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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 극장 가는 길. 2015년 2월. 겨울에 공연 보러 갈땐 추우니까 보통은 버스를 타고 간다. 이 날은 엄청 추웠지만 햇살이 좋아서 그냥 운하 따라서 극장까지 쭉 산책했었다. 공연은 아마 전날 밤과 다음날 밤 보러 갔던 듯.

 

 

꽁꽁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흰눈과 얼음, 그리고 새파란 하늘. 이런 날씨엔 추워도 산책하기 좋다.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실지로 썼던 글들 속에서 미샤가 트로이네 집에서 잘 때면 아침에 이 길을 따라 극장으로 걸어가곤 했다. 물론 소련 시절 그 극장은 마린스키가 아니라 키로프 극장이었고 이 길의 주변 풍경도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운하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살을 에는 듯 차디찬 공기와 하얗게 빛나는 수면 위 얼음, 눈이 멀도록 새파란 하늘은 변함없을 것이다.

 

 

 

 

 

 

 

 

 

 

 

 

 

 

 

 

이렇게 극장까지 걸어오는 것이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극장.

:
Posted by liontamer

 

 

 

내가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로 하고 미샤를 되살려냈을 때 구상했던 소설은 이른바 가브릴로프 이야기였다. 미샤가 체포된 후 지방 소도시의 보잘것없는 극장 감독으로 전출되고(사실은 유배) 그곳에서 겪는 일들을 그릴 생각이었다. 플롯과 인물들도 거의 다 구성했고 나 자신에겐 꽤나 흥미로운 프로젝트인데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쓰기가 무척 힘들었다. 아마 이 소설은 다른 일을 하면서는 쓰기 어려운 종류의 글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틀어박혀 글만 쓸때 잘 풀릴 것 같은 종류의 소설이다. 나머지 글들은 거의 일을 하면서 짬짬이 썼는데...

 

 

하여튼 이 소설에서 최근 몇년 간 쓴 미샤에 대한 모든 글들이 나왔다. 이거 시작하려다 워밍업하려고 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frost' 단편을 썼고 그러고 나서는 이 소설에 잠깐 등장하는 트로이라는 남자가 궁금해져서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오는 소설을 심지어 장편으로 쓰고, 나중에는 또 미샤와 렐랴가 나오는 추리소설 패러디 외전을 쓰고, 그러다 코즐로프가 나오는 단편도 하나 쓰고, 그러다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면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고 등등등...

 

 

이 가브릴로프 소설을 쓰기는 할 것이다. 다른 글을 쓸때에도 항상 내 마음 속 가운데를 채우고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사실, '매우 잘 쓰고 싶다'라는 욕망 때문에 쓰기가 어려운 게 분명하다.

 

 

 

발췌한 에피소드는 예전에 먼저 발췌했던 http://tveye.tistory.com/3332 (요즘 쓰는 글, 행정 체계라는 간편한 대답)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실은, 서무의 슬픔 시리즈는 저 행정체계 얘기랑 이 에피소드를 쓰다가 새끼쳐서 나왔음... 

 

 

 

시골 소도시 가브릴로프의 삼류극장에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미샤! 하지만 극장에는 구세력들이 우글거리고... 밖으로는 KGB 국장 스페호프, 극장 안에서는 전임 감독 쿠즈네초프와 그 후계자인 니콜라이 레베진스키, 그리고 그의 일파들이 으르렁거리고 있으니~ 이 와중에 폐세자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레베진스키가 면담을 요청하는데... 과연 20대 중반의 애송이 감독인 미샤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오페라에 대해서도 물었다. 사람들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비록 미샤가 극장 전체를 총괄하는 예술감독직을 맡기는 했지만 발레계 출신인데다 가브릴로프 극장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무용에 특화되어 있었고 오페라는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임 감독이었던 쿠즈네초프 역시 오페라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고정 레퍼토리는 발레와 마찬가지로 4~5개뿐이었고 그나마도 한 달에 두세 번 공연하는 것이 전부였다. 미샤는 첫 2주 동안 피가로의 결혼과 라 보엠 무대를 보았고 근 20년 가까이 오페라단을 총괄하고 있는 말레도프스키와도 한 시간 정도 따로 미팅을 했다. 가수들도 만났다. 하지만 정작 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쿠즈네초프 체제에서 2인자의 자리를 공고히 해왔고 최근 1~2년 동안은 실질적으로 발레단의 레퍼토리와 무용수들의 지도를 총괄해온 것이나 다름없는 수석 안무가 니콜라이 레베진스키는 초조해져서 닷새째 되던 날 류다를 통해 미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류다는 전보다 두 배로 아이라인을 두껍게 칠한 눈꺼풀을 무겁게 깜박이며 끝을 길게 끄는 말투로 대꾸했다.

 

 

“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면 될 거예요. ”

 

 

“ 안에 전화 한 통 넣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유세야! 아무 것도 안 하고 죽치고 앉아서... 새 상사 덕에 팔자가 늘어졌군. 우리 감독님은 사람 만나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나보지. 일이 줄어서 참 좋겠어. ”

 

 

“ 적어도 커피 타다 주고 두어 시간마다 간식 쟁반 갖다 바치는 일은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미샤는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일일이 전화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거지. 문은 열려 있으니까 이름 부르고 들어오면 된다고 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아까 차이카에서 마주쳤을 때 해도 됐을 텐데. 아니면 무대 점검하러 갔을 때나. ”

 

 

“ 난 공식적인 면담을 요청하는 거라고. ”

 

 

“ 하세요, 누가 말리나요. 지금 들어가세요. 조금 전에 티무르 보리소비치가 나왔으니까 아마 미샤 혼자 있을 거예요. ”

 

 

“ 빨리도 친해지셨군. 감독을 애칭으로 부르지를 않나. ”

 

 

“ 취임 파티 기억 안 나요? 감독님이 부칭 같은 거 붙이지 말고 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예전부터 다들 그렇게 부른다고. 하긴 그때 당신은 심기가 불편해서 계속 술만 마시느라 못 들었나 보군요. ”

 

 

레베진스키는 류다를 노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책상을 서류철로 거칠게 한번 내리치더니 안쪽에 있는 미샤의 사무실로 곧장 걸어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미샤는 약 20분 동안 레베진스키가 발레단에 대해 떠들도록 내버려두었다. 레베진스키는 발레단의 구조와 운영 현황에 대해, 주요 레퍼토리에 대해, 가브릴로프 발레단의 역사와 특성에 대해, 안무가와 교사들을 비롯한 지도부에 대해, 연습 시간표에 대해 브리핑한 후 마침내 주역 무용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막 그가 타마라의 이름을 끄집어냈을 때 미샤가 처음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 잘 들었어요,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도움이 되는군요. 레퍼토리에 대해서도 이제 이해가 됐습니다. 백조, 지젤, 코펠리아, 잠자는 미녀, 호두까기를 순서대로 돌린다는 거죠? ”

 

 

레베진스키는 부아가 치미는 것을 꾹 참고 호두까기 인형은 연말과 새해 시즌에 올라간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 작품의 배경이 언제인지 모르느냐고 한 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갑작스럽게 그의 머릿속에 새해 시즌마다 문화 채널에서 방영해주던 키로프 호두까기 인형이 떠올랐다. 저 망할 애새끼가 호두까기 왕자를 췄었지... 심지어 시립 발레학교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서 다 같이 그 방송을 보곤 했다.

 

 

 

“ 호두까기 외엔 맞다고 해야겠죠. 그래도 일률적인 배정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백조 공연이 가장 잦죠. 인기가 제일 많으니까. 그 다음은 지젤. 그리고 코펠리아. 어린애들이 많이 보러 오니까요. 잠자는 미녀는 손이 많이 가서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올라가고. ”

 

 

“ 갈라 공연도 있나요? ”

 

 

“ 관객 대상으로는 아니죠. 모스크바에서 높은 분이 들렀을 때 리셉션 파티용으로 올린 적은 두어 번 있지만. 아, 예외가 하나 있군. 발레학교 졸업 무대. 그거야 당연히 이것저것 섞게 되니까요. 우리 애들도 졸업생들 파트너 해주기도 하고. ”

 

 

“ 내년이 100주년이라고 들었는데 우리 극장 레퍼토리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뭔가요? ”

 

 

“ 흠,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

 

 

“ 그냥 미샤라고 부르시죠. ”

 

 

“ 그건 피차 좋을 것 같지 않군요. 그러니까, 내가 감독님과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고... 아무래도 주변 시선이 있어서 말이지요. 가뜩이나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쉬운 상황인데 이름까지 그런 식으로 편하게 부른다면 내가 고의로 무례하게 군다는 말이 나돌 겁니다. 뭐 내가 훨씬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직위는 직위고 상사는 상사니까요. 그러니 부칭은 그대로 쓰도록 하겠습니다. ”

 

 

“ 그럼 좋을 대로 하시죠.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부분은 뭐죠? ”

 

 

