 

“ 왜죠? ”

 

 

“ 찢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

 

 

“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나요? ”

 

 

“ 하긴 그렇죠. 안 읽은 것도 그래서겠지. 현명한 사람이군요. ”

 

 

 

미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베르닌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검은 눈을 찬찬히 응시하면서 조금 전보다 훨씬 진지한 어조로 덧붙였을 뿐이었다.

 

 

 

“ 이제부터 충고 하나 하죠. 강을 건너기 전에. 일단 시내로 들어가면 우리 대화는 전부 기록해야 할 테니까. 난 77년에 모스크바에 있었어요. 당신이 볼쇼이에 있었을 때죠. 당신 무대는 여러 번 봤습니다. 내 심미안이야 교양 있는 관객들에겐 비웃음을 살 수준이지만, 일단 팬이라고 해둡시다. 그래서 말인데,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지루한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온건한 사람은 아니지요. 가브릴로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곳은 말이지요, 미하일, 작은 도시입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와는 다르지요. 저 숲들이 보이시나요? 이쪽에는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습니다. 공항과 기차역과 저 울창한 숲, 그리고 즐라타야 강. 우리는 지금 강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곧 다리를 건너게 되겠죠. 그곳에 시내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손바닥만 한 도심과 주거지. 그리고 숲. 공장들. 아, 하나 빼먹었군. 교회들. 이젠 쓸모없는 곳들이지만. 어쨌든 이게 전부입니다. 운 좋게 도시란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당신처럼 대도시에서 온 분에게 이곳은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겠죠. 그러니 이곳을 손에 넣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이곳에도 시 의원들이 있지요. 당원들도 있고 노멘클라투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는 블라지미르 스페호프 한 사람뿐입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당신이 서류를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찢어버렸다면 아예 입을 다물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당원이자 폭군이죠. 표면적으로 볼 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자기 권위를 무시하는 겁니다. 하지만 더 싫어하는 게 하나 있다면 그건 혼자 생각하고 혼자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페호프를 만나게 되면 그걸 감추는 쪽이 피차 좋을 겁니다. 그도 알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말썽을 부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겠다는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족해요. 더는 필요 없습니다. 훌륭한 배우였으니 물론 그 정도는 쉬운 일이겠죠. 아마 10분도 안 걸릴 겁니다. 그리고 난 그 10분이 걱정돼서 이렇게 길게 떠들어댄 거고요. 내 말 아시겠습니까? ”

 

 

“ 그게 당신의 충고인가요? ”

 

 

“ 글쎄요, 난 충고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았나보군요. ”

 

 

 

베르닌은 낮게 웃었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 우리는 곧 노브이 다리로 접어들 겁니다. 당신이 비행기를 타고 왔다면 아마 배를 타고 곧장 강을 가로질러 갔겠지요. 사실 그게 시내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만 기차역에서 내렸으니 좀 돌아가는 수밖에요. 오른편으로 강이 보이시나요? 즐라타야 강입니다. 당신들의 네바 강보다는 덜 화려하겠지만 그래도 이 동네에서 가장 내세울만한 풍경이죠. 지금 건너는 게 노브이 다리입니다. 물론 스타르이 다리도 있지요. 그건 검은 숲 지대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가장 먼저 생긴 다리는 아니지만요. 그건 가브릴로프 다리죠. 구시가지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이곳도 꽤 넓게 느껴지는군요. 우리의 즐라타야 강이 마음에 드십니까? 당신은 레닌그라드에서 왔으니 도심 한가운데 강이 흐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겠군요. 그래도 우리 쪽 강이 더 낫지요. 범람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요. 여기는 늪을 갈아엎어 만든 도시가 아니거든요. 대부분이 숲이죠. 추위도 덜할 겁니다. 기온이야 당신 살던 곳과 비슷하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습한 기후는 아니니까요. 수도원 근방으로 가면 온천도 있습니다. 여러 모로 당신에겐 훨씬 낫겠죠. 그런데 더우십니까? 창문을 좀 여는 게 낫겠군요. 오늘은 햇살이 강해서 좀 답답하군요. ”

 

 

 

쉴 새 없이 떠들다가 미샤의 상기된 옆얼굴을 힐끗 쳐다본 베르닌이 창문을 반쯤 열었다. 찬바람이 불어 들어오자 미샤가 몸을 희미하게 움츠렸다. 베르닌은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 아니면 열이 나서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추우면 창을 닫겠습니다. 어쨌든 기차로 열네 시간은 그렇게 짧은 거리는 아니지요. 비행기를 탔다면 좋았겠지만 아마 여의치 않았겠죠. 정 힘드시다면 병원에 먼저 들르도록 해드리죠. ”

 

 

“ 그럴 필요 없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

 

 

“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런데 아직 20분은 더 가야 하거든요. 혹시, 그러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주저 말고 얘기하세요. 어차피 병원 검진은 오늘 일정에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요. 국장 면담 후 곧장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

 

 

“ 내 일정표를 다 외고 있는 모양이죠? ”

 

 

“ 적어도 오늘 일정은. ”

 

 

 

미샤는 입을 꽉 다물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열린 창문을 닫을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와 뺨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열기가 퍼져서 눈동자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베르닌은 자신의 가방 안에 루뱐카 클리닉으로부터 인계받은 앰풀 두 개와 주사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장시간의 기차 여행을 견딜 수 있었다면 남은 20분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국장과의 면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고 다소 허세를 부렸지만 그 주사를 놓으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지체될 것이다. 그리고 스페호프 국장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스크바에서 보낸 인물, 자신의 권위를 짓밟아가며 밀어 넣은 반역자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는 불과 사흘 전에 스페호프가 모스크바 본부로 호출되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건 비공식 출장도 아니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아주 은밀하게 행동하는 방법도 잘 아는 인물이었지만 그건 대단한 정적들을 다룰 때에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는 몇 가지 이유를 달아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지국장을 정식으로 호출했다. 스비제르스키가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보안위원회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연방에서 공식적인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스페호프는 몹시 분노한 상태로 돌아왔다. 좀처럼 부하 직원들 앞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베르닌이 있는 자리에서도 화를 참지 못했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모스크바와 크레믈린에 대해, 루뱐카에 대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역겨운 반역자 주제에 줄을 잘 타서 빠져나온 애송이에 대해서도. 그러나 대부분의 욕설은 총살형 대신 정신교화 수용소 쪽을 관철시켰던 제믈랴코프와 그 애송이를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며 약물을 찔끔찔끔 놓다가 결국 자기 무덤을 판 레닌그라드 쪽 책임자에게 돌아갔다. 베르닌은 모든 서류를 아주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스페호프가 그렇게 화가 난 진짜 이유 두어 가지를 눈치 챘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관용차가 다리를 건너 크라스나야 강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미샤의 시선이 자작나무 숲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보고 베르닌이 쾌활하게 말했다.

 

 

 

“ 자작나무를 좋아하시나보군요. 하긴 자작나무를 싫어하는 러시아인은 없지요. 그런데 저건 진짜 숲이 아니랍니다. 여기서는 그냥 공원이나 화단 정도죠. 구시가지 쪽으로 넘어가면 진짜 숲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숲은 정말 크고 울창하죠. 극장 주변 공원에도 나무는 많답니다. 아마 이곳에 나무가 없다는 말과 공기가 안 좋다는 말만은 못할 겁니다. 다른 건 없어도 나무와 물은 많죠. 살기에는 좋을 거예요, 물자는 좀 부족한 편이지만 그거야 일반인들 얘기고 적어도 국가에서 운영되는 극장의 감독이라면 사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좀 지루하긴 하겠지만. ”

 

 

 

미샤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생판 모르는 도시에 던져진 사람치고는 별로 현명한 태도는 아니었다. 베르닌은 그가 완전히 체념한 상태인지, 아니면 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것인지 궁금했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숙련된 기자가 초점을 맞춰 놓은 카메라 렌즈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는 KGB 감시요원의 친절한 설명보다는 자기 눈을 믿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게 스페호프가 좋아하는 방식일지는 미지수였지만.

 

 

 

마침내 관용차가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본관 앞에 도착했다. 미샤는 베르닌이 미처 차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먼저 내렸다. 가방은 뒷좌석에 그대로 팽개쳐둔 채였다. 가방과 보안 서약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내린 베르닌이 솔직하게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여권을 챙기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그것도 당국에 출두하면서. ”

 

 

“ 챙기기 전에 항상 압수당했거든요. ”

 

 

 

미샤는 웃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하며 시멘트 담장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베르닌은 그에게 스페호프 앞에서는 그런 식의 농담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는 충고를 추가해 주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이미 그는 차 안에서 너무 많은 말을 했다.

 

 

 

...

 

 

 

내일이나 모레쯤은 가브릴로프 KGB 국장 스페호프와 미샤의 첫 대면 에피소드를 이어서...

 

 

전에 이 본편의 에피소드 몇개를 발췌한 적이 있다.

 

먼저 위의 이야기에서 곧장 연결되는

'가브릴로프 보안위원회 검색대를 통과하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5368

 

 

그리고 스페호프와의 대면을 마치고 나온 후의 짧은 장면인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 http://tveye.tistory.com/4451

 

 

같은 파트의 마지막 부분. 숙소에 도착한 미샤와 베르닌이 나누는 이야기는 여기

이웃사촌 미샤와 베르닌, 미샤가 생각한 해법 두가지 : http://tveye.tistory.com/4971

 

 

그리고 이 다음 파트인 3장의 일부인 렐랴의 인터뷰 : http://tveye.tistory.com/5114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파트별로 시점이나 심리적 화자, 혹은 구조가 조금씩 다르게 서술된다. 나는 다성악 구조를 좋아하는 편이고 쓰기에 그렇게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 본편은 좀 어렵다. 그만큼 집중하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7. 8. 5. 22:25

면회 - 발광 페인트 토마토 수프 about writing2017. 8. 5. 22:25

 

 

 

 

 

며칠 전 이 폴더에 글쓰기와 시점에 대한 메모를 올린 적이 있다. 몇년 전 쓴 미샤의 수용소 단편에 대한 글쓰기 메모와 일기였다. 제목은 '1인칭 시점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 링크는 http://tveye.tistory.com/6836

 

 

그 수용소 단편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용소 간수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3인칭의 1부, 미샤의 후원자였던 공산당 고위간부 게오르기 벨스키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3인칭의 2부, 그리고 미샤의 절친한 벗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1인칭으로 전개된 3부인데 각 파트별로 꽤 여러 토막을 이 폴더에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오늘 발췌하는 부분은 2부. 게오르기 벨스키가 모스크바 비밀클리닉에 입원한 미샤를 후원하러 가서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이 파트 바로 앞부분을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발췌문 맨 앞 미샤와 벨스키가 재판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 몇 문단은 그때 발췌문 맨뒤와 겹치는데, 그걸 잘라버리면 너무 흐름이 끊겨서 그냥 살려두었다.

 

 

 

이 폴더에야 거의 항상 글을 토막토막 잘라 올리고 있으니 이 부분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크게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앞의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http://tveye.tistory.com/6068 (모스크바 요양소, 재판)를 먼저 읽고 이 파트를 읽으면 된다.

 

 

..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벨스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소설의 배경인 1970년대~80년대 초반의 소련 공산당 고위 간부이다.

 

파나예바는 모스크바 비밀클리닉에서 미샤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이다.

 

글루크, 슈스코프는 미샤가 1부에서 갇혀 있었던 수용소의 원장과 정신교화 책임자이다.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스비제르스키는 역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인 공산당 고위 당 간부이자 옛 KGB 고위직 출신이다. 이전에 jewels에서 미샤를 파티에 불러낸 인물이기도 하고 이 본편 우주에서 미샤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마로조프 역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이자 애인인 당 간부이다. 스비제르스키는 모스크바 의원이고 마로조프는 레닌그라드 의원이다. 그는 이 2부의 심리적 화자인 게오르기 벨스키를 정치적으로 발굴한 대부이기도 하다.

 

 

아사예프는 미샤가 춤췄던 레닌그라드 키로프 극장의 발레단 예술감독, 지나는 미샤의 발레학교 동기이자 발레리나 파트너이다. (지나와 말썽쟁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그 두둥실 지나 ㅋㅋ)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옥사나 셰먀코바는 극장 동료 무용수들이다.

 

 

...

 

 

위의 사진은 alex gouliaev가 찍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젊은이와 죽음' 화보.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왜 오셨어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

 

“ 파리 때문에. 그 외 다른 문제도. ”

 

“ 파리? 모스크바라고 하셨잖아요. ”

 

 

벨스키는 언제까지 미샤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머릿속에 간단하게 정보들을 밀어 넣기로 했다.

 

 

“ 여기 오기 전에. 글루크가 있는 수용소에 가기 전에. 파리에 갔었잖아. 그 니진스키 트리뷰트 때문에. 그 전에는 뉴욕에 갔었고. 자네 그 파리에서 도망쳤었잖아. 그래서 문제가 생겼지. 돌아와서 재판 받았잖아, 그래서 그 수용소로 보낸 거고. ”

 

 

미샤가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두어 차례 휘저었다.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볍게 흔들자 거무스름한 멍들로 뒤덮인 목덜미가 드러났다. 맞아서 생긴 상처 같지는 않았다. 그곳을 맞았다면 쇄골이 부러졌을 터였다.

 

 

“ 도망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러 갔었을 뿐이에요. ”

 

 

갑작스럽게 미샤가 아주 또렷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비공개 재판에서도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변호하려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미샤는 직접 변론을 했다. 극장 동료들 몇몇이 유리한 증언을 해주려고 자원했지만 모두 자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참석을 금지 당했다. 벨스키는 그 재판의 일지와 보고서를 훑어보았지만 중간 쯤 읽다가 그만두었다. 미샤의 변론 대부분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나마 끝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다. 재판관이 그의 발언을 중단시킨 후 휴정을 선언했고 30분 만에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벨스키는 그런 종류의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 도망친 거였다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기억이 되살아난 것 같군. 자네 소환됐을 때 파리에서 시끌시끌했던 건 생각나나? 호텔 앞부터 공항까지 피켓 시위자들이 몰렸었지. 기자들도. 자네 가고 나서 그 시위가 좀 커졌거든. 게다가 이상한 오해가 생겼지. 헛소문이 퍼져서 상황이 좋지 않았어. ”

 

 

“ 무슨 소문이요? ”

 

 

“ 뻔하잖아. 자넬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처박았다는 얘기. 벌써 루뱐카에서 총살했다는 얘기.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들. ”

 

 

“ 그게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예요? ”

 

 

 

미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몸을 가누기가 힘든 듯 점점 어깨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볼품없이 들쭉날쭉 잘린 검은 머리칼이 한 움큼 이마 위로 흘러내려왔다.

 

 

 

“ 그 얼간이가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 누굴 소환한다고. 하지만 걘 아무 것도 몰라요. 절 좋아한 적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걘 놔주세요. 그 여자 정말 아무 것도 몰라요. ”

 

 

“ 누구 얘길 하는 거지? 그 여자가 누구야? 얼간이는 누구고? ”

 

 

“ 아, 소환 같은 건 없었군요. 어차피 허풍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진짜 역겨운 놈이었어. ”

 

 

벨스키는 그가 글루크나 슈스코프 중 한 명을 언급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파나예바가 정해준 10분은 이미 흘러가버렸고 미샤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론부터 말해주기로 했다.

 

 

“ 자네 석방될 수도 있어, 회복되면. ”

 

 

미샤는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거의 무관심한 표정으로 오른손 손가락들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왼팔을 들어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손목이 3센티미터 쯤 올라갔다가 무겁게 툭 떨어지자 짜증도 내지 않고 계속해서 그 무익한 시도를 반복했다.

 

 

“ 왜, 믿지 않아? 내 말인데도? ”

 

 

“ 믿어요. 의원님이 제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어요. ”

 

 

“ 그런데 별로 관심이 없나? 수용소가 좋아? 자네 7년형 받았잖아.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 약물 치료 다시 받고 싶을 리가 없잖아. ”

 

 

“ 전 선언문 안 읽을 거예요. 인터뷰도. ”

 

 

미샤가 툭 끊어지듯 거친 음성을 내뱉더니 무겁게 처져 있던 어깨와 허리를 억지로 다시 세웠다. 이마와 목에 파란 핏줄이 돋아 오르며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벨스키는 파나예바의 경고를 어기고 그의 가슴에 손을 얹어 가볍게 뒤로 밀었다. 미샤는 저항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벨스키가 조금 힘을 실어 누르자 다시 베개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인터뷰 할 필요 없어. 그리고 선언문 수준도 아냐. 몇 줄만 읽으면 끝나. ”

 

 

“ 당신들 다 똑같아. ”

 

 

미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베개에 피가 튀었다. 가슴에서 짐승들이 내는 듯 낮게 끓어오르는 소리가 났다. 이제 기침은 하지 않았지만 오른손으로 목을 감싸 누른 채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베개에 쏟아진 피는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발광 페인트처럼 새빨간 색이라 벨스키는 파나예바를 불러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지금 파나예바를 부른다면 그녀는 면담을 완전히 중지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벨스키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조그만 타월을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병실에 있는 물품들은 모두 소독을 마쳤을 테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샤가 타월로 입과 턱에 흘러내린 피를 닦는 동안 그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 어쩔 수 없잖아.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지. 나나 스비제르스키도, 아니,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라도 마찬가지야. 서기장이라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어. ”

 

 

“ 무슨 명분이요. 거짓말해서 풀려나라고요? 아니면 창녀짓해서? 다른 이름들도 얘기하시지 그래요. ”

 

 

미샤가 몸을 떨었다. 벨스키는 그가 그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폭발적 열기와는 달리 사석에서의 미하일 야스민은 아주 침착하고 서늘한 인물이었다. 훨씬 어렸을 때도 그랬다. 하긴 그는 미샤가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 자네 지금 아파서 제대로 생각이 안 되고 있어. 그냥 내 제안대로 해. 원한다면 문구도 자네가 써. 싫으면 내가 써서 보여줄 테니 고쳐도 좋아. ”

 

“ 정치국 위원님은 바쁘실 텐데... ”

 

 

벨스키는 온건한 개혁파 의원이었지만 나이 차이가 두 배 가까이 나는 애에게서 그런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미샤가 구겨진 타월 위로 다시 피를 뱉은 후 몸을 심하게 떨면서 완전히 옆으로 누웠기 때문이다. 수척한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많이 아프잖아. 자네 정말 죽을 뻔 했어. 스비제르스키 의원이 들르지 않았다면 아마 죽었을 거야. 난 자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망가지는 것도. 내가 왜 여기까지 직접 왔겠어. 내가 자네 아꼈던 거 몰라? 3분만 자존심 버려.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

 

 

“ 지금 보내주실 수 있어요? 리허설에 가야 해요. ”

 

 

 

벨스키는 그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미샤는 오른쪽으로 몸을 튼 채 창문과 벽 사이의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완전히 달라진 어조로 간청하듯 속삭였다.

 

 

“ 제발 보내주세요. 다시 올 테니까. 이 방으로 다시 오면 되잖아요. 지금은 안돼요. 저한테 약속하셨잖아요, 말 잘 들으면 다시는 그 약 안 먹일 거라고. 주사도 안 놓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게르만 알렉세예비치, 제발 놔주세요. 너무 아파요. 내일, 내일 다시 올게요. ”

 

 

“ 정신 좀 차려, 난 그 사람이 아니야. 아무래도 파나예바를 불러야겠군. ”

 

 

미샤가 오른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손이 타들어가는 듯 뜨거웠지만 여섯 살짜리 어린애처럼 미약해서 슬쩍 움직여도 털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가. 난 말을 들었는데. 시키는 건 다 했는데. 당신 말은 다 들었어, 하나 빼고. 내가 그랬잖아. 당 이름으로 창녀 짓 하는 건 못한다고. 이제 상관없어. 그거 계속 놔도, 가둬도, 못 움직이게 해도. 그냥 죽여주면 좋을 텐데 당신 절대 그런 짓은 안 해. 자꾸 날 막아. 이제 그만 가. ”

 

 

게오르기 벨스키는 군 출신이었고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동문 서클과 그 도시의 실권자인 드미트리 마로조프를 통해 정치계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그 냉철한 마로조프가 그를 실질적 후계자로 점찍고 모스크바 권력의 중심지까지 단숨에 밀어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벨스키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점진적 개혁파에 속했고 결코 정적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거나 모함과 숙청이라는 자연스러운 무기를 대놓고 쓴 적도 없는 온건한 인물이었지만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충격을 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마로조프는 벨스키를 정치국으로 입성시켰고 놀랍게도 그의 오랜 정적이었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조차도 거기에 방해 공작을 펼치지 않았다. 스비제르스키는 사석에서 벨스키에게 ‘당신 뱃속은 쇠망치로 두들겨 패도 충격을 전부 흡수해버릴 쿠션들로 꽉 차 있다니까’ 라고 노골적인 농담을 건네기까지 했다. 그만큼 그를 놀라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게오르기 벨스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자기 앞에 누워 있는 젊은 죄수, 한때 그가 열렬하게 후원했던 무용수를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미샤가 다시 기침을 했다.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반 숟갈 가량의 피가 밀려나왔다. 괴로운 듯 베개에 이마를 부딪쳐댔다. 벨스키는 그의 머리를 가볍게 감싸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미샤가 오른손을 들어 벨스키의 손목을 쳐냈다.

 

 

“ 만지지 마. 제발 내 몸에 손대지 마. 나 좀 놔둬. ”

 

 

벨스키는 더 이상 면담을 계속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파나예바를 부르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곧장 들어왔다. 파나예바는 미샤를 보더니 벨스키에게 책망하는 시선을 던졌다.

 

 

“ 심문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

 

 

“ 잠깐 얘기를 나눴을 뿐이야, 소장이 너무 낙관적으로 얘기했던 것 아닌가 모르겠군. 전혀 회복이 안된 것 같은데. ”

 

 

“ 의원님께서 그 면담을 고집하지 않으셨으면 훨씬 나았을 거예요. 10분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이상은 집중을 못 해요. ”

 

 

파나예바가 미샤의 자세를 바꿔주고 출혈이 멎도록 조치를 취하는 동안 벨스키는 병실에서 나가는 대신 창가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주로 자신의 스케줄을 한 번 더 비울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었지만 미샤가 파나예바의 손길은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뒤섞였다. 어쨌든 그는 5년 이상 미샤를 알았고 가장 강력한 후원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올가 파나예바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걸었다. 벨스키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샤의 대답은 잘 들렸다. 체포되기 이전처럼 또렷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 아니, 그건 부다페스트에서였어요. 아사예프가 저와 지나의 호흡을 점검해보고 싶어서 투어 무대에 먼저 올라가게 했죠. 키로프 첫 무대는 12월이었어요. 74년. 폴랴코바가 테라스 장면에서 배경을 바꿨는데 아사예프가 무대가 죽어 보인다고 화를 냈어요. 그 사람 그때 공연 직전까지 계속 화만 냈죠. 진짜 이유는 저와 지나가 금발로 염색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집시 로맨스를 출 작정이냐고 한 시간 동안 설교를 늘어놓았어요. 지나가 빨간 머리 줄리엣이 뭐가 문제냐고 발끈하더니 저에게 아사예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집시 분장을 하고 추자고 했어요. 걔는 화를 내면 무섭기 때문에 잠깐 집시 의상까지 입어봤는데 그걸 보고 지나가 포기했어요. ”

 

 

 

파나예바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다시 뭐라고 속삭이자 미샤가 대꾸했다.

 

 

 

“ 아, 다른 건 다 됐는데 피부색을 바꿔야 했어요. 집시처럼 보이려면 진한 파우더가 필요했는데 마침 다 떨어졌거든요. 그러고 있는데 아사예프가 들어와서 기겁을 하더니 염색 얘길 더 이상 안 했어요. 그래서 원래대로 췄죠. 이후에도 그거 출 때 금발로 물들인 적 없었어요, 단 한 번도. ”

 

 

‘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얘기하고 있군. ’

 

 

 

벨스키는 잠시 매혹된 채 파나예바와 미샤 쪽에 시선을 던졌다. 자신이 췄던 작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미샤는 완전히 정상처럼 얘기했다. 파나예바가 백조의 호수에 대해 묻자 미샤는 니나 크류코바와 췄던 첫 무대나 크레믈린, 해외 투어 무대가 아니라 헝가리 춤을 추고 들어간 발레리나가 떨어뜨렸던 머리장식을 밟고 미끄러질 뻔 했던 무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뒤엉킨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최고의 찬사를 받은 무대가 아니라 실수를 할 뻔 했던 무대라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스키는 미샤가 얘기하는 공연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옥사나 셰먀코바가 고의적으로 장식을 떨어뜨렸다는 소문이 무용계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당시 셰먀코바는 미샤의 오랜 반대파였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의 연인이었고 그 서클에서는 끊임없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 그를 괴롭히고 있었으므로 꽤 신빙성 있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미샤는 이듬해 볼쇼이로 옮겼는데 벨스키는 세레브랴코프 서클이 그를 조금만 더 심하게 볶아댔으면 더 빨리 옮겨오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벨스키는 자신도 모르게 파나예바가 지젤이나 라 바야데르에 대해 물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샤 야스민의 알브레히트나 솔로르를 따라갈 무용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팬들이 미샤의 무게 없는 도약과 고속 회전, 화려한 테크닉에 푹 빠졌지만 벨스키는 항상 그의 진정한 강점은 드라마 배우로서 타고난 연기력과 음악에 대한 완벽한 감각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서방 관객들과 전문가들이 그 젊은 무용수 앞에서 넋을 놓았던 것도 당연했다. 그자들이 어디에서 그런 춤을 볼 수 있었겠는가. 볼쇼이나 키로프에서도 그렇게 춤추는 무용수는 없었다. 그런 재능은 유일무이했다.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온전한 재능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재능이, 그 완벽했던 육체가 부서지고 찢어진 채 반쯤 마비되어 있었고 무용수답지 않게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명료한 이성은 으깬 토마토 수프처럼 뒤섞여 있었다.

 

 

 

... 

