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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이 금세 지나갔다. 이제 내일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모스크바에서 경유해서 화요일에 도착하고 수요일 새벽 기차로 본사에 내려간다. 그런데 금요일에 다시 서울 출장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상황이면 사실 수목금 서울에서 근무하는 게 좋겠지만... 현실은 나는 이제 새로 발령받은 부서로 출근해야 하므로 그럴 수가 없다. 아마 수요일에 새벽 기차 타고 비몽사몽 출근하자마자 새로운 일들 때문에 정신이 쏙 빠질 것 같다.



오늘도 낮 12시 공연이 있었다. 오늘 공연은 스트라빈스키 음악, 포킨 오리지널 안무를 안드리스 리에파가 재연한 '불새'였다. 이 발레에 대해서는 예전에 여러번 쓴 적이 있고, 또 내가 미샤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했으므로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전에도 무대에서 여러번 본 작품이다. 오늘은 낮공연이라 저녁에 비해서는 캐스트가 좀 가벼웠지만 사실 이 발레는 춤 자체보다는 무대미술과 음악이 더 강력한 작품이라 큰 영향은 없었다. 다시 보니 반가웠다.



(커튼콜 사진 한장. 사이드에서 줌 당겨 찍어서 이게 최선, 그래도 의상이 화려하니 이번에 본 공연들 중 그나마 사람 얼굴들 조금 나옴 ㅠㅠ)



공연 보는 내내 음악과 리브레토를 따라가며 내 마음속에서 오래전에 미샤를 통해 재안무한 작품을 박자와 장면에 맞게 대입해보았다. 사실 이 공연 보러올 때면 자주 그렇게 한다. 본편에서 미샤가 이 발레를 자신의 표현양태로 재안무했고 그로 인해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고 당에서도 더 이상 봐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샤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전부터 불새 민화와 이 발레는 나에게 여러가지 글의 소재가 되었었다.



공연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글에 대해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무대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또 한편으로는 돌아가는 것, 회사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니 제대로 공연을 즐긴 것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해서 회사 생각이 났다. 새로 발령받은 부서, 거기서 해야 할 일에 대해, 그리고 그보다도 '회사' 자체에 대해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상태인 것 같다. 아니, 분노 자체는 이제 잦아들었는데 여전히 지쳐 있고 '정말 이제 너무 지겹고 역겹다' 상태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료샤랑 레냐도 같이 공연을 보았다. 둘 다 이 발레는 처음이었다. 아이들이 많이 보러 오는 발레이기도 하고, 또 무대 미술이 화려한데다 불사의 마법사 카쉐이와 악당괴물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조명도 번쩍번쩍 빛나기 때문에 료샤도 안 졸았다. 레냐는 내 손을 꼭 쥐고 엄청 재밌게 봤다. 베누아르 칸막이 좌석이었는데 좀 사이드였기 때문에 레냐의 눈에 오페라 글라스를 대어 주자 엄청 좋아했다.










마린스키 구관이었다. 나의 추억의 극장이다. 여기 오면 오랜 옛날 쥬인과 함께 두 손 꼭 잡고 추위에 종종거리며 극장 와서 공연보던 추억이 떠오른다... 여기 들어서면 옛날의 추억과 함께, 극장 안의 동선과 무대 여기저기를 살펴보게 된다. 나는 이 극장과 공연,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사랑, 그외 몇가지 때문에 오래 전에 미샤를 만들어냈다. 실재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과 꿈 속에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존재하는 그 아이는 오랜 옛날, 이 극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저 무대에 올라갔을 것이다.



..



공연을 보고 나오니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날씨는 아주 궂었다. 비는 오다 안 오다 했지만 하여튼 어제 산책을 한 것이 참 다행이었다.



나는 판탄카 근처의 이즈다니야 서점에서 책을 좀 사고 싶었다. 료샤가 차로 데리고 가 주었다. 근처 쩨레목에서 셋이 블린을 먹었다. 우리 모두 블린을 좋아한다. 블린을 먹은 후 옆의 홍차 가게에서 다즐링 새로운 품종을 시향하고 100그램 사보았다. 쥬인 주려고 커피를 사볼까 했으나 작년에 여기서 '제 친구는 견과류 향을 좋아해요' 라고 했다가 헤이즐넛 커피를 추천받아 사갔던 쓰디쓴 기억이 있어서 관두었다.





이즈다니야 서점에 가서 책을 두어권 샀다. 여기는 작년에 슈클랴로프님 화보집 사러 와서 알게 된 곳인데 아늑하고 참 예쁘다.  그리고는 돔 끄니기 서점에도 가서 책을 두어권 더 샀다.


