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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1. 23:07

잠시, 2년 전 이맘때 쓰던 글 발췌 about writing2014. 12. 31. 23:07

 

2014년도 한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2년 전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아주 오래 전 만들어냈던 인물을 되살려냈다.

 

그 2년 전은 내게 상당히 혹독한 한 해였다.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마도 그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그 당시 쓰던 글이었을 것이다. 그 글과 함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 있었다. 나는 그 글을 2012년 10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썼다. 아마 지금이라면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의 주인공을 되살려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여러 편을 썼는데 그 글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또 내밀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글을 마친 후 '어쩌면 나중에 이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다면 이 글은 거기서 빼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배경은 1970년대의 소련 레닌그라드. 나의 주인공인 미샤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의 시기를 다뤘다. 심리적 화자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강사이자 미샤의 친구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 애칭은 트로이였다. 소설은 약 7년 동안 주인공과 트로이, 극장, 그리고 그들의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꽤나 긴 이야기였지만 키워드는 언제나 명확했다. 그건 재능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쨌든, 재작년 연말, 이맘때에 쓰던 부분 발췌해 본다. 소설의 후반부. 배경은 1976년 가을. 주인공 미샤는 스물 한살이다. 키로프 수석무용수로 승승장구하고 있던 무렵, 그리고 안무가로도 데뷔해 호평을 받기 시작한 시기. 그러나 부상과 다른 몇 가지 이유로 두어 달 휴가를 받았을 때이다.

 

후반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스탄카'는 미샤의 친구이자 볼쇼이 안무가인 스타니슬라프 일린의 애칭이다. 일린은 전에 발췌했던 글의 화자로 등장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3221)

세레브랴코프, 레냐, 지나 등 언급되는 인물들은 미샤의 극장 동료들이다.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저 레냐는 내 친구네 아들내미 레냐가 아님! 그 꼬맹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냈던 인물이었음 ㅎㅎ)

트로이가 등장하는 부분들은 이전에 이 writing 폴더에 몇번 발췌했던 적이 있다.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배포, 복제하거나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

 

....

 

 

한밤중에 트로이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담요 밖으로 나와 있던 맨 어깨에 선뜩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문이 열려 있나 싶었지만 조금 정신이 들자 그 이유를 알았다. 옆이 비어 있었다. 미샤는 그와 함께 침대를 쓸 때는 항상 베개를 같이 베거나 그의 어깨와 가슴 사이에 머리를 대고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잤다. 여름에는 좀 더웠지만 이런 계절에는 조그만 스토브를 켜놓은 것처럼 따뜻했다.

 

그는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어둠에 점차 익숙해진 눈을 옆으로 돌리자 미샤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벽에 기대지도 않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턱을 무릎에 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이 밝은 회색과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창 너머에서 스며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아니면 그 검은 눈 안쪽에서 발화한 불꽃 때문인지 모호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방 안에 안개처럼 뭉쳐져 있는 어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쓸쓸하고 고통스럽고 두려움에 잠긴 눈빛으로.

 

트로이는 눈을 감았다. 못본 척 해주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애를 껴안고 키스를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미샤는 언제나 그의 곁에 누울 때면 순식간에 잠들곤 했다. 잠을 못 이루며 뒤척이는 일도, 중간에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이제 그가 고로호바야의 침실에서도 제대로 잠들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쁜 꿈을 꾸고 잠깐 깨어난 것 뿐이다.

 

잠시 후 미샤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여전히 스토브처럼 따뜻한 온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트로이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러자 미샤가 한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더 꽉 잡고 싶었지만 그를 깨울까봐 망설이는 것 같았다. 손가락 끝을 쥐고 있는 그 애의 손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며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어서, 그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어서 트로이는 더 이상 자는 척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한 팔로 미샤를 끌어당겼다.

 

“ 아, 미안. 안드레이, 계속 자. ”

“ 악몽이라도 꿨어? ”

“ 그냥, 잠이 안 와서. 신경 쓰지 말고 자. ”

“ 이리 와, 재워줄 테니까. ”

“ 피곤하게 자던데. ”

“ 그래도 재워줄 수 있어. ”

 

미샤가 담요 안으로 기어들어왔다. 트로이는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 위에 얹고 한 팔로 허리를 안았다. 가슴팍 위로 미샤의 귀와 뺨이 따스한 열기를 내뿜으며 와 닿았다. 미샤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귀를 댄 채 옆으로 누워 있었다. 심장 소리를 세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스케로프가 쓰는 방법대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하지만 어둠이 걷힐 때까지 그 아이는 트로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고 그대로 머물렀고 아마 잠든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

 

 

트로이는 새벽에 잠시 깊은 잠에 빠졌고 자명종이 울렸을 때 퍼뜩 놀라 깨어났다. 그때 미샤는 거실 창가에 선 채 두 팔을 위로 쭉 뻗고 금방이라도 대기권을 빠져나갈 듯한 자세로 로켓처럼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차갑고 희미한 아침 햇살 속에서 그 애의 몸은 끝없이 이어지는 광선처럼 길게 솟아올랐고 거기에는 그 어떤 뼈와 살도, 장애물과 가림막도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투명했고 한없이 길고 높이 뻗어 올랐고 형체 없이 빛났다. 그림자조차 없었다. 오로지 끝이 보이지 않는 선과 빛, 바람, 주변을 달아오르게 하는 열기 뿐이었다.

 

트로이는 오랫동안 침실 문가에 선 채 그 비밀스러운 변형의 순간을 응시했다. 한참 후 미샤는 바닥으로 내려왔고 두 다리를 반듯한 일자로 뻗으며 머리와 팔과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굽혔다. 책장을 접듯 몸을 절반으로 접어 아랫배로부터 가슴과 어깨, 두 팔과 이마를 완벽하게 바닥에 밀착시켰다. 양옆으로 길게 펼쳐진 두 다리를 감싼 슬랙스의 얇은 천 위로 근육이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바닥에 엎드려 완전히 정지한 순간에도 그 육체 내부에서는 소용돌이치는 움직임이 끓어올라 흘러넘칠 듯 했다.

 

트로이는 등을 돌려 욕실로 갔다. 어쩐지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그가 나왔을 때 미샤는 부엌 식탁 위에 걸터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트로이를 보더니 주전자에서 펄펄 끓는 커피를 한 잔 따라주기까지 했다. 알리사의 말이 맞았다. 그 애가 끓여준 커피는 갈랴의 집에서 마신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모이카 운하 뒤편에 있는 단골 카페에서 내주는 커피만큼 훌륭했다.

 

“ 너 이런 실력을 왜 이제야 발휘하는 거야? 5년 동안 한 번도 안 끓여줬잖아. ”

 

“ 냉동 옥수수로 여물 같은 걸 만들어 먹는 게 불쌍해서. ”

 

“ 먹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확신하다니. 맛은 나쁘지 않았는데. ”

 

“ 그냥 커피나 마셔. ”

 

“ 커피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어디서 이렇게 만드는 걸 배웠어? ”

 

“ 우리 엄마. 아침에 진한 거 두 잔 마시지 않으면 절대 못 깨어나. ”

 

“ 아, 넌 어머니 닮은 거구나, 잠에서 빨리 못 깨는 거. ”

 

“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엄마도 아침엔 졸려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걸 마시고 싶어해. 그래서 내가 배웠어. 지금은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끓여주지만. ”

 

“ 아리나 바실리예브나가 누구야? ”

 

“ 엄마 아파트에 같이 사는 할머니. 봉쇄 때 가족 다 잃고 혼자야. 음식 솜씨가 형편없어. 커피도 별로야. 엄마가 나한테 집에 들르라고 하는 건 90퍼센트는 커피 때문이라고까지 하더라. ”

 

“ 네 어머니 취향이 나랑 똑같은가봐. 딱 좋은데. ”

 

“ 우리 엄마는 더 진하게 마셔. 설탕은 4분의 1 스푼만 넣고, 크림은 절대 안 넣어. 넌 절대 안 마실 걸. ”

 

“ 그래? 지금 건 어떻게 맞췄어? 레시피 있어? ”

 

“ 모르겠는데, 대충 끓여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마셨을 걸. 엄마가 아버지 생일이면 이렇게 만들어서 나한테 줬으니까. ”

 

“ 아... 너희 아버진 달콤한 걸 좋아하셨나 보다. 미식가셨어? ”

 

“ 글쎄. 난 커피는 별로 안 좋아해서. 엄마가 주면 마시는 척만 했어. 차가 더 좋아. ”

 

미샤는 찻잔을 내려놓은 후 냉장고에서 케피르를 꺼냈다. 팩을 뜯어 입에 대고 마시다가 등 뒤에서 트로이가 찬장 문을 열었을 때 경고하듯 말했다.

 

“ 그 빵, 어제처럼 버터 떡칠하려는 거지? 난 안 먹어. ”

 

“ 버터 없이 먹을 수는 없어, 벌써 굳었단 말야. 잼도 바를 거야. 잔뜩. 99퍼센트의 러시아 남자들이 버터와 잼이랑 같이 살아. 나머지 1퍼센트가 너 같은 불쌍한 무용수야. ”

 

“ 1퍼센트도 안 될걸. 레냐도 잼 없이는 차를 안 마셔. 스탄카도. ”

 

“ 일린? 차에 잼을 곁들여 마시는 사람치곤 굉장히 말랐던데. ”

 

“ 음, 나보다 두 배는 더 먹을 걸. 타고 난 거야. 아무리 먹어도 체중이 늘지 않아. 근육도 잘 안 붙고. ”

 

“ 그런 게 부러워? ”

 

“ 전혀. 스탄카는 너무 작아서 밀려났는걸. 볼쇼이나 키로프나 마찬가지야. 어느 정도 외모나 체형이 안 되면 제대로 된 역을 주지 않아. 군무 첫 줄에 제일 잘 빠진 애들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야. 스탄카 같은 무용수는 아무리 잘 춰도 캐릭터 댄스나 바리아시옹 정도 밖에 못 얻어. 그런 면에선 세레브랴코프 같은 인간이 유리하지. ”

 

“ 너도 못 얻는 역이 있어? ”

 

“ 나한테도 돈키호테 투우사 같은 건 안 줘. 그건 180센티미터 넘는 애들이 가져가. 아사예프는 185 정도를 선호해. ”

 

“ 넌 작지도 않잖아! 기껏 몇 센티미터 밖에 차이 안 나는데도 안 줘? ”

 

“ 발레만큼 편견과 전형으로 가득 찬 공연예술은 없어. 세레브랴코프나 레냐에게는 투우사를 주고 내게는 바질을 주는 거야. 틀에 박힌 이미지도 마찬가지야. 요즘도 아사예프는 로미오 출 때 내게 금발로 물들이라고 하지. 지나가 백조 출 때도. 우린 둘 다 말 안 듣지만. 니나마저도 키트리 출 때는 검은 머리로 바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아. ”

 

“ 난 네가 원하는 역은 다 가질 수 있는 줄 알았어. ”

 

“ 다 가질 수도 있겠지, 언젠가는. ”

 

미샤는 케피르 팩을 구겨 휴지통에 집어던지면서 돌아섰다. 검은 눈에 회색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 그때도 원할지는 모르겠지만. ”

 

버터와 잼을 바른 빵을 두 조각 먹고 주전자에서 커피를 한 잔 더 따라 마신 후 트로이는 미샤와 함께 집을 나갔다. 그는 학교로 강의를 하러 갔고 미샤는 러시아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간다면서 반대편 방향으로 갔다.

