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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14. 22:09

쓰는 중 - 단어와 기억, 그 외 about writing2020. 3. 14. 22:09

 

 

 

계속 쓰는 중이다. 전반부의 두 문단 발췌. 중간에 한두 문단 정도 생략되어 있다. 전에 발췌했던 부분들과는 흐름이나 말투가 좀 다르다. 나의 글들에서 이 사람은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화자는 미샤이다.

 

 

글에서 언급되는 이름인 안드레이는 미샤의 친구인 트로이의 본명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나는 그 시를 안드레이의 수첩에서 발견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몰래 시를 썼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내 명예를 위해 덧붙이자면, 나는 그 수첩을 우연히 발견했다. 안드레이는 대청소 중이었고 식탁 위에 책들과 수첩과 노트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펼쳐진 책들은 읽히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읽었다. 안드레이가 쓰고 내가 읽었다. 나는 그 시들의 일부를 지금도 기억한다. 단어들은 더 많이. 안드레이는 내가 그 모든 것들을 잊기를 바랐을 것이다. 혹은, 내가 모든 것을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략)

 

 

 

나는 여전히 안드레이의 말을 글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그 시는 잊지 않았고 아주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그가 언제 그 시를 썼는지도 알 것 같았다. 여름이었고 흑해로 향하는 기차 안이었다. 우리는 객차 연결 통로에 나와 있었다. 안드레이는 만취했고 멀미를 하고 있었지만 내가 잘 수 있도록 어깨를 빌려주었다. 그때 그는 바퀴와 레일과 불꽃과 자갈을 바라보고 있었다. 덥고 습한 바람이 불었다. 안개는 없었다. 먼지와 바람뿐. 나는 졸면서도 볼펜이 종이 표면을 사각거리며 긁는 소리를 들었다. 열기와 갈망으로 가득한 그의 눈길을 느꼈고 반쯤은 일부러 졸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

 

 

사진 속의 무용수는 다닐 심킨. Mariam Medvedeva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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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20. 3. 8. 15:30

쓰는 중 약간 - 스카프 추신 about writing2020. 3. 8. 15:30

 

 

 

계속 쓰는 중이다. 앞부분의 아주 짧은 문단 발췌. 미샤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한다. 스탄카는 일린의 이름인 스타니슬라프의 애칭. 올가는 모스크바 클리닉의 의사.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저께 올가는 저녁 주사를 놓고 나서 내 손목을 마사지해주는 척하며 스탄카가 보낸 쪽지를 쥐어주었어. 내용은 아주 짧았어. 자기와 지나가 내 짐을 꾸려서 가브릴로프로 부쳤다고 적혀 있었어. 그리고 추신 한 줄.  스카프들은 트레치야코프로 보냈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던 첫날 스탄카는 짐 푸는 걸 도와주면서 웬 스카프가 이렇게 많으냐고, 굼 백화점에 기증하라고 농담을 했었지. 굼보다는 트레치야코프가 낫다고 마음을 바꿔먹은 모양이야.

 

 

...

 

 

 

사진은 몇년 전 프라하의 유리공예 가게에서 발견한 스카프. 너무 아름다워서 사고 싶었는데 가격이 많이 비싸서 포기했었다. 저 가게에서 레냐가 나에게 부드러운 핑크와 보랏빛의 유리 펜던트를 선물했었다.

:
Posted by liontamer

 

 

 

1월부터 쓰고 있는 글에서 약간 발췌. 아주 짧은 두 문단이다. 화자는 미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문을 열자 뜨겁고 습한 공기가 해일처럼 몰려들었어. 소독약과 가솔린 냄새가 구름처럼 덮쳐 왔어. 집 안은 온통 뿌연 안개로 가득했어. 요원은 모두 셋이었어. 둘은 내 뒤와 오른쪽에 서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거실을 대각선으로 두 번 왕복하며 창문과 방문들을 열었어. 그러니 모든 문들은 닫혀 있었던 거겠지.

 

 

창문을 열자 놀랍게도 습기가 금세 빠져나갔어. 커튼 아래로 안개가 아주 작게 소용돌이치는 게 보였어. 느슨하게 매여 있는 띠 아래로 무지갯빛 거품이 일었어. 커튼 띠로 묶었었는데, 네바 강에 썰매 타러 갔을 때. 아빠가, 나를. 떨어질까봐.


 

 

 

 

 

맨 위 사진은 2018년 1월 블라디보스톡 바다, 맨 아래 사진은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 12월. 얼어붙은 바다 위로 썰매 타러 가던 어떤 아빠랑 아들의 모습이 예뻐서 찍음. 오랜 옛날 저 바닷가 근처 기숙사에 살았던 적이 있다. 안개와 무지갯빛 거품 사진을 올리면 발췌문에는 더 어울렸겠지만 그런 사진은 찍어놓은 게 없어서 대신 얼음과 눈, 썰매 사진 두 장 올려봄.

:
Posted by liontamer
2020. 2. 13. 21:34

생략된 단어들 about writing2020. 2. 13. 21:34

 

 

 

 

 

새해 들어 쓰고 있는 글이 있는데 시간적/정서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예전 글에서 몇 문장 발췌해 본다. 발췌된 글의 화자는 미샤의 친구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가 다시 한 팔을 내 목에 감았다.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게 군다고 생각했을 때 미샤가 낮고 깔깔한 음성으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스탄카, 좀 잡아줘. 넘어지기 싫어. ”

 

 

마지막 문장에는 두 개의 단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넘어지기 싫어, 저자들 앞에서.

 

 

6년 가까이 친하게 지낸 사이라면 그 문장과 단어를 잘라먹는 버릇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

 

 

 

이 문장들이 포함된 에피소드 일부를 예전에 이 writing 폴더에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4521


 

 

맨위 사진은 작년 12월말 블라디보스톡의 얼어붙은 바다에서 석양 즈음 찍은 것. 이미지 없이 올리려니 뭔가 허전해서 :)

:
Posted by liontamer
2020. 2. 8. 22:49

파편 from 밤, 레닌그라드 about writing2020. 2. 8. 22:49

 

 

얼마 전에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연말과 새해에 따로 구상했던 글이 있었는데 막상 자리에 앉아 노트를 열고 메모들을 적기 시작하자 다른 글을 쓰게 되었다. 가제를 '밤, 레닌그라드'라고 붙여놓긴 했는데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는 물론 모르는 일이다. 오래전부터 머릿속으로 이따금 상상하던 장면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이야기이다. 그런데 아마 지금은 이 이야기를 써야 하는 시기인 것 같기도 하다.

 

 

지난 주말에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좀 빨리 적어내려간 문단들 중 약간을 발췌해본다. 쓰는 중이라 아직은 호흡이 빠르고 거칠다. 문장들은 미샤의 1인칭 독백으로 기술된다. 가제 그대로, 어떤 밤과 레닌그라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좀 더.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는 언제나 그렇듯 크냐제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 그럴싸한 술책을 부리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누군가에 대한 서류를 만들고 절차를 밟는 데 있어 가장 필요 없는 존재가 누구라고 생각해? 당연히 그 자신이지. 등록 말소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스크바로 이송되었을 때 레닌그라드 거주등록부에서 지워진 상태였어. 어쩌면 그 전에, 재판을 받기도 전에. 아니, 헤아릴 수 없는 이전의 어둠 속에서.

 

 

그건 전혀 중요한 사실이 아니야. 내 핏속에 어떤 도시가 있고 그건 등록과는 무관하기 때문이야. 어떻게 번호와 글자와 도장과 서류철들이 한 인간을 어떤 도시에 영원히 속하게 만들 수 있겠어. 그건 하느님의 영역이겠지.

 

 

 

 

 

 

사진들은 작년 6월, 백야 시즌 한밤중의 페테르부르크 판탄카 운하. 소련 시절에는 레닌그라드. 이 사진 오른편에 보이는 거대하고 묵중한 다리는 로모노소프 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오른편 너머에 바가노바 발레학교가 있다. 미샤는 학창 시절 이 다리를 셀 수도 없이 건너다녔고 모든 운하와 모든 골목을 따라 걸었을 것이다.

 

 

 

 

 

 

 

 

로모노소프 다리에서 운하 쪽을 향해 찍은 사진인데 황혼녘이라 빛이 모자라서 흔들렸다. 저멀리 한가운데 흐릿하게 보이는 세개의 둥글고 파란 쿠폴은 트로이츠키 사원의 쿠폴들이다.

 

:
Posted by liontamer

 

 

 

네바 강 풍경.

 

네바 강의 넘실대는 수면을 볼때면 종종 떠올리곤 하는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 일부 발췌해 봄. 내 번역 + 원문 병기.


이 시는 3연으로 되어 있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 1연은 빼고 2-3연만. 이 시는 몇년 전 쓴 단편의 에피그라프로 썼고 소설 후반부에서 미샤가 인용하게 만들었다. 미샤도 2-3연만 읊었고 마지막 두 행은 뺐었다. 이녀석은 좋아하는 시나 노래를 잘 외기는 하는데 내키는대로 앞뒤도 잘라먹고 이것저것 뒤섞는 버릇이 있다.

 

 

..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네, 하늘을
가냘픈 대기, 맑은 바람
철제 울타리 너머로
검게 물드는 나뭇가지들을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하네, 엄숙하고
물결 넘실대는, 어둠에 잠긴 도시를
그리고 우리의 이별들과
짧은 만남의 순간들을.

안나 아흐마토바, 1914년

 

Оттого мы любим небо,
Тонкий воздух, свежий ветер
И чернеющие ветки
За оградою чугунной.  

 

Оттого мы любим строгий,
Многоводный, тёмный город,
И разлуки наши любим,
И часы недолгих встреч.  

 

 

.. Анна Ахматова ..  

 

 

 

 

 

 

... 번역의 '물결 넘실대는'은 단어를 직역하면 '물이 많은 / 물로 가득한'이란 형용사이다. 이 도시에 딱 들어맞는 단어인데 우리 말로 바꾸면 좀 꺽꺽해서 시어의 맥락상 내가 좀 의역했었다.