 

 

 

 

이 면회의 후반부 대화를 일부 발췌한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589 (체제의 이름, 비행사, 천사 이름 붙은 도시)

 

 

이 링크에 발췌된 이야기에는 이 단편의 다른 파트들에 대한 링크들도 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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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췌문에 붙인 제목은 그냥 충동적으로 여기 나오는 단어들을 조합했음. 원래 이 단편은 1부 1~3장, 2부 1~3장, 3부 1~3장으로만 되어 있어 이런 소제목 같은 건 없기 때문에 여기 발췌해 올릴 때 내 맘대로 대충 붙이고 있다. 주인공이 피 토하고 정신 흐릿해진 상태이니 뭐 어울리는 듯... (미샤 : 뭐 임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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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내가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하고 미샤를 되살려냈을 때 구상했던 소설은 이른바 가브릴로프 이야기였다. 미샤가 체포된 후 지방 소도시의 보잘것없는 극장 감독으로 전출되고(사실은 유배) 그곳에서 겪는 일들을 그릴 생각이었다. 플롯과 인물들도 거의 다 구성했고 나 자신에겐 꽤나 흥미로운 프로젝트인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쓰기가 무척 힘들었다. 아마 이 소설은 다른 일을 하면서는 쓰기 어려운 종류의 글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틀어박혀 글만 쓸때 잘 풀릴 것 같은 종류의 소설이다. 나머지 글들은 거의 일을 하면서 짬짬이 썼는데...

 

 

하여튼 이 소설에서 최근 몇년 간 쓴 미샤에 대한 모든 글들이 나왔다. 이거 시작하려다 워밍업하려고 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frost' 단편을 썼고 그러고 나서는 이 소설에 잠깐 등장하는 트로이라는 남자가 궁금해져서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소설을 심지어 장편으로 쓰고, 나중에는 또 미샤와 렐랴가 나오는 추리소설 패러디 외전을 쓰고, 그러다 코즐로프가 나오는 단편도 하나 쓰고, 그러다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면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등등등...

 

 

이 가브릴로프 소설을 쓰기는 할 것이다. 다른 글을 쓸때에도 항상 내 마음 속 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사실, '매우 잘 쓰고 싶다'라는 욕망 때문에 쓰기가 어려운 게 분명하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예전에 먼저 발췌했던 http://tveye.tistory.com/3332 (요즘 쓰는 글, 행정 체계라는 간편한 대답)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실은,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저 행정체계 얘기랑 이 에피소드를 쓰다가 새끼쳐서 나왔음... 

 

 

 

시골 소도시 가브릴로프의 삼류극장에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미샤! 하지만 극장에는 구세력들이 우글거리고... 밖으로는 KGB 국장 스페호프, 극장 안에서는 전임 감독 쿠즈네초프와 그 후계자인 니콜라이 레베진스키, 그리고 그의 일파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이 와중에 폐세자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레베진스키가 면담을 요청하는데... 과연 20대 중반의 애송이 감독인 미샤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오페라에 대해서도 물었다.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비록 미샤가 극장 전체를 총괄하는 예술감독직을 맡기는 했지만 발레계 출신인데다 가브릴로프 극장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무용에 특화되어 있었고 오페라는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임 감독이었던 쿠즈네초프 역시 오페라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정 레퍼토리는 발레와 마찬가지로 4~5개뿐이었고 그나마도 한 달에 두세 번 공연하는 것이 전부였다. 미샤는 첫 2주 동안 피가로의 결혼과 라 보엠 무대를 보았고 근 20년 가까이 오페라단을 총괄하고 있는 말레도프스키와도 한 시간 정도 따로 미팅을 했다. 가수들도 만났다. 하지만 정작 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쿠즈네초프 체제에서 2인자의 자리를 공고히 해왔고 최근 1~2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발레단의 레퍼토리와 무용수들의 지도를 총괄해온 것이나 다름없는 수석 안무가 니콜라이 레베진스키는 초조해져서 닷새째 되던 날 류다를 통해 미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류다는 전보다 두 배로 아이라인을 두껍게 칠한 눈꺼풀을 무겁게 깜박이며 끝을 길게 끄는 말투로 대꾸했다.

 

 

“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면 될 거예요. ”

 

 

“ 안에 전화 한 통 넣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유세야! 아무 것도 안 하고 죽치고 앉아서... 새 상사 덕에 팔자가 늘어졌군. 우리 감독님은 사람 만나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나보지. 일이 줄어서 참 좋겠어. ”

 

 

“ 적어도 커피 타다 주고 두어 시간마다 간식 쟁반 갖다 바치는 일은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미샤는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일일이 전화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거지. 문은 열려 있으니까 이름 부르고 들어오면 된다고 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아까 차이카에서 마주쳤을 때 해도 됐을 텐데. 아니면 무대 점검하러 갔을 때나. ”

 

 

“ 난 공식적인 면담을 요청하는 거라고. ”

 

 

“ 하세요, 누가 말리나요. 지금 들어가세요. 조금 전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나왔으니까 아마 미샤 혼자 있을 거예요. ”

 

 

“ 빨리도 친해지셨군. 감독을 애칭으로 부르지를 않나. ”

 

 

“ 취임 파티 기억 안 나요? 감독님이 부칭 같은 거 붙이지 말고 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예전부터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하긴 그때 당신은 심기가 불편해서 계속 술만 마시느라 못 들었나 보군요. ”

 

 

레베진스키는 류다를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책상을 서류철로 거칠게 한번 내리치더니 안쪽에 있는 미샤의 사무실로 곧장 걸어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미샤는 약 20분 동안 레베진스키가 발레단에 대해 떠들도록 내버려두었다. 레베진스키는 발레단의 구조와 운영 현황에 대해, 주요 레퍼토리에 대해, 가브릴로프 발레단의 역사와 특성에 대해, 안무가와 교사들을 비롯한 지도부에 대해, 연습 시간표에 대해 브리핑한 후 마침내 주역 무용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막 그가 타마라의 이름을 끄집어냈을 때 미샤가 처음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 잘 들었어요,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도움이 되는군요. 레퍼토리에 대해서도 이제 이해가 됐습니다. 백조, 지젤, 코펠리아, 잠자는 미녀, 호두까기를 순서대로 돌린다는 거죠? ”

 

 

레베진스키는 부아가 치미는 것을 꾹 참고 호두까기 인형은 연말과 새해 시즌에 올라간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작품의 배경이 언제인지 모르느냐고 한 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그의 머릿속에 새해 시즌마다 문화 채널에서 방영해주던 키로프 호두까기 인형이 떠올랐다. 저 망할 애새끼가 호두까기 왕자를 췄었지... 심지어 시립 발레학교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서 다 같이 그 방송을 보곤 했다.

 

 

 

“ 호두까기 외엔 맞다고 해야겠죠. 그래도 일률적인 배정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백조 공연이 가장 잦죠. 인기가 제일 많으니까. 그 다음은 지젤. 그리고 코펠리아. 어린애들이 많이 보러 오니까요. 잠자는 미녀는 손이 많이 가서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올라가고. ”

 

 

“ 갈라 공연도 있나요? ”

 

 

“ 관객 대상으로는 아니죠. 모스크바에서 높은 분이 들렀을 때 리셉션 파티용으로 올린 적은 두어 번 있지만. 아, 예외가 하나 있군. 발레학교 졸업 무대. 그거야 당연히 이것저것 섞게 되니까요. 우리 애들도 졸업생들 파트너 해주기도 하고. ”

 

 

“ 내년이 100주년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극장 레퍼토리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뭔가요? ”

 

 

“ 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

 

 

“ 그냥 미샤라고 부르시죠. ”

 

 

“ 그건 피차 좋을 것 같지 않군요. 그러니까, 내가 감독님과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고... 아무래도 주변 시선이 있어서 말이지요. 가뜩이나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쉬운 상황인데 이름까지 그런 식으로 편하게 부른다면 내가 고의로 무례하게 군다는 말이 나돌 겁니다. 뭐 내가 훨씬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직위는 직위고 상사는 상사니까요. 그러니 부칭은 그대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

 

 

“ 그럼 좋을 대로 하시죠.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부분은 뭐죠? ”

 

 

“ 당신은 큰 극장에만 있었기 때문에 모를 겁니다. 여기는 볼쇼이처럼 거대한 극장도 아니고 키로프처럼 귀족적인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아닙니다. 규모 자체가 다르다는 말이에요. 관객들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 파벨 유리예비치는 백조와 지젤, 호두까기만 남기려고 했었고 그 생각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주장해서 두 개를 더 살렸죠. 호두까기를 제외하고도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하나 있어야 했고, 그래도 고전 발레를 표방하고 있으니 명목상 잠자는 미녀는 놔둬야 했던 겁니다. 솔직히 말해 이 동네 관객들 수준은 형편없어요. 몇몇 교양 있는 관객들을 빼고는 발레라면 그저 예쁜 여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분장한 남자들이 펄쩍펄쩍 뛰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잠자는 미녀라면 태반이 다 졸아버리죠. 그래도 극장의 예술적 자존심을 위해 일 년에 다섯 번은 올려야 한다고 내가 우긴 겁니다. ”

 

 

“ 극장 규모가 작고 관객 수준이 낮으니 레퍼토리는 인기를 끌만한 작품으로 최소화해야 했다는 얘기인가요? ”

 

 

“ 이를테면 그렇죠. 게다가... 이건 비공식적으로 하는 얘깁니다만, 우리 애들 수준도 거기서 거기예요. 잘 하는 애들 몇 명 빼고는 하향 평준화되어 있죠. 할 수 없잖습니까, 여긴 바가노바 아카데미도 없고. 귀감이 될 만한 스타 무용수도 없으니까요. 하긴 이제 하나 있군요. 당신은 무려 키로프 수석무용수 출신이니까요. 극장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당신 이름은 다 알고. 어제 마감한 우리 발레학교 신입생 추가 모집 접수가 작년보다 몇 배로 늘어났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무대에는 언제부터 올라가실 생각이죠? 적어도 2주 전에는 얘기해주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 포스터와 프로그램 인쇄를 바꿀 수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10월 첫 주 백조의 호수부터가 어떨지 싶은데. 역시 상대역으로는 타마라가 제일 나을 것 같군요. 실력도 그렇고 외모로 봐도 가장 잘 어울릴 테니까요. 뭐 브루넷을 선호한다면 레나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예쁜 애죠, 키는 살짝 큰 편입니다만. ”

 

 

 

미샤는 잠시 수석 안무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찌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날 감독실에서 보낸 시간 중 니콜라이 레베진스키가 가장 모욕감을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면담을 마친 후 친분이 두터운데다 때로 같이 자기도 하는 사이인 르이조바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 자식이 날 재보더군. 얼마나 재수 없게 째려보든지. 새파랗게 젊은 것이 그 계집애 같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날 지그시 훑어보면서 어떤 식으로 날 무시해줘야 할지 머리를 굴리더라니까. 키로프에서 그런 짓만 배웠던 모양이야. 동료들과 기 싸움하면서 자리 꿰차고 콧대 세우고... 배역 기용은 자기 권한이라 이거지.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얘기야. 일개 너 같은 놈이 감히 자기 같은 대스타에게 언제 무대에 올라갈지 말지 떠들다니 주제를 알라는 표정이지 뭐였겠어!’ 하고 투덜댔다.

 

 

문틈으로 귀를 바짝 대고서 모든 대화를 엿들었던 류다는 그 얘기가 사무국에 좍 퍼졌을 때 코웃음을 쳤다.

 

 

“ 그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람. 미샤는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어. 그냥 자기는 무대에 올라갈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 연초에 은퇴했다고. 그리고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어. 그리고서 오디션 얘기가 나왔던 거지. 그 사람은 콜랴처럼 잘난 척하면서 말하지 않았어. 파벨 유리예비치처럼 반말을 내깔기지도 않았다고. ”

 

 

 

하지만 류다도 그가 레베진스키에게 제대로 한방 먹인 것은 인정했다. 그때 레베진스키는 미샤의 은퇴 얘기에 한껏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건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군요. 당신 같은 대스타가 우리에게 와줬는데 무대를 볼 수 없다니 그건 말도 안 되죠. 극장에 그 이름을 걸어놓고 막상 춤을 추지 않는다니! 다들 실망할 겁니다. 세상에 은퇴 생각 한 번 안 해본 무용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 이건 다 떠나서 무용계 선배로서 하는 얘긴데, 춤추다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에요. 그만 두겠다는 말도 가끔 내뱉는 법이지만 그건 다 젊어서 그런 거죠. 돌아서면 다시 올라가고 싶은 게 무대인데. 나도 부상 때문에 은퇴했지만 지금도... ”

 

 

“ 난 부상 때문에 그만둔 게 아니라서요. 어쨌든,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지금까지 발레단을 관리하느라 수고가 많으셨군요. 여름부터는 실질적인 감독 대행으로 공연도 총괄해 오셨다죠.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부탁드려야겠군요. ”

 

 

“ 그거야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지요, 어쨌든 감독님은 여기 처음이고 난 이십 년 넘게 이 극장에 있었으니까요. 사정도 빠삭하고 무용수들에 대해서도 잘 아니까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 ‘조금만’이라는 것은... ”

 

 

“ 오늘이 9월 20일이군요. 내가 극장 사정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시즌은 벌써 시작했으니 9월 마지막 주까지는 지금처럼 공연을 총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겠죠? ”

 

 

“ 아, 물론... 전혀... 그런데 9월 마지막 주라고요? 앞으로 열흘 동안만이라는 건가요? 음, 그러면 10월부터는 어떻게... 그러니까, 10월 공연도 벌써 일정은 다 나왔는데. 설마 그걸 전부 바꾸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

 

 

“ 아뇨, 10월까지는 일단 레퍼토리는 그대로 갈 겁니다. 새 작품을 추가한다 해도 준비 기간이 필요하니까요. 배역은 아마 좀 바뀔지도 모르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10월까지는 전임 감독과 당신이 짠 일정표와 배역 명단을 수정하지는 않을 거예요. 현실적으로 그럴 시간은 부족하니까요. 대신 오디션을 보려고 해요. 당신 말대로 난 여기 처음 왔고 개별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요. 9월 29일과 30일이 좋겠죠. 오페라가 올라가는 날이니까 무용수들도 부담이 덜할 테고. ”

 

 

 

10월부터는 자신의 권한이 대폭 축소될 거라는 예고에 이어 오디션 얘기를 듣자 레베진스키는 정신이 좀 혼미했다. 무겁게 당겨오는 뒤통수를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 흠, 오디션. 29일과 30일이라고요. 그 오디션이라는 것은, 어떤 배역에 대한 건지. 백조의 호수 얘기겠죠? 공연 횟수가 많으니까. 수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제1솔리스트까지? 굳이 이틀이나 잡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

 

 

“ 백조. 지젤. 코펠리아. 주역과 솔리스트 바리아시옹들. 나머지는 10월에 생각하죠. 참가 대상은 제한을 두지 않을 겁니다. ”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한을 두지 않다니, 그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코리페도 모자라 군무 쪽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전부 몰려들 거라고요. 그렇게 하면 이틀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걸요. 자기 실력을 착각하고 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기는 잘났는데 위에서 기회를 안 줘서 군무진에 처박혀 있다고 불만만 더 늘어날 겁니다. 솔리스트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주 골치 아프게 될 거라고요. 그래서 파벨 유리예비치는 웬만하면 오디션을 하지 않았습니다. 드물게 하더라도 비공개로 하나씩 불러다 했고요. 원체 애들에 대해서도 잘 알았고 항상 붙어서 가르쳤으니 실력에 대해서도 잘 알았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감독님이 오디션을 진행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지금 수석들 외에는 주역 출 만한 애들이 없어요. 전문가라면 누구든 보는 눈은 같은 법이에요. 공연히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 글쎄요,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죠. 그리고 모든 역을 균일하게 소화하는 무용수는 없어요. 오디션은 공개로 진행할 겁니다. 낭비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얻는 게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

 

 

레베진스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감독실을 나왔다.

 

 

..

 

 

 

레베진스키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예의를 갖춰 미샤의 본명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름 + 아버지의 이름에서 나온 부칭 + 성으로 이루어진다. 미샤의 아버지 이름이 세르게이 야스민이기 때문에 미샤의 풀 네임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야스민이 되는데 본편에서 미샤는 자기를 이름과 부칭으로 깍듯이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항상 '그냥 미샤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하곤 한다.

 

 

레베진스키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여러번 등장했었다. 거기서 좀 바보같게 그려지긴 했었음 ㅠㅠ 하지만 이 글이 오리지널이고 서무는 여기서 파생된 패러디 ㅠㅠ

 

레베진스키가 얘기하는 가브릴로프 극장의 다섯개 레퍼토리는 발레 레퍼토리 중 가장 유명한 작품들에 속한다만... (코펠리아는 그 정도로 대중적이진 않지만 이 동네에선 어린이용 발레로 남아 있다고 가정했다) 하여튼 시를 대표하는 극장이고 한때는 그래도 조금의 명성은 있었던 곳이니만큼 다섯개 레퍼토리만 가지고 줄창 돌려댄다는 것은 솔직히 좀 너무한 상황이긴 하다 :)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아직 120페이지 정도밖에 못 썼다... 이 소설은 쓰기가 참 힘들다. 원래 미샤를 되살렸을때 처음 구상한 것이 이 글이었는데... 결국 이 글이 잘 안 써져서 다른 장편과 중편과 단편, 패러디 외전, 심지어 서무 시리즈도 모자라 지나와 말썽쟁이 낙서까지 나와버렸어...

 

아래는 그래도 전에 군데군데 발췌했던 이 가브릴로프 본편의 일부 에피소드 링크들.

 

 

http://tveye.tistory.com/3408 1부 마무리. 키라와 미샤

 

http://tveye.tistory.com/4451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http://tveye.tistory.com/5368 가브릴로프 KGB 등록 절차, 검색대

 

http://tveye.tistory.com/4971 이웃사촌 베르닌, 미샤의 두가지 해법

 

http://tveye.tistory.com/5114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간 사람, 렐랴의 인터뷰

 

 

..

 

 

맨 위 사진은 마린스키 극장 사진 :) 가브릴로프 극장은 내가 만들어낸 곳이라 사진이 없음. 물론 마린스키(당시 키로프)와 가브릴로프 극장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 미샤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처음 와서 가브릴로프 발레단 무용수들 무대를 보고 기절할 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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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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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6. 13. 20:42

모든 장미가 시들지만 about writing2017. 6. 13. 20:42


멀고도 가까이, 꽃들이 죽어간다.

이 도시에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



위의 두 문장은 아주 오래전 내가 썼던 소설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락 가수였는데 저 두 줄은 그가 만든 노래의 일부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만들어낸 노래 가사이다) 소설 속에서 저 노래 가사가 전부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여전히 꽃을 좋아한다. 그리고 꽃이 시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좀 우습게도 저 구절을 되뇌곤 한다. 자기가 만든 구절을 자기가 되뇌고 있는 걸 보면 참 유치하다.









장미를 좋아한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장미는 다른 꽃들보다 오래 꽂아놓을 수 있다. 겉의 꽃잎부터 시들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면 바깥쪽부터 힘없이 벌어지면서 툭 떨어지기도 하고 시들어 살며시 오그라들기도 한다. 장미를 꽂아둔 날들이면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꽃병의 물을 갈아준다. 그리고 시든 겉꽃잎 몇장을 딴다. 일하고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 것. 그리고 다시, 시든 겉꽃잎을 살며시 따주는 것.



그래서 날이 갈수록 장미는 작아지고 날씬해지고 마침내 아주 가늘고 춥고 외롭게 변한다. 커다랗고 화려하고 두툼한 아름다움을 벗어버리고 아주 조그맣고 조용하고 쓸쓸한 안쪽 꽃잎들만 남는다. 마지막 남은 순간의 장미는 더 작고 더 둥글어서 때로는 조그만 열매처럼 보인다.



나의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때 언제나 붉은 장미보다는 흰 장미가 오래 갔다. 붉은 장미는 한꺼번에 진다. 아주 작고 외롭게 끝까지 버티지는 않는다. 혹은, 내가 그것을 참지 못하고 어느 정도 꽃잎이 떨어지면 과감하게 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흰 장미가 가장 오래 남는다. 노란 장미도 좀 오래 가고 분홍 장미도 붉은 장미보다는 오래 간다. 그러나 흰 장미가 가장 오래 남는다. 아마도 흰색이기 때문에, 그래서 겉꽃잎이 한장 한장 떨어져 나가고 몇장 남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의 변화에 있어 진폭이 별로 크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지난주 목요일에 사왔던 노란 장미는 신품종이었다. 한 송이에 천원이었다. 고전적인 흰 장미는 한 송이 2천원. 노란 장미 한 송이는 빨리 져버렸고 나머지 한 송이는 아직 저렇게 버티고 있다. 겉꽃잎의 절반이 이제 사라졌다. 대부분은 한쪽 귀퉁이에 생긴 얼룩 때문이었다. 나는 꽃집 주인에게 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을 들고 와서 집에서 잘 보니 이미 그때부터 얼룩이 있었다. 흰 장미도 밖에서 두겹까지는 얼룩이 군데군데 있었다.



흰 장미는 얼룩진 두겹의 꽃잎을 떼어내 버렸다. 그 후부터는 얼룩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 저 장미의 꽃잎은 두껍고 견고한 편이다. 그리고 작약을 닮은 이 신품종 노란 장미는 얼룩이 전염병처럼 번진다. 아주 깊은 곳까지 겹겹이 그 얼룩이 번져 있었다. 꽃잎도 얄팍하고 빨리 시들어버린다.



이 품종의 장미는 한번 사서 꽂아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 우아하고 차갑고 고집센 흰 장미는 앞으로도 종종 사게 될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 동네 꽃집에서는 붉은 장미를 잘 가져다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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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오랜만에 본편 일부를 올려본다.


이 에피소드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이전에 각각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네프스키의 유명 디저트 가게인 세베르에 나갔던 트로이는 우연히 미샤와 그의 극장 친구들을 마주치게 된다. 거기에는 미샤의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를 비롯해 동기인 레냐 핀스키, 후배인 니넬,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초빙되어 온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었다. 일린은 토요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며 그를 파티에 초대한다.


순서는 반대로 일린의 생일 파티를 먼저 올렸었다. 트로이는 파티에 가서 미샤의 극장 동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미샤는 브이소츠키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 술에 취해 나가떨어진다.


이번에 올리는 에피소드는 그 두 이야기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시간 순서대로 재배열하면 세베르 - 이번 에피소드 - 노래 부르고 나가떨어지는 미샤 이다.




그 두 에피소드 링크는 아래 :


 
http://tveye.tistory.com/6253 세베르에서의 만남, 달콤한 것들, 미샤와 지나 어릴적 스케치 2


http://tveye.tistory.com/5842 생일과 그 다음날, 브이소츠키




...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는 일린의 이름과 부칭이다. 제대로 된 이름은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일린이고 미샤는 그를 애칭인 스탄카라고 부른다.



미샤와 일린이 논쟁을 벌이는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이다. 나스첸카는 그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내가 쓴 이 소설 속에서 일린은 미샤와 지나를 위해 '백야'를 단막 발레로 안무하고 미샤를 화자였던 남자 주인공, 지나를 나스첸카로 캐스팅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과 부칭이다. 미샤에게는 존경하는 예술가를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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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토요일 저녁 7시에 트로이는 미샤와 지나이다의 아파트로 갔다. 생일 파티는 8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미샤가 백야 때문에 일린과 이견이 생겼다면서 좀 일찍 와달라고 했다. 트로이는 자신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일찍 갔다.



 지나이다가 문을 열어주더니 반색을 했다.



 “ 제발 쟤 좀 말려요. 저러다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를 잡아먹겠어요. ”



 힐끗 보니 부엌 테이블에는 이미 음식들과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준비해 온 게 틀림없었다. 미샤는 원래 요리를 하거나 잘 차려먹는데 관심이 별로 없었고 지나이다도 가정적인 주부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 여왕님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술 한 잔 권하기는커녕 코트를 벗는 것도 기다려주지 않고 그의 팔목을 잡아끌며 거실로 데려갔다.



 미샤는 피아노 옆에 선 채 일린과 열띠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샤는 평소에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논쟁할 때는 명료하고 건조한 말투로 변했다. 그는 빠르게 쏟아지는 일린의 설명을 중간 중간 칼처럼 끊어대며 끼어들었다. 검은 눈에서 불꽃이 연달아 튀었다. 처음에 트로이는 그들이 뭘 가지고 그렇게 가열찬 논쟁을 벌이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듣고 보니 주인공이 나스첸카의 첫사랑에게 연애편지를 전해주러 갈 때 무대 어느 쪽에 서야 하느냐, 여자가 그 첫사랑이란 작자에게 달려들어 안길 때 주인공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느냐 아니면 관객들로부터 등을 돌려야 하느냐 등의 트로이로서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듯한 문제들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대체 왜 미샤가 자신에게 빨리 와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참 열을 내다가 트로이를 발견한 미샤가 좋아하며 손목을 휙 흔들었다.



 “ 아, 잘됐다. 빨리 스탄카한테 설명 좀 해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이 사람한테 좀 알려줘. 그리고 백야가 주인공과 나스첸카의 연애소설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짝사랑이라는 이론 좀 설명해봐. 구조주의랑 뭐 그런 것도 섞어서. 너 지난번에 세미나에서 발표한 거 있잖아. ”



 “ 구조주의와는 관계가 없는데... ”



 “ 아니, 관계가 있게 설명해줘. 넌 할 수 있잖아. ”



 “ 그거랑 무대에서 등을 돌리고 말고랑 대체 상관이 있어? ”



 “ 있어요. ”



 미샤 대신 일린이 대꾸했다. 역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밝은 회색 눈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아마 턱수염을 깎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트로이에게 자신들의 이견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미샤의 질문과 주인공의 동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쭉 설명했다. 그는 간결하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미샤와는 달리 빠르고 길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일린이 어찌나 설득력 있게 조곤조곤 얘기하는지 트로이는 미샤에게 그냥 연출자의 말을 따르라고 충고할 뻔 했다. 하지만 미샤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할 수 없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페테르부르크 소설들에 대해 얘기를 늘어놔야 했다. 나중에는 미샤가 원하는 대로 구조주의 이론도 좀 섞었다.



