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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4. 23:14

누가 누구일까요~ 2017-19 petersburg2019. 11. 14. 23:14





어제 새로 발굴한 기념품샵에서 득템한 러시아 작가 초상 그려진 컵들 :) 다른 작가들도 많아서 다 사고픈 걸 꾹 참았다. 비싸진 않았지만 컵은 뽁뽁이로 싸야 하고 부피도 차지하니...(이미 로모노소프도 여럿 샀다ㅠㅠ)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 고름. 그나마도 불가코프 컵이 없어서 다행. 근데 불가코프는 너무 멀쩡하고 또 일반인처럼 생겨서 캐리커처 특징 잡을만한 재미가 없어서 그런것 같기도... 아흐마토바는 살짝 구부러진 코가 있고 푸쉬킨은 곱슬머리 구레나룻이 있고 등등...



세개만 골라옴. 누가 누구일까요~~~



왼편부터 도스토예프스키, 고골, 그리고 하름스. 고골은 저 그림이 너무 귀여워서 고름(그래서 푸쉬킨을 배신했음) 글구 하름스는 본모습보다 넘 귀엽게 그려져서 쫌 안 닮았지만 그래도 하름스니까 샀다 :)



근데 도스토예프스키 저 불쌍하고 힘든 모습 어쩔거야... ㅎㅎ 너무 잘 어울린다 흐헝 ㅋㅋ


:
Posted by liontamer






오랜만에 본편 일부를 올려본다.


이 에피소드의 앞부분과 뒷부분을 이전에 각각 발췌해 올린 적이 있다. 네프스키의 유명 디저트 가게인 세베르에 나갔던 트로이는 우연히 미샤와 그의 극장 친구들을 마주치게 된다. 거기에는 미샤의 파트너 발레리나인 지나를 비롯해 동기인 레냐 핀스키, 후배인 니넬,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초빙되어 온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었다. 일린은 토요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며 그를 파티에 초대한다.


순서는 반대로 일린의 생일 파티를 먼저 올렸었다. 트로이는 파티에 가서 미샤의 극장 동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미샤는 브이소츠키 노래를 부르고, 그러다 술에 취해 나가떨어진다.


이번에 올리는 에피소드는 그 두 이야기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시간 순서대로 재배열하면 세베르 - 이번 에피소드 - 노래 부르고 나가떨어지는 미샤 이다.




그 두 에피소드 링크는 아래 :


 
http://tveye.tistory.com/6253 세베르에서의 만남, 달콤한 것들, 미샤와 지나 어릴적 스케치 2


http://tveye.tistory.com/5842 생일과 그 다음날, 브이소츠키




...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는 일린의 이름과 부칭이다. 제대로 된 이름은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 일린이고 미샤는 그를 애칭인 스탄카라고 부른다.



미샤와 일린이 논쟁을 벌이는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소설 '백야'이다. 나스첸카는 그 소설의 여주인공이다. 내가 쓴 이 소설 속에서 일린은 미샤와 지나를 위해 '백야'를 단막 발레로 안무하고 미샤를 화자였던 남자 주인공, 지나를 나스첸카로 캐스팅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과 부칭이다. 미샤에게는 존경하는 예술가를 이름과 부칭으로 부르는 버릇이 있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토요일 저녁 7시에 트로이는 미샤와 지나이다의 아파트로 갔다. 생일 파티는 8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미샤가 백야 때문에 일린과 이견이 생겼다면서 좀 일찍 와달라고 했다. 트로이는 자신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일찍 갔다.



 지나이다가 문을 열어주더니 반색을 했다.



 “ 제발 쟤 좀 말려요. 저러다 스타니슬라프 리보비치를 잡아먹겠어요. ”



 힐끗 보니 부엌 테이블에는 이미 음식들과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준비해 온 게 틀림없었다. 미샤는 원래 요리를 하거나 잘 차려먹는데 관심이 별로 없었고 지나이다도 가정적인 주부 노릇을 하기에는 너무 여왕님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술 한 잔 권하기는커녕 코트를 벗는 것도 기다려주지 않고 그의 팔목을 잡아끌며 거실로 데려갔다.



 미샤는 피아노 옆에 선 채 일린과 열띠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샤는 평소에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얘기했지만 논쟁할 때는 명료하고 건조한 말투로 변했다. 그는 빠르게 쏟아지는 일린의 설명을 중간 중간 칼처럼 끊어대며 끼어들었다. 검은 눈에서 불꽃이 연달아 튀었다. 처음에 트로이는 그들이 뭘 가지고 그렇게 가열찬 논쟁을 벌이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듣고 보니 주인공이 나스첸카의 첫사랑에게 연애편지를 전해주러 갈 때 무대 어느 쪽에 서야 하느냐, 여자가 그 첫사랑이란 작자에게 달려들어 안길 때 주인공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느냐 아니면 관객들로부터 등을 돌려야 하느냐 등의 트로이로서는 사소하기 짝이 없는 듯한 문제들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대체 왜 미샤가 자신에게 빨리 와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참 열을 내다가 트로이를 발견한 미샤가 좋아하며 손목을 휙 흔들었다.



 “ 아, 잘됐다. 빨리 스탄카한테 설명 좀 해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이 사람한테 좀 알려줘. 그리고 백야가 주인공과 나스첸카의 연애소설이 아니라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짝사랑이라는 이론 좀 설명해봐. 구조주의랑 뭐 그런 것도 섞어서. 너 지난번에 세미나에서 발표한 거 있잖아. ”



 “ 구조주의와는 관계가 없는데... ”



 “ 아니, 관계가 있게 설명해줘. 넌 할 수 있잖아. ”



 “ 그거랑 무대에서 등을 돌리고 말고랑 대체 상관이 있어? ”



 “ 있어요. ”



 미샤 대신 일린이 대꾸했다. 역시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지만 밝은 회색 눈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아마 턱수염을 깎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트로이에게 자신들의 이견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미샤의 질문과 주인공의 동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쭉 설명했다. 그는 간결하게 문장을 끊어서 말하는 미샤와는 달리 빠르고 길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일린이 어찌나 설득력 있게 조곤조곤 얘기하는지 트로이는 미샤에게 그냥 연출자의 말을 따르라고 충고할 뻔 했다. 하지만 미샤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할 수 없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페테르부르크 소설들에 대해 얘기를 늘어놔야 했다. 나중에는 미샤가 원하는 대로 구조주의 이론도 좀 섞었다.



 얘기를 마쳤을 때 일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그럼 좀 더 생각해봐야겠는데. 이건 내일 다시 맞춰보는 걸로 해. ”




 “ 등 돌리는 거지? ”




 
 한번 파고들면 절대 포기하는 법이 없는 미샤가 집요하게 물었다. 자신이 일린의 입장이었다면 그 고집 세고 버릇없는 젊은 애에게 화를 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린은 소리 내어 웃었다.



 “ 그래, 등 돌리는 걸로 하자. 이제 페트루슈카 좀 맞춰보면 좋겠는데. 좀 있으면 사람들 올 테니까. ”



 소파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지나이다가 일어났다. 피아노 쪽으로 다가오면서 트로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 고마워요, 덕분에 공연이 파탄나지는 않겠네요. ”




 “ 무슨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군요. ”




 “ 그냥 쟤를 얌전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성공이에요. ”




 지나이다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테마를 치기 시작했다. 미샤가 바 앞으로 가더니 목과 팔을 기형적으로 꺾은 채 지푸라기 인형처럼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일린이 박자를 셌다. 중간 중간 동작을 지시하기도 하고 손을 내저으며 음악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백야를 놓고 열띠게 대들던 것과는 달리 미샤는 일린의 모든 지적에 온순하게 따랐다.




 “ 팔을 더 내려야 해. 허리는 좀 더 펴고. 무릎이 더 나가야지. 다시 해봐. 어깨도 내리고. ”




 미샤가 다시 포즈를 취했다. 일린이 뒤로 다가와서 왼쪽 어깨를 아래로 세게 내리눌렀다. 아픈 부위였기 때문에 미샤가 잠깐 얼굴을 찡그렸지만 불평 없이 어깨를 더 내렸다. 일린이 손을 치우자 그는 정말로 꼭두각시 인형 같은 모습으로 허공에 매달린 듯 서 있었다. 트로이는 금방이라도 미샤가 무릎을 꺾고 바닥에 넘어질까봐 오싹했다.



 지나이다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이제 일린은 박자를 세는 것 외에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피아노 옆에 선 채 미샤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샤는 검은 머리칼을 털실이나 지푸라기처럼 들썩이며 사지를 상하좌우로 흔들었다. 몇 차례 이어지는 도약조차 무릎을 구부린 채 낮게 뛰었다. 발레란 몸을 가능한 한 곧게 펴고 길게 늘이는 것이라고 믿었던 트로이에게 있어 그 춤은 전혀 아름답거나 우아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팔과 어깨 동작이 특히 그랬다. 불협화음과 구슬픈 멜로디가 뒤섞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속에서 미샤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우울해지고 고통스러워졌다. 얼굴 전체가 일그러지며 외롭고 슬프게 변했다. 두 손을 털실로 감친 인형 손처럼 둥그렇게 뭉쳐서 가슴을 치며 옷을 잡아당기고 어깨를 떨며 이따금 구부러진 다리를 바깥으로 한두 번 찼다. 피아노를 치면서 지나이다가 살짝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너무 슬픈데. 꼭 저걸 가져가야 하나... ”




 미샤가 몸을 돌려 일린 쪽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무대에 존재하지 않는 발레리나 인형이나 독재자 흥행사를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피아노 옆에는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있었고 그 밝은 회색 눈은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예리한 칼처럼 자기 앞의 무용수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샤는 두 손을 어색하게 뻗더니 삿대질을 하고 턱짓을 했다. 그리고 어깨를 홱 떨구더니 한 바퀴 빙글 돌고 바닥에 넘어졌다.