:
Posted by liontamer
2020. 1. 18. 23:04

오랜만에 카르멘 한 컷 + about writing2020. 1. 18. 23:04

 

 

 

오늘의 퀵 스케치는 오랜만에 카르멘 한 컷.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내 그림솜씨가 별로인 관계로 자꾸만 지나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둘이 좀 다르다고 우기면서... 지나가 아니라 오래전에 썼던 옴니버스 단편 시리즈 스타차일드의 주인공인 일명 펑크폭력녀 불량학생 카르멘임. 지나보다 더 구름처럼 붕 뜬 곱슬머리이고 색깔도 좀더 어두운 붉은색이다. 그리고 눈 색깔도 쫌 다르다... (근데 그거 빼면 결국 얼굴 똑같아보여 엉엉 똥손이라 그래 흑흑...)

 

 

간만에 카르멘을 그려본 이유는 지난주말에 옛날에 쓴 스타차일드 시리즈를 좀 뒤적여봤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완결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림을 그렸으니 오랜 옛날 썼던 글 아주 일부만 아래 발췌해 본다. 내용은 전혀 없고 그냥 묘사만. 8번째 에피소드에서 사고로 멈춘 엘리베이터에 갇힌 카르멘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카르멘은 일어서서 거울을 보았다. 치렁치렁한 붉은 곱슬머리를 휘장처럼 늘어뜨린 채 창백하고 작은 얼굴로 마주 보는 자신이 거기 있었다. 그녀는 오래된 유리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하늘색 눈을, 아침에 돋아난 아주 작은 여드름이 빨갛게 부풀어오른 하얗고 매끄러운 콧등을, 거의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진한 립스틱을 칠한 하트 모양의 입술을, 갸름하고 우울한 턱과 목, 사이즈가 큰 검은 티셔츠와 빛 바랜 청바지와 운동화를 보았다.

 

 

그녀는 알이 빠진 고대의 반지 같았다.

 

 

..

 

 

그런데 역시나 앞발이라 스케치에서는 글에서 쓴 묘사가 제대로 구현되지는 못했다. 사실 그림은 문장들을 떠올리지 않고 그냥 그렸고 '카르멘의 외모에 대한 묘사 몇 줄이 여기저기 있었는데' 하고 다시 뒤적여보니 마침 검정 티셔츠 입고 있는 장면이 있어서 가져와봤다 :)

 

 

:
Posted by liontamer

 

 

 

2019년도 딱 하루 남았다. 나는 블라디보스톡에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보다 한시간 더 빨리 올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몇년 전 썼던 수용소 중편 후반부의 일부를 아래 발췌해 본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나는 이 글을 2013년 3월과 4월에 썼다. 그때 나는 프라하에 머물고 있었다. 돌아와서 서울에서 글을 마무리했었다. 그 순간들이 너무 생생한데 이미 6년이나 지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긴 이제 나이를 많이 먹어서인지 시간들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버린다. 사실 십년 전 이십년 전의 기억도 생생하다. 물론 그건 취사선택된 특정 순간들에 대한 기억들이겠지만.

 

 

이 소설은 여기 폴더에 여러차례 조금씩 발췌해 본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좀 다른 면에서 소중한 소설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중첩되고 변형되면서 더 밀접해졌다. 오늘 발췌한 부분은 3부의 전반부 몇 페이지이다. 약물 고문 쇼크를 일으켜 클리닉으로 옮겨진 미샤를 그의 친구인 일린이 면회를 하러 온다. 일린은 피폐해진 친구와 이야기를 조금씩 이어나가면서 동시에 최근의 기억들을 몇가지 머릿속으로 되살린다. 미샤의 발레학교 동기이자 오랜 파트너인 지나에 대한 얘기도 좀 나오고, 미샤의 어머니 율리야에 대한 얘기도 약간 나온다.

 

 

지나이다는 지나의 본명이다. 맨날 지나라고 부르지만 러시아 이름답게 본명은 좀더 길다 :) 사족이지만 이 이름은 상징파 시인인 지나이다 기피우스, 그리고 화가 지나이다 세레브랴코바에서 따왔었다. 특히 전자.

 

 

율리야가 언급하는 이름인 세료자는 율리야의 남편이자 미샤의 아버지인 세르게이의 애칭이다. 세르게이는 이 글의 시간적 배경으로부터 20년 전에 체포되어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미샨카는 미샤의 또다른 애칭인데 율리야와 미샤의 주치의인 유라 외에는 이 이름을 쓰지 않는다. 벨스키는 예전에 발췌한 글들에도 자주 나왔다. 유력 정치인이고 미샤를 후원하는 인물이다. 발췌된 3부는 일린의 1인칭으로 서술된다.

 

 

사진은 예전에 페테르부르크 본치 카페에서 찍은 것이다. 그냥 눈에 들어서 올려봄. 글만 올리면 뭔가 아쉬워서.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그를 소파로 데리고 갔다. 미샤는 자기 발로 걸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마침내 소파에 앉혔을 때 그는 훅 하고 숨을 내쉬더니 팔걸이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잠시 가만히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병의 뚜껑을 따주자 별 말도 없이 물을 두어 모금 마셨다.

 

 

 병을 내려놓은 후 미샤가 한결 또렷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 진짜 올 줄 몰랐어. ”

 

 

 “ 전에는 왔던 사람 없었어? ”

 

 

 그 말을 입 밖에 낸 후에야 그게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리에서 소환된 직후부터 그 누구도 미샤를 본 적이 없었다. 나를 비롯한 그의 지인들과 극장 동료들은 갖은 인맥을 동원해 어떻게든 면회를 해보려고 애썼고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재판의 증인이 되기 위해 신청서를 쓰고 끊임없이 면담을 요청했지만 모두 묵살당했다. 지나이다는 아직도 세력이 꽤 남아 있는 자기 아버지와 미샤의 오랜 팬이었던 알렉산드르 고르차긴, 마이야 필리포브나 등 레닌그라드의 전통적 실력자들의 힘을 빌려 재판 날짜를 알아내고 증인 허가서까지 받았다. 그러나 당일이 되었을 때 고르차긴으로부터 우울한 전화가 걸려왔다. 재판은 이틀 전에 비공개로 진행되었으며 미샤는 이미 판결을 받고 이송되었다는 얘기였다. 지나이다는 너무 충격을 받아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무대에도 서지 못했다. 그 더러운 놈들은 심지어 미샤를 어느 교도소로 보냈는지, 형량이 얼마이며 정확한 죄목이 무엇인지조차 밝히지 않았다. 면회는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미샤는 별로 내키지 않는 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 엄마. 어제 왔었어. ”

 

 “ 그리고는 내가 처음이야? ”

 

 “ , 벨스키가 어제 와서 두 명만 허가해주겠다고 했지. 엄밀히 말하면 엄마는 내가 부른 게 아냐. 벨스키가 이미 데리고 왔더라고. ”

 

 

 미샤의 얼굴에 희미하게 찡그린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그가 율리야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쇼크에서 벗어난 후 지나이다는 율리야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날 지나이다의 집에는 나도 있었다. 나는 미샤보다도 더 독립적이고 더 말이 없으며 여왕처럼 도도하고 수녀처럼 침착한 율리야 야스미나가 평정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 이마와 뺨을 바닥에 비벼대며 짐승처럼 낮게 흐느껴 울었다.

 

 아, 세료자. 그놈들이 걜 끌고 갔어. 우리 아이, 우리 미샨카를 뺏아갔어, 그 천사 같은 애를, 아무 죄도 없는 앨 체포했어, 가둬버렸어. 이제 죽일 거야, 당신처럼. 그놈들이 우리 애를 죽일 거야...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야. 사라져버릴 거야. 미샨카, 내 아들, 불쌍하고 불쌍한 우리 아이... , , 아 세료자,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해...

 

 

 “ 그래도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어머니가 더 걱정하셨을 거야. 많이 힘들어 하셨어. ”

 

 “ 지나에게 고맙다고 전해줘. ”

 

 “ 우셨어? ”

 

 “ 아니. 우리 엄마는 내 앞에서는 절대 울지 않아. ”

 

 그리고 넌 율리야를 그대로 닮았겠지. 

나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미샤는 어머니 얘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듯 내 쪽을 보며 불쑥 말했다.

 

 “ 미안. ”

 

 “ 뭐가? ”

 

 “ 네 이름 말해서. 귀찮은 일 생길지도 모르는데. ”

 

 

 “ 그런 말을 하다니, 한대 패주고 싶은데.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다들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알아? 지나는 마이야 필리포브나에게 찾아가기까지 했어. 그 둘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아. ”

 

 

 “ ... ”

 

 

 미샤는 잠깐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눈꺼풀을 무겁게 깜박였다. 몸이 아파서 그런 건 아닐까 걱정도 잠깐 밀려왔지만 난 그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전혀 모르거나 기억나지 않는 얘기를 들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마이야 필리포브나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토록 그를 열렬하게 후원했던 여자를, 레닌그라드의 공작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여자를, 거의 한 달에 한 번씩은 극장 후원 모임에서 만났던 여자, 그를 아들처럼 아꼈던 그녀를. 지나는 그녀가 미샤에게 연정을 품고 있어서 항상 자신을 못살게 군다고 투덜대곤 했지만 난 그저 마이야 필리포브나가 지나와 같은 타입의 발레리나를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어쨌든 불러줘서 난 기뻤는데. 난 네가 지나를 부를 줄 알았어. 아니면 그 국립대 친구나. ”

 

 

 “ 네가 가장 안전했어. ”

 

 

 

 물론 난 그의 말을 이해했다. 벨스키가 내게 연락했을 때부터 알았다. 미샤는 키로프 동료들과 레닌그라드에 있는 지인들의 이름을 대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나마 모스크바에 있는 내가 가장 나았을 것이다. 벨스키를 비롯해 두세 명의 의원들과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으니까. 그건 완벽하게 이성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벨스키가 내게 했던 말에는 지나친 우려와 과장이 섞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특유의 매끄럽고 침착한 어조로 미하일이 이상하게 굴어도 너무 놀라지 말게. 꽤 심하게 앓아서 아직 완전히 맑은 정신을 찾지 못했으니까라고 말했다. 정치인답게 제대로 된 해명은 해주지 않았다. 왜 앓았는지, 그것과 이상하게 구는 것, 또렷한 정신을 찾지 못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다시 말해서, 그 더러운 놈들이 내 친구에게 대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자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다.