“ 당신은 큰 극장에만 있었기 때문에 모를 겁니다. 여기는 볼쇼이처럼 거대한 극장도 아니고 키로프처럼 귀족적인 전통을 자랑하는 곳도 아닙니다. 규모 자체가 다르다는 말이에요. 관객들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 파벨 유리예비치는 백조와 지젤, 호두까기만 남기려고 했었고 그 생각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주장해서 두 개를 더 살렸죠. 호두까기를 제외하고도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하나 있어야 했고, 그래도 고전 발레를 표방하고 있으니 명목상 잠자는 미녀는 놔둬야 했던 겁니다. 솔직히 말해 이 동네 관객들 수준은 형편없어요. 몇몇 교양 있는 관객들을 빼고는 발레라면 그저 예쁜 여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분장한 남자들이 펄쩍펄쩍 뛰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잠자는 미녀라면 태반이 다 졸아버리죠. 그래도 극장의 예술적 자존심을 위해 일 년에 다섯 번은 올려야 한다고 내가 우긴 겁니다. ”

 

 

“ 극장 규모가 작고 관객 수준이 낮으니 레퍼토리는 인기를 끌만한 작품으로 최소화해야 했다는 얘기인가요? ”

 

 

“ 이를테면 그렇죠. 게다가... 이건 비공식적으로 하는 얘깁니다만, 우리 애들 수준도 거기서 거기예요. 잘 하는 애들 몇 명 빼고는 하향 평준화되어 있죠. 할 수 없잖습니까, 여긴 바가노바 아카데미도 없고. 귀감이 될 만한 스타 무용수도 없으니까요. 하긴 이제 하나 있군요. 당신은 무려 키로프 수석무용수 출신이니까요. 극장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당신 이름은 다 알고. 어제 마감한 우리 발레학교 신입생 추가 모집 접수가 작년보다 몇 배로 늘어났다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무대에는 언제부터 올라가실 생각이죠? 적어도 2주 전에는 얘기해주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 포스터와 프로그램 인쇄를 바꿀 수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10월 첫 주 백조의 호수부터가 어떨지 싶은데. 역시 상대역으로는 타마라가 제일 나을 것 같군요. 실력도 그렇고 외모로 봐도 가장 잘 어울릴 테니까요. 뭐 브루넷을 선호한다면 레나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예쁜 애죠, 키는 살짝 큰 편입니다만. ”

 

 

 

미샤는 잠시 수석 안무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찌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날 감독실에서 보낸 시간 중 니콜라이 레베진스키가 가장 모욕감을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면담을 마친 후 친분이 두터운데다 때로 같이 자기도 하는 사이인 르이조바에게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 자식이 날 재보더군. 얼마나 재수 없게 째려보든지. 새파랗게 젊은 것이 그 계집애 같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날 지그시 훑어보면서 어떤 식으로 날 무시해줘야 할지 머리를 굴리더라니까. 키로프에서 그런 짓만 배웠던 모양이야. 동료들과 기 싸움하면서 자리 꿰차고 콧대 세우고... 배역 기용은 자기 권한이라 이거지.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얘기야. 일개 너 같은 놈이 감히 자기 같은 대스타에게 언제 무대에 올라갈지 말지 떠들다니 주제를 알라는 표정이지 뭐였겠어!’ 하고 투덜댔다.

 

 

문틈으로 귀를 바짝 대고서 모든 대화를 엿들었던 류다는 그 얘기가 사무국에 좍 퍼졌을 때 코웃음을 쳤다.

 

 

“ 그건 또 무슨 바보 같은 소리람. 미샤는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했어. 그냥 자기는 무대에 올라갈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 연초에 은퇴했다고. 그리고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어. 그리고서 오디션 얘기가 나왔던 거지. 그 사람은 콜랴처럼 잘난 척하면서 말하지 않았어. 파벨 유리예비치처럼 반말을 내깔기지도 않았다고. ”

 

 

 

하지만 류다도 그가 레베진스키에게 제대로 한방 먹인 것은 인정했다. 그때 레베진스키는 미샤의 은퇴 얘기에 한껏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그건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군요. 당신 같은 대스타가 우리에게 와줬는데 무대를 볼 수 없다니 그건 말도 안 되죠. 극장에 그 이름을 걸어놓고 막상 춤을 추지 않는다니! 다들 실망할 겁니다. 세상에 은퇴 생각 한 번 안 해본 무용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 이건 다 떠나서 무용계 선배로서 하는 얘긴데, 춤추다 보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에요. 그만 두겠다는 말도 가끔 내뱉는 법이지만 그건 다 젊어서 그런 거죠. 돌아서면 다시 올라가고 싶은 게 무대인데. 나도 부상 때문에 은퇴했지만 지금도... ”

 

 

“ 난 부상 때문에 그만둔 게 아니라서요. 어쨌든, 니콜라이 안토노비치. 지금까지 발레단을 관리하느라 수고가 많으셨군요. 여름부터는 실질적인 감독 대행으로 공연도 총괄해 오셨다죠.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부탁드려야겠군요. ”

 

 

“ 그거야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니지요, 어쨌든 감독님은 여기 처음이고 난 이십 년 넘게 이 극장에 있었으니까요. 사정도 빠삭하고 무용수들에 대해서도 잘 아니까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 ‘조금만’이라는 것은... ”

 

 

“ 오늘이 9월 20일이군요. 내가 극장 사정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시즌은 벌써 시작했으니 9월 마지막 주까지는 지금처럼 공연을 총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겠죠? ”

 

 

“ 아, 물론... 전혀... 그런데 9월 마지막 주라고요? 앞으로 열흘 동안만이라는 건가요? 음, 그러면 10월부터는 어떻게... 그러니까, 10월 공연도 벌써 일정은 다 나왔는데. 설마 그걸 전부 바꾸려는 생각은 아니겠죠? ”

 

 

“ 아뇨, 10월까지는 일단 레퍼토리는 그대로 갈 겁니다. 새 작품을 추가한다 해도 준비 기간이 필요하니까요. 배역은 아마 좀 바뀔지도 모르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10월까지는 전임 감독과 당신이 짠 일정표와 배역 명단을 수정하지는 않을 거예요. 현실적으로 그럴 시간은 부족하니까요. 대신 오디션을 보려고 해요. 당신 말대로 난 여기 처음 왔고 개별 무용수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요. 9월 29일과 30일이 좋겠죠. 오페라가 올라가는 날이니까 무용수들도 부담이 덜할 테고. ”

 

 

 

10월부터는 자신의 권한이 대폭 축소될 거라는 예고에 이어 오디션 얘기를 듣자 레베진스키는 정신이 좀 혼미했다. 무겁게 당겨오는 뒤통수를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헛기침을 했다.

 

 

 

“ 흠, 오디션. 29일과 30일이라고요. 그 오디션이라는 것은, 어떤 배역에 대한 건지. 백조의 호수 얘기겠죠? 공연 횟수가 많으니까. 수석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제1솔리스트까지? 굳이 이틀이나 잡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

 

 

“ 백조. 지젤. 코펠리아. 주역과 솔리스트 바리아시옹들. 나머지는 10월에 생각하죠. 참가 대상은 제한을 두지 않을 겁니다. ”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한을 두지 않다니, 그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코리페도 모자라 군무 쪽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전부 몰려들 거라고요. 그렇게 하면 이틀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걸요. 자기 실력을 착각하고 있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기는 잘났는데 위에서 기회를 안 줘서 군무진에 처박혀 있다고 불만만 더 늘어날 겁니다. 솔리스트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주 골치 아프게 될 거라고요. 그래서 파벨 유리예비치는 웬만하면 오디션을 하지 않았습니다. 드물게 하더라도 비공개로 하나씩 불러다 했고요. 원체 애들에 대해서도 잘 알았고 항상 붙어서 가르쳤으니 실력에 대해서도 잘 알았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감독님이 오디션을 진행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지금 수석들 외에는 주역 출 만한 애들이 없어요. 전문가라면 누구든 보는 눈은 같은 법이에요. 공연히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 글쎄요,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죠. 그리고 모든 역을 균일하게 소화하는 무용수는 없어요. 오디션은 공개로 진행할 겁니다. 낭비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얻는 게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

 

 

레베진스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감독실을 나왔다.

 

 

..

 

 

 

레베진스키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부르는 것은 예의를 갖춰 미샤의 본명과 부칭을 함께 부르는 것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름 + 아버지의 이름에서 나온 부칭 + 성으로 이루어진다. 미샤의 아버지 이름이 세르게이 야스민이기 때문에 미샤의 풀 네임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야스민이 되는데 본편에서 미샤는 자기를 이름과 부칭으로 깍듯이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항상 '그냥 미샤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하곤 한다.

 

 

레베진스키는 서무의 슬픔 시리즈에서 여러번 등장했었다. 거기서 좀 바보같게 그려지긴 했었음 ㅠㅠ 하지만 이 글이 오리지널이고 서무는 여기서 파생된 패러디 ㅠㅠ

 

레베진스키가 얘기하는 가브릴로프 극장의 다섯개 레퍼토리는 발레 레퍼토리 중 가장 유명한 작품들에 속한다만... (코펠리아는 그 정도로 대중적이진 않지만 이 동네에선 어린이용 발레로 남아 있다고 가정했다) 하여튼 시를 대표하는 극장이고 한때는 그래도 조금의 명성은 있었던 곳이니만큼 다섯개 레퍼토리만 가지고 줄창 돌려댄다는 것은 솔직히 좀 너무한 상황이긴 하다 :)

 

 

이 가브릴로프 본편은 아직 120페이지 정도밖에 못 썼다... 이 소설은 쓰기가 참 힘들다. 원래 미샤를 되살렸을때 처음 구상한 것이 이 글이었는데... 결국 이 글이 잘 안 써져서 다른 장편과 중편과 단편, 패러디 외전, 심지어 서무 시리즈도 모자라 지나와 말썽쟁이 낙서까지 나와버렸어...