..



하루가 금방 흘러갔다. 레냐는 저녁에 엄마에게 돌아가야 하고 내일은 등교해야 하므로 나와 헤어져야 했다. 레냐는 결국 울음보를 터뜨렸다. 많이 컸지만 그래도 여전히 울보다. 오늘따라 나에게 '쥬쥬, 안 가면 좋겠어. 회사 싫어. 한국 싫어. 그냥 나랑 있어' 하면서 열심히 설득을 했다. 전에는 그냥 '으앙 가지 마' 했는데 지금은 나름대로 논리를 펼친다.



1. 한국은 북한 때문에 위험하다. 2. 회사 때문에 쥬쥬가 자꾸 아프고 힘들다. 3. 쥬쥬는 회사보다 여기를 더 좋아한다. 4. 그러니까 여기서 나랑 있어야 한다. 5. 여기서 회사 다니면 된다!



흐흑. 5번이 불가능하단다 얘야 ㅜㅜ



레냐는 서러워했다. 내가 왔는데 비만 왔다면서 같이 분수도 보러 못 갔고 배도 못 탔다고 엉엉 울었다. 어흑... 그러더니 심지어 '엉엉 쥬쥬는 슈클랴로프 좋아하는데 모처럼 여기까지 왔는데 슈클랴로프도 안 나왔어, 독일에서 공연했대. 쥬쥬 불쌍해. 마린스키 갔는데 쥬쥬가 좋아하는 슈클랴로프가 안 나왔어' 라고 하해와 같은 아량을 베풀어주기까지 한다!! 너 슈클랴로프 밉다며 ㅋㅋㅋ 그러고는 날씨가 춥고 비가 와서 쥬쥬가 좋아하는 마로제노예(아이스크림)도 못 먹었다며 또 서러워한다...



그래서 나는 레냐 손을 잡고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마침 내가 옛날부터 좋아하던 다샤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내가 하겐다즈보다 더 좋아하는 땅콩 박힌 초콜릿 코팅 아이스크림... 다시 먹어도 하겐다즈보다 맛있다. 레냐랑 같이 다샤를 먹으면서 금방 또 올 거니까 울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레냐는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자 좋아했다. '옛날옛날에 레냐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여기 학교에 연수왔을때, 쥬인이랑 나랑 수퍼에서 이거 사서 먹었단다' 라고 하면 막 좋아한다. 쥬인과 토끼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고 한다.





(쥬인과 내가 좋아했던 아이스크림, 다샤)




나와 레냐가 다샤를 먹는 동안 료샤는 길거리 미용실 간판에 붙어 있는 머리 기르고 수염난 남자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저런 스타일을 원한 건데 왜 몰라주었느냐고 슬퍼하기에 내가 '저 남자도 지저분해 보여! 안 어울려! 저 남자보다야 수염깎은 네가 훨 낫다!' 하고 말해주니 갑자기 '역시 그렇지? 하긴 나는 멋있지' 하며 기분을 풀었다 ㅋㅋ



(바로 이 광고판의 저 남자 사진! 료샤 수염도 저렇게 지저분했다! 이 남자보단 수염 깎은 료샤가 낫다! 이건 립서비스 아니다!)



..



레냐와 뽀뽀를 하고 꼬옥 안아주고 헤어졌다. 료샤는 내일 체크아웃할때 들르겠다고 했다.



나는 방에 돌아와서 가방을 대충 꾸렸다. 좀 남았지만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쑤셔넣으려고 한다. 그리고 배가 고파져서 로비 카페에 내려가 생선수프 우하를 먹었다. 여기 우하가 생각보다 무척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전혀 짜지 않아서 좋았다. 몸이 따뜻해졌다.



...



내일은 10시 쯤 체크아웃하고 밖에서 좀 시간을 보내다 1시에 공항으로 출발, 4시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날아가 저녁 8시 즈음에 인천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마음이 산란하다. 뭐 돌아갈 때 되면 이럴 거라는 거야 알고 있었지. 그래도 작년 겨울보단 덜 심란하잖아 ㅠㅠ



이번에는 정말 간 곳도 별로 없고 생각보다 산 것도 별로 없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박물관이나 미술관 아무 곳에도 안 들렀다. 브루벨과 금발의 가브리엘이 그립긴 하지만... 다음에 와서 다시 봐야지. 이번엔 날씨가 너무 안 좋았다. 하지만 도시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고, 오히려 더욱 두터워진 느낌이다.



아이고 남은 가방 싸기 귀찮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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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