 

 

 나는 거의 의식적으로 농담을 섞어 말했다.

 

 

 “ 전략적으로 택해준 거라면 영광이지만 좀 섭섭하기도 한데. 난 너 정말 보고 싶었다고. 그래도 열 번째 안에는 들어야 할 텐데. ”

 

 

 “ 들어. 훨씬 더 앞에. ”

 

 

 지금껏 미샤가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 정말로 말문이 막혔다. 하긴 그 애는 평소에도 가끔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므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
Posted by liontamer
2019. 12. 22. 22:49

계속 가는 것 + 이전의 메모 about writing2019. 12. 22. 22:49

 

 

 

 

오늘의 메모를 적고 난 후 문득 떠올라서 발췌해봄. 예전에 쓴 글에서 트로이와 미샤가 나누는 대화 일부.

 

 

...

 

 

“ 왜 그렇게 자신에게 가혹해? 넌 지금 몇 사람 몫을 하고 있는데. ”  


“ 계속 가야 해. 멈추면 안돼. ”


" 잠깐 멈춰도 돼. 조금 쉰다고 생각해. ”


 " 아니, 난 계속 가야 해. 멈추면 일어나고 싶지 않을 테니까. ”

 

 

..

 

 

 

위의 대화가 포함된 짧은 에피소드를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를 때 이 폴더에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런 메모를 적었었다.

 

 

< ..... 어쩌면 저때 나는 미샤의 입을 빌려 내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진실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차피 소설쓰기란 거짓말하기이며 거기에 일부의 진실을 숨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 반대도 성립할 것이다.... >

 

 

... 노트북이 안돼서 폰으로 적느라 불편하긴 하다만. 저 메모와 소설 에피소드는 아래 링크에... 16년 여름이었다. 소설의 저 에피소드 자체는 12년 겨울에 썼다.

 

- 내가 마린스키 앞을 지날 때마다 생각하는 것, 그가 계속 가야 하는 이유 -

 

 

..

 

 

맨 위 사진은 트로이가 사는 동네에서 미샤네 동네와 극장으로 가는 길 풍경. 모이카 운하. 아래 사진 한장 더. 두 장 모두 지난 7월 밤에 마린스키에서 공연 보고 걸어오며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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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모이카 운하. 딱 3년 전. 2016년 12월. 이때는 아주 추웠다. 모든 운하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맑아서 산책하기 좋은 날이었다. 올 겨울은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유례없이 따뜻한 편이라 운하가 아직 이렇게 얼지 않았다고 한다.

 

 

이 운하는 미샤의 운하이다. 이 운하를 따라 쭉 걸어가면 트로이네 집이 있는 고로호바야 거리를 관통하고 시느이 모스트(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건너다 운하를 내려다보는 그 다리이다)와 이삭 광장을 지나고 포나르느이 모스트(거대한 가로등 램프들이 있는 다리이다, 포나리는 램프라는 뜻임)를 지나고 또 계속해서 걸어가다 크류코프 운하 쪽으로 꺾으면 키로프 극장, 지금의 마린스키 극장이 나온다. 물론 민트 블루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구관이다. 호박색의 화려한 신관은 2005년에 생겼으니 그 당시의 미샤는 그런 신관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마린스키 신관은 엄청나게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적이고 또 아름답고 매끈하고 세련된 건물이니까.  

 

 

예전에 썼던 소설 속에서 미샤는 발레단 신입 시절 처음에는 사도바야 거리에 있는 낡은 아파트에서 극장 동료들 세명과 함께 지내고 1년이 지난 후에는 톱스타 대접을 받아 극장 바로 근처에 있는 넓고 좋은 아파트에서 지나와 둘이 살게 된다. 사도바야 거리에 살 때는 이 운하를 따라 걸어서 극장으로 출근했다. 좋은 아파트에서 지나와 살게 된 후에도 그 집에서 자는 적은 별로 없고 걸핏하면 도시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또 툭하면 고로호바야 거리에 있는 트로이네 집에서 자고 나왔기 때문에 그때에도 역시 이 운하를 따라 극장에 가곤 했다. 차를 산 후에도 운전이 귀찮은데다 본시 산책을 좋아하는터라 그냥 걸어다니는 경우가 훨씬 많다.

 


 

 

 

페테르부르크, 당시 이름으로는 레닌그라드 토박이답게 미샤도 살을 에는 듯 춥지만 그래도 햇살이 비치는 한겨울에 꽁꽁 언 운하를 따라 걷는 것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붉은 다리(러시아어 이름은 끄라스느이 모스트)를 지나면서 다리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리들과 갈매기들에게 흑빵을 부숴서 던져주곤 했을 것이다. 새를 좋아하는 애니까.

 

 

다리 아래는 웬만하면 꽁꽁 얼지 않는다. 그래서 새들이 여기 모여 있곤 한다. 저때 나도 저 다리 난간에 기대어 새들에게 흑빵을 좀 던져주었는데 료샤가 강 오염시킨다고 투덜거렸음 -_- 빵은 유기물인데... 그리고 새들이 한순간에 다 찾아서 먹어치우는데 그런 내 말을 잘 들어주지도 않고 막 구박했다 엉엉 ㅜㅜ 그래놓고는 내 빵을 뺏아서 자기도 새들에게 먹이를 줌. 뭐야, 지도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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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6. 21:52

고로호바야 거리, 이름들 about writing2019. 12. 6. 21:52

 

 

 

11월 초, 해질녘 페테르부르크 고로호바야 거리. 날씨가 흐려서 석양이나 아름다운 푸른빛은 아쉽지만 없었다. 걸어가면서 폰으로 찍었더니 조금 흔들렸는데 색감도 그렇고 어쩐지 옛날 소련 느낌이라 레닌그라드 시절이라고 최면 주문을 외며 사진 올려봄. 뭐 레닌그라드 시절엔 저런 별 모양 전선 장식은 없었을 것 같지만.

 

 

이 거리는 상당히 길게 뻗어 있다. 쭉 따라서 올라가면 사도바야 거리와 이어진다.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를 가로질러 해군성 공원에 이른다. 네프스키 대로와도 가깝다. 내가 쓴 글들 몇편에 등장하는 트로이가 이 거리 어딘가의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도바야 쪽보다는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좀더 가까운 방향에. 소련 시절 이 거리는 제르진스키 거리로 불렸다. 하지만 내 입에는 고로호바야가 더 붙어 있어서 소설 속에서도 딱히 이름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알고 있으니 필요할 때는 언제든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퇴고 버전에서는 이름을 모두 수정해놓기도 했다.

 

 

그러니 이 소설들 역시 이 거리의 지난한 역사들과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면을 띠게 된다. 어딘가에서는 고로호바야가 되고 또 어딘가에서는 제르진스키가 된다. 아마도 이 거리가 몇년 동안 가졌던 이름인 코미사로프스카야로 불리는 버전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들이야 모두 달라지겠지만. 이것은 소련에 존재하는 다른 무수한 거리들과 도시들, 극장과 건물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페테르부르크가 페트로그라드가 되었다가 레닌그라드가 되고 다시 페테르부르크가 되는 것처럼, 마린스키 극장이 키로프가 되었다가 다시 마린스키가 된 것처럼. 이름이 바뀌고 또 돌아오는 과정들은 너무나도 이 나라의 역사나 삶과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 또한 어떤 면에서는 렌즈이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 니넬이라는 여자 이름이 유행했던 것처럼. (니넬은 '레닌'의 철자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이름이 어떻든, 이 거리는 현실 속에서 내가 매년 오가며 자주 걷는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 루트와도 겹치고 주로 묵는 숙소와도 가깝다. 동시에 이 거리는 허구의 소설 속에서 트로이와 미샤가 셀수 없이 걷는 곳이다. 트로이는 자기네 집이 이 거리에 있으니까, 미샤는 트로이네 집을 뻔질나게 드나드니까(게다가 여기서 극장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고) 그래선지 이 거리에 대해 나도 애정을 품고 있다 :)

 

..

 

 

(사족) 그러고보니 레닌그라드 시절이라면 도로에 차가 저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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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 22:54

네바 강변의 석조 난간, 글쓰기 about writing2019. 12. 1. 22:54

 

 

네바 강변의 석조 난간. 강 건너편으로 바실리예프스키 섬과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쿤스트카메라, 저 멀리로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이 보인다.

 

나는 이 석조 난간을 따라 걸을 때면 갈매기에게 빵을 던져주고 이 위로 훌쩍 뛰어올라 춤을 추고 그런 그를 끌어내린 친구에게 공연히 벌컥 화를 내는 미샤에 대해 생각한다. 물론 나는 언젠가 아주 오랜 옛날, 먼저 난간을 따라 걸었고 그 이후 그 글을 썼다. 그리고 지금은 거꾸로 그 인물과 글쓰기에 이 난간이 따라온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돌로 된 난간 위에서 몇 발짝 뛰어올랐다. 꼭 맞는 옷을 입고도 무대 위에서처럼 춤을 췄다. 빵조각을 채간 갈매기의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해 추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지만 트로이는 그 재능에 놀라거나 감명을 받을 겨를도 없었다. 그는 난간에 몸을 바짝 기댄 채 두 팔로 미샤의 허리와 골반을 감아 바닥으로 홱 끌어당겨 내렸다. 아마 안드레이 트로이츠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잊은 드문 경우였을 것이다. 트로이는 균형을 잡는 데는 별 재능이 없었으므로 하마터면 미샤와 함께 돌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미샤가 재빨리 몸을 뒤로 젖히며 한 손으로 난간을 짚고 한쪽 다리로 트로이의 무릎을 떠받쳐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싸늘하고 약한 바람이 불어와 미샤의 머리칼이 검은 깃털처럼 공중으로 가볍게 나부꼈다. 