 일린이 손바닥을 마주쳐 딱 소리를 냈다.



 “ 훨씬 좋아졌네. 어깨 동작만 좀 손보면 되겠어. 런던에서 좋아할 거야. ”




 미샤는 심하게 숨을 헐떡였다. 트로이는 그가 연습하면서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어려운 동작 때문인지 마음이 산란해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면 티셔츠가 땀에 젖어 몸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거실 마룻바닥에 반쯤 엎드린 채 두 손으로 머리와 가슴을 감싸고 숨을 몰아쉬면서 가만히 있었다. 방금 춘 춤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힘든 것 같았다. 마침내 일린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씻어야지, 뭘 더 입든가. 런던 가기도 전에 감기 걸리면 안되잖아. ”




 “ 나 좀 놔둬. ”




 미샤가 목쉰 음성으로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여전히 머리를 들지 않은 채였다. 지나이다가 일어나더니 모른 척하면서 부엌으로 갔다. 일린은 다른 말을 하는 대신 소파에 펼쳐져 있던 카디건을 가져와 미샤의 머리와 등을 덮었다.



 잠시 후 미샤가 일어났다. 여전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카디건을 일린에게 휙 던지고 한 손으로 어깨를 누르면서 욕실로 갔다. 스위치를 찾지 못해 한참 문 옆 벽을 더듬었다. 트로이가 다가가서 불을 켜주었다. 미샤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곧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린은 바를 붙잡고 아까 미샤가 하던 동작 몇 개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정확하기는 했지만 나이 때문인지, 무용수에서 은퇴한지 오래됐기 때문인지 미샤보다는 훨씬 뻣뻣했고 우아한 느낌도 적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했다. ‘좀 더 내려야 하는데...’ 하고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다. 트로이는 견디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 더는 아파서 안 될 거예요. 그 어깨 아픈지 반년 가까이 됐어요. ”




 “ 아니, 그 정도예요? 왜 아프다고 얘길 하지 않는 건지... ”




 “ 자존심이 강해서 그래요. ”




 “ 저 정도로 추면 자존심 내세워도 돼요. 아픈 건 별개지만. ”




 “ 백야만 추는 줄 알았는데, 런던은 무슨 얘기죠? ”




 “ 2월 런던 페스티벌 있잖아요. 경쟁부문에도 초청됐어요. 참가진도 꽤 화려하고. 그래서 페트루슈카로 정한 거예요, 누가 뭐래도 러시아 춤이니까. ”




 “ 미샤가 정했어요? ”




 “ 아뇨, 하나 안무해달라고 해서 내가 고른 거죠. 물론 포킨 오리지널에서 가져온 거지만. ”




 “ 그럼 런던에 함께 가요? ”




 “ 글쎄요, 당국에서 나까지 허가를 내줄 것 같지는 않아요. ”




 일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 정도로 아프다면 동작을 바꿔야겠는데... ”




 “ 미샤에게는 내가 그런 말 했다고 얘기하지 마세요. ”




 “ 자존심 앞에는 친구도 소용없나 보죠? ”




 “ 자기 춤 앞에서라고 하는 게 정확하겠죠. ”




 “ 그럴만해요. 내가 저렇게 출 수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내놨을 테니까. ”




 스타니슬라프 일린이 투명한 회색 고양이처럼 미소를 띠었다. 트로이는 사라토프의 시골에서 할머니가 고양이들을 자루에 넣어 강물에 빠뜨려 죽였던 것을 떠올렸다. 일린을 향해 솟구치는 부당한 증오심에 그는 소스라쳤다.





...




발레 페트루슈카에 대해서는 전에 몇번 올린 적이 있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의 초창기 메인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이 니진스키를 위해 안무한 단막 발레이다. 러시아 전통시장과 놀이문화, 마슬레니차의 흥겨움과 화려함, 거기에 꼭두각시 헝겊 인형 페트루슈카와 독재자 흥행사, 아름다운 발레리나 인형과 폭압적인 무어 인형이 등장한다. 음악은 스트라빈스키. 원체 음악이 유명해서 종종 따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서 연주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미샤가 추는 페트루슈카는 포킨 원작이 아니고 일린이 그 원작을 따와서 미샤를 위해 변형시킨 작품이다. 여기 발췌한 적은 없지만 이후 미샤는 안무가가 되었을 때 니진스키를 위한 트리뷰트 작품을 안무하고 거기에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한 페트루슈카를 재등장시킨다.




런던에서 미샤가 춘 페트루슈카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공연을 본 알리사가 트로이에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http://tveye.tistory.com/5178 프라하의 두 개 메모,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마린스키에서 본 페트루슈카 무대에 대한 짧은 메모와 사진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3515

http://tveye.tistory.com/3686


..





미하일 포킨의 페트루슈카를 춘 바츨라프 니진스키.






최근에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가 발레 뤼스 디아길레프 갈라에서 페트루슈카의 모놀로그를 추었다. 마린스키에 오리지널 페트루슈카가 레퍼토리로 들어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은 그전까지는 페트루슈카를 춰본 적이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준 연습 영상을 보니 무척 보고팠는데 공연 영상은 올라오지 않았다. 무대 분장 사진을 보니 오리지널 페트루슈카를 그대로 따온 것 같긴 한데... 나에겐 실제 분장 사진보다 이 연습 사진이 더 인상깊었다.


페트루슈카는 남자 꼭두각시 인형이지만 최근 디아나 비슈뇨바가 젊은 안무가인 블라지미르 바르나바가 새로 안무한 작품에서 페트루슈카 역할을 추기도 했다.


리허설 중인 슈클랴로프 사진 몇 장 더.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어제 굉장히 고생했다. 모스크바까진 순조롭게 왔는데 폭설이 내렸다. 페테르부르크도 마찬가지로 눈폭풍(ㅠ)이 쳤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국내선 기다리는데 비행기들이 줄줄이 결항 또는 지연되기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까지야 한시간 십여분 거리라 뜨겠거니 했는데 20:20 뱅기가 21:00 출발로 변경되었다. 이때까진 그러려니..


뱅기를 탔는데 한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질 않았다. 첨엔 눈 때문안가 했으나 기체 어딘가 문제가 생긴 거였다.. 10시 반쯤 모두 내리라 함. 텅빈 벌판에는 눈보라가 쳤고 버스가 와서 우리를 싣고 도로 터미널로 감..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 화도 안냄 ㅠ 딱 한명 아저씨만 항의..


그나마도 11:55 뱅기 하나를 수배해 우리를 태웠으나 실제 출발은 12시 반에나.. 페테르부르크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한시 사십분.. 원래 밤 10시 도착 예정이었다.


딴거보다 호텔에 픽업 요청해놔서 아거 때매 계속 전화하고 정신없었다. 기사를 만나 넘 미안하다 사과하자 기사가 괜찮다며 오늘 하루종일 비행기들 다 지연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눈폭풍 왔다고 한다..


호텔 도착해 체크인하니 새벽 세시가 다 되어 있었다. 옷이랑 세면도구만 꺼내고 씻고 쓰러져 잤다.


..



조식이 10시까지여서 자다가 놓침. 근데 새벽 넘 늦게 도착해 어쩔수 없었다.


10시에 해뜨고 3시 즈음 해가 지기 때문에 밝을때 무조건 나가야 하는데 오늘은 11시에 일어나고, 씻고 화장하고 가방 푸느라 12시 반쯤에야 나섰다.


무지 추웠지만 하늘이 파랬다. 쌓인 눈이 얼어있었다. 예보를 보니 주중 맑은 날이 오늘뿐인거 같아 무조건 수도원에 갔다. 배고프고 추웠지만 일단 27번 타고 네프스키 수도원에 갔다.


..




수도원 도착해선 정신없이 지하 카페로 갔다. 배고프고 꽁꽁 얼어서.. 추워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여름엔 한산한데.. 다들 설탕 넣은 차와 수도원 빵을 먹는다. 나도 티백 홍차 한잔, 쌀과 버섯 든 빵, 양귀비씨빵 시켰다. 총합 110루블, 약 2천원!!


자리가 없어 합석함. 나 빼곤 다들 나이 지긋하신 분들. 기도하러 왔다 카페에서 차 마시고 맛있고 저렴한 수도원 갓 구운빵들 사가는 어르신들이 많다.


너무 추워서 오로지 러시아에서만 하는 짓.. 차에 설탕 투하. 안 그럴수가 없었음. 설탕 넣은 차랑 빵 먹었다. 빵이 정말 너무 맛있었다. 쌀과 버섯 든 빵이야 당연하고, 양귀비씨빵 이제껏 먹은것중 이게 제일 맛있었다. 가득 든 양귀비씨가 고소하게 톡톡 터지고 솔솔 뿌려진 설탕이 달콤했다.


따뜻한 빵, 설탕 녹인 달고 뜨거운 홍차.. 그리고 머릿수건 쓴 할머니들과 성호 긋는 할아버지들 사이에 앉아 투박하게 채색된 수도원 장식접시와 이콘 보는 기분, 그 따스하고 소박한 분위기는 형용할수 없다...



