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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본 발로쟈의 무대는 2019년 11월 15일, 마린스키 본관이었다. 백조의 호수였고 알리나 소모바와 함께 췄다. 이 사진들은 전에 공연을 보고 얼마 되지 않아 올린 적이 있다. 흔들린 사진이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도 이 사진이 좋다. 그날 밤 공연을 마친 후 나는 극장 옆문, 크류코프 운하 옆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농담에 웃기도 하고, 곧 다시 보자고 인사를 했다. 많이 지쳐서 늦게 나왔지만, 날씨가 싸늘했고 운하에서 11월의 습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는 나와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농담, 웃음만이 생생하다... 그리고 포옹과 볼키스, 인사. 존대어가 사라지고 서로 너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대한 행복감.
 
 
나는 예술에 대해서, 무대에 대해서, 그리고 극장과 관객의 관계, 그 환각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주제와 인물로 오랫동안 글을 써오기도 했다. 자신의 삶 역시 비슷한 업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람 앞에서는 순수하고 열렬하고 깊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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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찾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는데 블로그 유입경로에서 어제인지 그저께 우리 나라 뉴스에 나온 기사들이 떠 있었다. 그리고 서방 외신들 중 여럿도. 그의 죽음에 대해 온갖 추측이 이어지고 있고 그게 언론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 속상하고 서글프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꼭 말해두고 싶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서로 죽이지 말고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나는 춤추고 싶다, 그 어떤 경계도 없이 도처에서’ 라는 유명한 일기의 문장도 인용했다. 분명 온전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놓고 러시아나 푸틴 반대파가 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정부 비판이나 정치적인 얘기를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전쟁 후 푸틴에게 반대하다 의문사한 여러 유명인사나 재벌들과 비교하며 '반푸틴주의자,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했던 스타 무용수의 의문사'로 프레임을 짜는 기사가 제법 올라온다. 떠나버린 사람의 개인적 삶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전쟁과 이념과 살상의 끔찍한 비극 속에서 정치적으로 거짓 악용하는 것도 비열하다. 이것은 러시아 편이냐 우크라이나 편이냐, 푸틴 반대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편안하게 보내줬으면 좋겠다. 

 
 

 
 
 
그날, 운하 옆에서 받았던 사인들. 마샤와 발로쟈. 왼편은 푸쉬 컴스 투 쇼브(기민씨와 마샤가 췄다), 젊은이와 죽음. 오른편이 백조의 호수. 
 
 
 

 
 
이렇게 보고 있으니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여전히 모든 것이 꿈만 같고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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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백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향이 너무 강하고 장례식을 연상시키는 꽃이라 직접 사본 적은 거의 없다. 지난 토요일에 오랜만에 랜덤 박스를 주문했더니 거기 이렇게 커다랗고 향이 아주 강한 오리엔탈 화이트 백합이 여러 송이 들어 있었다. '백합은 별로인데 들어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후 나는 가장 사랑하는 무용수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저 슬픈 우연이지만 시차를 생각해보면 내가 이 꽃이 든 상자를 열었을 무렵 그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백합은 지젤 2막에서 알브레히트가 망토로 몸을 감싸고 지젤의 묘로 다가가 바치는 꽃이다. 지젤은 오래 전, 2006년에 내가 제일 처음 그를 마린스키 무대에서 봤던 작품이다. 그때 그는 입단한지 3년밖에 되지 않았고 아주 젊었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봤었다. 몇년 후 나는 마린스키에 다시 갔을 때 그의 '젊은이와 죽음'을 보고 완벽하게 사랑에 빠졌다.
 
 
간밤 많이 피곤했지만 이런저런 생각과 슬픔 때문에 늦게 잠들었다. 난방을 해서 더웠는지 새벽 3시에 깨어났고 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세시간 쯤 잔 것 같다. 그리고는 다시 새벽 출근했다. 오늘도 바쁘게 일했다. 하지만 일한다고 마음의 아픔이 가시지는 않았다. 여전히 슬프다. 목요일에 마린스키에서 작별예식을 하고 니콜스키 사원에서 미사를 드린 후 스몰렌스크 묘에 안장된다고 마린스키에서도 어제 공지를 해주었다. 모두에게 개방한다고. 너무나도 가서 인사하고 싶다. 사실 아직도 진짜 인사가 나오지 않는다. 노어로는 할 수 있다. 영원한 추억에 대해, 언제까지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거라고. 하지만 노어로도 그 마지막 작별인사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 목요일에는 할 수 있겠지. 너무나도,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프다. 가엾고 불쌍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잠을 너무 못 잤고 밥도 잘 먹히지 않아서 매우 피곤하다. 점심땐 죽을 먹고 저녁엔 단감 1개와 포도 몇 알을 먹었다. 내일은 좀더 나아지겠지. 늦지 않게 잠자리에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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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