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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9. 21:31

잠시 - 유라의 보르쉬 수프 + about writing2020. 4. 19. 21:31

 

 

 

지난주 일요일에 좀 긴 단편을 하나 끝마쳤고 지금은 퇴고 중이다. 쓰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조금씩 발췌한 적이 있다. 오늘은 다 쓴 후 일부 발췌. 화자는 미샤.

 

 

보르쉬는 비트와 쇠고기, 양배추, 양파와 감자 등을 넣고 끓이는 수프이다. 내 글에 자주 등장했던 음식이고, 내가 러시아 갈때마다 꼭 먹는 수프이다.

 

 

유라는 레닌그라드 시립병원의 의사이다. 트로이가 화자로 나오는 레닌그라드 본편에 등장했었고 패러디 외전인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도 한번 나왔다. 단추 청년 베르닌이 선배들 모시고 출장 갔을 때 왕재수 미샤의 부탁으로 편지 전해주러 찾아갔던 의사 선생님이었음.  

 

 

오늘 이웃님과 톡으로 재미나는 얘기를 나눴는데 그러다 먹을 것들 얘기가 나오고... 너무 보르쉬가 먹고 싶어져서 이 부분 발췌해본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유라는 날 거실로 데려가서 사과 주스를 마시게 했고 보르쉬 한 그릇과 흑빵을 주면서 먹으라고 했어. 수프는 진했고 약간 달콤했어. 채 썬 비트가 가득 들어 있었고 양배추는 흐물흐물하고 부드러웠어, 고기는 아주 작게 다져져 있었어. 몇 숟가락 먹자 온몸에 따뜻한 피가 도는 것 같았어. 그 맛은 아주 익숙했어. 유라는 요리를 잘해. 의대에 가기 전에 식당에서 일 년 넘게 일했다고 했어.

 

 

 “ 언제 끓였어? ”

 

 “ 너 자는 동안. ”

 

 

 흑빵은 아주 촉촉했어. 귀퉁이를 떼어내 보르쉬에 담그자 금세 핏빛처럼 붉은 얼룩이 짙게 번지기 시작했어.  보르쉬 먹어, 철분이 많으니까. 다량의 출혈에 특히 좋지.  누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유라는 아니었어. 유라는 말하는 대신 수프를 직접 만들어서 먹이는 사람이야.

 

 

 나는 수프 한 입, 빵 한 입 번갈아 가며 아주 천천히 먹었어. 유라는 내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도 더 먹으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어. 대신 주스를 다 마시라고 했을 뿐이야. 주스는 보르쉬만큼 맛있지 않았어. 가게에서 사온 거니까.

 

 

 “ 넌 저녁 먹었어? ”

 

 “ 당연히 먹었지. ”

 

 “ 그럼 이제 차 마실까? ”

 

 “ 차는 안돼. 카페인은 꿈도 꾸지 마. ”

 

 “ 의사 선생 역시 가차없군. ”

 

 

 먹고 나니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다시 졸음이 몰려왔어. 시계를 보니 자정이었어. 자고 싶지 않았어. 움직이고 싶었어. 펄쩍 뛰어오르고 빙글빙글 돌고 싶었어. 소파와 창문까지의 거리를 재보았어. 예전에는 딱 한 번 뛰어올랐다 내려오면 창문 바로 앞에 멈추었지. 지금은 그러지 못해. 뛰는 것도, 도는 것도, 춤이라면, 아무것도. 하지만 걸을 수는 있어. 그래서 난 창문까지 걸었어. 걷는 동안 몇 발짝인지 세었어. 단숨에 날아오를 수 있었던 거리.

 

 

 

..

 

 

 

 

 

사진은 둘다 2013년, 뻬쩨르의 맛있는 러시아 음식점인 '고골'의 보르쉬. 여기 보르쉬가 제일 맛있다. 한 그릇 먹고 나면 몸이 정말 따뜻해짐. 글에서 유라는 흑빵이랑 같이 줬지만 여기는 고급 레스토랑이므로 제대로 된 뽐뿌슈까(마늘 브리오쉬)랑 같이 나옴. 스메타나(사워크림)는 따로 종지에 나온다. 러시아 사람들은 저것을 푹푹 퍼서 수프에 잔뜩 넣고 풀어먹는데 나는 그냥 한스푼 정도만 넣는다. 스메타나를 넣으면 새빨갛던 수프 색이 핑크색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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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