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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단편을 하나 마친 후 이제 퇴고를 시작했다. 퇴고와 후기 등 후속 작업이 이어져야 하는 시기인데 일도 새로 시작했고 2집 이사도 마무리해야 해서 좀 정신이 없다. 이 시기는 실제로 글을 쓰는 시간 이상으로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하려는 중이다.

 

 

아래의 이야기는 이번에 쓴 글이 아니고 몇년 전 쓰다 중단된 가브릴로프 본편의 일부이다. 사실 이번에 쓴 단편도 크게 보면 이 본편에 속해 있다. 프리퀄이라 해야 시간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맞겠지만. 하여튼 언제나 이 본편을 다시 이어서 쓰고 싶은데 참 어렵다. 그래서 이 본편에서 명랑만화처럼 평행 외전 새끼를 쳐서 서무의 슬픔 시리즈가 왕창 나오기까지 했음.

 

 

아래 글을 올리기 전에, 몇년 전 바로 앞부분을 발췌해 올렸던 적이 있다.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미샤가 지방 소도시(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미샤의 코믹 패러디 버전인 왕재수는 '시골!' 하고 부른다) 가브릴로프에 와서 시립극장 감독을 맡게 된다. 가브릴로프 시의 유력 가문 출신이자 문예 월간지 편집장인 릴리아나 비슈네바(애칭은 렐랴. 맞다,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맨날 미샤 꼬시려고 하다 헛물만 켜는 그 엄친딸 렐랴이다)가 신임 감독인 미샤와 인터뷰를 한다. 전에 올렸던 부분은 그 인터뷰의 일부이다.

 

링크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114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간 사람, 렐랴의 인터뷰)

 

 

이번에 발췌한 이야기는 지난번 올렸던 파트에서 곧장 이어진다. 인터뷰와 화보 촬영을 마친 후, 렐랴는 미샤와 사적으로 더 친해지고 싶어서 좀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 주보프는 앞의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사진 작가이다.

 

 

* '노치, 울리차, 포나리'는 러시아 모더니즘 시인인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아주 유명한 시의 앞구절이다. 원래는 '노치, 울리차, 포나리, 아프테카'(Ночь, улица, фонарь, аптека)가 첫 행이고 이 구절을 모르는 러시아인은 거의 없을만큼 유명한 시이다. 뜻은 '밤, 거리, 가로등, 약국'. 이 소설에서 나는 아프테카(약국)를 들어낸 나머지만 카페 이름으로 붙였다. 그 이유는 이 카페가 '포나르나야 울리차', 즉 가로등 램프 거리에 있기 때문임 :)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사진 촬영을 끝낸 후 주보프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서둘러 나갔다. 어서 빨리 필름을 현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렐랴는 스카프를 고쳐 매면서 내심 미샤가 차를 마시자고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시 반이었고 그녀가 사전에 세심하게 계산한 대로 차를 마실 시간이었다. 월요일이라 극장 카페 차이카는 문을 열지 않았으므로 포나르나야 거리에 있는 아늑한 카페인 ‘노치, 울리차, 포나리’가 괜찮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가브릴로프에서는 가장 유행이 빠르고 근사한 곳이었으니까. 레닌그라드에서 온 예술가에게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시를 인용한 간판이 매달린 카페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샤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까지 바래다주면서 10월에 공연을 보러 오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조바심이 난 렐랴는 살짝 그를 떠보았다.

 

 

 “ 혹시 우리 인터뷰 때문에 출근하신 건가요? 그럴 줄 알았으면 다른 날로 잡는 건데. ”

 

 “ 아니에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인터뷰가 아니었어도 나왔을 거예요. 오디션도 그렇고 할 일이 많거든요. ”

 

 “ 그냥 렐랴라고 부르세요. 여기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르거든요.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쉴 땐 쉬어줘야 해요. 햇볕도 실컷 쬐고. 아직은 날씨가 좋지만 금방 환절기가 되면서 추워지거든요. ”

 

 “ 여기 날씨는 레닌그라드보다 훨씬 좋은데요. ”

 

 “ 일조량이 더 많으니까요. 그래도 10월이 되면 날씨가 확 달라질 거예요. 지금은 버섯과 나무열매가 한창 맛있을 때죠. 저도 얼마 전에 다차에서 버섯파이와 버찌 잼을 잔뜩 만들었어요. 차에 곁들이기엔 그만이죠. 그러고 보니 차 마실 시간이 다 됐네요. 혹시 이 근처에 있는 ‘노치, 울리차, 포나리’에 가 보셨나요? ”

 

 “ 아뇨. 서점인가요? ”

 

