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카페 에벨의 제일 안쪽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다. 창가 테이블은 아니다. 대신 테이블의 높이나 의자는 타이핑하기에 훨씬 편하다.
몇년 전에도 이 자리에 자주 앉곤 했다. 그때 나는 이 카페에서 3분 거리에 있는 바로 옆골목인 릴리오바의 어느 아파트에 두달 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노트북을 들고 에벨에 드나들었고 차를 마시며 글을 쓰곤 했다. 당시 나는 여기 앉아서 약 200페이지 가량의 경장편 중 1부와 2부를 썼다. 수용소와 보안위원회 요양소에서 미샤가 겪는 이야기에 대한 소설이었다. 이따금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시집을 들고 와 읽기도 했다.
지금은 노트북 대신 아이패드와 태블릿용 키보드를 치고 있고, 소설 대신 블로그의 오늘 메모를 적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도 평온하고 또 친밀하다.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에벨은 글을 쓰기 좋은 곳이다. 수많은 카페들을 다녀보았지만 이곳만큼 글을 쓰기 좋았던 카페는 없었다. 이곳의 어떤 공기가 나와 공명한다. 붉은색과 검은색, 아주 조금만 쓴 터키 블루 색깔 때문인지도 모른다. 단 하나 뿐인 창가 테이블의 특별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카페 에벨에 돌아와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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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 이번이 몇번째인지 기억이 안나서 순서대로 헤아려본다. 처음엔 2006년 11월말에 왔었다. 모든 것이 생소했다.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처음 나와본 외국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곳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와서 열흘 동안 혼자 머물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에벨이 있는지도 몰랐다. 내게 프라하의 첫 인상은 차가운 도시였다. 겨울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여행과 출장의 경험치가 쌓이기 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2010년 11월, 출장 때문에 3일 정도 머물렀다. 이때는 주로 일을 하러 다녀서 별다른 추억이 없다. 가기 싫은 출장이었다. 당시 수술을 받은지 한두달 밖에 안 된 상태였고 출장 목적이나 내용도 그다지 영양가 있는 게 아니었다(터키 앙카라에 갔다가 프라하와 카를로비 바리에 가는 일정이었는데 하여튼 출장이라 힘들었다)
12년 여름에 쥬인과 함께 휴가를 왔었다. 그때가 젤 재밌었던 것 같다. 둘이 엄청 쏘다니고 즐거웠다.돌이켜보니 그게 쥬인과 갔던 마지막 여행이었다. 이듬해 봄에 쥬인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13년 2월에 다시 와서 릴리오바 골목에 숙소를 잡고 두어달 동안 머물렀다. 그때 나는 휴직 중이었다. 몸과 마음이 아팠다. 글을 다시 쓰고 있었다. 카페 에벨은 이때 알게 되었고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들렀다.
그리고 16년 가을. 그때도 무척 힘들었다. 사실, 13년 당시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빛으로 가득한 프라하가 위안이 되어 주었다.
작년, 17년 봄. 날씨가 무척 좋았다. 중간에 드레스덴에 가서 영원한 휴가님을 만나 즐거웠다.
지금, 18년 12월. 그러면 몇번째인가, 7번째네. 정말로 뻬쩨르 다음으로 많이 왔다. 몇몇 골목들은 구석구석 알고 있다.
물리적인 숫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숫자를 헤아려본 것은 이번에 말라 스트라나부터 시작해 도시 몇몇 장소를 돌아다니고 예전에 좋아했던 음식들을 맛보면서 느꼈던 감각 때문이었다. 익숙함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나이를 먹고 기쁨의 감각이 퇴색했기 때문인지, 다시 걷고 느끼는 프라하는 전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답지 않았다. 골목도, 음식도, 좋아했던 카페들도. 아마도 겨울에 말라 스트라나에 묵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제 첫 숙소에서 가방을 꾸리면서, 오늘 말라 스트라나와 캄파를 걸어다니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프라하는 이제 한동안 안 와도 될 것 같아’
그 느낌은 오늘 오후에 숙소를 옮겨온 후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불빛들, 첨탑의 휘황한 풍경에 매료되었을 때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새로 옮겨온 숙소는 에벨과 같은 건물에 있는데 작은 레지던스 아파트 호텔이다. 첫 숙소에 비하면 궁전 같긴 한데 내 방이 1인용 스튜디오라 그런지 1층에 있고 리셉션에 면하고 있어서 어딘지 좀 무방비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짐을 풀다가 너무 피곤해져서 ‘에벨은 그냥 내일 갈까, 바로 옆인데 뭐’ 하고 푸념하다 그래도 편한 짚업과 진으로 갈아입고(바로 옆이니까 두꺼운 옷 안 입어도 됨!) 카페에 왔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맴돌고 있던 무감각과 씁쓸함과 퇴색된 듯한 느낌을 잊는다. 카페 에벨은 익숙하고 또 친밀한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익숙함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일종의 집과 같은 느낌이다.
에벨 역시 빛으로 가득한 아침이나 낮이 더 좋다. 하지만 어두컴컴해진 저녁에 안쪽 테이블에 앉아 타이핑을 하다 보니, 역시 겨울 무렵 머물렀던 그 몇년 전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곳은 나의 공간이라는 작은 충만감에 잠기게 된다.
아마도 바로 이곳 때문에, 그리고 이 감각 때문에 나는 다시, 또 다시 프라하에 돌아오곤 하는 것 같다. 뻬쩨르를 프라하보다 더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긴 하지만 그곳에는 이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게 유일무이한 곳이다, 카페 에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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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나가기 직전에 찍은 것. 첨엔 꽉 차 있었으나 저녁늦은 시간이 되자 어느새 텅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