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

« 2024/4 »

  • 28
  • 29
  • 30

 

 

 

지난달에 몇 주 동안 주말에 쓴 아주 짧은 단편을 올려본다. 제목은 '핀란드 우하'. 우하는 생선 수프이다. 각종 생선과 야채를 넣어 끓이는데 보통 우하라고 하면 맑은 국물의 수프이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대구지리나 복지리 같은 것. 정석으로 끓이자면 생선뼈와 머리로 육수를 내고 비린내를 날리기 위해 보드카도 들어간다. 핀란드식 우하는 크림을 넣어서 끓이는 생선 수프이다. 나는 맑은 우하를 좋아하지만 몇년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진눈깨비 오던 날 길을 잃고 헤매다 꽁꽁 얼었을 때 어느 카페에 들어갔다가 핀란드 우하를 먹고 몸이 녹았던 기억이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핀란드 우하와 너무나도 친절했던 청년 데니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단편은 아주 짧다. 12폰트로 A4용지 9~10페이지 가량. 플롯도 거의 없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었는데 몇주 전 저녁에 아무런 기승전결 없이 그저 단어 몇개와 한두 줄의 대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나는대로 대화들을 적어나갔고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어떤 글들은 그냥 그렇게 시작된다.

 

 

짧은 파편 스케치이다. 사실 독립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다. 오랫동안 쓰고 있는 미샤와 레닌그라드, 가브릴로프 우주에 속해 있다. 이 글의 배경은 1970년대 초, 소련 레닌그라드이다. 예전에 썼던 레닌그라드 장편(미샤의 친구 트로이가 심리적 화자로 나온다)과 배경이 같고 등장인물도 그 글에 나왔던 알리사와 미샤이다. 화자는 알리사. 애칭은 알랴. 트로이와 가장 친한 친구이고 레닌그라드 국립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트로이와 함께 문학 모임을 조직해 외국 문학을 읽고 사미즈다트(지하문학)와 금지문학들을 돌려보며 토론하는 인물이다. 친구들과는 달리 노멘클라투라 집안의 딸이고 어릴 때는 정치가인 아버지를 따라 외국 생활을 좀 했다. 알리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예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아래 글에 이름만 언급되는 갈랴, 료카, 코스챠, 이고리, 스베타 등은 모두 이 문학 모임 멤버들이다. 이 글에서 미샤는 아직 발레학교 학생이다. 아파트 주인은 갈랴와 료카 부부이다. 예전에 쓴 레닌그라드 장편은 트로이와 미샤가 갈랴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문학모임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어느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갈랴의 아파트에서 문학 모임이 열린다. 다들 만취해 뻗는다. 알리사 혼자 깨어 있다. 그리고 미샤가 문을 두드린다. 이야기는 짧고 가볍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핀란드 우하






 

 

 

 초인종은 고장 나 있었다. 갈랴는 2주일째 출장 중이었고 료카는 초인종을 고칠 줄 몰랐다. 수리 요청 서류를 쓰기가 싫다고 했다. 문을 잠그지 않으면 된다고 태평하게 굴었다. 결국 트로이가 서류를 써서 관리사무실에 갔다. 네 번쯤 갔고 수리 접수하는데 사흘이 걸렸다. 고치려면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어차피 불편한 건 없었다. 료카 뿐만 아니라 갈랴도 문을 잠그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임은 툭하면 열렸다.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별의별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드나들었다. 문제는 아파트 곳곳에 널려 있는 지하출판물들과 우리 번역 원고들이었다. 참다못해 내가 ‘제발 문 좀 잠가! 경찰들이라도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그래!’ 하고 성질을 내자 이고리가 ‘괜찮아, 나랑 트로이가 다 찢어서 먹어버리면 돼. 보드카 한 병만 있으면 금방 해치울 수 있으니까 5분만 벌어줘. 네가 미인계를 쓰면 되겠네.’ 라고 농담을 했다. 발칵 화를 내려는데 료카가 그 하염없이 상냥한 표정으로 빙긋 웃는 바람에 나도 결국 흐지부지 웃어버리고 말았다. 료카가 그렇게 유순하게 웃으면 너무나도 예세닌을 닮아서 나는 금방 허물어져버린다. 트로이는 나에게 ‘그런 게 어디 있어. 넌 예세닌 좋아하지도 않잖아. 비논리적이야’ 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무슨 소리, 나는 예세닌을 좋아한다. 외모만. 