몸 녹이고 배 채운 후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이콘을 보고 초를 켰다. 오늘의 기도는 전보다 간결했다...


..





나와서 수도원 묘지에 갔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 프티파 등의 무덤에 인사했다.


도스토예프스키 무덤 앞에 서자 눈물이 나왔다. 나이든 부인 둘이 무덤 앞에 오랫동안 서서 묵념하고 한 여인이 찬송가 같은걸 불렀다. 아마 정교에서 고인에 대해 부르는 송가 같았다. 얼어붙은 눈, 차가운 바람, 서서히 넘어가는 태양, 도씨의 어쩐지 슬픈 얼굴이 조각된 묘비. 흰 눈 위의 꽃다발들. 그리고 여인이 켠 초와 그 노래가 어우러져 순간 성스러운 곳에 있는 듯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땅에 키스하고 무덤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아 인사를 하고 키스자국 찍은 쪽지를 남겼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나의 도씨. 내 인생 바꿨던 사람.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에게도 오랫동안 인사했다. 불행하고 불행했던 사람.



..



버스를 탔다. 너무 추워서 배가 아프기까지 했다. 중간에 내려 그랜드 호텔 유럽에 들름(화장실 가려고 ㅠㅠ 그래도 전에 몇번 묵었으니 너그러이 봐줘요 카페도 자주 갔구먼)


나와선 맞은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에 갔다. 마침 이틀 후 라벨과 드뷔시 연주가 있어 남은 얼마 안되는 표 중 젤 싼 표 끊었다. 약 2만원 정도.. 하지만 내한 오면 엄청 비싸지지.. 안타깝게도 테미르카노프는 내가 떠난 후에야 지휘 일정이 잡혀 있었다 흐흑.. 그래도 드뷔시의 바다와 라벨의 볼레로를 들을 수 있다.


4시였고 이미 해는 져 있었다. 예술광장 가서 푸쉬킨에게 인사하고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쪽 갔다가 운하 따라 네프스키로 나와서 쭉 걸어내려왔다.


..




춥고 배고파서 고스찌에 갔다. 젤 먼저 가는 곳이니 젤 좋아하는 곳이겠지.. 따뜻한 보르쉬와 생선구이 먹었다. 생선은 이름 생소한 흰 생선인데 남자 점원의 추천대로 먹었는데 부드럽고 맛있었다.


먹고 나와서 호텔까지 걸어왔다. 방에 가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로비 카페에 잠깐 내려와 차 마시고 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해 뜨는대로 나가야지..


:
Posted by liontamer

 

 


 

 

 

아래 발췌한 두 개의 에피소드는 이전에 종종 올렸던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등장하는 장편의 중반부이다. 둘이 시간적으로 연속되는 건 아니고 앞 에피소드 이후 몇개의 이야기가 더 나오고 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배경은 1974년 즈음. 소련 레닌그라드.



지금의 내 상황과 같지는 않지만, 이 소설을 썼을때도 역시 나는 회사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물론 미샤가 주인공인 그 본편 우주의 일부이지만 여기 발췌한 에피소드들에는 미샤 대신 그의 친구인 트로이와 알리사가 등장한다. 그들은 운하를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불가코프에 대해 얘기하고 작가에 대해, 쓰는 것에 대해, 그리고 떠나야 하는 것에 대해 얘기했다. 아마도 나의 입을 빌어서, 서로가 다른 방식과 다른 시선으로.


 

전에 나는 런던에서 사라진 미샤를 찾으러 간 알리사의 이야기나 썰매 에피소드, 그리고 흑해로 가는 기차 에피소드를 발췌하면서 알리사란 인물에 대해 잠깐 얘기했었다. 그녀는 비중이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저 소설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리고 언젠가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도 생각했었다.



맨 위 사진은 내가 이번에 페테르부르크 서점에서 사온 에코백. 그리고 아주 오래전 샀던 한길사 거장과 마르가리따 번역본. 빛이 많이 바랬다. 저 에코백에는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중 고양이 베헤못과 짝패 코로비예프가 작가동맹의 점원에게 작가와 도스토예프스키, 증명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장면의 대사가 인용되어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명문들이야 물론 셀수도 없지만, 사실 나도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와 더불어 이 대화를 아주 좋아한다. 그래서 내 소설에서도 알리사의 입을 빌어 인용했는데 마침 저 에코백에도 씌어 있어 반가워하며 사왔다. 알리사의 인용은 아래 글 중 두번째 에피소드에 나온다.

 


 두번째 사진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어붙은 운하 풍경이다. 아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트로이와 알리사는 지도교수와의 식사를 마친 후 운하를 산책하다 저런 조그만 계단으로 내려가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에서야 워낙 추울때라 사람이 없지만 겨울이 아닐땐 저 자리에 삼삼오오 앉아 술마시는 사람들도 있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림 그리거나 책읽는 사람들도 있다.




첫번째 에피소드는 당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에서 막 석사 과정을 마친 트로이와 알리사가 지도교수인 스베들로프와 저녁을 먹으면서 진로 상담을 하고, 넌지시 런던의 소련 대사관으로 가서 KGB 활동을 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식사 후 트로이와 알리사는 다른 이야기들을 나눈다.



이 에피소드에서 스베들로프가 말하는 사미즈다트는 지하출판물, 금서 불법출판물을 가리킨다. 콤소몰은 공산주의 청년동맹으로 보통 16~26세 까지 활동한다. (17세인가? 긴가민가...) 안드레이는 트로이의 본명이고 파벨(파블릭)은 알리사의 약혼자이다. 루뱐카는 모스크바에 있는 KGB 본부의 속칭이다. 로미오는 알리사와 트로이를 비롯한 친구들이 미샤를 부르는 애칭이다.



두번째 에피소드는 앞 이야기로부터 약 10개월 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리사가 트로이의 아파트로 찾아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트로이에게 글쓰기에 대해 얘기하고 불가코프의 문장을 빌어 그를 독려한다. 그리고 그녀는 떠난다.


언급되는 갈랴나 코스챠 등은 이들의 문학서클 친구들이다. 전에 썰매 에피소드, 기차 에피소드, 표절 에피소드 등에서도 나온 적 있다. 코무날카는 공동아파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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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이야기 : 운하의 트로이와 알리사, 회색 톱니 기계벌레>





 

 트로이와 알리사는 둘 다 별 문제없이 논문에 통과했고 석사 학위를 땄다. 담당 교수인 스베들로프는 논문 심사가 완전히 끝난 후 이례적으로 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터놓고 진로에 대해 충고를 했다. 그들이 2년 전 해외 대사관 파견으로 위장한 KGB 근무 제안을 거절한 후 처음이었다. 정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스베들로프는 여전히 그 제안이 유효하다는 것을 넌지시 비추었다.

 


 트로이는 스베들로프가 정말로 그 제안을 하고 싶은 대상은 정부 관료의 딸이자 가장 성적이 뛰어난 알리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리사는 원어민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영어가 유창했고 문학뿐만이 아니라 영미 정세에도 환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약혼자가 부책임자로 있는 신문사에서 국제뉴스 업무를 맡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즈베스티야 급은 아니었지만 당에서도 인정받는 건전하고 탄탄한 신문사였다. 스베들로프는 알리사의 결정을 칭찬하면서 그녀가 국제부서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으면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운을 띄웠다.

 


 알리사는 평소처럼 세련된 화술로 교수의 제안을 받아넘겼지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침내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 들며 잠깐 자리를 떴다. 그러자 스베들로프는 기다렸다는 듯 트로이에게 학교에 남는 것도 좋지만 재능이 아까우니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 세상이 바뀌고 있네, 안드레이. 물론 자넨 어렵지 않게 박사 학위까지 딸 수 있을 거야, 교수가 될 수도 있겠지. 자네 아버지도 학교에 계시니 말야. 교수가 나쁘다는 건 아냐, 하지만 내가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다른 일을 했을 거야. 연방은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


 

 알리사만큼 세련된 화술을 보유하지 못한 트로이는 2년 전보다도 더 서툴게 교수의 말을 툭 잘랐다.


 

 “ 아나톨리 유리예비치, 저는 콤소몰 활동도 형편없었어요. ”


 “ 그래, 내가 그런 걸 모를 줄 아나? 자네와 알리사가 불어와 독어 쪽 애들이랑 뭘 하고 다녔는지도 아네. 자네들은 영리하게 스터디 모임이라고 속였다고 생각했겠지만 몇 년이나 봐왔는데 내가 그걸 모르겠나? ”

 


 트로이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스베들로프의 유리알 같은 눈을 응시했다.

