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 극장 신관은 온통 호박색 황금빛으로 매끄럽게 치장되어 있고 수많은 크리스탈 장식들로 반짝거린다. 처음 갔던 건 십년 전쯤 , 신관 개장 몇달 후였는데 무척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갈때마다 즐거운 극장, 깔끔하고 근사한 극장이다. 그래도 나에게 마린스키란 역시 푸른색 빌로드와 금빛의 고풍스런 장식, 구불거리는 계단의 구관이지만.
2층인가 3층 쪽으로 올라가면 이 크리스탈 장식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대충 찍어서 휘황한 자태를 명징하게 잡아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두 장 올려본다. 아마 14년이나 15년에 찍었던 사진 같다. 다시 가고 싶어진다.
이날 종일 비가 오다가 저녁 무렵 좀 잦아들었다. 나는 이날 지하철을 타고 페트로그라드스키 지역의 어느 기념품샵을 찾아가 도스토예프스키와 고골, 하름스가 그려진 머그와 도블라토프의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샀고 본치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그리고 해질 무렵 궁전광장으로 나와 글라브느이 슈땀프 건물에 있는 에르미타주 기념품샵에서 선물을 샀다. 11월이라 해가 일찍 졌다. 하긴 비가 왔으니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았지만. 푸르스름한 황혼녘의 궁전광장은 역시 아름답고 근사했다. 그리고 선물을 사서 나왔을 때 저 광장에서는 어떤 청년이 빅토르 최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 한동안 그걸 듣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이 푸른 저녁빛에 휩싸인 채 겨울비에 젖어 있는 페테르부르크는, 날씨는 끔찍할지 모르지만 역시 아름답다. 그립다.
맨 위 사진은 에르미타주도 함께 나왔다.
이건 에르미타주에서 등을 돌리고 네프스키 대로 가는 방향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왼편과 오른편에 이삭 성당과 해군성이 보인다.
빅토르 최 노래를 다 듣고 나자 좀더 어둑어둑해져서 광장이 더욱 짙은 남색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조그만 짐느이 까날(겨울운하) 역시 그리운 풍경이다.
사진은 아이폰 xs
... 추가
이날의 메모를 찾아보니 위에서 쓴 궁전광장 타임라인 다 거꾸로였다 ㅎㅎ 빅토르 최 노래가 먼저였고 그담에 에르미타주 샵, 이후에 본치카페에 갔다 :)
2019년 11월.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 이때는 슈클랴로프님 공연 +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갔었는데 사실 11월의 페테르부르크보다 더 별로인 건 10월 중하순의 페테르부르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시즌 날씨는 좋지 않다. 머무르는 내내 단 한번도 햇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즐거운 여행이었다. 음습하고 축축한 날씨의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 백야나 한겨울 설경의 페테르부르크 사진들을 많이 올렸지만 사실 이 동네 날씨는 대부분 이렇다. 오랜 옛날 처음으로 이곳에 와서 겨울을 날 때는 정말이지 이 시기가 참 힘들었다. 그래선지 지금도 이 도시를 무척 사랑하긴 하지만 '평생 거기서 살래?' 라고 하면 흠칫할 것만 같다 ㅠㅠ (가을, 겨울에는 다른 곳에 있다 오면 좀 괜찮을 것 같은데)
사진은 모두 아이폰 XS
모이카 운하.
궁전광장으로 향하는 길. 저 아치를 따라 들어가면 광장이 나온다.
이건 바실리예프스키 섬 외곽의 셉카벨 항구 가는 길. 여기는 사실 이 시즌에는 절대로 가면 안된다. 해풍이 엄청나고 정말 춥다 ㅠㅠ 황량하기 그지없었던 항구에 공공미술과 가게들이 들어서서 힙한 동네가 되었다기에 구경을 갔지만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버스를 잡아타고 급하게 시내로 나와 나의 안식처인 뽀드삐스니예 이즈다니야 서점으로 대피했다. 옛날에도 이 동네 바닷가는 추웠는데... 추운 게 당연한데 나는 왜 그랬을까 ㅜㅜ
마지막으로 페테르부르크에 다녀온 것도 어느덧 5년이 다 되어간다. 코로나, 전쟁이 이어지면서 계속 못 가서 너무 아쉽다. 사진은 2019년 11월. 페테르부르크의 스몰니 사원. 관광객들은 굳이 여기까지 올 일이 별로 없다. 볼셰비키, 레닌 등 역사의 요람이긴 하지만 딱히 관광지는 아니고 또 중심지에서도 좀 떨어져 있다. 하지만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운영하는 연수센터 학생들이나 예비학부 학생들이 여기서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추억이 어린 곳이다(그런데 지금도 여기서 수업을 하려나?) 내 기억 속 스몰니는 항상 딱 이런 풍경이다. 우중충하고 어두운 날씨, 비, 눈, 습기와 추위. 아마 날씨 좋은 여름 무렵에 수업을 받았다면 좀 달랐겠지만.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서 저때 다시 가봤는데 역시나 우중충하고 추웠다. 이런 곳에 모여 있으면 놀고 싶은 마음보다는 혁명을 획책하고 싶은 마음이 더 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 네바 강변에 면해 있고 바람 불고 추운 동네이다.
