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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이때 여행 중 이날 날씨가 최악이었다. 음습하고 춥기도 하고, 계속 진눈깨비가 내렸고 바닥은 완전히 진창이었다. 즉, '전형적인' 페테르부르크 겨울 날씨였다. 바로 이 날씨 때문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아예 정착해 살라고 하면 망설이게 될 것 같은 것이다!!!!

 

 

날씨 안 좋은 날은 무조건 박물관 가는 날임. 그래서 이 날은 루스키 무제이(러시아 박물관) 갔다. 페테르부르크 갈때마다 들르는 곳이다. 근데 이 날은 날씨도 그렇고 몸도 많이 안 좋아서(아마 복직을 앞두고 있어 더 심란했던 듯하다) 그림 구경도 대충 했다.

 

 

러시아 박물관은 옆으로 기다랗게 뻗어 있고 미하일로프스키 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전시실 창문들 너머로는 공원도 보이고 예술광장이나 그랜드 호텔 유럽이 보이기도 하고 스파스 나 크로비를 비롯해 카톨릭 성당, 인줴네르 자목 등의 첨탑이 보이기도 한다. 위로부터 세장은 박물관 창 너머로 본 바깥 풍경들.  

 

 

(여기엔 사진 안 올렸지만 에르미타주는 러시아 박물관보다 더 크고 길기 때문에 거기 전시실들 창문 너머로는 궁전광장, 네바 강변, 길거리 등등 더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오후 2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미 해는 거의 다 져버렸다.

 

 

 

 

 

 

 

눈과 얼음, 진흙이 지저분하게 녹아 진창을 이루기 시작한 차가운 바닥 위로 까마귀 몇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사진엔 한 마리만.

 

 

 

 

박물관 갔다가 근처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옷 갈아입으러 호텔로 들어가는 길. 네프스키 거리에서 버스 기다리며 한 장 찍음. 이게 오후입니다 흐흑... 그래도 사진으로 보면 뭔가 있어보이고 분위기 근사하죠... 실상은 '으악 이 날씨 정말 괴로워라'임...

 

 

:
Posted by liontamer
2017. 3. 17. 22:11

겨울,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2016 petersburg2017. 3. 17. 22:11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복직 며칠 전.

 

춥고 흐린 날이었다. 습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전형적인 잿빛 페테르부르크 날씨였다.

 

..

 

사진의 저 기념품 가게에서 파란 망토의 목각천사 미하일을 샀었다.

 

:
Posted by liontamer


어제 박물관에 공연까지 좀 무리해서 그런지 오늘은 많이 피곤했다. 잠도 많이 못 자서 졸렸지만 억지로 일어나 조식을 먹고 나섰다. 겨울이라 해가 짧기도 하고 이번에 머무는 일정이 그리 길지 않고, 또 돌아가면 이제 곧 지방 본사와 새로운 집2로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쩐지 시간이 아까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오늘 진눈깨비가 내렸고 날은 아주 흐렸다. 차라리 춥고 눈오는 게 낫다... 기온이 영하 1도~영상 1도를 오락가락하자 길에 쌓였던 눈이 녹아 진창으로 변했다.


..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돌아다닐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스 타고 네프스키 대로로 나가 돔 끄니기로 직행. 도블라토프 책 두권과 페테르부르크 출신 락뮤지션이자 작가가 쓴 레닌그라드에 대한 책을 샀다. 도블라토프는 사실 전에 샀던 두꺼운 책에 들어 있는 단편들인데 두껍고 무거운 하드커버 책은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가 어려워서 그냥 얇은 페이퍼백으로 분권되어 있는 걸로 두권 샀다. 실은 도블라토프 작품들은 거의 다 가지고는 있는데 역시 하드커버는 집에서 집중해 읽기가 힘들어서... 막 들고 다니며 읽는 페이퍼백이 낫다.


..