 


 “ 그럼 왜 그런 제안을 해주시는 겁니까? ”


 “ 요즘 공부하는 젊은이들치고 사미즈다트 한번 안 읽어본 애들이 어디 있다고. 오히려 자네 같은 친구가 나가면 더 플러스가 될 거야. 그 동네 문화를 많이 아니까. 아예 거기서 뿌리를 박을 필요도 없어. 몇 년만 나갔다 오면 탄탄대로야. 지금 런던으로 나가게 되면 구메로프 라인을 타게 될 테니까. 자네와 알리사가 같이 나가면 딱 좋을 텐데 그 아까운 아가씨가 결혼 때문에 여기 남는군. ”



 트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베들로프는 그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더욱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 자네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보지 않았지. 그래서 자꾸 그런 모임을 만드는 거야, 그런 것들이나 읽고 말이지. 여기 갇혀 있어서 목이 마르기 때문이야. 레닌그라드는 모스크바보다도 더 작고 답답한 곳이지. 콤소몰 실적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구메로프는 그런 쪽에는 관대한 편이니까. 이건 기회라네, 안드레이. 학교에 남아 곰팡내 나는 책을 뒤지고 분필 먼지를 뒤집어쓰는 건 나처럼 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야. 자네처럼 똑똑한 젊은이들은 다른 일을 해야 해. ”


 

 스베들로프는 이제 드러내놓고 웃고 있었다. 제자가 답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는 헛기침을 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아나톨리 유리예비치.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 ”


 “ 물론이지. 갑작스러울 테니까. 어차피 이번 학기 강의도 나가고 있으니 비교하면서 잘 생각해 보게. 다음 달 쯤 다시 얘기 나누지. ”

 


 그 때 알리사가 자리에 돌아왔다. 스베들로프는 그녀의 아버지와 약혼자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눴고 트로이가 맡은 학부 강의에 대해서도 몇 마디 조언을 늘어놓았다. 식사를 마쳤을 무렵 교수는 애제자들과 보낸 시간 덕에 기분이 좋아져 있었고 알리사와 트로이는 둘 다 꾸며놓은 듯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

 

 

 스베들로프와 헤어진 후 트로이는 알리사와 함께 판탄카를 따라 걸었다. 이미 11월이라 산책하기에는 꽤 추운 날씨였지만 둘 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 너 괜찮아? ”



 립스틱이 지워져서 그런지 알리사의 얼굴은 창백하고 우울해 보였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핸드백에서 모자를 꺼내 썼다.


 

 “ 속이 좀 좋지 않았어. 이제 괜찮아. ”


 “ 의사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요 며칠 계속 그러더니. ”


 “ 벌써 가봤어, 임신인 줄 알고. ”


 “ 뭐래? ”


 “ 임신 아냐. 그냥 스트레스 때문이야. ”


 “ 아... 안타깝네.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미안하다, 뭐라고 해야 맞는 건지 모르겠어. ”


 “ 괜찮아, 네가 파블릭보다 훨씬 나아. ”


 “ 파벨이 뭐라고 했는데? ”


 “ 그 사람한테는 얘기 안했어. ”

 


 트로이는 걸음을 멈추고 알리사를 쳐다보았다.

 


 “ 너 말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파벨하고 결혼하는 게 그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아버지가 하라고 해서인 거야? ”


 “ 빨리도 물어보시네, 흑해 갔을 때부터 묻고 싶어 했으면서. ”


 “ 주제넘은 것 같아서 그랬지.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


 “ 아빠 때문인 거 맞아. ”


 

 그녀는 맞은편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몸을 움츠리면서 트로이의 팔짱을 꼈다.

 


 “ 우리 아빠 은퇴 위기거든. 밀려나기 전에 어떻게든 날 괜찮은 집안이랑 엮어놓고 싶은 거지. 파블릭 아버지랑 삼촌 둘 다 모스크바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거든. ”


 “ 너한테는 그게 중요해? ”


 “ 안 중요해. 근데 아빠는 좀 중요하지. 아빠잖아. ”


 “ 파벨은? ”


 “ 파블릭? 그럭저럭 괜찮아. 너희들에 비하면 매너도 좋지. 괜찮은 집안 도련님이니까. 어차피 너희도 나보고 공주님이라고 하잖아. ”


 “ 우리 중에 널 그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 아무도 없어. 그건 네가 예쁜데다 항상 일등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야, 네 아버지와는 아무 상관없어. ”


 “ 그래, 고마워. ”


 

알리사는 트로이의 코트 위쪽 단추를 채워주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 임신 아니어서 다행이야. 나 사실 그 사람 아기 갖고 싶지 않아. 아직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 ”


 “ 결혼 안하면 안 돼? ”


 “ 순진한 소리 하지 마. 바보같이. ”


 “ 그래, 나 바보야. 스베들로프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


 “ 그 런던 얘기? ”


 

 트로이는 알리사에게 교수의 제안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 가는 게 어때? ”



 알리사는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트로이는 잠시 멍해졌다가 알리사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KGB 추천 때문에 구역질이 난다던 게 누구였더라. ”


 “ 어차피 난 타락했어, 강령이나 읊어대는 신문사에서 선전문구나 번역하게 될 테니까. 트로이, 맹세하는데 그게 런던보다 훨씬 나빠. 완전히 위선자가 되는 거니까. ”


 “ 알랴, 진심인데 결혼하지 마. 그 직장도 집어치워. 아버지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네 실력이면 어딜 가나 혼자 잘해낼 수 있어. ”


 “ 다들 그렇게 말하지, 넌 잘해낼 거라고. 그게 꼭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얼마나 속 빈 강정인지 너도 모를 거야. 그냥 결혼하는 게 나아. 난 그냥 옆에 있어줄 남자가 필요한 건지도 몰라. ”


 “ 코스챠가... ”


 “ 코스챠는 동생 같은 앤데 어떻게 잠을 자. 친구들이랑은 결혼 못해. ”

 


 알리사는 웃기 시작했다.

 


 “ 런던 말야, 나 진심으로 얘기한 거야, 트로이. 그게 꼭 KGB 쪽은 아닐 거야. 그냥 통역 일이나 서류 번역 같은 쪽으로 빠질 수도 있어. 너한테는 지금 나가는 게 좋은 일일 수도 있어. ”

 

 “ 너도 스베들로프처럼 생각해? 여기가 답답한 곳이라고? ”

 


 “ 그럼 답답하지 않아? 우리가 왜 갈랴네 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는데, 우리가 괜찮은 곳에서 괜찮게 살고 있다면 왜 그런 허세를 부리게 됐겠어. 우린 말이야, 그냥 벌레 같은 거야. 그것도 머리 가슴 배와 다리가 달린 진짜 벌레도 아냐. 우린 플라스틱과 톱니로 만든 기계 벌레야, 공장에서 찍어낸 완제품들이라구. 심지어 다들 불량품이야. 그냥 회색 벌레들, 공산품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우리가 모인 거야, 그나마 진짜 벌레인 척이라도 해보려고. 너 알지? 난 어릴 때 런던이랑 암스테르담에 살았어. 거기서도 난 조그만 톱니가 달린 벌레였어. 그래도 거기선 숨이라도 쉴 수 있었어. 여기? 네바 강? 운하? 궁전광장? 잘난 척 하지 말라고 해, 레닌그라드 따위. 매장도 안 된 채 몇십년 동안 냄새를 피우고 있는 시체 이름을 달고 있는 도시 주제에... 여기 있는 건 런던에도 다 있어. 여긴 모사품에 지나지 않아. 우리가 그냥 기계 벌레에 지나지 않듯이. 그러니까 트로이, 그냥 런던에 가. 한결 나아질 거야. 여기서보다 훨씬 행복해질 거야. 숨쉬기도 더 편하겠지. ”


 

 “ 나, 난 당을 지지하지 않아. 공산주의를 안 믿어. ”

 


 “ 아무도 안 믿어, 파블릭 같은 사람 빼고는.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가서 그냥 서류를 번역해. 그냥 일이니까. 그건 신념이랑 아무 상관없어. 어차피 넌 그렇게 반항적인 애도 아니잖아. 단 일 년이라도 좋아. 일단 가. ”



 

 트로이는 침을 삼켰다. 알리사는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옳았다. 속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스베들로프의 유리알 같은 눈을 보면서도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 언제나 옳은 알리사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신념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그저 숨을 쉬고 새로운 환경으로 나가기 위한 일일 뿐이다. 그녀의 말 대로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체제 비판자나 반항아인 적이 없었다. 그가 사미즈다트나 금지된 외국 서적들을 읽은 것은 그저 문학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루뱐카, 걔를 루뱐카로 데려갔어. 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작은 방으로. ”


 “ 뭐? ”


 “ 아무 것도 아냐. ”


 

 트로이는 운하 옆 돌계단에 앉았다. 검은 물 위로 드문드문 가로등 불빛이 깜박이고 있었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 불어와 코트 자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 왜 그런 말을 해, 알랴? 왜 날 보내고 싶어 해? 난 그냥 여기 있고 싶어. 너희 곁에 있고 싶은데. ”


 “ 우리하고만 있으면 안 돼. ”


 

 알리사도 그의 곁에 앉았다. 모피 목도리를 풀어 트로이와 자신의 목을 길게 빙 둘러 감았다. 와인과 부드러운 향수 냄새가 코끝에 끼쳐왔다.

 


 “ 다들 자기 삶을 살아. 갈랴랑 료카도, 이고리도, 그 철없는 코스챠도 마찬가지야. 근데 넌 그렇지 않아. ”


 “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일을 하잖아. ”


 “ 학교잖아. 그냥 학교에 남아 있는 거잖아. ”


 “ 나한테도 다른 친구들이 있어. 너희가 모르는. ”


 “ 그래, 다른 친구들.

 


 알리사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나직하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 런던으로 가, 그러면 훨씬 나아질 거야. 쓸데없는 의심도 받지 않을 거야. ”


 “ 무슨 의심? ”


 “ 다른 친구들. ”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손으로 트로이의 손목을 꼭 쥐었다.