페테르부르크의 그랜드 호텔 유럽, 그 동네식으로는 그저 '에브로파'라고 부른다. 사진은 호텔 2층의 라운지 카페 메조닌. 이게 2018년 11월에 찍은 사진인데, 코로나 시기에 이 카페가 리모델링되어 전반적으로 올리브그린 계열의 색채로 바뀌었고 식기와 소파도 바뀌었다. 바뀐 인테리어도 예뻐보여서 궁금한데 전쟁 때문에 가보지 못하고 있음. 나는 여기보다는 아스토리야의 로툰다 카페가 더 취향에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에브로파>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와 오랜 옛날부터 품어온 소녀의 로망 때문인지 이곳에 대해서 각별한 애정이 남아 있다. 그러나 디저트는 '확실하게' 로툰다 쪽이 더 맛있다.
호텔 복도.
이때 미니 아이스와인을 사와서 방에서 마셨나보다. 기억은 잘 안 난다만.
사진은 모두 아이폰 6s.
** 이 에브로파 카페에 대한 이야기를 예전에 쓴 중편에 삽입한 적이 있다. 발췌 링크는 아래
페테르부르크가 부쩍 그리워서 예전 사진들을 뒤적여보았다. 마지막으로 페테르부르크에 갔던 건 2019년이었다. 7월과 11월에 갔었다. 7월 여름에 찍은 폰 사진들을 보니 아기자기한 것들이 여럿 있었다. 이때 묵었던 호텔은 바가노바 발레학교와 면해 있는 건물의 로시 호텔이었다. 백야 시즌 성수기라 방값들이 다 비싸서 아스토리야나 에브로파에는 묵을 수 없었고 이 호텔도 방이 무척 작아서 답답했지만 그래도 판탄카 운하변에 있다는 건 좋았다. 발레학교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지나치면서 무용수나 학생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았고.
이건 낮에 햇살 받으며 쏘다니다 방에 돌아와 창가에 앉아 찍은 사진이다. 이때 내가 무척 좋아하는 서점인 뽀드삐스니예 이즈다니야 서점에 들렀고 거기서 귀여운 엽서와 스티커, 냉장고 자석을 사왔다. 거의가 페테르부르크와 관련된 그림들이다. 이후 선물로 준 것도 있고, 지금도 우리집 냉장고에 붙어 있는 엽서도 있다. 스티커 몇개는 캐리어에 붙였다. 사진을 보니 이때의 여행, 페테르부르크, 이즈다니야 서점이 무척 그립다.
페테르부르크에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도 빛이 잘 들어오고 살짝 복작복작한 느낌이 좋아서 자주 갔던 곳이 본치 카페이다. 통창문으로 햇살이 잘 들어오는 홀과 안쪽의 아늑하고 어두침침한 방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 나는 항상 빛이 들어오는 쪽에 앉곤 했다. 글을 쓰기도 좋고 스케치하기에도 좋다. 디저트도 맛있고 파스타도 나쁘지 않다. 아스토리야 호텔에서 걸어서 5~7분 거리라 종종 들르곤 했다.
여기는 뭐랄까, 굉장히 페테르부르크 느낌이 드는 카페이다. 아마도 바로 맞은편에 대학교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만. 미묘하게 이 도시 특유의 느낌이 배어 있다. 여기서 길을 건너서 옆 거리로 거슬러올라가면 빵집이자 카페인 부셰, 그리고 식사와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 고스찌가 나온다. 모두 내가 좋아했던 곳들이다.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무척 그립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특히 좋아하는 장소들이 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도 그중 한 곳이다.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 마음의 위안을 얻는 곳. 정교 신자는 아니지만 사원에 들어가 이콘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리고 초를 켠다. 촉촉하고 검은 흙들로 뒤덮인 뜰과 묘지를 산책하고 햇살을 쬐고 꽃과 식물들을 바라보고 종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지하의 작은 카페로 내려가 막 구워낸 따뜻한 사과빵과 버섯빵을 먹고 티백으로 우린 차를 마신다. 이따금 운이 좋을 때면 수도원의 허브차와 치즈를 사기도 한다.