 


 그래서 2주일 동안 문을 벌컥벌컥 열거나 발로 걷어차는 녀석들에게 익숙해진 나머지 처음에는 노크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늦은 밤이었고 눈보라 때문에 창문이 엄청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술에 떡이 되어 나자빠져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건 나와 코스챠 뿐이었다. 우리는 누군가가 필사해 온 브로드스키 시들을 함께 읽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코스챠는 너무 취해서 그게 단어인지 가게 전표 숫자인지 구분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그래, 알랴. 네가 다 맞아. 참 좋아’ 하고 추임새를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트로이는 그날 없었다. 있었다면 같이 재미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을 텐데. 

 


 꼬맹이는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노크를 했다. 마침내 나는 긴가민가하며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눈썹이 하얗게 얼어붙고 입술이 파래진 미샤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 다 자는 줄 알았어. 그냥 돌아갈까 했는데. ”

 

 

 “ 문 열려 있었는데. ”

 


 “ 예의를 지키느라. ”

 


 “ 예의바른 꼬마는 새벽 한시에 남의 집 문을 두들기지 않아. ”

 


 “ 그래도 소리치지는 않았잖아. ”

 


 “ 빨리 들어와. 얼어 죽겠네. ”

 

 


 미샤는 순식간에 모자와 목도리와 코트를 벗었다. 작은 눈 폭풍을 몰고 들어온 것 같았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그래도 부츠를 벗고 슬리퍼를 신을 때 보니 양말은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꼬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 신발은 좋은 거 신거든. ”

 


 “ 그래야겠지. 발로 먹고 살아야 되잖아. ”

 


 “ 음, 굳이 안 그래도 당이 먹여 살려주긴 할 거야. 소련 시민인데. ”

 


 미샤가 다시 한 번 활짝 웃었다. 이 녀석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돼먹지 않은 농담을 좋아한다. 나중에 키로프에라도 가면 저 말버릇 때문에 고생하게 될 것이다. 아니, 볼쇼이에 갈지도 모르지. 어쨌든 여기 우리끼리야 상관없다. 

 

 


 나는 미샤를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코스챠의 재킷을 낚아채 꼬마의 어깨에 뒤집어 씌웠다. 미샤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제대로 무용수 티를 냈다. 평소에는 애들이 아무리 ‘피루엣 한번만 보자. 점프면 더 좋고...’ 따위 간청을 해도 그냥 웃어넘기곤 했는데. 지금은 꽁꽁 얼어붙은 채 연달아 재채기를 하고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무대 위의 왕자님이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귀여운 꼬맹이 같으니. 이 모습을 타냐가 봤어야 하는 건데. 

 


 
 찻물을 올리려고 보니 주전자도 없고 빈 냄비도 없었다. 전부 설거지통에 쌓여 있었다. 아니, 주전자는 아까 이고리가 깔고 앉아 찌그러뜨렸다. 료카는 하고많은 살림살이 중 하필 주전자냐며 울상을 지었다. 갈랴가 탈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저 주전자를 도로 펴놓든지 아니면 어디서 하나 구해 오라고 투덜거렸다. 초인종 고장 난 건 아무렇지도 않아 하면서 기껏 주전자 하나에 세상 무너진 것처럼 구는 게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물을 끓이기가 어렵게 되자 나도 이고리를 한대 쥐어박고 싶어졌다. 그렇다고 설거지를 하기는 더 싫었다. 렌지 위에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저녁에 스베타가 가져왔던 생선 수프가 좀 남아 있었다. 박박 긁으면 한 접시 정도 나올 것 같았다. 크림이 굳어서 엉겨 있었기 때문에 물을 좀 부었고 숟가락으로 살살 저으며 데우기 시작했다.