 

트로이는 그가 전날 주워섬긴 곳들을 모두 쏘다닐지 궁금했다. 돔 크니기. 피의 사원. 판탄카. 블라지미르 사원. 쿠즈네츠느이 시장. 스타로 칼린킨 다리... 네프스키 일대와 네바 강변과 핏줄처럼 뻗어나간 운하들 구석구석. 그리고 뒷골목들. 어둠과 습기가 덮쳐와 눈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물과 돌의 도시, 순찰 경찰들과 보안요원들의 눈조차 가로막는 안개가 차오르는 뒷골목들. 미샤는 10월이 다 가도록 극장과 연습실 대신 도시 곳곳을 쏘다녔고 단 한 번도 트로이에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
Posted by liontamer

 

작년 초 프라하에 머물렀던 동안 썼던 글이 있는데, 분량은 약 200페이지가 좀 안되는 경장편이었고 총 세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글을 쓰게 된 배경은 예전에 올렸던 카페 엘리펀트와 카를로비 바리에 대한 얘기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http://tveye.tistory.com/2022)

 

당시 프라하로 떠났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그 글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 글은 1년 반이 지난 지금에서야 쓰기 시작했다. 그곳, 프라하는 추웠고 어딘가 음습했고, 또 외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추락과 변절, 깊이 스며든 어둠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곳이었다. 어떤 면에서 러시아와 비슷했지만 그것과는 또 달랐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곳에서 수용소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만일 내가 그때 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면, 혹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내가 그 글을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썼을지도 모른다. 필요한 글이었으니까. 하지만 방식은 달랐을 것이다. 감정도 달랐을 것이다.

 

그 글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부는 수용소 간수, 2부는 주인공을 후원하던 어느 당 간부, 3부는 주인공의 친구를 심리적 화자로 내세우고 있었다. 1~2부는 3인칭 시점으로 썼고 3부는 1인칭으로 썼다. 대부분은 소설의 구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와 주인공 간의 심리적 거리 때문이기도 했다. 내겐 거의 언제나, 1인칭이 3인칭보다 쓰기에는 쉽다. 보통은 3인칭 시점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글은 주로 카페 에벨에서 많이 썼다. 그리운 카페 에벨)

 

발췌한 부분은 3부의 도입부이다. 화자는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일린이라는 인물로, 볼쇼이 극장 안무가이자 주인공인 미샤와는 절친한 친구이다. 이 도입부에서 화자인 일린은 죄수 면회실에 앉아 있다. 반체제 혐의로 체포된 후 정신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약물 쇼크를 일으키고 모스크바 비밀 요양소로 이송된 친구를 면회하러 온 것이다. 물론 그 면회는 죄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도, 화자의 의지도 아니다.

 

새 글 쓰다가 잠깐 구조를 정리하기 위해 작년에 썼던 이 글을 다시 뒤적였다. 잠시 그 때 생각이 나서 몇 문단 발췌해 본다.

 

처음 나오는 크냐제프 라는 인물은 보안위원회, 속칭 루뱐카, 그러니까 KGB 측에서 붙여준 담당 요원. 대화에서 언급되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는 주인공을 후원하는 고위직 당 간부이자 2부의 심리적 화자이다. 그리고 라라는 일린의 딸이다. 라라가 미샤를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건 이름과 부칭을 모두 붙이는 러시아식 존칭이다.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말아주세요 *

 

..

 

 

 크냐제프는 한동안 내게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주로 면회 중 언급해서는 안 되는 내용들에 대한 경고였다. 내게 면회를 허가해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특히 반체제적 발언이나 서방 국가를 찬양하는 언사를 엄금했다. 나처럼 정상적인 소비에트 시민에게 그렇게 죄질이 과중하고 사상이 불온한 정치범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 입에 발린 걱정을 늘어놓았다. 마침내 나는 가능한 한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 지나친 표현 아닌가요. 게오르기 이바노비치는 미샤가 곧 석방될 거라고 하시던데요. ”

 

 “ 아, 게오르기 이바노비치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아마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아직 결재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때까지는 여전히 구금 상태고 연방에 위협을 가한 반체제 선동분자로 남아 있다고 해야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뭐 서류상으로는 그렇다 이겁니다. 우리는 명령과 규칙에 따를 뿐이죠, 잘 아실 테지만. 그러니 신중하게 얘길 나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작품의 팬으로서 충고해 드리는 겁니다. 전 볼쇼이를 좋아해서. ”

 

 “ 왜, 아예 그 친구의 팬이라고 얘기하시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

 

 “ 아뇨, 절대 그런 말은 안 할 겁니다. 애초부터 그런 스타일의 무용수는 제 취향에 맞지 않아서요. 안무한 작품들도 표현이 좀 지나친 편이고. 설령 말이죠, 완벽한 가정입니다만, 제가 그 젊은 친구 춤을 조금 맘에 들어한 적이 있다 쳐도, 그 야하게 뒹굴어댔던 마지막 작품을 꽤 높이 평가한다 해도 전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현명하신 분이니 무슨 뜻인지 잘 아시겠지요. ”

 

 “ 글쎄요, 전 머리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

 

 크냐제프는 소리도 내지 않고 웃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 면회 시간은 30분 드릴 겁니다. 꽤 긴 시간이죠. 감시자는 없을 겁니다. 게오르기 이바노비치가 보내신 분이니까요. ”

 

 문을 열고 방을 나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크냐제프가 덧붙였다. 그 혐오스러운 인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 아,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꼭 30분을 다 채울 필요는 없어요. 그 친구 아직 그럴만한 상태가 아니라서. ”

 

 보안위원회 쪽 작자들은 모두 저렇게 밉살스러운 화법을 교육받는지 궁금했다. 아마 분명히 매뉴얼이 있을 것이다. 전에 미샤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루뱐카 심문관 매뉴얼처럼’ 이란 표현을 무심코 내뱉고는 곧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 라는 수식어였지만 억지로 묻지는 않았다. 미샤는 하기 싫은 얘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내 딸 라라는 전에 미샤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는 시대를 잘못 탔어요. 십자가와 천사와 성인들, 악마와 용이 득실댈 때 태어났어야 했어’

 

 열네 살짜리 소녀치고는 꽤 예리한 말이었다. 평소에는 미샤나 미셴카라고 부르는 주제에 그때는 이름과 부칭을 제대로 갖춰 불렀고 자못 점잔을 빼며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자신이 벌써 5년 동안 그를 열렬히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전혀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그 애에게 ‘그럼 그 때 태어났으면 미샤가 무슨 일을 했을 것 같은데, 성 게오르기처럼 용이라도 잡아 죽일까?’ 하고 물었다. 라라는 발칵 화를 내면서 ‘아빠는 몇 년이나 그렇게 가깝게 지냈으면서 아직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를 잘 모르는 거야? 절대 남의 피를 자기 손에 묻힐 사람이 아닌데. 그게 악마든 용이든 마찬가지야. 아마 사자한테 던져지거나 화살을 비 오듯 맞고 순교해 성자가 되겠죠.’ 라고 대꾸했다.

 

 처음으로 나는 딸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내가 ‘그건 너무 끔찍한 상상인데. 게다가 미셴카는 무신론자야’ 라고 말하자 라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그러니까 아빤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라고 대꾸하고는 자기 방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나는 미샤에게 라라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미샤는 별로 충격을 받거나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언제나처럼 낮고 조용한 어조로 대꾸했다.

 

 “ 종 치는 사람. ”

 

 “ 뭐? ”

 

 “ 종 치는 사람 쪽이 더 좋아. 난 교회 첨탑 좋아하거든, 종소리 듣는 것도. 사자한테 물어뜯기거나 화살 맞으면 진짜 아플 거야. 그런 건 별로야. ”

 

 “ 겨우 종지기가 될 거라고 하면 라라가 실망할 텐데. 장엄하거나 영웅적인 맛이 하나도 없잖아. ”

 

 “ 장엄하거나 영웅적인 건 벌써 무대에서 수도 없이 췄는걸. 세상은 그렇게 거창하고 드라마틱하지 않아. ”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주 평범한 사무실 소파에 홀로 앉아 면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미샤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현실은 거창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무대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끔찍할 수는 있었다. 적어도 미샤 자신에게는 그랬다. 아마 그때도 그는 자기 말을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

 

 

 

카페 에벨 사진 두 장 더.

 

 

 

지난 4월에 나는 일린의 회상에 등장하는 그의 딸 라라를 화자로 부활절 단편을 하나 쓴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서 라라는 당시 볼쇼이에서 춤추기 위해 모스크바로 옮겨온 미샤를 짝사랑하는 열 살짜리 소녀로 등장한다. 70페이지 정도의 중편인데 나중에 시간 나면 올려보겠다.

 

** 추가 : 라라가 화자로 나오는 그 단편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390

 

 

:
Posted by liontamer

오늘은 비 올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아침에 나가려고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심지어 어제보다 더 추적추적 내리는 듯 했다.


비를 싫어하지는 않는데 이맘때 내리는 비는 싫다. 춥기도 하고 너무 어두컴컴해서. 이렇게 비가 오면 페테르부르크의 10월이 생각난다. 춥고 습하고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하고.. 거기 있을 때도 그맘때 날씨는 싫었다. 사람을 참 우울하게 만든다.


아아, 나는 아직 가을 햇살과 하늘을 만끽하지도 못했고 광합성도 제대로 못했는데!! 안돼애애..


..