 

아래는 그래도 전에 군데군데 발췌했던 이 가브릴로프 본편의 일부 에피소드 링크들.

 

 

http://tveye.tistory.com/3408 1부 마무리. 키라와 미샤

 

http://tveye.tistory.com/4451 햇살, 본편의 베르닌과 서무의 단추 사이

 

http://tveye.tistory.com/5368 가브릴로프 KGB 등록 절차, 검색대

 

http://tveye.tistory.com/4971 이웃사촌 베르닌, 미샤의 두가지 해법

 

http://tveye.tistory.com/5114 천사가 날개로 쓰다듬고 지나간 사람, 렐랴의 인터뷰

 

 

..

 

 

맨 위 사진은 마린스키 극장 사진 :) 가브릴로프 극장은 내가 만들어낸 곳이라 사진이 없음. 물론 마린스키(당시 키로프)와 가브릴로프 극장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 미샤가 말을 안해서 그렇지 처음 와서 가브릴로프 발레단 무용수들 무대를 보고 기절할 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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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전에 이 about writing 폴더에 트로이의 관점에서 기술된 미샤의 첫 시즌과 그의 돈키호테 무대 데뷔, 폐렴으로 인한 입원 등에 대한 에피소드를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 이야기는 같은 사건에 대한 미샤의 오랜 후원자이자 애인인 고위직 당 간부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회상이다.

 

물론 트로이와 마로조프는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고 또 다른 식으로 미샤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이 해프닝을 마주한다. 트로이가 아는 것을 마로조프는 모르고 마로조프가 아는 것을 트로이는 모른다. 미샤는 당사자이므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나처럼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다 그럴테지만.

 

시간적 배경은 1974년 4월. 미샤가 키로프 극장에 들어간지 반년이 조금 넘은 시기이다. 그는 이미 해적의 알리와 지젤의 알브레히트로 공전의 성공을 거두고 이른바 원더키드로 관객들과 평론가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키로프 발레단의 유명 무용수들은 소련 각 도시를 도는 국내 투어를 떠나고 미샤도 거기 합류한다. 아래 이야기는 투어에서 돌아온 미샤를 레닌그라드 근방의 도로에서 자기 고급차에 태워주는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세레브랴코프와 마할린은 모두 가상의 인물이다. 세레브랴코프와 미샤의 악연에 대해서는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니나 크류코바 역시 가상의 인물로 당시 키로프 극장의 톱스타 프리마 발레리나이다. 옛날로 따지면 나탈리야 두딘스카야나 갈리나 울라노바, 요즘으로 따지면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나 울리야나 로파트키나, 디아나 비슈뇨바처럼 극장을 대표하는 발레리나인데 소련 시절이라 지금의 자하로바나 로파트키나보다 위상이 더 높았다.

율리야 야스미나는 미샤의 어머니이다.

 

 

맨 위 사진은 마린스키 극장 무대에 드리워진 막. 아래 사진은 차이코프스키 파 드 두를 추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를 백스테이지에서 찍은 것. 돈키호테 사진들은 전에 많이 올려서.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 다리 좀 뻗어도 되나요? 누워도 되면 더 좋겠는데... ”

 

 

 그건 미샤의 키로프 첫 시즌 봄이었다. 그때 그는 키예프와 사라토프를 거쳐 페름까지 이어진 3주 동안의 국내 투어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레닌그라드 진입로에서 미샤를 태웠다. 커다란 가방을 들고 버스에서 내린 그 아이의 옷은 먼지투성이에 온통 구겨져 있었다. 투어 도중에 독감에라도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부터 그 아이는 대놓고 자존심을 세우며 내가 보낸 차를 타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날만은 예외였다. 물론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넓고 푹신한 뒷좌석에 몸을 눕히더니 두 다리를 쭉 뻗고 두 손으로 무릎을 이리저리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 꽤 지쳤나보군. ”

 

 “ 3주 내내 버스로 끌려 다녔거든요. 엔진이 세 번 고장나고 타이어가 네 번 터졌어요. 페름에선 공연 30분 전까지도 그 고물 버스 안에 처박혀 있어야 했죠. ”

 

 “ 어쩌겠나, 인민예술가 정도 되면 대우가 좀 나아지겠지. ”

 

 

 건방진 꼬마는 코웃음을 치려고 했지만 꼴사납게 밀려오는 기침 때문에 때를 놓쳤다.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는 이미 까치집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뺨은 열에 들떠 사과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왼쪽 광대뼈 언저리는 파랗게 멍이 들어 부풀어 있었다.

 

 간신히 기침이 멎었을 때 나는 그에게 손수건을 주었다. 미샤는 눈과 코를 닦은 후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 그 버스 안에는 인민예술가 한 명에 공훈예술가 두 명이 있었다고요. ”

 

 “ 그럼 불평하지 말아야지. ”

 

 

 더워서 벗어놓았던 캐시미어 스웨터를 그 아이의 목과 가슴 위로 덮어준 후 나는 광대뼈의 상처에 대해 물었다. 이미 반쯤 졸고 있었던 미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을 때에야 내키지 않는 어조로 대꾸했다.

 

 

 “ 존경하는 인민예술가께서 남겨주신 흔적입니다. ”

 

 “ 이런 짓을 할 만한 건 세레브랴코프인 것 같은데. ”

 

 “ 그깟 공훈예술가 따윈 그럴 배짱이 없죠. ”

 

 

 싸움을 건 쪽은 세레브랴코프였다. 단순한 선배들의 위계 잡기일 수도 있었고 들어온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주역을 독차지하다시피 한 경쟁 상대에 대한 질투일 수도 있었다. 미샤는 선배 무용수의 도발에 모욕적인 발언으로 맞섰고 과히 우아하지 못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을 떼어놓은 건 대선배인 알렉세이 마할린이었다.

 

 

 “ 마할린이 자넬 쳤다고? 그 온순한 친구가? ”

 

 “ 발레단에 온순한 인간 같은 건 없어요. ”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 어쨌든 불평하지 말아야겠군. 인민예술가에게 맞은 거라면. ”

 

 “ 불평 같은 건 안 해요. 별로 아프지 않았거든요. ”

 

 

 그날 밤 미샤는 스몰니의 내 아파트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돌아갈 때는 내 스웨터를 입고 갔다. 모자까지 받아 썼다. 아마 외투를 줬다면 그것도 망설임 없이 입고 갔을 것이다.

 

 잠시 후 나는 산책을 하려고 나왔다가 현관에서 몇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아이를 발견했다. 이른 봄이었지만 변덕스러운 레닌그라드 날씨답게 새벽부터 폭설이 쏟아졌기 때문에 미샤는 발목까지 차오른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미끄러져 넘어진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새하얀 눈 위로 새빨간 핏방울이 루비처럼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페름에서 싸움이 붙었을 때 마할린은 그 아이의 코와 광대뼈 사이를 가격했던 것이다. 요행히 코뼈가 부러지거나 내려앉지는 않았다. 심지어 콧등이 부어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눈 위에 앉아 코피를 펑펑 흘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 이런데도 아프지 않았다고? ”

 

 “ 아프지는 않아요. 숨쉬기가 불편할 뿐이지. ”

 

 

 그나마 얼굴이 망가지지 않았으니 다행이었다. 물론 알렉세이 마할린에게는 더욱 더. 며칠 동안 나는 그 작자를 고별 공연도 없이 은퇴시키고 말겠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나는 오전 연습에 가야 한다고 우기는 미샤를 기사의 차에 태워 병원으로 보냈다. 간단한 치료로 끝날 줄 알았지만 검사가 이어졌고 병원에서는 그 자리에서 미샤를 입원시켰다. 마할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코 때문이 아니라 폐렴 때문이었다.

 

 이틀 째 되던 날 그는 간호사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병실에서 기어나가 리허설과 정례 수업에 참석하고 그 다음날 밤에는 예정대로 무대에 올라가 춤을 췄다. 돈키호테였고 파트너는 니나 크류코바였다. 그녀는 미샤의 표현대로라면 ‘존경하는 인민예술가’였고 오랫동안 세레브랴코프의 파트너였다.

 

 

 무용계에서는 한동안 크류코바가 미샤를 낙점한 것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그날 돈키호테 공연에서 그녀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 밤 관객들의 환호와 충격 어린 열광을 기억한다. 그랑 파이널의 코다 무렵에는 천둥처럼 울려대는 갈채와 신음 소리, 숨이 멎는 듯한 비명들 때문에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미샤가 솔로를 마쳤을 때 무대로 날아든 꽃들 때문에 크류코바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 커튼콜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야 했다.

 

 

 극장 밖은 꽃다발과 편지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진창으로 부츠를 더럽히며 줄지어 있는 팬들로 가득했다. 주차장 한켠에는 얇은 봄 코트를 입고 머리를 스카프로 감싼 율리야 야스미나가 그 열광적인 남녀들을 힐끗거리며 서 있었다. 아들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서류의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흐릿한 가로등 램프 불빛 아래에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빛나는 검은 눈, 길고 미끈한 목과 호리호리한 실루엣, 초조함과 행복감이 뒤섞인 표정.

