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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휴 즈음부터 다시 본편을 쓰기 시작했다. 근 1년 만이다. 1부까지만 쓰다가 글도 잘 안 풀리고 직장 스트레스도 심해서 장난치는 외전으로 서무의 슬픔 시리즈를 쓰기 시작해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서 일년동안 그것만 쓰고 놀았다. 서무 시리즈로 잘 놀긴 했고 앞으로도 가끔 놀겠지만 하여튼 본편을 매우 어렵게 다시 시작했다. 물론 잘 안된다.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집중이 어려운 상황이라서 더 그럴 것이다.

 

오늘도 겨우 한 페이지 정도 썼다. 본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고 인물들 간의 친밀도나 관계가 강력해질수록 글은 가속이 붙고 스스로의 생명력을 얻게 되어 내달리게 되겠지만 아직은 그 단계가 아니다.

 

아래 발췌한 두세 페이지는 이미 쓴지 일년도 넘었다. 1부 2장에 속하니까 초입부이다. 가브릴로프로 유배된 미샤와 그의 감시요원인 다닐 베르닌이 처음 만나 KGB 사무실에 가서 서류등록을 한 후 신시가지 시내로 나오는 부분이다. 사실 베르닌보다는 미샤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긴 하지만. 그거야 주인공이니까 :)

 

서무 시리즈는 이 본편에서 나왔지만 그 시리즈가 훨씬 많아지고 방대해진 관계로 어쩐지 전세가 역전된 것 같다만... 원래는 베르닌은 이런 스타일의 인물이다. 서무의 고지식한 책상물림 단추청년과는 좀 다른데 그만큼 귀엽지는 않다. 물론 미샤도 왕재수와는 다르다. 서무 시리즈에서는 둘의 첫 만남을 완전히 다르게 묘사했다. 그 에피소드는 0편인 '다닐 베르닌의 새로운 임무'(http://tveye.tistory.com/3429)였는데 물론 그 에피소드 0은 아래 발췌된 문단이 들어 있는 제2장을 다 쓴 후에 나중에 패러디해 쓴 거라서 쓰는 내내 즐겁긴 했다.

 

지금 쓰고 있는 부분도 베르닌과 스페호프의 사무실 장면이기 때문에 그간 서무 단추로 오염된(ㅜㅜ) 베르닌의 본모습을 다시 찾으려고 앞부분을 들춰보고 있는 중이다. 아래는 그 앞부분 중 약간 발췌한 부분. 가브릴로프에 대한 간단한 설명도 나온다. 물론 내가 설정한 가상의 소도시이다. 서무 시리즈에서도 공간적 배경은 거의 흡사하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미샤는 정문 밖으로 나간 후였다. 베르닌은 정문 경비요원에게 자신의 허가도 없이 감시대상을 내보낸 이유를 추궁할까 했지만 그만 두었다. 자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그를 멈춰 세웠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무장 상태에 아무런 폭력성도 느껴지지 않는 젊은 남자, 한없이 무해하고 어려 보이는데다 심지어 한쪽 다리를 끌면서 천천히 걷는 야윈 청년. 눈부신 햇살 속에서 화관처럼 흐트러진 검은 머리와 하얗고 매끄러운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의 미샤 야스민은 차라리 소년에 가깝게 보였다. 그는 총을 들고 서 있는 경비 요원들의 곁을 자연스럽게 지나 밖으로 나갔다. 아무런 공포나 놀라움, 호기심조차 없이. 경비 요원들은 그가 지나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비나 새가 스쳐간 것처럼.

 

 

베르닌은 볼쇼이 대로와 그루셰바야 거리 교차로에서 그를 발견했다. KGB의 붉은 담장이 끝나는 곳에서. 미샤는 커다란 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길게 뻗은 두 다리는 그늘에 가려져 있었지만 머리와 어깨로는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꼭 따스한 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불과 5분 전까지 거친 몸수색을 당하고 KGB 국장으로부터 상당한 수위의 협박과 모욕을 받았던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재킷은 벤치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어쩌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햇볕을 받으며 바람을 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잠시 베르닌은 스타브로프의 병원까지 걸어서 갈까 하고 망설였다. 어쨌든 그루셰바야 거리를 따라가면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고 미샤에게 배정된 아파트도 그 근처였으니까. 아마 그 어둡고 붉은 얼룩이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얼룩은 이제 지퍼 장식 아래 포켓까지 타원형으로 번져 있었다.