 얘기를 마쳤을 때 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그럼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데. 이건 내일 다시 맞춰보는 걸로 해. ”




 “ 등 돌리는 거지? ”




 
 한번 파고들면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는 미샤가 집요하게 물었다. 자신이 일린의 입장이었다면 그 고집 세고 버릇없는 젊은 애에게 화를 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 그래, 등 돌리는 걸로 하자. 이제 페트루슈카 좀 맞춰보면 좋겠는데. 좀 있으면 사람들 올 테니까. ”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지나이다가 일어났다. 피아노 쪽으로 다가오면서 트로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 고마워요, 덕분에 공연이 파탄나지는 않겠네요. ”




 “ 무슨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군요. ”




 “ 그냥 쟤를 얌전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성공이에요. ”




 지나이다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테마를 치기 시작했다. 미샤가 바 앞으로 가더니 목과 팔을 기형적으로 꺾은 채 지푸라기 인형처럼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일린이 박자를 셌다. 중간 중간 동작을 지시하기도 하고 손을 내저으며 음악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백야를 놓고 열띠게 대들던 것과는 달리 미샤는 일린의 모든 지적에 온순하게 따랐다.




 “ 팔을 더 내려야 해. 허리는 좀 더 펴고. 무릎이 더 나가야지. 다시 해봐. 어깨도 내리고. ”




 미샤가 다시 포즈를 취했다. 일린이 뒤로 다가와서 왼쪽 어깨를 아래로 세게 내리눌렀다. 아픈 부위였기 때문에 미샤가 잠깐 얼굴을 찡그렸지만 불평 없이 어깨를 더 내렸다. 일린이 손을 치우자 그는 정말로 꼭두각시 인형 같은 모습으로 허공에 매달린 듯 서 있었다. 트로이는 금방이라도 미샤가 무릎을 꺾고 바닥에 넘어질까봐 오싹했다.



 지나이다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 일린은 박자를 세는 것 외에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피아노 옆에 선 채 미샤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샤는 검은 머리칼을 털실이나 지푸라기처럼 들썩이며 사지를 상하좌우로 흔들었다. 몇 차례 이어지는 도약조차 무릎을 구부린 채 낮게 뛰었다. 발레란 몸을 가능한 한 곧게 펴고 길게 늘이는 것이라고 믿었던 트로이에게 있어 그 춤은 전혀 아름답거나 우아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팔과 어깨 동작이 특히 그랬다. 불협화음과 구슬픈 멜로디가 뒤섞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속에서 미샤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고통스러워졌다. 얼굴 전체가 일그러지며 외롭고 슬프게 변했다. 두 손을 털실로 감친 인형 손처럼 둥그렇게 뭉쳐서 가슴을 치며 옷을 잡아당기고 어깨를 떨며 이따금 구부러진 다리를 바깥으로 한두 번 찼다. 피아노를 치면서 지나이다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너무 슬픈데. 꼭 저걸 가져가야 하나... ”




 미샤가 몸을 돌려 일린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발레리나 인형이나 독재자 흥행사를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피아노 옆에는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었고 그 밝은 회색 눈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예리한 칼처럼 자기 앞의 무용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샤는 두 손을 어색하게 뻗더니 삿대질을 하고 턱짓을 했다. 그리고 어깨를 홱 떨구더니 한 바퀴 빙글 돌고 바닥에 넘어졌다.



 일린이 손바닥을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 훨씬 좋아졌네. 어깨 동작만 좀 손보면 되겠어. 런던에서 좋아할 거야. ”




 미샤는 심하게 숨을 헐떡였다. 트로이는 그가 연습하면서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어려운 동작 때문인지 마음이 산란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면 티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거실 마룻바닥에 반쯤 엎드린 채 두 손으로 머리와 가슴을 감싸고 숨을 몰아쉬면서 가만히 있었다. 방금 춘 춤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힘든 것 같았다. 마침내 일린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씻어야지, 뭘 더 입든가. 런던 가기도 전에 감기 걸리면 안되잖아. ”




 “ 나 좀 놔둬. ”




 미샤가 목쉰 음성으로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머리를 들지 않은 채였다. 지나이다가 일어나더니 모른 척하면서 부엌으로 갔다. 일린은 다른 말을 하는 대신 소파에 펼쳐져 있던 카디건을 가져와 미샤의 머리와 등을 덮었다.



 잠시 후 미샤가 일어났다. 여전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카디건을 일린에게 휙 던지고 한 손으로 어깨를 누르면서 욕실로 갔다. 스위치를 찾지 못해 한참 문 옆 벽을 더듬었다. 트로이가 다가가서 불을 켜주었다. 미샤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곧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린은 바를 붙잡고 아까 미샤가 하던 동작 몇 개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확하기는 했지만 나이 때문인지, 무용수에서 은퇴한지 오래됐기 때문인지 미샤보다는 훨씬 뻣뻣했고 우아한 느낌도 적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좀 더 내려야 하는데...’ 하고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트로이는 견디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 더는 아파서 안 될 거예요. 그 어깨 아픈지 반년 가까이 됐어요. ”




 “ 아니, 그 정도예요? 왜 아프다고 얘길 하지 않는 건지... ”




 “ 자존심이 강해서 그래요. ”




 “ 저 정도로 추면 자존심 내세워도 돼요. 아픈 건 별개지만. ”




 “ 백야만 추는 줄 알았는데, 런던은 무슨 얘기죠? ”




 “ 2월 런던 페스티벌 있잖아요. 경쟁부문에도 초청됐어요. 참가진도 꽤 화려하고. 그래서 페트루슈카로 정한 거예요, 누가 뭐래도 러시아 춤이니까. ”




 “ 미샤가 정했어요? ”




 “ 아뇨, 하나 안무해달라고 해서 내가 고른 거죠. 물론 포킨 오리지널에서 가져온 거지만. ”




 “ 그럼 런던에 함께 가요? ”




 “ 글쎄요, 당국에서 나까지 허가를 내줄 것 같지는 않아요. ”




 일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 정도로 아프다면 동작을 바꿔야겠는데... ”




 “ 미샤에게는 내가 그런 말 했다고 얘기하지 마세요. ”




 “ 자존심 앞에는 친구도 소용없나 보죠? ”




 “ 자기 춤 앞에서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죠. ”




 “ 그럴만해요. 내가 저렇게 출 수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놨을 테니까. ”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투명한 회색 고양이처럼 미소를 띠었다. 트로이는 사라토프의 시골에서 할머니가 고양이들을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뜨려 죽였던 것을 떠올렸다. 일린을 향해 솟구치는 부당한 증오심에 그는 소스라쳤다.





...




발레 페트루슈카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올린 적이 있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의 초창기 메인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이 니진스키를 위해 안무한 단막 발레이다. 러시아 전통시장과 놀이문화, 마슬레니차의 흥겨움과 화려함, 거기에 꼭두각시 헝겊 인형 페트루슈카와 독재자 흥행사, 아름다운 발레리나 인형과 폭압적인 무어 인형이 등장한다. 음악은 스트라빈스키. 원체 음악이 유명해서 종종 따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연주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미샤가 추는 페트루슈카는 포킨 원작이 아니고 일린이 그 원작을 따와서 미샤를 위해 변형시킨 작품이다. 여기 발췌한 적은 없지만 이후 미샤는 안무가가 되었을 때 니진스키를 위한 트리뷰트 작품을 안무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한 페트루슈카를 재등장시킨다.




런던에서 미샤가 춘 페트루슈카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공연을 본 알리사가 트로이에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http://tveye.tistory.com/5178 프라하의 두 개 메모,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마린스키에서 본 페트루슈카 무대에 대한 짧은 메모와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15

http://tveye.tistory.com/3686


..





미하일 포킨의 페트루슈카를 춘 바츨라프 니진스키.






최근에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발레 뤼스 디아길레프 갈라에서 페트루슈카의 모놀로그를 추었다. 마린스키에 오리지널 페트루슈카가 레퍼토리로 들어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은 그전까지는 페트루슈카를 춰본 적이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준 연습 영상을 보니 무척 보고팠는데 공연 영상은 올라오지 않았다. 무대 분장 사진을 보니 오리지널 페트루슈카를 그대로 따온 것 같긴 한데... 나에겐 실제 분장 사진보다 이 연습 사진이 더 인상깊었다.


페트루슈카는 남자 꼭두각시 인형이지만 최근 디아나 비슈뇨바가 젊은 안무가인 블라지미르 바르나바가 새로 안무한 작품에서 페트루슈카 역할을 추기도 했다.


리허설 중인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더.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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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오랜만에 본편을 약간 발췌해 본다. 요즘 지나와 말썽쟁이 낙서하며 노느라 정작 원래 글은 한줄도 안 썼고 다른 글도 거의 안 썼다. 노는 건 좋은데 이게 문제야. 노는 건 편하고 쉬우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거든. 그래서 서무 시리즈도 그렇게 줄줄이 썼는데...

 

전에 트로이가 지나이다와 미샤의 아파트에 보드카를 마시러 간 이야기를 조금 발췌했던 적이 있다. 미샤의 공연을 보고 나오던 트로이와 마주친 지나가 그에게 아파트로 보드카 마시러 오라고 초대를 한다. 지나의 약혼자인 마르크 카라바노프는 트로이와 같은 학교의 영문학과 부교수라서 친분이 있다. 앞 에피소드에서 공연을 마친 미샤가 돌아오고 카라바노프는 어서빨리 같이 보드카 마시자고 성화를 부린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643 - 보드카를 따지 않는 건 죄악, 옷 빌려입기, 위선자)

 

 

아래 얘기는 그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샤워를 하고 나온 미샤를 남겨두고 트로이는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카라바노프가 염원하고 또 염원하던 보드카를 딴다. 미샤도 나온다. 지나이다는 학창시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그런 이야기이다.

 

지나와 말썽쟁이 시리즈에서 놀고 있긴 하지만 이 둘의 학창시절 관계는 사실 이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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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리츠나야'는 보드카 상표 이름이다. 러시아에선 스탄다르트와 스톨리츠나야가 유명 보드카 브랜드임.

 

마이야 필리포브나는 미샤의 오랜 후원자인 노멘클라투라 귀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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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사실 이 글과는 별 관계없지만... 최근 마린스키에서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를 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 한 장. 내가 좋아하는 씬이기도 하고 이 사람은 이 의상 입고 이 포즈 취할 때 참 멋있어서.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트로이가 부엌으로 나왔을 때 카라바노프는 한 손에 여전히 보드카 병을 쥔 채 지나이다와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한순간 그는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되고 싶었다. 거리낌 없고 적극적이며 단순하고 모두와 쉽게 친해지고 어디를 가나 사랑받는 남자. 자신이 원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얻은 남자. 모두의 눈에 흡족하게 비쳐질 남자. 무난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남자.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게 될 남자. 모든 것이 정상인 남자.

 

 

“ 아니, 미하일은 왜 안와? ”

 

“ 공연 때문에 피곤한 것 같던데. 그냥 자라고 했어. 어차피 걔한테는 그림의 떡이잖아. ”

 

“ 불쌍한 친구 같으니, 보드카와 캐비아를 놔두고 자러 갔다고? 이건 다 발레학교가 애들을 어릴 때부터 너무 잡았기 때문이야. 맞지, 지나샤? ”

 

“ 학교가 우릴 잡아댄 건 맞는데 바보는 그런 게 별로 안 통했어. 술만 못 마시는 거지 부릴 수 있는 말썽은 다 부렸으니까 전혀 불쌍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

 

 

카라바노프가 염원하던 스톨리츠나야의 마개를 땄을 때 미샤가 부엌으로 나왔다. 지나이다 옆에 앉더니 꽤 묵직해 보이는 종이 상자를 열어 빈 접시 위에 초콜릿 트러플과 조그만 커스터드 슈, 금박지로 포장된 캐러멜과 투명하게 꿀이 입혀진 아몬드 캔디를 주르르 쏟아놓았다.

 

 

“ 오, 이 끔찍한 것들은 뭐야, 어디서 가져온 거야! ”

 

 

지나이다가 비명을 질렀다. 정말 끔찍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서 그런 것 같았다. 에메랄드빛 두 눈에 반짝거리는 광채가 일었다.

 

 

“ 어제 마이야 필리포브나가 주고 갔는데 깜박 잊고 있었어. ”

 

“ 그럼 진짜 브뤼셀에서 가져온 거겠네. 지극정성이다, 그 여자. 막상 바보는 이런 거 먹지도 않는데. ”

 

“ 마이야 필리포브나가 누군데요? ”

 

“ 있어요, 바보 추종자 중 하나. 쉰 살도 넘었을걸요. 무슨 인민 영웅 미망인인데 돈도 많고 엄청 잘난 척해요. ”

 

“ 그렇게 말하면 마이야가 상처받을 거야. 마흔다섯 살이라고 했는데. 그리고 이거 너한테 주라고 한 거야, 내가 안 먹는 건 알거든. ”

 

“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네. 그 아줌마가 전에 나한테 여우같은 년이라고 했는데. 바보한테 꼬리친다고. ”

 

“ 결혼 소식 듣고 아주 좋아했으니까 독 같은 건 안 들었을 거야. 정 의심되면 마르크와 트로이에게 하나씩 먼저 먹여. ”

 

“ 자기가 먹는다는 얘긴 끝까지 안하네. ”

 

 

달콤한 초콜릿과 캔디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카라바노프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내더니 직접 잔들을 끌어당겨 보드카를 따랐다. 지나이다의 잔에는 와인을 넘치도록 부어준 후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 미인을 위해! ”

 

 

다들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켰다. 지나이다는 한 모금 밖에 마시지 않았다. 모든 관심이 마이야의 초콜릿들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독 운운하더니 초콜릿 트러플을 두 개나 집어 조그만 입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이미 행복해진 카라바노프가 두 번째 잔을 따랐고 상투적인 구호대로 건강을 위해 건배했다.

 

 

미샤는 첫 잔은 단숨에 비웠지만 두 번째 잔은 기침을 하면서 몇 모금으로 나눠 마셨다. 첫 잔부터 눈물이 순식간에 차올라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니 카라바노프의 스톨리츠나야는 순도 높은 진짜 보드카가 분명했다. 카라바노프는 미샤가 잔을 다 비울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가 강의실에서 학생을 격려하듯 쾌활하게 말했다.

 

 

“ 이번 거 한 잔만 더 받아. 자기를 위한 건배는 받아야지. 미하일을 위해! 최단시간 내에 인민예술가가 되기를! ”

 

 

트로이는 미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 기원의 말이 어쩐지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이콘 후광 같은 머리와 채찍 같은 몸. 루뱐카에서 그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지.

 

 

 

그는 당이 내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어. 오전의 만남은 자기들과 나 양측에 모두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했지. 가능하면 볼쇼이에서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인민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았어.

 

 

 

다행히 미샤는 그 끔찍했던 말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웃었고 잔을 들어올렸다. 지나이다가 한 손을 그의 머리칼 사이로 집어넣어 부드럽게 헝클어뜨렸다.

 

 

“ 천천히 마시고 가서 자, 멍청이. ”

 

 

“ 이제 더 이상 신경써주지 않는구나, 멍청이로 바뀐 걸 보니. ”

 

 

“ 아직 문법이 제대로인 걸 보니 덜 취했네. ”

 

 

“ 취해도 제대로 말할 수 있어. ”

 

 

 

하지만 미샤는 세 번째 잔을 비우지 못했다. 절반 정도 마셨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나이다의 뺨에 키스를 하고 부엌을 나갔다. 심하게 비틀거리며 식탁과 벽에 부딪치는 것을 보니 이미 꽤 취한 것 같았다. 카라바노프가 재빨리 일어나 뒤따라갔다. 트로이는 희미한 질투심을 느꼈지만 지나이다와 카라바노프가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애의 팔을 끼고 침실로 데려갈 자신이 없었으므로 그게 낫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들은 한 시간 정도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얘기하는 쪽은 주로 카라바노프였다. 지나이다는 미샤가 가져다 준 초콜릿과 캔디들 때문에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약혼자의 어깨에 기대어 가끔 대화를 거들었다. 카라바노프가 베라에 대한 화제를 꺼내자 지나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 루빈슈테인 병원 의사? 데이트해요? ”

 

“ 그냥 친구예요. 가끔 만나요. ”

 

“ 남녀 사이에 그냥 친구가 어디 있어. 그렇게 얘기하면 베로츠카가 분명히 섭섭해 할걸. ”

 

“ 인사도 안 했으면서 벌써 베로츠카라니. 정말 넉살이 좋네. ”

 

“ 친구가 만나는 여자라면 애칭으로 불러도 괜찮아. 미하일도 여자 친구를 좀 보여주면 좋을 텐데. 자넨 만나봤지? 궁금해 죽겠네, 어떤 여잔지. 지나랑 다른 타입이라고 했잖아. ”

 

 

트로이는 제멋대로 둘러댔던 말을 카라바노프가 기억하고 있다는데 놀랐고 더듬대며 대꾸했다.

 

 

“ 아... 나도 못 봤어. 미샤는 그런 얘긴 잘 안 해. ”

 

“ 음, 분명히 눈이 새파란 금발 미녀일 거야, 좀 얼음공주 같은 스타일의... 그래야 지나랑 다른 타입이 되지. ”

 

 

지나이다가 입술을 푸르르 떨면서 카라바노프의 입에 캐비아를 얹은 흑빵을 밀어 넣었다.

 

 

“ 왜 100킬로 쯤 나가는 갈색머리 연상녀라고는 생각 못해? 온 세상에 나랑 다른 타입들이 널렸는데. ”

 

“ 그 다른 타입이란 표현에도 숨겨진 조건들이 있는 거야. 적어도 당신만큼 예뻐야 한다든가. 미하일은 일단 자기가 너무 잘났어. 그러니까 여자도 엄청 까다롭게 고를 거야. ”

 

“ 그 바보는 고르지도 않아. 지금까지 사람 마음을 제대로 받아준 적도 없을 걸. 누굴 사귄다니 믿을 수 없어. 그런 걸 할 줄 알았으면 바보라고 불렀겠어? 그 멍청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왜 질투하는지, 왜 울고 괴로워하는지 이해해본 적도 없을 거야. ”

 

“ 아니, 정말 자기 파트너를 너무 가혹하게 깎아내리는 거 아냐? 여태까지 내가 만난 젊은이들 중에 제일 괜찮은 친군데. 다 갖췄잖아, 잘나고 실력도 좋고 착하기까지 한데. 당신 말은 다 들어주고. ”

 

“ 그 중 하나라도 안 갖췄으면 훨씬 나았을 거야. ”

 

 

지나이다는 갑자기 입맛이 떨어진 듯 초콜릿 접시를 한쪽으로 밀어놓더니 트로이나 카라바노프에게 청하지도 않고 자신의 빈 와인 잔에 보드카를 약간 따라 한 입에 마셔버렸다.

 

 

“ 학교 다닐 때 여학생들 연애편지에 답장 안 해 줬다고 사람 마음을 제대로 받아준 적 없다고 판단하면 안 되지. 나도 학생 때 맘에 안 드는 여자애가 고백한 거 거절한 적이... ”

 

“ 니넬이 그런 얘기 안 해? 정신 나간 팬 하나가 학교로 찾아와서 바보 파트너를 가위로 찌르려고 했다는 얘기. ”

 

“ 기억나, 사귀는 줄 알고 그랬다고. 그 여자 이름이 뭐였더라. ”

 

“ 마루샤. ”

 

 

트로이가 니넬의 이야기를 기억해내며 끼어들었다. 지나이다는 트로이 쪽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 미친 여자애는 끌려 나갔고 마루샤는 살짝 긁히기만 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어요. 마루샤는 학기 마치고 일반 학교로 전학 갔어요. 다들 그 사건 때문에 충격 받아서 춤을 그만둔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죠. 이건 아무도 모르는 얘기예요. 양호실로 그 바보가 문병을 갔는데 마루샤가 고백을 했어요. 무대를 하나 차려도 될 정도로 열렬하게. 가위에 찔려 죽어도 좋다고, 정말 너와 사귀다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고. ”

 

아니, 오글거리는 게 진짜 무대 위에서 하는 말 같네. 사춘기라서 그런가? ”

 

“ 그럼 학교에서 매일 배우고 춤추는 게 왕자랑 공주의 로맨스에 온갖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레퍼토리들뿐인데 제정신인 애들이 얼마나 있었겠어? 여자애들만 그런 것도 아냐. 다들 꿈이랑 현실을 구분 못했어. 극장에도 아직 그런 사람들 많아. 근데 미샤는 안 그랬어. 꿈같은 로맨스 따윈 믿지도 않았고 다른 애들의 환상을 받아주지도 않았어. 그 자리에서 마루샤를 거절했는데 그 불쌍한 여자애가 너무 상심해서 걔가 보는 앞에서 창밖으로 뛰어내렸어. ”

 

“ 뛰어내려? 장난이 아닌데! 전학 갔다고 했으니 다행히 무사했나보네. ”

 

“ 겨우 2층이었는걸. 마루샤야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일단 뛰어내린 거고. 하나도 안 다쳤어. 미샤가 걜 안고 다시 양호실로 데려왔는데 그때 마루샤가 완전히 맛이 갔지. 울면서 자기가 뛰어내릴 때 안 잡아줬다고, 분명히 옥상에서 뛰어내렸어도 가만 놔뒀을 거라고 소리를 질렀어. ”

 

“ 불쌍한 미하일, 난 그 친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울고불고 한다고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잖아. ”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트로이는 레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흑해에 함께 갔던 소녀, 작은 인어 같던 레나. 그 애도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지나이다는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더니 약혼자 대신 트로이 쪽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 미샤가 달래주려고 가까이 갔는데 그때 마루샤가 베개 밑에서 재봉 가위를 꺼내서 걜 찔렀어요. 진짜로 찔렀어요, 그 팬 계집애가 슬쩍 긁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되게. 바보가 그때 조금만 늦게 피했으면 가슴에 박혔을 걸요. ”

 

 

카라바노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트로이와 자신의 잔에 보드카를 철철 따르며 중얼거렸다.

 

 

“ 아니, 그렇게 끔찍한 얘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토슈즈를 신고 드레스를 나풀거리는 귀여운 여학생이 그렇게 무서운 짓을! 전혀 낭만적이지 않잖아! ”

 

“ 왜, 아주 낭만적이지. 역시 당신은 아직 발레를 잘 몰라. 지젤만 해도 버림받으니까 미쳐서 심장도 터져 죽고... 라 바야데르도 연적을 독사를 풀어 제거하는걸. 내 무대 제대로 안 봤지? ”

 

“ 그래서, 미하일은 무사했어? ”

 

“ 뭐 안 죽었으니까 무사했다고 해야 하나. 팔로 막았는데 꽤 많이 베었지. 내가 마루샤 떼어놓지 않았으면 완전히 난도질당했을 걸.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지. ”

 

“ 당신은 어떻게? ”

 

“ 그때 몸살이 나서 양호실에 누워 있었거든. 제일 안쪽 침대에 있어서 걔네가 날 못 봤었어. 있는 줄 알았어도 똑같았겠지만. 그래서 유일한 목격자가 된 거야. 미샤가 아무한테도 얘기 못하게 했거든. ”

 

“ 왜?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났는데도? ”

 

“ 몰라. 귀찮아서 그랬겠지. 위에 불려가는 걸 제일 싫어했으니까. ”

 

“ 마루샤가 퇴학당할까봐 그랬을지도 모르죠. ”

 

“ 글쎄요, 귀찮아서 그런 거였으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 같아요. 사람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으면서 걱정해주는 건 더 나쁘니까. 걘 그걸 이해 못해요. 아마 지금도 모를 걸요. ”

 

 

트로이는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아마 지나이다는 그가 이해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 그래서, 지나샤, 어떻게 됐어? 아가씨는 진정했어? ”

 

“ 절대 진정 안하지. 사춘기 여자앤데. 뭐 내가 재우긴 했어. 따귀 두어 대 갈긴 다음에 보드카를 우유컵에 가득 채워 먹였거든. 바보는 캐비닛에서 약이랑 붕대 꺼내서 자기 혼자 치료하고. ”

 

“ 그땐 둘이 같이 추기 전이었나요? ”

 

“ 그때까진 그랬죠. 며칠 후에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우릴 파트너로 엮었어요. ”

 

 

지나이다는 접시 위에 쌓여 있는 초콜릿과 캔디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 난 걔랑 같이 추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일을 목격하고서 파트너가 되고 싶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운 나쁘면 광팬한테 습격당할 거고 더 나쁘면 나도 마루샤처럼 그 바보한테 빠졌다가 돌아버릴까 봐 겁났어요. 아니, 당신 그런 생각하지 마. 같이 해보니까 저게 완전히 바보란 걸 알게 돼서 반할 일이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

 

“ 아니, 뭐... 내가 무슨 그런 생각을 했다고. 설사 그랬다 해도 어릴 때야 다들 짝꿍에게 반하니까 난 이해해. ”

 

 

지나이다는 약혼자의 살짝 질투어린 시선을 무시했다. 그녀는 트로이를 향해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 난 걔한테 그대로 얘기했어요. ‘너랑 같이 추기 싫어, 마루샤처럼 되고 싶지 않아.’ 라고. 그러니까 그 바보가 자기는 나와 같이 추고 싶다는 거예요. 전부터 그랬다나.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지금도 그대로 기억나요. ‘여자애들 중에서 네가 가장 뛰어나. 무대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 절대음감은 아니지만 음악도 잘 따라가고. 절대 겁먹지도 않잖아.’ 근데 난 그 말에 또 발끈해서 ‘절대음감이 아니라는 건 뭐야, 그럼 넌 그렇다는 거야?’ 라고 화를 냈어요. 그러니까 그 건방진 게 자기는 그렇다는 거예요! ”

 

 

카라바노프가 아는 척하면서 끼어들었다.