조식을 열시쯤 먹고 나왔기에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날씨가 워낙 안 좋아서 돔 끄니기 2층의 카페 singer에 가서 차 마시고 책 읽을까 했지만 창가 자리가 다 차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그러면 차라리 케익이 더 맛있는 고스찌에 가기로... 그전에 정류장 근처에 있는 예카테리나 카톨릭 성당에 가서 다시 초를 켰다.


..




버스 타고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로 와서 고스찌 1층에 갔다. 여긴 2층은 레스토랑, 1층은 카페이다. 점심시간에 가서 저렴한 런치도 가능했지만 배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얼그레이와 메도빅(페테르부르크 최고의 메도빅. 여기 거랑 아스토리아 카페 것)을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차 마시고 케익 먹으며 친구들과 잠시 톡을 하고 책을 좀 읽었다. 그리고 료샤를 기다렸다.


..


료샤는 일요일에 코펜하겐 쪽에 출장을 갔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왔다.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오기로 결정하고 마일리지 표를 끊고 호텔 예약한 게 지난 금요일이라...

주말에 얘기했더니.. 깜놀 + 기뻐하면서 이 녀석이 하는 말...


료샤 : 드뎌 그만뒀구나!!!

나 : 아니야 ㅜㅜ 돌아가기 전의 마지막 일탈이야.

료샤 : 어휴 바보!

나 : 나 바보 아니야 ㅠㅠ


..



고스찌에서 기다리자 오후에 료샤가 왔다.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수트 대신 편한 티셔츠와 패딩점퍼, 청바지 차림이었다.



나 : 그래도 집에 들렀다 왔구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네. 잘했어.

료샤 : 응. 근데 저녁에 아빠가 오라 했어. 그래서 옷 있다가 또 갈아입어야 돼. 아 가기 싫다...

나 : 무섭고 근엄하지만 멋있는 너네 아빠~~

(* 료샤네 아빠 좀 숀 코너리 닮음. 소련 붕괴시 노브이 루스끼로 부를 축적했던 벼락부자 미노년 ㅋㅋ 전에 한두번 본 적 있고 그 집에 가본 적도 있음. 경호원 있는 저택에 살고 계심!)


료샤 : 야! 너 우리 아빠 넘보지 마! 내 아들 하나로도 모자라냐!

나 : -_- 안 넘봐! 글고 너네 아빠 부인 너보다 어리잖아!

료샤 : 쳇. 하여튼 가기 싫어라...

나 : 근데 왜 갑자기? 너 원래 아빠한테 잘 안 가잖아. 사업이 잘 안되니?

료샤 : 오늘 아빠 생일 ㅠㅠ

나 : 아 그렇구나. 축하한다고 전해드려.


료샤 : 너 나랑 같이 갈래?

나 : 싫어!!!! 가기 싫은 자리에 혼자 가지 왜 나까지 끌고 가!

료샤 : 아빠는 맨날 잔소리한단 말이야 ㅠㅠ 근데 아빠는 너를 좋아해. 그니까 너랑 가면 잔소리 안할지도 몰라. 그래도 울아빠는 여자 앞에선 나 안 혼내.

나 : 너네 아빠가 나 좋아해??? 나도 너네 아빠 멋있었어 ㅋ

료샤 : 똑똑하다고 ㅠㅠ 내 돼먹지 못한 친구 중 너만 보기 드물게 인텔리겐치야래 ㅠㅠ

나 : 어마나 나 똑똑! 나 인텔리겐치야!! 너네 아빠 짱 멋짐~

(생각해보니 몇년 전 료샤 아빠네 갔을때 서재에 있는 책들 보고는 불가코프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 있었음. 료샤는 불가코프 안 읽었음 ㅠㅠ)


료샤 : 그니까 같이 가자 ㅠㅠ 아빠가 잔소리할때 실드 좀 쳐줘

나 : 싫어 싫어 ㅠㅠ 너네 아빠네 집에는 경호원도 있고... 도베르만도 있고(개는 다 좋아하지만 도베르만은 무서워)...너네 아빠 부인 무서워...

