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바야데르 (2014.4.2, 미하일로프스키 극장)
(사진은 미하일로프스키 극장 벽에 붙은 라 바야데르 공연 광고. 매진 띠가 붙어 있다)
니키야 : 폴리나 세미오노바
솔로르 :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감자티 : 빅토리야 쿠체포바
브라만 : 마라트 쉐미우노프
황금 신상 : 데니스 톨마쵸프
지휘자 : 파벨 부벨니코프
1. 라 바야데르를 처음 봤을 때
사람의 취향이란 변하는 것이어서 옛날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발레인데 요즘은 라 바야데르도 잘 추는 버전으로 보면 또 나름 괜찮게 본다.
맨 처음 라 바야데르를 본 건 오랜 옛날 마린스키 극장에서였다. 그땐 막 발레를 보기 시작해서 열광하던 초짜 시절이었다. 그 당시야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것도 아니고 필름을 구해 볼 루트가 다양했던 것도 아니니 이 발레에 대한 사전 정보란 "1. 오리엔탈리즘이 가미된 웅장한 작품. 2. 아랍 의상 입은 멋있는 주인공들이 나옴. 3. 백조의 호수나 지젤처럼 하얀 옷 입은 여자들의 군무가 있음..." 이었다. (웃지 마세요 ㅠㅠ 그땐 지금처럼 정보 찾기 편한 시절이 아니었다고요!)
마침 신년이 되었고 1~2월 공연 일정표가 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끊어보려고 마린스키 극장 내의 매표소까지 갔다. 그때 친구를 열심히 꼬셨다. 당시 나는 포킨 발레에 빠져 있었고 라 바야데르도 세헤라자데 스타일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진짜 볼만할 거라고 막 꼬셨다. '이거 엄청 화려하고 멋있을 거야~ 남자들도 타이츠 아니고 아랍 팬츠 입고 나와 >.< 유명한 애들도 나와~' 등등... 게다가 이건 가격도 포킨이나 발란신보다 훨씬 비쌌다. (원래 백조 등 유명 고전 레퍼토리는 표값이 더 비쌈) 어쨌든 학생 할인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주머니 사정으로는 좀 비싸고 좋은 자리를 끊어서 갔다.
그런데...
1막, 2막까지는 그런대로 재밌게 봤지만 문제의 망령의 왕국이 나온 순간 나는 유체이탈. 그리고 그 앞의 막들도 딱히 맘에 안 들었다.
그 이유는..
1. 남자 주인공 솔로르가 너무 찌질하다.(지젤의 알브레히트에게 느꼈던 것과 유사한 분노. 저 나쁜눔!! 출세를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다니!! 아무리 외모가 잘나고 호랑이를 잡아오면 뭘하니! 좋아하는 여자 하나 못 지키고 공주랑 결혼시켜준다니 휙 넘어가고!! 여자 죽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면 뭘해. 아편이나 피우고, 이 허접한 놈아! .. 하지만 잘생긴 솔로르라면 또 관대해질지도 ㅠㅠ)
2. 리브레토만 봐서는 무지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데 막상 발레는 정신없이 후다닥 지나가고 그냥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과시만 해대는 것 같다.
3. 망령의 왕국! 으악, 저 망령은 대체 언제 다 내려오는 거냐... 으악, 저 망령들에 비하면 지젤의 윌리들은 돈키호테 스페인춤 수준으로 재밌구나!
..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기지만 저 때는 발레 본지 1년도 안 된 시절이었고 무조건 화려한 테크닉과 도약, 주테, 피루엣, 남자 무용수들의 역동적 춤, 32회 푸에떼 등이 좋았던 때였다. 심지어 저땐 지젤 2막의 윌리 군무 때도 괴로워했다! 백조 군무도 별로 안 좋아했다!