 
 “ 봐, 위보다 아래가 더 위험해. 넘어질 뻔 했잖아. ”


 “ 너 그 위에서 헛디뎠으면 강으로 떨어졌을 거야. ”


 “ 강이야 헤엄치면 되지만 이건 돌바닥이잖아. ”


 “ 괜찮아, 넌 내 위로 떨어졌을 테니까. ”


 “ 미쳤어? 제대로 넘어질 줄도 모르면서. 뻣뻣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거짓말이 아냐, 안드레이. 위보다 아래가, 강보다 바닥이 더 위험해. 넌 머리가 깨졌을 거야, 뼈가 부러졌거나. ”



 미샤는 화를 내고 있었다. 까만 눈을 뜨겁게 태우면서 입술을 떨었다. 자기는 그렇게 위험한 짓을 밥 먹듯 하는 주제에 기껏 그가 뒤로 자빠질 뻔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트로이는 그 말을 그대로 해주었다.

 

 

...

 

 

엄밀히 말하면 미샤가 춤을 춘 난간은 이쪽이 아니고 사진 속 강 건너편인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당시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쪽에 있다. 미샤는 트로이에게 한소리 들은 후 어쩐지 토라진 채 말도 없이 궁전 교각을 빠르게 걸어서 강을 건너고 이쪽 방향으로 걸어온다.

 

저 짧은 몇 문단이 포함된 파트를 예전에 이 폴더에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앞뒤가 더 붙어 있어 맥락이 좀더 나온다.

링크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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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8. 22:59

겨울운하, 그리고 약간 about writing2019. 11. 28. 22:59





겨울 운하. 짐냐야 까나브까(Зимняя канавка)



내가 좋아하는 장소이다. 에르미타주 겨울궁전 사이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로컬들도 사랑하는 장소이다. 아주 작은 운하이지만 매력이 넘친다. 겨울궁전 아치 너머로 네바 강이 보인다.



이 도시의 운하는 나에게 각별하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곤 한다. 그래서 전에 쓴 글에 이런 대화를 넣었었다. (예전에 이 폴더에 저 대화를 포함한 파트를 좀 길게 발췌한 적이 있긴 하다. 글쓰기 메모와 함께)




...





 “ 나하고 레닌그라드는 같을지도 몰라. ”


 미샤는 트로이의 귓가에 입술을 마주 댄 채 따스한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 뿌리가 없어. 돌이킬 수 없이 안이 비었어. 파이프처럼. 운하의 검은 물이 그 안으로 차올랐다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그래서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어. 친구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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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발췌한 짧은 대화는 몇년 전 쓴 소설의 전반부이다. 열심히 쓰려 했지만 너무 업무도 과중하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을 겪느라 결국은 100여페이지밖에 못 쓰고 중단한 상태이다. 언젠가는 다시 쓰게 될 테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 잘 모르겠다. 항상 다시 쓰고 싶다. 그런데 써보려고 해도 도저히 에너지가 나지 않는다. 물리적인 에너지도 모자라고 또 그외의 여러 이유가 있다.

 

 

발췌한 대화는 예전에 이 about writing 폴더에 좀더 긴 버전으로 올려본 적이 있다. 시골이나 다름없는 지방 소도시 가브릴로프 극장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미샤가 그 지역의 문예지 편집장이자 노멘클라투라 가문의 유명한 미인 렐랴와 나누는 대화이다. 렐랴는 신임감독 인터뷰를 하러 가서 이것저것 묻는다. 그러다 미샤가 부임 후 백스테이지 뿐만 아니라 관객석에서 꾸준히 공연을 보는 이유에 대해서도 묻는다. 미샤가 거기 대답한다. 아래 대화는 거기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나는 미샤를 등장시킨 소설들과 에피소드를 꽤 여럿 썼지만 거기서 그가 자기 입으로 예술과 공연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드러내게 한 적은 별로 없었다. 아주 친한 사이인 트로이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때, 그리고 춤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던 무렵 외국 신문과 가졌던 인터뷰,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여기 렐랴의 인터뷰.

 

 

별 얘기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진부하고 또 당연하고 혹은 교과서 같은 얘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샤는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며(어디까지가 그의 진실일지는 물론 확언할 수 없다. 그는 저 멀리 있는 사람이고 소설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샤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이쪽 일을 해오면서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관 일부와도 상통한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나에게도 여러가지 방향과 생각들이 있고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미샤가 하는 이야기는 나에게도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종종 이 대사들을 입 안으로 되뇔 때가 있다.

 

 

(사진은 이번에 갔을 때 마린스키 극장 2야루스(4층) 관객석 한가운데에서 찍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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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것 같군요. 전 극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대를 봐야 한다고 말했죠. 그건 관객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어요. ”

 

 “ 어떤 사람들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지? ”

 

 “ 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공연을 보는지. 극장이라는 공간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이야기하고 보고 느끼는지. 그 모든 것이 중요해요.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 무대는 절반만 열려 있는 공간이에요. 극장은 예술가의 자기만족과 독백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니까요. ”

 

 “ 좀 의외네요. 전 당신이 엘리트주의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술가들 대부분이 그렇죠. 관객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잖아요. 관객들이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슬퍼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

 

 “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건 이성의 영역이죠. 이해하지 못하고도 사랑할 수 있고 슬퍼할 수도 있어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할 수도 있고요. 그들로 하여금 뭔가를 느끼게 만들 수 없다면 그건 실패한 공연이에요. ”

 

 “ 백조의 호수나 지젤이라면 모르지만 관객들이 호두까기 인형을 보면서 어떤 감정적 고양을 느끼지는 않잖아요. ”

 

 “ 하지만 즐거워하죠. 아기자기한 무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고 발레리나들의 화려한 의상과 움직임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고요. 감정적 고양이란 꼭 거창하고 드라마틱한 것만은 아니에요.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이 가끔 빠져드는 함정이 있죠. 장엄하고 영웅적인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추구하지 않으면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거라고 믿어버리는 것. 그건 일종의 도그마예요. 기본적으로 예술이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거기에는 진정성이 필요해요. ”

 

 “ 호두까기를 보면서 웃는 어린아이들과 잠자는 미녀를 보면서 그 구조적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발레 애호가들이 원칙적으로는 동일하고 평등한 관객이라는 것인가요? ”

 

 “ 네. ”

 

 “ 그건 가브릴로프 극장 예술감독으로서의 가치관인가요, 아니면 무용수이자 창작자인 미하일 야스민의 믿음인가요? ”

 

 “ 감독으로서의 저와 예술가로서의 저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겠죠. 하지만 관객에 대한 제 태도는 전자든 후자든 변함없을 거예요. ”

 

 “ 그것이 당신이 무대에서 그 수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비밀인가요? 그들 모두를 이해하고 동등하게 대하려고 했다는 것? ”

 

 “ 조금은요. ”


 

 

..

 

 

아래 링크로 가면 앞뒤 이야기가 좀더 붙어 있는 발췌본을 읽을 수 있다.

그 링크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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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3. 00:05

몇년 전의 글 약간 발췌 about writing2019. 11. 3. 00:05





 아래 발췌한 글은 몇년 전 썼던 중편의 일부이다. 중편이라기엔 길고 장편이라기엔 짧은 글인데 제목이 있긴 하지만 쓰는 동안은 '수용소 프리퀄'이라고 부르곤 했다. 미샤가 파리에서 체포된 후 수용소와 클리닉에서 겪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1~2부는 프라하에 머물때 썼고 3부는 돌아와서 썼다. 발췌한 글은 3부 후반부이다. 미샤의 친구이자 안무가인 일린이 그를 면회하러 와서 나누는 대화와 일린의 회상 일부. 



이 소설을 쓴지 꽤 시간이 지났고 그 사이에 나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일들을 겪고 나자 이 글은 나에게 더 예리하고 고통스럽게 읽히게 되었다. 쓸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읽을 때가 더 그런 것 같다. 보통은 반대이다. 자신이 쓴 글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좀더 객관적으로 읽게 되고 또 그 순간의 감정과 생각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게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좀 달랐다. 나는 물론 그 이유들을 알고 있고(전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느낌은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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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다지오였다, 격정적인 사랑의 춤이었다. 2인무는 그 애가 옐레나를 추는 것보다도 더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애가 그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싶었다, 무대 위에서. 그 어느 곳에도 미샤처럼 추는 무용수는 없었다. 이전에 미샤의 그 영문학자 친구와 이야기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저렇게 출 수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놨을 걸요. 그건 지금도 유효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 애처럼 출 수만 있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목숨이라도 내놨을 것이다. 나는 안무가였지만 그 이전에 무용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 수 있었다면 결코 안무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애에게 그때 뉴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왜 춤을 그만 두겠다고 선언했던 것인지 묻고 싶었다. 6월에 레닌그라드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이미 그에게는 보안 요원들이 여럿 딸려 있었다. 아파트는 두 번이나 수색당한 후였고 전화도 도청되고 있었다. 게다가 레닌그라드 무대에 올라온 그 불새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보는 것이 괴로울 정도였다. 물론 전후사정을 무시한다면 공연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안무를 대폭 수정해서 지나가 췄던 불새는 나름대로 매력적이었고 관객들은 백조의 호수를 연상시키는 해피엔딩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건 미샤가 원래 만들었던 작품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 화려하고 생기 넘치는 불새는 원본에 대한 조롱이자 끔찍한 패러디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질문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무대에 올라가지 않는 것과 춤을 추지 않는 것. 네겐 그 둘이 같아? ”

 

미샤는 생각에 잠겼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 애는 전혀 아파 보이지 않았다, 리허설 도중에 나와 함께 연습실 바닥에 앉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같지 않아. ”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있어? 자신해? ”

 

그게 뭔데? 무대? ? ”

 

.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지만 소파에 앉지는 않았다. 대신 에어컨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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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9. 10. 20. 21:22

모이카, 미샤의 운하, 극장과 백야 about writing2019. 10. 20. 21:22

 

 

 

지난 7월, 백야의 모이카 운하 사진 몇 장.