 

 “ 조교 몇 명이 거지같은 소리를 하더라. 그러니까, 너하고 이라가 헤어진 다음에 말야. 네가 이상한 친구들하고 어울린다고. 그래서 이라랑 잘 안된 거라고. 그 남자, 물리학부에서 강의하던 사람. 그 사람 얘길 늘어놓고... 그래서 내가 혼쭐을 내놨었어. ”


 

 이사악. 그녀는 이사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 달아나는 것 같았다. 알리사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 아냐, 오해하지 마. 트로이, 난 그런 말 믿지 않아. 괜히 그 계집애들이 이라 편 들어주느라 그런 거야. 난 그냥... ”


 

 알리사가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언제나 순식간에 눈물을 터뜨리는 능력이 있었다.

 


 “ 그건 그냥 네가 너무 다정하기 때문이야. 넌 친구들을 너무 아껴. 그 남자도 그렇고 또 걔도... 네가 그런 눈으로 그 사람들을 보니까 오해를 사는 거야. 진짜 그것 뿐이야.


 “ 그런 눈이라니. ”


 “ 로미오. 네가 로미오를 보는 눈. ”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피 목도리가 바람에 펄럭이며 그와 알리사의 얼굴을 동시에 때렸다. 그는 목도리를 풀어 알리사의 가냘픈 목에 둘러준 후 일어나 운하 쪽으로 급하게 내려갔다. 알리사가 쫓아왔다. 구두 굽이 돌계단 틈에 끼어 하마터면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


 

 “ 미안해. 멍청한 소릴 해서. ”


 “ 아냐. ”


 “ 나 그런 말 하나도 믿지 않아. 그저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게 화가 났을 뿐이야. 다들 벌레라고 했잖아. 그래서 바보 같은 소릴 지껄이는 거라구. ”


 “ 그냥 친구들일 뿐이야. 미샤도. 너도 알잖아. 모두가 걜 그렇게 봐, 우리한텐 없는 걸 가진 애니까. ”


 “ 맞아. 네 말이 맞아. 미안해. 내가 정신 나간 소릴 했어. 결혼 때문이야, 힘들어서 그래. 미안해. ”


 

 알리사가 우는 동안 트로이는 판탄카 운하의 어두운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검은 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저만치에서 순찰 경찰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알리사가 울음을 그쳤을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와 경찰들의 곁을 지났고 연인들처럼 판탄카를 돌아 나갔다.

 

 

 




 

<두번째 이야기 : 아파트의 트로이와 알리사,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신분증이 필요한가? 떠나는 알리사>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알리사가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6월에 파벨과 이혼한 후 그녀는 신문사도 그만두고 두어 달 동안 잠적해 있었다. 트로이조차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연락이 전혀 없어 걱정이 되었지만 알리사의 어머니는 딸이 근교의 친척집에 가 있다고 그를 안심시켰다. 이전 같았다면 어떻게든 행선지를 알아내 찾아갔겠지만 그때 트로이는 격하게 사랑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숨어버린 친구를 위해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이제 생전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입에 물고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알리사의 바짝 야윈 얼굴을 보니 트로이는 친구를 등한시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알리사는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그의 아파트로 찾아와 밤새 울고 갔던 두 달 전보다 몇 킬로그램이나 체중이 준 것처럼 보였다. 유행하는 스타일로 머리를 말끔하게 정돈하고 있었지만 머리칼에는 윤기가 전혀 없었다. 도톰하던 볼 살이 쭉 빠져서 광대뼈가 두드러져 있었고 갈색 눈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갈랴의 집에 모여든 남자들의 가슴을 두근대게 하던 재기 넘치던 공주님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스물다섯 살이 아니라 서른다섯 살은 되어 보였다.


 

 “ 너 박사 과정 시작할 거라면서. ”


“  아, 응... 학교에 남기로 했으니까. ”


 

 알리사는 담배 연기를 가볍게 내뿜었다. 마스카라 사이로 커다란 갈색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갑자기 물었다.


 

 “ 톨랴하고는 이제 안 만나? ”


 “ 봄 되기 전에 헤어졌어. ”


 “ 그래, 말은 안했지만 네가 아까웠어. ”

 


 그녀는 화제에 오랫동안 집중하기가 힘든 듯 말을 멈추고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과 부엌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정리벽이 있는 사람답게 습관적으로 식탁 위에 지저분하게 쌓여 있는 책들을 한쪽으로 차곡차곡 밀어놓고 다 먹은 우유팩을 집어 휴지통에 버렸다.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이 제대로 들어차 있는지도 확인했다. 어릴 때부터 알리사는 항상 그에게 엄마나 누나처럼 굴곤 했다.



 “ 나 런던에 가기로 했어. ”


 

 식탁에 엉덩이를 반쯤 걸치고 앉은 채 알리사가 불쑥 말했다.

 


 “ 뭐, 스베들로프가 말했던 그거? ”


 “ 응. 지난주에 만나서 얘기했어. 어제 구메로프한테 가서 면접도 봤어. ”


 “ 아, 그래.... ”


 

 트로이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자신도 잠시 고민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알리사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런던으로 떠난다고 하니 배신감이 들었다. 그게 자신을 두고 가버리는 친구에 대한 서운함인지, 아니면 당과 정부의 이름으로 지저분한 짓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을 선택한 그녀에 대한 감정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 너 실망했지. ”


 “ 아냐. 무슨 소리야, 축하해. ”


 “ 실망했잖아. 내가 안드로포프 앞잡이가 되고 스파이들의 뒷돈이나 세탁하게 될까봐 화난 거잖아. ”


 “ 그럴 거야? ”


 “ 진짜 바보. 그런 일은 나 같은 풋내기한텐 안 시켜. 그냥 대사관에서 통역이나 할 거야. 내가 그랬잖아, 그냥 서류 일만 들어올 거라고. ”


 “ 모르지, 넌 미인이잖아. 마타하리 같은 일을 시킬지 누가 알아. ”



알리사는 농담을 받아들일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 미인은 없어졌어. 난 팍삭 늙어버린 이혼녀야. ”


 “ 한 집 건너 하나씩 다 이혼하는 세상인데 그게 뭐 어떻다고. 그리고 너 아직 꽤 예뻐. ”


 “ 너한테 그런 말 듣는 건 하나도 기쁘지 않아. 너와 잘 건 아니잖아. ”


 “ 코스챠는 아직도 널 좋아해. ”


 “ 걔가 지금 내 쪼그라든 가슴을 보면 그 마음이 달라질 걸. ”


 

 그런 얘기를 하는 동안 알리사는 가스렌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물을 끓였다. 냉장고에서 달걀과 감자를 꺼내 삶더니 시든 오이와 양파를 찾아내 능숙한 칼질로 잘게 토막냈다.

 


 “ 레몬은 없네. ”


 “ 독신남의 아파트에서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냐? ”


 “ 하긴, 이 정도 있는 것도 놀랍다. 그래도 식초는 있네. ”



 

 알리사는 달걀과 감자를 썰어 으깬 후 소금을 뿌렸다. 오이와 양파를 섞고 마요네즈와 후추와 식초를 쳤다. 순식간에 샐러드를 수북하게 한 접시 만든 후 흑빵과 햄을 두 조각씩 잘랐다.

 


 “ 먹어, 점심도 걸렀을 거 아냐. ”


 “ 나도 방법 좀 가르쳐줘. 내가 만들면 물이 엄청 생기던데. ”


 “ 넌 손재주가 없어서 그래. 가르쳐줘도 안될 거야. ”

 


 언제나처럼 알리사는 가차 없는 진실만 말했다. 트로이는 그런 그녀가 떠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는 알리사가 만들어준 샐러드를 먹었다. 그의 친구는 요리 솜씨가 좋았다.


 

 “ 너도 먹어. 런던에 가려면 몸을 좀 만들어야지. ”


 “ 오다가 카페에서 커피랑 케익 먹었어. ”


 “ 카페인과 당분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아. ”


 “ 네 몸이나 잘 챙겨. ”


 

 그녀는 식탁 위에 쌓여 있는 강의 노트와 메모지들을 무심하게 뒤적이다가 생각난 듯 물었다.


 

 “ 요즘은 글 안 써? ”


 “ 시간이 없어, 재능도 없고. ”


 “ 아니야, 난 네 글 좋아했었는데. 틈나면 계속 써봐, 응? ”


 “ 어릴 땐 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알지. ”


 “ 쥬진스키 같은 멍청이도 벌써 책을 두 권이나 냈는걸. ”


 “ 그래, 증명서를 받은 작가지. ”


 “ 도스토예프스키가 작가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해야 해? 그에겐 그런 신분증 따윈 없었을 게 뻔해! ”


 

한 때 그들의 밤을 하얗게 새게 만들었던 소설의 대사를 인용하며 알리사가 열을 냈다. 트로이는 그녀의 열성에 맞춰 대사를 따라가면서도 우울하게 끝을 꼬았다.


 

 “ 아, 맞아. 도스토예프스키는 불멸이지. 하지만 우린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걸. ”


 “ 그건 모르는 일이지, 지금 어떻게 알아? ”

 


 그녀는 끝까지 불가코프의 대사를 따라가며 친구의 재능을 변호했다. 그건 믿음이라기보다는 우정이었고 트로이는 감동을 받았다.


 

 “ 계속 써, 트로이. 그만두지 마. ”


 “ 시간이 나면 써볼게. ”

 


 그는 자신이 아직도 조금씩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는 작가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재능이 없는 자를 작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다 먹은 샐러드 접시를 빼앗아 싱크대에 던져 넣으며 알리사가 물었다.