같이 갔던 친구도 대왕실망... 같이 돈키호테 보고 열광하던 친구였음 ㅠ.ㅠ 이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 친구(전 룸메이트)는 지금도 라 바야데르는 별로 안 좋아해서 이 공연 같이 보러 가자고 하면 '난 바야데르까는 좀...'하고 거절 ㅠㅠ (바야데르까는 러시아어 제목임. 사실 나도 이 제목이 더 입에 붙는다)
그런데 저 첫 공연 때 캐스트가 엄청나게 화려했다. 아실무라토바가 니키야, 파루흐 루지마토프가 솔로르, 이르마 니오라제가 감자티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대단한 캐스트로 라 바야데르를 마린스키에서 봐놓고도 나는 저렇게 투덜대고 있었던 것이다 ㅋㅋ 미안해요 루지마토프님... 그래도 당신 춤은 멋있었어요...
2. 솔로르, 니키야, 망령들, 그리고 이 발레에 대한 평소 느낌
이후 라 바야데르를 여러 번 봤다. 그래도 첫 인상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둘 다 고티에가 리브레토를 써서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내게 라 바야데르는 항상 지젤의 럭셔리 오리엔탈리즘 변용판으로 느껴졌다. 내용도 유사하고 여자를 버린 남자 주인공이 환상의 망령들 사이에서 죽은 여자의 영혼을 만나 참회하는 형식도 비슷했다. 그러나 내게 라 바야데르는 지젤과는 달리 굉장한 허세로 가득찬 작품이란 인상이 강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느낌이 좀 남아 있다. 원래 포즈와 허세가 고전 발레의 주요 요소 중 하나라고 냉소적으로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솔로르에 대한 인상은 알브레히트와 비슷하긴 하지만 그래도 남자 무용수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기는 한다. 오히려 춤 자체는 솔로르가 알브레히트보다 더 볼만하다. 테크닉도 그렇고. 하지만 바로 그때문인지 솔로르에게는 알브레히트가 보여주는 드라마, 즉 회한과 참회, 고통과 처벌을 통한 갱생 등의 드라마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니키야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번 국립발레단 공연과 이번 미하일로프스키 발레단 공연을 보면서 내가 왜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깨달았다. 사실 라 바야데르는 리브레토만 보면 진짜 드라마틱하고 통속적이다. 그래서 니키야가 뱀에 물려 죽고 망령들과 나타나 춤추면 지젤을 볼 때처럼 감동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내가 발레의 형식과 조형적 아름다움보다는 드라마를 중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 그래서 발란신 발레들도 안 좋아하나보다) 니키야는 분명 드라마틱한 조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여주인공이지만 망령의 왕국에 등장하는 그녀는 어떤 감정이라기보다는(그러니까 사랑, 원망, 심지어 증오나 복수심이라도 좋으니..) 멋진 테크닉을 잇따라 보여주는 댄스 머신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것도 무용수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어쨌든 이 느낌은 아직도 좀 남아 있다. 특히 파이널에서 초스피드로 연속 푸에테/피루엣 등 테크닉을 과시하는 장면에서는 좀처럼 이입이 안된다. 저 여자는 억울하게 죽었고 솔로르를 그렇게도 사랑했는데 어째서 그런 감정 같은 것보다는 저런 테크닉 과시에 집중할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아니면 이건 솔로르가 아편에 취해 보는 환각이라 그런 건가 싶기도 하지만.
물론 마린스키 버전 말고 다른 버전에서는 고티에의 원작을 따르기도 한다. 망령은 중간에 나오고 결혼식이 파이널이 되어 거기서 사원이 우르르 무너지고 솔로르가 니키야의 영혼을 따라가는데 차라리 개연성은 그쪽이 나은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 레퍼토리의 2인무를 갈라로 추면 그건 또 엄청 근사하다는 거다. 그러니까 전체 공연의 맥락보다도 춤 자체를 즐기는 건 또 좋았다. 민쿠스의 음악 자체도 좋고 특히 솔로르. 의상도, 춤도, 포즈도 모두 근사해서 멋진 무용수가 추면 정말 눈호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망령의 왕국은 내 취향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혹자는 망령의 왕국이야말로 수많은 군무 중 백미라고 칭하고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내 지인은 오로지 망령의 왕국 보러 라 바야데르 공연에 간다는데 나로서는 지젤이나 백조가 더 좋다. 망령들의 조형적 아름다움이야 인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망령이 하나 하나 내려오기 시작할때는 '언제 다 내려오니 ㅠㅠ' 하는 마음이 든다.