 

페테르부르크의 여러 운하들 중 도심을 가로지르는 세개의 운하가 있는데 판탄카, 그리보예도프, 모이카 운하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운하는 가운데의 그리보예도프이다. 여기에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피의 구세주 사원), 돔 크니기, 예술광장 등의 명소가 모여 있기 때문이다. 판탄카 운하를 따라가면 레트니 사드와 아니치코프 다리, 이즈마일로프 사원(트로이츠키 사원)이 나오고, 모이카 운하를 따라가면 이삭 성당과 마린스키 극장에 닿을 수 있다. 이 운하들은 도시를 가로지르고 또 얽혀든다.

 

미샤를 등장시켜 쓴 소설들에서 페테르부르크는 단순한 배경과 장소가 아니라 때로는 소설 자체이기도 했다. 이 도시를 드나들면서 나는 가끔은 오감을 열고 머리를 비운 채 걷고, 가끔은 글과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고, 가끔은 그들을 불러내어 같이 걷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고 에너지가 소진되어 한동안 글쓰기를 중단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페테르부르크를 거닐 때면 이러한 과정들이 되풀이된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이 도시에 몸이 가 있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뒤적이거나 혹은 그저 머릿속으로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에도 반쯤은 저절로 나는 도시의 곳곳을 재생할 수 있다. 거의 육체적인 반응에 가까운 재생이다.

 

판탄카 운하가 트로이와 알리사의 운하였다면 모이카 운하는 누구보다도, 미샤의 운하다. 극장으로 통하는 운하이기 때문이다. 극장. 사도바야 거리. 그리고 트로이가 살고 있는 고로호바야 거리. 이 모든 곳들을 관통하는 운하. 미샤는 도시의 모든 운하들을 알고 있고 눈을 감고도 그곳들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그래도 그의 운하는 모이카이다.

 

 

사진은 7월,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공연 본 후 나와서 운하 따라 걸어가는 길에 몇장 찍은 것이다.

 

 

 

 

 

마린스키 극장 이야기를 하고서 사진 한장 없이 넘어가는 건 어쩐지 아쉬우니, 천정 장식화와 샹들리에 사진 한장.

 

 

이날 보았던 발레 공연은 돈키호테였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프의 투우사가 정말 근사했던 날이다.

 

 

 

 

모이카 운하. 백야. 밤 10시 반에서 11시 사이.

 

 

이삭 성당의 황금빛 쿠폴이 보인다.

 

 

 

 

저 너머로는 카잔 성당의 쿠폴도 보인다. 미샤는 학창 시절과 사도바야 쪽에 살던 신입 단원 시절에는 이 길을 따라 걸어서 극장에 다녔다. 이후 극장 근처 아파트를 받은 후에도 이 운하를 뻔질나게 지나다녔을 것이다(그리고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트로이네 집도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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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9. 9. 17. 22:45

트로이와 알리사의 운하 about writing2019. 9. 17. 22:45




판탄카 운하. 지난 7월, 백야 저녁.


전에 메모에서 몇번 언급했듯, 판탄카 운하는 내가 쓰는 글의 등장인물들 중 특히 트로이와 알리사의 운하이다. 둘은 이 난간과 돌바닥을 따라 자주 걸었고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알리사가 떠나고 난 후에도 트로이는 계속해서 이 운하를 따라 걷는다. 판탄카 운하 난간 귀퉁이에 이렇게 나뒹구는 술병을 보면 나는 보통 트로이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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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10. 23:15

담배 연기, 어둠과 뇌우 about writing2019. 9. 10. 23:15

 

 

 

비도 오고 이것저것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담배 뻑뻑 피우는 미샤 크로키 한 장 그림.

 

 

아래 글은 몇년 전 썼던 단편의 초반부이다. 전에 이 about writing 폴더에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파리에서 레닌그라드로 소환되는 비행기 안에서 담배 피우는 미샤와 거기 오버랩되는 과거의 에피소드에 대한 짧은 발췌문이다. 담배 연기. 어둠. 뇌우. 거장과 마르가리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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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샤는 피곤해 보였다. 얼굴은 창백했고 길게 뒤엉킨 속눈썹 아래로 어두운 그림자가 패여 있었다. 항상 제멋대로 치솟는 경향이 있던 검은 머리칼은 이마 위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갸름한 얼굴 위로 광대뼈 윤곽이 더 날카롭게 두드러져 있었다. 파리의 더운 날씨 때문인지 소위 위험인물이라 무기를 감출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재킷은 걸치지 않았고 주머니가 없는 검은색의 긴 소매 리넨 셔츠와 짙은 회색의 슬랙스 차림이었다. 웅웅거리는 소음과 둥근 창 너머로 보이는 두터운 구름이 아니었다면 연습실에서 막 나온 것 같다고 착각할만한 모습이었다.

 

 

 미샤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안개처럼 빽빽하고 불투명한 연기에 휩싸여 그 창백하고 지친 듯한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 서쪽에서 다가온 어둠이 거대한 도시를 뒤덮었다. 다리도, 궁전들도 사라졌다. 마치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실처럼 가느다란 섬광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내달렸고 천둥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울리는 천둥과 함께 뇌우가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 휩싸여 볼란드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나는 미샤를 모스크바로 데려갔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샤는 볼쇼이나 므하트 극장보다는 트레치야코프 갤러리를 더 좋아했다. 갤러리에서 나와 저녁을 먹으러 갔을 때 나는 몇 년 전 파리에서 출간된 무삭제판 불가코프 소설을 선물했지만 그 아이는 벌써 지하 루트로 그 책을 입수해 읽은 후였다.

 

 

 “ 실망하실 필요는 없어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

 

 

 식어가고 있는 수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말했다.

 

 

 “ 그건 갱지 복사물이었거든요. 돌려가며 읽었는데 제 차례가 왔을 땐 잉크가 번져서 여기저기 지워져 있었어요. ”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나는 그에게 책에서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몇 장 읽어달라고 청했다. 마음속으로는 어느 부분을 읽어줄지 예측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마르가리타가 빗자루를 타고 모스크바 밤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이나 사도바야에서 악마 무도회를 여는 장면이다. 혹은 반항심 많은 사춘기 소년답게 나를 권력과 체제의 상징으로 설정해 놓고는 보란 듯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라는 대사를 읊어 주리라고 생각했다.

 


 
 미샤는 밑도 끝도 없이 대여섯 문장만을 읽었다. 어둠과 뇌우에 대한 장면이었다. 왜 그 부분을 읽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미샤가 낭독한 저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무척 좋아하는 장면이다. 내용도, 그리고 문장들 자체도 무척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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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앞 버스 정류장. 네프스키 대로에서 궁전 교각을 지나 네바 강을 건너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들어오면 '대학교'가 나타난다. 정류장 이름이 아예 '대학교'(우니베르시쩻)이다. 오래 전 나랑 쥬인은 수업을 마친 후 이정류장에서 기숙사행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7번, 뜨랄레이부스(트롤리버스)는 10번이었는데 둘다 무지하게 안 왔다. 게다가 퇴근 시간이 되면 네프스키에서 궁전 교각을 건너 여기로 오는 길은 정말 엄청나게 막히는 터라 한겨울엔 여기서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 기다리는 게 정말 춥고 힘들었다. 이 사진엔 강이 안 나왔지만 학교와 정류장이 네바 강변에 있는 터라 강바람도 장난 아니었고. 또 겨울이면 오후 2~3시 무렵 해가 져버리니 진짜 힘들었음.

 

이 정류장에서 나와 쥬인은 좀처럼 오지 않는 7번과 10번을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더욱 과거로 갔다. 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오기 전, 레닌그라드로. 글을 쓰면서 나는 정든 도시를 다시 돌아다녔고 좀 다른 시선으로 골목들과 장소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미샤를 가장 자주 소환했다. 그는 나의 주인공이었으니까. 

 

하지만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들어오자 이 장소는 트로이와 알리사의 공간이 되었다. 미샤의 공간들은 강 너머에 집중되어 있었다, 모이카 운하와 사도바야 거리, 조드쳬고 로시 거리와 바가노바 발레학교, 그리고 키로프 극장.. 미샤야 원체 도시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아이였으니 바실리예프스키 섬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가장 가까운 공간들은 바로 극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실리 섬은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 다녔던(지금의 이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이다) 트로이와 알리사, 그리고 그들의 문학서클 친구들의 공간이 되었다. 어쩌면 나에게는 훨씬 더 소중한 기억의 장소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잠시나마 이 학교에 드나들었고 바실리 섬 안쪽의 기숙사에 살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트로이와 미샤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인 갈랴와 료카 부부의 아파트를 내가 지냈던 기숙사 바로 옆 건물로 정하기도 했다.

 

나와 쥬인은 이 정류장에서 기숙사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알리사와 트로이도 여기서 버스를 기다렸다. 갈랴와 료카가 사는 아파트에 가려고. 좀처럼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알리사는 키큰 트로이의 어깨 뒤에 숨어 바람을 피하곤 했을 것이다. 더 오래 전, 레닌그라드 시절. 아마 저런 광고판은 없었겠지만. 꽁꽁 얼어붙은 네바 강과 칼날처럼 살을 파고들던 바람, 얼음에 반사되어 창백하게 빛나던 햇살은 동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름. 백야 시즌의 이 찬란한 빛살도.

 

이따금 미샤도 여기서 버스를 탔을 것이다. 수업이 끝난 트로이와 함께 갈랴네 집 문학 모임에 갈때, 혹은 그와 하느님만이 아는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무수한 이곳저곳들을 쏘다니기 위해. 나는 트로이와 알리사의 경로들을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고 때로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미샤에 대해서라면 그냥 놔두었다. 그 아이는 그렇게 놔둬야 했다.