 

 

“ 그 절대음감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긴 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

 

“ 아, 바보가 거기 아주 가깝긴 해. 뭐든지 한번 들으면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어. 악보도 그려줄 수 있고. 지금 이 잔 부딪치는 소리도 무슨 음인지 정확히 잡아줄 수 있을 걸. 근데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정말 재수 없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지, 너 갈수록 건방지고 재수 없어진다고. 우린 1학년 때부터 같이 수업 들어서 친하긴 했지만 파트너로 춰본 적은 없었거든. 걘 나보다 훨씬 빨리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반으로 옮겼으니까. 어쨌든 걔는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묻더라고, ‘나랑 추는 게 싫은 이유가 건방지고 재수 없어서야? 그게 그렇게 중요해?’ 라고. 근데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그렇게 출 수 있는 애는 학교에 걔 하나 밖에 없는데. 선배들도 그렇게 추진 못했어. 극장에는 너 같은 게 널렸을 테니 지금에나 실컷 잘난 척하라고 해주긴 했지만 사실 그때도 알았어. 극장에 와도 그 바보처럼 추는 사람은 없으리란 거. 그래서 그냥 같이 추기 시작한 거야. ”

 

“ 전혀 로맨스는 없었던 거야? ”

 

“ 없었다니까. 저 바보가 춤이라도 잘 춰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까지 멀쩡하게 걸어 다니지도 못했을걸. 주변에 마루샤 같은 추종자들이 한둘이어야지. 바보는 지금도 마루샤가 왜 자기한테 그렇게 굴었는지 이해 못 할 거야. ”

 

 

지나이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몸이 결리는지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길게 뻗으며 유연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 이제 그만 마셔, 마르크. 벌써 한 시가 다 돼 가는데 저 가방들은 옮겨놔야지. 나 내일도 오전에 리허설 있어. ”

 

“ 그럼 얼른 자. 내가 지금 차로 옮길게. ”

 

“ 당신도 바보라고 불리고 싶어? 보드카를 그렇게 바닥내놓고 차를 몰 생각을 하다니!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 짐이나 옮겨. ”

 

 

여왕에게 복종하는 신하처럼 카라바노프가 절을 하면서 거실에 내놓았던 트렁크들을 가지러 갔다. 지나이다가 트로이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 자고 가요, 많이 늦었는데. 마르크만큼 마셨잖아요. 버스도 이제 없고. ”

 

“ 괜찮아요, 걸어가도 30분 정도 밖에 안 걸려요. ”

 

“ 미샤 옆방에도 침대 있어요. 2층 침실도.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가 돌아간 후로 그 방 비어 있거든요. ”

 

 

그녀는 거실 쪽을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였다.

 

 

“ 저 바보를 혼자 두고 나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남아주면 좋겠어요. ”

 

 

트로이는 그녀의 녹색 눈과 단정하게 다물어진 입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단호하고 명쾌한 여왕 같은 모습 너머로 병원 복도에 엎드려 울부짖던 고통스러운 얼굴이 겹쳐져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그는 조용히 물었다.

 

 

“ 전에도 그런 적 있었어요? ”

 

“ 뭐가요? 마루샤? ”

 

“ 아니, 유럽 호텔. ”

 

“ 바보가 얘기 안하는 걸 내가 얘기할 필요는 없죠. ”

 

“ 당신에겐 아무 얘기 안 해요? ”

 

“ 무슨 얘기? ”

 

“ 왜 그랬다든지... ”

 

“ 절대. 바보라고 했잖아요. 난 농담한 게 아니에요, 춤이라도 잘 춰서 다행이에요. 쟤한텐 그것 하나 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자기 춤을 안 믿어요. 그냥 믿으면 되는데. 아무 것도 안 믿어요. 멍청이. 파리에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런던에라도... ”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창백해지면서 입을 막았다.

 

 

“ 아, 잊어버려요. 취했나봐. ”

 

“ 미샤가 로쉬 얘길 했나보죠? ”

 

 

지나이다가 웃었다. 그 매끄럽고 완벽하며 아름다운 얼굴에 갑작스럽게 주름이 지면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아뇨, 걔가 그런 말을 파트너에게 감히 어떻게 하겠어요. 우린 그런 말 절대 안 해요. 내가 디나에게 걔 방 열쇠를 줬어요. 난 디나가 걜 자기들 쪽으로 데려가길 바랐죠. 이제 지금 했던 말 다 잊어요. 편하게 자고 가세요, 내일 아침 열 시까지 바보가 안 일어나면 꼭 깨워주세요. 감독 면담에 가야 할 테니까. ”

 

 

그녀는 트로이의 어깨를 잡아당겨 고개를 낮추게 한 후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약혼자와 함께 아파트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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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샤에 대해 미샤와 지나의 후배 니넬이 늘어놓은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842

 

 

파리의 프리마 발레리나 디나 로쉬와 미샤의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040

 

 

마루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트로이가 떠올린 레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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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예전에 발췌했던 에피소드 중에 아파트 수도관이 터져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친구인 트로이의 집으로 피신 온 미샤의 이야기가 있었다. 두 토막으로 나누어 올렸는데 하나는 흠뻑 젖은 미샤가 트로이네 집으로 오는 이야기였고 다음 얘기는 잠든 미샤를 바라보는 트로이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5524 (수도관 터진 날, 푸쉬킨,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http://tveye.tistory.com/5783 (깊은 잠, 멈춘 육체)



그 파트는 사실 트로이와 미샤가 처음으로 밤을 보내고 육체적 관계를 맺는 순간을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행복한 순간이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그 직후의 이야기이다(공개 블로그라 자기 검열에 의해 둘의 불꽃튀는-ㅋㅋ- 장면은 건너뜀) 덜컥 관계를 맺어버린 후 트로이와 미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사실 내겐 그들의 잠자리보다 이 순간이 더 중요했다.



실지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이야기와 단어와 표현조차 그 순간의 트로이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샤라면, 그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농담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작가로서의 나는 오직 그의 말만을 믿을 수 있다. 웬 횡설수설이냐고?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작가란 거짓말쟁이이며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발췌한 에피소드 아래에는 이 글을 쓰던 당시 내가 사적으로 남겼던 메모를 첨부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한참 후 미샤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팔에서 빠져나갔다. 침대에서 내려가 방을 나갔다. 트로이는 잠깐 동안 어둠 속에 누운 채 두려움에 잠겼다. 그가 떠나 버릴까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 두려움이 너무 생생하고 강렬해서 어지럽고 욕지기가 났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일어나 침실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갔다.



 미샤는 가버린 게 아니었다. 그는 부엌에 있었다. 식탁 구석에 오랫동안 놓여 있던 미지근한 과일주스를 팩 째로 마시고 있었다. 달착지근한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 애였으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트로이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안을 뒤져 맥주 한 병을 찾아냈다. 막 뚜껑을 따고 들이키려는데 미샤가 병을 빼앗아 크게 두 모금 마시고 돌려주었다. 트로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 넌 마시지 마. ”



 “ 왜? 미성년자도 아닌데. ”



 “ 찬바람 맞고 왔잖아. 투어도 가야 한다면서. ”



 “ 폐렴에라도 걸릴까봐? ”



 트로이가 맥주 대신 물을 따라 주자 미샤는 컵을 들고 침실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술병을 거꾸로 들어 끝까지 다 마셨다. 차가운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까지 단숨에 흘러내려갔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침실로 갔다. 차가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미샤는 모포를 찾아내 몸에 두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벽에 기댄 채 넓은 침대에 앉아 있는 미샤는 더 이상 격렬하게 그를 포옹할 때처럼 대담하고 강해 보이지 않았다. 사원을 기어오르던 악마도, 끝없이 그를 몰아대며 끌어당기던 젊은 폭군도 사라졌다. 부스스하게 뒤엉켜 사방으로 치솟은 검은 머리칼을 갸름한 얼굴 주위로 종려나무 잎사귀처럼 드리운 채 보풀 어린 모포로 어깨를 감싸고 사춘기 소년처럼 사지를 늘어뜨리고 앉아 트로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 어둠 속의 고양이처럼 세로로 길게 빛나고 있었다. 트로이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어깨를 안고 베개 위로 눕혔다.



 미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이런 거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



 길 잃은 아이처럼 우울한 목소리였다. 미샤는 베개에 이마와 눈을 파묻고 몸을 웅크렸다.




 충격을 받은 게 당연해. 무경험, 친구의 배신, 충격.


 아니, 사회 윤리와 법률 위반도 있지. 발각되면 체포당할 짓이니까. 넌 항상 그런 규율과 질서를 경멸하는 것처럼 굴지. 하지만 어쩌면 넌 그렇게 강하지 않을지도 몰라.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되었어도 마찬가지야. 넌 아직 애에 지나지 않아. 얕보이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는 애. 그런 상황을 거부할 용기가 없는 어린애. 그건 강간이나 마찬가지였을지도 몰라. 내가 그렇게 한 거야.




 트로이는 공포를 억누르려고 애쓰며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네 잘못이 아냐. 내가 그런 거니까. 넌 아무 것도 몰랐잖아. ”




 “ 네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 ”



 알리사와 마찬가지였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알아차린 것이다. 미샤는 언제부터 알았던 걸까?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알리사는 조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의 표정과 태도 전체에 선명하게 낙인이 찍혀 드러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오랫동안 감추려고 애썼는데.



 미샤가 눈을 들어 충격에 잠긴 트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다른 애들은 모를 거야. 난 같이 자는 남자들이 많아. 보면 알아. ”



 “ 그럼 다른 것도 알았어?"



 그는 차마 ‘내가 널 원했던 것도 알았어?’ 라고 대놓고 묻지 못했다. 다시 두려움이 솟구쳤다.



 “ 몰랐어. 알고 싶지 않았어. 어쨌든 너와는 자고 싶지 않았어. ”




 “ 교회 첨탑 같아서? ”



 트로이는 억지로 농담을 짜냈다. 미샤는 웃지도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 파트너나 친구와는 자는 게 아니니까. 신뢰가 사라지잖아. ”



 “ 난 나보다 널 더 믿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



 “ 네가 그렇다는 건 알아. ”



 미샤는 그의 얼굴에 뺨을 마주대고 여전히 우울하게 말했다.



 “ 파트너는 바꿀 수 있어. 친구는 그게 안 돼. 내게 친구는 너 하나 밖에 없어. ”



 “ 주위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쩌고. 극장 동기들은, 이고리는, 타냐는? ”



 “ 친구는 잘 사귀지 못해. 난 사람들을 믿지 않아. ”



 처음으로 트로이는 미샤의 완벽하게 서늘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너머로 깊게 일그러지고 오그라든 어둠을 보았다. 어둠. 불. 추락. 크세니야가 했던 말. 불을 뿜으며 떨어지는 아이. 모스크바 역 좁은 의자에 앉아 공포에 질려 있던 소년.



 “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데. ”



 그는 심각하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팔 안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미샤의 몸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 세상이란 게 뭔데. 소비에트 연방?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




 
 그는 키로프라고 하지 않고 마린스키라고 했다. 레닌그라드 대신 페테르부르크라고 얘기한 것처럼.



 “ 우리 주위의 모든 것. 전부. ”



 “ 레닌그라드.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트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레닌그라드. ”



 그는 미샤가 이 도시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에 전율했다. 물 위에 돌로 지어진 도시, 학살과 절망의 도시, 피와 바람의 도시, 허위와 모방의 역사로 가득 찬 옛 수도, 이제는 모스크바의 광휘에 밀려나 퇴색하고 있는 도시를 향해 그런 절대적이고 강력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 나하고 레닌그라드는 같을지도 몰라. ”



 미샤는 트로이의 귓가에 입술을 마주 댄 채 따스한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 뿌리가 없어. 돌이킬 수 없이 안이 비었어. 파이프처럼. 운하의 검은 물이 그 안으로 차올랐다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그래서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어. 친구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



 2년 반 전 갈랴의 집에서 만난 이래 미샤는 단 한 번도 트로이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그럼 나는? ”




 “ 내가 널 잡는 게 아니야, 네가 날 잡아주는 거지. 그래서 나한테는 친구가 너 하나 밖에 없어. 너하고 나는 레닌그라드에 같이 있으니까. ”



 그는 미샤의 말을 절반쯤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지금껏 미샤를 이해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있어 미샤 야스민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곤 깊은 사랑과 욕망뿐이었다.



 가슴을 에는 듯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며 안드레이 트로이츠키가 조용히 물었다.



 “ 누구든 사랑해본 적이 있어? ”



 “ 같이 자는 남자들은 많아. ”



 미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트로이의 목을 껴안고 따뜻하게 데워진 몸을 바짝 밀어붙였다. 한쪽 다리를 들어 트로이의 허리를 감았다. 엷은 갈색 털이 성기게 돋아난 트로이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애무하듯 쓸어내리며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키스를 잠시 멈췄을 때 미샤가 입술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 좀 안아줘, 안드레이. 한번만 더 해줘. ”



 절망적이고 쓸쓸한 목소리였다. 불을 뿜으며 떨어지는 아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생명체. 낯선 인간. 하지만 트로이는 더 이상 그게 새로 온 존재인지 그들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좀 안아줘, 안드레이. 한번만 더 해줘란 말과 ‘안드레이, 나 좀 잡아줘. 잠시만’ 이란 말이 똑같은 울림과 똑같은 깊이로 밀려나온다는 것뿐이었다. 파이프에서 검은 물이 빠져나오듯, 그렇게.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시트가 말려 올라간 매트리스 위를 구르며 다시 사랑을 나눴다. 아침이 되었을 때 트로이는 면도도 하지 않고 강의 노트를 챙겨 학교에 나갔다. 그가 나갈 때 미샤는 기침을 하면서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파이프가 터져 엉망이 되었던 아파트는 예상 외로 다음날 곧 복구되었다, 레오니드 핀스키가 아는 수리공에게 보드카를 뇌물로 주며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샤는 3일 후 키예프로 투어를 떠날 때까지 트로이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







<2012년 가을의 메모 - 이 소설을 쓰던 무렵>




요즘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텅 빈 일종의 파이프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끔은 그 파이프 안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와 위아래, 양옆으로 물결치는 것 같다. 그 물은 아주 차갑고 아주 검다. 주로 밤에 그렇다. 원래 밤이란 건 그런 시간이다. 


 
옛날에도 가끔 우울증에 시달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나 자신이나 주변과 타협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면서 훨씬 나아졌다. 그런데 그건 사실 해결의 기술이 아니라 회피의 기술이다. 파이프에는 별 도움이 안된다.
 


오래 전 글을 쓸 때, 그리고 최근 다시 글을 쓰게 되었을 때, 난 동일한 인물의 입을 빌어서 한 인물의 내부와 외부에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하며 거기에는 어떤 정점도 어떤 바닥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고 우울한 일인지 이야기했다. 난 그 느낌을 안다. 그건 파이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인물은 파이프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난 그 느낌을 안다. 


 
어쩌면 내가 다시 글을 쓰기로 했을때 비슷한 성향이지만 훨씬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던 다른 인물, 이미 정교한 플롯이 짜여져 있던 다른 이야기를 되살리는 대신 그 음울하고 고통스런 인물을 데려온 것은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은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치기로 한다. 재능을 배신하고 열망을 버린다. 다른 세계로 옮아간다. 그건 기만이며 일종의 회피, 비겁한 행위이다. 딱히 살아남기 위한 열정에서 나온 회피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말로 나쁜 건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지금껏 내가 만들어냈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더. 물론 나는 그와 같은 재능이나 매력을 갖춘 예술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


 
어쨌든 파이프가 되는 건 우울한 일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건 더욱 그렇다.



2012.10.19




..








* 사진들은 모두 작년 여름과 겨울에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것. 마지막 사진은 푸쉬킨 동상.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7. 3. 20. 22:15

모스크바 요양소, 재판 about writing2017. 3. 20. 22:15

 

 

아래 발췌한 글은 이전에 가끔 올렸던 미샤의 수용소 이야기 일부이다. 소설은 레닌그라드 수용소의 1부, 모스크바 요양소의 2,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수용소 간수 흘레브니코프, 2부는 미샤의 후원자인 정치가 게오르기 벨스키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고 3부는 미샤의 친구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한다. 1~3부 모두 토막토막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아래 글은 2부의 거의 도입부이다. '거의'라는 말을 쓴 이유는 이 앞에 벨스키와 요양소장이 나누는 대화가 몇장 있기 때문이다. 유력한 정치가이자 미샤의 예술적 후원자 중 하나인 게오르기 벨스키가 미샤의 병실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들이다.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는 벨스키의 이름과 부칭이다.

 

게르만 알렉세예비치는 스비제르스키의 이름과 부칭이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전에 여러번 발췌한 적이 있다. 역시 정치가로 미샤의 후원자이며 벨스키와는 달리 미샤와 끈끈하고 격렬한 관계를 맺고 있다.

 

러시아 이름과 부칭을 함께 부르면 존칭의 의미가 된다.

 

 

..

 

 

내가 그를 수용소에 보내고 어둠 속으로 밀어넣고 고통을 겪게 한 것은 그때 그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그때 써야 했던 것이 그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접근방법은 무수하게 달라질 수 있다. 문체도, 시점도, 심지어 사건이나 플롯, 슈젯조차도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직은.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햇살이 밝고 뜨거운 여름 오후였지만 병실은 서늘했고 어둑어둑했다. 창문은 커튼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고 불도 꺼져 있었다. 모이세예프는 스위치를 올려 천정의 등을 켰다. 밝은 빛이 몰려들어오자 담당 의사인 올가 파나예바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지만 벨스키 쪽을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이세예프는 곧 나갔지만 파나예바는 병실에 남아 있고 싶어 했다. 벨스키가 단독 면담이 필요하다고 얘기하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파나예바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 10분. 더는 안 됩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앉거나 피부 접촉을 하지 마세요. 심문이 아니라 순수한 면담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허가해 드리는 겁니다. 다그치거나 소리를 지르셔도 안 됩니다. 아직 정상이 아니에요. 저는 문 밖에 있을 테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부르세요. ”

 

 

 게오르기 벨스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파나예바를 응시했다. 그녀는 일반적인 의사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아픈 자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굴었다. 하긴 이전에도 미샤는 많은 여자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으므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심지어 벨스키의 아내도 미샤를 좋아했다. 미샤가 볼쇼이에서 춤췄던 77년에는 한 달에 두 번 가량은 그를 집으로 불렀고 직접 저녁을 만들어 먹이기까지 했다. 정작 친아들 두 명에게는 그렇게 살갑게 대한 적이 없었으므로 벨스키는 그녀가 뒤늦게 젊은 무용수를 향한 사랑에 빠졌다고 놀리곤 했었다.

 

 

 “ 당신은 이해 못해요. 걔에게는 엄마처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제대로 된 가족의 사랑도 못 받고 컸으니 안됐잖아요. ”

 

 “ 레닌그라드에 어머니가 있는데. ”

 

 “ 어릴 때부터 기숙학교에 있었잖아요. 형제도 없고. ”

 

 

 그는 아내가 이번 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는 크레믈린이나 정치국,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결코 집에서 말을 꺼내지 않았고 아내도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거나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아내가 분명히 한 마디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심지어 벨스키는 그녀가 낮게 숨을 몰아쉬며 ‘오, 이 가엾은 것. 어쩌면 좋아’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얼핏 들었던 것 같았지만 물론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

 

 

 파나예바는 거의 연극적 제스처에 가까울 정도로 두드러지게 손목을 들어 올려 시계를 보더니 병실을 나갔다. 그녀는 문을 닫지도 않았다. 아마도 고의적이었을 테지만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이세예프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문을 밀어 닫았다.

 

 

 미샤는 몸을 반쯤 일으킨 채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벨스키가 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문가 쪽으로는 눈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침대 등받이가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데다 가슴에 띠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보니 스스로 몸을 일으킨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마비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자세를 바꿔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는 모포에 덮여 보이지 않았지만 윤곽을 보니 왼쪽 무릎을 세우고 있는 듯 했다.

 

 

 벨스키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이름을 불렀을 때에도 미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이름과 성을 함께 부르자 미샤가 어깨를 희미하게 움찔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벨스키는 굳이 모이세예프나 파나예바의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미샤가 어떤 모습일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전에도 약물 쇼크를 일으켜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던 환자를 본 적이 있었다. 게다가 사진. 그 문제의 사진이 있었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 그는 눈을 감고 있었고 전혀 의식이 없었다. 벨스키는 차라리 사진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완전히 텅 비고 초점이 없는 눈을 마주하자 잠깐 욕지기가 일었다.

 

 

 “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군. 날 알아보겠나? ”

 

 “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

 

 

 미샤가 그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말을 한다기보다는 음절을 조약돌처럼 내뱉었지만 그렇게 끔찍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여전히 나직하고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했다. 다만 훨씬 작고 약하게 속삭였을 뿐이었다. 스카프를 입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 그래도 눈이 보이긴 하는 것 같군. 다행인데. ”

 

 

 “ 목소리를 아니까요. ”

 

 

 미샤가 벨스키 쪽으로 몸을 좀 더 돌렸다. 느리게 감기 버튼을 눌러놓은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세워 똑바로 앉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벨스키는 어깨를 잡아주려다 파나예바의 경고를 떠올리고 한 발짝 물러나 의자에 앉았다.

 

 

 “ 아니, 그냥 기대 있는 게 좋겠는데. 의사가 억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하더군. ”

 

 

 미샤는 그 말을 무시하고 결국 똑바로 일어나 앉았다. 무리한 움직임 때문에 창백했던 얼굴에 희미한 핏기가 돌았지만 곧 사라졌다. 벨스키는 침대에 고정된 띠가 가슴을 팽팽하게 압박할 것을 우려해 고리를 풀어주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이 너무 야위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띠에서 그대로 빠져나와 바닥에 내려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왜 오신 거죠? ”

 

 

 심지어 그런 상황에서도 미샤 야스민은 여전히 단도직입적이었다. 벨스키는 총살대나 전기의자에 끌려가도 그런 식으로 굴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최근 그가 받았던 약물 교화를 생각하며 말을 바꿨다.

 

 

 “ 모이세예프가 아무 말 안 해주던가? ”

 

 “ 그게 누구죠? ”

 

 “ 여기 소장. ”

 

 “ 소장 이름은 글루크인데. ”

 

 

 벨스키는 잠시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여긴 레닌그라드가 아니야. 일주일 전에 모스크바로 옮겨왔잖아. 수용소가 아니라 요양소야. 기억 안 나나?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여자는 자네 담당 의사고. ”

 

 “ 올가예요. ”

 

 

 미샤가 잘못된 문법을 정정해 주듯 참을성 있고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 그래, 올가. 글루크의 수용소에 여의사가 있을 리가 없잖아. ”

 

 “ 왜 모스크바에 와 있지? ”

 

 

 미샤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오른손을 이마에 갖다 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무대 위에서 발레리나를 상대로 마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벨스키는 그의 왼팔이 아무런 힘도 없이 베개 위에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모이세예프가 마비 증세에 대해 꽤 교묘하게 설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른팔은 제대로 쓸 수 있다고 했지만 왼쪽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다리를 움직일 수는 있지만 일어서거나 걷지는 못한다고 했다. 아마 혼자서 몸을 완전히 뒤집을 수도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 자네 아주 아팠었어. 며칠 의식이 없었지. 스비제르스키 의원이 센터에 들렀다가 그걸 보고 이쪽으로 옮긴 거고. 그 얘기는 못 들었나? ”

 

 

 그 이름을 듣자 미샤가 눈에 띄게 몸을 움츠렸다. 멍하게 눈을 깜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꿈이었던 것 같은데. ”

 

 “ 혼수상태였으니까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

 

 “ 함께 오셨어요? ”

 

 “ 아니. 게르만 알렉세예비치가 오는 편이 더 좋았을까? ”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팽팽하게 당겨졌던 입술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니 안도한 것 같았다. 벨스키는 그 건방진 젊은이가 누군가를 두려워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기색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는.

 

 

 “ 왜 오셨어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 ”

 

 “ 파리 때문에. 그 외 다른 문제도. ”

 

 “ 파리? 모스크바라고 하셨잖아요. ”

 

 

 벨스키는 언제까지 미샤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머릿속에 간단하게 정보들을 밀어 넣기로 했다.

 

 

 “ 여기 오기 전에. 글루크가 있는 수용소에 가기 전에. 파리에 갔었잖아. 그 니진스키 트리뷰트 때문에. 그 전에는 뉴욕에 갔었고. 자네 그 파리에서 도망쳤었잖아. 그래서 문제가 생겼지. 돌아와서 재판 받았잖아, 그래서 그 수용소로 보낸 거고. ”

 

 

 미샤가 오른손을 뻗어 허공을 두어 차례 휘저었다.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볍게 흔들자 거무스름한 멍들로 뒤덮인 목덜미가 드러났다. 맞아서 생긴 상처 같지는 않았다. 그곳을 맞았다면 쇄골이 부러졌을 터였다.

 

 

 “ 도망치지 않았어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러 갔었을 뿐이에요. ”

 

 

 갑작스럽게 미샤가 아주 또렷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비공개 재판에서도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를 변호하려고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미샤는 직접 변론을 했다. 극장 동료들 몇몇이 유리한 증언을 해주려고 자원했지만 모두 자격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참석을 금지 당했다. 벨스키는 그 재판의 일지와 보고서를 훑어보았지만 중간 쯤 읽다가 그만두었다. 미샤의 변론 대부분에는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나마 끝까지 이어지지도 않았다. 재판관이 그의 발언을 중단시킨 후 휴정을 선언했고 30분 만에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벨스키는 그런 종류의 재판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 도망친 거였다면 지금 여기 있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기억이 되살아난 것 같군. 자네 소환됐을 때 파리에서 시끌시끌했던 건 생각나나? 호텔 앞부터 공항까지 피켓 시위자들이 몰렸었지. 기자들도. 자네 가고 나서 그 시위가 좀 커졌거든. 게다가 이상한 오해가 생겼지. 헛소문이 퍼져서 상황이 좋지 않았어. ”

 

 “ 무슨 소문이요? ”

 

 “ 뻔하잖아. 자넬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처박았다는 얘기. 벌써 루뱐카에서 총살했다는 얘기.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들. ”

 

 “ 그게 제국주의자들 입맛에 맞는 얘기예요? ”

 

 

 미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몸을 가누기가 힘든 듯 점점 어깨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볼품없이 들쭉날쭉 잘린 검은 머리칼이 한 움큼 이마 위로 흘러내려왔다.

 

 

..

 

 

 

 

 

 

이 면회 후반부의 대화를 약간 발췌한 적이 있다. 그건 여기 :

http://tveye.tistory.com/5589 (체제의 이름, 비행사, 천사 이름 붙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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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 사진은 프라하 성 이르지 성당. (성 게오르기)

아래 사진은 프라하 아녜슈카 성당 사진. 둘다 작년에 내가 찍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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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8. 21:05

나는 그의 말투로 시작했다 about writing2017. 3. 8. 21:05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풍경. 예전의 레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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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 귓가에 조용히 닿았다가 아무런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목소리. 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흠잡을 데 없이 예의바르고 차분한 태도, 그러나 어쩐지 부아가 치밀게 만드는 어조. 어쩌면 음성학 수업에서나 들을 법한 정확하고 모범적인 발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0여 년 동안 나는 그가 부정확한 어휘를 쓰거나 문법적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무용수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아마 레닌그라드 토박이라서 그럴 것이다. 방송국에서 일했던 그의 아버지나 교정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을 테지만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다. 사실 미샤가 나 외의 그 누구에게든 자기 부모 이야기를 꺼낸 적이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선동 죄목으로 죽은 가족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 2012년 9월, Fr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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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단편의 이 문단으로 시작했다. 앞부분에는 생략된 대화가 몇 줄 있다.