아마도 라 바야데르의 망령들은 지나치게 차갑고 객관적이고 인간사에 관심없는, 좀 사물처럼 보이는 유령으로 느껴져서 그런가보다. 이입이 좀처럼 안된다. 다행히 이 유령들 내려올 때 민쿠스의 음악은 아주 좋기 때문에 그걸로 버틴다 ㅠ.ㅠ 역시 난 진짜 고전 발레를 즐길 줄 모르나보다!!
그리고 마린스키 망령들은 참 천천히 내려온다... 여기 버전을 따르는 유니버설도 그렇다. 그런데 전에 본 국립발레단 버전은 망령들이 좀 빨리 내려와서 살 것 같았다(약간 우습기도 했지만 ㅠㅠ) 원래는 천천히 하나 하나 내려와야 정석이겠지만 그래도 우르르 빨리 내려오면 인내심에 대한 도전은 좀 줄어든다. 망령들 다 내려오고 나면 큰 산을 하나 넘었다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쉰다.. (너무 비웃지 마세요 ㅠㅠ)
3. 본론.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의 라 바야데르. 사라파노프와 세미오노바
하여튼... 이 레퍼토리에 대한 나의 복잡한 감상은 이 정도로 미루고. 4월 2일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서 본 라 바야데르에 대한 간략한 메모.
마린스키에서 보고 싶긴 했지만 내가 갔을 때는 일정이 맞지 않았다. 코르순체프나 슈클랴로프의 솔로르가 무척 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코르순체프의 (너무 당당하고 남성적인 ㅠㅠ) 황금 노예, 그리고 춤도 별로 없고 1막 내내 화살 맞고 쓰러져 무대에 잠자는 공주처럼 누워 있는(그래서 예쁘기만 한 ㅠㅠ) 슈클랴로프의 목동 아민타...
대신 레오니드 사라파노프가 있다 :)
난 이 극장이 무소르그스키란 이름을 달고 있을 때 처음 다녔는데 그때도 마린스키 표 못 구할 때 가거나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아서(네프스키 대로 중심가에 있음) 추운 겨울에 가기 편한 극장 느낌이 좀 있었다. 지금은 빵빵한 후원 기업들 덕에 수퍼스타들을 열심히 끌어모으고 나초 두아토를 예술감독으로 앉히고 각종 행사들을 진행하는 등 굉장히 노력하고 있다.
이 날 공연은 7시였다. 마린스키 갈때는 22번이나 3번, 27번 등 버스를 타고 가야 했지만 이 극장은 묵고 있던 호텔 바로 근처에 있어서 6시 30분 정도에 나갔다. 가까워서 참 좋았다. 극장 근처에 살고 싶다... 예술의 전당도 한번 가려면 정말 너무 힘들다. 거긴 교통편도 안 좋고...
사실 이 공연 예매하느라 엄청 고생했다. 페테르부르크 가기 전부터, 그러니까 마린스키 공연들 예매할 때부터 이것도 예매하려고 했는데 온라인 예매에 문제가 생겨서 아무리 시도를 해도 결제가 되지 않았다. 톱스타인 사라파노프와 세미오노바 캐스팅이라 현지에 가서 끊으면 이미 표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놈의 러시아'를 외치며 우울해하다가 '에잇, 안되면 말지! 어차피 내가 사라파노프 광팬도 아니고.. 어차피 밤톨처럼 얄밉게 생긴 사라파노프(ㅠ.ㅠ 사라파노프 팬분들 미안해요..) 못봐도 미모의 슈클랴로프면 족해! 에잇, 내가 언제부터 라 바야데르 그렇게 좋아했다고! 잘됐다 돈 굳었네. 안그래도 마린스키 때문에 파산인데' 하며 신포도 모드에 들어갔다.