 

 

 그날 밤 팬들도 율리야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투우사를 췄던 동료가 분장실에 갔다가 고열로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뒹굴고 있는 미샤를 발견했다. 그 고집쟁이는 40도까지 열이 치솟는 것도 모르고 춤을 추러 올라갔던 것이다. 혼비백산한 다닐로프가 자기 차로 그를 병원에 싣고 갔다고 들었다.

 

 

 나는 다음날 병원에서 율리야를 보았다.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나도 굳이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복도에 선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감싸고 있는 긴 손가락 사이로 결혼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나는 그녀에게 세르게이 야스민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그녀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그건 미샤가 얘기하는 어둠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샤는 폐렴으로 입원해 있던 열흘 동안 일곱 번 병원을 빠져나가 연습과 수업에 참석했고 심지어 지젤 무대에도 예정대로 올라갔다. 단 한 번도 너그럽다는 평을 들어본 적이 없는 크류코바는 자신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간 어린 파트너를 질투하기는커녕 지젤을 비롯해 이후 백조의 호수까지 같이 췄다. 광대뼈의 멍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고 콧대는 멀쩡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그에게 대체 왜 세레브랴코프의 도발에 화를 내며 싸움으로 맞섰느냐고 물었다. 고분고분하거나 얌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상대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는 적이 거의 없는 애였으니까.

 

 

 “ 제가 배역을 얻으려고 니나와 잤다고 몰아붙여서요. 정말로 화가 났던 건 아니에요. 화를 내야 정상인 상황이라 그랬던 거죠. ”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에게 정말 크류코바와 잤느냐고 물었다.

 

 

 “ 파트너와 자면 신뢰가 깨져요. 그런 식으로 춤추고 싶지는 않아요. ”

 

 “ 신뢰 대신 다른 게 생길 수도 있지. 이를테면 사랑이라든가. 키로프에도 커플 무용수들 여럿 있지 않나. ”

 

 “ 전 사랑으로 춤추는 인간이 아니에요. ”

 

 

...

 

 

 

폐렴에 걸린 미샤가 병실을 빠져나가 돈키호테 무대에 올라갔다가 쓰러져 도로 실려간 이야기와 세레브랴코프와의 싸움 얘기는 트로이의 이야기에 다른 식으로 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94 (미샤의 첫 번째 시즌, 돈키호테, 축구팀과 군대처럼 등)

 

여기 발췌한 에피소드의 일인칭 화자인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미샤의 이야기는 전에 두어군데 다른 내용을 발췌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고 미샤를 되살려내면서 바로 이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그래서 이 단편은 내겐 좀 특별하다.

 

전에 발췌했던 마로조프의 이야기들은 아래 :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4485 

그가 읽었던 불가코프의 문장, 비행기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  http://tveye.tistory.com/4572

 

..

 

 

 

마린스키 극장(소련 시절 키로프 극장)

 

 

 

난 사실 여기 발췌한 저 소설을 쓸때 이런 이미지로 시작했다. 그건 아주 붉은 장미와 하얀 눈이었다.

하얀 눈 위에 쏟아진 붉은 피에 대해 쓸때도 마찬가지였고 저 단편 전체를 쓰는 내내 나는 장미에 대해 생각했다. 장미와 눈. 그래서 원래 이 단편의 에피그라프를 장미나 눈에 대한 시로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그렇게는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하얀 눈 위에 핀 빨간 장미 사진은 찍어본 적이 없어서... 이번 페테르부르크 갔을때 찍었던 이삭 광장의 붉은 장미 사진으로... :)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사진은 nina alovert.

 

 

돈키호테를 추는 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은 nina alovert.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6월 24일. 이날 운좋게 매진됐던 표를 득템하여 마린스키 구관에서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아나스타시야 마트비옌코가 춘 지젤을 보러 갔었다. 근 10년 전 슈클랴로프의 첫 무대를 본 게 바로 지젤이었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그날 찍었던 휘황하고 아름다운 마린스키 극장 샹들리에와 램프, 그리고 내부 사진 몇 장.

 

세상에 극장은 많다. 아름답고 호화스런 극장들도, 현대적이고 세련된 극장들도. 그러나 그 많은 극장들 중 나의 첫 극장이자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극장, 여전히 내 마음 속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극장은 바로 이곳, 마린스키 극장이다. 신관도 좋지만 역시 구관이 가장 매혹적이다. 리노베이션을 한다 해도 제발 저 전통적인 아름다움은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신관과는 달리 마린스키 구관에는 여기저기 카페가 숨어 있다. 처음 가는 사람들이야 다들 2층 벨에타쥐 쪽에 있는 카페로 몰리지만 공연 많이 보러 온 사람들은 보통 2야루스(4층) 양쪽 윙에 딸려 있는 조그만 카페를 선호한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입장 가능한 시간에 딱 맞춰가서(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가능) 프로그램을 산 후 잽싸게 2야루스 쪽 카페로 달려간다. 나는 좀더 편안한 레프트 윙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바로 여기... 층계와 복도 사이의 조그만 귀퉁이에 카페가 있다. 테이블이 몇개 없기 때문에 빨리 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이 자리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러시아 관객들. 특히 비싼 표 대신 4~5층(2야루스, 3야루스) 표 끊어서 자주 보러 오는 진짜 애호가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내가 료샤를 여기 데려가기도 했음 ㅋㅋ)

 

작년에 마린스키 숍에서 사서 잘 쓰고 있는 오페라 글라스와 이 날의 지젤 프로그램.

 

 

 

 

이 날은 빨리 가서 제일 좋아하는 층계 옆 테이블 득템... 옆으로는 기다란 층계가 있고 거대하고 화려한 거울이 있어서 저 계단 올라오는 여인들마다 모두 저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고치고 미모를 뽐낸다.

 

 

 

내가 좋아하는 이곳의 티라미수 :)

 

 

 

옆으로는 이렇게 층계가 보이고...

마린스키의 색깔인 푸른색... (볼쇼이는 붉은색이다. 이건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색채이기도 하다)

 

 

 

 

 

나도 러시아풍으로 꾸미고 갔음 :) 목걸이와 브로치.

 

 

 

이때 내가 득템한 자리는 1층 칸막이 좌석인 베누아르. 시작 전 첫번째나 두번째 벨이 울린 후 직원 할머니가 오셔서 열쇠로 저 칸막이 문을 하나하나 열어주면 그때 들어갈 수 있다.

 

 

복도의 램프들.

 

 

 

샹들리에.

 

오래된 극장들의 샹들리에들은 굉장히 아름답다. 마린스키 샹들리에도 예외는 아닌데, 전에 마린스키 페이지에서는 연중행사로 저 샹들리에 내려서 청소하는 영상을 보여주기도 해서 무척 재미있었다.

 

 

 

 

좌석 칸막이 위의 램프.

 

 

 

 

 

 

 

 

 

이날 파루흐 루지마토프 사진 몇장과 테미르카노프의 호두까기 인형 지휘 cd 득템. 그런데 저 비닐봉지가 더 가슴 설렘. 항상 그렇다. 그래서 여기서 받아온 비닐 봉지는 하나도 안 버리고 차곡차곡 모아놨음 :)

 

 

그냥 이걸로 끝내면 아쉬우니 이날 춤춘 아나스타시야 마트비옌코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커튼 콜 사진도 한 장.

슈클랴로프의 알브레히트는 명불허전...

(이때 찍은 사진 몇장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835)

:
Posted by liontamer







지난주에 나는 몇년 전 쓴 소설에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 출신인 트로이와 알리사가 나눈 대화와 알리사가 런던으로 떠난 과정을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그때 트로이는 레닌그라드에 남았고 알리사는 런던에 있는 소련 대사관으로 떠났다.

(http://tveye.tistory.com/5016 : 알리사는 기계벌레와 도스토예프스키, 불가코프에 대해 무슨 말을 했나, 항의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불멸입니다!)



아래 발췌한 이야기는 그로부터 몇달 후의 일이다. 미샤가 키로프 발레단의 유럽 투어에 참여한다. 그는 파리와 암스테르담, 브뤼셀에서 공연을 한다. 그리고 일 때문에 파리에 들른 알리사와 잠깐 조우한다. 돌아온 미샤는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한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들이다. 디나 로쉬도 마찬가지이다. 런던 댄스 페스티벌도 여러가지 페스티벌과 콩쿠르를 조합해 내가 만든 것이다.



맨 위의 사진은 내가 찍은 것은 아니고 웹에서 얻은 것인데 분위기가 좀 이 에피소드와 어울려서 올려봤다. 어스름에 잠긴 궁전광장에서 이삭 성당과 네프스키 거리 입구를 바라본 풍경이다. 내 글에서는 저런 어둠 속에서 미샤와 트로이가 걷는 장소가 고로호바야 거리라서 여기는 아니고 그저 좀 가까운 곳이긴 하다만. 


..



