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중 - 빨강머리가 문제라고 치려는데 + about writing2020. 9. 11. 21:59
몇 달 동안 써온 새해 이야기들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가장 마지막의 일곱번째 에피소드를 쓰고 있는 중인데 빠르면 이번 주말, 좀 늦으면 다음 주말 정도에는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발췌한 두 문단은 그 중 네번째 에피소드의 일부이다. 네번째 이야기는 유일한 1인칭으로 서술된다. 주인공은 지나. 전에 이 이야기의 일부를 발췌한 적이 있는데(https://tveye.tistory.com/10420) 오늘 올리는 파트가 조금 더 앞부분이다. 키로프 극장의 홀에서 새해 전야 리셉션이 열린다. 정치인들, 노멘클라투라 발레 애호가들, 업계의 귀빈들이 지나와 미샤의 테이블로 모여든다. 그리고 지나의 쫑알쫑알....
앞부분에 언급되는 인물들은 모두 미샤의 후원자들. 마이야 필리포브나는 이전에 발췌한 글들에도 몇번 이름이 등장했다. 이 사람은 본격적인 등장씬은 거의 없고 항상 이렇게 이름이 언급되는 타입의 등장인물임. 레냐는 지나와 미샤의 동기 무용수. 타마라는 발레단 코디네이터. (가브릴로프 이야기에 나오는 발레리나 타마라와는 다른 인물). 마이야가 '나타샤'라고 부르는 사람은 지나의 엄마인 나탈리야 아시모바. 나타샤는 나탈리야의 애칭이다. 지나는 엄마도 유명한 발레리나였음.
사진은 디아나 비슈뇨바. (빨강머리는 아니지만~) 사진사는 Mark Olich.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진주목걸이를 늘어뜨린 마이야 필리포브나와 문화국 책임자인 카테리나 바랸체바, 거기에 알렉산드르 고르차긴 장군까지 합류하면서 우리 테이블은 순식간에 미샤의 팬 미팅 현장으로 변모했다. 레닌그라드 예술계의 대모인 마이야는 발레학교 시절부터 미샤를 열렬히 후원하고 있었는데 나를 볼 때마다 미간에 우아한 주름을 잡으며 ‘우리 미셴카에겐 저런 빨강머리 말괄량이보단 좀 더 부드러운 인상의 파트너가 낫지 않겠어?’ 하고 투덜대곤 했다. 극장 동료들도 다들 들은 적이 있는 불평이어서 레냐는 마이야 필리포브나가 옛날에 붉은 머리 여자에게 애인을 뺏긴 적이 있어서 그럴 거라고 농담을 했고 타마라는 마이야가 원래부터 남자 무용수들을 편애한다고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었다. 이 업계에서는 가장 믿을만한 선배인 엄마의 얘기에 따르면 마이야는 예전에 엄마의 무대를 보고서도 ‘어휴, 나타샤는 파트너들을 다 잡아먹을 것 같아. 우아한 맛도 없고 키트리나 추면 모를까 저런 백조가 어디 있어!’ 하고 악담을 늘어놓았다고 하니 아무래도 레냐의 말에 신뢰가 간다. 빨강머리 여자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덜 나쁘다.
이렇게 다른 동료들은 위로를 해줬는데 막상 당사자인 미샤는 내가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서 그렇게 싫은 티를 내야 하는지’ 하고 투덜대자 ‘못 춰서 맘에 안 든다고 한 건 아니잖아. 그럼 됐지 뭐’ 라고 대꾸해서 나에게 옆구리를 한 대 쥐어박혔다. 하긴 엄밀히 말하자면 미샤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의 위로였을 것이다. 마이야는 무용수들의 실력에 대해서는 정말 칼 같은 여자였고 때로는 루바노프스카야나 무라비요바 같은 유명 평론가들보다도 더 정확하게 핵심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더럽게 춤도 못 추는 풋내기’, 혹은 ‘파 드 부레도 제대로 못 하는 키로프의 수치’ 따위의 무시무시한 혹평 대신 그저 ‘인상 센 빨강머리 말괄량이’ 정도만 되풀이하는 것은 차라리 칭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about wri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린과 K로 시작하는 곳 + 트로이의 운하 돌계단 (0) | 2020.09.19 |
---|---|
글을 마친 직후, 아주 짧은 메모 (0) | 2020.09.13 |
쓰는 중 - 섞어 먹는 건 안 좋아하는 사람 + (2) | 2020.09.05 |
쓰는 중 - 아무 때나 와도 되는 미샤와 모레 와야 하는 트로이 + (6) | 2020.08.30 |
쓰는 중 - 의사 선생에겐 어쩐지 불공평한 관심사들 + (2) | 2020.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