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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내일 하루만 더 지내고 나면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생각하니 괴롭구나.



낮 열두시 마린스키 신관 발레 공연 티켓을 끊어두었었다. 료샤와 레냐도 갈까 했었는데 이것도 현대 발레이고 또 레냐가 보기에는 너무 플롯이 없어서(사실 레냐보다 료샤가 걱정 ㅋ) 그냥 나 혼자 보러 가기로 했다. 대신 내일 낮 공연은 불새니까 레냐도 볼만해서 같이 가기로 함.



아침에 보니 파란 하늘이 손톱만큼 보였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극장에 갔는데 하늘이 보이기 시작해서 부디부디 공연 끝나고 나와서도 날씨가 개어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제바아아알... 네바 강변 한번이라도 걷게 해주세요오오... 아직 청동기사상도 보러 못 갔다고요...



오늘 공연은 마린스키 무용수이자 젊은 안무가인 일리야 쥐보이가 안무한 현대발레 '사계'(THE FOUR SEOSONS)였다. 작년 여름에 젊은 안무가 워크숍 공연에서 쥐보이가 Seasons란 제목으로 이 발레의 초안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2~30분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에도 막스 리히터의 음악과 쥐보이의 안무가 잘 어우러져서 느낌이 괜찮았었다. 극장에서도 그렇게 여겼는지 2막짜리 발레로 전곡을 써서 안무하게 해주었고 몇달 전 초연을 했었다.




내가 리히터를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쥐보이의 안무도 우아하고 감성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와서 본 세가지 공연 중 오늘 공연이 제일 맘에 들었다. 그러니까, 프렐조카주의 Le Parc보다는 쥐보이의 이 작품이 좀더 내 취향이었다. 물론 주역을 춘 무용수가 예카테리나 콘다우로바이기도 했지만. 하여튼 오늘 공연은 꽤 좋았다.

(커튼콜 사진은 다 번져서 안 올린다... ㅠㅠ 3층 앞줄에 앉아서 너무 멀기도 했고 조명이 너무 밝았다 ㅠㅠ)



..



공연을 보고 나왔는데... 빗방울이 약간씩 떨어지고 있었다. 흐흑... 료샤랑 레냐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호텔 앞으로 왔는데 그때 다시 개면서 하늘이 보였다. 나는 '아아... 하늘이 보여, 제발 네바 강변을 산책하자' 라고 징징거렸다.



우리는 해군성 공원을 지나 청동기사상 쪽으로 갔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지만 저 멀리에는 파란하늘도 좀 보였다. 표트르에게 인사한 후 길을 건너 네바 강변을 따라 거닐었다. 아아... 그래도 네바 강변 걷긴 하는구나 엉엉... 석양 보는 거라면 더 좋겠지만 엉엉 이게 어디야...










네바 강변을 쭉 따라 걷다가 에르미타주 쪽으로 틀었다. 궁전광장으로 가니 오늘이 바이커 축제일이었다. 그래서 광장에 수많은 오토바이들 집결. 가죽점퍼의 라이더들 우글우글. 내가 또 이런 걸 좋아해서(ㅋㅋ) 넋놓고 그 해골과 가죽 패션과 멋있는 오토바이들을 보고 있는데 료샤가 '야!' 하면서 날 확 잡아끌었다. 사람 많은데 들어가면 밟힌다고 ㅋㅋ 레냐는 '쥬쥬가 좋아하는 해골 옷이 많아!' 하고 소리를 쳤다 ㅋㅋ



..



그런데... 아틀라스 발을 만지며 소원을 빌고 막 내려오는 순간부터 빗방울이... 아니야 아니야... 나는 이 사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싶었지만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와서 카메라 집어넣고 폰으로 찍음. 우중충해진 거리 ㅜㅜ)