그래도 페테르부르크 도착하고 바로 다음날, 제일 처음 간 곳이 바로 이 극장 매표소였다(ㅜ.ㅜ) 호텔 바로 옆이라 산책하러 가면서 들렀던 거다. 참 세상 좋아졌다. 옛날엔 매표소에 가면 파르테르, 베누아르, 벨에타쥐 등 좌석 구분만 말하고 대충 주는 대로 받아야 했는데 이제는 매표소 아줌마가 모니터를 띄워놓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이게 당연한 것 같지만 옛날 러시아에서 표 끊느라 고생했던 사람에겐 좀 감동이다 ㅋㅋ
아줌마가 이 자리 저 자리 추천해주길래 나는 '파르테르 끝열이 좋아요'라고 했다. 이 극장도 옛날 극장이라 앞사람 머리에 엄청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줌마가 '오 그럼 이 자리가 진짜 괜찮아. 앞사람 머리 안 가려' 하고 추천해줘서 그걸 끊었다. 극장에 들어가보니 이 맨 뒷열은 반원형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왼편 귀퉁이에서 3번째라 무대를 대각선으로 봐야 해서 투덜댔지만 역시 경험많은 아줌마 말대로 앞사람 머리에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1층 파르테르 좌석 특성상 결국 무대 바닥은 잘 안 보였다. 책이라도 가져와 깔고 앉을 걸. (결국 다음날 마린스키 실비아 공연 땐 책 가져가서 깔고 앉아서 봤다 ㅠㅠ)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서 올리는 라 바야데르는 처음이었다. 옛날에도 여기선 이 공연 본 적이 없다. 이번에 본 버전도 두아토가 온 후 최근 다시 손본 거라고 한다. 음, 무대 미술과 의상 보니 확실히 이 극장에 돈이 도는구나 싶긴 했다. 무대 미술도 근사하고 코끼리도 그럴싸했다. 하긴 뱌체슬라프 오쿠네프가 디자인을 총괄했으니 당연히 근사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무대가 확실히 너무 작다. 라 바야데르는 상당히 큰 규모의 작품이다. 망령 군무도 그렇지만 1~2막의 궁전과 결혼식 장면도 그렇고 대규모 출연진이 등장한다. 그걸 제대로 소화하려면 역시 큰 무대가 필요하다. 미하일로프스키의 무대는 사실 그러기엔 너무 작다.
전체적으로 무용 자체는 그냥 그랬다. 미하일로프스키가 수퍼스타들을 끌어모으긴 했지만 군무나 일반 솔리스트 수준은 아직 마린스키에 딸리는 것 같다. (당연한 얘기긴 하지만) 심지어 전체적으로는 그 전 국립발레단 버전 볼 때 더 끌렸다. 작년에 갔을 때 여기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봤었는데 이 발레야 20세기 작품이고 나초 두아토가 여러 가지로 손을 댔기 때문에 크게 비교하기 어려웠지만 확실히 고전 발레가 올라오자 그런 부분들이 티가 났다.
그래도 레오니드 사라파노프가 있다!
사라파노프의 무대를 진짜 오랜만에 봤다. 나에게 레오니드 사라파노프는 언제나 '원더 키드'라는 인상이 강했다. 출중한 테크닉. 깨끗한 포즈. 그리고 통통 튀는 에너지. 볼 때마다 저 사람 참 잘 추네~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무용수. 그런데 '아 이 사람 너무 좋아!' 하는 느낌은 별로 안 드는 무용수였다. 아주 잘 추긴 하는데 마음을 확 끄는 뭔가가 없었다. (이 얘기를 하자 다음날 실비아 같이 보러 갔던 친구가 한방에 정리해줬다. 넌 일단 외모가 돼야 좋아하는 거야! 저 기생오라비 같은 슈클랴로프 좋아하는 걸 봐라!)
이 사람은 마린스키의 대표적 스타였지만 결국 발레단 감독 유리 파테예프와도 안 좋았고 이래저래 결국 미하일로프스키로 옮겼다. 참 아까운 일이다. 이번에 라 바야데르 무대 보면서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저 사람에겐 저 무대가 너무 좁아 ㅠ.ㅠ
오랜만에 무대를 봐서 그런지 이 사람 도약이 전처럼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깨달았다. 왜 이 사람이 그토록 테크니션으로 이름났었는지. 사라파노프의 동작은 하나하나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테크닉은 여전히 근사했다. 점프보다는 피루엣이 더 훌륭했다.