 


 미샤는 차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카펫도 깔려 있지 않은 부엌 바닥에서 슬리퍼를 신은 채 타닥타닥 발을 구르고 팔을 이리저리 뻗어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옆으로 돌렸다 난리였다. 어깨에 걸쳐줬던 모직 재킷이 두터운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결국 나는 꾸짖었다.

 


 “ 먼지! ”

 


 “ 창문 열면 되는데. ”

 


 “ 집안까지 시베리아로 만들 셈이야? ”

 


 “ 아 그러면 안 되지. 마가단... ”

 


 미샤는 잠잠해졌다. 팔짝팔짝 뛴 덕에 몸이 좀 녹았는지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나는 다 데워진 생선 수프를 접시에 부었다. 

 

 


 수프 접시를 밀어주었을 때 꼬맹이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빵이라도 곁들여줘야겠다 싶어 찬장을 뒤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미샤가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 핀란드 우하야? 에이... ”

 


 “ 투정하지 말고 그냥 먹어. 꽁꽁 얼었잖아. ”

 


 “ 난 그냥 우하가 좋은데. 크림 넣은 건 별로야. ”

 


 “ 맑은 우하는 노인네나 보드카 마실 줄 아는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거야. 넌 아니잖아. ”

 


 “ 뭐가 아니야? ”

 


 “ 보드카, 못 마시잖아. ”

 


 “ 무슨 소리. 마실 수 있어. 세 잔까지는 거뜬해. 많이 봤으면서. ”

 


 “ 거짓말 안 통해. ”

 


 나는 반쯤 말라붙은 흑빵 두 조각을 미샤의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미샤는 숟가락조차 들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까만 두 눈에 작은 파란 불빛이 반짝거렸다. 목덜미 어딘가가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언제부터 알았어? ”

 


 “ 뭘? ”

 


 “ 나. 술 못 마시는 거. ”

 


 “ 처음부터. ”

 


 “ 다들 모르던데. ”

 


 “ 난 ‘다들’이 아니야. ”

 


 “ 안드레이도 모르던데. ”

 


 “ 트로이라고 불러. 걔 그 이름 싫어해. ”

 


 “ 난 좋은데, 그 이름. 안드레이 공작은 별로지만 우리 안드레이는 좋아. ”

 

 


 나는 미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애와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고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사실 그랬다. 우리는 항상 필사 원고나 갱지 인쇄본을 놓고 토론을 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와 트로이가 이야기를 했고 꼬맹이는 듣고 있었다. 이따금 질문을 하는 게 전부였다. ‘이건 어떻게 읽는 거야?’, ‘세 번째랑 네 번째 행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떻게 돼?’ 등등. 미샤는 말수가 적은 애였다. 

 


 트로이는 그 애와 따로 만나 번역 노트를 보여주고 책도 같이 읽곤 했다. 나는 미샤와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 애에게 나는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는 똑똑한 누나였다. 그리고 나는 트로이만큼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은 성격도 아니었다. 타냐처럼 그 애의 재능에 경탄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발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극장에는 가끔 갔지만 무용보다는 연극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미샤에게는 어딘가 좀 신경을 긁는 구석이 있었다. 한마디로 좀 건방졌다. 하긴 어릴 때부터 무대에 올라간 데다 누구에게나 잘한다 잘한다 하고 인정을 받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트로이는 꼬마의 그런 면에 매료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미샤는 여전히 수프를 뜨지 않았다. 흑빵을 조금 뜯어서 먹고 있을 뿐이었다. 뺨이 불그스름했다. 다시 재채기를 했다. 

 


 “ 수프 먹으라고 했잖아. ”

 


 “ 모레 무대 올라가야 돼. 크림은 좋지 않아. 고지방. ”

 


 “ 그냥 먹어, 그깟 지방질 이틀이면 다 녹아 없어져. 핀란드 우하가 얼마나 맛있는데. 크림 들어 있어서 부드럽고 고소해. 몸도 따뜻해질 거야. 연어랑 대구가 들어 있어. 파슬리랑 우끄롭도. 스베타네 할머니가 끓여놓은 거 몰래 한 냄비 퍼왔댔어, 우리는 아까 다 한 그릇씩 먹었어. ”
 

 

 


 꼬마는 수프를 한 숟갈 떠서 먹었다. 까만 눈에 구슬 같은 광채가 돌았다.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먹어보니 맛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샤가 뜬금없이 물었다.