사진은 2013년 9월.
코로나와 전쟁 때문에 이 사랑하는 도시에 가지 못한 지 몇년이 지났다. 마음을 담아 떠올려본다.
레트니 사드(여름 정원)는 페테르부르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다. 녹음이 울창하고 연못에는 백조와 오리, 갈매기가 노닌다. 대리석 조각상들이 즐비하고 한가운데에는 유명한 러시아 우화 작가 크르일로프의 커다란 동상이 있다. 무더운 여름에도 이곳에 들어서면 선선하기 그지없다. 분수와 아폴로를 보면서 크르일로프 동상 근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사진은 2018년 9월에 찍은 것.
레트니 사드에는 옛날에 쥬인이랑 처음 갔었다. 이후에도 자주 갔지만 그래도 항상 이곳 사진들을 보면 쥬인 생각이 제일 먼저 난다.
이것이 크르일로프 동상.
오른편이 내가 좋아하는 아폴로. 이 공원에서 가장 인기 많은 조각상이다. 료샤는 내가 저 아폴로를 좋아하는 걸 보고 민망하다면서 '하긴 넌 타이츠 입은 발레 무용수를 좋아하니까. 어휴 민망해' 라고 디스하곤 했다. 야,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라고 하려다 또 생각해보면 비슷한가 싶어서 '그런가보다' 라고 인정해버렸다.
이 날은 빛이 좋아서 연못이 새파랗게 나왔다. 갈매기, 청둥오리들이 많이 찾는다. 백조도 한 쌍 있다. 사진엔 안 나왔지만 참새랑 비둘기, 까마귀도 많다.
2018년 페테르부르크. 네프스키 대로를 중심으로 주변의 모이카 운하와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따라 걷고 이따금 그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쉬었다. 순서대로 모이카 운하의 끄라스느이 모스트(붉은 교각) 근처의 카페, 그리고 그리보예도프의 카잔 성당 맞은편의 카페 부셰,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네프스키 거리 풍경. 사진은 아이폰6s.
첫번째 사진은 잘 보면 카페 창 너머로 끄라스느이 모스트의 붉은 난간이 보인다. 그래서 붉은 교각이다.
햇살이 환하고 밝은 여름날 바실리예프스키 섬과 네바 강변을 따라 산책하는 기분은 너무나도 좋다. 이것은 도심의 그리보예도프 운하나 판탄카를 따라 산책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인데, 바실리 섬 자체에 배어 있는 특유의 뭔가가 있다. 이 섬에는 한편 끝에는 바닷가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과 네바 강변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바글바글한 주택가가 모여 있는 동네들. 나는 맨처음 러시아에 갔을 때 이 섬 바닷가에 있는 기숙사에 살았었다.
사진은 2019년 여름. 아마 7월이었을 것이다. 볼쇼이 대로에서 가까운 동네에서부터 국립대학이 있는 강변까지 쭉 걸어가며 찍은 사진들. 아이폰 xs. 빛이 무척 예뻤다. 마음에 평화와 위안을 주는 사진들. 저때의 따뜻하고 조금은 뜨겁기까지 했던 쨍한 햇살이 아직도 생각난다.
2014년 3월의 페테르부르크 사진들인데 화질이나 색감 등 뭔가 평소 이 도시 사진들과 다른 느낌이 드는 이유는 이때 새로 산 카메라를 시험하면서 이것저것 잘못 만지작거렸기 때문이다. 당시 필름카메라 느낌이 난다는 조그만 후지 카메라를 사서 들고 갔는데 여기에는 첨 보는 모드들이 있었다(요즘 폰의 앱에 많은 무슨무슨 필터 모드들인듯) 그래서 암것도 모르고 눌러보다가 어떤 것은 미니어처 모드 어떤 것은 비네팅 모드 등으로 찍혔다. 그래서 그런 스위치를 건드려서 찍은 사진들은 다들 우중충하고 어둡게 나왔는데 그 결과에 깜짝 놀란 나머지 이 카메라를 잘 쓰지 않고 손에 익은 니콘 DSLR을 다시 쓰게 되었음. (이 후지카메라는 그냥 똑딱이 디카였음)
근데 엄청 오랜만에 다시 들춰보니 뭔가 폰카 느낌이 나서 그런지 또 색다른 기분의 사진들이라 주루룩 올려본다. 겨울운하, 에르미타주, 그리보예도프 운하, 근처 거리, 호텔 방까지 이것저것. 그런데 이미 10년 전 ㅠㅠ
아직도 저 기념품 가게가 남아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던 가게였는데 저기서 브로치를 샀던 것 같지만 긴가민가하다. 근처에 기념품 가게가 여럿 있어서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면 그런 곳 어딘가에서는 목각 천사를 샀고 어디에서는 브로치, 어디에서는 마트료슈카를 사곤 했다. 사진은 2015년 7월.
