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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게냐의 풀코보 공항 왕복 여정과 네프스키, 그와 미샤, 지나에 대한 글을 쓰면서 동시에 구상했던 단편이 있었는데 지금 그것을 쓰고 있다. 전자의 이야기보다 이틀 전에 일어나는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쌍둥이'라고 불렀는데 구상을 하는 과정에서 '쌍둥이를 차라리 먼저 쓸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어쨌든 전자를 마친 후에는 한동안 이 쌍둥이와 또다른 구상 노트가 떠오른 글 두개를 놓고 고민하고, '그래도 쌍둥이를 써야지'로 귀결된 후에도 시점을 놓고 좀 고민하느라 계속 늦어져서 글을 시작한 것은 작년 12월 마지막날 밤이었다. 그러고는 1월에 연초라 너무 바빠서 결국 아직도 초반부에 머물러 있다. 아직 제목도 못 정했다. 

 

 

 

배경은 1997년 11월의 페테르부르크. 처음 글이 시작되는 곳은 페테르부르크 바실리예프스키 섬의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이다(전에 일상 메모에서 노어 발음과 표기법 사이의 괴리에 대해 투덜거렸던 바로 그곳이다)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게냐이고 이야기는 이 사람이 옛 여자친구인 리다를 만나러 프리발티스카야 호텔에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발췌한 부분은 게냐가 다른 호텔들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다.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 현재의 공식 호텔 이름은 벨몽드 그랜드 호텔 유럽, 그리고 로코 포르테 아스토리야 호텔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종종 언급했고 내가 종종 묵기도 했던 곳인데 나는 보통은 유럽 호텔, 아스토리야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에브로파라고 표기하고 있다. 에브로파는 '유럽'의 러시아어 표기이고 실제 발음은 에브로빠/이브로빠.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이 에피소드의 배경인 1990년대 후반에 게냐는 미샤의 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춤추고 있고 그와 동거하고 있다. 그는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에 대해, 그보다는 실은 미샤에 대해, 그리고 예전 애인인 리다에 대해 얘기한다. 현 남친, 그리고 전 여친에 대해서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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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는 밝고 우아하고 동시에 돈 냄새가 넘쳐나서 어딘가 조금 천박하게 느껴진다. 미샤가 업무 미팅이나 인터뷰 장소를 다른 곳으로 잡으면 더 좋았겠지만 두 곳 모두 네프스키 한가운데와 이삭 광장 맞은편이라는 위치상의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잘 모르고 또 이해하고 싶지 않은 어떤 비즈니스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라면 갈런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설명해줄 준비가 되어 있을 테지만 나는 물론 그 자본주의 장광설에 자진해서 코를 처박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느 날 딱 한 번, 미샤에게 미팅 약속이 아닐 때는 굳이 여기에서 차를 마시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뿐이었다. 에브로파와 아스토리야는 이름값만큼 차 한 잔 값도 비쌌고 그렇다고 그만큼 맛이 훌륭한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미샤는 자기 정도 되는 사람이면 매일같이 최고급 호텔에서 차를 마시는 법이라고 당연한 답을 하는 대신 눈을 둥그렇게 떴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그러고 보니 그렇네, 집 앞 카페가 더 나은 것 같아, 몇 배는 싸고. 바깥으로 운하도 보이고. 그냥 습관이 돼서 그런가 봐. 옛날부터 자주 왔거든. 지나도 그렇고. 전엔 여기가 그렇게 비싸지 않았어. 국립대 다니는 애들도 자주 왔고’ 라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그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시간과 인식의 거리를 깨닫고 내심 놀라곤 한다. 그건 공식적인 일의 영역과는 다른 층위의 거리이다. 스튜디오와 극장에서 그는 명확하게 리더이며 윗사람이다. 동시에 그런 위계와는 아무 상관 없이, 나와 같은 무용수다. 미샤가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언제나 무용수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도 미샤는 딱히 어른처럼 구는 적이 없어서 내게는 그가 소위 옛날 사람이란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이따금 이런 말을 들을 때에야 비로소 ‘아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뭐 단어만 놓고 치자면 리다도 ‘국립대 다니는 애들’에 속했다. 그저 시대가 다를 뿐이다. 리다는 일부러 에브로파에 가서 편지를 부쳤다. 순전히 그곳의 호사스러운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같은 학부의 부잣집 여자애들에게 꿀리지 않으려고. 에브로파에서는 외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맨을 대상으로 달러를 갈취하기 위해 요금이 몇 배로 비싼 특송 우편센터를 차려놓고 있었는데 길만 건너면 우체국이 있었고 리다에겐 딱히 편지를 보낼만한 외국의 친척이나 지인이 없었으므로 이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너 도쿄에 다녀온 적 있잖아. 그쪽 아는 사람 주소라도 줘’ 라고 했고 결국 나는 도쿄문예회관과 발레 마스터클래스에서 딱 한 번 만났던 그쪽 안무가에게 새해 인사 엽서를 써야 했다. 

 

 

 

 

 

 

 

 

 

 

 

 

 

 

중반부에 언급되는 갈런드는 미샤의 발레단에서 홍보와 해외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미국인. '국립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 (미샤의 레닌그라드 시절엔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이었고 소련 붕괴 후 다시 옛날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이다) 네바 강변에 있는 대학이고 나도 예전에 여기서 잠시 수업을 받았다. 페테르부르크에선 그냥 '우니베르시쩻' (Университет, 영어로는 유니버시티)으로 부르고 정류장 이름도 우니베르시쩻, 학교가 있는 강변도 우니베르시쩻 강변이다. 예전에 썼던 트로이의 레닌그라드 이야기에서 트로이와 알리사도 이 학교를 나왔다. (푸틴도 이 학교 법대 출신...)

 

 

 

사진은 2013년에 갔을 때 찍었던 에브로파, 즉 그랜드 호텔 유럽의 라운지 카페 메조닌. 여기는 작년에 완전히 리모델링을 하고 가구와 인테리어도 싹 바꿔서 이 모습은 이제 없다. sns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 바뀐 모습도 우아하고 아름답지만 어쩐지 내 기억 속 메조닌이 사라진 것 같아 좀 아쉽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90년대 후반의 이 호텔 카페는 이 모습과는 또 달랐을 것이다(당시엔 돈이 없어 카페까진 못 들어가봤음. 소설 속의 리다처럼 나도 호텔 안의 우편센터를 몇번 이용했는데, 리다처럼 허세부리는 건 아니었고 여기선 속달로 한국에 편지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긴 했지만, 그 센터를 이용할 때면 뭔가 특별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마찬가지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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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