어떤 글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동시에 첫 단어와 문장과 문단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심장을 조이고 또 흥분시키는 일도 거의 없다.


지금은 다른 글을 쓰고 있지만 어느 정도 궤도를 찾으면 나는 저 본편의 우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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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5. 20:01

모스크바에 있는 것들, 오직 불길 about writing2017. 3. 5. 20:01






아래 글은 체포된 후 약물 고문으로 피폐해진 미샤가 수용소 클리닉에서 절친한 사이인 스타니슬라프 일린과 면회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예전에 이 소설 일부들을 여러번 발췌해 올렸었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샤와 일린의 면회는 마지막 3부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모스크바 토박이이자 그 도시의 대표 극장인 볼쇼이 극장에서 무용수 노릇을 하다 안무가가 된 일린과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토박이이며 역시 그곳 대표 극장인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의 간판 무용수였던 미샤의 대화이기도 하다.



벨스키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모두 미샤를 후원하던 공산당 고위 간부이다. 전자는 미샤를 수용소에서 빼내 가브릴로프로 보내는 인물이고 후자는 오랫동안 미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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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와 일린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볼쇼이, 트레치야코프, 므하트, 아르바트는 모두 모스크바의 명소들이다. 볼쇼이는 다들 아는 그 볼쇼이 극장, 트레치야코프는 미술관 이름이고(여기에 브루벨의 백조공주가 있다) 므하트는 모스크바 예술극장(Московский Художествен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Театр)의 약자이다. 유명한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창립한 극장이다. 아르바트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젊음의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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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병을 집어 남은 물을 한 모금 마셨지만 전부 삼키지는 못했다. 바닥에 반쯤 뱉어버렸다. 에어컨을 꺼 주자 한기가 덜한 듯 목과 어깨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었다. 아니면 더워서 그랬던 건지도 몰랐다. 열 때문에 추웠다 더웠다 하는 것 같았다. 눈의 광채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몇 초 사이에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기 때문에 나는 소파로 가서 그 애의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 여기 의사들도 알아? ”


 
 “ 뭘? ”


 
 “ 아무 약이나 주면 안 되는 거. ”
 


 “ 아는 것 같아. ”


 
 “ 다 말해. 그 올가란 여자에게. 아픈 데 있으면 전부. 약 먹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데 있으면 무조건 얘기하고. 고집 부리지 마. 벨스키에게 들었어, 회복돼야 내보내준다고 했어. ”
 


 “ 친절한 분이시군, 조건을 하나만 걸어놓으신 것처럼 얘기하시다니. ”
 


 “ 가브릴로프 얘기도 들었어. ”
 


 “ 아. 그건 조건이 아니고 벨스키가 결정해놓은 거야. 그 사람은 가을부터 극장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벌써 내년 행사 미션까지 줬어. 거기 가 봤어? ”
 


“  아니. 전에 이그나트가 가봤다고 했어. 좋았다고 했어, 한적하고 공기도 좋고. 온천도 있을지도 몰라. 회복하기엔 좋을 거야. 좀 쉰다고 생각해.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야. ”
 


 “ 어디로? ”


 
 “ 글쎄. 모스크바는 아직도 싫어? ”


 
 “ 거긴 충분히 있었어. ”


 
 “ 겨우 일 년 있었으면서. 모스크바도 좋은데. ”


 
 “ 그건 네가 거기서 태어났으니까 그렇지. ”


 
 “ 그럼 넌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서 거길 좋아하는 거야? 정말 간단한 이유네. ”


 
 “ 그럴지도. ”


 


 미샤의 창백한 얼굴에 잠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고집쟁이, 언제나 한결같고 견고한 마음을 가진 그 애가 사랑하는 도시, 돌아가고 싶은 유일한 도시가 거기 있다는 것을. 그 애를 파리에 남지 못하게 했던 유일한 이유. 물과 돌의 도시,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안개를 딛고 세워진 도시, 네바 강과 발트 해, 그림자와 습기 사이에서 부유하는 도시, 환영으로 축조된 도시.


 
 그 애가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벨스키가 어떤 식으로 반대파들을 요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높은 분들에게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을 테니까. 그는 미샤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수용소에서 풀려날 거라고, 하지만 재판 결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레닌그라드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 한동안 연금될 거라고 말했다. 그건 추방 조치나 다름없었다. 그가 미샤를 구해준 것은 맞다, 아마 다른 의원들 몇몇이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그 애의 오래된 후원자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권력자들. 
 


 그러나 아무리 벨스키와 스비제르스키, 그 외의 많은 의원들이 미샤를 강력하게 후원했다 해도 해외에서 그토록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애를 구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자들에게 있어 일개 예술가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하잘것없는 대상일 뿐.
 


 미샤가 옳았다.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사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미샤는 언제나 옳았다. 그 애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몸서리치게 싫어하고 증오했던 것처럼.
 




 벨스키의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 마음 속을 꽉 채웠던 것은 미샤의 상태에 대한 걱정도, 그 애의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한 분노였다. 스비제르스키는 그 애가 체포되어 그 불공정하고 더러운 재판을 받도록, 가혹하게 과장된 죄목들을 뒤집어쓰도록, 그 끔찍한 정신병자 수용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자가 정말 원하기만 했다면 애초부터 그런 재판을 받지 않도록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자는 아직도 KGB와 사법부 쪽으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높으신 분, 정치국 위원, 무소불위의 권력자 의원께서는 고개를 돌렸고 그럼으로써 그놈들이 마음 놓고 더러운 짓을 할 수 있도록 묵인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자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 애에게 그 정도로 심한 판결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벨스키도, 다른 의원들과 간부들도, 아니, 그 애의 모든 동료들, 심지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비겁하게 행동했다. 모두가 등을 돌렸고 손을 씻었다. 우리는 뒤늦게 일어났을 뿐이었다. 벨스키가 그 애를 위해 노력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 시위가 없었다면, 그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해외에서 그토록 지속적이고 격렬한 소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역시 계속해서 침묵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비겁자들이었다. 그러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사악하고 더러운 인간, 모든 비겁자들보다 더 지저분하고 더 비열한 인간이었다.




 
 한때 나는 그자가 그토록 오랫동안 미샤를 놔주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 애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랜 적이 있었다. 그 잔혹하고 더러운 학살자 역시 인간이며 내부에는 부드러운 심장이 뛰고 있어서 비밀스러운 애정을 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심기가 불편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샤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스비제르스키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 자존심 강한 애는 충분히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그 애가 스비제르스키의 호출에서 돌아온 직후 모스크바 강을 따라 뛰고 또 뛰는 것을 보았고 창가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가끔은 거울을 주먹으로 치고 또 쳐서 유리 파편이 박히고 피를 흘리는 것을, 또 언젠가는 욕조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럴 때면 그 애는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춤조차 추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두 번, 나는 그 애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내 몰래 병원으로 데려갔다. 지난 5년 동안 두 번. 한 번은 페이퍼 나이프를 썼고 다른 한 번은 스카프를 썼다. 그 애가 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여러 번. 그게 스비제르스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이름이 그 애를 떠밀고 계속해서 길을 잃게 만드는 어둠 속에 존재하는 괴물 중 하나라는 건 알았다. 그자들이 계속해서 그런 짓을 했다. 재판과 판결, 수용소와 고문이 있기 전부터 당과 국가와 체제, 영광과 명예와 의무,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그 애의 심신을 산란하게 하고 고통을 가하고 자꾸만 넘어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건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그저 눈을 돌리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미샤는 그만큼 무심하고 평온한 심장을 가진 애가 아니었다. 그 침착하고 서늘한 태도, 흐트러지지 않는 또렷한 눈빛 너머로는 오직 불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불을, 그 뜨겁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을 단숨에 꺼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공포에 떨었다.



 
 아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 애를 넘어지게 하고 마침내 불을 꺼버리는 그 끔찍한 행렬 맨 앞에 있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것으로 삼고 착취하고 더러운 짓을 하면서. 그런데도 그자는 모른 척했다. 그 애를 자기 수하의 사냥개들에게 그대로 던져주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 음습했던 욕망이 마침내 꺼져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건 비열한 짓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혹은 그런 낭만적인 가장조차 없이 누군가를 지배하고 끊임없는 고통을 가하고 마침내 파괴하고 쓰레기처럼 내버리는 행위보다 더 사악하고 더러운 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그자를 그토록 증오하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미샤를 고발하고 억지 혐의를 씌워 수용소로 보낸 자들보다도, 그 애를 고문하고 거의 죽일 뻔 하고 이런 상태로 만들어놓은 자들보다도 더 증오했다.
 



 
 미샤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모스크바 싫다고 해서 그래? ”

 
“ 모스크바도 좀 좋아해줘. 안 그러면 섭섭할 거야. ”

 
“ 좋아할 이유를 좀 대봐. ”


 
“ 볼쇼이. ”


 
“ 그리고? ”


 
“ 트레치야코프. ”


 
“ 이제 므하트라고 할 거지? ”

 
“ 안 통하는군. 그럼 아르바트. ”


 
“ 그 동네 요즘 재미없어졌어. ”

 
“ 나. ”

 
“ 넌 안 떠날 거야? 끝까지 모스크바에 남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

 
“ 그래. ”

 
“ 그럼 모스크바도 나쁘지 않아.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내게 기댔던 몸을 떼었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맨 위의 사진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그리고 이 사진은 네바 강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배경으로 찍은 페테르부르크 사진. 당시의 레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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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라는 표현은 앞부분에서 일린이 미샤와의 대화를 회상할때 나온 것이다. 전에 이 부분에 대해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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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에피소드의 뒷부분 일부는 예전에 이미 올린 적이 있다.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에 대한 문단이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나는 두어가지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쓰는 순간만 하더라도 저 부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다 쓰고 난 후, 그리고 그 이후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내내 나는 저 부분을 떠올렸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전에 저 부분에 대해 했던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341, http://tveye.tistory.com/2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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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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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예전에 발췌한 이야기 중 미샤와 트로이가 차를 타고 둘이서 모스크바에 가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열리는 세미나의 발제를 맡은 트로이가 어깨 부상 치료를 받아야 하는 미샤와 함께 차를 운전해 모스크바로 가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에서 둘은 중간의 휴게소에 내려 식사를 하고 얘기를 나눴었다. ((http://tveye.tistory.com/3759)

 

아래는 그 후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냥 간단한 이야기이다. 미샤는 치료를 받았고 트로이는 세미나에서 발제를 한다. 그리고 밤에는 같은 방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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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카라바노프는 미샤의 파트너인 지나이다의 약혼자이자 모스크바 대학교 영문과 부교수이다. 트로이와는 일린의 생일 파티에서 알게 되어 친해진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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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는 3일 내내 병원과 치료소에 붙잡혀 있었고 세미나에는 결국 들어와 보지 못했다. 트로이는 병원 일정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그가 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로 실망하지는 않았다.

 

 

행사는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발이 넓은 마르크 카라바노프는 그를 참석자들과 모스크바 대학 지인들에게 두루 소개시켜주었다. 그와 같은 세션에 발제자로 참여한 베를린대학교 교수 카타리나 아펠과 오슬로의 국제 문예연구소 영문학 분과장 에스펜 베르너는 특히 좋은 사람들이었고 발표 내용도 잘 통했다.

 

카라바노프는 그에게 미리 베르너와 대화를 나눌 때는 조심하라고 당부해 두었다. 둔한 트로이조차도 베르너를 감시하고 있는 요원들을 분간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펠은 동맹국가 출신이니 한결 나았다.

 

 

행사 마지막 날에는 참여자들이 모여 가벼운 파티를 했는데 아펠과 베르너는 둘 다 그의 연구 방향과 학위 논문 주제에 대해 큰 흥미를 보였다. 카타리나 아펠은 완벽한 영국식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트로이는 잠깐 알리사를 떠올렸고 그녀가 스파이 출신이 아닌가 하는 뜬금없는 의심에 잠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베르너는 누가 들어도 북유럽계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액센트가 강한 영어를 썼고 무슨 일에든 쉽게 흥분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베르너가 먼저 숙소로 돌아간 후 카라바노프가 그의 곁에 와 앉았다. 잔을 권하며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얼마 전부터 말을 놓고 있었다.

 

 

“ 우리 곧 같은 학교에서 보게 될지도 몰라. 아나톨리 유리예비치가 흔쾌히 추천서를 써주더군. ”

 

“ 스베들로프 교수 얘긴가? ”

 

“ 맞아. 자넬 안다고 했더니 반가워하시더군. 그분이야 정부 일로 워낙 바빠서 요즘 학교에는 자주 안 나오시지만. ”

 

“ 레닌그라드로 옮겨오는 건 여름에? ”

 

“ 아마 그렇겠지. 지나가 모스크바로 올 수는 없으니 내가 가야지. ”

 

 

사랑에 빠진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황홀한 눈으로 여자친구를 떠올리다가 갑자기 우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런데 여름에 결혼하자고 했더니 내년 초까지는 안 된다는 거야. 그나마 여름에 시즌도 없고 휴가도 받지 않느냐고 했더니 무슨 행사도 있고 해외 투어도 있고 올해 가을 겨울은 계속 바빠서 어렵다고 하더군.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도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와중에 새 작품을 할 것도 아니고 올 가을이 특별히 바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네 친구가 다른 작품을 만든다는 거야. ”

 

 

카라바노프는 술잔을 훌쩍 비우더니 정말 속이 타는 듯 서로의 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 정말 지나와 자네 친구 미하일 사이엔 아무 것도 없는 거야? 아는 대로 다 말해줘. 예전에 사귄 것 따윈 괜찮으니까. 요즘엔 자다가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 ”

 

“ 걱정할 필요 없어.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으니까. 그냥 동료야. ”

 

“ 몇 년 째 같이 살고 있는데도? 여름에 내가 집을 구하면 그쪽으로 옮겨오라고 했더니 지나가 결혼 전까지는 싫다고 거절했어. ”

 

“ 지금 집이 극장에서 가까우니까 그렇겠지. 그 거실 봤잖아, 연습하기도 훨씬 편하고. 차라리 자네가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

 

“ 미쳤어? 그래서 한 집에서 지나가 그 디오니소스 같은 자네 친구 팔에 안겨서 춤 연습하는 걸 매일같이 내 눈으로 보라고? ”

 

“ 그건 그냥 일이잖아. 우리가 논문을 쓰고 도서관에 가는 것과 같다고. ”

 

“ 자네가 내 입장이었으면 그런 말 못할 걸. 지나가 그 친구 방으로 가는 상상을 하면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미하일은 너무 사람을 끌어. 원하기만 하면 아무 여자나 다 넘어갈걸. 자네야 친구니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겠지만. ”

 

“ 지나는 아무 여자가 아니고, 미샤는 사귀는 사람이 따로 있어. 지나는 걔 타입도 아니고. ”

 

 

그 말에 카라바노프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미샤에게 애인이 있다는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그의 잔을 채워주며 등을 툭툭 쳤다.

 

 

“ 그건 그렇고 카타리나가 자넬 베를린으로 데려가고 싶어 하던데. 연구직 자리가 하나 빈대. 아마 나중에 따로 연락할 거야. ”

 

 

트로이는 카라바노프가 취했다고 생각하며 웃어넘겼다.

 

 

 

...

 

 

 

트로이가 밤늦게 호텔로 돌아왔을 때 미샤는 이미 자고 있었다. 나이트 테이블 위에는 엑스레이 사진과 처방전으로 추정되는 접힌 종이와 연고가 팽팽하게 채워져 있는 튜브, 이번에는 노란색 알약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플라스틱 케이스와 불규칙하게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는 6월 달력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붕대는 감고 있지 않았지만 왼쪽 어깨 여기저기에 각종 검사와 치료로 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목덜미에서 가슴으로 나 있는 흉터가 램프 불빛 때문인지 평소보다 눈에 띄었다. 베개와 뺨 사이에 얇은 노트가 구겨진 채 처박혀 있었다.

 

 

트로이는 조심스럽게 노트를 빼내 주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종류의 노트였다. 펼쳐진 페이지 상단에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로 발레 동작과 음악에 대한 메모가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중간부터는 검정 볼펜으로 휘갈긴 문장들이 몇 개 있었다. 잉크가 군데군데 뭉쳐져 있었지만 끊긴 흔적은 없었다. 두어 줄을 읽자 트로이는 그게 어디서 온 구절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항구를 따라 걸어가 바다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앉았다, 언덕 너머 석양을 찾아 울고 싶어서.

 

내 곁의 녹슨 쇠막대 위에는 잭 케루악이 앉아 있었지, 우린 나무처럼 빽빽한 기계들에 둘러싸여 영혼에 대해 생각했네, 어둡고 우울하게, 슬픈 눈으로.

 

 

 

그건 알리사가 맨 처음 미샤에게 빌려주었던 필사본 시집에 들어 있던 시였다. 긴스버그의 ‘Sunflower Sutra’였다. 지명이나 단어가 군데군데 빠져 있었고 원문과는 좀 다른 해석도 섞여 있는 것을 보니 미샤가 생각나는 대로 번역해 적은 것 같았다.

 

 

 

강물은 붉은 하늘을 거울처럼 비췄네. 태양이 언덕 위로 저물고 있었어. 그 물결 너머에는 물고기 한 마리 없었고 그 산속에는 어떤 은둔자도 없었지. 다만 우리들 뿐, 습기로 부푼 눈으로 숙취에 절어 강변에 앉아 있는 우리들.

 

저 해바라기 좀 봐, 그가 말했지. 죽은 잿빛의 그림자가 하늘을 등지고 걸려 있었어, 사람처럼 거대한...

 

 

 

 

거기서 번역은 뚝 끊겨 있었다. 잠이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잠시 트로이는 그 뒤에 이어지는 구절들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긴스버그의 비논리적이며 열광적인 산문시들을 제대로 외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생각나는 거라곤 어이없게도 수줍은 여학생 릴랴가 주고 갔던 시집에 들어 있던 연애시의 첫 구절 뿐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머무르고 싶어요

당신의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대고

 

 

 

 

그는 노트를 내려놓고 침대 위에 앉았다. 미샤의 뺨에 입술을 댄 채 머리를 쓸었다. 미샤가 꿈틀거리더니 눈을 반쯤 떴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 결국 못 갔네, 이제 다 끝났지? ”

 

“ 응, 내년에 또 한다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 ”

 

“ 그 오슬로에서 온 바이킹이 발표한 거 얘기해줘. 부다페스트 대학 교수가 얘기한 거랑. 마르크 건 괜찮아. 전에 들었으니까. ”

 

“ 얘기해줄게, 내일. 지금은 자. ”

 

“ 다 깼어. ”

 

 

미샤가 일어나 앉았다. 트로이는 그에게 발표 원고 복사본을 쥐어주고 베르너의 발제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 주었다. 부다페스트 교수의 발표는 그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주제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미샤는 원고를 넘기더니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듯 하품을 하며 그의 어깨에 이마와 뺨을 마주 댔다.

 

 

“ 난 네 글이 더 좋아. 이해가 잘돼. ”

 

“ 그건 네가 날 잘 아니까 그런 거야.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강의 들으면서 맨날 졸아. ”

 

“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학교에도 갈 텐데. 네 강의도 듣고. ”

 

“ 지금도 충분히 무리하고 있어. 몸이 축났잖아. 뭐래? 수술해야 된대? ”

 

“ 아니, 한 달쯤 치료만 잘 받으면 돼. ”

 

“ 그럼 백야 축제 시작하기 전까지 모스크바에 남는 게 낫겠네. ”

 

“ 치료는 레닌그라드에서도 받을 수 있어. ”

 

 

레닌그라드에 돌아가면 다시 일하느라 병원에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게 뻔했지만 트로이는 미샤를 더 괴롭히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면서도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오래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애를 만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유리 아스케로프보다도 더 먼저.

 

 

미샤는 며칠째 이어진 진료 때문에 피곤했는지 사랑을 나누는 대신 그의 팔과 가슴팍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 애의 입술과 목덜미 안쪽에서 흐릿하게 발산되는 야생 꿀 냄새를 맡으면서 트로이는 마르크 카라바노프의 질투 어린 토로를 생각했다.

 

 

지나가 그 친구 방으로 가는 상상을 하면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 미하일은 너무 사람을 끌어. 원하기만 하면 아무 여자나 다 넘어갈걸.

 

 

그토록 사람을 끄는 애가 자신의 팔 안에서 잠들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의지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그와 미샤가 그곳에 함께 있으며 동시에 철저하게 따로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깊은 고통을 느꼈다.

 

 

 

..

 

 

미샤가 수첩에 러시아어로 번역해 끄적거려 놓은 시는 미국의 비트족 시인 앨런 긴스버그(Allen Ginsberg)의 ‘Sunflower Sutra’의 도입부이다. 이 소설에서 긴스버그는 비밀문학 모임 멤버인 미샤와 트로이, 알리사가 모두 좋아하는 시인이다.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임^^;)

 

- 발췌된 시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미샤는 습관대로 지명과 표현들 몇 개를 생략하고 자유롭게 번역하고 있어 이 원문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문이 궁금하신 분들은 Allen Ginsberg의 Sunflower Sutra’로 구글링하시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시 자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만 이 당시 미샤가 떠올릴만한 딱 그런 시라서 인용했었다. (나야 긴스버그 시들 중에서는 howl을 제일 좋아한다. 제일 유명해서라기보다는... howl 3장이 주는 슬픔과 아련한 느낌이 좋아서)

 

 

I walked on the banks of the tincan banana dock and sat down under the huge shade of a Southern Pacific locomotive to look for the sunset over the box house hills and cry. 

 

Jack Kerouac sat beside me on a busted rusty iron pole, companion, we thought the same thoughts of the soul, bleak and blue and sad-eyed, surrounded by the gnarled steel roots of trees of machinery. 

 

The only water on the river mirrored the red sky, sun sank on top of final Frisco peaks, no fish in that stream, no hermit in those mounts, just ourselves rheumy-eyed and hung-over like old bums on the riverbank, tired and wily. 

 

Look at the Sunflower, he said, there was a dead gray shadow against the sky, big as a man, sitting dry on top of a pile of ancient sawdust--

 

(여기 등장하는 잭 케루악은 바로 '그' 잭 케루악'이다. 긴스버그와 케루악, 윌리엄 버로즈 등 비트문학가들끼린 친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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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가 떠올리는 연애시 구절은 학교에서 그를 짝사랑하는 여학생 릴랴가 선물한 통속시집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물론 실재하는 시는 아니고 내가 집어넣었음.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긴스버그 빼고는 물론 다 내가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카타리나 아펠, 에스펜 베르너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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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발췌한 글은 몇년 전 쓴 미샤와 트로이의 장편의 1부 3장의 일부분이다. 1부 3장은 트로이란 인물에 대한 짤막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트로이의 본명.

사미즈다트는 지하 자가출판 문학이다. 검열이 횡행하던 소련 시절 작가들이 지하에서 몰래 인쇄하거나 손으로 써서 돌려 읽던 작품들도 포함된다.

브이소츠키는 소련 시절 음유시인이자 가수인 블라지미르 브이소츠키이다. 우리 나라엔 비소츠키 란 번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남몰래 습작을 한다. 10대 소년 시절부터 모눈 공책에 시를 써 왔고 가끔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완성된 소설은 거의 없다. 피오네르 시절 그는 영웅도시 레닌그라드에 대해, 나치의 폭격에서 청동기사상을 구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날랐던 시민들에 대한 시를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알리사를 제외한 모임 친구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는 친구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될까봐 걱정했던 적이 몇 번 있다. 그의 수많은 시들과 미완성 소설이 적힌 노트들을 들춰보았던 건 알리사 슈로프스카야와 미샤 야스민 뿐이다.


 알리사와는 중고등학교 시절 서로의 습작 노트를 공유하며 토론하던 사이지만 트로이는 항상 알리사가 순수 문학보다는 풍자와 비판을 더 좋아한다는 것과 그녀가 언젠가는 글쓰기를 그만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리사는 대학에 진학한 후 더 이상 습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서와 토론은 여전히 좋아해서 그와 함께 모임을 시작했다. 그녀는 트로이에게 요즘 쓰는 글이 있으면 좀 보여 달라고 습관처럼 말을 걸지만 그는 번역 필사본과 평론, 영문학 수업과 관련된 메모가 아니면 더 이상 알리사에게도 자기 노트를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이 매우 흐릿하며 끈질기게 노력하고 매달려야만 간신히 조그만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불꽃을 가지고 태어나긴 했지만 그건 미지근하고 어둡게 깜박이는 촛불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우울증에 잠겨 한밤중에 네바 강으로 가서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샤 야스민은 알리사와는 완전히 다른 경우다. 그때 트로이는 논문이 잘 풀리지 않아 머리를 식히려고 대청소를 하고 있었다. 미샤는 언제나처럼 불쑥 들렀다가 뒤집혀진 책상 서랍과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상자들 사이에서 펼쳐진 모눈 공책을 발견하고 모든 금서와 사미즈다트 애호가답게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뒤늦게 트로이가 그 재앙을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어 뛰어왔을 때 미샤는 유일하게 깨끗한 공간인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공책을 네 권 째 읽고 있었다. 트로이가 얼굴이 붉어져서 심하게 말을 더듬거리며 공책을 빼앗았을 때 미샤 야스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영어로 쓰면 바깥에서 출판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때 미샤가 시의 내용이나 형태에 대해, 그 무엇보다도 재능에 대해 침묵해 준 것에 대해 트로이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다.


 몇 년 후 미샤 야스민이 드라마 극장 무대에 프로코피예프 음악을 짜깁기한 15분짜리 모던 발레를 안무해 올렸을 때 그는 트로이의 노트에 적혀 있던 시 몇 편을 제멋대로 해체하고 오려붙여 브이소츠키 풍의 발라드를 만들어 에피그라프처럼 삽입했다. 그건 트로이의 생애에서 분명 가장 영광스런 순간 중 하나였다.



 트로이는 여전히 글을 쓴다. 때로는 자신의 문장과 단어와 인물에 홀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따금 그는 사랑의 시를 쓴다. 밤이 지나고 나면 그 자신조차 다시 읽기 부끄러운 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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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겐 오랫동안 쓰지 않고 묻어두었던 여러 소재와 인물들이 있었다. 다시 글을 쓰려고 기억을 되살려내고 노트에 메모를 시작했던 순간만 해도 내가 페테르부르크와 미샤에게 되돌아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거의 당연한 듯, 혹은 마법처럼 그들이 나를 불렀다. 나는 이전에 구상했던 여러가지 플롯들과 소재들을 쭉 적어나가다 자신도 모르게 미샤의 간단한 연혁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왔다. 혹은, 페테르부르크가 되살아났다.