나는 몇주 동안 많이 힘들었고 특히 최근 며칠 동안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심신을 주워모으는 중이다. 예전 글도 읽고 이번에 페테르부르크 다녀와 조금 구상한 글에 대한 생각도 다시 시작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이 방법으로 숨을 쉬고 다시 물 위로 올라가곤 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12월 초에 미샤는 프랑스 등 유럽 3개국 투어를 떠났다. 별 문제 없이 투어에 합류하고 백조의 호수와 지젤 두 개 작품을 모두 추게 된 것을 보니 지나이다의 말을 잘 들었던 게 틀림없었다. 파리 첫 공연이 끝나고 며칠 후 런던으로부터 잠시 들어온 알리사의 동료가 타냐에게 조그만 상자를 전해 주었다. 실크 스카프와 초콜릿 캔디들 아래 이중바닥에 공연에 대한 프랑스 뉴스 녹화 테이프와 신문, 잡지 기사가 숨겨져 있었다. 알리사는 특유의 조그맣고 깔끔한 글씨로 짧은 메모를 남겼다. 안부 인사도 없이.



회의 때문에 파리 갔다가 지젤 봤어.
극장이 발칵 뒤집혔지.
콧대 높은 파리 사람들 넋을 완전히 빼놨어.




 타냐의 집에 모여든 친구들에게 프랑스어를 전공한 스베타가 뉴스와 기사를 번역해 소리 높여 읽어주었다. 열광과 칭찬 일색이었다. 트로이는 ‘사악한 천사, 마음을 뒤흔드는 악마’라는 다분히 뜨겁고 감상적인 표현을 발견하고 수첩에 적어두었다. 그건 파리 오페라 극장의 스타 발레리나이자 안무가인 디나 로쉬가 한 말이었는데 그녀는 공연 다음날 아침 키로프 발레단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와 미샤와 한 시간 동안 직접 인터뷰를 했다. 물론 관계자들과 보안요원들이 동석한 자리였고 전문이 다 실려 있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터뷰는 무척 생생한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로쉬가 미샤한테 완전히 반했나봐. 자기가 조직위원으로 있는 런던 댄스 페스티벌에 초청했어. ”


 “ 언젠데? ”


 “ 2월. ”


 “ 와, 근데 보내줄까? ”


 “ 기자들 다 있는데서 제안해서 다닐로프가 긍정적으로 대답했나봐. ” 


 “ 그럼 런던에 가겠네. 코스챠한테 트렁크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해야겠다. ”




 그들은 이고리의 편집실로 몰려가 녹화 테이프도 돌려보았다. 뉴스 클립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공연 모습과 커튼 콜 장면, 파리 오페라 극장에 천둥처럼 울려 퍼진 갈채와 함성만으로도 꽤 볼만했다. 디나 로쉬와 미샤의 인터뷰 필름도 있었다. 기사에는 빠져 있던 부분이었다. 인터뷰는 러시아 대사관 쪽 통역을 통해 진행되었지만 로쉬가 어떤 질문을 던지자 미샤가 통역을 기다리지도 않고 재빨리 프랑스어로 길게 대꾸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고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 뭐라고 하는 거야? 쟤 어떻게 프랑스어를 저렇게 해? ”


 “ 학교에서 배웠다고 했어. ”


 “ 배워봤자 발레 용어였을 텐데. 네가 영어도 가르쳤잖아. ”


 “ 음, 영어도 나쁘지 않아. ”


 “ 그래, 준비 잘하고 있구나. 다행이다. ”



 트로이가 노려보자 이고리는 입을 다물었다. 애가 탄 타냐가 스베타를 쿡쿡 찔렀다.



 “ 무슨 얘기였어? 우리 쪽 사람들 얼굴이 완전히 굳었잖아. ”


 “ 어... 좀 민감한 질문이었어. ‘키로프는 확실히 고전 발레 쪽에서는 최고의 극장이지만 예술가로서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싶지 않느냐, 파리나 서방 국가의 무대에서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마음은 없느냐’, 처음엔 이렇게 물었어. ”


 “ 그래서 뭐라고 대답한 거야? ”


 “ 디나가 부른다면 물론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했어. 모든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다면 그건 예술가가 아니라 급료를 받는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어. ”


 “ 급료를 받는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동자를 그렇게 깎아내렸단 말야? 대사관 사람들과 요원들 앞에서? ”
 


 트로이는 공포에 질려 신음을 토했다. 이고리는 고개를 저으며 스베타에게 물었다.



 “ 그 다음엔? 또 다른 질문 있었잖아. ”


 “ 아, 음... 파리에 처음 온 것 같은데 레닌그라드와 어떻게 다른지, 여기 좀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지 물었어. ”


 “ 그 여자 너무한데, 망명을 부추기는 질문처럼 들리잖아. 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걸 물으면 미셴카가 난처해지지. ”


 “ 파리는 레닌그라드만큼 춥지 않고 길에 진창이 별로 없어서 신발이 덜 더러워지는 게 좋대. 그 말 때문에 로쉬랑 둘이 웃은 거야. 로쉬가 애한테서 눈을 못 떼는 걸 보니 진짜 반했나봐. 아, 그리고... 자기는 춤을 출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오래 머물고 싶다고 했어. ”


 “ 알만하네, 저 인터뷰 끝나고 불려갔을 거야. 그냥 통역이 적당히 잘라서 옮기게 놔둘 것이지... 아, 우리 로미오를 어떻게 하지. 평소엔 그렇게 침착한 애가 자기 춤 앞에선 성격이 불같이 변해. KGB 놈들이 가만히 안 놔둘 거야. ”



 타냐가 탄식하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고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 그래도 레닌그라드로 소환 안하고 브뤼셀이랑 암스테르담에 보내줬잖아, 별 일 없을 거야. ”


 “ 런던엔 못가겠네. ”


 “ 두고 봐야겠지 뭐. 그건 그렇고 프랑스 사진사가 우리 쪽보다 실력이 훨씬 좋네, 자다가 일어나서 내려온 애를 모델처럼 찍어 놨으니. 나도 이런 구도로 찍어봐야지. ”


 “ 이고리 넌 멀쩡한 애를 왜 자다가 일어났다고 폄하하고 그래, 원래 잘난 애를. ”


 “ 저 까치집 같은 머리 좀 봐라, 눈도 풀려 있고. 셔츠 단추도 위는 하나도 안 잠근 거 안보여? 다닐로프가 또 펄펄 뛰었을 게 뻔해, 극장 명예가 어쩌고저쩌고. ”


 “ 그래도 사진은 근사한데. 파리 아가씨들이 너도나도 스크랩하겠어. ”



 타냐와 스베타, 이고리가 잡지 사진을 보며 감탄하는 동안 트로이는 좁고 답답한 편집실을 빠져나와 비상구로 갔다. 차디찬 바람을 쐬며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벨트 아래를 눌렀다. 그저 펄프와 잉크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데 어째서 그 보잘것없는 사진 한 장마저 그토록 격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고리의 말이 맞았다, 그건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된 모습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그 모습을 잘 알았다. 흐트러진 머리와 무겁게 처져 뒤엉킨 속눈썹, 평소의 예리함이 사라진 부드러운 눈매. 아무리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해도 소용없었다. 잠에서 깨어나 한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항상 그랬다. 온통 느릿느릿하고 어눌하고 거의 어린 아이처럼 부드럽고 사랑스러웠다. 그 짧고도 긴 시간만큼 안드레이 트로이츠키가 그를 온전히 자기 것처럼 느끼는 순간은 없었다. 미샤는 그런 무기력한 시간을 아주 싫어했다. 자신의 몸이 대체 왜 그런지 이해가 안 된다고 투덜거렸다. 빨리 정신을 차리려고 일어나자마자 찬물로 얼굴을 씻고 차가운 우유나 진한 차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며 온갖 애를 다 썼지만 완전하게 또렷해질 때까지는 언제나 한 시간이 필요했다.



 “ 그냥 받아들여. 넌 잠에서 깨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일 뿐이야. ”


 “ 유라가 그러긴 하더라, 아침에 활동하는 타입이 아니라고. ”


 “ 학교 다닐 땐 어떻게 이른 아침부터 수업을 받았어? ”


 “ 춤이나 음악 수업은 괜찮았는데 다른 건 힘들었어. 다행히 1교시가 주로 강령이랑 공산주의 교육이어서 자주 제꼈어. ”




 
 그 한 시간만큼 트로이를 강렬하게 감동시키고 애정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순간은 거의 없었다. 그는 미샤가 잠에서 깨어난 후 곧장 침대에서 내려가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썼다. 잠든 척하며 거미처럼 기다랗고 무거운 자신의 사지로 그의 몸을 반쯤 덮고 있을 때도 있었고 아예 애무를 하거나 섹스를 할 때도 있었다. 사랑을 나누고 나면 미샤는 평소보다 일찍 제정신을 차렸다. '온몸에 피가 잘 돌아서' 라고 농담을 했는데 트로이는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희미하게 흥분을 느꼈다.