 


 “ 걔 여기 와 있어? 발레슈즈가 있네. ”

 


 트로이는 당혹감을 감추려고 애쓰며 느리게 대꾸했다.

 


 “ 아... 전에 하루 자고 갔어, 이사하느라. ”


 “ 이사? 사도바야 쪽에 있었잖아. ”


 “ 지난달에 새 아파트를 줬어. 극장 바로 근처에. ”


 “ 코무날카 아니고? ”


 “ 아니, 복층에 방이 대여섯 개는 돼. 룸메이트는 하나뿐이고. 그 아파트 진짜 대단해. 스몰니의 네 부모님 댁보다 더 넓어. ”


 “ 굉장한데, 일 년 밖에 안된 애가. 정말 스타 대접을 받나보네. 그때 갈랴네 집에서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그냥 형 누나들 틈에 낀 귀여운 꼬마라고만 생각했지. ”

 


 알리사는 똑똑하고 뭐든지 잘 하는 친구였다. 하지만 재능에 대한 판단력은 부족할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다면 트로이에게 글을 쓰라고 간절히 권하면서 미샤를 그냥 어린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룸메이트는 누구야? 지난번처럼 극장 동료야? ”


 “ 그렇대. ”

 


 트로이는 그 룸메이트가 학창시절 동기이며 최근 새 파트너가 된 지나이다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극장에서는 미샤와 지나이다를 볼쇼이의 바실리예프와 막시모바 커플처럼 만들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둘 다 실력도 좋았고 일 년 만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데다 강렬한 외모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미샤가 좀 더 빠르게 뜬 편이었지만 지나이다의 어머니는 키로프의 유명한 무용수 출신이었고 아직도 극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력한 군인이었다.


 미샤는 파트너 발레리나와 한 아파트를 쓰도록 조치한 극장 측의 이른바 세심한 배려에 드러내놓고 분노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그저 가장 편하고 자기다운 방법으로 반항했을 뿐이었다. 이사 후 그는 종종 트로이의 아파트에 와서 자고 갔고 트로이가 이름을 알고 싶지 않은 다른 애인들의 집에서도 밤을 보냈다. 트로이는 지나이다가 그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미샤에게 묻지는 않았다.

 


 “ 런던 가기 전에 사인이라도 받아놔야겠네. 8월에는 공연 없나? ”


 “ 지금 투어 때문에 부다페스트에 가 있어. 바르샤바 거쳐서 비엔나랑 프라하까지 간대. 겨울엔 런던도 갈 것 같다던데. ”


 “ 나한테 감시 업무 맡길 수도 있겠네. 이 누나가 잘 봐주겠다고 전해줘. ”




‘ 그래, 잘 봐줘야 할 거야. 걘 문제아니까. 바깥으로 나가면 더욱 눈에 띄겠지. 튀어나온 못처럼. ’

 


 트로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미샤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은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알리사와는.



 “ 같이 가지 않을래? ”


 “ 런던? ”


 “ 그럼 어디겠어. 나 진짜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야. 구메로프가 사람이 하나 더 필요하다고 했어. ”



 알리사의 눈이 너무나 진지하고 간절하게 빛나고 있어서 트로이는 선뜻 대답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잠시 침묵한 끝에 그는 입술을 축이며 대꾸했다.

 


 “ 나도 너와 같이 가고 싶어, 알랴. 너랑 같이 일하고 싶어. 하지만 난 그게 안돼. 레닌그라드를 떠나고 싶지 않아. ”


 “ 왜? 여기가 대체 뭐라고. 너한테 뭘 해준 게 있다고. ”


 “ 여긴, 그러니까 내 주위의 모든 것, 전부야. ”




 몇 달 전 어두운 침실 안에서 미샤에게 얘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트로이는 자신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미샤는 레닌그라드가 전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다른 소련 시민들은 평생 한번 나가보기도 힘든 해외 도시들로 날아가 춤을 추고 환대를 받는 남자가 이 도시를 자신의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트로이에게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족할지도 몰랐다.



 

 알리사는 화를 내거나 따져 묻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를 엑스레이 광선 같은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알리사가 자신을 투명한 책처럼 읽어냈던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이제 그 책은 페이지가 너무 많고 지리멸렬하게 뒤엉켜 있었다.


 

 “ 그래. 여기 남아도 좋아. 하지만 꼭 글을 써야 해. ”



 그는 왜 알리사가 그토록 집요하게 그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환상을 갖는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너무나도 그를 아끼기 때문에 그럴지도 몰랐다.

 



 알리사는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갔다. 그리고 9월 초가 되자 커다란 여행가방 두 개를 끌고 런던으로 떠났다. 여전히 자작나무처럼 야윈 채, 어두운 붉은색으로 물들여 짧게 자른 새 헤어스타일과 소년처럼 직선으로 떨어지는 재킷과 바지 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트로이는 친구들과 함께 그녀를 전송하러 공항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코스챠가 제대로 고백해보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오래된 짝사랑에 절망해 난폭운전을 하다 교차로에서 버스를 들이받을 뻔 했다. 다행히 주변에는 경찰이 없었고 그들은 잽싸게 샛길로 도망쳤다. 코스챠는 그날 밤 떡이 되도록 취했고 갈랴의 품에 안겨 실연당한 고등학생처럼 엉엉 울었다.

 

 

 


... 


 

 



트로이와 알리사가 어깨를 맞대고 쭈그려 앉아 이야기를 나눴던 운하 계단은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운하변을 따라 걷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에서 알리사가 인용하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문구. 이 에코백에 씌어 있는 문장은 파란색 표시를 한 부분이다.


 

 


..




불가코프와 거장과 마르가리타에 대해 전에 썼던 짧은 원고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3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



이전에 발췌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미샤의 이야기에서도 미샤가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572 (그가 읽었던 불가코프의 문장, 비행기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러브 스토리에 대한 짧은 발췌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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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발췌했던 이야기들 중 알리사가 등장했던 에피소드들은 아래.


썰매 에피소드 : http://tveye.tistory.com/4050

 

 

흑해로 가는 기차 에피소드 : http://tveye.tistory.com/4671

 

 

런던에서 사라진 미샤를 찾으러 간 알리사의 이야기 : http://tveye.tistory.com/2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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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지금 구상하는 글은 미샤가 등장하는 본편이나 외전 우주에 속해 있지 않으니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약간은 연관되는 것 같기도 해서... 사진과 메모들 뒤지다가...

 

종종 발췌해 올렸던 본편 우주 장편(미샤의 친구이자 애인인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옴) 중반부에는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아주 인기많았던 제과점(..이자 지금도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사랑하는 옛날식 제과점) 세베르와 그곳에서 파는 케익에 대한 얘기를 두어번 썼다.

 

세베르랑 거기서 내가 좋아하던 까르또슈까(위의 저 초콜릿 경단 같은 디저트)에 대해 떠올리다가... 아래 부분을 발췌해본다. 세베르와 케익에 대한 얘기만 있는 건 아니고... 미샤와 파트너 발레리나 지나이다의 티격태격 메모도 있고 미샤의 아파트 묘사도 있다. 그리고 미샤도 물론 등장한다.

 

미샤는 단 걸 안 먹지만... 그러나 그 역시 좋아하는 케익이 있긴 있었으니... ㅠㅠ

 

그리고 파트너이자 한 아파트 동거인인 지나이다와의 관계는 이러했으니...

 

소설 중반부. 배경은 1975년 말. 미샤는 스무살이고 키로프 수석무용수로 잘 나가고 있으며 지나이다와는 최고의 파트너쉽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알리나 소모바의 연습실 장면. 파트너들의 연습실 느낌이 좋아서 여기 올려본다. 사진은 alex gouliaev.

 

..

 

 

'세도바'는 지나이다의 성, 맨앞에 나오는 '크류코바'는 당시 키로프 최고의 발레리나로 신입이었던 미샤를 전격 자기 파트너로 발탁했던 인물이다(두딘스카야 같은 존재였음. 물론 내가 만들어낸 인물)

'코무날카'는 공동아파트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12월 하순부터 미샤는 한동안 극장 근처의 자기 아파트에 머물렀다. 크류코바의 부상으로 지나이다가 비엔나와 프라하, 바르샤바 투어에도 투입되었기 때문에 집이 비었고 호두까기 인형에 캐스팅되어 연습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다. 미샤는 그 작품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역을 추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언제나처럼 열심이었다.

 

 

그날은 공연이 없는 월요일이었다. 미샤가 아침에 극장에서 트로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침이라는 것과 전화를 했다는 것 둘 다 드문 일이었다. 그는 혹시 아파트에 자신의 노트와 파란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필름,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초기 단편집이 있느냐고 물었다. 트로이는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부엌 식탁과 책장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노트랑 케이스는 찾았고, 책은 없어. 너 그 책은 우리 집에 가져온 적 없었던 것 같은데? ”

 

“ 너 혹시 ‘백야’ 있어? ”

 

“ 아, 그건 있어. 극장으로 가져다줄까? ”

 

“ 아니, 괜찮아. 금방 집에 들어갈 거라서. 저녁에 들를게. ”

 

급하게 필요한 거라면 집으로 갖다 줄게. 어차피 강의 때문에 나가야 해. ”

 

“ 아, 그럼 부탁해. 고마워. ”

 

 

트로이는 책장 구석에서 ‘백야’가 수록되어 있는 19세기 단편 모음집을 찾아냈다. 오래된 책이라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뜬금없이 왜 그 소설을 찾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샤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해서 학창 시절에도 종종 트로이와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지만 그 대상은 주로 유형 이후 발표한 작품들이었다. 백야는 그의 취향에 비해 지나치게 감상적이었다.