네바 강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이 사진을 찍었던 날은 매우 추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하늘이 파랬고 차가운 햇살이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렸다. 사진첩 넘기다가 이 사진 색채가 마음에 들어서 올려본다. 아주 고요한 풍경이다.
네바 강변으로 나가기 전에 이렇게 해군성을 따라서 걸었다. 이 공원은 오랜 옛날 러시아에 처음으로 갔을 때 주말을 맞아 제일 처음으로 '시내 구경' 나왔을 때 왔던 곳이다. 지리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이삭 성당 간다고 꾸역꾸역 버스 타고 나왔었다. (이삭 성당은 바로 맞은편에 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에르미타주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리를 하나 건너가야 나온다. 네바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은 바실리섬의 스뜨렐까 부근. 건너편은 에르미타주. 그러고보니 이 사진이 벌써 10년 전이네. 저 여인처럼 밝은 오후에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쉬고 싶다.
2017년 10월. 리체이느이 대로 풍경 두 장. 사진은 아이폰 6S. 이 거리는 보통 뽀드삐스니예 이즈다니야 서점에 갈 때 걷곤 했다. 사진은 이미 근 6~7년 전 모습이라 지금은 저 가게나 호텔, 바 등이 그대로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막상 여기 사진엔 안 나왔지만 이즈다니야 서점에 다시 가고 싶다.
페테르부르크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 겸 카페 고스찌. 내가 무척 좋아했던 곳이다. 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꼭 들렀다. 아직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음식도, 디저트도, 차도 모두 맛있는 곳이었다. 여기 메인 셰프가 세르비아 사람이었다. 그래서 세르비아 사과랑 과일을 디저트에 쓴다고 친절했던 남자 점원이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나는 세르비아에 대해 '음식이 맛있을 것 같다'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ㅎㅎ)
페테르부르크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것은 2019년 11월이었다. 그해 연말에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2020년 새해를 맞았다. 그 이후 코로나와 전쟁으로 러시아에는 가지 못하게 되었다. 여행이 재개된 후 빌니우스와 프라하, 바르샤바에 다녀왔다. 아마도 나는 계속해서 어디든 저 동네와 가깝거나 저곳을 연상시키는 동네에 가고 싶은 것 같다. 가능하다면 5월에 베오그라드에 다녀오려는 중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는 너무나도 다시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저 운하와 강을 따라 걷고 싶다.
사진은 2019년 7월. 여름, 백야 시즌의 판탄카. 이때는 성수기라 아스토리야나 에브로파는 너무 비싸서 판탄카 쪽에 있는 로시 호텔에 묵었다. 바가노바 학교와 면해 있는 호텔이었다. 그래서 이때는 저녁마다 판탄카를 따라 산책할 수 있었다. 에브로파에 묵을 때는 그리보예도프 운하, 아스토리야일 때는 모이카를 따라 산책하게 된다. 판탄카는 그리보예도프나 모이카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리고 아주 길게 이어진다. 나의 70년대 레닌그라드 이야기들에서 이 판탄카는 알리사와 트로이의 운하였다. 그리고 90년대 이야기로 접어들면 미샤가 이 판탄카 운하 어딘가에, 트로이츠키 사원이 잘 보이는 쪽에 있는 집에 살고 있다.
사진을 찍었던 건 아마 밤이었던 것 같다. 늦은 밤은 아니고 아마 9시 무렵 쯤 됐을 것 같다. 역광이라 컴컴하게 나왔지만 실제로는 이것보다 밝았다.
2018년에는 9월에 페테르부르크에 갔다. 그 당시는 적어도 매년 한번 이상은 갔었다. 코로나와 전쟁 이후 못 가게 되어 항상 마음 속에 크고 깊은 그리움이 있다.
이때의 휴가 후반부에는 이곳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숙소인 아스토리야에 묵었다. 폰으로 찍었던 사진첩에서 당시 아스토리야의 방과 카페, 외관 등 사진 몇 장들을 꺼내본다. 이때는 dslr도 가지고다니며 쏠쏠하게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이건 전부 아이폰6s로 찍은 사진들.
저 빨간 차양이 항상 그립다. 친구들을 만나는 장소로도 항상 '아스토리야 빨간 차양 아래에서 만나' 하곤 했는데. 못 가게 된 최근 몇년 사이에 외벽 색깔을 이것보다 더 짙은 색으로 전면 바꾸었는데 내 기억과는 달라졌을테니 좀 아쉽긴 하지만 새로 칠한 색이 원래 옛날 색깔이었다고들 한다.