날씨 탓에 심신이 처져서 오늘도 끝내려던 일을 반밖에 못함 ㅠ


..


손석희씨와 태지의 인터뷰 기사만 보고 영상은 아직 못 봤다. 아껴뒀다 기분 전환하고 싶을 때 봐야지. 울고 싶을 때 그러지 못하게 하는 건 폭력이라는 그의 말이 당연하면서도 참 좋다.


이번 앨범은 주문해서 들을 생각.



..



오늘 집중이 안돼서 친구랑 잠시 메신저하다가.. 2년 전 이맘때부터 몇 달 간 썼던 글의 플롯 일부에 대한 얘길 나눴다. 그 주인공을 데리고 쓴 여러 편 중 가장 길고 우울하고 감정적으로 격렬했던 글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과 그 인물의 배경, 그가 겪는 몇몇 일들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 후..


친구가 '그 얘기는 너무 암울하다, 날씨도 꿀꿀한데 더 우울하고 처진다, 너무 애를 학대한다, 냉장고에 넣고 싶다..'고 했다.


(냉장고 얘긴 프렌즈를 보신 분들은 알 듯.. 무서운 이야기책을 차마 뒤를 볼 엄두가 안 나 냉장고에 넣는데.. 레이첼은 '샤이닝', 조이는 '작은 아씨들'이었음 ㅎㅎ)


그 글이 좀 우울하고 감정적으로 꽤나 격하게 서술된 것은 사실인데, 등장인물들이나 배경 등등을 생각해보면 개연성은 있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좀 뒤틀리고 어둡고 혹은 비극적이거나 격렬한 인물, 상황, 이야기를 쓰는 것이 더 쉬웠다. 사실 거의 언제나 그렇다. 왜냐하면 진정 위대한 것은 희극이며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은 울게 만드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적 성향 역시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중요한 문제도 있다. 글을 쓰거나 써본 사람은 거의 한 번 이상 생각해 본 문제일 것이다. 흔한 얘기다. 작자와 화자(그것이 1인칭이든 3인칭이든, 2인칭이든 어느 시점이든 관계없다), 그리고 삶과 텍스트의 문제다.


물론 작자와 화자는 별개의 인물이다. 작가의 심적 상태와 실제 삶은 텍스트와 등장인물, 텍스트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는 다르다. 대부분은 허구이다. 설령 그 사건들이 실재하는 경험에서 태동되었다 해도 그건 렌즈를 통해 왜곡되고 걸러지고 재창조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어떤 작품들에 따라붙는 '자전적'이란 표현이 상당히 손쉽게, 혹은 무책임하게 쓰인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소위 '자전적'이 아닌 소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지 모른다. 동시에 그건 반대로도 마찬가지이다.


어제부터 날 괴롭히던 그 글을 '정말로' 시작했는데, 고민과는 달리 그 글은 상당히 힘을 뺀 어조로 시작되었다. 나중에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렇게 가야겠다. 그 글을 시작하기 전까지,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아주 정교한 구조를 축조하기 위해 너무 생각이 많았다. 그런데 때로 너무 생각과 고민이 많은 건 독이다.


나는 언제나 글쓰기가 기본적으로는 사랑하는 행위와 같다고 여겨왔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비슷하다. 때로는 그저 빠져야 하고 그저 흥분해야 하고 오로지 몰입해야 한다. 이 글에서도 다시 그런 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건 예고 없이 찾아오는 순간이며 일종의 선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는 것과 흡사할지도 모르겠다.


.. 그건 그렇고 하여튼 저 대화의 결론은, 주인공을 학대하지 말고 우울하지 않은 글을 쓰라는 것 :)

난 별로 학대하는 것 같지 않았는데..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행동/사고 양태 상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지 내가 가학적인 건 아니라고요 ㅠ



.. 후반부에 글쓰기 얘기를 길게 늘어놓아서 오늘의 메모는 프래그먼트가 아니라 어바웃 라이팅 폴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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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난주에 바이올리니스트가 화자로 등장하는 단편(http://tveye.tistory.com/3165, http://tveye.tistory.com/3146)을 마무리하고 나서, 이제 원래 쓰려던 글을 시작하려던 참인데 머리도 식히고 전체적인 흐름을 정리하려고 예전에 썼던 글들을 훑어보고 있다.

 

작년 초에 마무리했던 꽤 긴 글이 있는데 그 글의 화자는 지난번에 몇 번 발췌했던 부분에 등장한 적이 있는 트로이라는 인물이다. 레닌그라드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강사이고 주인공인 미샤의 친구이다. 이 사람은 해외 문학과 지하 문학 등을 몰래 공유하는 모임을 조직한 적이 있는데 주인공과도 그곳에서 만난다. (메밀죽 안 먹으려는 릴렌카와 그 꼬마의 아빠 이야기: http://tveye.tistory.com/2952 도 이 글에서 발췌했다) 이 글의 배경은 1970년대 초반에서 중후반, 레닌그라드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시기에 주인공은 미샤는 발레학교 학생이었다가 키로프에 입단해서 몇 년 동안 춤을 춘다.

 

지난주에 발췌했던 사과 파이 에피소드(http://tveye.tistory.com/3165)에서 미샤는 화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코즐로프에게 자기 친구를 좀 닮았다고 말하는데 이 글에 나오는 트로이 얘기다. 트로이는 이 인물의 성에서 따온 애칭이고 본명은 안드레이인데, 당사자는 자기 이름을 싫어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트로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주인공은 꿋꿋하게 이 사람의 본명을 부른다(주인공이라서 ㅋㅋ)

 

이미 마무리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글인데, 오늘 훑어보다가 딱 이맘때 가을 얘기가 있어 올려본다. 발췌한 부분의 배경은 1976년 10월 초.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교정이다. 미샤는 어깨 부상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온 직후이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좀 어두운 편이지만 이 부분 쓸 때는 즐거웠다.

 

발췌한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다닐로프와 세레브랴코프, 베론스카야 등은 키로프 극장 쪽 사람들로 물론 가상의 인물들이다. 뒤에 나오는 이고리, 타냐 등은 트로이의 문학 모임 친구들이다.

 

사과 파이 얘기 말미에 나는 이 주인공을 두고 뭔가를 먹이는 얘기를 쓴 적이 거의 없다고 했는데, 사실 이 부분에서도 이 사람이 뭘 먹기는 한다. 사과 파이처럼 맛있게 먹지 않아서 그렇지..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말아 주세요 *

 

..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날 미샤는 트로이의 학교로 찾아왔다. 퇴원 후 거의 3주 만이었다. 강의를 모두 마치고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나오는데 미샤가 교정 잔디밭 앞 벤치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10월이었고 햇살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싸늘한 편이었지만 미샤는 더블 버튼 재킷 외에는 스카프조차 두르지 않고 벤치 위에 편하게 누워 있었다. 목덜미까지 자라났던 머리칼도 단정하게 자른 데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인지 알이 큰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맨 처음에 트로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곁을 지나칠 뻔 했다. 그러자 미샤가 그를 불렀다.

 

 “ 안드레이, 그냥 가면 안 되지. 난 아침부터 굶었는데. ”


 
 트로이는 그를 학교 식당으로 데려갔다. 미샤는 대학교 식당에 처음 들어와 본다며 신기해했고 생각보다 음식 종류가 많고 가격도 싸다고 또 신기해했다. 더블 단추가 달린 암청색 재킷과 꼭 맞는 검은색 진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채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입생처럼 보였다. 물론 그가 걸치고 있는 옷들이야 일반적인 대학 신입생이라면 구하기도 힘들고 구한다 해도 가격을 치르기 어려울 정도일 테지만. 미샤는 연습실에 드나들 때나 거리를 쏘다닐 때는 편한 차림을 하고 다녔지만 필요할 때는 꽤 세련되게 옷을 입는 편이었다. 그의 열성팬들 중에는 계절별로 유명한 외국 브랜드의 옷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반적인 러시아 남자답게 패션에 큰 관심이 없는 트로이가 밀수품 아니냐고 물으면 미샤는 어차피 소련 공장에서 나오는 옷들 외엔 전부 밀수품이라고 대꾸하며 개의치 않고 그 옷들을 입었다.

 

 한번은 당국에서 의류공장 활성화를 위해 다닐로프에게 무용수들의 모델 협조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다닐로프는 외모와 비율이 뛰어난 울리얀 세레브랴코프와 올가 베론스카야, 그리고 지나이다와 미샤를 보내기로 했다. 타마라의 말에 따르면 다들 촬영에 협조하기로 했지만 미샤는 거절했다. 물론 다닐로프는 버럭 화를 냈다.

 

 “ 이건 가기 싫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가서 두어 시간만 찍고 와. ”


 “ 레오니드를 보내시죠, 그 멋진 옷들을 소화하려면 그 친구 정도 체격은 돼야 어울릴 테니까. ”

 

 다닐로프도 미샤가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 그렇게 큰 사람은 울리얀 하나로 족해. 남자는 금발과 흑발이 필요하고. ”

 

 그러자 미샤가 극장의 검은 머리 남자 무용수들의 이름을 읊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닐로프가 소리를 지르며 가로막았다.

 

 “ 공장 책임자가 자네 이름을 찍어서 보냈어. 다른 사람들은 바꿔도 자넨 못 바꿔. 당장 안 가면 징계야. ”

 

 미샤는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촬영을 하러 갔다. 타냐는 국영 백화점과 의류상점마다 쫙 깔린 그 옷들의 카탈로그를 몇 부 얻어 와서 좋아했지만 미샤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괴로워했다. 그 별 것 아닌 촬영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짜증을 냈다. 고스치니 드보르의 의류상점 진열창에 그 체크무늬 재킷과 폴리에스테르 바지를 입고 있는 자신의 화보가 걸려 있는 동안에는 네프스키 대로를 걷지도 않으려고 했다. 모임의 친구들은 미샤가 평소의 침착하고 서늘한 태도와는 달리 그 일에 짜증을 내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한동안 국영 의류공장 모델이라고 놀려댔다. 특히 이고리가 그랬다. 

 

 “ 화내지 마라, 모델 양반. 네가 입은 재킷을 적어도 수백만명이 입을 텐데. 소비에트 사회 아니면 어느 나라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있겠냐. 거의 인민예술가 수준의 영광이지. ”


 “ 수백만명! ”

 

 미샤가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이고리를 노려보더니 타냐가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구겨서 휴지통에 집어던졌다.