 

이 사진은 지난 7월에 갔을 때 찍은 것이다. 료샤는 자기도 여기서 버스를 기다린 적이 많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둘다 '7번은 진짜 안 왔어~!' 하고 기억을 되살리며 웃었다. 나는 '근데 지금도 7번은 엄청 늦게 와' 라고 덧붙였다. 료샤는 '나는 버스 안 탄지 오래돼서 이제 몰라' 라고 부르조아다운 마무리를 하였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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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 맑은 생선수프 우하. 엄밀하게 말하자면 원래는 우크라이나 쪽 수프이다. 여기 크림을 넣으면 핀란드식 우하가 된다. 얼마 전 써서 이 폴더에 전문을 올렸던 미니단편 '핀란드 우하'에서 미샤가 취한 채 계속해서 '나는 맑은 우하가 좋은데' 하고 알리사에게 찡찡대는 장면이 나온다. 그게 이것. 안에 든 연어와 당근, 레스토랑 조명 때문에 좀 붉게 나오긴 했는데 하여튼 맑은 국물이다.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러시아 음식점 '고골'의 우하. 여기 음식이 좀 비싸긴 해도 맛있는데 갈수록 유명해져서 점점 자리 잡기가 힘들어지고 있음. 이제는 가기 전에 예약을 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흑흑 예전이 좋았는데... 이 사진은 2016년 겨울에 갔을 때. 따끈한 생선 수프 우하를 먹으면 몸이 데워진다.

 

단편에서 미샤가 맑은 우하 타령을 하자 알리사가 '맑은 우하는 노인네 입맛이거나 보드카 마시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거야' 하고 타박을 준다. 근데 사실 나도 미샤랑 입맛이 비슷한 편이라서 크림 넣은 핀란드 우하보단 이 맑은 우하가 더 좋다 :)

 

 

그 미니 단편 '핀란드 우하'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8950

 

 

 

 

보드카를 곁들이면 좋겠지만 이때 나는 심신이 많이 힘들 때라 모르스 주스를 마셨다.

 

 

 

 

 

제대로 된 맑은 우하에는 이 '뽐뿌슈까'를 곁들여 먹게 되어 있다. 마늘 브리오쉬인데 폭신하고 마늘향이 감도는 게 무척 맛있다.

 

 

 

 

폰으로 찍었던 클로즈업 사진 두 컷 더.

 

 

 

비밀을 털어놓자면... 사실은 알리사도 크림 넣은 핀란드 우하보다는 이 맑은 우하를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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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9. 21:48

크림을 넣은 생선수프와 흑빵 about writing2019. 4. 9.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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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스케치 한 장. 노동노예 옥토끼나 말썽쟁이 미샤, 빨간머리 지나 대신 음식 스케치. 며칠 전 올린 미니 단편에 나오는 핀란드 우하(크림을 넣은 생선 수프)와 러시아 흑빵 두 조각. 앞발이라 대충 그려서 별로 맛있어 보이진 않는다만 사실 맛있습니다 :) 수프에는 알리사가 말한대로 연어와 대구, 파슬리와 우끄롭(딜), 그리고 감자와 당근이 들어갔습니다. 잘 찾으면 셀러리도 있음. 그리고 크림.

 

핀란드식 생선 수프와 흑빵, 보드카에 대한 그 미니 단편은 여기 : https://tveye.tistory.com/8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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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난달에 몇 주 동안 주말에 쓴 아주 짧은 단편을 올려본다. 제목은 '핀란드 우하'. 우하는 생선 수프이다. 각종 생선과 야채를 넣어 끓이는데 보통 우하라고 하면 맑은 국물의 수프이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대구지리나 복지리 같은 것. 정석으로 끓이자면 생선뼈와 머리로 육수를 내고 비린내를 날리기 위해 보드카도 들어간다. 핀란드식 우하는 크림을 넣어서 끓이는 생선 수프이다. 나는 맑은 우하를 좋아하지만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진눈깨비 오던 날 길을 잃고 헤매다 꽁꽁 얼었을 때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핀란드 우하를 먹고 몸이 녹았던 기억이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핀란드 우하와 너무나도 친절했던 청년 데니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단편은 아주 짧다. 12폰트로 A4용지 9~10페이지 가량. 플롯도 거의 없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었는데 몇주 전 저녁에 아무런 기승전결 없이 그저 단어 몇개와 한두 줄의 대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나는대로 대화들을 적어나갔고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어떤 글들은 그냥 그렇게 시작된다.

 

 

짧은 파편 스케치이다. 사실 독립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다. 오랫동안 쓰고 있는 미샤와 레닌그라드, 가브릴로프 우주에 속해 있다. 이 글의 배경은 1970년대 초, 소련 레닌그라드이다. 예전에 썼던 레닌그라드 장편(미샤의 친구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온다)과 배경이 같고 등장인물도 그 글에 나왔던 알리사와 미샤이다. 화자는 알리사. 애칭은 알랴. 트로이와 가장 친한 친구이고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트로이와 함께 문학 모임을 조직해 외국 문학을 읽고 사미즈다트(지하문학)와 금지문학들을 돌려보며 토론하는 인물이다. 친구들과는 달리 노멘클라투라 집안의 딸이고 어릴 때는 정치가인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좀 했다. 알리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예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 글에 이름만 언급되는 갈랴, 료카, 코스챠, 이고리, 스베타 등은 모두 이 문학 모임 멤버들이다. 이 글에서 미샤는 아직 발레학교 학생이다. 아파트 주인은 갈랴와 료카 부부이다. 예전에 쓴 레닌그라드 장편은 트로이와 미샤가 갈랴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문학모임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갈랴의 아파트에서 문학 모임이 열린다. 다들 만취해 뻗는다. 알리사 혼자 깨어 있다. 그리고 미샤가 문을 두드린다. 이야기는 짧고 가볍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핀란드 우하






 

 

 

 초인종은 고장 나 있었다. 갈랴는 2주일째 출장 중이었고 료카는 초인종을 고칠 줄 몰랐다. 수리 요청 서류를 쓰기가 싫다고 했다. 문을 잠그지 않으면 된다고 태평하게 굴었다. 결국 트로이가 서류를 써서 관리사무실에 갔다. 네 번쯤 갔고 수리 접수하는데 사흘이 걸렸다. 고치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차피 불편한 건 없었다. 료카 뿐만 아니라 갈랴도 문을 잠그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임은 툭하면 열렸다.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별의별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드나들었다. 문제는 아파트 곳곳에 널려 있는 지하출판물들과 우리 번역 원고들이었다. 참다못해 내가 ‘제발 문 좀 잠가! 경찰들이라도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래!’ 하고 성질을 내자 이고리가 ‘괜찮아, 나랑 트로이가 다 찢어서 먹어버리면 돼. 보드카 한 병만 있으면 금방 해치울 수 있으니까 5분만 벌어줘. 네가 미인계를 쓰면 되겠네.’ 라고 농담을 했다. 발칵 화를 내려는데 료카가 그 하염없이 상냥한 표정으로 빙긋 웃는 바람에 나도 결국 흐지부지 웃어버리고 말았다. 료카가 그렇게 유순하게 웃으면 너무나도 예세닌을 닮아서 나는 금방 허물어져버린다. 트로이는 나에게 ‘그런 게 어디 있어. 넌 예세닌 좋아하지도 않잖아. 비논리적이야’ 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무슨 소리, 나는 예세닌을 좋아한다. 외모만. 

 


 그래서 2주일 동안 문을 벌컥벌컥 열거나 발로 걷어차는 녀석들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처음에는 노크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늦은 밤이었고 눈보라 때문에 창문이 엄청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술에 떡이 되어 나자빠져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건 나와 코스챠 뿐이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필사해 온 브로드스키 시들을 함께 읽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코스챠는 너무 취해서 그게 단어인지 가게 전표 숫자인지 구분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그래, 알랴. 네가 다 맞아. 참 좋아’ 하고 추임새를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트로이는 그날 없었다. 있었다면 같이 재미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을 텐데. 

 


 꼬맹이는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노크를 했다. 마침내 나는 긴가민가하며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고 입술이 파래진 미샤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 다 자는 줄 알았어. 그냥 돌아갈까 했는데. ”

 

 

 “ 문 열려 있었는데. ”

 


 “ 예의를 지키느라. ”

 


 “ 예의바른 꼬마는 새벽 한시에 남의 집 문을 두들기지 않아. ”

 


 “ 그래도 소리치지는 않았잖아. ”

 


 “ 빨리 들어와. 얼어 죽겠네. ”

 

 


 미샤는 순식간에 모자와 목도리와 코트를 벗었다. 작은 눈 폭풍을 몰고 들어온 것 같았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그래도 부츠를 벗고 슬리퍼를 신을 때 보니 양말은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꼬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 신발은 좋은 거 신거든. ”

 


 “ 그래야겠지. 발로 먹고 살아야 되잖아. ”

 


 “ 음, 굳이 안 그래도 당이 먹여 살려주긴 할 거야. 소련 시민인데. ”

 


 미샤가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이 녀석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돼먹지 않은 농담을 좋아한다. 나중에 키로프에라도 가면 저 말버릇 때문에 고생하게 될 것이다. 아니, 볼쇼이에 갈지도 모르지. 어쨌든 여기 우리끼리야 상관없다. 

 

 


 나는 미샤를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스챠의 재킷을 낚아채 꼬마의 어깨에 뒤집어 씌웠다. 미샤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제대로 무용수 티를 냈다. 평소에는 애들이 아무리 ‘피루엣 한번만 보자. 점프면 더 좋고...’ 따위 간청을 해도 그냥 웃어넘기곤 했는데. 지금은 꽁꽁 얼어붙은 채 연달아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무대 위의 왕자님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귀여운 꼬맹이 같으니. 이 모습을 타냐가 봤어야 하는 건데. 

 


 
 찻물을 올리려고 보니 주전자도 없고 빈 냄비도 없었다. 전부 설거지통에 쌓여 있었다. 아니, 주전자는 아까 이고리가 깔고 앉아 찌그러뜨렸다. 료카는 하고많은 살림살이 중 하필 주전자냐며 울상을 지었다. 갈랴가 탈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저 주전자를 도로 펴놓든지 아니면 어디서 하나 구해 오라고 투덜거렸다. 초인종 고장 난 건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기껏 주전자 하나에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구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을 끓이기가 어렵게 되자 나도 이고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더 싫었다. 렌지 위에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저녁에 스베타가 가져왔던 생선 수프가 좀 남아 있었다. 박박 긁으면 한 접시 정도 나올 것 같았다. 크림이 굳어서 엉겨 있었기 때문에 물을 좀 부었고 숟가락으로 살살 저으며 데우기 시작했다.