 “ 카페예요. 19~20세기 시집이 많아요. 마음에 드실 거예요. 몸도 데울 겸 잠깐 같이 가 보실래요? ”

 

 

 미샤는 아주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주보프의 포즈 요청을 거절했을 때만큼 정중하고 그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말투로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어려우니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얘기했다. 렐랴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렇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미샤는 정말 바쁜 것 같았고 거절하는 태도도 매우 신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매력이 단숨에 통하지 않았다는 데 놀랐을 뿐이었다. 이제껏 렐랴는 그런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레닌그라드 출신답게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면 톱스타였기 때문에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렐랴는 미녀 앞에서 모든 남자들은 다 똑같아진다고 생각해왔고 아직 그 믿음을 버릴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렐랴는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하지만 미샤가 차 문을 열어주었을 때 몇 마디를 덧붙였다.

 

 

 “ 오늘이 월요일이라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전 인터뷰 장소를 바꾸자고 했을지도 몰라요. ”

 

 “ 블로크 시가 적힌 카페로요? ”

 

 “ 어디든. 다른 날이었다면 콜랴나 잔나가 끼어들었을지도 모르니까요. ”

 

 “ 콜랴가 누구죠? 잔나는 우리 사무국장일 테고. ”

 

 “ 니콜라이 레베진스키. 그 사람 요즘 심기가 안 좋거든요. 왜인지는 대충 얘기 들으셨겠죠? 전임 감독 체제에서 가장 큰소리치던 사람이었어요. 의회에 로비도 많이 했었죠. 그 사람은 조심하는 게 좋아요. 겉과 속이 다르니까요. ”

   

 

 극장 내부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미샤는 인터뷰 때와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렐랴는 긴 속눈썹 사이로 아름다운 회색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 제 말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미셴카. 전 오래 전부터 당신 팬이었거든요. 볼쇼이와 키로프에도 무대를 보러 갔었어요. 전 당신이 극장을 바꿔놓았으면 좋겠어요. 고여 있는 물 같은 곳이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그저 시골 극장에 지나지 않아요. 전 우리 극장에서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당신 춤을 다시 보고 싶어요. 그래서 힘닿는 대로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에요. 저는 레베진스키와도 친분이 있어요. 그는 사악한 사람은 아니에요, 자존심과 명예욕이 아주 강할 뿐이죠. 그러니 아무런 대가 없이 당신에게 쉽사리 협조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사람과 틀어지면 골치 아파질 거예요. 잔나도 마찬가지고. 둘이 아주 친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를 어르고 달래서 포섭하든지, 아니면 아예 잘라내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할 거예요. 그리고 우리 시 사람들은 외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아요. ‘우리 편’, ‘우리 사람’이란 개념이 너무 확실하거든요. 아마 당신에겐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전 그렇게 할 수 있고요. 이래봬도 전 여기 예술계에서 발이 아주 넓거든요. 그러니 절 친구로 생각하시고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

 

 

 미샤는 그녀의 일렁이는 듯한 회색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고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키스를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또렷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었다.

 

 

 “ 고마워요,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이미 많은 도움이 된 것 같군요. 그럼 다음 주에 뵙죠. 안녕히 가세요. ”

 

 

 

 극장에서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렐랴의 머릿속을 산란하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건 ‘노치, 울리차, 포나리’ 카페도, 자신의 조언에 대한 미샤의 반응도, 심지어 그가 키스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릴리아나 페트로브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곰씹다가 머리가 아파진 나머지 렐랴는 차를 몰다 하마터면 광장으로 곧장 직진해 레닌 동상을 들이받을 뻔 했다.

 

 

  ..

 

 

 

* 렐랴의 본명은 릴리아나 페트로브나 비슈네바인데 중간의 페트로브나는 부칭이다. 러시아 이름은 가운데에 아버지 이름을 변형한 부칭이 붙는다. 남자는 ~비치, 여자는 ~브나 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페트로브나는 표트르의 딸이란 뜻이고-액센트 위치 때문에 표트로브나가 아니라 페트로브나가 됨- 미샤 같은 경우는 아빠 이름이 세르게이라서 부칭이 세르게예비치이다. 존대하는 사이이거나 공식적으로 예의를 차릴 때는 상대를 부를 때 이름과 부칭을 같이 붙여 부른다. 친해지면 보통은 애칭을 부른다. 내 친구 료샤도 본명은 알렉세이임. 미샤도 본명 미하일의 애칭.

 

 

* 사진은 2016년 가을, 프라하의 우 크노플리치쿠 카페 창가. 조그만 램프가 달려 있어서 올려봤다 :) 렐랴가 얘기하는 노치 울리차 포나리 카페는 이 카페보다는 좀더 인텔리겐치야 분위기가 풍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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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