 

 “ 왜 그래, 인민을 선도하는 미남자가 됐다고 생각해. 그 옷 연방이랑 동맹국에도 수출할지 누가 알아? 오늘만도 네프스키에서 그거 입은 남자 다섯 명은 봤어. 뭐가 그렇게 수치스러워? 수백만장 찍는 질 나쁜 공산품 모델이 돼서? ”


 “ 단추가 잘못 달렸어. 칼라도 비뚤어졌어. 진창과 토사물을 섞어놓은 것 같은 색깔이야. 어떻게 이런 걸 수백만장을 찍어낼 수가 있어! ”

 

 미샤의 그 재킷 카탈로그를 보면서 나름대로 괜찮으니 자기도 한 벌 사볼까 하고 생각했던 트로이는 깜짝 놀라서 그 말을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샤가 몇백만장 찍어내는 질 나쁜 공산품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촌스러운 옷을 입고 촬영한 사실에 화가 났다는 것이 아주 우스웠지만 그 말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근사한 재킷과 진을 입고 진열대의 음식을 구경하고 있는 미샤를 보면서 트로이는 잠시 단추와 칼라가 비뚤어진 흙탕물 색깔의 소련 공장 재킷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때 미샤는 촌스러운 옷 때문이 아니라 그게 당국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샤의 옆으로 가서 조그만 단지에 들어 있는 닭고기 수프나 펠메니를 먹으라고 했다. 미샤는 물론 그의 조언을 거부하고 우하 수프와 게살 샐러드를 시켰다.

 

 “ 우리 학교 식당 우하는 맛없어. 닭고기 수프가 제일 맛있다니까, 알랴도 런던에서 왔을 때 그것부터 찾았는데. ”


 “ 저쪽 테이블에서 먹고 있는 저거잖아. 기름이 이렇게 두껍게 떠 있어! 게다가 노란색이야! ”


 “ 기름기가 많을수록 좋다는 속담 몰라? ”

 “ 그럼 네가 시켜. 나한테 한입 주면 되겠네. ”

 

 미샤는 주문한 음식을 다 먹었고 트로이의 닭고기 수프도 정말 한두 입 먹었다. 안색도 전보다 나아 보였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야윈 것도 덜했다. 눈 아래 패여 있던 그림자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짧아진 머리와 옷차림 때문인지 스무 살도 안돼 보였다.

 

..

 

여기 등장하는 레닌그라드 국립대 학생식당은 나도 가끔 가던 곳이다 :) 단지에 든 닭고기 수프 엄청 느끼하지만 먹고 나면 몸이 따뜻해진다고 친구들은 좋아했었다. 나는 차마 못 먹고 가끔 몇 숟가락 뺏아먹기만 했는데 심대하게 느끼했다!! 물론 내가 다닐 때는 이미 소련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저 글 속 식당과는 좀 달랐을 테지만.

 

이 부분을 쓸때 즐거웠던 이유는 저 주인공이 사람들 앞에서 좀처럼 저런 식으로 짜증을 내거나 유치하게 굴지 않기 때문이다. 뭐 미감이 뛰어난 사람에게 흙탕물 색깔의 이상한 소련 옷을 입히고 사진까지 찍어서 진열하게 한다면 열받긴 했겠지. 심지어 반체제주의자라면 더.

 

** 이 주인공에 대해 료샤가 불쌍히 여길 뻔한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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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4. 10. 4. 21:51

잠시 : 글, 사과 파이 등 about writing2014. 10. 4. 21:51

지난주에 끝낸 글 퇴고 중인데, 앞선 오늘 메모(http://tveye.tistory.com/3164)에서 잠깐 얘기했듯 거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과 화자가 함께 늦은 점심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 사과파이가 나오는데 덕분에 오늘 사러 갔었다.

 

지금 내 상황에서 사과파이를 먹는 것은 식이요법을 마구 무너뜨리는 짓이라 반쯤 농담조로 '사과파이 대신 버섯 샐러드나 보르쉬나 먹일걸' 하고 투덜댔지만, 사실 이 글에서는 그게 사과파이여야만 했다. 뭐 논리적으로야 다른 나무열매 파이가 될수도 있고 심지어 잼을 가득 얹은 케익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주 달콤한 무엇인가라면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쓰는 사람의 구상과 사고 구조 속에서 그건 사과파이여야 했다. 

 

지난번 잠깐 발췌했던 글(http://tveye.tistory.com/3146)과 같은 소설이다. 거기서는 화자가 주인공의 청에 따라 바이올린을 켰다. 여기 발췌한 부분은 그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다. 중간에 좀 생략된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화자는 지방의 소도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은 로만 코즐로프. 주인공인 미샤는 그 극장의 신임 예술감독으로 부임한지 한달 정도 된 상태이다.

 

글에 나오는 '칼바사'는 러시아식 소시지의 일종으로 기름기가 많고 꽤 짭짤한 편이다. 짙고 어두운 붉은색의 밀도높은 소시지를 잘라보면 단면에 하얀색 기름이 송송 박혀 있다. (난 못 먹는 음식이었다 ㅋㅋ) 러시아식 오픈 샌드위치인 부체르브로드 위에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 이 글을 무단으로 발췌, 인용, 전재, 배포하지 마세요 *

 

...

 


 미샤가 소파에 기대어 다시 조는 동안 나는 칼바사와 치즈를 얹어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고 통조림을 따서 토마토 수프를 데웠다. 뭐든 먹여야 취기에서 좀 풀려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무척 배가 고팠지만 요리를 하기에는 만사가 귀찮았다. 그래서 볼코프가 손녀의 솜씨라며 가져다주었던 사과파이에 연유를 잔뜩 끼얹었다. 여섯 살짜리처럼 구는 놈이니 분명히 입맛도 그럴 것이다.

 

 자식은 아무 것도 먹지 않으려고 했다. 두들겨 패겠다고 협박해서 식탁으로 끌고 왔다. 샌드위치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계속 토했으니 기름진 칼바사가 당기지 않을 만도 했다. 그래서 수프를 먹으라고 강요했다. 어쨌든 토마토 수프는 숙취 해소에 좋기 때문이다. 미샤는 수프를 한 숟가락 삼킨 후 투덜거렸다.

 

 “ 그건 진짜 토마토 얘기지. ”


 “ 가짜 토마토도 있나? ”


 “ 우리 공장에서 나온 통조림은 전부 가짜라고. ”


 “ 어쩌면 저렇게 입에서 나오는 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잡혀갈 내용인지. ”


 “ 잘됐네, 누구는 말 때문에 잡혀가고 누구는 폭행으로... ”


 “ 난 그런 적 없어. ”


 “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를 구사하시는군. ”


 “ 심신상실자의 증언은 아무도 안 믿어줘. ”


 “ 심신상실자? 내가? ”

 

 미샤가 숟가락으로 그릇을 땅 쳤다. 그 돼먹지 못한 식사예절에 뒤통수를 한 방 갈겨줄까 하다 참았다.

 

 “ 떡이 되게 취했었잖아. 기억이나 제대로 나나? ”


 “ 기억하고 말 게 어디 있어. 당신이 팼겠지. 그러니까 멍도 들고 이렇게 아픈 거지, 설마 내가 자해를 했겠어? ”


 “ 정말 기억 못하는군. 술 마시면 원래 그래? 필름 끊기고 기억 못해? ”


 “ 중요한 건 기억해. ”

 

 미샤는 수프를 한 모금 더 삼켰고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덧붙였다.

 

 “ 아마도. ”

 

 어디까지가 중요한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간밤의 일을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알콜로 엉망이 되어버린 저 귀엽고 조그만 머릿속에서 간밤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보고 싶었다.

 

 반쯤은 내 협박에 질려서, 반쯤은 관성적으로 미샤는 수프를 다 먹었다. 하지만 사과파이는 거부했다.

 

 “ 먹어두는 게 좋을 걸. 사과도 숙취 해소에 좋아. 통조림도 아니고. 볼코프 손녀가 직접 따서 만든 거라고. 꽤 맛있어. ”


 “ 단 거 잘 안 먹거든. ”


 
 의외였다. 나는 관찰력이 꽤 좋은 편이었고 특히 사람들의 식성에 대해서는 틀린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 남자 무용수들도 그런가? 발레리나 계집애들처럼 몸매 관리하고 음식 조절하고? ”


 “ 사람에 따라 달라. 안 그런 애들이 더 많지만. 난 학교 다닐 때부터 안 먹었어. 춤에 방해될까봐. ”


 “ 어차피 은퇴했다면서. 그냥 먹어. 속이 울렁거릴 테니까. 당분이 도움이 될 걸. ”


 “ 당신은 꼭 내 친구처럼 말하는데. ”


 “ 참 놀랍군, 친구가 다 있다니. 그 성깔에. ”


 “ 있어. 많지는 않지만. ”

 

 미샤는 잠시 침묵했다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 좀 닮았어. 교회 첨탑처럼 큰 것도. ”

 

 어쩐지 그 말은 오케스트라 때문에 낚았다는 말보다 더 기분이 나빴지만 또 한 대 팼다가는 자식이 영영 나가버릴 것 같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미샤는 포크로 사과파이를 조금 잘라서 먹었다. 그래도 연유는 한쪽으로 긁어냈다. 나는 그 애가 파이를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조그만 파이 조각을 지독하게 천천히 먹었다. 남은 파이를 한꺼번에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식이 눈을 가늘게 뜨며 행복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 당신 말이 맞네.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 ”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나는 심장 한 구석을 칼로 베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뱃속이 뭉클거렸다. 팔을 뻗어 그 애를 껴안고 싶었다. 뺨을 쓰다듬고 싶었다.

 

 “ 사과가 좋기 때문이지, 여기 숲에서 난 건 레닌그라드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걸. ”


 “ 이렇게 단 건 정말 오랜만에 먹어. ”


 
 파이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자 미샤는 나머지도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뜨거운 차를 주자 좋아했다. 하지만 차에 설탕을 넣지는 않았다. 레몬조차 넣지 않았다. 연유를 계속 접시 귀퉁이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남은 파이를 포크로 끌어당겨 연유를 잔뜩 묻혀 주었다. 자식은 좋아하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한번쯤 먹어봐도 괜찮을걸. 어차피 단 거 먹고 있잖아. ”

 “ 차원이 다르잖아. ”


 “ 단 걸 먹는 것도 배워야 할 거야. 여기서 겨울을 나려면. ”


 “ 레닌그라드도 추워. ”


 “ 그땐 감독이 아니었겠지. 춤만 추면 됐잖아. ”


 “ 감독이 된 거 하고 설탕이 잔뜩 들어 있는 연유를 먹는 게 무슨 관계가 있는데? ”


 “ 뭐든 처음이 있다는 얘기지. ”


 “ 볼셰비키 식 논리인데. 대전제를 아무 데나 다 이입하는. ”


 “ 어쨌든 먹어봐. 더 맛있을 테니까. ”

 

 미샤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없이 부드럽고 조용한 눈빛이었다. 아직 취기에 잠겨 있는 눈. 자식이 영영 술기운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빌고 싶을 정도였다.