 


 미샤는 차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카펫도 깔려 있지 않은 부엌 바닥에서 슬리퍼를 신은 채 타닥타닥 발을 구르고 팔을 이리저리 뻗어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옆으로 돌렸다 난리였다. 어깨에 걸쳐줬던 모직 재킷이 두터운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결국 나는 꾸짖었다.

 


 “ 먼지! ”

 


 “ 창문 열면 되는데. ”

 


 “ 집안까지 시베리아로 만들 셈이야? ”

 


 “ 아 그러면 안 되지. 마가단... ”

 


 미샤는 잠잠해졌다. 팔짝팔짝 뛴 덕에 몸이 좀 녹았는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나는 다 데워진 생선 수프를 접시에 부었다. 

 

 


 수프 접시를 밀어주었을 때 꼬맹이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빵이라도 곁들여줘야겠다 싶어 찬장을 뒤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미샤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 핀란드 우하야? 에이... ”

 


 “ 투정하지 말고 그냥 먹어. 꽁꽁 얼었잖아. ”

 


 “ 난 그냥 우하가 좋은데. 크림 넣은 건 별로야. ”

 


 “ 맑은 우하는 노인네나 보드카 마실 줄 아는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거야. 넌 아니잖아. ”

 


 “ 뭐가 아니야? ”

 


 “ 보드카, 못 마시잖아. ”

 


 “ 무슨 소리. 마실 수 있어. 세 잔까지는 거뜬해. 많이 봤으면서. ”

 


 “ 거짓말 안 통해. ”

 


 나는 반쯤 말라붙은 흑빵 두 조각을 미샤의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미샤는 숟가락조차 들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까만 두 눈에 작은 파란 불빛이 반짝거렸다. 목덜미 어딘가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언제부터 알았어? ”

 


 “ 뭘? ”

 


 “ 나. 술 못 마시는 거. ”

 


 “ 처음부터. ”

 


 “ 다들 모르던데. ”

 


 “ 난 ‘다들’이 아니야. ”

 


 “ 안드레이도 모르던데. ”

 


 “ 트로이라고 불러. 걔 그 이름 싫어해. ”

 


 “ 난 좋은데, 그 이름. 안드레이 공작은 별로지만 우리 안드레이는 좋아. ”

 

 


 나는 미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애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사실 그랬다. 우리는 항상 필사 원고나 갱지 인쇄본을 놓고 토론을 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와 트로이가 이야기를 했고 꼬맹이는 듣고 있었다. 이따금 질문을 하는 게 전부였다.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세 번째랑 네 번째 행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떻게 돼?’ 등등. 미샤는 말수가 적은 애였다. 

 


 트로이는 그 애와 따로 만나 번역 노트를 보여주고 책도 같이 읽곤 했다. 나는 미샤와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 애에게 나는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는 똑똑한 누나였다. 그리고 나는 트로이만큼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은 성격도 아니었다. 타냐처럼 그 애의 재능에 경탄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발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극장에는 가끔 갔지만 무용보다는 연극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미샤에게는 어딘가 좀 신경을 긁는 구석이 있었다. 한마디로 좀 건방졌다. 하긴 어릴 때부터 무대에 올라간 데다 누구에게나 잘한다 잘한다 하고 인정을 받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트로이는 꼬마의 그런 면에 매료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미샤는 여전히 수프를 뜨지 않았다. 흑빵을 조금 뜯어서 먹고 있을 뿐이었다. 뺨이 불그스름했다. 다시 재채기를 했다. 

 


 “ 수프 먹으라고 했잖아. ”

 


 “ 모레 무대 올라가야 돼. 크림은 좋지 않아. 고지방. ”

 


 “ 그냥 먹어, 그깟 지방질 이틀이면 다 녹아 없어져. 핀란드 우하가 얼마나 맛있는데. 크림 들어 있어서 부드럽고 고소해. 몸도 따뜻해질 거야. 연어랑 대구가 들어 있어. 파슬리랑 우끄롭도. 스베타네 할머니가 끓여놓은 거 몰래 한 냄비 퍼왔댔어, 우리는 아까 다 한 그릇씩 먹었어. ”
 

 

 


 꼬마는 수프를 한 숟갈 떠서 먹었다. 까만 눈에 구슬 같은 광채가 돌았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먹어보니 맛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샤가 뜬금없이 물었다.

 

 


 “ 알랴, 핀란드 가봤어? ”

 


 “ 가봤지. 가깝잖아. 너는? ”

 


 “ 엄마가 그러는데 어릴 때 아빠랑 엄마랑 같이 갔었대. 기억은 안 나. 너는 핀란드가 좋았어? ”

 


 “ 글쎄. ”

 


 “ 그러면 어디가 좋았어? 넌 어릴 때 외국에 살았잖아. 여기저기. ”

 


 “ 나는 런던이 좀 나았어. 암스테르담은 싫었고. ”

 


 “ 왜? 난 가보고 싶어, 암스테르담. 여기처럼 운하도 있고. ”

 


 “ 그래서 싫었어. ”

 

 


 나는 식탁 한가운데 놓여 있던 술병을 끌어당겼다. 기적적으로 보드카가 남아 있었다. 한 잔 따라서 마셨다. 미샤는 내 입술에 잔이 닿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갈망하는 눈빛으로 보였다. 내가 아니라 알콜을.

 

 


 “ 난 그래서 가보고 싶은데. 운하. 암스테르담. 아빠는 런던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어. 엄마가 말해줬어. 우리 엄마는 불어 공부했는데 프랑스에는 못 가봤대. 엄마는 모든 곳이 같을 거라고 했어. 그럴까? 런던과 암스테르담과 레닌그라드, 헬싱키가 같았어? ”

 

 


 보드카는 뜨거운 칼처럼 목구멍을 찌르고 태웠다. 말라서 딱딱해진 흑빵 조각을 오래 씹어 넘기자 취기 대신 축축하고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약간 달콤하면서도 구수하고 시큼하고 전반적으로는 씁쓸한 맛이 입 안과 목구멍 전체를 채웠다. 말 그대로, 흑빵의 맛.

 

 


 “ 아니, 같지 않았어. 그런데 똑같이 지루했어. ”

 


 “ 도시가? 사람들이? ”

 


 “ 사는 게. ”

 


 “ 그땐 어렸잖아. 어떻게 그래? ”

 


 “ 인생은 어른이든 어린애든 똑같은 거야. ”

 


 “ 아니, 사는 거 말고. 지루하다는 거. 애들일 땐 시간이 빨리 가는데. 모든 게 빨리 달아나. 안 가본 곳들도 너무 많아서 매일 새롭게 길을 잃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엄마랑 아빠, 친구들도 있고... ”

 

 “ 그거랑 지루한 건 다른 거야. ”

 


 “ 뭐가 다르지? 문학적인 표현인 거야? ”

 


 “ 아마도. ”

 


 “ 흐음. ”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미샤는 진한 크림이 엉겨 있는 뜨거운 수프를 떠먹었다. 먹다가 숟가락을 놓쳐서 테이블보에 연어 부스러기와 감자조각을 흘렸다. 꼬마는 빵 끄트머리로 크림 얼룩을 닦았다. 테이블보가 아니라 자기 입술에 묻은 자국을. 별처럼 반짝이는 까만 눈 어딘가에 취기가 어려 있었다. 그때에야 나는 이 망나니 녀석이 이미 다른 곳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퍼마시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그러니까 살점이 떨어져 나갈듯 추운 길거리를 쏘다니고 아무도 문을 안 열어주는데도 줄기차게 노크를 해대고 실없는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는 거겠지. 술김에. 언제부터 나랑 이렇게 얘기하는 사이였다고. 말썽쟁이 꼬맹이 같으니. 기껏 열일곱도 안 된 주제에, 졸업하려면 일 년이나 남았는데 허세만은 이미 하늘을 찔렀다.

 

 


 나는 새 잔을 꺼내왔다. 이 집에 딴 건 몰라도 보드카와 술잔만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갈랴와 료카는 은근히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잔에 보드카를 가득 따라서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꼬마는 거부하지도 않고 잔을 받아 홀짝 마셨다. 쉬지도 않고, 한방에 끝까지. 그리고는 기침이 나오는 걸 숨기려고 수프를 잽싸게 두 숟가락이나 떠먹었다. 그래봤자 눈가와 코가 새빨개지고 있었다. 

 


 
 한 잔 더 따라주었을 때 미샤가 노래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 그러면 새 수프로 바꿔줘. 크림 든 거 말고. 맑은 우하로. 나 지금 보드카 마시잖아. ”

 


 “ 아니, 크림 든 우하도 보드카랑 어울려. 수 쓰지 말고 다 먹어. ”

 


 “ 나 사실 노인네 입맛인데. ”

 


 “ 웃기지 마, 아이스크림 좋아하면서. ”

 


 “ 알랴는 엄마 같구나.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내가 으깬 감자 먹기 싫다고 우니까 감자 다 안 먹으면 아이스크림 안 준다고 했었지. 아빠가 그거 몰래 먹어줬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개나 사주셨어. 에스키모. 플롬비르. 너무 좋아서 밤에 잠이 안 올 정도였어. 아빠랑 아이스크림, 어느 쪽이 더 좋은지 헷갈리기까지 했어. 매일이 그런 하루라면 어떻게 지루할 수가 있어? 핀란드에도 아이스크림이 있겠지, 런던에도, 암스테르담에도. 아빠도. 그러면 모든 게 빨리 달아날 거야. 잠도 못 잘 거야. 날아다닐 거야. 지루한 게 뭔지 난 모를 거야. ”

 

 



 나는 아빠에 대해 생각했다. 대사관과 관리들, 제복들, 볼가 승용차들, 서류들, 라디오, 스모그, 물이끼, 운하, 안개, 바다, 호수, 작은 창문들, 책들, 회색의 거리들, 서로 다르지만 똑같이 지루한 도시들. 아빠에게 인사하는 사람들. 스몰니 집의 거실. 보드카. 그루지야 와인. 우유 넣은 홍차. 터키 과자. 아빠를 찾아오는 사람들. 당. 위원들. 파벨. 아빠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돌마예프가 밀려났으니 아빠도 아마 몇 년 못 갈 거라고. 나를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상대를 찾아줘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파벨을 골라왔다. 당과 모스크바가 밀어주는 모범적인 남자. 안정적이고 탄탄한 가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를 위해서. 그런데 이 모든 게 지루하지 않다고?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당돌하고 바보 같은 허세쟁이.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귀여운 이 꼬맹이. 