그리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사람은 알브레히트도 그렇고 솔로르도 그렇고 정감 간다기보다는 참 혼내주고 싶게 연기를 잘 한다. 그러니까, 좀 현실적인 '남자' 느낌이다. 맨 처음 니키야와 만나러 달려나왔을 때는 어떻게든 스킨십을 하고 사랑을 속삭이려고 안달을 부리고, 공주랑 약혼하고 나자 단숨에 니키야를 외면하고 공주 손에 키스한 후 돌아서서 좀 어쩔줄 몰라 하고(근데 이것도 내 눈엔 니키야한테 미안해서라기보단 자기 상황이 너무 복잡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니키야 죽고 나자 또 우왕좌왕하면서 미안해하고. 한마디로 좀 얄밉지만 현실적이다. 지젤 때도 좀 그랬다. 내가 니키야라면 용서 안해줄듯. 혹시 모르지, 춤을 너무 잘 추니 용서할지도... 난 좀더 몸과 마음을 던지며 드라마틱하게 울부짖는 알브레히트나 솔로르에게 더 끌리는 편이라서 그런가보다.
감자티와의 결혼식 2인무에서 보여준 솔로. 그리고 망령의 왕국에서 그 유명한 2인무의 사라파노프 솔로는 역시 아주 멋졌다. 관객들도 갈채와 브라보 연발. 전에 슈클랴로프가 이런 인터뷰를 했다. "사실 페테르부르크 관객들은 상당히 까다롭기 때문에 못하면 브라보 절대 안한다. 마음에 안들면 박수도 잘 안 친다. 그러나 한번 '우리 무용수'가 되면 정말 사랑해 준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관객들이다" 그 말이 맞다. 며칠 후 마린스키 백조의 호수 보러 갔는데 냉정한 페테르부르크 관객들은 옥사나 스코릭의 백조에게 브라보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사라파노프는 물론 '우리' 무용수였다. 그런 재능 앞에서 당연히 이 관객들은 열광했고 큰 갈채와 브라보를 줬다. 보통 이런 고전 발레에서는 남자 무용수보다는 발레리나에게 환호가 집중되는 편이지만 이들은 게스트 톱스타인 폴리나 세미오노바보다 사라파노프에게 훨씬 열광했다.
그리고 폴리나 세미오노바.
세미오노바의 춤은 영상으로는 여러번 봤고 무대는 작년 로미오와 줄리엣 때 처음 봤다. 잘 추는 무용수였다. 존재감도 있었다. 하지만 라 바야데르를 보면서는 뭔가 갸우뚱했다. 1막, 2막 니키야 땐 오히려 좋았다. 감자티에게 칼 들고 덤빌 때는 좀 오싹할 정도였다. 그러나 망령의 왕국 씬에서는 뭔가 부족했다. 이 아가씨가 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모스크바 출신이라 그런가. 베를린에서 활동해서 그런가. 보는 내내 대체 뭐가 거슬리나 싶었는데 다리 동작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깨끗한 선이 안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가 너무 페테르부르크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가보다. 작년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경우는 드라마틱 발레이고 모던한 안무라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3막은 특히 니키야의 경우 감정선보다는 각종 테크닉 보여주는 기계 같다는 느낌이 강한 편인데 이 사람도 그런 경향이 강했다. 처연한 니키야보다는 강인한 니키야였고 3막의 니키야는 좀 푸에떼 머신 같았다. 이날 공연을 보니 어쩐지 이 사람은 지젤에서도 1막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이 사람이 슈클랴로프와 췄던 지젤 영상에서도 그런 느낌이 좀 들었던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세미오노바보다 3월에 국립발레단에서 김지영씨가 보여줬던 니키야가 더 좋았다. 훨씬 드라마틱했고 원숙했다.