 

 

미샤는 별 말 없이 차에 탔다. 벗었던 재킷을 다시 걸쳤고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 주름을 편 후 목에 둘렀다. 좁고 어두운 차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다시 야위고 창백해 보였다. 검은 눈이 우물처럼 깊게 패여 있었다. 목덜미 전체에 잉크 얼룩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잿빛의 흐릿한 멍 자국들이 스카프 사이로 여전히 눈에 띄었다.

 

 

“ 여기는 그루셰바야 거리입니다. 예전에는 배나무 숲이었는데 길을 내면서 많이 밀어버리고 가로수로만 남겨뒀죠. 하긴 이쪽 신시가지가 거의 그렇습니다만. 당신의 페테르부르크가 돌로 늪을 메워서 만든 도시라면 가브릴로프는 숲을 조금씩 밀어내고 세운 도시죠. 불행하게도 여기는 황제의 손이 닿은 곳이 아니라서 숲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답니다. 당장 이 그루셰바야 거리 끝에도 조그만 숲이 있죠. 그래도 이곳은 도시에서 가장 번화가에 속합니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당신 도시의 네프스키가 있다면 여긴 볼쇼이 대로와 그루셰바야 거리죠. 뭐 당신들 예술가들이야 극장에 박물관에 공방들이 우글거리는 구시가지가 더 마음에 들겠지만 그래도 살기는 이쪽이 훨씬 편하죠. 아까는 시간에 쫓겨 미처 보여주지 못했지만 우리 사무실 옆에는 시 의회와 공공기관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저쪽으로는 백화점과 상점가들이 있죠. 아, 지금 보이는 분홍색 건물은 시립 유치원입니다. 저기는 오블라츠느이 공원이고요. 시적인 이름이지만 구름과는 별 관계가 없답니다. 혁명 당시 이 동네 적위군 사령관 이름을 딴 거죠. 조금만 더 가면 당신 집이 보일 겁니다. 좋은 아파트죠, 스탈린 시절 세워진 겁니다. 이 동네 노멘클라투라들도 탐내는 곳이죠. 보안도 잘 되는 곳이고. 당국에서 신경을 쓰긴 한 모양이더군요. 어쨌든 팬들이 집까지 숨어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레닌그라드에서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여튼 아파트가 스타브로프의 병원 근처니까 편할 겁니다. 아니, 그렇다고 당신이 환자라는 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병원은 가까이 있는 게 좋지요. 그는 괴팍한 노인네지만 시에서는 최고의 의사죠. 아참, 잊을 뻔 했군. 앞으로 최소 두 달 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검진을 받으셔야 합니다. 루뱐카 본부에 서류를 제출하게 되어 있거든요. 극장 일로 아무리 바빠도 그건 빼먹으면 안 됩니다. 무려 벨스키 의원이 직접 지시한 사항이거든요. 아시다시피 이 동네에서 그 분의 말씀은 법이나 다름없죠. 하긴 그 분도 어릴 땐 우리 극장에서 뛰어놀며 컸다고 하더군요. 먀흐킨 극장장과 동창이라던가. ”

 

“ 당신은...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

 

 

미샤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 표정을 지었다.

 

 

“ 아, 내 이름이요. 다닐 베르닌입니다. 부칭까지는 필요 없겠죠. ”

 

“ 다닐, 당신은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 건가요. 아니면 정보 제공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건가요? ”

 

“ 흠, 어느 쪽이든 편할 대로 생각하시죠. ”

 

“ 후자라면 이제 충분한 것 같군요. ”

 

 

베르닌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 하긴 피곤하긴 하겠군요, 그렇게 기차에 시달리고 국장에게도 볶였으니. 조금만 견디시죠. 의사 선생에게 검진을 받고 나면 오늘 일정은 끝이니까. 집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리고 정보 제공 업무라면, 언제든 궁금한 게 생기면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꽤 유용한 정보들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전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

 

 

미샤는 아주 잠깐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베르닌은 그의 관통하는 듯한 검은 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일주일 이상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맸고 자기 발로 다시 걷게 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

 

사진은 지난 여름에 페테르부르크를 산책하다 찍은 것이다. 가브릴로프는 물론 아니지만(실재하지 않으니) 아마 미샤 역시 저렇게 찬란하고 따스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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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