 그런데 마로조프도 그 모습을 알까? 니콜카도, 아스케로프도, 스비제르스키도, 그리고 그 외의 이름 모를 정부들도 모두 그 한 시간을 알고 있을까? 갑작스럽게 트로이는 칼로 파고드는 것 같고 불타는 듯한 질투심과 분노를 느꼈다. 심지어 편집실에서 그 사진을 보고 있는 친구들에 대해서도, 잡지를 펼쳤다가 미샤의 모습을 봤을 무수한 프랑스 남녀에 대해서도 비이성적이며 무자비한 증오가 치솟았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와 희미한 졸음에 취해 있는 길고 부드러운 눈매, 반쯤 벌려진 입술과 칼라 아래 단추 여러 개가 풀려 있는 검은 실크 셔츠와 어린 아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소파에 늘어뜨리고 있는 팔과 다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마치 인생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소중하고 비밀스런 그 무엇을 순식간에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너희들은 그냥 무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잖아. 이건 그냥 놔둬!’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불을 지르고 싶었다.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두렵게 느껴졌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오랫동안 그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  *  *





 큰 성공을 거둔 유럽 투어에서 돌아온 직후 미샤는 모임에 찾아왔고 파리에서 만난 알리사에 대한 소식을 짧게 전해주었다. 대사관 리셉션에서 자기가 직접 찍은 그녀의 사진도 한 장 가져왔는데 트로이에게 주려고 했지만 코스챠가 열광하며 빼앗아가 버렸다.



 “ 여전히 예쁘구나, 알랴는. 근데 많이 야위었네. ”



 사진을 들여다보며 갈랴가 혀를 찼다. 알리사는 어깨를 드러낸 암청색 드레스 차림이었고 여전히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칼을 소년처럼 짧게 자른 채 비스듬하게 몸을 틀고 있었다. 솟아오른 광대뼈 위로 커다란 갈색 눈동자가 깊고 쓸쓸하게 빛나고 있었다.



 코스챠가 미샤의 팔을 잡아당기며 애절하게 물었다.



 “ 알랴 혼자였어? 아니면 파트너가 있었어? 누구 사귄대? ”


 “ 런던 쪽 동료들과 같이 왔어. 사귀는 사람은 잘 모르겠네, 5분밖에 못 봤거든. 다들 보고 싶다고 전해 달래. ”


 “ 걔랑 저녁이라도 같이 먹지 그랬어. 런던에서 엄청 외로웠을 텐데. ”


 “ 그러지 않겠냐고 했는데 알리사가 시간이 안 된다고 했어. ”


 “ 알리사가 네 공연 기사랑 뉴스 클립 보내줬어. ”


 “ 아, 의외네. ”


 “ 뭐가? ”



 미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파리에 가기 전에 트로이가 알리사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런던에도 가게 된다면 알리사를 만날 수 있을 텐데 아쉽다고 했더니 미샤는 ‘알리사는 날 싫어하는데 보러 올까?’ 하고 물었었다. 




 
 그날 갈랴의 집에 모여든 친구들은 끊임없이 미샤에게 투어와 공연에 대해, 파리와 브뤼셀과 암스테르담, 이름만으로도 한없이 자유롭고 멋지게 느껴지는 그 도시들에 대해 질문을 퍼부었다. 미샤는 평소처럼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들로 대답했지만 트로이는 그의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아늑한 거실 안에서, 따뜻하고 열광적인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채 미샤는 홀로 길을 잃은 것처럼 멍하게 서 있었다.



 마침내 트로이는 다음날 오전 리허설이 있지 않느냐는 핑계로 미샤를 갈랴의 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코스챠가 자기 차로 데려다 줄 테니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붙잡았지만 다들 네 음주 운전에 친구들의 생명을 저당 잡힐 수는 없다고 심하게 야단쳤다.




 차디찬 밤거리로 나와 버스를 타러 갔을 때 미샤가 말했다.



 “ 알리사가 네게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어. ”


 “ 무슨 뜻인지는 얘기 안해? ”


 “ 네가 알 거라는데. ”



 물론 알았다. 그는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과연 약속을 지키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리사는 그가 진정한 시인처럼, 진짜 작가처럼 쓰기를 원했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오로지 열망만이 존재했다. 그것도 충분히 뜨겁지도 못한 열망.



 “ 또 다른 말은 없었어? ”


 “ 없었어. 알리사는 외롭고 불행하게 거기 있었어. ”


 “ 거기는 어딜 말하는 거야? 파리? 런던? ”


 “ 글쎄, 둘 다. 똑같은 거야, 안드레이. 파리나 런던이나 둘 다. 어쩌면 여기와는 다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알리사가 찾는 건 거기 없을 거야. ”


 “ 알랴가 왜 런던에 갔다고 생각해? ”


 “ 자신을 사랑할 힘을 얻고 싶어서. ”


 “ 서로 싫어하는 사이치곤 꽤 날카로운 얘긴데. ”


 “ 난 알리사 싫어하지 않아. 사실은 꽤 좋아해. ”



 버스가 고로호바야 거리 근처에서 멈추었다. 미샤가 트로이의 뒤를 따라 내렸다. 별 말도 없이 어두운 거리를 건너 아파트 안뜰로 들어섰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불어왔고 미샤의 머리에서 모자가 벗겨져 멀리 날아갔다. 미샤가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트로이는 투덜거리며 뜰 저편으로 모자를 주우러 갔다.



 돌아왔을 때 미샤는 엘리베이터를 붙잡아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릿한 전구 불빛 아래에서 검은 눈동자가 두세 겹의 불타는 원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트로이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등 뒤로 문이 닫혔을 때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와락 끌어당기며 키스를 했다. 지금껏 트로이가 집 바깥에서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샤가 잠깐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를 쳐다보았다. 거기 다시 그 시선이 있었다. 길 잃은 것처럼 멍하고 우울한 눈빛. 그는 더 이상 그런 눈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입술로 그 눈 위를 덮었고 혀끝으로 눈꺼풀과 속눈썹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 핥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그는 앞집 사람이 나와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미샤를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은 채 복도를 지나 자기 집 문 앞으로 갔다. 열쇠를 두 번 잘못 돌리자 미샤가 그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직접 열었다.




....



잠에서 깨기 힘들어하는 미샤에 대한 다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844







12월, 눈오는 마린스키(구 키로프) 극장 풍경. 이것도 웹에서 가져온 것. 아래 사진 네장은 내가 이번에 갔을때 찍은 것들.





이건 트로이와 미샤가 버스를 탔던 곳은 아니고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의 버스 정류장. 이 글에서 그들은 바실리예스프키 섬에 있는 날리츠나야 거리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그 정류장은 전에 사진 올린 적 있다. 여기 : http://tveye.tistory.com/4421 )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 어느 건물 문.





전에 몇번 올린 적 있지만, 페테르부르크에는 이런 안뜰(드보르)이 있는 형태의 건축물이 많다. 트로이가 살고 있는 고로호바야 거리의 아파트도 이런 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가면 사방을 둘러싼 건물이 나오고 그중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다.





어스름에 잠긴 고로호바야 거리.


여기는 트로이의 아파트가 있는 곳이라 이 글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이 거리는 꽤나 길어서... 트로이의 아파트는 위의 사진에 나온 곳과는 꽤 떨어져 있음.



어쨌든 미샤는 발레 투어를 갔다왔으므로 그가 주역을 췄던 지젤과 백조의 호수 사진 몇 장. 물론 미샤는 내가 만들어낸 인물이므로 사진은 다른 사람들 :)





안드리스 리에파 & 율리야 마할리나. 지젤.





아르춈 옵차렌코. 지젤.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백조의 호수




그리고 리허설 중인 슈클랴로프 사진으로 마무리...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이번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공연을 여러 차례 봤다. 마린스키에서 5회, 미하일로프스키에서 2회, 알렉산드린스키에서 에이프만 발레까지 총 8번을 봤는데 아주 좋았던 것도 있고 그럭저럭이었던 공연도 있었다.

 

극장에 가면 종종 나는 쓰고 있는 글에 대해 생각하거나 인물들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 마린스키에 가면 더 그렇다. 내가 데리고 쓰는 주인공이 그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근 10년만에 에이프만의 공연을 보았을 때는 내가 왜 이 인물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오랜 옛날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도 들었다.

 

발췌한 부분은 3년 전에 쓴 장편의 중반부이다. 배경은 1974년에서 1975년 초. 주인공 미샤가 키로프 극장에 입단해서 두번째 시즌을 맞이했을 때이다. 이 부분에서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그리고 곱사등이 망아지의 이바누슈카를 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라브로프스키 버전. 여기의 곱사등이 망아지는 요즘 마린스키에 올라가는 라트만스키 버전이 아니고 나의 본편 우주에서 당시 키로프 예술감독(허구의 인물) 보리스 아사예프가 새롭게 안무한 버전이다. 둘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고 배역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미샤는 조금 다른 식으로 춤춘다.

 

하지만 이 글을 쓸때 나는 춤에 대해서만 쓰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이 글의 진짜 화자는 트로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샤가 정장에 샴페인을 엎지르는 얘기도 나왔다. 그 얘기는 아래...

 

 

(... 글에 언급되는 보리스 아사예프는 키로프 예술감독, 다닐로프는 행정감독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허구로 만들어낸 극장 구조와 인물들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두번째로 맞이한 가을 시즌에서 미샤는 지나이다와 짝을 이루어 춤추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크류코바나 다른 인민예술가 파트너가 필요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 젊은 무용수가 무대 위에 꼼짝도 않고 두 시간 동안 앉아 있기만 해도 극장에 찾아올 기세였다. 그와 지나이다는 첫해에 미처 추지 못했던 주요 레퍼토리들의 배역을 거의 모두 섭렵했다. 키로프 무대에서 채 보여주지 못한 것들 중 몇 가지는 연방과 해외 투어에서 췄다.