 

 

그는 가방에 책과 필름 케이스, 그리고 표지가 반쯤 접힌 노트를 챙겼다. 미샤는 항상 노트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리허설 중인 춤의 동선을 짜고 리브레토를 재구성하는가 하면 오선도 생략한 채 음표와 기호를 휘갈겨 놓았다. 소설이나 시의 구절 몇 개를 불쑥 적어 놓을 때도 있었고 가끔은 오로지 숫자들만 써내려갔다. 트로이의 눈에 그 노트들은 2차 대전 암호 해독서나 이사악의 물리학 강의 메모보다도 더 복잡하게 보였다.

 

 

가방에 집어넣기 전에 노트를 넘겨보니 춤과 관련된 예의 그 수수께끼 같은 수많은 메모들이 빽빽했지만 중간 중간에 녹색 볼펜으로 휘갈긴 다른 사람의 글씨도 등장했다. 필체와 색깔이 계속해서 같은 것을 보니 동일인이었다. 내용을 보니 파트너인 지나이다가 분명했다. 그녀는 미샤의 메모에 동그라미를 쳐놓기도 하고 커다랗게 가위표를 슥슥 그어놓기도 했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돼,네가 계속 포앙트를 고집하면 아사예프가 혈압으로 쓰러질 거야,그 잘난 앙트르샤 횟수 좀 줄이시지! 따위의 메모가 힘찬 필체로 따라나왔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메모도 등장했다.

 

 

 아까 누가 세베르에서 모코를 한판 사다줬어. 빨리 끝내고 먹자 라는 어쩐지 간절하게 느껴지는 녹색 글씨 아래 평소와는 달리 인쇄체로 또박또박 적어 놓은한조각도 아니고 한판! 몸매 관리 안하시나, 여왕님? 이 이어졌다. 미샤의 반짝거리는 까만 눈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녹색 글씨가 다시 이어졌다. 한판 다 해치우고 10킬로 쪄서 누구 허리를 분질러버릴 테야!

 

메모의 마지막은 다 먹지 말고 나도 한조각만 줘라는 하소연으로 끝났다.

 

 

 

파트너들의 대화에 매료된 트로이는 페이지를 더 넘겨보았다. 평소에 별로 장난기도 없고 애교는 더욱 없는 미샤가 지나이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어쩌면 10여 년 동안 쌓여온 친밀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생리 첫날이니까 알아서 잘해.

 

내가 피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다른데 피나게 해주겠어!

 

 

 

 

제발 넥타이 매고 와, 파리에 가고 싶으면 내 말 들어 !

 

타이 잃어버렸어

 

나가서 사와, 정 안되면 레냐 거 빌려.

 

정장 싫어

 

.. 들어.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주 짧게 휘갈겨 쓴 메모가 있었다.

 

 

일린 오는 걸로 결정. 기뻐?

 

아주!

 

 

 

또 다시 그 이름이 있었다. 일린. 짧고 명료하게 울리는 이름.

 

 

 

그는 강의 자료도 함께 챙겨서 집을 나섰다. 극장 거리까지는 가까웠으므로 걸어갈까 했지만 다시 눈보라가 치고 있었으므로 버스를 탔다.

 

 

잠시 그는 네프스키로 나가 세베르에서 모코를 한조각 살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미샤는 케익이나 초콜릿을 기피하는 편이었지만 트로이는 라리사의 집에 가서야 그가 단 것을 정말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을 제어하는 것뿐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모코는 별로 달지도 않았다, 버터크림과 견과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케익 한조각이 아니라 한판을 그 자리에서 다 해치워도 전혀 문제가 없을 몸을 가진 애가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운다는 게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어릴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여섯 살 이후로는 썰매도 타러 간 적이 없고 스케이트나 스키는 더더욱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축구를 해보기는커녕 제니트와 스파르탁조차 구분 못할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정해진 스트레칭을 마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음식이 싱겁더라도 결코 소금을 더 치지 않았다. 그처럼 자기 제어에 뛰어난 사람이 어째서 규율이 관련된 일이나 애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렇게 무모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미샤 야스민을 샅샅이 이해해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   *   *

 

 

 

 

미샤는 아직 극장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파트 문은 잠겨 있었지만 트로이는 예비 열쇠를 한 벌 가지고 있었다. 미샤가 어머니도 아니고 자신에게 그 열쇠를 건네줬다는 데 트로이는 남몰래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미샤와 지나이다의 아파트는 19세기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완전히 최신식으로 수리되어 있었다. 그 정도로 넓은 집이라면 적어도 서너 가구가 들어와 사는 코무날카여야 정상이었다. 다닐로프가 주택관리국에 수완을 발휘한 것인지, 지나이다의 막강한 부모가 실력을 행사한 것인지, 아니면 드미트리 마로조프가 배후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원래 스타들에게는 그 정도 대접을 해주는 건지도 몰랐다. 널찍한 거실 벽에는 바와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고 나무 마루가 깔려 있었다. 지나이다가 가져온 소형 피아노도 한 대 있었다.

 

 

잠시 트로이는 몇 년 전 타냐의 생일에 미샤가 늦게 도착한 벌로 노래를 불러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아마 72년이었던 것 같았다, 미샤가 학교에 다닐 때였으니까. 그때 그는 지겨운 생일 축하곡 대신 타냐가 좋아하는 데이빗 보위의 불경스러운 노래를 불렀는데 기억은 흐릿하지만 ‘The man who sold the world’ 였던 것 같았다. 기타 대신 피아노를 치면서 불렀는데 그때 트로이는 그 애가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노래를 하는 것도 처음 들었다. 학교에서 배웠는지 피아노를 꽤 잘 쳤다. 노래는 말투와 똑같았다, 나직하고 또렷하고 시를 읊는 것처럼 근사하게 불렀다. 타냐는 좋아서 반쯤 울었고 다른 친구들은 반주자를 찾아낸 게 기뻐서 족히 한 시간 가까이 미샤에게 각종 로큰롤 연주를 시켰다. 그때 트로이는 그 애를 향한 은밀한 갈망으로 몸을 태우고 있었고 한동안 보위 노래만 들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타냐의 집에 들르면 피아노 쪽은 쳐다볼 수도 없었다.

 

 

미샤와 지나이다는 양쪽 끝에 있는 침실을 쓰고 있었다. 호화스런 아파트답게 각각 욕실이 딸려 있었다. 두 침실 사이에도 방이 하나 더 있었는데 손님용 침실로 쓸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지나이다의 의상과 각종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미샤는 현관에서 제일 가까운 쪽에 있는 방을 그런 용도로 썼다. 그는 기사도를 발휘해 지나이다에게 남향의 넓은 방들을 내주고 아파트 내부도 그녀의 강렬하고 화려한 취향대로 꾸미도록 내버려두었다. 하긴 집에 제대로 머무는 적이 없으니 신사답게 행동한 거라기보다는 그저 귀찮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천정이 매우 높은 집이었는데 나선계단을 따라 조그맣게 복층 구조로 되어 있었고 평소에는 비워두는 손님용 침실이 하나 있었다.

 

 

부엌은 넓고 밝았으며 거실 한쪽에는 조그만 방이 하나 더 있었다. 거실의 바를 제외하고는 둘이 유일하게 공동으로 쓰는 공간이었는데 일종의 서재였다. 세 개의 책장에 발레와 음악, 미술, 극장 관련 서적들과 레코드, 테이프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가 두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장식 술이 달린 꽃무늬 숄이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고 나머지 의자에는 낯익은 노트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지나이다와 미샤가 그 조그만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열띠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자 이해할 수 없는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애 감정이나 성적 긴장감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하긴 그는 지나이다의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으므로 속단할 수도 없었다.

 

 

 

거실의 티 테이블 위에 노트와 필름 케이스, 책을 내려놓고 막 나가려고 했을 때 문이 열리고 미샤가 들어왔다. 극장에서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온통 하얗게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현관에서 모자와 코트를 벗어 눈을 대충 털어냈다. 눈썹과 속눈썹, 입술 위에도 눈과 얼음이 붙어 반짝거렸다. 뺨과 턱에는 붉은색 얼룩이 있었다.

 

 

“ 목도리는 어쨌어? ”

 

“ 극장 나오는데 처음 보는 여자애들이 달려들어서 벗겨갔어. ”

 

“ 그나마 모자는 지켰네. ”

 

“ 머리 뜯길 뻔 했어. 단추는 몇 개 뜯겼어. ”

 

“ 얼굴에 묻은 건 뭐야, 립스틱이야? ”

 

 

미샤가 현관에 붙어 있는 거울을 힐끗 보더니 짜증도 내지 않고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 다닐로프가 차 줬을 때 그냥 받지 그랬어. 얼굴 다 알려졌는데 그렇게 걸어 다니다간 팬들한테 진짜로 봉변당한다. ”

 

“ 그래, 차를 사긴 해야겠다. ”

 

 

순순히 동조하면서 미샤가 하품을 했다. 욕실 쪽으로 걸어가면서 스웨터를 벗고 나머지 옷들을 하나하나 벗어 떨어뜨렸다. 왼쪽 어깨와 등 사이에 달걀만한 멍이 들어 있었다. 색깔을 보니 새것이었다.