 

 

 

 미샤는 새로 따라준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수프를 먹었다. 어느새 접시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흑빵으로 크림을 몽땅 닦아 먹었다. 남은 보드카를 홀랑 다 마셨고 결국 기침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빵이 목에 걸렸다고 뻥을 쳤다. 그리고는 여전히 노래하는 어조로 말했다.

 



 “ 아, 잊었네. ”

 


 “ 뭘? ”

 


 “ 건배. 알랴를 위해. 건강을 위해. 푸쉬킨을 위해. 우리 그렇게 하잖아. ”

 


 “ 나중에. 다같이 마실 때. ”

 


 “ 하긴 두 잔밖에 안 마셨으니까. 그럼 푸쉬킨은 남겼네. ”

 


 “ 이제 몸 녹았지? ”

 


 “ 응. 따뜻해졌어. 졸려. ”

 


 “ 너 잠은 잘 자니? ”

 


 “ 잘 때도 있고 못 잘 때도 있어. ”

 


 “ 오늘은 잠 잘 올 거야. 핀란드 우하도 먹고 보드카도 마셨으니까. ”

 


 “ 좋아. 잠이 오면 정말 좋아. ”

 


 “ 저쪽으로 가서 자. 소파 하나 비었어. ”

 


 “ 나중에. 다같이. 안드레이도 오면. 남은 한잔 같이. 푸쉬킨을 위해. 그때는 맑은 우하. ”

 

 



  꼬마는 취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거의 잠꼬대였다. 부엌 구석의 낡은 소파로 데려다 주자 금세 인사불성이 되어 잠들었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던 코스챠의 재킷을 주워서 덮어주자 담요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옷깃을 꼭 쥐고 목까지 끌어올리며 쌕쌕 숨소리를 냈다.

 

 



 나는 크림 찌꺼기가 말라붙은 접시를 설거지통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남은 보드카를 따라 마셨다. 반 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다 떨어진 수프와 흑빵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됐다. 술 때문에 더워져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지만 꼬맹이의 본을 받아 ‘나중에, 다같이. 트로이도 오면.’ 하고 혼잣말을 하며 거실로 돌아가 남은 필사본을 다 읽었다.

 

 

 

 



FIN
2019.3.9 ~ 3.30


 

 

..

 

 

 

 

 

 

 

미샤와 알리사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단어 몇개.

 

마가단은 스탈린 시절 악명높은 강제노역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예세닌과 브로드스키는 러시아 시인. 에스키모와 플롬비르는 러시아 아이스크림 종류이다. 전자는 초콜릿 입힌 하드 아이스크림, 후자는 유지방이 높은 둥글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콘.

 

트로이가 본명인 안드레이란 이름을 싫어하고 이 이름을 택하게 된 유래는 예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7043

 

'알랴, 건강. 푸쉬킨을 위해' 라는 말은 전에 쓴 글들에서 유래했다. 갈랴의 문학 모임 멤버들의 습관이다. 보통 러시아인들은 건배할 때 첫잔부터 순서대로 여인을 위해 건배하고, 이후에는 건강, 그 다음엔 성공이나 뭐 이것저것 순서대로 하는데(물론 때에 따라 다르다) 이 친구들은 아무래도 문학 모임이다 보니 세번째 건배는 항상 '푸쉬킨을 위해!' 하고 외치는 버릇이 있다. 이 건배사는 미샤의 입에도 붙어 있기 때문에 예전에 쓴 단편 Frost 에서도 미샤가 비행기 안에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술을 마실 때 써먹는다.

 

알리사에 대한 발췌본 몇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016 (알리사와 기계벌레, 불가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

https://tveye.tistory.com/5178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https://tveye.tistory.com/5040 (파리의 알리사)

 

 

 

 

맨위에서 언급했던 그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에서 내 몸을 녹여주었던 핀란드 우하. 이때 에피소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5

 

언젠가 이 우하와 카페, 데니스에 대해 단편이나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신 이 미니 단편을 쓰게 되었다.

 

 

 

 

이건 내가 집에서 끓였던 약식 핀란드 우하.

 

크림을 넣어 끓이는 핀란드 우하 레시피에 대해 전에 번역해 올린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8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 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의 바실리예프스키 섬 쉡첸코 거리에 있다. 내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가 있던 동네이고 이 아파트는 그 근처에 있다. 이 건물 어딘가에 트로이와 알리사네 모임 아지트인 갈랴네 집이 있다. 이건 여름에 가서 찍은 사진이라 햇살이 좋고 밝게 나왔지만 겨울엔 물론 춥고 어둡다.

 

이 동네와 아파트들에 대한 사진들은 여기 : https://tveye.tistory.com/8509

 

 

 

 

이런 창문들 중 하나가 갈랴네 집 창문일 것이다.

 

 

 

겨울의 그쪽 동네. 이 겨울 풍경은 몇년 전 찍은 거지만 사실 레닌그라드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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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어젯밤 마친 글은 알리사의 1인칭 시점으로 썼다. 아주 짧고 가볍고 조용한 미니 단편이었다. 알리사는 예전에 트로이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지만 서술자로 나선 적은 없었다.



아마 몇주 전 무의식적으로 단어 하나와 대화 몇개를 떠올리고 곧 그녀를 불러내 쓰기 시작한 것은 언제 어느 순간이든 내가 알리사와 뭔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쓰는 순간이면 그게 어느 누구가 되었든 작가는 그 인물과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최소한의 일부를 공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찻물을 올리려고 보니 주전자도 없고 빈 냄비도 없었다. 전부 설거지통에 쌓여 있었다. 아니, 주전자는 아까 이고리가 깔고 앉아 찌그러뜨렸다. 료카는 하고많은 살림살이 중 하필 주전자냐며 울상을 지었다. 갈랴가 탈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저 주전자를 펴놓든지 아니면 어디서 하나 구해 오라고 투덜거렸다. 초인종 고장 난 건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기껏 주전자 하나에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구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을 끓이기가 어렵게 되자 나도 이고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더 싫었다.




...





우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얘기했어. 아직도 내가 빌려줬던 번역 노트들을 기억하더라. 시 같은 건 난 구절도 가물가물한데 걘 다 외고 있었어. 난 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걔는 자기 얘기는 별로 안 했어. 나에 대해 물었지. 런던에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일은 힘들지 않은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사람들과는 잘 지내는지.



난 하마터면 울 뻔 했어. 왜냐하면, 트로이. 걔가 정말로 묻고 있었던 건 내가 그곳에서는 덜 외로운지,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놓고 관대해졌는지, 그래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사랑하게 됐는지에 대한 거였으니까.




..






찌그러진 주전자에 대한 단락은 어제 마친 글에서, 아래의 대사는 몇년 전 쓴 글에서 발췌했다. 둘다 화자는 알리사이다.



어제 마친 글은 퇴고를 마치고 맘이 내키면 이 폴더에 전문을 올려보겠다. 겨울밤 알리사와 미샤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진 스케치 파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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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9. 3. 30. 23:44

오랜만에 about writing2019. 3. 30. 23:44

 

 

아주 오랜만에 글을 한 편 썼다. 3주 전 토요일 밤에 무심코 시작해서 주말에 한두페이지씩 썼고 오늘 남은 절반을 몰아서 썼다. 아주 짧다. 9페이지 가량. 미니 단편이고 이렇다 할 플롯도 없고 절반 이상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 그냥 스케치이지만 다시 뭔가를 쓴 것 자체로 충분하다. 지금은.

 

다 쓴 후에는 일단 글을 덮어둔다. 완성하자마자 오타를 찾고 문장이나 앞뒤를 수정하는 것이 무리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 순간의 감정적 상태를 잠시 간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단편은 짧고, 쉽게 썼다. 그러니 자고 나서 내일이면 아마 퇴고를 할 것이다. 딱 그 정도의 작고 얕고 부드러운 스케치니까.

 

이제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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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모이카 운하변을 따라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나오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이 카페가 나온다. 트로이츠키 모스트 카페. 즉 트로이츠키 다리 카페라는 이름이다. 트로이츠키 다리는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교각 중 하나이다. 네바 강의 다리 중 제일 유명한 건 역시 궁전 다리이지만 이 다리도 상당히 유명하고 랜드 마크 중 하나이다. 에펠의 작품. (그 에펠 맞다)



이 카페를 지나칠 때마다 한번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어쩐지 이 카페는 혼자서 불쑥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다음에 가면 료샤랑 같이 가봐야지. 



카페 간판도 촌스러운데 왜 들어가고 싶었느냐면, 이름 때문이다. 전에 쓴 글의 심리적 화자로 등장했던 인물의 이름이랑 같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그의 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였는데 보통은 애칭인 트로이로 불린다. 이 이름을 지을 때 안드레이라는 이름은 톨스토이의 등장인물에서 따왔고(전쟁과 평화의 그 안드레이 공작 맞다), 성인 트로이츠키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원 중 하나인 트로이츠키 사원에서 따왔다. 더불어서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트로이츠키 다리에서도. 



그래서 이 카페 들어가보고 싶은데 이쪽 길은 공사를 할 때가 많아서 한적하게 산책하는 일이 별로 없고 대로 건너편 방향 산책길이 더 예쁘기 때문에 잘 안 다니게 되고... 카페도 좀 투박해 보여서 혼자 들어갈 마음이 확 내키진 않았었다. 나중에 보니 여기는 소련식 카페라고 한다. 더더욱 들어가봐야 하는데! 담에 페테르부르크 가면 료샤를 꼬셔서 꼭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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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이름과 그에 대한 메모, 소설의 소개 부분은 아래. 여기 트로이츠키 사원 사진도 있다




트로이츠키 다리에 대한 메모와 사진들은 아래. 이때 한참 그 글을 쓰고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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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