 

 발레단의 예술감독인 보리스 아사예프는 미샤에게서 몸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는 능력과 음악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발견했다. 혹독한 교육과 훈련으로 다져져 고전 발레의 테크닉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무용수였지만 미샤 야스민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움직임을 추구하고 전통적 방식을 훌쩍 뛰어넘으려는 성향이 있었다. 그건 자칫 잘못하면 천박하고 지저분한 스타일로 전락할 수도 있었지만 미샤는 휘파람을 불 듯 가볍고 우아하게 그런 시도를 계속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관객들은 그가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키로프의 전통을 박살내며 야만인처럼 무대를 더럽히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전통주의자에 가까운 아사예프는 미샤의 그런 특질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힐 때도 많았지만 보통은 매료되거나 고민에 빠졌다. 당에서 박아 넣은 밋밋한 예술감독이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는 나름대로의 심미안을 갖추고 있었고 재능에 대한 감별력도 뛰어났다. 아사예프는 미샤와 새 배역을 놓고 리허설을 할 때마다 그의 새로운 해석과 놀라운 움직임에 감탄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반항적이며 타협하지 않으려 드는 태도를 들어 역을 빼앗아버려야 할지 골치를 썩여야 했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를 축으로 한 남성 무용수들 다수는 그런 미샤를 미워했다. 그건 순식간에 톱스타가 된 후배에 대한 질시 뿐만은 아니었다. 미샤는 선천적으로 집단에 포함되거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바깥에서는 예의도 제법 지키고 차분한 편이었지만 춤과 관련된 일에서는 연공서열이나 소모적인 명령 따위를 경멸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새 시즌에도 선배들과 미샤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가 여러 번 생겨났다. 미샤는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꽤 친해진 발레단 코디네이터 타마라로부터 가끔 그런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고 걱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여자 파트너들은 미샤에게 별로 불만을 갖지 않았다. 존재감이 강력해서 어디서나 훌쩍 튀어버리는 경향은 있었지만 미샤는 기본이 잘 되어 있는 파트너였고 상대를 안정적으로 받쳐주면서 움직임이나 포즈를 아름답게 뽑아내 주는 기량이 탁월했다. 미샤와 춤을 췄던 여자 무용수들은 한결같이 그의 음악적 감각과 무대 장악력에 대해 얘기했고 다시 파트너가 되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으로 상대를 압살하기보다는 파트너를 그 경이로움 속으로 함께 데려갈 때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떠나갈 듯한 갈채와 기록적인 커튼콜 앞에서 무심할 수 있는 무용수들은 별로 없었다.

 

 

 12월 중순에 그는 지나이다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췄다. 부다페스트에서 춘 이래 두 번째였지만 레닌그라드에서는 처음이었다. 발레단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커플인데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배역의 상징성 때문에 공연 당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들 미샤 야스민과 지나이다 세도바의 테라스 장면을 보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 날은 극장과 관련된 기념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당 중앙위원들과 정부 관료들이 좋은 자리를 모두 차지했고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극장 바깥에 모여 발을 동동 굴렀다. 대담한 몇몇은 몰래 칸막이 자리로 숨어들기도 했다. 방송사에서도 취재를 왔고 렌필름에서도 무대를 녹화하러 왔다.

 

 후끈 달아오른 관객들의 기대와는 달리 극장 내부와 몇몇 전문가들로부터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둘 다 사랑스럽고 달콤한 연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고 가냘프고 섬세하다기보다는 역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스타일의 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사예프는 한때 미샤와 지나이다에게 부드러운 이미지를 위해 금발로 염색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했지만 둘 다 거부했다. 트로이는 세레브랴코프가 스페이싱 리허설을 마치고 내려오던 지나이다에게 기껏해야 머큐시오에나 어울리는 파트너를 얻어서 참 안됐다고 비아냥거렸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타마라는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과장된 어조로 외쳤다.

 

 

 “ 오오, 난 지나가 울어버릴 줄 알았어, 트로이! 울리얀은 본성이 못된 건 아니지만 원하기만 하면 엄청 기분 나쁘게 말할 수 있거든. 그 사람 독설 때문에 신입 남자애들도 여럿 우는 거 봤어. ”

 

 “ 그런데? ”

 

 “ 와, 지나가 그렇게 성깔 있는 앤 줄 상상도 못했지. 눈을 똑바로 뜨면서 나이 값 못하는 선배와 추느니 머큐시오 따위와 추는 게 백배 낫다고 쏘아붙이던데. 너도 그때 지나를 봤어야 해. 눈이 이글거리는 게 미샤랑 똑같았어. 무섭기는 걔보다 훨씬 무서웠지. 역시 빨간 머리는 달라. 둘이 정말 딱 어울려. ”

 

 

 그래서 트로이는 성깔 넘치는 반항아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며 극장에 갔다. 촬영에 여념이 없는 이고리 옆에 앉아 타냐와 갈랴, 료카와 함께 공연을 봤다. 갈랴는 우리 로미오가 진짜 로미오를 추는 걸 어떻게 보지 않을 수가 있느냐며 아기도 어머니에게 맡기고는 새 옷을 차려입고 왔다. 그들 모두 미샤가 발레학교 시절 췄던 짧은 2인무를 떠올리며 감개무량해 하고 있었다.

 

 

 이고리가 막이 드리워져 있는 무대를 향해 카메라를 길게 빼며 말했다.

 

 

 “ 이봐, 저 앞자리에 쿨리마코프가 앉아 있어. 스비제르스키도. ”

 

 “ 그래, 돔브로프스키와 불리첸코도 같이 들어가더라. 아까 기념식 했잖아. 오늘 다닐로프 완전 긴장 타겠는데. 높으신 분들이 대체 몇 명이야. ”

 

 “ 더 장난 아닌 거 얘기해줄까? 마로조프도 왔어. 그 드미트리 마로조프. ”

 

 “ 그 도살자? 추기경? 젠장, 우리 저쪽 줄에 폭탄이라도 하나 던져버리자, 구국영웅이 되는 거야! ”

 

 “ 안되지, 우리 로미오가 다치잖아. 폭탄은 커튼 콜 끝난 다음이야. ”

 

 

 그때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변에 앉아 있던 관객들이 그들에게 쉿 하며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현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셰익스피어를 좋아했다.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서는 언제나 보석 같은 언어로 교묘하게 치장된 섬세한 포르노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 초년생 시절 셰익스피어 연구회 친구들과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 그 발레를 보러 갔었다. 발레는 떠들썩하고 장황한 음악과 호화스런 볼거리로 가득 차 있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에로틱한 언어를 형상화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미샤는 로미오 역을 준비하면서 트로이에게 그 희곡의 영어 낭송 테이프를 구해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밤마다 그 대사를 들으며 잤다. 트로이는 그가 프로코피예프의 음악보다도 그 영어 테이프를 더 많이 들은 건 아닌지 궁금했다.

 

 

 미샤와 지나이다가 테라스에 등장해 춤을 추기 시작했을 때 극장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전혀 타타르 전사나 그루지야 미녀처럼 춤추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사춘기 연인들의 춤이었다. 미샤와 지나이다는 첫 번째 아다지오를 청순하고 조심스러운 아이들처럼 시작했다. 하지만 순수함과 건전함으로 표백된 피오네르 소년소녀들의 춤은 아니었다. 음악이 고조됨에 따라 그들은 성에 눈뜨는 사춘기 연인들의 경이와 탐색을 거의 짐승과도 같은 예민한 감각으로 점점 생생하게 형상화해냈다. 그건 셰익스피어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섬세하게 정련된 우아한 포르노였다.

 

 트로이는 미샤가 어떻게 섹스를 무대 위로 가지고 올라와 저토록 소년답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춤출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관객들과 전문가들도 그 무대를 외설적이라고 비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트로이는 알았다. 관객들 대부분도 알았을 것이다. 미샤와 지나이다는 어린 연인들의 섹스와 욕망을 얘기하고 있었다. 중앙위원회 간부들과 문화예술계 인사들 앞에서 당과 소비에트의 명예를 드높이는 키로프 극장의 스타 커플이 섹스를 형상화한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젊은 연인들의 풋풋하고 애처로운 사랑과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성의 쾌락에 대한 노골적이며 호기심 넘치는 탐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며 미샤와 지나이다는 관객들을 유사 오르가즘으로 몰고 갔다.

 

 

 침실에서 미샤는 대담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애인이었다. 당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이나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소심하고 폐쇄적인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그에 비하면 경험이 일천한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도중, 드문 순간이면 트로이는 그에게서 길 잃은 아이처럼 쓸쓸하고 순진한 모습을 보았다. 경이로움과 공포. 그리고 무대 위의 로미오에게도 그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은 드라마틱하게 극대화되었고 관객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사랑에 빠뜨렸다. 미샤의 로미오와 지나이다의 줄리엣이 종말을 맞았을 때 관객들은 진심으로 슬퍼하며 자기 첫사랑이 죽은 것처럼 눈물을 쏟았다. 아사예프의 선택이 성공했던 것이다. 세레브랴코프조차도 더 이상 미샤를 머큐시오 역에나 어울리는 풋내기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고리와 영화사 동료들이 촬영한 필름은 연말에 국영채널에서 방영되었다. 미샤는 호두까기인형을 추지는 못했지만 대신 아사예프가 야심차게 리메이크한 ‘곱사등이 망아지’의 새해 초연에서 이바누슈카를 췄다. 파트너인 공주 역을 춘 것은 지나이다가 아니라 코펠리아 역으로 유명했던 옥사나 셰먀코바였다. 그 공연에서 미샤는 드라마와 비극 뿐만이 아니라 희극도 잘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돈키호테를 췄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관객들을 웃게 만드는 방법을 알았다. 그건 축복받은 재능이었다.