 

 

“ 등은 왜 그래? ”

 

“ 아까 스텝이 꼬여서 자빠졌어. ”

 

“ 호두까기가 그렇게 어려워? ”

 

“ 아니, 그거 말고. 나 혼자 뭐 좀 연습하다가. ”

 

“ 너도 그렇게 넘어지는구나. ”

 

연습할 땐 많이 넘어져. 그래도 지나를 떨어뜨린 적은 없어서 다행이야. ”

 

“ 지나 말고 다른 여자들은 떨어뜨린 적 있어? ”

 

음, 그때 이바누슈카 리허설 하다가 손이 미끄러져서 옥사나를 제대로 놓친 적이 있어. 안 다쳐서 정말 다행이었지. 그래서 옥사나가 날 별로 안 좋아해. ”

 

의외네, 그 여잔 지나보다 더 조그맣잖아. 난 폴리나일 거라고 생각했어. ”

 

“ 폴리나는 테크닉이 좋다니까 왜 아무도 안 믿는지 모르겠네. 키가 180센티인 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닌데. ”

 

“ 어쨌든 어깨 다쳤잖아. ”

 

“ 폴리나 때문이 아냐, 연습할 때 내가 균형을 잃어서 그랬어. ”

 

 

어깨를 한쪽으로 돌리면서 미샤가 욕실로 들어가려다 트로이 쪽을 돌아보았다.

 

 

“ 강의 언제야? ”

 

“ 아, 지금 가야 해. 티 테이블 위에 책이랑 다 놔뒀어. ”

 

“ 고마워. ”

 

“ 넌? 다시 극장에 갈 거야? ”

 

“ 아니, 연구해볼 게 있어. 좀 자고 나서. ”

 

“ 그래, 눈 좀 붙여라. 며칠 못 잔 얼굴이네. ”

 

“ 얼굴은 그 아가씨들이 쥐어뜯어서 그런 거야. ”

 

“ 그래도 다 네 관객들이니 받아들여. 네 무대를 좋아하잖아. ”

 

“ 글쎄, 그건 그냥 가수나 배우 사진을 모으는 것 같은 거야. 대부분의 관객들은 극장에 꿈을 꾸러 와. 환각을 보러 오는 거지. 원하는 걸 주지 않으면 돌변할 거야. ”

 

“ 설마 무대에 불이라도 지르겠냐. ”

 

“ 괜찮은 관객들이라면 배우를 찢어죽이겠지. ”

 

“ 그런 말 하지 마. 관객들 무시하지 말고. 어쨌든 널 보러 오는 거니까. ”

 

“ 무시하지 않아. 내가 그랬잖아, ‘괜찮은’ 관객들이라고. ”

 

 

이제 옆으로 번져버린 붉은 얼룩과 눈 아래 깊게 패인 그림자 너머 아직도 그 황폐하고 어두운 표정이 남아 있었다. 잠시 그는 강의를 빼먹고 이곳에 남아 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미샤가 너무 피곤해 보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자도록 내버려두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공연 목요일이지? 타냐랑 보러 갈게. ”

 

“ 응, 그때 봐. ”

 

 

미샤가 욕실로 들어간 후 트로이는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있는 옷가지들과 가방을 주워서 소파에 올려놓았다. 지퍼가 열린 가방에서 리본 달린 곰 인형과 캔디 상자들과 향수를 뿌린 예쁜 편지 봉투 몇 개가 쏟아졌다. 봉투에 들어 있지 않은 카드도 한 장 있었는데 호기심에 펼쳐보니 피처럼 새빨간 잉크로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세도바와 당장 헤어져요!

안 그러면 그년한테 황산을 끼얹을 거야!

 

 

 

그 끔찍한 카드를 내려놓은 후 그는 코트를 입었다. 왜 그 메시지를 읽었는데도 지나이다가 아니라 미샤가 걱정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지나이다는 그런 협박을 두려워하기에는 너무나 당당한 여왕님처럼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니콜카 이후 그는 미샤가 어디선가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내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런 무서운 일이 생긴다면 정부들 중 하나의 짓이겠지만 카드를 보고 나니 극성팬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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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들의 연습실 사진 두 장 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디아나 비슈뇨바. 신데렐라 리허설. alex gouliaev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와 도로테 질베르의 라 바야데르 리허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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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트로이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가져다달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 챕터에서 볼쇼이에서 온 안무가 일린이 미샤를 위해 이 작품을 안무해주기 때문이다. 일린에 대한 이야기는 이 writing 폴더에서 여러번 발췌했으므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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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부분에서 인용되는 극성팬의 카드 협박에 대한 얘기는, 사실 세르게이 필린 황산투척 사건보다 이전에 쓴 것이다. 광팬들이 많은 미샤의 특성상 저런 협박편지를 많이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볼쇼이에서 필린 황산 테러 사건이 일어나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 황산까지 똑같다. 역시 저 동네 무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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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트는 페테르부르크 축구팀, 스파르탁은 모스크바 축구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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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가 '라리사의 집'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은 전에 발췌한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라리사는 트로이의 아버지가 재혼한 리가의 여인이다. 트로이와 미샤는 그 집에 가서 저녁을 얻어먹는다.

그 이야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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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이다와 미샤가 주고받은 메모와 트로이의 상념 속에 등장하는 세베르와 모코에 대한 메모는 아래... 몇년 전 따로 글에 등장하는 장소나 주요 소재에 대해 정리할때 개인용 블로그에 썼던 메모이다.

 

 

 

<'세베르'와 '모코'에 대한 메모 : 2013년 9월>

 

 

 

 

 

 

 

러시아어로 세베르(СЕВЕР), 즉 북쪽이라는 뜻의 유명한 디저트 카페이다. 올해 110년이 되었으니 소련 전환 이전에 생긴 곳인데 지금도 유명하다.
 

네프스키 대로 한복판의 어느 건물 반지하에 위치한 세베르는 딱 러시아인들이 좋아하는 디저트들과 빵, 케익, 쿠키가 가득한 곳이다.


 

지금은 리모델링을 해서 널찍하고 쾌적한 카페로 바뀌었지만 내 기억 속 90년대말 세베르는 어두컴컴한 조명과 불친절한 점원들, 높은 원탁을 둘러싸고 선 채 종이접시에 얹힌 조각 케익(삐로즈노예)이나 파이, 까르또슈까를 먹고 종이컵에 담긴 싸구려 티백 홍차나 진한 커피에 설탕을 부어먹는 러시아인들로 득실거리던 아주 소련답고 러시아다운 카페였다.
 


 

지금은 페테르부르크에도 워낙 세련되고 현대적인 카페들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리모델링을 했어도 세베르는 좀 아날로그 풍이고 '옛날 카페'란 느낌이 난다. 파는 케익이나 과자도 그렇고. 그래서인지 여전히 중년 부인들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찾는다. 


 

나는 이 소설의 중반부에서 세베르를 한번 등장시켰다. 트로이가 할머니를 위해 까르또슈까를 사러 갔다가 카페 구석 원탁에 모여 차를 마시며 얘기 중이던 미샤와 그의 극장 동료들과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물론 트로이와 미샤는 레닌그라드 토박이였으므로 세베르는 아주 친숙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세베르에서 미샤는 트로이를 자기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그가 좋아하는 메도빅과 커피를 권해준다. 이곳에서 트로이는 그에게 아주 불편한 존재로 각인되는 볼쇼이 출신 안무가 스타니슬라프 일린을 소개받는다.

 

 

 

 

 

 

 

 

요즘은 이렇게 환하고 널찍한 카페로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절대 이렇지 않았다. 훨씬 좁고 어두웠으며 의자도 없이 둥글고 높은 테이블들만 몇개 늘어서 있어서 사람들이 그걸 둘러싸고 와글거리며 케익과 차를 먹었다.

 



이 사진은 작년(2012년)에 내가 갔을 때. 까르또슈까랑 홍차 먹는 중. 이젠 종이접시도 종이컵도 아니다!

 

 

 

 



이것은 모코. 세베르에서 유명한 케익 중 하나. Mokko(모코)라는 케익으로 버터크림, 커피, 코냑, 초콜릿 등이 들어간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꽤 투박하고 촌스러운 옛날 아날로그 풍 케익인데 의외로 아주 맛있다. 90년대 페테르부르크에 살 때 가끔 조각케익으로 사먹었고 생일날에는 통 크게 조그만 케익을 한 판 사기도 했다.


 
이번에도 사와보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더 이상 모코는 조각 케익으로는 팔지 않고 저렇게 한 판 단위로만 팔고 있었다 ㅠㅠ

 

소설에서 미샤와 지나이다는 둘 다 이 케익을 좋아하는데 단 것을 일단 먹고 보자 주의의 지나이다와 달리 미샤는 스파르타식으로 '단거 안먹어!' 하고 끝끝내 안 먹고 버티는 타입이다. (하지만 저 모코를 매우 먹고 싶어하는 약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이 사진들은 지금 세베르에서 팔고 있는 케익들.


 
물론 티라미수 같은 '서구식', '요즘' 케익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련 시절부터 팔던 전통적 케익들이다. 모양도 그렇고 맛도 꽤나 소박하고 달콤한데 먹을수록 정감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버터크림이 주종을 이룬다.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고 딱 '옛날; '아날로그' 맛이 난다.

 

 

 

 

** 위의 메모에서 언급되는 세베르에서 트로이가 미샤의 친구들과 일린을 만나는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발췌해 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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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샤가 타냐의 생일에 불렀던 데이빗 보위의 노래 'The man who sold the world’ 실제 노래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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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