두세달 쯤 후 나는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다. 약 2년 반만에. 그리고 겨울이 아닌 페테르부르크에 다시 간 것은 5년만이었다. 그때 내가 그곳으로 간 것은 글을 다시 쓰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도시를 무척 많이 돌아다녔다. 내게 친숙했던 장소와 7~80년대 레닌그라드의 미샤가 돌아다녔을법한 장소들을 이곳저곳 쏘다녔다. 그것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후 나는 매년 그 도시로 갔다. 운이 좋을땐 일년에 두번, 아니면 최소 한번은 갔다. 다른 아름다운 도시들 대신.


아래 발췌한 글은 트로이와 미샤가 등장하는 그 장편의 후반부 에피소드이다.


이전에 이 이야기의 바로 앞 에피소드도 발췌한 적이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1976년 가을. 몇가지 이유로 두달간의 휴가를 받고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어깨 치료를 받고 온 미샤가 트로이가 강의하는 학교(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지금의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로 불쑥 찾아온다. 여기서 미샤는 학교 식당 밥을 먹으며 간만에 좀 재잘거리기도 하고, 트로이는 미샤의 멋진 옷차림을 보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를 먼저 읽으려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흙탕물 색깔 재킷과 기름기 많은 수프)


위의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것이 이 글이다. 둘은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교정을 나와 네바 강변을 걷고 다리를 건너간다. 이 강변의 이름은 '대학교 강변'이란 뜻으로 '우니베르시쩻스까야 나베레즈나야'라고 불린다. 이 에피소드는 둘이 강변을 걷다가 미샤가 다리 난간에서 춤을 추고 트로이가 혼비백산하는 상황에 뭔가를 조금 더한 이야기다.


맨 위 사진은 트로이츠키 사원. 그 아래 사진은 내가 찍었던 우니베르시쩻 강변의 석조 난간과 네바 강 사진.


* 고로호바야 거리는 트로이의 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



작년에는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올해는 좀 달랐으면 좋겠다. 나는 미샤처럼 다리 난간 위에서 춤을 추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나만의 방식으로 춤을 춰왔고 때로는 멈췄다. 올해는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숨을 쉬고 나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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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를 나와 강변으로 걸어가면서 트로이가 말했다.


 “ 얼굴은 훨씬 나아졌네. 모스크바에서 사람들 많이 만났어? ”



 “ 만났지, 의사랑 물리치료사. 아무 데도 못 갔어. 열흘 동안 요양소에 갇혀서 치료만 받았어. 주는 대로 먹고. 완전히 사육당했어. 머리까지 잘라주던데. 원장이 지나랑 다닐로프와 한통속이더라고. 외출 금지에 창문에는 쇠창살까지 쳐져 있었어.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 ”



 “ 그래도 어깨는 좋아졌겠네. ”



 “ 아, 이제 다 나았어. ”



 미샤가 어깨를 유연하게 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강물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갈매기를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흑빵 조각을 쪼개서 휙 던졌다. 새가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빵조각을 채갔다.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 갈매기는 물고기를 먹어. ”



 “ 잘만 먹는데, 빵. ”



 “ 그래도 원래는 물고기를 먹어. ”



 “ 여긴 소련인데 뭘 기대해, 흑빵이라도 감지덕지해야지. 줄 안 서는 것만으로도. ”



 “ 넌 줄 안 서잖아. ”



 “ 그런가. 갈매기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는 것 같긴 하네. ”



 미샤가 석조 난간 위로 훌쩍 올라갔다. 난간 폭은 꽤 넓었고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너무 놀라서 펄쩍 뛰었다.


 “ 뭐해, 빨리 내려와! ”



 “ 왜? 설마 떨어질까봐? 이렇게 넓은데? ”



 미샤는 돌로 된 난간 위에서 몇 발짝 뛰어올랐다. 꼭 맞는 옷을 입고도 무대 위에서처럼 춤을 췄다. 빵조각을 채간 갈매기의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해 추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지만 트로이는 그 재능에 놀라거나 감명을 받을 겨를도 없었다. 그는 난간에 몸을 바짝 기댄 채 두 팔로 미샤의 허리와 골반을 감아 바닥으로 홱 끌어당겨 내렸다. 아마 안드레이 트로이츠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잊은 드문 경우였을 것이다. 트로이는 균형을 잡는 데는 별 재능이 없었으므로 하마터면 미샤와 함께 돌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미샤가 재빨리 몸을 뒤로 젖히며 한 손으로 난간을 짚고 한쪽 다리로 트로이의 무릎을 떠받쳐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싸늘하고 약한 바람이 불어와 미샤의 머리칼이 검은 깃털처럼 공중으로 가볍게 나부꼈다. 



 
 “ 봐, 위보다 아래가 더 위험해. 넘어질 뻔 했잖아. ”


 “ 너 그 위에서 헛디뎠으면 강으로 떨어졌을 거야. ”


 “ 강이야 헤엄치면 되지만 이건 돌바닥이잖아. ”


 “ 괜찮아, 넌 내 위로 떨어졌을 테니까. ”


 “ 미쳤어? 제대로 넘어질 줄도 모르면서. 뻣뻣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거짓말이 아냐, 안드레이. 위보다 아래가, 강보다 바닥이 더 위험해. 넌 머리가 깨졌을 거야, 뼈가 부러졌거나. ”



 미샤는 화를 내고 있었다. 까만 눈을 뜨겁게 태우면서 입술을 떨었다. 자기는 그렇게 위험한 짓을 밥 먹듯 하는 주제에 기껏 그가 뒤로 자빠질 뻔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트로이는 그 말을 그대로 해주었다.


 미샤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근처로 접어들었을 때 어떤 남녀가 그를 알아보고는 사인을 해달라고 매달렸다. 미샤는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고 그들을 물리치고 빠른 보폭으로 길을 건넜다. 평소에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었으므로 트로이는 그가 정말 화가 났거나 키로프 무용수 노릇에 넌더리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앞까지 왔을 때 트로이는 그를 따라잡았다. 고로호바야로 가려면 이곳에서 함께 안쪽으로 접어들어야 했다.



 “ 너 어디로 갈 거야? ”


 “ 러시아 미술관. ”


 “ 벌써 다섯 시가 넘었는데 무슨 러시아 미술관. 문 닫았잖아. ”


 “ 돔 크니기. 피의 사원. 판탄카. 블라지미르 사원. 쿠즈네츠느이 시장. 스타로 칼린킨 다리... ”


 “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기지 마. ”


 “ 신경 꺼. 전부 갈 거니까. ”




 
 트로이는 그의 팔을 낚아채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로 접어들었다. 미샤가 조금 끌려가다가 완력으로 버티며 그 자리에 멈췄다.



 “ 너 정말 왜 그래? 우리 집에 가려고 학교로 온 거 아니었어? ”


 “ 넌 머리가 깨졌을 거야, 뼈가 부러졌거나. ”



 미샤는 네바 강변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눈 아래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순간 그렇게 창백해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검은 머리가 흩어져 있는 얼굴이 루빈슈테인 병원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을 때처럼 조그맣고 하얗게 보였다.



 ‘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그대로야. 좋아진 척 하고 있었을 뿐이야. 아스케로프 말이 맞아. 정신이 나갔어. ’



 트로이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미샤의 팔을 움켜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놔주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미샤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 머리 좀 깨져도 안 죽어. 정말 그것 때문에 성질내고 있는 거야? 앞으로는 조심할게. 됐지? ”


 “ 나 때문에 넘어지지 마. ”



 그 말이 지나치게 낮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칼에 찔린 듯 깊은 통증을 느끼며 미샤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완전한 어둠이 내려와 그의 곁에 그림자가 돌아와 있었다면 미샤의 그 부드러운 음성은 침실에서 속삭이는 밀어처럼 들렸을 것이다.



 트로이는 헛기침을 했다. 미샤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면서 갑작스럽게 거칠어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 연습할 때마다 넘어지는 주제에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집에 가자. ”


 “ 나는 넘어져도 일어나. 넌 안 돼. 넘어지지 마. ”


 “ 내가 뻣뻣한 건 알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좀 기분 나쁜데. ”


 “ 넌 교회 첨탑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거대하고 우아한 것들은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기 힘들어. 큰 나무와 비슷한 거야. 그러니까 넘어질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 꼼짝도 하지 마. ”




 
 지금껏 미샤가 그렇게 사적인 말을 거리에서, 그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속삭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현기증과 함께 지독하게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억지로 웃었다.



 “ 태어나서 우아하다는 표현은 처음 듣는데. ”


 “ 왜? 모든 사원은 우아하고 쓸쓸해. 교회 첨탑도 마찬가지야. ”



 미샤가 움직였다. 그의 곁을 지나쳐 빠르게 걸었다. 트로이는 거대한 회색 거미처럼 긴 다리를 뻗어 그의 뒤를 쫓아갔다. 미샤는 곧장 고로호바야 거리 쪽으로 꺾었고 아파트 건물 앞에 도달했을 때에야 멈춰 섰다. 트로이가 정문을 열자 미샤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여전히 가볍고 나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집까지 올라가는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아마 20년 쯤 더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하지만 트로이는 20년 더 나이를 먹은 미샤 야스민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10년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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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 글 쓰고 나서 미샤가 춤췄던 우니베르시쩻 강변 석조 난간과 이 이야기에 대해 짧은 메모를 쓴 적이 있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1840 (우니베르시쩻 강변의 석조 난간)



그때 올렸던 사진이긴 한데 하여튼 미샤가 춤췄던 난간 사진 한장 더.

(이 에피소드 쓰고 나서 여기 난간 사진들 많이 찍어놨는데 그 사진들은 전부 화정 집 데스크탑에 있네...)




이것이 트로이츠키 사원. 성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즈마일로프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한 사원이다. 전에 한두번 쓴 적 있지만 트로이의 이름과 성은 여기서 따왔다. 트로이의 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인데 그 트로이츠키는 무엇보다도 이 사원의 이름, 두번째는 네바 강에 있는 트로이츠키 다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트로이츠키 다리와 트로이 이름에 대해 전에 쓴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746 : 트로이의 이름 유래 중 하나 : 트로이츠키 다리


트로이츠키 사원은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무척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푸른 돔에 그려진 금빛 별이 총총 빛나고 있다. 눈에 덮여 있을때도, 석양에 반사되었을때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트로이츠키 사원 사진 몇 장 더. 사진들은 내가 찍은 게 아니고 페테르부르크 사진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하지만 미샤의 말대로, 모든 사원은 우아하고 쓸쓸하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트로이는 언제나 교회 첨탑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이다. 혹은 그러기를 바랄 것이다.


이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여기는 외곽의 다른 사원.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러시아는 곳곳에 작고 아름다운 정교 사원들이 많다.




화려한 네프스키 대로 너머로 카잔 성당의 돔이 보인다.




어쨌든 미샤는 춤추는 아이니까 무용수 사진 두 장으로 마무리.

아르춈 옵차렌코.



그리고 연습실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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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마지막 글은 몇년 전 썼던 미샤의 수용소 이야기 1부에서 발췌한다. 좀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부분이긴 하다만. 하긴 수용소와 고문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밝고 경쾌하기란 좀 어려운 법이니까(난 고통을 유머로 승화시킬만큼 위대한 재능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ㅠㅠ)

 

올해를 마무리하는 글로 왜 이런 어두운 이야기를 선택했을까. 뭐 그건 지금 이 순간 이 글이 여기 보였고 또 지금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다른 무슨 이유가 있을까.

 

.. 관찰자이자 심리적 화자인 흘레브니코프는 수용소 간수. 33번은 미샤의 죄수번호. 라브로프는 미샤를 약물로 고문하는 정신과병동 화학박사이다.

콤소몰은 16~25세 청년들이 활동하는 청년공산당 동맹. 피오네르는 공산당 소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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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브로프의 방 앞까지 왔을 때 33번이 떨었다. 그것도 눈에 띄게 몸을 움츠렸다. 흘레브니코프는 뒤에서 팔을 뻗어 문을 열면서 갑작스럽게 그 미친놈이 며칠 사이에 얼마나 야위었는지 깨닫고 희미하게 소름이 돋았다.

 

 보그단을 맨손으로 처치했다는 소문이 센터에 퍼져나간 후 죄수들은 33번을 인정했고 나름대로 경의를 표하기까지 했는데, 피복 물품을 담당하는 모범수 므라모르도프는 관례를 깨고 그 신참에게 치수에 맞는 옷들을 배정해 주었었다. 이제 그 치수에 맞던 옷은 주먹이 쑥 들어갈 정도로 헐렁하게 늘어져 있었고 라운드 칼라 사이로 훤하게 드러난 어깨 위로는 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놈은 원래 피부가 흰 편이었지만 이제 두 배는 더 창백해 보였다. 얼굴과 목덜미 피부 안쪽으로부터 미세하게 뻗은 혈관이 그대로 비쳐 나와 푸른빛이 어른거렸다.

 

 

 라브로프는 그날 33번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시 이마에 주사를 놓았는데 그건 첫날처럼 약효를 빨리 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바늘을 찔러 넣었던 왼팔의 혈관이 전날 저녁에 터졌기 때문이었다.

 

 약물이 주입되자 투명할 정도로 창백하던 33번의 얼굴과 목덜미가 잠시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검은 눈동자 전체에 붉은 기운이 차올랐지만 물론 그건 흘레브니코프가 보고 기겁했던 그 야수 같은 불빛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붉은색이었다. 라브로프가 바늘을 빼내고 약물이 모두 흡수되자 붉은 기운도 썰물이 빠져 달아나듯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시 창백한 흰색과 눈동자의 검은색만 남았다.

 

 33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두 손으로 목과 가슴을 누르며 몸을 웅크렸는데 전날까지의 반응과는 또 달랐기 때문에 라브로프가 투약량만 늘린 것이 아니라 약물 배합을 다시 바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브로프가 혀를 차더니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콤소몰 행진곡이었기 때문에 흘레브니코프는 하마터면 쿡쿡 웃을 뻔 했다. 라브로프가 콤소몰에 있던 시절은 적어도 20년은 지났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3번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목과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을 억지로 움직여 귀를 틀어막았던 것이다. 그게 콤소몰 행진곡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시무시하게 확장된 청신경 때문에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라브로프가 휘파람을 뚝 그쳤다. 33번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마치 아끼는 학생이나 자기 아들을 어루만지듯 이마 위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짧은 머리칼을 쓸었다. 그리고는 너무나도 자상하고 부드럽게 어르는 듯 속삭이기 시작해서 흘레브니코프는 소스라쳤다.

 

 

 “ 이제 이 노래 좋아할 때도 됐잖아, 아니면 피오네르 노래 쪽이 더 좋아? 파벨이 그러던데, 이제 기억이 퇴행하기 시작할 거라고. 다시 피오네르 시절로 돌아가겠네. 그 편이 훨씬 나아,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인간의 기억은 백지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 위에 뭔가를 칠해서 다시 그려낼 수는 있어. 차라리 피오네르 때보다 더 뒤로 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얼룩을 다 없애버리면 넌 깨끗해질 거야. 정말 착해질 거야. 네 아버지, 그 배반자, 그 선동분자가 남겨준 얼룩부터 지워버리면 좀 달라지겠지.

 

 너 글루크에게 대들었지, 파벨에게 파리 시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우겼듯이 소장이 준 기회도 날려버렸지. 가엾고 또 가엾은 우리 미슐랴,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머리를 굴릴 줄도 모르는 순진하고 귀여운 아이. 그런데도 파벨은 널 영리한 젊은이라고 생각하지. 아니, 넌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애일 뿐이야. 그건 기회였어, 어쩌면 여기서 풀려날 수도 있는 기회. 한 번만 고개를 숙이면 됐어. 전에 입던 것처럼 근사한 외제 수트를 걸치고 이 얼간이 같은 머리도 제대로 다듬고, 뭐 얼굴은 많이 상했지만 그것도 소장이 누굴 붙여주면 전처럼 예쁘게 꾸며줄 수는 있을 거야, 그렇게 치장하고 5분, 아니 3분만 카메라 앞에 서면 되는 거였어. 그 글귀들은 굳이 욀 필요도 없어, 어차피 이제 머리가 안 돌아가서 암기 따윈 안 될 테니까. 보고 읽기만 하면 돼, 읽는 데는 3분이면 충분했어.

 

 아, 그런데 안타까워서 어떻게 하면 좋지. 내 마음이 너무 아프네. 불쌍한 꼬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그 좋은 기회를 거부하다니. 난 네가 꽤 힘들어한다고 생각했어. 정말 아픈 것 같다고. 이거 맞고 나면 너 울잖아. 어린애처럼, 계집애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울잖아. 그런 적 없다고 하고 싶겠지. 근데 난 봤거든, 네가 우는 거. 넌 아마 기억도 못할 거야. 왜, 자존심 상해? 너 자존심 엄청 세잖아. 그거 하나로 지금껏 버티고 있잖아. 원래 어린애들이 그래. 제대로 사회화가 안된 애들, 소비에트 체제에 적응이 안된 애들. 아까 파벨 앞에서도 끝까지 무릎 안 꿇었다면서. 기운만 있으면 그때처럼 내게 달려들고 싶겠지, 보그단을 반 죽여 놓은 것처럼 나나 파벨도 목 졸라 죽이고 싶겠지. 그 몸을 쓸 수가 없어서, 그 가볍게 날아오르던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렇게 잘 빠졌던 몸이 이 꼴로 망가져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데 아직 안 늦었어, 순진하고 귀여운 미셰츠카, 한때 공훈예술가였던 야스민 동지. 파벨은 반대하겠지만 난 생각이 틀려. 난 너 구해줄 거야. 넌 그저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잖아, 그냥 어린애잖아. 나라고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게 기분 좋을 것 같아? 내가 그랬잖아, 난 극장 애호가라고. 너처럼 뛰어난 애를 이렇게 아프게 만드는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잖아. 지금이라도 말해, 소장이 얘기한 대로 할 거라고. 그럼 다음 주사는 없을 거야. 프로그램도 중단해 줄 거야. 내가 그렇게 할 거야, 약속하지.

 

 자, 말해봐. 아직 얘기할 수 있잖아, 혀는 움직일 수 있잖아. 잘 안돼? 목소리가 안 나와? 그럼 눈만 깜박여도 좋아. ‘소장이 얘기한 대로 할게요’ 라고 착하게 대답해봐. 두 번 깜박이면 돼. 천천히, 두 번. 그 유명한 눈 좀 뜨고 날 봐. 계집애들 미치게 하던 그 까만 눈. 난 모스크바에 갔었어, 레닌그라드에도. 네 무대도 본 적 있어. 그때 계집애들이 그랬지, 검은 눈의 야스민이라고, 천사처럼 날아오른다고. 다시 돌아가게 해 줄게. 자, 눈 깜박여봐. 착하고 예쁜 애가 돼봐. 그럼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

 

 

 33번이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눈을 깜박인 것은 아니었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이마와 눈을 가렸다. 라브로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두 눈을 불태웠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고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한순간 흘레브니코프는 주임 의사가 센터의 죄수들에게 전염되어 미쳐버린 게 아닐까 하며 겁에 질렸다. 데미얀 라브로프는 고무공처럼 튀어 자리에서 일어났고 잠깐 뒤로 물러섰다가 33번의 가슴팍을 거세게 걷어찼다. 물기 어린 둔탁한 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는데 흘레브니코프는 목구멍에 시큼하게 차오르는 공포를 느끼며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3번은 이제 제대로 된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짧고 거친 숨을 수차례 몰아쉬려고 애쓰며 흐느끼는 듯한 희미한 신음을 토해냈을 뿐이었다. 호흡이 꽉 막혀서 어깨와 무릎을 꿈틀거리듯 경련하면서도 끝까지 눈을 가린 손을 내려놓지 않았다. 라브로프가 한 번 더 걷어찼을 때 33번이 말을 했다. 터진 입술 사이로 단어들이 토막토막 밀려나왔다.

 

 “ 절대. 안 해. 죽여. ”

 

 

 라브로프가 들어 올렸던 발을 내렸다. 불에 덴 듯 뒤로 몇 발짝 물러서더니 나직하게 웃기 시작했다.

 

“ 아, 꿈도 꾸지 마. 우린 너 절대 안 죽일 테니까. 못되게 굴어서 차라리 죽고 싶은가 본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는 없을 거야. 오늘 정말 말을 안 듣는군. 파벨에게만 그럴 줄 알았는데, 설마 이 방에서도 이렇게 뻗댈 줄은 몰랐어. 이제 많이 약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그 약을 맞고도 이렇게 귀엽게 굴다니. 뭐 상관없어, 이제 약 기운이 세게 오를 테니까. 어제보다 훨씬 아플 걸. 가만히 누워서 생각 좀 해봐. 그리고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고. 저녁에 나한테 애걸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거야. 저녁 주사 맞고 나면 진짜 계집애처럼 울어댈걸. 네가 질질 짜는 소리가 온 복도에 울려 퍼질 거야. 다른 놈들 잠을 다 설치게 만들겠지. 어쩌면 내가 그 꼴 구경하러 올지도 몰라. 그래도 네 애원은 안 들어줄 거야. 그러니 내일 아침까지 잘 버텨봐. ”

 

 

 33번은 버텼다. 한 시간 정도. 라브로프는 나가지도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흘레브니코프는 물품 장부를 대조하러 가야 했지만 라브로프 때문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 때 33번이 울었다. 눈 전체가 회색 얼룩이 가득한 검은 수은처럼 변해서, 흰자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짐승 같은 눈으로, 비처럼 눈물을 쏟았다. 가슴과 목구멍으로부터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그맣고 가느다란 흐느낌이 이따금 물결처럼 밀려나왔다. 흘레브니코프는 어린 시절 차에 치어 죽어가는 개나 고양이를 거리에서 본 이후로 그런 연약하고 끔찍한 신음 소리를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라브로프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다른 죄수들의 차트와 보고서들을 넘기며 마치 벨벳 좌석에 몸을 파묻고 오페라 아리아나 모차르트 연주를 감상하듯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 신음 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 쯤 더 지나자 33번이 헛소리를 했다. 발음이 모두 뭉개지고 흐릿해서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단어와 이름들을 띄엄띄엄 토해냈다.

 

 

 아마도 엄마를 부르는 거겠지,

 

 

 흘레브니코프는 이제 무감각해진 가슴으로 생각했다.

 

 

 다른 놈들도 다 그랬어, 약에 취해서 너무 괴로우면 엄마를 찾아. 저 미친놈에게도 엄마가 있을 거야. 저렇게 머리와 눈이 새까맣고 살빛이 눈처럼 하얀 엄마, 자기 아들이 체포됐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울어댔을 엄마. 하지만 여기서 저게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하겠지. 알게 되면 아마 가슴이 터져 죽을 거야. 내가 발등에 다리미를 떨어뜨려서 껍질이 홀딱 벗겨지고 물집이 마구 잡혀서 숨넘어가게 울었을 때 우리 엄마도 울었어, 연고를 발라주면서, 날 꼭 껴안고 달래주면서 사랑하는 이오슈카, 귀여운 우리 아가, 엄마가 대신 데었으면, 대신 아파줬으면 좋겠다면서 울었어. 저 병신, 미친놈.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아무도 못 버텨. 끝까지 가는 놈들은 아무도 없어. 라브로프가 옳아, 화학은 전능해. 결국은 고분고분해져, 착해지게 돼. 그러니까 그만 포기해. 어차피 포기할 거, 지금 포기해. 더 아프기 전에. 네 엄마가 병신 같은 그 꼴을 보고 가슴이 터져 죽기 전에.

 

 

 죄수가 환각과 착란, 무의식 상태를 왕복하다 마침내 완전히 정신을 잃고 조용해졌을 때 라브로프가 두꺼운 보고서 뭉치를 탁 내려놓고 일어섰다. 칸막이 뒤로 들어가서 5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두 손을 닦으며 나온 주임 의사는 흘레브니코프가 보는 앞에서 저녁에 주사할 약물을 가득 채운 앰풀과 주사기를 집어넣고 서랍을 잠갔다. 그리고 열쇠를 그에게 주었다.

 

 

 “ 지금 옮겨. 다시 여기로 데려올 필요는 없어. 8시에 놔. 내일 파벨에겐 10시에 데려가고. ”

 

 

 그래서 흘레브니코프는 명령에 따랐다. 죄수를 독방으로 옮겼다. 8시가 되었을 때 라브로프의 방으로 와서 열쇠로 서랍을 열었다. 앰풀을 따서 약물을 주사기에 채워 넣었다. 독방으로 갔을 때 33번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주사를 찔러 넣기 직전 그 미친놈이 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침착하게. 마치 그놈이 정신병자 수용소 독방이 아니라 대학 강의실이나 햇살 찬란한 네프스키 대로의 야외 카페 테이블에 앉아 있기나 한 것처럼, 흔들림 없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거 더 이상 놓지 말아요, 더는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라고 말했다. 물론 이오시프 흘레브니코프는 죄수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그 어리석은 부탁을 무시했다. 주사를 찔러 넣었고 그 지긋지긋하고 협소한 감방을 나와 밖에서 문을 잠갔다.

 

 

 그날 밤 꿈속에서 흘레브니코프는 발등에 붕대를 감고 활짝 웃으며 ‘사랑하는 이오슈카, 넌 화상을 입지 않았어. 다리미를 떨어뜨렸던 건 네가 아니야, 엄마였어. 넌 아픈 적이 없단다. 한 번도,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어. 이제 모든 게 잘 될 거야, 다 괜찮을 거야’ 라고 속삭이는 엄마를 보았다. 그런데 그건 흘레브니코프의 포근하고 따스한 엄마, 키가 작고 털실 같은 금발에 쿠션처럼 동글동글하고 푹신한 몸매의 엄마가 아니었다. 재수 없게도 그건 머리칼과 눈이 석탄처럼 까맣고 피부가 우유처럼, 눈처럼 하얗고 자작나무처럼 야윈 여자, 공주 같고 루살카 같고 마녀 같은 창백한 여자였다. 심지어 꿈 속에서도 흘레브니코프는 욕을 하며 여자를 밀쳤다. 병신 같은 년, 꺼져. 가까이 오지 마, 여기 들어오지 마. 가 버려. 안 그러면 가슴 터져 죽을 거야. 꺼져! 꺼져! 꺼져!