료샤의 차는 호텔 앞에 세워두었으므로 그리로 가야 했다. 그러나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금방 그치지 않을까? 우리 그리보예도프 운하 따라 조금만 걸으면 안될까?' 하고 불쌍하게 부탁했다. 료샤는 툴툴댔지만 레냐는 '그래그래!' 하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산 쓰고 그리보예도프 운하 쪽을 따라 걸어가는데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앞에서 비가 또 그쳤음. 그래서 우리는 미하일로프스키 정원을 좀 산책했고 다시 운하를 따라 나왔다. 나온 김에 좀더 걸어서 카잔 성당 쪽을 지나서 수프 비노에 갔다. 여기는 전에 bravebird님이 소개해주셔서 알게 된 곳인데 목소리가 다정하고 매력적인 알렉세이가 있는 곳이다. 료샤랑은 안 갔었다. (알렉세이 얘기하면 또 쿠사리 줄 게 뻔해서 ㅋ) 하지만 레냐랑 료샤도 배가 고프다 했고 나는 극장에서 먹은 빵 한조각 파인애플 몇조각이 전부라 정말 배가 고팠다. 수프 비노는 음식이 맛있고...



알렉세이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쭉 걸어서 수프 비노에 갔다. 그런데 슬프게도 알렉세이가 없었고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전에도 알렉세이는 주말에는 근무를 안했던 것 같음 ㅠㅠ 알렉세이 말고도 안면 있는 점원이 두엇 있긴 한데 오늘 가게 보던 남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는 얼굴이었음 알렉세이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하고팠는데 ㅠㅠ





하여튼 배고프고 너무 지쳐서 생강 레모네이드랑 치킨 수프랑 해산물파스타를 주문했다. 료샤는 핀란드식 우하(크림이 들어가는 생선수프. bravebird님이 여기 핀란드 우하를 좋아하심. 내 입맛엔 조금 짠 편이라 나는 치킨수프가 더 좋았다), 탕수치킨 비슷한게 곁들여진 볶음밥을 시켰고 레냐는 버섯파스타를 시켰다. 수프는 나랑 나눠먹었다. 이곳의 치킨 수프는 긴 쌀이 가득 들어 있고 무척 따뜻해서 꼭 닭곰탕에 밥 말아먹는 기분이라 몸이 따뜻해진다. 작년 여름에 너무 힘들때 여기서 그 수프 먹고 감동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음식을 별로 못 먹던 때였는데...



료샤도 레냐도 음식이 맛있고 분위기도 좋다고 했다. 료샤는 보통 이렇게 조그만 카페 같은 음식점엔 잘 오지 않는다(여기는 테이블이 5개 뿐이고 아주 작다) 사실 덩치 큰 료샤가 앉기에는 의자도 좀 좁은 편이었지만 음식이 맛있고 음악도 좋다면서 의외로 좋아했다. 다 먹은 후 레냐를 위해 치즈케익을 시켜주었다. 작년에 먹었을때 맛있었던 기억이 나서. 레냐는 무척 좋아했다.


..



나와서 걸어나오다 카잔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분수를 보면서. 오래전 미샤가 등장하는 illuminated wall 단편은 이 장소를 배경으로 시작되어 궁전광장의 원주 아래에서 끝난다. 레냐는 작년에 내가 이 분수 앞 벤치에 앉아 그 단편 이야기를 해준걸 기억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는데 레냐가 '쥬쥬가 쓴 글에서 미샤랑 레냐-자기랑 이름 똑같아서 잘 기억함-가 여기서 만났어 그치. 레냐가 여기서 아이스크림 먹었어 그치?' 하고 갑자기 떠올려서 반갑고 귀여웠다.





(그 단편에서 화자인 레냐는 이 벤치 중 하나- 잘 보면 오른쪽의 분홍색 옷 입은 분 앉아 있는 저 벤치-에 앉아 책 읽고 있는 미샤와 마주친다)





분수를 보고 있는데 아까 궁전광장에 모여 있던 바이커들이 우르르 몰려 지나갔다. 네프스키 대로를 꽉 채웠고 차들이 다 멈췄다.



우리는 엘리세예프스키 상점에 가서 과자들과 케익 구경을 했다. 뭘 사지는 않았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호텔 쪽으로 돌아왔다. 료샤는 항상 차를 가지고 다니므로 버스를 타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있어 나랑 레냐가 '바보!' 하고 소리쳤다. (버스 요금이 작년 겨울보다 더 올라서 지금은 40루블임)



호텔 로비에서 잠시 쉬었다. 나는 석양을 보고팠지만 흐려서 실패했다. 대신 황혼녘의 모이카 운하를 좀 거닐었다. 중간에 레냐가 다리 아프다고 했다. 나도 다리가 아팠다. 오늘 많이 걸었다. 나 때문에 어린 레냐가 많이 걸어서 미안해졌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이제 레냐는 내가 안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다. 곧 나만큼 커질 것이다. 료샤는 예전같으면 레냐를 안아주거나 업어주었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이제 다 큰 소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레냐도 이제 '아빠, 다리 아파 업어줘'라고 떼를 쓰지 않는다. 그냥 '다리 아프다, 좀만 쉬었으면' 이라고 말한다. 레냐는 많이 컸다...