군무는 별로였다. 동작 타이밍이 안 맞는 경우가 많았고... 2막인가 3인무인지 4인무에서 맨 오른편 애가 대놓고 실수도 했다 ㅠㅠ 망령의 왕국도 그렇고... 확실히 이건 군무가 중요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볼 만했다. 이게 잘못하면 지루해지고 늘어질 수도 있는 길이인데 스피디하게 편집해서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결혼식 장면도 솔리스트들 춤이 꽤 편집됐고. 망령들도 빨리 내려왔다(ㅋㅋ)
진짜 좋았던 건 음악!! 원래 민쿠스의 음악이 좋긴 하지만... 이날은 처음 전주가 나올때부터 너무 좋은 거였다. 이제껏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에서 오케스트라에 반한 적은 없었는데. 이날 지휘자가 바로 파벨 부벨니코프였던 거다. (인민예술가이고 유명한 사람이다) 연주가 너무 좋아서 이 사람 지휘 버전으로 cd 사고 싶었는데 결국 네프스키의 음반 가게를 두 군데나 갔지만 못 구하고 리처드 보닝 지휘 cd만 사옴. 근데 난 사실 이 사람이 지휘한 발레 음악 버전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도 아쉬워서 집에 돌아온 후 자주 듣고 있음.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 일단 올린다. 미하일로프스키 극장 내부 사진들과 사라파노프가 예전에 췄던 라 바야데르 동영상 클립 등은 끊어서 올려야겠다.
...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의 솔로르 영상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2808
* 커튼 콜 사진들. 맨 뒷자리라서 줌 당겨도 이게 최선이었다 ㅠㅠ 다 번져서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어쨌든 그냥 올려본다.
* 사족 1.
극장은 꽤 럭셔리해졌지만 샵은 여전히 너무 작았다.. 파는 것도 이반 바실리예프 엽서 뿐이었다. 워낙 요즘 잘 나가는 무용수니 그럴만도 하지만.... 그래도 페테르부르크 관객들은 역시 모스크바에서 온 바실리예프보다는 사라파노프를 더 좋아하는지... 내 앞에 있던 러시아 아줌마는 샵 직원에게 싸늘한 음성으로 '레냐 사라파노프를 내놔요! 바실리예프 말고!' 라고 당당하게 요구, 사라파노프 엽서를 사갔다 :)
** 사족 2
막간에 잠시 홀에 나와 쉬는데 덩치 좋은 아줌마들이 모여 발레에 대해 얘길 하고 있었다. 상당한 발레 애호가들이었다. 전문적인 얘기도 많이 했다. 사라파노프를 격하게 아꼈다. 그러다 웃긴 말을 들었다.
아줌마 1 : 세미오노바는 좀 별로야 그치?
아줌마 2 : 뼈대가 너무 굵어! 그래서 솔로르가 버린 거야!!
... ㅠㅠ 세미오노바 엄청 말랐는데... 근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는 좀 됐다. 이 아가씨는 마린스키 발레리나들처럼 가느다랗고 낭창낭창하다기보다는 말랐지만 강인한 근육질에 가까웠다. 기본적 골격 자체가 작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1~2막에서 보여준 니키야도 청순하고 가엾다기보단 강단있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하시던 아줌마들은 정말 거구였다고요 ㅠ.ㅠ
*** 다음 리뷰는 4.3 마린스키 초연이었던 실비아.
** 예전에 올렸던 라 바야데르 관련 포스팅들은 여기
http://tveye.tistory.com/2715 : 이 공연 본 날 남겼던 메모
http://tveye.tistory.com/2773 : 루지마토프와 마할리나의 라 바야데르 화보
http://tveye.tistory.com/2276 : 루지마토프의 솔로르 영상
http://tveye.tistory.com/2294 : 루지마토프의 솔로르 화보
http://tveye.tistory.com/2478, http://tveye.tistory.com/2408, http://tveye.tistory.com/2328, http://tveye.tistory.com/2215 : 슈클랴로프의 솔로르 화보
http://tveye.tistory.com/2077 : 율리야 마할리나의 니키야 화보
http://tveye.tistory.com/2195 : 라 바야데르에 대한 짧은 메모
http://tveye.tistory.com/1596 : 사라파노프가 등장하는 마린스키 지젤 3D 필름에 대한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