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날씨 좋더니만 역시 전형적인 페테르부르크 날씨가 돌아왔다. 후덥지근해지더니 뇌우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산도 소용이 없어 흠뻑 젖었다.
어제 청동기사상 공연 끝난 후 료샤네 집에 가서 새벽까지 얘기하느라 늦게 자고, 아침에 걔 출근할때 따라 나와 방으로 돌아오느라 잠 설침. 아니 이놈은 맨날 비서한테 일시켜먹는 놈이 왜 오늘은 이렇게 아침 9시까지 나간다고 난리인가... 왜 갑자기 열심히 일하는 척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야! 나도 일해! 나 출장 갔다왔잖아!' 하고 툴툴댄다. 쳇 그래봤자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놈이.
하여튼 4~5시간밖에 못 잤고 방에 돌아와서도 좀 자보려 했으나 처리할 일들이 몇가지 있어 그거 하느라 결국 더 못 잤다. 머리도 아프고 주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몸이 괴롭다.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날을 조금 더 연장했다. 비행기와 숙소 변경하느라 오전에 좀 정신이 없었다. 6월말에 돌아갈 것 같다. 이로써 나의 유리지갑은 이제 먼지로 화했다만... 아마도 나는 돌아가는 시점을 할수 있는 한 미루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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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쯤 배가 고파서 기어나갔다. 뒷길의 루빈슈테인 거리에 갔고 며칠 전 찍어두었던 북카페 같은 곳에 갔다.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책들이 매우 많았고 여기저기 불상이 앉아 있는것이 내겐 좀 우스웠지만 여기 사람들에겐 이른바 '힙'한 스타일인가보다.
(카메라 렌즈 덕에 사진은 좀 밝게 나왔지만실제로는 꽤 어두컴컴한 곳이다)
버섯수프와 잘 모르는 이름의 생선요리를 시켰다. 설명을 들어보니 흰 생선이고 살이 부드럽다 해서. 둘다 맛있긴 했는데 문제는 이것들이 둘다 크림소스라... 나중엔 엄청 느끼했다. 아아, 김치찌개 먹고싶다 엉엉..
어두컴컴한 테이블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며 책장에서 오래된 러시아 문학책을 꺼내 뒤적였다. 글쓰러 오기 좋은 카페이긴 한데 너무 늦게 알았다. 모레 나는 숙소를 옮기니까. 그리고 뭔가 장소는 좋은데 어딘가 약간 편하지 않은 점이 있다. 불상 때문인가?? 두셰브나야 꾸흐냐와 좀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여기가 더 어두워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웬만큼의 빛이 들어오는 곳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그건 그렇고 밥먹은 후 산딸기에이드를 마시고 있는데 반삭발에 귀걸이, 해골 반소매 티셔츠 차림의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청년이 갑자기 내 곁에 와서 앉아도 되느냐 물었음. 아마도 내가 징 박힌 후드 재킷과 해골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동류의식을 느꼈나... 그는 자기 소개를 했는데 이름이 '고릭'이었다. 게오르기 아니면 그리고리의 애칭인갑다. (추가 : 생각해보니 이고리의 애칭인가보다)
고릭 : 나 아까부터 너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어.
나 : (뭐냐 이 무례함!) 왜?
고릭 : 외국인인데 되게 편안하게 주문을 해서. 생선 종류도 물어보고 뭔가 당황하지 않는게 인상적이어서.
나 : (내가? 난 세상에서 주문하는 게 젤 무서운데!) 어, 그래...
고릭 : 노어 잘하네. 관광객? 학생?
나 : (어머나 학생이라니~ 오오...) 아, 난 잠시 여행왔어.
고릭 : 아 그렇구나. 나 만화 그려.
나 : 어, 그래? 그렇구나...
고릭 : (자랑스럽게 뭔가를 뒤적뒤적하더니 스케치북에 펜으로 그려놓은 만화를 보여줌) 내가 그린 거야.
나 : (어두워서 안보여.. 글씨가 너무 빽빽해 ㅜㅜ) 아, 대단하구나!
고릭 : 그렇지? 나 이 근처에 화실 있는데 구경갈래? 너 만화 그리는 거 못봤지?
나 : 어, 저기... (이거 뭐지?)
고릭 : 화실에 좋은 와인도 있고 샴페인도 있다. 맥주 좋아하면 맥주도...
나 : (이노미...) 아, 그래. 고마운데 나는 약속이 있거든.
고릭 : (휘파람 + 푸르르) 남자?
나 : 어, 으응... (남자 맞긴 하지.. 남자들. 료샤와 레냐. 둘중 하나는 나의 '8세' 약혼자 ㅠㅠ)
고릭 : 에이 어쩐지. 편안하게 주문을 하더라니.
나 : (? 남자랑 약속 있는 것과 외국인이 노어로 편하게 주문하는 것 사이에는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만화 보여줘서 고마워.
고릭 : 그래, 나중에 약속 없을때 여기 와. 나 자주 오니까 언제 화실 보여줄게.
나 : 으, 으응...
그리하여 펑크 청년 고릭은 나타났을때와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자리를 떴다.
흠.. 뭔가 황당하지만 그래도 조금살짝 헌팅당한 느낌이니 조금 뿌듯해하기로 함. 역시 조명이 어두운 데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 (나이를 숨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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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료샤에게 전화왔길래 그 얘기 해줬더니 료샤가 짜증을 냈다.
료샤 : 야! 아무나 말 건다고 덥석덥석 대꾸하지 마! 그런 놈 위험해!
나 : 위험하기보단 어벙해보이고 엄청 속이 들여다보였어. 대놓고 화실 가서 술마시자 했어.
료샤 : 반삭에 펑크에 해골!! 개날라리! 거기 질나쁜 어린애들 많어!
나 : 나 해골 티 입고 나왔는데 ㅠㅠ
료샤 : 어이구, 못살아... 너 왜케 해골 좋아해. 저녁에 레냐 봐야 하니까 해골 티 입지 마! 레냐가 어제 나한테 해골 티 사달랬어! 다 너때문이야!
나 : (아아, 내가 어린이에게 악영향을??) 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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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결국 오늘 저녁 료샤와 레냐와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뇌우가 너무 치고 비가 많이 오자 레냐네 엄마가 레냐를 외출금지시켰다. 레냐가 감기 걸렸다 나은지 얼마 안돼서 그럴만도 하다. 그래서 나도 료샤에게 너도 출장 다녀와 피곤할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 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해골 티를 입고(ㅋㅋ)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점에 한군데 다녀왔지만 빈손으로 돌아왔고 숙소 옆 그 쇼핑센터에 붙어 있는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신 후 수퍼마켓에서 자질구레한 것을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이 쇼핑센터에서 호텔은 20초만 뛰면 되는데 우산 안가지고 나왔다가 진짜 흠씬 젖었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듯 비가 왔기 때문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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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한시간 쯤 그대로 덮개도 안 벗긴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자고 싶었지만 밤잠 설칠까봐 꾹 참았다.
원래 오늘은 글도 쓰고 공연 리뷰들도 정리하려 했는데 마냥 피곤하다. 이러다 곧 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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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유일한 즐거움은 나보다 엄청 어린 남자애에게 조금살짝 헌팅을 당했다는 것 뿐이구나. (고릭 그 녀석이 스스로 나이도 밝힘. 22살이라 함 ㅋㅋ 내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기 망정... 해골청년 고릭은 내가 같이 화실 가자고 밖으로 나왔으면 '앜 속았어~' 하고 도망갔을지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