 

 고함을 지르고 외치고 또 외치다가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고 기분이 너무 나빠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라브로프를 비롯해 그가 '파벨'이라 부르는 슈스코프 등 심문관들과 미샤의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748 : 수용소, 심문자들, 유령들, 인체발화, 다시 세 개의 메모

고문 에피소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미샤에게야 다행) 이 1부에서 적당히 마무리된다. 2부와 3부의 이야기들도 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그 중 두 에피소드 링크는 아래. 하나는 미샤의 후원자인 게오르기 벨스키, 하나는 그의 친구인 일린과의 면회 장면이다.

 

http://tveye.tistory.com/5589 : 체제의 이름, 비행사, 천사 이름 붙은 도시

http://tveye.tistory.com/5551 : 수용소 면회실에서, 얼룩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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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6. 12. 29. 23:45

투명함과 어둠 사이에서 about writing2016. 12. 29. 23:45

 

 

2016년도 거의 다 저물었다. 올해는 글을 많이 쓰지 못했다. 정제된 글도, 정제되지 않은 글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내부의 혼란과 고통을 겪었던 해였다.

 

밤 기차로 올라왔다. 내일은 휴가이고 12월 31일과 1월 1일은 화정에서 보낸 후 다시 본사가 있는 시골 동네로 내려갈 것이다. 좀전에 집에 돌아왔고 환기를 시키고 보일러를 올렸다. 그리고 자기 전에, 문득 생각나서 몇년 전의 노트를 조금 발췌해 본다. 이전에 이 폴더에 종종 발췌해 올렸던 트로이와 미샤가 등장하는 장편을 마친 후 썼던 후기의 일부이다. 내가 만들어내고 숨결을 불어넣은 두 사람, 트로이와 미샤에 대한 메모의 일부.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종종 나는 그가 네바 강변을 걷는 모습을 떠올린다. 197센티미터의 키에 조금 야윈 체격, 하지만 큰 키와 굵고 강건한 뼈대 때문에 90킬로그램을 훌쩍 넘기는 체중으로 묵직하게 돌바닥을 누르고 한쪽 발을 조금 끌며 걸어가는 남자. 길게 구부러지는 팔다리, 나무인형처럼 뻣뻣하게 삐걱거릴 것 같은 몸매. 석양 속에서 네바 강변의 포석 위로 드리워지는 그의 그림자는 아마도 거대한 종루 같고 거미 같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미샤는 언제나 조그맣고 새처럼 가벼운 어린애로 보일 것이다. 미샤는 트로이에게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지 않아’라고 말했듯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작지도 가볍지도 않아’라고 대꾸해줄 수 있을 테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나는 트로이의 재능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그 시대에 다른 존재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지금보다도 무척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리라고 위로하며 어깨를 쓸고 입을 맞춰주고 싶다. 트로이의 고민은 복잡하지만 등장인물로서의 그는 내게 투명한 존재이다. 내 앞에서 그는 수수께끼나 비밀이 없다. 그래서 1인칭 소설은 아니지만 그는 궁극적으로는 화자이며 주인공이 아니다.

 

 미샤는 다르다. 그는 투명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나는 트로이보다 미샤와 공명하는 부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의 고민과 공포는 나의 어둠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원히 내 앞에서 비밀을 간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재능이란 관통하는 아름다움이며 불꽃처럼 터졌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은밀한 그 무엇,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든 그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한순간에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리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 앞에서 무심하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트로이였다고 해도 가망 없이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혹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증오했을 것이다.

 

.. 2013.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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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6. 12. 25. 21:02

런던에서 걸려온 전화 about writing2016. 12. 25. 21:02

(알티나이 아실무라토바 & 파루흐 루지마토프. 1985년)

 

(마린스키 극장 내부 모형)

 

 

오랜만에 글을 조금 발췌한다.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하는데 요즘 너무 바쁘고 또 정신적 여유가 없어 언제 시작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쓰기는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것이다.

 

..

 

지난번에 미샤의 런던 에피소드를 몇번 언급한 적이 있다. 하나는 그가 런던에서 그쪽 예술가들의 아지트에 가서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이야기였고 하나는 같은 시기에 그가 런던 페스티벌에 참가하고 옛 친구이자 대사관 직원인 알리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에피소드였다. 두 에피소드의 링크는 포스팅 맨 아래에 적어두었다.

 

아래 이야기는 위 두 이야기가 속한 파트의 전반부이다. 런던에 간 미샤와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는 트로이, 그리고 그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디나 로쉬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발레리나이며 이 이야기에서 미샤를 런던 페스티벌에 초청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일린은 미샤의 친구이자 안무가로 런던 페스티벌에서 미샤가 춘 '페트루슈카'를 안무했다.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미샤의 후원자이다. 율리야는 미샤의 어머니이다.

 

'로미오'는 알리사를 비롯한 트로이의 친구들이 미샤를 부르는 애칭이다. 줄리엣은 그의 파트너인 지나이다의 애칭.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 야스민은 런던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안무가인 일린에게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고 다른 극장 관계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문화국장인 포노마레바와 담당직원 하나가 함께 갔다. 키로프 무용수 개인이 그런 서방 유럽의 페스티벌에, 그것도 경쟁 부문에 참가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마침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비롯한 당 위원 두 명이 영국 측과 몇 가지 협약을 맺기 위해 런던에 갈 예정이었으므로 미샤의 런던행도 문화교류 일환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스비제르스키는 포노마레바와 미샤를 모스크바로 부른 후 자신과 같은 비행기에 태워갔다.

 

 

 개막일에 미샤가 디나 로쉬와 함께 춘 돈키호테에 대한 관객들의 환호가 너무 뜨거워서 축제에 대한 관심도 함께 치솟았다. 한동안 경색되어 있던 런던과 모스크바의 관계도 스비제르스키의 방문과 함께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언론도 키로프 간판스타의 참가를 집중 조명했다. 미샤는 빠듯한 일정 때문에 로쉬와 충분한 호흡을 맞춰보지는 못했지만 둘 다 기본기가 뛰어난 무용수였기 때문에 별다른 실수는 없었다. 게다가 돈키호테는 키로프의 자랑거리였고 남자 무용수의 화려한 테크닉과 눈부신 도약을 한껏 뽐낼 수 있는 레퍼토리였기 때문에 그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경쟁 부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당국에서는 지난 파리 인터뷰 같은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미샤에게 절대로 통역 없이 얘기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포노마레바가 신신당부했기 때문인지 스비제르스키가 협박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미샤는 통역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지난번처럼 열성적으로 끼어들지도 않았다.

 

 로열 발레단의 스타 무용수 몇 명이 미샤를 극장으로 초청해 함께 세션을 진행한 후 런던의 명소 구석구석을 안내해 주었다. 물론 통역과 요원이 동행하는 공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소련 대사관에서 주최한 리셉션에도 가고 스비제르스키가 주관하는 행사에도 끌려갔다. 겉으로는 런던 시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요원 두 명과 통역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언론 홍보용 제스처일 뿐이었다.

 

 미샤의 성격이나 과거 비행들을 잘 알고 있는 포노마레바는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는 페트루슈카를 출 때까지 얌전하게 잘 견뎠다. 도망치지도 않았고 인터뷰에서 사고를 치지도 않았다. 둘째 날 대사관 측에서 조직위가 잡아줬던 숙소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영국 정보부의 도청으로부터 깨끗한’ 다른 호텔로 변경한 후 아무런 통보도 없이 그의 짐을 모두 옮겨버렸을 때에도 폭발하지 않았다.

 

 

 왕립극장 무대에서 페트루슈카 독무를 췄을 때 놀랍게도 영국 관객들이 미샤의 키로프 첫 지젤 무대와 매우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 우울한 춤에 이입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 내어 우는 관객들이 많았다. 지푸라기 인형 페트루슈카가 죽어 넘어졌을 때 공포로 실신한 여자도 있었고 음악이 끝난 후에도 미샤가 잠시 일어나지 않자 무대로 올라가보라고 소리를 지른 관객도 있었다. 관객들 뿐만 아니라 페스티벌 관계자 대부분도 돈키호테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에너지 넘치는 도약과 화려한 테크닉을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페트루슈카는 생각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결국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의도가 성공했던 셈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별 이견 없이 그 춤에 좋은 상을 주었다. 외교적 의도라고 비꼬는 우익 언론도 있었지만 조직위와 페스티벌 참가자들 사이에는 별다른 논란도 없었다. 로쉬는 훌륭한 춤 앞에서는 이념이나 국경 따위가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모범적이면서도 단호한 코멘트로 우익 언론의 비난을 묵살했다.

 

 페트루슈카를 춘 다음날 미샤는 BBC를 비롯한 미디어와 일간지 인터뷰에 응했고 로쉬와 함께 유력 예술 잡지의 표지 사진도 촬영했다. 대사의 생일 파티에도 잠깐 참석했다.

 

 

 그리고 끈이 툭 끊어졌다. 미샤는 다음날 새벽 연기처럼 사라졌다.

 

 

*    *   *

 

 

 알리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그때 트로이는 오후 강의 때문에 막 집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수화기를 들자 교환수가 딱딱한 목소리로 런던에서 걸려온 전화를 연결하겠다고 통보했다. 집으로 그런 전화가 걸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얼떨떨해져 있는데 알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랴! 무슨 일이야? 잘 지내? ”

 

“ 전화 오래 못해. 도청되기 전에 끊어야 해. 묻는 말에 대답만 해. ”

 

“ 무슨, 무슨 일인데? ”

 

“ 로미오. 런던에서 가고 싶어했던 곳 없어? ”

 

“ 어... 왕립극장? 대영박물관? 세인트폴 성당? ”

 

“ 그런 뻔한 데 말고. ”

 

“ 락 클럽? ”

 

“ 대낮이잖아. ”

 

“ 대체 무슨 일인데? ”

 

“ 없어졌어. 새벽에 사라졌어. 빨리 찾아내야 해. 대사관이랑 요원들이 알아채기 전에. ”

 

 

 트로이는 멍하게 수화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미샤가 갈만한 곳이나 런던의 지인들에 대해 캐물었지만 그는 런던에 대한 일이라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알리사의 목소리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고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아, 어쩌지. 다들 곧 알아챌 거야. 그 전에 돌려놔야 해! ”

 

“ 어떻게, 어떻게 그자들이 아직 모를 수가 있어? ”

 

“ 내가 막고 있어. 감기 기운 때문에 누워 있다고 보고했어. 세시에, 세시에 스비제르스키가 올 거야. 더는 못 숨겨. 어쩌면 좋지? ”

 

 

 트로이는 알리사가 울음을 터뜨릴까봐 겁이 났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미샤에 대한 생각은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갑자기 알리사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 끊어야겠다. 회선 추적당할 거 같아. 혹시 모르니까 너 준비하고 있어. ”

 

“ 뭐, 뭘? ”

 

“ 로미오가 남으려고 하면, 설득해. ”

 

“ 설득이라니, 여기서 어떻게? ”

 

“ 전화로. 엄마도 불러. 걔한테는 엄마 외엔 일가친척 없어. 줄리엣, 그 아가씨도 불러. 무조건 돌아오게 설득해야 해. ”

 

“ 알랴! ”

 

 

 전화가 툭 끊겼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기계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별다른 논리도 없이 빗장을 지르고 커튼을 쳤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공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두개골과 이마를 아주 무거운 것으로 짓누르는 듯 멍할 뿐이었다. 마취 주사를 쑤셔 넣은 듯 희미한 얼얼함 외에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을 때 그는 어딘가의 책에서 읽은 구절을 되뇌었다.

 

 

“ 쇼크 상태에 빠진 사람은 일시적인 마비 증세를 겪는다. ”

 

 

그는 자신이 영어로 중얼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후 또 다른 구절들이 구토하듯 밀려나왔다.

 

“ 그가 그토록 가볍고 즐거운 걸음걸이로

지나쳐 갈 때면 기묘한 마음이 들었다

그토록 슬픈 눈으로 나날을 응시할 때도 그랬다

그토록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 놀랍기만 했다.

 

 

이게 뭐지?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아니, 헛소리라니! 이건 와일드잖아. 미샤가 알았으면 내 목을 자르려고 들 걸. 감히 오스카 와일드 시를 헛소리라고 지껄이다니. 어떤 꼬마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만큼이나, 블라지미르 세묘노비치만큼이나 숭배하는 공작새 같은 작자. 그나마 영국 놈이라 이름과 부칭으로 부를 수 없으니 다행이야. 이건 레딩 감옥의 발라드잖아. 어떻게 이 부분을 외고 있었지?

 

 

 트로이는 한 손으로 자기 뺨을 거세게 때렸다. 싱크대 수도꼭지 아래 머리를 대고 물을 틀었다. 얼음장 같은 찬물에 소스라치듯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전화기 앞으로 가서 다이얼을 돌렸다. 학교에 전화를 해서 독감에 걸렸다고 둘러대고 수업을 취소했다. 잠깐 지나이다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율리야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뜬금없이 루빈슈테인 거리의 의사가 눈앞에 스치고 지나갔다. 욕을 하며 이마를 문지르자 이번에는 회색 고양이 같은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구역질나는 인간이라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 비뚤어진 애는 일린 따위보다는 차라리 루빈슈테인 의사의 말을 더 잘 들을 것이다. 트로이는 미샤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일 거라고는 애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반쯤 비어 있는 보드카 병에 손을 뻗었다. 막 뚜껑을 열고 들이키려다 고개를 저으며 병을 한 쪽으로 밀어버렸다.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평소의 세 배쯤 되는 분량의 찻잎을 쏟아넣었다. 거의 커피처럼 새까맣게 변한 찻물을 이 빠진 컵에 부은 후 레몬이나 설탕도 넣지 않고 뜨거운 것도 모른 채 마셨다. 씁쓸하고 얼얼한 맛이 혀와 입천장에 흐릿하게 돌았다.

 

 

 몇 시간 동안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전화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단 두 문장만이 되풀이되어 울려 퍼졌을 뿐이었다.

 

 

그 애가 남을까? 돌아올까?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도 않았고 설령 알리사가 전화를 연결해준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미샤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를 비롯해 이곳에 남은 지인들에게 벌어질 우울한 일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화벨이 다시 울렸을 때 갑작스럽게 어떤 끔찍한 생각이 이마와 콧속을 타고 스멀거리며 기어 내려와 혓바닥을 쿡쿡 찔렀다.

 

 

 그자들이 널 죽일 거야.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몸을 부르르 떨면서 트로이는 수화기를 잡아챘다. 다시 교환수의 기계적인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잠시 후 알리사의 목쉰 음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

 

“ 아무 일, 아무 일 없는 거야? ”

 

“ 별 일 아니었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괜히 전화했었어. ”

 

“ 지금 같이 있어? ”

 

“ 응. ”

 

 

 알리사는 먼젓번처럼 예고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트로이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고 식탁 위에 밀어놓았던 병을 집어 남은 술을 모두 마셔버렸다.

 

 

...

 

 

트로이가 중간에 떠올리는 구절은 오스카 와일드의 장시 ‘The Ballade of Reading Gaol’ 제 2부 6연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For strange it was to see him pass

With a step so light and gay,

And strange it was to see him look

So wistfully at the day,

And strange it was to think that he

Had such a debt to pay.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 블라지미르 세묘노비치는 브이소츠키이다. 미샤는 존경하는 인물을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

 

포노마레바를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던 파리 인터뷰와 디나 로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040

 

..

 

페트루슈카는 원래 미하일 포킨이 발레 뤼스에서 안무했던 작품이지만 이 소설에서 나는 그 작품을 모티브로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친구인 미샤를 위해 별도로 안무해준 약 10여분 가량의 짧은 독무 작품으로 개작했다. 이 소설에서 미샤는 이 페트루슈카를 가지고 런던의 댄스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고 그랑프리를 받는다(물론 이 페스티벌은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행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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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veye.tistory.com/5178 : 알리사가 해준 이야기(페트루슈카, 미샤와의 대화)

http://tveye.tistory.com/2390 : 알리사가 해준 이야기(미샤는 어디에 있었나, 젊은이와 죽음)

 

..

 

 

안드리스 리에파. 1980년대. 해외 잡지 표지. 볼쇼이 시절.

 

 

백스테이지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최근 상하이 투어 당시.

 

 

마린스키 극장 좌석. 이번에 갔을때 찍음.

 

역시 마린스키 극장의 유명한 샹들리에.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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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래 이야기는 4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서 가장 먼저 썼던 단편  'Frost'에 삽입된 에피소드이다. 원래는 노어 제목을 달고 있는데 번역하면 '서리', 영어로는 프로스트였다. 공산당 고위간부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키로프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미샤가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주축으로 그들의 과거에 대한 회상이 끼어드는 형식이었다. 전에 부분부분 몇번 올린 적이 있다.


아래에 발췌한 에피소드는 마로조프가 예전에 자기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배경은 1975년 여름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아주 오래 전 내가 썼던 미샤에 대한 단편인 'illuminated wall'과 시간/배경상 연결되고 있다. 그 단편은 전에 이 about writing 폴더에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맨 아래에 링크를 덧붙여 두었다.


공산당 고위간부이며 정치국의 위세등등한 멤버인 드미트리 마로조프는 교외의 아름다운 별장에서 열리는 동료들과의 모임에 키로프 무용수인 미샤와 지나이다를 부른다. 표면적인 이유는 와서 춤을 추라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다른 이유도 있다. 미샤와 지나이다는 그곳에 간다. 이것은 그 다음날 아침의 이야기이다.


이 단편은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는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내밀하고 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마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숨을 쉬는 방법을 익히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는 방식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 발췌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인 빛, 맞잡을 수 있는 손의 온기, 그리고 내부의 불꽃. 그 세가지 중 마지막.



... 위의 사진은 순서대로 페테르부르크의 레트니 사드, 지난 여름에 엽님과 같이 갔을때 찍은 연못 사진. 그리고 아래는 지난 9월 찍은 프라하의 말로스트란스카 역 앞의 연못. 깊이가 얕긴 하지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1975년 7월, 페테르고프



 밤새 쏟아진 비로 잔디가 젖어 있었다. 비를 흠뻑 맞은 장미들이 순식간에 피어올랐고 정원은 자욱한 향기로 가득 찼다.


 나는 맨발로 잔디를 밟으며 정원을 거닐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공식적으로는 정치국 멤버들의 회동이 있어 별장에서의 휴가를 이틀 더 늘린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아내나 나나 관심이 없었다.


 미샤는 정원에 없었다. 수영장도 비어 있었다. 뒤뜰 연못가에 새로 들여놓은 독일 설치작품을 보러 간 모양이었다. 그는 지나이다와 함께 전날 밤 도착했지만 우리의 파티가 늦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걸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를 불러 앉혀 놓고 진지하게 할 말이 있었지만, 과음으로 일찌감치 뻗어버린 에멜리야노프와 구신스카야를 제외한 멤버들이 돌아간 것은 새벽 세시였고 미샤는 보이지 않았다. 이 별장에야 여러 번 와봤으니 마음에 드는 침실을 골라 자러 들어간 게 뻔했다. 어쩌면 지나이다와 함께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놀랍게도 심장 한구석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나이가 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정원으로 내려오기 전에 지나이다를 2층의 터키 풍 침실에서 발견했다. 그녀는 전날 밤 우리 앞에서 보여준 작은 공연 때문에 피곤했는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쿠션 사이에 몸을 묻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옆자리에는 자고 일어난 흔적이 없었다. 붉은 머리 타래를 녹색 실크 쿠션 위로 펼치고 태아처럼 웅크린 채 홀로 자고 있는 지나이다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어이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뒤뜰은 햇살이 모자라서인지 아직 장미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간 잡초 손질을 등한시했다는 증거로 조각상들 주변에 드문드문 하얀 풀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 번지르르한 대리석 조각상들을 볼 때마다 박물관에 기증해버리고 싶었지만 아내의 취향이 확고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지인들은 레트니 사드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농담하면서도 은근히 그 오래된 제국주의의 유물들을 부러워했다. 오로지 미샤만이 내 투덜거림에 정면으로 반응했다. 지난 가을에 그는 정원에서 쇠갈퀴를 들고 와서 미네르바 조각상 한 개를 박살냈다. 내가 화를 내자 미샤는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 제게 감사하셔야죠. 가장 흉물스러운 조각상이었다고요. ”


 망가뜨린 걸 치워놓으라고 명령하자 미샤는 쇠갈퀴로 낙엽을 끌어와 박살난 조각상 파편 위에 대충 무덤처럼 쌓아놓고는 수영을 하러 가 버렸다. 나는 겨울이 올 때까지 그 낙엽 더미를 방치했고, 조각상이 사라진 받침대는 아예 치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갈퀴에 찍힌 기다란 자국 외에는 텅 비어 있는 받침대를 볼 때면 혈관 속에서 핏줄기가 뜨거운 강물처럼 거세게 내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젖은 풀잎들이 달라붙어 있는 그 받침대를 지나 독일 설치작품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미샤는 보이지 않았다. 연못가도 비어 있었다. 아마 내가 놓치고 지나간 침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 아이는 항상 늦게 일어나곤 했다.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갑자기 연못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미세한 소음이 일었다. 마치 분수의 물방울이 튀는 소리 같았다. 새가 연못 위로 내려앉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 순간 완벽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했다. 창백한 푸른빛 하늘과 잎이 무성하게 뻗어 있는 나무들, 짙은 청록색 그림자가 가득한 연못 수면까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내가, 드미트리 마로조프, 눈과 피의 마로조프, 레닌그라드의 소리 없는 지배자, 얼음성의 사나이가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손발이 저려오면서 현기증이 났다. 이해할 수도 없고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파도처럼 쇄도했고 나는 마비되어 서 있었다.



 대리석 받침대 위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손목 살갗 위로 벌레가 기어가듯 미지근한 공기가 스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함을 지르며 연못가로 달려 내려갔다.



 수면은 차갑고 매끄러운 녹색 금속처럼 단단하게 응고되어 있었다. 한겨울이었다면 얼어붙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못은 별장을 짓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수심이 어느 정도로 깊은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내는 아이들이 그쪽으로 가는 것을 절대 허락한 적이 없었고 생각날 때마다 그 연못을 메워버려야 한다고 우겼다. 내심 그 연못이 뒤뜰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그래 메워야지'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넘기곤 했다.



 수면 아래에 하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두텁게 얼어붙은 네바 강 아래로 물고기가 흐느적대며 헤엄치듯, 거기 그 연못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한가운데에, 짙은 청록색으로 뭉쳐진 수면 아래 하얗고 거대한 짐승 같은 형체가 위아래로 가만히 들썩이고 있었다. 펄럭이는 흰 그림자 위로 검은 해초 같은 머리털이 천천히 나부꼈다.



 맨 처음에 난 그가 헤엄을 치러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수영을 잘 하는데다 겁이 없는 애였으니까. 그저 물 속 깊이 잠수했을 뿐이다. 더운 날씨였으니까.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셔츠와 바지를 벗어던지고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물은 생각보다 찼다. 심호흡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전날 밤 지나이다와 춤췄을 때 입었던 하얀 루바슈카 셔츠를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파자마 같은 흰색 바지와 슬리퍼마저 벗지 않았다.



 나는 연못 한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가 그 아이의 어깨를 잡고 끌어올렸다. 미샤는 내게 어깨를 잡히자 격렬하게 몸부림치더니 작살에 꿰인 고래처럼 순식간에 물 위로 튀어 올랐다. 응고된 수면이 폭발하듯 깨지며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미샤의 몸을 연못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 깊은 곳에서 벗어난 후에는 거의 발길질을 하며 떠밀어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연못가로 올라온 후 나는 한동안 헉헉거리며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구멍과 콧구멍으로 펄펄 끓는 듯한 물이 쏟아져 나왔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간신히 숨을 고른 후 고개를 돌리자 미샤가 1미터 쯤 떨어진 곳에 누운 채 목과 입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경련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 곁으로 다가갔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거칠게 몇 차례 내리쳤다. 미샤는 새파랗게 질렸다가 물을 토해내더니 무섭게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몸에서도 그나마 남아 있던 힘이 몽땅 빠져나갔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랫배가 아프고 머리가 멍멍했다. 벗어던졌던 셔츠로 대충 얼굴과 몸의 물기를 훔친 후에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 다시는 이러면 안 돼. 아침부터 물에 뛰어들기엔 난 이제 늙었어. ”


 그건 사실이었지만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을 터였다. 나는 다시금 온 힘을 쥐어짜 미샤의 몸에서 흠뻑 젖은 루바슈카를 벗기고 이미 축축해진 내 셔츠로 목덜미와 가슴을 거칠게 문질렀다. 미샤가 기침을 몇 번 하고 다시 물을 조금 토해낸 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그 호흡을 따라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숨이 턱에 닿았다. 그는 수차례 심호흡을 반복했다. 무겁게 깜박이는 속눈썹 주위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미샤의 얼굴에 희미한 붉은 기가 돌아왔을 때에야 나는 일어설 수 있었다. 타월과 마른 옷을 가지러 집 쪽으로 몇 발짝 걸어가다 다시금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불쾌함을 느끼고 멈춰 섰다. 내가 정신 나간 주정뱅이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 안 돼. 혼자 놔두면 안 돼. 절대로. ”




 
 내가 돌아왔을 때 미샤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물기를 짜낸 루바슈카를 기다란 베일처럼 머리와 어깨에 두르고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연못에 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양이었다. 미샤는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얘기하셔도 좋아요. ”


 “ 뭘 말인가, 만취한 상태로 연못에 다이빙하지 말라는 것? 오늘 자네가 극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물론 돌아갈 수 없겠지, 내가 저 빌어먹을 연못을 메우게 해줄 테니까! 저 오래된 돌덩어리들을 몽땅 처넣든 삽질을 하든 상관 안 해. 저걸 다 메워버릴 때까진 못 돌아갈 거야! ”



 그르렁거리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밤중에 산짐승이 우는 것처럼 나직하고 어쩐지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나는 계집애처럼 오한을 느꼈지만 곧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건 미샤가 목과 가슴을 울리며 웃는 소리였다. 폐에 물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 그냥 방수포를 덮으면 될 거예요. ”


 내 눈에는 그가 머리와 어깨에 뒤집어쓰고 있는 루바슈카가 방수포처럼 보였다. 그건 익사체 위에 씌워놓은 하얀 천이 될 수도 있었다. 온 몸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더 심해졌다. 오염된 연못물 탓에 피부에 두드러기가 생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미샤의 머리에서 루바슈카를 잡아채 내팽개쳤다.