 

 

 이바누슈카를 출 때 미샤는 머리색을 금발로 물들였다. 아사예프는 자기가 제안했을 때는 무시해놓고 왜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하느냐고 짜증을 냈지만 미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배역 해석 방법이 있었고 감독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다. 트로이가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미샤는 욕조에 앉아서 직접 머리칼을 자르고 블론드로 염색을 시도하고 있었다. 트로이는 뒷머리에 약을 바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 이거 너무 밝은 거 아냐? ”

 

 “ 아주 밝아야 해. 색이 빠지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거야. ”

 

 

 미샤는 참을성 있게 탈색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색을 덧입혀서 아주 엷고 밝은 꿀 색깔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 와중에 뒷목덜미에 잠깐 두드러기가 일어나서 트로이는 얼음을 가져와야 했다. 미샤는 따끔거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눈썹까지 물을 들였다.

 

 

 “ 그냥 스프레이로 물들이면 안돼? 분장사한테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

 

 “ 머리가 너무 까매서 스프레이는 잘 안 들어, 분장사도 포기했어. ”

 

 

 미샤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몇 주 정도 머리색을 되돌리지 않고 다녔다. 키로프에서 새로 제작하는 화보집 촬영 작가가 블론드의 이바누슈카 사진을 넣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엷은 꿀 빛깔의 머리와 금빛 눈썹의 미샤는 완전히 낯선 존재로 보였다. 트로이는 길게 흐트러진 검은 머리의 미샤가 더 좋다고 생각했지만 학생처럼 짧은 금발 머리로 열쇠를 따고 들어와 현관에서부터 수트 재킷과 드레스 셔츠와 타이를 벗어 내팽개치는 미샤를 볼 때마다 갈랴의 집에서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제어하기 힘들만큼 격한 욕망을 느꼈다.

 

 

 미샤는 정장을 싫어했지만 연초부터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정장이 없다는 거짓말을 하며 고집을 부리자 다닐로프는 새해 선물로 그에게 새 수트를 한 벌 떠안긴 후 무조건 입고 나오라고 엄포를 놨다. 미샤는 당 지역위원회 서기가 주최한 파티에서 고의로 자기 옷에 샴페인을 엎지르고는 다음날 비슷한 행사에 전혀 얌전하지 않은 스웨이드 재킷을 입고 나갔다. 화가 난 다닐로프는 타마라를 시켜서 서로 다른 디자인의 수트를 세 벌이나 사오게 한 후 옷들을 말 그대로 미샤의 얼굴에 냅다 집어던졌다.

 

 

 “ 그래서, 또 샴페인을 엎질러야 하는 거야? 아니면 와인? ”

 

내 급료에서 제할 줄 알았는데 공금으로 지출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입기로 했어. 스타일은 후졌지만 소비에트에서 무려 공금으로 하사하신 거니까. ”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트로이는 그 정장들의 스타일이 어디가 어떻게 후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짧은 금발을 하고 나타나 재킷과 드레스 셔츠와 넥타이를 기록적인 속도로 벗어던지는 미샤의 앞에서 도저히 태연하게 견딜 수 없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사춘기 줄리엣처럼 몸이 달았고 가끔은 침실이나 소파까지 가지도 못했다.

 

 

 마침내 그는 미샤에게 머리색을 되돌리라고 종용했다. 화보 촬영도 다 끝났으므로 미샤는 순순히 검은 머리로 돌아왔는데 그때서야 트로이는 머리색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계속해서 사랑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충족되지 않는 갈망으로 불타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머리의 미샤 야스민과 갈색 머리의 미샤 야스민, 금빛 머리의 미샤 야스민, 심지어 붉은 머리와 푸른 머리, 자주색 머리의 미샤 야스민조차도 모두 그의 곁에 존재하는 동시에 다른 무수한 남자들의 곁에 존재할 것이다. 그 무수한 남자들에게도 미지의 이름이 주어져 있고 미지의 욕망이 타오르고 있을 것이다. 트로이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예전에 미샤가 키로프에 데뷔해 해적의 알리와 지젤의 알브레히트를 추는 장면을 발췌한 적이 있다. 그 글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28

 

 

 

 

그냥 지나가면 아쉬우니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로미오와 곱사등이 망아지의 이바누슈카 사진 몇 장. 사진은 alex gouliaev.

 

 

 

 

 

상대역은 디아나 비슈뇨바

 

 

 

이것부터 세장은 상대역이 알리나 소모바

 

 

 

 

 

마지막은 곱사등이 망아지에서 이바누슈카를 추는 슈클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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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5. 10. 19. 20:53

극장 - 마린스키 russia2015. 10. 19. 20:53

 

 

 

 

 

 

 

 

 

7월. 발레 해적 보러 갔던 날.

맨 위 두 장은 마린스키 신관 내부.

세번째 사진은 공연 시작 직전, 운하와 마린스키 극장(구관)

마지막은 공연 마치고 나와서 찍은 마린스키 신관. 7월 백야 막바지 시즌이라 캄캄하지는 않다.

 

..

 

 

이 바닥에는 미치도록 환멸이 느껴지는데 그래도 극장은 그립다. 극장에서는 일을 안 해봐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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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서무 20편(http://tveye.tistory.com/3708)을 올리고 나니 극장 생각이 많이 나서...

지난 2월 20일. 마린스키 극장. 구관. 페트루슈카 보러 갔을 때 찍은 내부 사진 몇 장.

 

이건 4층인가 5층의 복도 카페에서 주스 마시다가 아치의 틈새 사이로 찍은 것. 2층에 커다란 홀이 있는데 그 홀의 샹들리에가 반쯤 보인다.

 

 

 

복도의 의자. 쉬는 시간에 관객들이 여기 앉아 쉰다. 나는 보통 이런 의자에 앉아 미리 챙겨온 물을 마시고 초코바를 까먹는다.. (공연 보면 배고픈데 막간에는 카페에 줄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못 기다림..)

 

 

 

1층에 있는 아트샵. 마린스키에 가면 꼭 가서.. 모든 엽서와 사진을 전부 살펴보고.. 가끔 슈클랴로프의 근사한 사진이나 더 운 좋으면 왕년의 루지마토프 사진을 득템한다.. 이번에 갔을 때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아주 멋진 사진을 하나 건졌다!!

 

 

 

 

복도 여기저기에 이렇게 코트 보관소(가르제로브)가 있다. 구극장 리노베이션하면 이 구석구석 보관소를 혹시 없애려나 ㅠㅠ 이건 그냥 놔뒀음 좋겠다... 신관은 지하가 모두 코트 보관소인데 줄 엄청 서야 함... 이쪽이 더 좋다. 5층까지 있는데 각 층별로 여기저기 보관소가 흩어져 있어 편한데...

 

 

 

1층 박스석. 베누아르, 오른편 윙.

 

베누아르는 이렇게 칸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 의자 5~6개가 늘어서 있다. 앞에 3석, 뒤에 3석 식인데 의자가 요즘 극장처럼 붙어 있지 않고 그냥 파란 빌로드 방석 깔린 의자라서 움직일 수가 있다. 고로 나처럼 작은 사람은 앞자리 앉으면 의자를 더욱 앞으로 바짝 당겨서 볼 수 있다.

 

첫번째 벨이 울리고 두번째 벨이 울릴 즈음이면 안내원 할머니들이 열쇠꾸러미를 가져와서 각 칸마다 문을 열어준다. 문 안 열어주면 못 들어감 :)

 

물론 현대적인 신관에는 이런 거 없다... 아아, 이거 다 그대로 놔둬주세요 ㅠㅠ 미로처럼 뻗어 있고 칸칸이 나뉘어진 구극장의 매력인데...

 

(그래도 공연 보기에는 사실 신관이 더 편하긴 하다 ㅠㅠ 앞사람 머리에도 덜 가리고.. 그러나 이 오리지널 극장의 아우라는 결코 신관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뒤로는 마린스키의 유명한 파란 막이 보이고... 내 자리였던 베누아르 칸막이에 들어와서 머리 위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 찍음

 

 

 

비스듬하게 찍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가운데로는 마린스키의 아름다운 푸른 천정과 찬란한 샹들리에가 보이고.. 정가운데 커다란 샹들리에는 역시 칸막이 위에 달려 있던 샹들리에.

 

다시 가고 싶구나.

리노베이션한다고 하는데.. 제발제발제발 화장실이랑 앞사람 머리 가리는 의자만 좀 손보고 전체 구조는 놔둬줬으면 ㅠㅠ 제발... 구극장의 아름다움과 세월 속에서 쌓여온 묵중함과 신비로움을 가져가지 말아주세요.. 제발!! 가뜩이나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신관을 멸시하고 구극장만이 '진짜 극장'이라고들 하는데..

 

 

** 태그의 마린스키 극장을 클릭하면 이 극장 내외부 사진들이나 극장 공연들, 혹은 리뷰 등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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