내가 '레냐야 미안해. 내가 오랜만에 뻬쩨르 와서 산책하고 싶었는데 너무 많이 걸었나봐. 다리 많이 아프지?' 라고 묻자 레냐는 '나는 금방 안 아파져! 나는 건강해!' 하고 소리치더니 갑자기 '쥬쥬가 집에 안 갔으면 좋겠어. 그러면 맨날 이렇게 같이 걸을 수 있는데. 그러면 하루에 이렇게 많이 안 걸어도 되는데' 라고 한다. 레냐는 빵긋빵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는데 나는 갑자기 그 말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꾹 참았다.






..




우리는 방에 돌아왔다. 레냐는 많이 걸어서 피곤했는지 침대로 기어올라가 살풋 잠이 들었고 나는 료샤와 소파에 앉아(방 업그레이드해준 거 다시 생각해도 참 좋다 ㅋㅋ) 얘기를 좀 나누었다. 감자칩과 하리보 젤리를 깔아놓고 석류 주스를 마셨다. 료샤는 맥주 마시고 싶어했지만 레냐 태우고 운전해야 하므로 나와 주스 나눠마셨다. 그는 몹시도 맥주를 마시고 싶어했다. 그래서 '에이. 여기 방 하나 잡아서 자고 갈까' 하고 정말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는 정말 방을 잡았다. 아니... 여기는 무려 아스토리야 호텔인데... 운전 안하고 맥주 마시고프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방 잡아서 자고 갈 수 있는 부르주아 녀석이 부럽구나... 나는 여기 묵어보려고 환불도 안되는 가장 저렴한 요금 간신히 찾아서 그나마도 큰맘먹고 예약한 거였는데...



료샤는 나보고 오늘 얼마나 걸었는지 확인해보라고 했다. 앱을 보니 8.8킬로나 걸었다. 많이 걸었다. 나는 극장도 갔었기 때문에 료샤랑 레냐보다 더 많이 걸었던 것이다. 료샤는 나에게 몸살날지도 모르니 자라고 했다.



우리는 좀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료샤는 레냐를 살살 깨웠다. 레냐가 집에 가기 싫다고 막 울려는데(이럴땐 아직 아기 같음 ㅋㅋ) 료샤가 아래층에서 자고 갈거라고 하자 '쥬쥬도?' 하고 빵끗 웃는다 ㅋㅋ 아니야 레냐야. 나는 여기서 자고 너는 아빠랑 다른 방에서 자는 거야 ㅋㅋㅋ



료샤랑 레냐는 아래층에 자러 가고 나는 씻고 나와 오늘의 메모를 정리하고 있다.

:
Posted by liontamer

 

새해가 되었다. 올해는 2012년 여름에 구상해서 작년에 시작한 글을 반드시 끝내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내가 이 글의 주인공을 제일 처음 떠올렸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9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극장과 발레와 사람들, 예술가와 창작, 욕망과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는 물론 나이도 어렸고 경험도 자료도 부족했다. 이후 나는 극장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문화예술계에 속한 바닥에서 일하게 되었다. 매우 부족하지만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고, 또 사고의 지평도 넓어졌다.

 

내가 맨처음 이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고 배경도 90년대였다. 미샤는 그 글의 조역이었고 일종의 안티 히어로,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존재였는데 아마도 그건 그때 내가 아직 어렸고 다분히 낭만적인 환상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미샤는 훨씬 예리하고 어둡고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인물, 정치적이고 지배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되살려낸 미샤는 당시의 그와는 많이 다르다. 본질적인 몇 가지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변형되었다.

 

어쨌든 당시 내게 있어 '발레 소설'(그땐 그렇게 가제를 붙였다)은 좀더 경험이 쌓였을 때 쓸 수 있는 미래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난 다른 글들을 썼고 이후 직장에 들어가고 삶에 짓눌리면서 서서히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중간중간에 그 다른 글들에 삽입되는 에피소드 몇개에 미샤를 등장시켰을 뿐이었다.