료샤 : 나도 싫어, 나타샤... 못되게 생겨서 입술은 맨날 시뻘개... 가슴만 왕 커!

(나타샤 : 료샤 아빠의 어린 아내. 금발 글래머 미녀. 몇번째 아내인지 기억도 안남 ㅋ)

나 : 야! 여자를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마! 그리고 너 글래머 좋아하잖아!

료샤 : 나타샤는 싫단 말이야! 목소리도 째지고 맨날 헐벗고 있고! 옷인지 속옷 쪼가리인지!!!!

나 : 나타샤 이쁘던데...

료샤 : 나타샤랑 아빠랑 편먹고 나 공격할 거란 말이야 아....



료샤가 불쌍해서 하마터면 넘어갈뻔 했지만... 나도 무지 가기 싫었다! 나타샤는 딱 한번 봤는데 목소리도 정말 크고 째지고(프렌즈의 재니스랑 비슷한 목소리 ㅠㅠ) 이쁘긴 한데 사람을 무지 깔본다(그때도 내가 청바지랑 운동화 차림으로 갔는데 왕 무시했음 ㅠㅠ) 그리고 료샤네 아빠가 멋있긴 하지만 경호원과 도베르만 있는 집에 가기 싫었다.



나 : 친구야, 가주고 싶지만 나도 (불여우 같은 ㅋ) 나타샤 무서워. 그리고 너네 아빠 생일이면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잖아... 사업 파트너들도 올 거 아니야. 백번 양보해서 간다 쳐도 나 봐라, 어그 부츠에 패딩! 명품 입고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 이러고 가라고!!! 나타샤가 얼마나 비웃겠냐!   

료샤 : 그건 그렇지만... 아 가기 싫어...

나 : 레냐도 데려가?

료샤 : 아니, 레냐는 지난주에 이라랑 따로 가서 아빠랑 밥먹었어.

나 : 하긴... 애기니까 저녁에 술마시고 만찬 먹고 할땐 좀 그렇겠다.


료샤 : (곰곰 생각...) 야, 울집에 여자 드레스 있는데 너 그걸로 갈아입고 가면 되지 않을까?

나 : 뭐야, 싫어!!!! 내가 왜 남의 옷을 입고 가니!!! 글고 나한테 맞지도 않을 건데...

료샤 : 하긴 길어서 너한텐 안 맞겠다. 아...

나 : 그래도 여자 옷이 있는 걸 보니 요즘 데이트 생활은 좀 잘되나보구나 ㅋㅋ

료샤 : 아니야!!!! 접때 그 망할 그 여자가 놔두고 간 거야!

나 : 앗, 그 여자랑 뽀뽀도 안 하고 헤어졌다더니 ㅋㅋ

료샤 : 그 여자가 그냥 놔두고 갔어!!!!! 간악한 여자!!! 그래놓고 막 브 콘탁테에 자기 옷 내 소파에 걸어놓은 사진 올리고!!! 악마 같은 여자 ㅠㅠ

(얼마 전 료샤는 어떤 여자를 사귈뻔 했으나... 좀 이상한 여자라서 두어번 만나고 말았지만 이 여자가 동네방네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녀서 얘는 자기 sns 계정도 다 폐쇄했음. 무서운 불여우 같은 여자라고 혀를 내두르고 있음 ㅋ)


나 : 뭐 그냥 놔두고 간 거든 역사가 있었든 상관은 없다만... 너 나보고 그 여자가 입었던 옷 입으라는 거야 지금!!!!!

료샤 : 어, 생각해보니 그것도 좀 그렇긴 하다. 생각해보니 그 여자 170 넘었는데 그 옷 너한텐 맞지도 않겠다.

나 : (-_- 어쩐지 나 의문의 1패한 것 같음 ㅠㅠ) 근데 그 여자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 옷은 왜 안 돌려줬어?