 

 


 “ 알랴, 핀란드 가봤어? ”

 


 “ 가봤지. 가깝잖아. 너는? ”

 


 “ 엄마가 그러는데 어릴 때 아빠랑 엄마랑 같이 갔었대. 기억은 안 나. 너는 핀란드가 좋았어? ”

 


 “ 글쎄. ”

 


 “ 그러면 어디가 좋았어? 넌 어릴 때 외국에 살았잖아. 여기저기. ”

 


 “ 나는 런던이 좀 나았어. 암스테르담은 싫었고. ”

 


 “ 왜? 난 가보고 싶어, 암스테르담. 여기처럼 운하도 있고. ”

 


 “ 그래서 싫었어. ”

 

 


 나는 식탁 한가운데 놓여 있던 술병을 끌어당겼다. 기적적으로 보드카가 남아 있었다. 한 잔 따라서 마셨다. 미샤는 내 입술에 잔이 닿는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갈망하는 눈빛으로 보였다. 내가 아니라 알콜을.

 

 


 “ 난 그래서 가보고 싶은데. 운하. 암스테르담. 아빠는 런던에 가본 적이 있다고 했어. 엄마가 말해줬어. 우리 엄마는 불어 공부했는데 프랑스에는 못 가봤대. 엄마는 모든 곳이 같을 거라고 했어. 그럴까? 런던과 암스테르담과 레닌그라드, 헬싱키가 같았어? ”

 

 


 보드카는 뜨거운 칼처럼 목구멍을 찌르고 태웠다. 말라서 딱딱해진 흑빵 조각을 오래 씹어 넘기자 취기 대신 축축하고 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약간 달콤하면서도 구수하고 시큼하고 전반적으로는 씁쓸한 맛이 입 안과 목구멍 전체를 채웠다. 말 그대로, 흑빵의 맛.

 

 


 “ 아니, 같지 않았어. 그런데 똑같이 지루했어. ”

 


 “ 도시가? 사람들이? ”

 


 “ 사는 게. ”

 


 “ 그땐 어렸잖아. 어떻게 그래? ”

 


 “ 인생은 어른이든 어린애든 똑같은 거야. ”

 


 “ 아니, 사는 거 말고. 지루하다는 거. 애들일 땐 시간이 빨리 가는데. 모든 게 빨리 달아나. 안 가본 곳들도 너무 많아서 매일 새롭게 길을 잃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엄마랑 아빠, 친구들도 있고... ”

 

 “ 그거랑 지루한 건 다른 거야. ”

 


 “ 뭐가 다르지? 문학적인 표현인 거야? ”

 


 “ 아마도. ”

 


 “ 흐음. ”

 

 


 우리는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미샤는 진한 크림이 엉겨 있는 뜨거운 수프를 떠먹었다. 먹다가 숟가락을 놓쳐서 테이블보에 연어 부스러기와 감자조각을 흘렸다. 꼬마는 빵 끄트머리로 크림 얼룩을 닦았다. 테이블보가 아니라 자기 입술에 묻은 자국을. 별처럼 반짝이는 까만 눈 어딘가에 취기가 어려 있었다. 그때에야 나는 이 망나니 녀석이 이미 다른 곳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퍼마시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그러니까 살점이 떨어져 나갈듯 추운 길거리를 쏘다니고 아무도 문을 안 열어주는데도 줄기차게 노크를 해대고 실없는 소리들을 지껄이고 있는 거겠지. 술김에. 언제부터 나랑 이렇게 얘기하는 사이였다고. 말썽쟁이 꼬맹이 같으니. 기껏 열일곱도 안 된 주제에, 졸업하려면 일 년이나 남았는데 허세만은 이미 하늘을 찔렀다.