 

 미샤는 남은 파이를 전부 먹었다. 연유와 함께. 너무 달아서 속이 뒤집힐 것 같다고 툴툴거렸지만 끝까지 먹는 걸 보니 내심 맛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 애가 파이를 먹는 동안 나는 샌드위치를 전부 해치우고 설탕을 탄 차를 마셨다. 미샤는 한참 먹다가 뒤늦게 파이를 반 토막으로 잘라 내게도 먹으라고 했다. 볼코프가 통째로 한 판 가져다 줘서 많이 남아 있다고 하자 좋아하는 눈치였다.

 

 미샤는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더 이상 토하거나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내내 취해 있었다.

 

...

 

소설은 이후 한 페이지 정도 더 지속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난다. 나는 이제껏 이 주인공을 놓고 단편이나 중편, 장편 등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이 사람이 뭔가를 먹는 장면을 쓴 적은 별로 없다. 뭐 몇 차례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쓴 적은 없다. 어쩌면 그래서 사과파이여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소설의 배경은 1981년이고 당시 주인공은 스물여섯 살을 앞두고 있다. 다소 까칠하고 다혈질인 화자 코즐로프는 마흔 살이다. 이미 40대로 접어든 소도시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어딘가 슬픈 일이었다. 아마 내가 더 이상 이전처럼 젊은 심장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이미 미샤보다는 코즐로프의 나이에 더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코즐로프가 사과파이에 연유를 끼얹는 것은 사실 생각하면 좀 괴로운 일인데... 무지무지 달콤한데다 어딘지 참 촌스러운 맛일 것 같긴 하지만.. 글의 배경이 물자가 풍족하지 않은 소련 시절이라서(ㅜ.ㅜ)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단 것을 아주 좋아한다. 연유와 잼도 좋아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블린에 연유를 흠뻑 끼얹어 먹는 걸 좋아했었다.

 

** 결국 사와서 먹어버린 사과 파이 : http://tveye.tistory.com/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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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약 한 달 가량 써오고 있는 글이 있는데 오늘이나 내일쯤 끝내고 퇴고에 들어갈 듯하다. 원래 구상한 꽤 복잡한 구조의 장편이 있는데 그거 서두 시작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삽입되는 에피소드를 먼저 쓴 것이다. 어차피 다성악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나중에 끼워맞춰도 된다만. 생각보다 길어져서 나중에 삽입 버전으로는 훨씬 간결하게 다듬어야 할 것 같다.

 

배경은 1981년. 아직 페레스트로이카가 닥쳐오기 전이고 브레즈네프 정체기가 막바지에 접어든 무렵의 소련이다. 이전에 몇번 발췌했던 글에 등장했던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주인공 미샤는 이 시기에 큰 시련을 겪고 있는데, 반체제주의를 비롯한 몇몇 정치적 혐의로 체포되어 정신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정치적 후원자들과 해외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다만 완전한 사면은 아니어서 소련 내의 어느 지방 도시(가상의 도시이다)에 유배되어 그곳 극장 예술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 문제의 글을 2년 전부터 구상했는데 이게 참 생각처럼 잘 안 풀려서 모든 플롯과 인물도 다 구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 (그래서 이거 준비하려다 주인공의 다른 시기를 다룬 글들만 몇개나 더 썼다)

 

발췌한 부분은 주인공이 촌동네 극장에 부임해 와서 한참 어려움을 겪는 초기에 일어난 일이다. 화자는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둘은 오케스트라 연주 문제로 계속 심하게 충돌해왔는데 이번에 쓴 에피소드에서는 그 둘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오해를 풀게 되는지를 다룬다. 발췌 부분에서는 미샤가 잠깐 춤을 보여주지만 그건 드문 일이고 꽤 사적인 순간인데, 배경이 되는 1981년에는 그가 이미 은퇴하여 더 이상 무대에 올라가지 않는데다 수용소 이후 육체적으로도 손상을 입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프라하에 머물 때 나는 그의 수용소 시기를 다루는 경장편을 하나 썼는데 그건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었고 세 사람의 시점으로 묘사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그 글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 쓰는 글이 내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면 또 다른 식으로 씌어질지도 모르듯이.

 

발췌한 내용은 미샤가 화자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한 곡 켜달라고 청한 후 벌어지는 일이다. 뭐 별다른 사건이랄 건 전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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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뒷골이 띵하도록 부담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어차피 차원이 다른 놈이니 내가 뭘 어떻게 하든 삼류로 들릴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홧김에 아무 거나 켜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그때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샤는 바닥에 누운 채 가만히 연주를 들었다. 나는 단 한 번도 관객과 눈을 맞추며 연주하는 타입이 아니었고 사귀거나 잠자리를 같이 하는 상대에게 바이올린을 켜준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내 연주는 형편없었을 것이다.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주하는 내내 내 시선은 바닥에 누워 있는 미샤에게 쏠려 있었다. 오후 햇살 때문에 몸에 반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다행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면 분명 박자를 더듬었을 것이다.

 

활을 내려놓았을 때 미샤가 말했다.

 

“ 더, 로만. ”

 

자식은 꼭 침대 위에 있을 때처럼 그런 말을 했다. 이름을 부르면서. 더 세게, 로만. 입 맞춰, 로만. 그 조그맣고 예쁜 입에서 애칭 따위는 밀려나오지 않았다.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까지도. 그저 간결하고 정확한 진짜 이름 하나 뿐이었다. 그 아이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현기증이 났다.

 

나는 다시 활을 움직였다.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 곡을 켰다. 짧고 빠르고 격렬한 곡이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어쩌면 프로코피예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쇼스타코비치. 자식은 분명 그자들의 음악을 좋아할 것이다. 저토록 이글거리는 까만 눈을 가진 아이를 사로잡고도 남았을 것이다.

 

미샤가 옆으로 몸을 굴려 일어났다.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았다. 눈에는 완벽하게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두 눈에 불길을 간직한 아이. 나는 반쯤 오기로, 그리고 반쯤은 농담을 섞어서 차이코프스키를 켜 주었다. 문제의 그 백조 아다지오를, 그리고 그 망할 오데트의 솔로를. 그때 미샤가 춤을 췄다.

 

그건 아주 짧은 솔로였다. 기껏해야 2분 30초도 안 되는 곡이었다. 난 바로 그 곡 때문에 자식과 싸웠다.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때 춤을 췄던 건 타마라 루세츠카야였다. 우리 극장에서 제일 잘 나가는 프리마 발레리나. 그런데 그 자식은 연주를 바꿔야 한다고 볼코프와 나를 들들 볶았다. 무용수와 맞지 않는다고...

 

그건 계집애의 춤이었다. 백조 여왕이 레이스 달린 튀튀를 펄럭이며 발가락 끝으로 선 채 휘청휘청 빙글빙글 도는 춤. 그런 지루하고 재미없는 춤을 보면서 갈채를 보내는 관객들이 별로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뭐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해 급료를 받아먹고 사는 입장으로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미샤는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았다. 30초 쯤 연주했을 때 예고도 없이 몸을 길게 내뻗으며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물결이 이는 듯했다. 자식이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은 내 연주와 그 어떤 충돌도 없었다. 그 애는 그저 공기처럼, 스치는 바람처럼 들어왔다. 한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

 

 듣고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같이 가야 해. 음악 안으로 들어가고 나올 줄 알아야 해.

 

자식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난 화가 치밀었고 이용당했다고 생각했었다.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꼬마가 말했던 건 모두 옳았다.

 

자식은 믿을 수 없이 우아하고 근사하게 춤을 췄다. 낡은 티셔츠 사이로 뻗어 나온 두 팔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진짜 백조에게 돋아난 날개처럼 보였다. 부드럽게 굽혔다가 길게 내뻗고 빙그르르 도는 다리를 보자 전율이 느껴졌다. 거기에는 어떤 무게도,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 가볍고 너무나 투명했다. 토슈즈도 없이, 맨발로 카펫을 밟으면서 그렇게 출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건 여자 무용수의 춤이었고 가느다랗고 하늘하늘한 팔다리를 과시하는 여성적인 동작들이었지만 자식은 물론 전혀 계집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내아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이상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새 같았고 유령 같았고 천사 같았다. 어쩌면 바로 그래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차이코프스키의 그 곡에 서려 있는 투명하고 슬픈 음률에는 어딘가 비인간적인 곳이 있었다. 마법에 걸린 백조 여왕 따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환상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안개처럼. 그리고 미샤는 그렇게 췄다. 안개처럼, 환상처럼 몸을 놀렸다. 자식이 회전했다. 하지만 내가 청했던 정신 나간 푸에테, 다리를 채찍처럼 휘젓는 곡예는 아니었다. 아주 느리고 비현실적으로, 깃털이 부유하듯 돌았다. 온몸이 날개와 깃털과 공기, 그리고 그 자욱하고 달콤한 냄새로 이루어진 것처럼 돌았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는 순간 자식이 나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스며들고 증발하는 기체처럼. 이제껏 이 곡을 연주하면서 그런 충격을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바이올린과 활을 내려놓았다. 미샤에게 갔다. 단 두 발짝 만에. 미샤는 경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애처럼 보였다. 춤을 췄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 당신 정말 큰데. 강물도 뛰어서 건너겠어. ”

 

넌 날아서 건너겠지. 하마터면 얼간이처럼 그렇게 지껄일 뻔 했다. 다행히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미샤가 추는 춤은 키로프 발레단 버전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가 추는 솔로이다. 물론 그는 그 춤을 소위 '여자처럼' 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역이 갖는 환상성과 투명함,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비현실성과 무중력 상태의 분위기를 온전하게 포착했을 것이다.

 

이전에 올린 적이 있지만, 그 부분을 추는 울리야나 로파트키나의 솔로 클립. 최고의 백조답게 그녀의 솔로는 아주 근사하다. 위의 글을 쓰면서 이 클립을 다시 여러 번 돌려봤다. 물론 그는 로파트키나처럼 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통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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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먼저 올린 지젤의 알브레히트에 대한 메모와 알브레히트를 추는 루지마토프, 슈클랴로프 영상 클립과 연관해서.(http://tveye.tistory.com/3127)

 

작년 초에 마무리했던 글에서 발췌.