료샤 : 무서워서... 옷 돌려주려면 연락해야 하잖아, 또 무슨 거짓말을 꾸며내고 브 콘탁테랑 인스타에 사진 올릴지 어떻게 알아 ㅠㅠ

나 : 그럼 나같으면 그 옷 버렸다! 아님 불우이웃한테 기부했거나!

료샤 : 청소 아줌마한테 버리라고 했는데 아줌마가 안 버리잖아 ㅠㅠ

나 : 네가 버리면 되잖아!

료샤 : 손대기도 싫단 말이야! 보기도 싫어!


난 가끔 얘의 행동 양태가 이해가 잘 안되지만... 하여튼 료샤는 기가 세고 목소리 크고 위압적인 여자를 매우 무서워하므로 그러려니... (성차별주의자!!)


..



하여튼 그래서 우리는 고스찌에서 좀 앉아 있다가 내 방으로 와서 한동안 얘기 나누었다. 그리고 료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으로 아빠 생일잔치에 갔다. 불쌍했다.


하도 풀죽고 불쌍해보여서 한 45% 정도 '그냥 같이 가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음. 그러나 료샤가 나한테 옷 때문에 신경쓰이는 거면 가다가 괜찮은 데 가서 한벌 사주면 되지 않냐고 해서 확 열받아서 45%는 0%가 되었다.


아니 도대체 내가 왜 친구가 사주는 옷까지 입고 부르주아 생일파티에 가야 되냐!!!!!!!!! 나는 기모바지랑 보세 니트랑 베어파우 어그 신고 패딩 입고 그냥 걸어서 쏘다니고 방에서 유니클로 티셔츠랑 파자마 입고 편하게 쉴 거다!!!!


그래서 료샤는 슬퍼하며 6시쯤 방에서 나갔고... 나한테 좀 삐쳤지만 아빠네 가다가 전화해서 '옷 사준다 해서 화나서 안 간다 한 거지? 안 그랬음 갔을 거지? 미안해 친구야' 하고 사과했다.


그래서 나는 '옷 사준다 해서 열받은 건 맞는데, 안 그랬어도 안 갔을 거야. 45 대 55였어'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료샤는 다시 좀 삐쳐서 '쳇 친구 맞아?' 하고 전화 끊음.


삐치면 안되는데... 내일 레냐랑 같이 보기로 했었는데 ㅠㅠ 친구야 삐치지 말고 아빠 생일잔치 잘 다녀오고 무서운 나타샤 어택도 잘 이겨내렴 ㅠㅠ (왜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공연히 잘못한 것 같지 ㅠㅠ)


..





하여튼 료샤는 가기 싫은 아빠네 집에 가고. 나는 샤워를 하고 유니클로 티셔츠와 파자마를 입고, 볶음김치와 참치와 누룽지로 저녁을 먹고, 그저께 호텔 로비 카페에서 준 크리스마스 쿠키를 뜯어서 에르미타주에서 사온 컵에 디카페인 차 우려 마시고 방에 비치된 잡지를 읽으며 평화롭게 밤을 보내다 이제 오늘의 메모 쓰는 중. (료샤는 나에게 '울 아빠네 안 가면 너 뭐할건데!' 라고 해서 '나는 샤워하고 파자마 입고 한국에서 가져온 인스턴트 밥 먹고, 쿠키랑 차 마시면서 잡지 볼거다!' 라고 했더니 엄청 부러워했었음 ㅋㅋ)


근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료샤 좀 불쌍해. 그냥 같이 가줄걸 그랬나?


:
Posted by liontamer

2~3일 날씨 좋더니만 역시 전형적인 페테르부르크 날씨가 돌아왔다. 후덥지근해지더니 뇌우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산도 소용이 없어 흠뻑 젖었다.