 

그리고 2012년 여름에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전에 구상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들과 여러 인물들을 모두 놓아둔 채 이 사람을 되살려냈다. 아마도 그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 그를 되살려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때. 이제 나는 그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해 가을에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고 그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구상했던 장편은 작년 10월에야 시작할 수 있었지만...

 

아래의 이야기는 오래 전에 썼던 글이다. 2002년. 미샤를 등장시켰던 세번째 단편이었다. 다른 글에 삽입되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독립적인 단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때 이미 미샤는 내가 맨 처음 생각했던 인물과는 꽤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내가 이 글을 썼던 이유는 이 인물에 대한 갈망보다는 이미 다녀온지 오래되어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던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그때는 통역대학원을 휴학한 상태였고 백수로 놀고 있었다. 지금 직장에 입사하기 한 달 전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미래는 불투명했다.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지조차 전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짧은 단편은 사실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 대한 나의 연서와 같았다.

 

단편의 제목은 앨런 긴스버그의 시 howl의 어느 구절에서 따왔다. 이 시는 어제 발췌했던 장편의 서두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된다.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백야의 레닌그라드(소련 시절 페테르부르크의 이름) 거리를 걷는 두 남자에 대한 얘기다. 둘은 키로프 극장(지금의 마린스키) 무용수이다. 화자는 두 남자 중 하나인 레오니드 핀스키이다. 애칭은 레냐.

 

이 단편은 이전에 내가 쓴 몇 편 안되는 미샤의 이야기들 중 가장 투명하고 부드러운 소설이었다. 왜냐하면 단편의 화자 자체가 선량하고 맑은 심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 순진한 화자의 필터링 속에서 미샤는 일종의 낭만적인 반항아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이 글을 쓸 때 나는 이미 미샤가 본질적으로는 좀 더 어둡고 뒤틀린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적 배경은 1975년 7월. 주인공인 미샤는 스무살이다. 키로프 극장 제1 솔리스트. 9월 시즌이 되면 수석무용수로 승급하게 될테지만 그건 이 단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가상의 인물들이다. 지나이다는 미샤와 오랫동안 같이 무대에 올라간 파트너 발레리나. 다닐로프는 극장 행정감독, 아사예프는 예술감독이다. (이건 내가 소설 속 현실을 구축하기 위해 변형을 가한 것이다. 실제의 키로프 체계와는 다르다)

 

미샤의 본명은 미하일이다. 미샤는 애칭. 친한 사이인 레냐는 종종 미셴카라고도 부른다. (이건 더 친밀하게 부르는 애칭임)

 

십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이라 지금 다시 읽으면 조금 뒷목덜미가 따끔거리긴 하지만.. 어쨌든 올려본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의미에서.

 

글은 약 13페이지 분량이라 짧다. 끝나고 나면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 사진 몇 장.

 

** 이 글을 무단으로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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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minated wall

  

  

 

   

 

 

 

 

 

illuminating all the motionless world of Time between.. 

... Allen Ginsberg, Howl ...

     

 

1975년 7월, 레닌그라드

 

 

미샤와 마주친 곳은 카잔 성당의 분수 앞이었다.

 

이미 열 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이었지만 7월 초의 레닌그라드는 백야의 도시였다. 주위는 여전히 부드러운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홀로 네프스키 거리를 걷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무대에서 내려와 동료들과 함께 있을 시간이었지만 단원들의 반수 이상은 유럽으로 여름 투어를 떠나서 남아 있는 동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는 나도 투어에 끼어야 했지만 여름이 시작될 무렵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남게 되었다. 아쉬운 일이긴 했지만 레닌그라드의 여름보다 아름다운 여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아이스크림을 한손에 든 채 걸음을 옮기면서 가을 시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부상은 그리 심각한 편이 아니었고 디렉터인 아사예프는 ‘라 바야데르’의 안무를 새로 손보고 있었다. 리허설은 다음 주부터였는데 솔로르 역으로는 나와 미샤가 더블 캐스팅되어 있었다. 위에서는 미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지만 그 무렵 미샤 야스민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까다로운 배역인 솔로르의 심리를 탁월하게 해석하는 무용수였기 때문에 그도 도리가 없었다. 나와 미샤의 스타일은 무척 달랐기 때문에 아사예프는 새로운 버전에서 솔로르를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었다.