 

 


 나는 새 잔을 꺼내왔다. 이 집에 딴 건 몰라도 보드카와 술잔만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갈랴와 료카는 은근히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잔에 보드카를 가득 따라서 미샤에게 건네주었다. 꼬마는 거부하지도 않고 잔을 받아 홀짝 마셨다. 쉬지도 않고, 한방에 끝까지. 그리고는 기침이 나오는 걸 숨기려고 수프를 잽싸게 두 숟가락이나 떠먹었다. 그래봤자 눈가와 코가 새빨개지고 있었다. 

 


 
 한 잔 더 따라주었을 때 미샤가 노래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 그러면 새 수프로 바꿔줘. 크림 든 거 말고. 맑은 우하로. 나 지금 보드카 마시잖아. ”

 


 “ 아니, 크림 든 우하도 보드카랑 어울려. 수 쓰지 말고 다 먹어. ”

 


 “ 나 사실 노인네 입맛인데. ”

 


 “ 웃기지 마, 아이스크림 좋아하면서. ”

 


 “ 알랴는 엄마 같구나.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내가 으깬 감자 먹기 싫다고 우니까 감자 다 안 먹으면 아이스크림 안 준다고 했었지. 아빠가 그거 몰래 먹어줬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개나 사주셨어. 에스키모. 플롬비르. 너무 좋아서 밤에 잠이 안 올 정도였어. 아빠랑 아이스크림, 어느 쪽이 더 좋은지 헷갈리기까지 했어. 매일이 그런 하루라면 어떻게 지루할 수가 있어? 핀란드에도 아이스크림이 있겠지, 런던에도, 암스테르담에도. 아빠도. 그러면 모든 게 빨리 달아날 거야. 잠도 못 잘 거야. 날아다닐 거야. 지루한 게 뭔지 난 모를 거야. ”

 

 



 나는 아빠에 대해 생각했다. 대사관과 관리들, 제복들, 볼가 승용차들, 서류들, 라디오, 스모그, 물이끼, 운하, 안개, 바다, 호수, 작은 창문들, 책들, 회색의 거리들, 서로 다르지만 똑같이 지루한 도시들. 아빠에게 인사하는 사람들. 스몰니 집의 거실. 보드카. 그루지야 와인. 우유 넣은 홍차. 터키 과자. 아빠를 찾아오는 사람들. 당. 위원들. 파벨. 아빠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돌마예프가 밀려났으니 아빠도 아마 몇 년 못 갈 거라고. 나를 위해서라도 안정적인 상대를 찾아줘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는 파벨을 골라왔다. 당과 모스크바가 밀어주는 모범적인 남자. 안정적이고 탄탄한 가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를 위해서. 그런데 이 모든 게 지루하지 않다고?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당돌하고 바보 같은 허세쟁이.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귀여운 이 꼬맹이. 

 

 

 

 미샤는 새로 따라준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수프를 먹었다. 어느새 접시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흑빵으로 크림을 몽땅 닦아 먹었다. 남은 보드카를 홀랑 다 마셨고 결국 기침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빵이 목에 걸렸다고 뻥을 쳤다. 그리고는 여전히 노래하는 어조로 말했다.

 



 “ 아, 잊었네. ”

 


 “ 뭘? ”

 


 “ 건배. 알랴를 위해. 건강을 위해. 푸쉬킨을 위해. 우리 그렇게 하잖아. ”

 


 “ 나중에. 다같이 마실 때. ”

 


 “ 하긴 두 잔밖에 안 마셨으니까. 그럼 푸쉬킨은 남겼네. ”

 


 “ 이제 몸 녹았지? ”

 


 “ 응. 따뜻해졌어. 졸려. ”

 


 “ 너 잠은 잘 자니? ”

 


 “ 잘 때도 있고 못 잘 때도 있어. ”

 


 “ 오늘은 잠 잘 올 거야. 핀란드 우하도 먹고 보드카도 마셨으니까. ”

 


 “ 좋아. 잠이 오면 정말 좋아. ”

 


 “ 저쪽으로 가서 자. 소파 하나 비었어. ”

 


 “ 나중에. 다같이. 안드레이도 오면. 남은 한잔 같이. 푸쉬킨을 위해. 그때는 맑은 우하. ”

 

 



  꼬마는 취해서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거의 잠꼬대였다. 부엌 구석의 낡은 소파로 데려다 주자 금세 인사불성이 되어 잠들었다.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던 코스챠의 재킷을 주워서 덮어주자 담요라도 되는 양 두 손으로 옷깃을 꼭 쥐고 목까지 끌어올리며 쌕쌕 숨소리를 냈다.