 

배경은 1970년대 소련 레닌그라드. 발췌된 부분은 1973년 가을. 주인공은 레닌그라드 출신 무용수로 이후 안무가가 된다. 발췌된 글에 나오는 트로이는 그의 친구. 율리야는 주인공의 어머니. 트로이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다른 부분에서 발췌한 적이 있다.

 

크류코바를 비롯해 여기 등장하는 무용수들은 모두 허구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재능 넘치는 신인 무용수의 데뷔나 반응, 출세 등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여러 무용수들에게 실제로 있었던 내용에서 일부를 참고하기도 했다. (프리마 발레리나인 크류코바가 미샤를 낙점해 파트너로 만드는 건 사실 크셰신스카야와 니진스키, 두딘스카야와 누레예프의 예에서 따왔다. 워낙 유명한 얘기들이기도 하고)

 

이 글을 쓸 당시 나는 심신 양쪽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쓰는 행위를 통해 바닥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올 수 있었다. 그래서 완성도나 정교함을 떠나서 내겐 중요한 글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장편을 쓸 수 있었고 그것도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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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로프에 입단한 후 미샤 야스민은 스타가 되었다. 그는 일반적인 신입 단원이 거치는 단계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극장에서는 순전히 위계질서를 너무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시즌 첫 한 달 동안은 그에게 두세 차례의 디베르티스망을 추게 했다. 그리고는 곧장 해적의 알리 역을 주었다.

 

 머리에 높은 깃털을 달고 반짝이는 구슬이 박힌 푸른색 하렘 팬츠를 펄럭이며 미샤 야스민이 무대 위로 날듯이 뛰어나왔을 때 어두운 극장 안의 관객들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트로이는 몇 년 전 콩쿠르 얘기만 들었을 뿐 미샤가 그 역을 추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샤는 파란 천을 휘감은 흑표범처럼 뛰어올랐고 중력을 경멸하듯 공중에 머물렀다. 그날 밤 옛 황실극장의 황금빛과 푸른빛 벨벳 좌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 모두는 최면에 걸린 듯 집단으로 사랑에 빠졌다. 아직 18살도 되지 않은 신인 무용수에게, 발레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에게. 완벽하게. 주역인 콘라드와 메도라는 기억 저 편으로 사라졌다. 그 무대 위에는 오직 아랍 의상을 입고 우아한 야수처럼 날아오르는 젊은 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트로이는 바로 옆 칸에 앉아 있던 잘 차려입은 여자 하나가 연신 소리를 지르다 머리를 뒤로 젖히며 실신하는 것을 보았다. 기절한 여자는 곧 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 옆에 앉아 훌쩍이고 있는 타냐의 온기와 스베타의 향수 냄새도 지워졌다. 그는 두 손으로 얇은 프로그램 종이를 움켜쥔 채 거대하고 텅 빈 구체처럼 어둠 속에 떠 있었다. 폭발하지 않기 위해 싸우면서.

 

 해적으로 인정받은 후 미샤는 수직으로 올라갔다. 가을 중에 지젤의 주역을 맡았다. 프리마 발레리나인 니나 크류코바가 그를 상대역으로 낙점했던 것이다. 트로이조차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크류코바는 평범한 스타 발레리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키로프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였다. 인민예술가였고 대스타였다. 가장 완벽한 지젤로 불리는 무용수였다. 그 소식을 들은 타냐는 반쯤 심장 발작을 일으킬 뻔 했다.

 

 트로이는 미샤의 어머니를 모시고 그 공연을 보러 갔다. 율리야 야스미나는 평소에는 감정을 별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날은 긴장 때문에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팽팽하게 당기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늘씬하고 우아한 몸매에 파도처럼 뒤엉키는 검은 머리와 찌르는 듯한 눈빛의 미인이었다. 흐트러진 긴 머리를 핀으로 틀어 올려 고정시키고 수수한 검은 원피스 외에는 목걸이나 귀걸이 따위로 치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긴 손가락에 가느다란 금반지를 하나 끼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무대에 미샤가 등장했을 때 그녀는 몸이 떨리는 듯 아들이 비엔나에서 사다준 커다랗고 아름다운 숄로 어깨를 감쌌다.

 

 타냐는 미샤가 대스타인 크류코바의 존재감에 너무 파묻히지만 않아도 큰 성공일 거라고 말했다. 트로이는 로미오처럼 순진하고 철없는 알브레히트를 기대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지나치게 젊은 귀족, 마음에 드는 여자를 가볍게 건드리고 불장난을 쳤다가 나비처럼 휙 돌아서는 사춘기 소년 같은 알브레히트를. 그건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20년에 가까운 크류코바와 그의 나이 차이도 그렇고 지난 해적 공연에서 보여준 공기와 바람 같은 특질도 그랬다. 관객들은 이미 니진스키 같은 아이, 날개 달린 천사처럼 춤춘다는 새로 온 무용수에 대해 떠들고 있었고 그 젊은 애의 알브레히트라면 생각 없이 말썽을 피워도 마냥 귀엽게 받아들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샤는 그들의 기대와 예상을 단숨에 박살냈다. 그 무대에서 미샤 야스민이 보여준 알브레히트는 철없고 사랑스러운 귀족 소년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야비한 탕아였다. 맨 처음 그가 크류코바의 지젤에게 다가가 손을 얹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충격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샤는 1막 전체를 숨막히는 유혹의 드라마로 바꿔버렸다. 그 알브레히트는 크류코바의 순수하고 청순한 지젤, 완벽하게 성적으로 무지한 그 시골 아가씨에게 아랫배에 불을 당겨놓았다. 트로이는 타이츠와 레이스 의상을 입고 춤추는 고전 발레 무대에서 그런 식의 성적 긴장감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알브레히트는 검은 눈의 악마처럼 무대를 휩쓸고 다니며 여자를 정복하고 관객들을 공공연하게 유혹했다. 1막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관객석에서 분노 어린 탄식들이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그건 배반당한 여주인공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알브레히트에 대한 순수한 증오였다.

 

 막간 휴식시간에 트로이는 율리야를 데리고 홀로 올라가 시원한 샴페인을 두 잔 주문했다. 율리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변 관객들이 흥분해 떠드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대부분이 새로 온 무용수, 아니, 알브레히트에 대한 얘기였다. 미샤와 친해진 후 여러 차례 극장에 와 보았지만 트로이는 관객들이 그렇게 공연에 몰입해서 무용수가 아니라 배역의 이름을 부르고 생생한 증오로 두 눈을 불태우며 그 망나니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어서 빨리 2막이 되어 그 개 같은 놈이 유령들에게 혼쭐이 났으면 좋겠다고, 결말이라도 바꿔서 유령 여왕이 그 방탕한 자식을 새벽이 되기 전에 죽여버리는 꼴을 봤으면 속이 시원하겠다고 떠들었다. 마치 교양 있는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아니라 난생처음 천막극장에 몰려들어 무대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홀려버린 시골 농민들 같았다.

 

 크세니야가 그렇게 말했었다. ‘렌스키는 여자를 모르는 애였어. 내게 안겨서도 아무 것도 몰랐어.’ 아무 것도 몰랐던 건 크세니야 자신이었다. 그 알브레히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적 자력으로 휩싸여 있었다. 트로이는 관객들의 격렬한 반응이 그 탕아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온몸을 떨리게 하는 성적 흥분 때문인지 궁금했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2막에서 미샤는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 사악하고 음란한 탕아가 흰 옷을 입고 무게도 없이 자기 앞에 나타난 여자의 유령 앞에서 공포와 놀라움으로 소스라쳤다. 2인무를 추는 동안 그 감정은 점차 깊은 죄책감으로, 그리고 그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 짧은 춤을 추는 동안 미샤의 알브레히트는 타락한 악마에서 첫사랑에 빠진 젊은이로 변모했다.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불타던 정복자에서 자기 감정과 육체를 가눌 방법조차 모르는 길 잃은 소년이 되었다. 트로이는 어떻게 그런 변형이 가능한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관객들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흰 옷 입은 유령들이 줄지어 늘어서고 화관을 쓴 여왕이 얼음처럼 차갑게 돌아서는 순간, 미샤의 알브레히트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추락해 나뒹구는 것을 반복하며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또 애원하는 순간 극장 여기저기에서 관객들의 신음과 낮은 비명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와 뒤섞이며 튀어나왔다. 진짜 공포에 질려서, 안타까움으로 발을 구르며 너도나도 애타게 속삭이고 흐느꼈다. 죽이지 말아요, 그만 용서해 줘요. 제발 살려줘요. 트로이는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나이든 부인이 지휘자를 향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음악 좀 멈춰요, 저렇게 추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그들 중 누구도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이 가공의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정말 어떻게? 이 사람들 모두가 넋이 나간 바보들일까? 수십 번 이 공연을 본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텐데? 하지만 트로이도 그 순간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숨도 쉬지 못하고 율리야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그는 굉음을 내며 뒤집힌 썰매에서 튀어나가 눈보라 속으로 추락하는 미샤를 보고 있었다. 현기증과 구역질이 엄습해와 머리와 턱이 덜덜 떨렸다.

 

 관객들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유령들이 하나둘 무대 너머로 사라지고 창백하고 아름다운 크류코바의 지젤이 두 팔을 뻗어 바닥에 누워 있는 알브레히트를 포옹했을 때도 모든 것이 끝났으며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침내 미샤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극장 안은 안도의 탄식으로 가득 찼다. 


 
 그 날 크류코바의 숭배자들 중 절반 이상이 우상을 배신하고 자신들이 가져온 꽃을 미샤에게 주었다. 미샤가 인사를 할 때 무대 위로 로켓처럼 꽃다발들을 내던졌다. 조준이 잘 되지 않았거나 너무 가벼운 꽃다발은 오케스트라 석 안으로 떨어지며 꽃잎을 비처럼 흩뿌렸다. 트로이는 그 미친 듯한 열기와 사랑이 일상적인 광경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율리야는 복도로 나가 코트를 찾아 입고 극장의 무거운 문을 두 손으로 밀었다. 트로이는 문을 대신 열어주면서 물었다.