로비 라운지 카페 로툰다. 여기는 차도 디저트도 햇살 들어오는 창가도 모든 것이 좋아서 이 동네치고는 좀 비싸지만 그래도 자주 드나들곤 했다. 그래서 이 호텔에 묵으면 더욱 좋다.
이건 방에서.
로비에는 이렇게 기념품 샵이 있음.
방. 이때 업그레이드를 해줘서 방이 좋았다 :)
저녁 늦게 내려와 김릿을 마시면 더욱 좋다. 여기 김릿이 맛있다. 메인을 보드카와 진 중 무엇으로 할지도 물어보는데 당연히 진을 고른다. 언젠가부터 메뉴판에서는 사라졌지만 요청하면 만들어준다.
메도빅도 맛있다 :) 그리고 이곳의 시그니처인 저 조그만 플로랑틴 쿠키도 맛있다. 디저트를 시키지 않아도 차를 주문하면 항상 저것을 내준다. 나는 이곳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로모노소프 샵에서 저 찻잔과 종지, 큰 접시를 사서 모았다.
이따금 마린스키 등 저녁공연에 다녀오면 이렇게 저녁 청소와 침구 정리를 해두고는 귀여운 알룐카 미니 초콜릿을 올려둔다. 알룐카는 시리즈별로 맛에 편차가 심한데 이 조그만 것은 킷캣이랑 맛이 비슷하다. 이게 제일 맛있다!
로비의 기념품 샵에서 향초와 안대를 샀다. 그런데... 저 안대는 너무 이쁜데 밴드가 심히 짱짱해서 도저히 불편해서 써먹을 수가 없다 ㅠㅠ 나는 잠잘 때 안대를 착용하므로 아주 실용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써보니 머리가 터질 듯 조인다!!! 아무래도 러시아인들의 엄청 조그만 두상에 맞게 만들었나보다. 우리 나라에선 어린이들이나 맞을 사이즈! 안대 자체는 코 중간까지 내려와서 넉넉한데 밴드가 너무 짱짱하다. 밴드를 늘려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잡아당기고 기다란데 뒤집어씌워놔도 안 늘어난다. 흑흑, 근데 러시아에도 머리 큰 사람들도 많은데 엉엉... 그 사람들은 어떻게 쓰라는 말인가. 팔등신에 얼굴 주먹만한 러시아 미녀들만 착용하는 안대인가보다 + 우리 슈클랴로프님같은 꽃돌이 무용수 ㅜㅜ
그래서 이 예쁜 안대는 옷장 서랍에 고이 모셔놓았고 저 빨간 안대 케이스는 지금 서재 방의 이콘과 천사들의 공간인 우골에 펼쳐서 깔아두었음... 향초는 아까워서 못 쓰고 이것도 어딘가 모셔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저런 향초도 유통기한이 있지 않으려나, 지금 써도 되나 잘 모르겠음. 벌써 5년도 넘었네 흑흑...
며칠 전에 이어, 역시 같은 시기인 2013년 9월 페테르부르크 사진 몇 장. 그리보예도프 운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그리고 당시 머물렀던 숙소인 그랜드 호텔 유럽의 방과 카페. 9월은 이 동네를 산책하기 좋은 시기이다. 그런데 자칫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끔찍한 10월이 온다. 해도 안 나고 계속 비가 주룩주룩 오고, 난방 시작 직전이라 춥고 음산해서. 사진을 찍었던 시기인 9월 초중순까지는 딱 좋은데.
이 사진은 그리보예도프 운하변. 건너편에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의 2013/14 시즌 발레와 오페라 광고가 붙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레프 박스트의 Supper 사본이 액자로 붙어 있고 그 옆에는 대중가수 콘서트 광고들이 나란히.
여기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들어가는 길.
수도원과 아름다운 정원.
수도원 경내 묘지.
그랜드 호텔 유럽(에브로파)의 침실. 여기는 다 좋은데 도저히, 정말 도저히 저 꽃무늬 커튼만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후 나는 이곳보다는 좀더 모던한 아스토리야에 더 자주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호텔이 확실히! 고풍스럽고 우아한 면에서는 한 수 위이긴 하다.
에브로파의 2층 카페 메조닌. 좋아하던 곳이다. 그런데 코로나 시즌에 이 카페를 리모델링해서 색채도 연녹색 계열로 모두 바뀌었다. 바뀐 모습도 사진으로 보면 예뻐보였다. 다시 가보고 싶은데...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