 

 



 나는 크림 찌꺼기가 말라붙은 접시를 설거지통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남은 보드카를 따라 마셨다. 반 잔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다 떨어진 수프와 흑빵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됐다. 술 때문에 더워져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지만 꼬맹이의 본을 받아 ‘나중에, 다같이. 트로이도 오면.’ 하고 혼잣말을 하며 거실로 돌아가 남은 필사본을 다 읽었다.

 

 

 

 



FIN
2019.3.9 ~ 3.30


 

 

..

 

 

 

 

 

 

 

미샤와 알리사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단어 몇개.

 

마가단은 스탈린 시절 악명높은 강제노역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예세닌과 브로드스키는 러시아 시인. 에스키모와 플롬비르는 러시아 아이스크림 종류이다. 전자는 초콜릿 입힌 하드 아이스크림, 후자는 유지방이 높은 둥글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콘.

 

트로이가 본명인 안드레이란 이름을 싫어하고 이 이름을 택하게 된 유래는 예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7043

 

'알랴, 건강. 푸쉬킨을 위해' 라는 말은 전에 쓴 글들에서 유래했다. 갈랴의 문학 모임 멤버들의 습관이다. 보통 러시아인들은 건배할 때 첫잔부터 순서대로 여인을 위해 건배하고, 이후에는 건강, 그 다음엔 성공이나 뭐 이것저것 순서대로 하는데(물론 때에 따라 다르다) 이 친구들은 아무래도 문학 모임이다 보니 세번째 건배는 항상 '푸쉬킨을 위해!' 하고 외치는 버릇이 있다. 이 건배사는 미샤의 입에도 붙어 있기 때문에 예전에 쓴 단편 Frost 에서도 미샤가 비행기 안에서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술을 마실 때 써먹는다.

 

알리사에 대한 발췌본 몇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5016 (알리사와 기계벌레, 불가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

https://tveye.tistory.com/5178 (문을 여는 사람, 악령과 성모)

https://tveye.tistory.com/5040 (파리의 알리사)

 

 

 

 

맨위에서 언급했던 그 카페 '두셰브나야 꾸흐냐'에서 내 몸을 녹여주었던 핀란드 우하. 이때 에피소드는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5

 

언젠가 이 우하와 카페, 데니스에 대해 단편이나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대신 이 미니 단편을 쓰게 되었다.

 

 

 

 

이건 내가 집에서 끓였던 약식 핀란드 우하.

 

크림을 넣어 끓이는 핀란드 우하 레시피에 대해 전에 번역해 올린 적이 있다. 여기 : https://tveye.tistory.com/3538

 

 

 

 

갈랴와 료카의 아파트. 현재의 페테르부르크,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의 바실리예프스키 섬 쉡첸코 거리에 있다. 내가 예전에 지냈던 기숙사가 있던 동네이고 이 아파트는 그 근처에 있다. 이 건물 어딘가에 트로이와 알리사네 모임 아지트인 갈랴네 집이 있다. 이건 여름에 가서 찍은 사진이라 햇살이 좋고 밝게 나왔지만 겨울엔 물론 춥고 어둡다.

 

이 동네와 아파트들에 대한 사진들은 여기 : https://tveye.tistory.com/8509

 

 

 

 

이런 창문들 중 하나가 갈랴네 집 창문일 것이다.

 

 

 

겨울의 그쪽 동네. 이 겨울 풍경은 몇년 전 찍은 거지만 사실 레닌그라드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