 

 “ 분장실에 모셔다 드릴까요? 담당자가 제 얼굴을 알아요. ”
 “ 아니, 그냥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 잠깐이라도 보고 싶지 않으세요? ”
 “ 우리 앞줄에 당 간부들이 앉아 있었어요. 아마 그 사람들과 저녁을 먹으러 갈 걸요. ”


 
 그녀의 어조에서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씁쓸한 분노가 동시에 배어나왔다. 트로이는 당의 이름으로 가족이 체포되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침묵했고 율리야를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네프스키로 나올 때는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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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지난번에 내 러시아 친구와 그의 어린 아들에 대한 얘기 중 야채 먹기 싫어하는 에피소드에 대해 fragments 폴더에 쓴 적이 있다. 비트 샐러드 먹기 싫어하는 레냐에 대한 얘기였다.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2915

 

그때 철없는 아빠와 아들이 귀여워서 웃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다 재미있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은 작년 초에 마쳤던 소설에 비슷한 에피소드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레냐랑 비트 샐러드 먹으러 갔을 때보다 더 전에 쓴 거였다. 때로는 현실이 허구를 따라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건 내가 만들어낸 허구가 현실 속에서 일어날 법한 보편적인 상황을 끌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 부분 발췌해본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부분이다. 그 장편은 꽤나 뒤틀린 구석이 있었지만 이 부분은 그렇지 않다.

 

배경은 1977년 봄.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 등장인물들 이름이 생소하니 잠깐 소개하면

 

갈랴(여), 료카(남) : 부부. + 릴렌카(여) : 이들의 어린 딸

트로이(남) : 주인공

코스챠 : 주인공의 친구

 

.. 이고 이들은 대학 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로 지하 문학을 읽는 서클을 운영하기도 했고 이때도 주말에 모여 실컷 놀고 술 마신 후 갈랴네 집에서 잠들었음... 정도가 이 에피소드의 배경이다. 연령대는 대부분 20대 후반. 릴렌카는 만 세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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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는 술에 취해 갈랴의 집 소파에서 잠들었다. 토요일 아침에 깨어났을 때 릴렌카가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손으로는 뭔가 회색빛의 걸쭉한 것이 가득 들어 있는 사발을 들고 있었다.

 

 “ 술 냄새 나. ”


 “ 미안. ”


 “ 우리 아빠랑 틀려, 턱이 까끌까끌해. ”


 “ 면도를 안 해서 그래. 너희 아빠는 부지런하구나. ”


 “ 늦잠 안돼! 일찍 일어나야지! ”

 

 숙취에 시달리며 세 살짜리 꼬마로부터 설교를 듣는 아침은 결코 상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트로이는 비좁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릴렌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가 구부러져 있던 팔과 다리를 길게 펴는 것을 지켜보았다.

 

 “ 어떻게 하면 그렇게 쭉쭉 늘어나? ”


 “ 어른이 되면. ”


 “ 우리 아빠는 안 그러는데. ”


 “ 콩나무 같은 어른이 되면. ”

 “ 이거 먹어. ”

 “ 그게 뭐야? ”

 “ 이거는 어른이 먹는 거야. ”

 

 그때 갈랴가 나타나 엄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 누가 삼촌한테 아침밥 떠넘기래! 빨리 식탁으로 돌아와! 다 먹기 전까지는 만화 못 볼 줄 알아. ”

 

 릴렌카가 칭얼거리면서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갈랴가 고개를 저으며 트로이에게 와서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주었다.

 

 “ 딴 애들은 새벽에 다 갔어? ”

 “ 코스챠랑 너 빼고. 걔 지금 샤워하고 있어. ”

 “ 릴렌카가 나한테 먹이려고 했던 게 뭐야? ”

 “ 메밀죽. ”

 “ 윽, 어린애한테 좀 맛있는 걸 먹일 수는 없어? 토요일 아침인데! ”

 “ 료카랑 똑같은 소릴 하고 있네. 남자들이란 정말 왜 그러는 거야! 네 것도 있으니까 와서 한 그릇 먹어. 몸에 좋으니까. ”

 “ 갈린카, 제발 봐줘. 숙취 때문에 죽겠는데 메밀죽까지 먹으라고 하는 건 고문이야. ”

 “ 까다롭게 굴지 마. 미샤는 내가 주는 건 다 먹었는데. 우리 집에 오는 남자들 중 제일 착했지. 그립다. ”

 “ 설마. 네가 만드는 음식은 전부 엄청 달잖아. 그걸 먹었을 리가 없어. ”

 “ 무슨 소리야, 내가 주는 아침밥은 다 먹었어. 메밀죽도 얼마나 잘 먹었는데, 릴류슈카가 안 먹고 있으면 무릎에 앉혀 놓고 같이 먹었어. ”
 

 샤워를 하고 나와 인간의 몰골을 되찾은 코스챠가 끼어들었다.

 

 “ 그건 네가 여자라서 그랬던 거야. 미슈카는 여자들에겐 절대 기분상할 짓 안해. 나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잘 안되더라, 그 기사도 정신. ”
 

 트로이는 그 화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스를 재빨리 마신 후 욕실로 갔다. 잠시 후 부엌으로 가보니 릴렌카가 엄마보다는 훨씬 만만한 아빠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 이제 다 먹었어. 만화 볼래. ”

 “ 반이나 남았잖아. ”

 “ 남은 거 아냐. 이거 삼촌 거야. ”

 

 릴렌카가 금발 곱슬머리 사이로 파란 눈을 인형처럼 깜박이면서 간절하게 트로이를 쳐다보았기 때문에 그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서 메밀죽이 반쯤 남아 있는 그릇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 알았다, 내가 먹어줄게. 가서 만화 봐. ”

 

 릴렌카가 좋아하며 거실로 내닫자 료카가 한숨을 쉬었다.

 

 “ 야, 빨리 긁어먹어. 갈랴한테는 비밀이야. ”

 “ 아빠가 대신 먹어줘야 하는 거 아냐? 난 해장이 필요한데! ”

 “ 난 메밀죽이 정말 싫단 말야. 토요일 아침마다 꼬박꼬박 한 그릇씩 먹고 있다고. 너 알잖아, 옛날에 우리 집단농장에 파종하러 갔을 때 자꾸 메밀죽만 줘서 내가 식사 거부하다가 자아 비판할 뻔한 거. ”

 “ 아, 기억난다. 난 네가 화내는 거 그때 처음 봤어. 그것도 먹을 걸로. ”

 “ 지금은 화내면 큰일 나. 갈랴가 주는 대로 안 먹으면 뼈도 못 추려. ”

 “ 그러면서도 빨리 결혼하라고 날 들들 볶아? ”

 “ 그래도 좋은 점이 훨씬 많으니까 그렇지. ”

 

 갈랴가 들어오려는 기색이 보였기 때문에 트로이는 괴로워하면서 릴렌카가 남긴 메밀죽을 두어 숟갈 만에 억지로 입안에 모두 밀어 넣었다.

 

...

 

 

분명히 쓸 때는 레냐나 료샤에 대한 생각은 1%도 안 했지만... 어쩐지 지금 보니 릴렌카와 료카는 성별만 다를 뿐 걔들과 좀 닮았다. (심지어 료캬는 얘랑 이름마저 비슷하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아이들은 몸에 좋지만 맛없는 음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들이란 개별적인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어른이 돼도 어린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이 얘기 해줘야지 :)

 

 

예약 포스팅 올라가는 동안은 저를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댓글 다실 때 비밀 댓글 체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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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3. 4. 28. 14:12

카페 엘리펀트, 카를로비 바리 about writing2013. 4. 28. 14:12

 

 

 

 

내가 지난 2월 프라하로 떠났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고 누구에게도 그 모든 이유들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어떤 것은 해결이 되었고 어떤 것은 그대로 남았다. 뭐 겨우 두 달 머물렀으니 그럴만도 하다.

 

글쓰기도 큰 이유 중 하나였는데, 실은 도착해서 거의 한 달 가량 쓰기를 시작할 수 없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나날이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러다가 친구가 나를 만나러 와줘서 카를로비 바리에 잠깐 갔었다.

 

친구는 일 때문에 늦게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카를로비 바리에 도착해 거리를 산책하다가 호텔 근처에 있는 저 카페 엘리펀트에 들어갔다.

 

 

사실 저 카페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난 엉망이었다. 몸이 아팠고 열이 나고 정신도 산란했다. 나중에 도착해 숙소에서 날 만난 친구는 아픈 애를 괜히 데려왔다고 미안해했다. (그 친구임. 복지리를 갈망하는 애. 뭐 그래서 얘가 카를로비 바리 있는 내내 날 잘 먹이고 짐도 다 들어주고 보살펴주고 챙겨줬기 때문에 신났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ㅋㅋ)

 

 

그런데 사실 나는 그때 기분이 꽤 좋았었다. 몸은 아팠지만 카페 엘리펀트에서 보낸 한 시간이 지금껏 프라하에서 보냈던 20여일의 시간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카를로비 바리에 갔을 때 나는 노트북이나 아이패드 따위를 들고 가지 않았다. 오로지 도블라토프의 소설 한 권, 펜 한 자루와 스프링 노트 한 권을 챙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게 전부다. 

 

 

나는 그곳 창가에 앉아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던 글의 전체 흐름을 정리해보았다. 이건 플롯이 아니라 슈젯을 정리하는 편에 가까웠다.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것은 이 글에 너무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미 나는 그 글을 쓰려다 두 번이나 포기한 후 워밍업을 위해 다른 글을 두 편이나 썼다. 때로 어떤 글을 시작한다는 것은 사랑을 새로 시작하는 것만큼, 아니,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리는 것만큼 어렵다. 이제 카페 엘리펀트 창가에 앉아 스프링 노트를 가로로 펼치고 펜을 잡은 나는 단순하게 시간적 흐름에 따라 사건과 인물과 내용의 골자를 배열하고 전체적 맥락을 다시 잡았다.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페이지에 걸쳐 기다란 흐름을 정리하고 나자 뭔가가 명확해졌다. 그리고 이 소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하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인물이 어떤 일을 겪고 그곳에 존재하게 되는지, 이 소설에서 그의 행동 패턴이 왜 변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와 나 둘을 모두 납득시켜야 했다. 그건 단순히 그가 나이를 먹거나 철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원래 쓰고자 했던 글을 위한 프리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원래는 짧게 툭툭 던져지는 배경으로만 묘사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프라하에 돌아와서 그 글을 시작했고 꾸준히 썼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 글을 끝냈다.

 

 

다음날 아침 호텔의 조그만 식당 창가에 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친구가 말했다.

