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토요일 밤 : 커튼을 달아야 할텐데, 왜 추운 걸까, 통화 후 우울해짐, 그래도 시작이라도 fragments2023. 3. 11. 21:33
해질 무렵 서재 방. 책이 상하지 않게 하려면 커튼을 달아야 하는데 게으름의 결과 꼬박 2년이 넘게 지나도록 이렇게 내버려두고 있다. 이사오면서 책을 절반 이상 정리했고 책장의 5분의 1 정도는 비워두었는데(사진에 보이지 않는 나머지 두 면에도 책장이 있음) 이제는 다시 꽉 찼다 ㅠㅠ 조금 더 쌓이면 액자를 들어내려고 한다. 맨 윗칸에 액자를 놔둔 이유는 사실 책을 자꾸 사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배치했던 건데 처음엔 좀 효과가 있었으나 이제 그 약효도 다 떨어짐.
기온이 많이 올랐는데 정작 나는 간밤부터 계속 추웠다. 오후에도 거실에 있는 내내 희미한 오한이 들어서 짚업을 걸치고 있었고 결국은 '기온이 올라도 내가 추우니 어쩔 수 없다' 하며 보일러를 켰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가 싶다. 막상 잠잘 때 더우면 힘드니까 자기 직전에 난방을 끄거나 해야겠다.
잠을 적게 잔 건 아닌데 끊임없이 너무 현실적으로 일에 시달리는 꿈을 꿨기 때문에, 그리고 아침엔 거의 2~30분마다 자다깨다 하며 이런 꿈에 시달렸기 때문에 매우 피곤하게 깨어났다. 무의식의 스트레스 지수도 상당히 높은 것 같다.
조금 전에는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너무 기분이 우울해졌다. 원래 올해 초여름 쯤 엄마와 여행을 가려고 했었다. 엄마는 계속해서 나와 함께 유럽에 가고 싶어하셨고 나는 올해 같이 가자고 해뒀었는데 그러고 나서는 사실 연초부터 회사의 엄청난 변화와 최고임원의 압박, 온갖 방식으로 몰아치는 과도한 업무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스트레스 때문에 원래 생각했던 기간에 그 정도의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갈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고 생각할 여력조차 없어져 버렸다. 엄마는 통화로 친구분이 딸들과 4월말에 여행가는 얘기를 꺼내시며 내가 바쁠테니 올해는 안 가도 된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은 안 가도 된다는 게 아니라 친구 얘기에 슬며시 기분이 안 좋아지고 질투가 나서 우리는 언제 가는 거냐고 떠보고 싶어서 말씀하신 거였음.
나는 연초부터 이 여행에 대해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정말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라 이런 얘기를 들으니 사실 굉장히 스트레스가 되고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엄마에게는 지금 회사가 정말 폭풍 속에 휘말려 있고 매일같이 일에 짓눌려서 이런 체제에서는 과연 그렇게 여러 날 동안 휴가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일단 이번달은 지나봐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엄마는 안 가도 된다고 하셨지만 내심 실망하신 눈치였다. 나도 근속휴직이라도 쓰고 6월 즈음 좀 쉬면서 엄마와 여행을 가고 싶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게 가능할지 솔직히 모르겠고, 눈앞의 어려움이 너무 크다 보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지친다. 하루하루를 감당하는 것도 벅차서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데 엄마와 통화를 하고 나니 좀 비합리적이리만큼 기분이 우울하고 가라앉았다. 아마 상황에 대한 제어가 전혀 안되고 앞날도 너무 모호한데다 일에 너무 지쳐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은 와중에 엄마가 여행 얘기를 꺼내시니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속상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쓰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고 계속 우울해진다. 이게 이렇게까지 기분이 가라앉을 일인가 싶은데 이상하게 많이 우울하다. 이게 혹시 내가 이렇게 지치고 힘든 것에 대해 부모님에게 공감을 받지 못해 섭섭한 건지도 모르겠다. 눈앞의 현실이 너무 버거우니 여행 모시고 갈 기력 자체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5~7월에 좀 쉬고 싶은데 근속휴직 석 달을 제도적으로는 쓸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업무 자체의 마비와 책임감을 차치하고라도 이런 시기에는 정말 엄청난 후환을 몰고 올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엄두를 낼 수가 없다. 한 달을 써보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오늘의 메모를 마친 후 글을 시작해보려 했는데 엄마와의 이런 통화로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아서 이 메모도 생각보다 늦게 쓰고 있다. 글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저녁까진 조금 더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발전시켜보고 있긴 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적어도 파일을 생성해두고 제목이라도 얹어놓는 노력은 좀 해보려고 한다.
..
자기 전에 추가.
우울했던 마음이 좀 나아졌다. 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일을 열고 제목과 시간/공간적 배경만 얹어두려 했는데 앞의 한 문장을 쓰자 생각보다 훨씬 쉽게 첫 문단이 풀려나갔다. 아마도 주인공이 단순하고 좀 귀여운 인물이기 때문인 것 같다. 좀 더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몸이 피곤해서 일단 이렇게 보험용 첫 페이지를 걸어두고 오늘은 마무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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