 

어제 청동기사상 공연 끝난 후 료샤네 집에 가서 새벽까지 얘기하느라 늦게 자고, 아침에 걔 출근할때 따라 나와 방으로 돌아오느라 잠 설침. 아니 이놈은 맨날 비서한테 일시켜먹는 놈이 왜 오늘은 이렇게 아침 9시까지 나간다고 난리인가... 왜 갑자기 열심히 일하는 척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야! 나도 일해! 나 출장 갔다왔잖아!' 하고 툴툴댄다. 쳇 그래봤자 프롤레타리아도 아닌 놈이.

 

하여튼 4~5시간밖에 못 잤고 방에 돌아와서도 좀 자보려 했으나 처리할 일들이 몇가지 있어 그거 하느라 결국 더 못 잤다. 머리도 아프고 주기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몸이 괴롭다.

 

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날을 조금 더 연장했다. 비행기와 숙소 변경하느라 오전에 좀 정신이 없었다. 6월말에 돌아갈 것 같다. 이로써 나의 유리지갑은 이제 먼지로 화했다만... 아마도 나는 돌아가는 시점을 할수 있는 한 미루고 싶은 것 같다.

 

..

 

1시쯤 배가 고파서 기어나갔다. 뒷길의 루빈슈테인 거리에 갔고 며칠 전 찍어두었던 북카페 같은 곳에 갔다.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책들이 매우 많았고 여기저기 불상이 앉아 있는것이 내겐 좀 우스웠지만 여기 사람들에겐 이른바 '힙'한 스타일인가보다.

 

 

 

(카메라 렌즈 덕에 사진은 좀 밝게 나왔지만실제로는 꽤 어두컴컴한 곳이다)

 

버섯수프와 잘 모르는 이름의 생선요리를 시켰다. 설명을 들어보니 흰 생선이고 살이 부드럽다 해서. 둘다 맛있긴 했는데 문제는 이것들이 둘다 크림소스라... 나중엔 엄청 느끼했다. 아아, 김치찌개 먹고싶다 엉엉..

 

 

어두컴컴한 테이블에 앉아 혼자 밥을 먹으며 책장에서 오래된 러시아 문학책을 꺼내 뒤적였다. 글쓰러 오기 좋은 카페이긴 한데 너무 늦게 알았다. 모레 나는 숙소를 옮기니까. 그리고 뭔가 장소는 좋은데 어딘가 약간 편하지 않은 점이 있다. 불상 때문인가?? 두셰브나야 꾸흐냐와 좀 비슷한 분위기이지만 여기가 더 어두워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웬만큼의 빛이 들어오는 곳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그건 그렇고 밥먹은 후 산딸기에이드를 마시고 있는데 반삭발에 귀걸이, 해골 반소매 티셔츠 차림의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청년이 갑자기 내 곁에 와서 앉아도 되느냐 물었음. 아마도 내가 징 박힌 후드 재킷과 해골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동류의식을 느꼈나... 그는 자기 소개를 했는데 이름이 '고릭'이었다. 게오르기 아니면 그리고리의 애칭인갑다. (추가 : 생각해보니 이고리의 애칭인가보다)

 

고릭 : 나 아까부터 너를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었어.

나 : (뭐냐 이 무례함!) 왜?

고릭 : 외국인인데 되게 편안하게 주문을 해서. 생선 종류도 물어보고 뭔가 당황하지 않는게 인상적이어서.

나 : (내가? 난 세상에서 주문하는 게 젤 무서운데!) 어, 그래...

고릭 : 노어 잘하네. 관광객? 학생?

나 : (어머나 학생이라니~ 오오...) 아, 난 잠시 여행왔어.

고릭 : 아 그렇구나. 나 만화 그려.

나 : 어, 그래? 그렇구나...

고릭 : (자랑스럽게 뭔가를 뒤적뒤적하더니 스케치북에 펜으로 그려놓은 만화를 보여줌) 내가 그린 거야.