 

" 다 나 덕분인 줄 알아라. "

 

" 뭐가? "

 

" 안 아프게 된 거. "

 

" 아직 좀 아픈데. "

 

" 그래도 얼굴이 동그래졌어. 어제 온천 시키고 슈니첼을 먹였더니 이제 사람다워진 거야. 이제 가방 들고 다닐 수 있겠지. 사람 구실을 하겠지. "

 

" 슈니첼 먹고 자서 얼굴이 부은 거야! 좋은 게 아니잖아 ㅠㅠ "

 

" 아니야, 좋아진 거야. 눈에 빛이 돌아왔어. "

 

" 그래, 어떻게 보면 네 덕분이 맞아. 엄밀히 얘기하면 카페 엘리펀트 때문이야. "

 

" 온천보다, 맛있는 음식보다, 좋은 호텔보다 카페 따위가 더 좋단 말이냐! 어딜 가나 널려 있는 카페 따위가! "

 

" 엉... 그게 꼭 그런 건 아닌데... 좀 그래. "

 

" 근데 왜 아직도 결혼을 못했지? 이 여자는 저비용으로 꼬시기에 아주 적합한 타입인데. "

 

" 이 자식이.. 상대를 앞에 두고 3인칭으로 칭하지 마라. "

 

 

사실 친구 말이 맞다. 네 덕분이다. 카를로비 바리에 가자고 꼬셔줬잖아. 세번째 찾는 카를로비 바리였지만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리고 여기서 카페 엘리펀트에 갔고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으니까. 고맙다 :)

 

 

 

 

 

 

카페 엘리펀트는 카를로비 바리 온천지대를 따라 쭈욱 걸어가다가 이 동네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호텔일 GRAND HOTEL PUPP으로 접어들기 좀 전에 나타난다. (그 호텔엔 전에 출장와서 행사만 들어가봤다. 이번에 묵었던 곳은 다른 곳)

 

휴양지인 카를로비 바리라는 동네 특성이 그렇듯, 이 카페에도 두터운 외투를 벗고 앉아 쉬는 중년이나 노년 부부들이 많았다. 카페는 널찍한 그랜드 카페 스타일이었다. 이른 오후였고 창가에 앉자 싸늘한 바깥 날씨와는 달리 햇살이 스며들어와서 좋았다.

 

점심 먹을 때 차를 마셨기 때문에 평소엔 잘 마시지 않지만 카푸치노를 주문해봤다. 그리고 모양이 예뻐서 마블 케익 주문. 케익은 커스터드가 진했고 꽤 달아서 다 먹지는 못했다. 카푸치노는 부드럽고 맛있었다.

 

 

 

 

 

 

 

 

내부는 이렇게 생겼다. 좀 호텔 커피숍 같은 분위기인가..

 

 

 

 

고맙구나, 카페 엘리펀트. 그리고 카페 에벨도. 친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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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  주말에 비엔나에 다녀올 예정이다. 원래는 화-목 정도를 생각했는데 일기예보를 보니 눈이 오고 추워진다고 해서 토~월로 변경했다. 덕분에 어젯밤에 버스 티켓 예매와 호텔 예약하느라 피곤했다.

기차를 타고 갈까 했는데 스튜던트 에이전시가 기차보다 훨씬 저렴해서 버스 표를 끊었다. 카를로비 바리 두시간 타고 가는 것도 살짝 버거웠는데 과연 5시간 동안 잘 타고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다녀올 듯.

날씨 때문에 앞당기긴 했지만 주말도 역시 춥다는 예보가 있다. 체감온도가 영하 4~5도라나. 부츠를 신고 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

여기 와서 후회한 것 중 하나가 백팩을 안 가져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레스포삭 가방도 안 가져왔다. 뭘 얼마나 쏘다니겠어 싶어서. 막상 이렇게 다른 곳에서 자야 하는 경우엔 가방 들고 가기가 참 난감하다. 그렇다고 기내 가방을 끌고 갈 수도 없고. 하루를 자든 이틀을 자든 화장품과 세면도구와 잠옷을 챙겨가야 하니 부피와 무게가 늘어난다.

다시금 루키야넨코의 명언을 되새기는 중. 돈 없는 자들만이 여행가방을 바리바리 꾸려가지고 다닌다. 부자는 현지에서 모든 것을 조달할 수 있다.

 

*  전에는 혼자 쏘다니는 것이 좋았다. 게으르고 겁도 많은 편이지만 혼자 출장도 잘 다니고 여행도 잘 다녔다. 그런데 요즘은 피곤해서 그런 건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보지 않았던 나라와 도시들을 찾아 떠나는 것이 전처럼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설레는 마음도 훨씬 덜하다. 이렇게 사람이 칙칙해지나 보다.

전 같으면 벌써 비엔나 관련 모든 정보를 검색해서 메모를 하고 근처 서점에 가서 지도라도 사 와서 체크를 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한국에서 몇장 뜯어온 비엔나 관련 여행 책자를 한번 들춰보고 지하철, 트램 노선을 폰에 저장한 것이 끝. 호텔에 가면 지도를 주겠지, 가서 대충 쏘다니자 이런 마음이다.

이제 혼자 열심히 찾아서 챙기고 쏘다닐만큼 부지런하거나 열망으로 넘쳐나지 않게 된 것 같아 좀 씁쓸하다. 이렇게 해서 나이를 먹고 급기야는 패키지 여행에 끼게 되나보다. 지금까지는 패키지, 단체여행이라면 정말 토할 것처럼 싫지만. 

그 좋아하던 미술관들과 음악, 공연들에 대한 갈망도 전 같지 않다. 아마 이건 내가 작년부터 이쪽에 서서히 피로를 느끼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미술 쪽이 그렇다. 업무 관련해서 심적으로 많이 소진되었는지 프라하에 와서도 미술이나 건축 쪽은 그렇게 많이 보러 다니지 않았다. 꼭 가보고 싶었던 현대 미술 갤러리가 몇 군데 있었는데 곁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본 적도 없다.

 

*  패키지, 단체 여행 얘기가 나와서 잠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들이 몇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집단으로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수학여행을 비롯해 교련, 운동회, 매스 게임 등등을 모두 싫어했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주의의 횡포를 견딜 수가 없다. 아니, 이게 꼭 횡포가 아닐 수도 있다. 순기능적인 면이 강조될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횡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내겐 그게 횡포였다.

직장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우리 회사는 그런 면이 꽤 덜한 편이라 다행이지만. 그래도 부임해오는 임원에 따라 가끔 주말 산행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는 '조직 문화'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이러한 단체행동이 사실은 강압이며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주말이 아니라 해도, 본래 회사에서 봄이나 가을에 정례적으로 개최하는 체육대회나 산행도 좋아하지 않는다. 게을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난 줄을 서서 다 같이 뭔가를 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집단 행동을 함으로써 단결력이 강화되고 '우리'라는 끈끈한 정이 생겨난다는 말을 믿지도 않는다. 그래본 적이 없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이며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 집단 행동을 통해 '우리'라는 이름의 뜨거운 결속력을 획득하고 팀으로서 거듭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쪽에 포함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아마 내가 소련 시절에 태어났다면 정치 이념이나 먹고살기 힘든 사회나 그런걸 다 떠나서 그 망할 놈의 집단주의 때문에 미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을 것 같다.

작년부터 쓰고 있는 시리즈의 주인공에게도 그런 성향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물론 그는 나와는 꽤 다른 인물이지만,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주의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비슷하다. 그래서 보안위원회의 어느 인물은 어느 날 그 애를 불러다놓고 이런 말을 한다. '애'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이 저 당시 주인공은 아직 학교를 졸업하기 전이었다.

 

... 그런데 내가 아주 미워하는 애들이 있어.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이토록 선량하고 교양 있는 나조차도 그런 녀석들은 아주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건 말이지, 혼자 다니는 놈들이야. 모두가 노래할 때 혼자 침묵하는 녀석, 다같이 컨베이어 벨트를 돌릴 때 혼자 뒤돌아 서 있는 녀석, 동지들끼리 모여 차를 마실 때 길거리로 사라지는 녀석. 가끔 가다 보면 꼭 그런 인간이 있어. 차라리 떠들고 선동하는 놈들이 나아, 왜냐하면 그것들은 항상 여럿이 모여 있으니까. 그리고 무리 짓는 인간들은 언제나 소비에트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는 놈들이야. 문제는 바로 혼자 다니는 애들이야. 도무지 집단에 끼어들지 않는 놈, 미제 자본주의자들의 타락한 정신을 따라가는 놈. 줄을 서는 게 싫다는 이유로 빵과 우유를 사러 가지 않고 꼬박 며칠 동안 처자식을 굶기는 놈, 존경하는 레닌 동지와 레오니드 일리치 동지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해버리는 건방진 놈들. 차라리 소리 높여 욕하는 놈들이 훨씬 나아. 언제나 혼자 있으려고 하는 놈들, 자기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며 이 세상에서 혼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놈들, 그런 놈들이 제일 나빠....

 

.. 저 자의 장광설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물론 저 설교가 주인공을 바꿔놓지는 못한다. 저때 꽤 혼이 나고 고생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그 애는 여전히 '혼자 다니는 놈'으로 남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  오늘은 8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그래도 중간에 한번 깨서 1시간 넘게 뒤척이긴 했다. 계속 자고 싶어서 괴로웠는데 바깥을 보니 어제보다 날씨가 더 흐렸다. 오늘은 나가지 않고 내일 비엔나 갈 준비와 다른 이것저것들을 했는데 열어놓은 창 너머에서 불어들어오는 바람이 매우 찼다.

틈날 때마다 꾸준히 걷고는 있지만 운동 부족이 분명하다. 그런데 따뜻한 날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더 움직이고 싶어도 힘들었다. 며칠 동안 입맛도 없고 몸이 힘들었는데 내일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에 좀전에 힘을 내어 카프레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여기는 아주 조그만 모짜렐라 치즈 덩어리를 한팩씩 포장해 팔기 때문에 편하다. 가격도 싸고.

 

* 아이팟 랜덤 재생을 해놨더니 new kids on the block의 time is on our side 가 나오고 있다. 좋아했던 노래인데. 역시 세대가 나오는군 :) 요즘 아이들은 뉴키즈 잘 모르겠지 ㅠ.ㅠ

 

... 그러고 보니 이걸 어느 폴더에 넣어야 할지 모르겠다. 글 얘기가 있으니 about writing 에 일단 넣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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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