 “ 일단 들어가서 몸을 말려야 해. ”



 미샤는 전신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파자마 바지가 흰색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연못 위로 이는 잔물결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 원래 하시려던 얘기가 있었을 텐데요. ”



 그 아이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연못으로부터 내 쪽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힘에 부쳤다. 미샤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면 그를 육체적으로 제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 그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안 해. 자네 취기가 가시면 그때 얘기하지. ”


 “ 취하지 않았어요. 술을 마시지 않았거든요. ”


 “ 똑같은 거야, 마셨든 안 마셨든! ”



 나는 연못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술은 아직 파랬다. 까만 눈에 이글거리는 섬광이 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살가죽이 벗겨진 야수처럼 괴로운 표정으로 두 눈을 숯처럼 불태우며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건 같은 게 아니죠. 당신이 이곳으로 날 부른 이유가 5월과 달랐던 것처럼. 같은 건 하나 뿐이에요. 변함없는 것. 이곳의 주인들. 당신들. ”



 그가 말한 대로였다. 나는 그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 어젯밤의 파티는 2주 전 유보되었던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당 간부들이 종종 별장에서 파티를 열 때 무용수들이나 가수를 부른다. 나는 다른 무용수들에 비해 미샤를 자주 부르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뿐이었다. 물론 쿨리마코프나 스비제르스키 같은 발레 애호가들도 미샤와 지나이다를 부른 적이 있다. 그들 중에는 미샤의 팬도 있고 단순히 키로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자리에 오고 싶어 안달인 무용수들도 많았다. 확실한 후원자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기도 했다. 크셰신스카야가 요즘 발레리나였다면 황제 대신 브레즈네프의 정부가 되었을지 누가 아는가.



 완벽한 이성애자이자 발레광인 쿨리마코프는 첫 해부터 미샤의 춤에 푹 빠졌고 1년 이내에 키로프의 모든 고전 레퍼토리 주역을 섭렵하게 해주겠다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쿨리마코프처럼 드러내놓고 미샤를 옹호한 적이 없었다. 발레학교 학생 시절부터 가끔 만나고는 있었지만 그건 물론 비밀스런 관계였다. 그는 자기 실력만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충분했고 나는 낯간지러운 후원자 정부 노릇은 질색이었다. 나도 볼쇼이나 키로프 오페라의 몇몇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후원 입장을 밝힌 적이 있었지만 그들과는 잠자리를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2주 전 나는 별장에서 정치국 동료들을 불러 중요한 파티를 열었다. 비밀회의는 밤 10시에 시작해 1시간 만에 끝났고 그 이후부터는 밤새 파티가 계속될 예정이었다. 여러 가지 민감한 문제들이 있었고 그 중 두어 가지에 대해서는 쿨리마코프의 지지가 필요했다.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미샤를 포함해 키로프에서 네 명을 불렀다. 


 
 미샤는 그날 밤 별장에 오지 않았다. 무단이탈이었다. 당시 행정 책임자였던 다닐로프가 겁에 질리고 풀이 죽은 채 직접 나머지 세 명을 데리고 왔다. 다닐로프는 미샤가 전날 백야 축제 공연을 마친 후부터 몸이 아파서 집에 누워 있다고 둘러댔다. 물론 나는 다닐로프와 나머지 무용수들의 태도에서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눈치챘지만 그 자리에서 문제 삼지는 않았다. 파티는 그럭저럭 흘러갔고 공연도 나쁘지 않았다. 쿨리마코프가 좀 툴툴거리긴 했지만, 어차피 그 얼간이는 미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쾌유를 비는 카드와 꽃을 보낼 게 뻔했다.


 아프다는 건 물론 다닐로프의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미샤에게는 이미 감시 요원이 딸려 있었다. 다음날 나는 미샤가 밤새 네프스키 거리와 궁전 광장, 사도바야 일대를 쏘다녔으며 그건 의도적 이탈이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요원의 말에 따르면 미샤는 페테르고프 출발 시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시내에서 마주친 발레단 동료 핀스키의 설득을 가볍게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반정부적 표현이 있었다. 심지어 파티가 시작될 시각에는 궁전 광장의 딱딱한 돌바닥 위에서 내키는 대로 춤까지 췄다. 이쯤 되면 보안위원회가 미샤를 소환해 무단이탈과 반체제적 행동에 대한 심문을 진행한다고 해도 억울할 게 없었다.


 나는 보안위원회 담당자에게 이 문제는 내가 처리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다닐로프가 미샤에게 한 달간 페스티벌을 포함한 모든 공연의 출연을 취소시켰으며 가을 시즌 개막작으로 잡혀 있던 라 바야데르의 주역에서도 하차시키겠다고 협박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 아이는 이미 겨울 베를린 투어 때에도 숙소를 이탈한 적이 있어 이번 여름 시즌의 해외 투어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나는 열흘 동안 극장이나 미샤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노심초사한 다닐로프는 급기야 내 비서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지난 번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별장에서 다시 파티가 있으니 미샤와 지나이다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으로 나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별것 아닌 농담 때문에 동료들에게 밀고당해 유죄가 된 남자, 정신교화 수용소에서 꺼져버린 희미한 불꽃.



 한숨을 내쉰 후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이었나? 미친 짓을 하고 싶을 만큼? 다시는 자네를 이곳으로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받고 싶어서? ”


 “ 아니에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물론 당신이 앞으로는 그런 무가치한 파티 때문에 절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준다면 더 좋겠죠. 파티보다는 섹스가 더 나으니까요. ”



 미샤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 정말 그런 약속을 해 줄 생각이 있었어요? ”


 “ 아니. ”



 그 아이는 다시 산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낚아챘다. 햇살 때문에 물기는 거의 다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차갑게 미끌거리는 그 몸을 꽉 붙잡아 끌어당겼다. 두개골이 쪼개질듯 아팠다.



 “ 이유를 말해봐. 다닐로프 때문인가? 아사예프와 맞지 않아서? 아니면 런던에 가지 못하게 돼서? ”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하마터면 ‘원하는 걸 얘기해봐!’ 라고 소리칠 뻔 했다.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따위는 별것 아니었다. 세레브랴코프를 비롯한 선배 무용수들의 텃세 때문이라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손봐주겠다고 권력 자랑을 하기 직전이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당신들’로 지칭되는 거대한 권력의 일부다. 여러 개의 아파트와 별장들, 좋은 차들을 소유하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오가며 정치라는 것을 하는 지위 높은 인물일 뿐이다. 저 스무 살짜리 풋내기 사내애는 내가 실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이 꼬마를 자기 아버지처럼 교도소로 보내 망각의 암흑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재판이니 수용소니 하는 절차 따위는 생략한 채 목을 조르거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어 죽이고 캄캄한 네바 강 바닥에 가라앉혀 버릴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도 더러워지는 것은 내 손이 아닐 것이다. 이유를 말해준다면 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



 미샤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한 팔로 나를 껴안고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조용히 속삭였다.



 “ 전 알아요, 당신이 학살자라는 걸.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 해도 뼛속까지 그런 사람이란 걸. 하지만 그런 걸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게 있어요. ”




 
 나는 그를 놔주었다. 미샤는 내 곁을 지나 연못으로부터 멀어졌다. 어두운 수면으로부터 마침내 시선을 돌린 채 그 아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 내 안에 어둠이 있고 밖에도 어둠이 있어요.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래서 춤을 추는 거예요. 올라갈 수가 없을 때는 내려가야 해요. ”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미샤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뭉쳐져 있는 잡초들과 텅 빈 대리석 받침대, 군인처럼 열을 이은 조각상들을 지나쳐 걸었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바지 때문에 평소보다 보폭이 좁았다. 무용수의 우아한 몸놀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쪽 다리를 무겁게 끌었다. 연못에 뛰어들었을 때 발목을 다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미샤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샤워 부스와 욕조 수도꼭지 양쪽을 틀었다. 여름이었지만 그 아이도 나도 뜨거운 물이 필요했다. 미샤는 내 도움을 받지 않고 파자마와 슬리퍼를 벗었다. 왼쪽 발목을 다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살점이 조금 찢겨나간 자리에 피가 고여 있었다. 허리 아래에도 보라색의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지만 그게 연못에 빠지면서 다친 것인지 연습 도중에 생긴 멍인지, 혹은 무분별한 사랑의 밤들이 남긴 자국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각자 말도 없이 끈적거리는 연못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냈다. 씻고 나서 미샤는 욕조에 걸터앉아 발목에 연고를 발랐다. 나는 그에게 가운을 하나 주었다. 그 루바슈카와 파자마, 슬리퍼는 모두 불태워버릴 생각이었다. 욕실을 나왔을 때 그는 내 뒤를 따라왔다. 에멜리야노프나 구신스카야, 지나이다가 깨어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미샤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침실 문을 잠가야 했다. 미샤는 침대 위로 올라갔고 가운을 벗지도 않은 채 누웠다. 재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찰나 뜨겁고 힘센 팔이 뻗어 나와 내 머리와 어깨를 끌어당겼다. 사랑을 나누는 내내 그 아이는 침묵했다. 이후 살풋 잠에 빠졌을 때 아주 잠깐 몸을 떨며 외마디 비명을 토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꿈속에서조차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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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레트니 사드의 미네르바 조각상. 올빼미랑 있으니 미네르바 맞는 거 같은데 긴가민가... 이것도 지난 6월에 엽님이랑 같이 갔을때 찍었음.

뭐 이 미네르바야 아름답지만.. 미샤가 두들겨부순 미네르바 조각상은... 글쎄 잘 모르겠다. 미샤가 흉물스럽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마찬가지로 레트니 사드.

레트니 사드에는 이렇게 대리석 조각상들이 많다. 그래서 마로조프의 지인들이 그의 별장에 이런 조각상들 많다고 레트니 사드 같다고 부러워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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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 frost는 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그 링크들은 아래 :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4485

그가 읽었던 불가코프의 문장, 비행기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  http://tveye.tistory.com/4572

미샤의 신입 시절, 싸움의 이유, 붉은 장미와 하얀 눈 : http://tveye.tistory.com/5469


미샤가 마로조프의 부름을 무시해 페테르고프에 가지 않고 네프스키를 쏘다니다 궁전광장에서 춤을 췄던 이야기는 전에 단편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링크는 아래 :

illuminated wall : http://tveye.tistory.com/3385
레냐에게 궁전광장에서 춤추는 미샤에 대해 해준 이야기 : http://tveye.tistory.com/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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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에 와 있고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고 아름다운 거리를 거닐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산란하다. 평온을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 정상일 것이다. 어쨌든 다음주에 여기서 떠나면 나는 회사와 지방으로 돌아가게 될테니까. 그래서 요 며칠 여기에 예전 글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공허한 어딘가를 채우기 위해? 아니면 숨을 쉬고 수면으로 올라가는 방식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아마도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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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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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추운 러시아에 잠시 와 있다 보니 이렇게 추웠던 날 썼던 추운 날에 대한 이야기 조금. 아래 에피소드는 종종 조금씩 올렸던 트로이와 미샤의 장편 후반부에서 발췌했다.


에피소드의 앞부분에 생략된 배경은 이렇다. 12월의 추운 겨울날 미샤의 공연을 보러 갔던 트로이는 그날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던 지나이다(미샤의 룸메이트이자 꾸준히 파트너로 춤춰온 발레리나)를 만나고 안면이 있는 그녀의 초대를 받아 집에 놀러간다. 즉, 미샤와 지나이다가 함께 사는 아파트이다.

아파트에는 지나이다의 약혼자이자 트로이의 친구(트로이가 영문학과 강사로 일하는 학교의 같은 학과 부교수)인 마르크 카라바노프가 기다리고 있다. 카라바노프는 보드카가 있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없다고 슬퍼하다 트로이를 보고는 반색한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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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톨리츠나야는 보드카 상표 중 하나.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는 전에 종종 등장했던 미샤의 절친한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

트로이츠키는 트로이의 원래 성. 트로이의 원래 이름은 안드레이라서 미샤는 단둘이 있으면 그를 안드레이라고 부름.

넬레츠카는 지나와 미샤의 극장 후배 발레리나.

벨스키는 전에 수용소 이야기에 잠깐 등장했던 정치가이자 미샤의 후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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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 사진은 젊은이와 죽음을 추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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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카라바노프는 지나이다가 트로이를 데리고 들어오자 무척 좋아했다. 트렁크 몇 개에 약혼녀의 책과 여름 옷을 챙겨넣던 것도 내팽개치고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반짝거리는 스톨리츠나야 보드카 유리병을 양 손에 움켜쥐고 나와 보란 듯이 흔들었다.


 “ 하늘이 자넬 보내준 거야! 아니, 레닌이 보내줬다고 해야 하나? 저녁에 이게 두 병이나 생겼는데 같이 마실 사람이 없잖아. 지나는 보드카 입에 안 대고, 미하일은 술을 아예 못 마시니... 딤카도 없고 루벤도 없고... 연말이라고 다들 바빠서 들를 생각도 안해. 섭섭한 마음에 모스크바에 전화해서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를 부를 생각까지 했다니까! 스톨리츠나야를 앞에 놓고 뚜껑을 따지 않는 건 죄악이야! 동의하지, 트로이츠키 동지? ”



 “ 어, 그래. 죄악 맞아. ”



 지나이다가 약혼자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 당신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가 얼마나 술이 센 줄 알아? 대작할 생각 꿈에도 하지 마. 밤새 마셔도 절대 안 취하니까. 딤카도 나가떨어졌어. ”



 “ 그러니까 부르려고 한 거지. 끝까지 안 취하고 남아서 우릴 돌봐줄 사람이 하나 필요해. 당신은 안해 줄 거잖아. 미하일은 옆에서 냄새만 맡아도 취해서 기절할게 뻔하고. 아니, 세 잔까지는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트로이슈카, 자네 조금만 참아줘. 우리 이거 미하일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자. 그래도 남자들의 의리가 있는데 한 잔은 권해야지. 안 그러면 그 친구 섭섭해 할 거야. 게다가 난 미하일한테 신세진 게 진짜 많아. 새 집 구하는 것도 도와줬고 주택관리국 등록도 빨리 받을 수 있게 도와줬어. 지나랑 편하게 지내라고 자리도 많이 비켜줬고... ”



 “ 안돼, 그 바보한테는 한 방울도 따라줄 필요 없어. 그냥 지금 따. 내가 한 잔쯤 마셔줄게. ”



 “ 지나샤, 파트너를 바보라고 부르는 건 참 무례한 것 같아. 미슈카가 착해서 넘어가는 거지 사실은 별로 기분 좋지 않을 거야. ” 



 “ 바보를 그럼 뭐라고 불러. 얼간이나 멍청이보단 그래도 바보가 어감 상 나아. 꽤 신경써서 불러주고 있는 거야. ”
 


 “ 전혀 몰랐네, 그게 신경써서 불러주는 거였는지. ”



 소리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미샤가 말했다. 카라바노프는 깜짝 놀라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 아니, 미하일. 농담이었어. 스톨리츠나야가 생겨서 좋아하다 그런 거야. 기분 나쁜 거 아니지? ”



 “ 기분 나쁘긴. 신경써주고 있었다는 걸 알게 돼서 감동했는데. ”



 지나이다는 어깨를 으쓱하며 파트너에게 곧장 다가가서 코트를 받아주었고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 어쩐지 말도 안 되게 빨리 집에 왔다 생각했어. 분장도 안 지웠네. 가방도 안 가져오고. ”



 “ 분장실에 안 들어갔어.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고 넬레츠카가 알려줘서 곧장 뒷문으로 나왔어. 가방이야 안나 미하일로브나가 따로 챙겨놨겠지. ”



 “ 이 코트는 뭐야! 소매가 왜 이렇게 짧아, 이거 케이프야? 여자 코트 아냐? ”



 “ 분장실에 못 들어갔잖아. 넬레츠카가 자기 거 벗어줬어. 아, 결국 그 단추 두 개나 떨어졌군. 치수 큰 거라더니 역시 무리였어, 이오시프 걸 뺏으려고 했는데 안 벗어주잖아. 이 옷 새 거라고 했는데. 단추 달아줘야겠다. ”



 “ 잘한다, 여자 후배 코트나 벗겨 입고 오고 단추도 떨어뜨리고. 그나마 케이프라서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어깨 솔기 다 터졌을걸. 다닐로프가 끝나고 면담하자고 했던 거 아니었어? ”



 “ 내일 다시 얘기하기로 했어. ”



 미샤는 트로이를 발견하고 잠깐 눈짓을 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나이다와 카라바노프 때문인지 코트를 벗은 것 외에는 얌전하게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트로이는 그 애가 고로호바야의 집 현관에서부터 옷을 하나하나 벗어 내팽개치며 샤워를 하러 가던 것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현관의 황금색 불빛 아래에서 분장을 지우지 않은 그 애의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또 가면처럼 낯설어 보였다. 헐렁하게 늘어진 스웨터 아래로 이바누슈카 무대 의상이 힐끗 보였다.



 ‘ 그때도 그랬지, 지나이다에게 내쫓겨서 레오타드 위에 동료가 빌려준 옷을 입고 우리 집까지 왔었어. 그때 그 살인자가 왔었지. ’



 카라바노프는 의리를 지켜 꿋꿋하게 보드카를 따지 않고 버텼다. 대신 꽤 질이 좋은 캐비아가 담긴 병을 꺼냈고 지나이다를 위해 그루지야 와인도 한 병 가져왔다. 접시에 흑빵과 피클, 살얼음이 껴 있는 훈제 연어 몇 조각과 치즈를 늘어놓았다. 보드카 잔 세 개와 와인 잔 한 개도 꺼냈다. 지나이다는 카라바노프가 테이블을 차리는 동안 별 거리낌도 없이 미샤의 침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욕실 문 앞에 서서 미샤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지나이다가 나오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조그만 구급상자를 가지고 나와 트로이를 불렀다.



 “ 바보한테 약 좀 발라줘요. 내가 해줘도 되는데 마르크가 삐칠까봐. ”


 “ 어디 또 다쳤어요? ”



 “ 좀 긁혔어요. 바보 정도면 아주 양호한 호칭이란 걸 이제 알겠죠? ”




 트로이가 등 뒤로 욕실 문을 닫고 들어갔을 때 미샤는 거품을 채운 욕조 안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부글거리는 하얀 거품 때문인지 분장을 모두 지운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 어디 긁혔어? ”



 “ 아, 지나가 얘기했구나. 별 거 아닌데. ”



 미샤가 물속에서 몸을 돌려 반쯤 엎드렸다. 견갑골 사이에 길게 벤 상처가 나 있었다. 물에 씻겨나가서 피는 맺혀 있지 않았지만 피부가 양 옆으로 슬며시 벌어져 안쪽의 연한 붉은빛 살갗이 드러나 있었다.



 “ 이게 긁힌 거라고? 벤 거잖아. 누구야? ”



 “ 누구라니? 넌 왜 누구라고 생각해? 커튼 콜 끝나고 내려오다가 무대 장치에 벤 거야. 원래는 톱니를 천으로 씌워놓는데 오늘은 시간이 없었나봐. 끝나고 베어서 다행이야. 의상도 찢어졌거든. ”




 
 트로이는 그의 말을 절반도 믿지 않았다. 미샤도 그의 시선을 눈치 챈 듯 고개를 저었다.



 “ 안드레이. 넌 정말 런던에 안 가길 잘 했어. 요원은커녕 아마추어 탐정도 못 될걸. 내가 아무리 유연해도 이런 각도로 찌르진 못해. ”



 “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왜 앞장서서 변명해? ”



 “ 하고 있는데? 눈으로. ”




 
 트로이는 대꾸하지 않고 버튼을 눌러 물을 틀었다. 천정에 달린 샤워기에서 갑자기 물이 쏟아져 내리자 미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 엄청 뜨거워! 말도 없이! ”



 “ 거품을 닦아내야 약을 바를 거 아냐. ”



 “ 오늘 공연 보러 왔었어? ”



 미샤가 욕조에서 일어서며 화제를 돌렸다. 어깨와 등의 물기를 닦아내고 벤 상처를 소독하면서 트로이가 대꾸했다.


 
 “ 그래. ”


 “ 얘기하지 그랬어. 연말이라 표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


 “ 타마라가 구해줬어. ”


 “ 아, 귀여운 무샤. 그 아가씨 없으면 우린 아무 것도 못해. ”


 “ 벨스키는 왜 온 거야? ”


 “ 게다가 수다쟁이지. 뭐 그게 매력이지만. ”


 “ 난 벨스키에 대해 물었는데, 타마라가 아니고. ”


 “ 무슨 회의 때문에 왔다가 들렀어. 크레믈린 축제 때 지나에게 그랬거든, 레닌그라드에 오게 되면 식사나 같이 하자고. ”


 “ 지나에게? ”


 “ 아, 정말 까칠해졌네. 지나랑 나에게. 됐어? ”


 “ 넌 정치가들과 친한 게 불편하지 않아? 콤소몰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으면서 고위층 인사들과는 잘 지내네. 문화국 쪽도... ”


 “ 전제부터 틀렸네. 친하지 않아, 전혀. 이제 그런 얘긴 그만하지. ”


 “ 친하지 않다고? 고르차긴이 자기 집안에 들여놓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


 “ 너 정말 왜 그래? 넌 이 바닥을 잘 몰라. 내가 싫다고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인간들이 아냐.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밉보이면 무대에 올라갈 수도 없게 만드는 놈들이야. ”


 “ 그것 때문에 친하게 지내? 무대 뺏길까봐? ”


 “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얻어 걸리는 고위직들과 다 잔다고? 내가 여자야? 그런 짓 꿈에도 생각 안하는 인간들이 더 많아, 내가 자달라고 매달려도 절대 안 해 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그 자리에서 수용소로 보낼 걸. 넌 동의 안하겠지만, 차라리 자는 게 나아. 솔직하고 깨끗하게. 그냥 자고 끝내는 게 낫다고. 그 인간들 파티에 가고 웃어주고 공연 얘기, 극장 얘기 하고 행사에 끌려 다니는 것보다 백배 낫단 말야. ”


 “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어. 흥분하지 마. ”


 “ 그래, 그런 뜻이 아니었겠지. 위선자처럼 군다고 하고 싶었을 테니까. 나도 알아, 잘 아니까 제발 놔둬. 내가 얼마나 더러운지는 나도 아니까, 네 입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 인간들 얘기하지 마. 그 살인자들에게 내가... ”



 미샤가 주먹으로 타일 벽을 꽝 쳤다. 살갗이 터지면서 핏방울이 튀었다. 트로이는 거울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기를 빌었다. 그는 목욕 가운을 잡아채 미샤의 어깨에 뒤집어씌우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난 한 번도,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 없어. 넌 위선자가 아냐.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런 놈이라 해도 너만은 아니란 말야. 그런 바보 같은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마. ”



 미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욕조에서 나왔다. 거울 앞에 선 채 기계적으로 토너와 로션 따위를 얼굴에 부드럽게 문질렀다. 손의 상처 때문에 뺨 위로 피 얼룩이 조그맣게 번지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트로이는 젖은 타월로 그의 손을 감싸 피를 닦아냈다.


 “ 너 옷 다 젖었어. 내 거라도 입고 있어야겠다, 마르크는 나보다 더 작으니까. 방에 가서 줄게. ”



 미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는 타월로 머리를 닦은 후 드라이어로 몇 분 동안 맹렬하게 물기를 말렸다. 침실로 나왔을 때 미샤는 옷장을 뒤지더니 좋아하면서 치수가 큰 스웨터와 바지를 찾아냈다.



 “ 이건 레냐한테 빌렸던 거니까 좀 나을 거야. 좀 짧겠지만 품은 맞을 걸. ”


 “ 동료고 후배고 가리지 않고 옷을 빌려 입고 오는구나. ”


 “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 정도는 기본이지. 나도 내 옷 많이 빌려줬어. 아무도 안 돌려줬지만. 그러니까 나도 갖고 있는 거야. 그래도 넬레츠카 건 내일 갖다 줘야지. 단추 달아서. ”


 


 트로이가 젖은 옷을 벗어 라디에이터에 널어놓고 레냐 핀스키의 옷을 걸쳐 입는 동안 미샤는 옷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갛게 씻긴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 뭐해, 옷 안 입고. 마르크가 눈 빠지게 기다려, 저 보드카 빨리 안 따면 저 친구 울지도 몰라. ”


 “ 너희 집이면 좋겠다. 그럼 지금 그냥 잘 수 있을 텐데. ”


 “ 졸리면 그냥 자. 어차피 넌 거의 못 마시잖아. ”


 “ 난 네가 옷 입는 걸 보는 게 좋아. 머리 위로 윗도리 뒤집어쓰면서 팔을 빼는 거. ”


 “ 다 똑같잖아, 너도 그렇게 입잖아. ”


 “ 넌 팔이 끝없이 뻗어 나오는 것 같은걸. ”



 미샤가 일어나 다가왔다. 그의 기다란 두 팔을 뒤로 엇갈려 끌어당기면서 의심할 수 없는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했다.



 “ 우리 그냥 방에 있자, 나가지 말고. 마르크는 혼자서도 잘 마셔. ”


 “ 의리를 지켜줘야지. 너 때문에 기다렸는데. ”


 “ 내 파트너 뺏아간 도둑놈에게 무슨 의리. ”


 “ 농담이라도 마르크 앞에선 그렇게 얘기하지 마라, 정말 질투하니까. 한동안 너 의심하느라 잠도 못 잤을 걸. ” 


 “ 아, 하긴. 마르크는 지나가 쓰다듬는 강아지까지 질투하지. ”




..




 

루돌프 누레예프.


신나게 보드카 마시는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왜 또 이 미샤란 놈은 심각하게 구느냐 하고 크레믈린 흑토끼 운운하시는 분들을 위안하고자...

마르크 카라바노프는 지나이다가 쓰다듬는 강아지까지 질투한다고 해서... 강아지 사진 :)

(소설에서 카라바노프는 처음엔 미샤와 지나이다 사이를 엄청 의심했음... 파트너이자 같이 살기까지 해서ㅠㅠ)


 


그리고 '내가 바보라고?' 하는 미샤의 표정과 오버랩되는 듯한 슈클랴로프의 눈 똥그란 사진. 발레 101 :)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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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