나 : (어두워서 안보여.. 글씨가 너무 빽빽해 ㅜㅜ) 아, 대단하구나!

고릭 : 그렇지? 나 이 근처에 화실 있는데 구경갈래? 너 만화 그리는 거 못봤지?

나 : 어, 저기... (이거 뭐지?)

고릭 : 화실에 좋은 와인도 있고 샴페인도 있다. 맥주 좋아하면 맥주도...

나 : (이노미...) 아, 그래. 고마운데 나는 약속이 있거든.

고릭 : (휘파람 + 푸르르) 남자?

나 : 어, 으응... (남자 맞긴 하지.. 남자들. 료샤와 레냐. 둘중 하나는 나의 '8세' 약혼자 ㅠㅠ)

고릭 : 에이 어쩐지. 편안하게 주문을 하더라니.

나 : (? 남자랑 약속 있는 것과 외국인이 노어로 편하게 주문하는 것 사이에는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만화 보여줘서 고마워.

고릭 : 그래, 나중에 약속 없을때 여기 와. 나 자주 오니까 언제 화실 보여줄게.

나 : 으, 으응...

 

그리하여 펑크 청년 고릭은 나타났을때와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자리를 떴다.

 

흠.. 뭔가 황당하지만 그래도 조금살짝 헌팅당한 느낌이니 조금 뿌듯해하기로 함. 역시 조명이 어두운 데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 (나이를 숨김 ㅋ)

 

..

 

아까 료샤에게 전화왔길래 그 얘기 해줬더니 료샤가 짜증을 냈다.

 

료샤 : 야! 아무나 말 건다고 덥석덥석 대꾸하지 마! 그런 놈 위험해!

나 : 위험하기보단 어벙해보이고 엄청 속이 들여다보였어. 대놓고 화실 가서 술마시자 했어.

료샤 : 반삭에 펑크에 해골!! 개날라리! 거기 질나쁜 어린애들 많어!

나 : 나 해골 티 입고 나왔는데 ㅠㅠ

료샤 : 어이구, 못살아... 너 왜케 해골 좋아해. 저녁에 레냐 봐야 하니까 해골 티 입지 마! 레냐가 어제 나한테 해골 티 사달랬어! 다 너때문이야!

나 : (아아, 내가 어린이에게 악영향을??) 아, 알았어.

 

 

..

 

그런데 결국 오늘 저녁 료샤와 레냐와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뇌우가 너무 치고 비가 많이 오자 레냐네 엄마가 레냐를 외출금지시켰다. 레냐가 감기 걸렸다 나은지 얼마 안돼서 그럴만도 하다. 그래서 나도 료샤에게 너도 출장 다녀와 피곤할테니 오늘은 쉬고 내일 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해골 티를 입고(ㅋㅋ)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점에 한군데 다녀왔지만 빈손으로 돌아왔고 숙소 옆 그 쇼핑센터에 붙어 있는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신 후 수퍼마켓에서 자질구레한 것을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이 쇼핑센터에서 호텔은 20초만 뛰면 되는데 우산 안가지고 나왔다가 진짜 흠씬 젖었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듯 비가 왔기 때문이다 ㅠㅠ

 

..

 

 

 

돌아와서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한시간 쯤 그대로 덮개도 안 벗긴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자고 싶었지만 밤잠 설칠까봐 꾹 참았다.

 

원래 오늘은 글도 쓰고 공연 리뷰들도 정리하려 했는데 마냥 피곤하다. 이러다 곧 잘 것 같다.

 

..

 

오늘의 유일한 즐거움은 나보다 엄청 어린 남자애에게 조금살짝 헌팅을 당했다는 것 뿐이구나. (고릭 그 녀석이 스스로 나이도 밝힘. 22살이라 함 ㅋㅋ 내가 어둠 속에 앉아 있었기 망정... 해골청년 고릭은 내가 같이 화실 가자고 밖으로 나왔으면 '앜 속았어~' 하고 도망갔을지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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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