 

나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서 판탄카를 거쳐 알렉산드린스키 공원 앞을 지났다. 여왕의 거대한 동상이 위압적인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낮이나 이런 백야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한겨울 저녁 발레학교 시절 공원으로 나왔다가 문득 이 동상을 올려다보면 그 푸르스름한 청동빛을 발산하는 자태에 오싹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다리가 조금 아팠기 때문에 나는 카잔 성당의 벤치에서 좀 쉬었다 가기로 했다. 예카테리나 여왕과 마찬가지로 한밤중의 카잔 성당은 어딘지 악마적인 위압감을 느끼게 했지만 다행히 지금은 7월이었고 밤은 낮처럼 환했다.

 

분수가 하얀 물보라를 뿜고 있었다. 나는 분수 쪽으로 다가가다가 미샤를 발견했다. 그는 물방울이 튀어 반쯤 젖어 있는 벤치 귀퉁이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카잔 성당의 분수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고 그는 자주 그 벤치에 와서 책을 읽곤 했다. 주로 도스토예프스키나 푸시킨, 혹은 레르몬토프였는데 가끔은 구하기 힘든 영어 소설들이기도 했다. 그는 금지된 원서들을 구할 수 있는 지하 루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종종 그는 내게 락 음악 잡지나 갱지에 인쇄된 비트 작가들의 시집을 빌려주곤 했다. 내킬 때면 그 자리에서 번역해 읽어주기도 했다.

 

그렇다, 이곳에서 미샤와 마주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한다면.

 

나는 벤치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 안녕, 미셴카. ”

“ 레냐. ”

 

미샤는 고개를 들더니 내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혼자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방해받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발레학교에서 바로 옆 침대를 썼으니까.

 

“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열 시에 출발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다닐로프가 극장 앞으로 오라고 했잖아. ”

“ 그건 다닐로프가 해결할 문제지. ”

 

미샤는 책장을 덮고 잠시 분수의 물줄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책표지를 힐끗 보았다. 안드레예프의 단편집이었다.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부분을 보지 않아도 그가 어느 곳을 읽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단편집에는 미샤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실려 있었다. ‘그는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는 마지막 문장은 학창 시절의 미샤에게 있어서는 성서 구절과도 같았다. 졸업하기 일 년 전인가 우리는 연극학교 친구들의 발표회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단편을 각색한 작품이 올라갔다. 미샤는 연출가였던 루벤의 청을 수락해 나레이션을 맡았는데 난 그가 그 까다로운 문장들을 푸시킨 시처럼 줄줄 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설마, 미하일. 농담이겠지? 다닐로프가 널 가만히 놔둘 것 같아? 잘못하면 새 시즌에 못 나가! ”

 

그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나와는 달리 아무런 부상도 입지 않은 미샤가 이번 유럽 투어에서 제외된 것은 일종의 징계 조치였다. 지난 해 겨울에 우리는 베를린에 투어를 갔는데 미샤는 한밤중에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 락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갔던 것이다. 다닐로프는 펄펄 뛰었고 당과 극장의 명예를 운운하며 여름 투어를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그는 사죄하며 근신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키로프의 지도부에게 있어 미샤 야스민은 골치 아픈 무용수였다.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름이나 가을이면 무용수들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근교의 호화롭고 아름다운 별장으로 불려가곤 했다. 그런 별장의 소유주들은 (소유주라는 어휘에 어폐가 있다 해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진짜 소유주들이었으니까. 그게 소비에트 시대의 진짜 러시아어라는 것이다) 거의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력한 정치가들과 당의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별장에서 파티를 열었고 키로프나 볼쇼이 등 유명 극장의 무용수들을 불러서 춤을 추게 하거나 오페라 가수들을 데려와 아리아를 부르게 했다.

 

그 날 미샤는 다닐로프의 인솔 아래 파트너인 지나이다 세도바와 함께 페테르고프의 별장에 가게 되어 있었다. 역시 당의 권력자인 별장 주인은 대단한 발레 애호가였기 때문에 측근들을 불러 파티를 열기로 했던 것이다. 1군에 속한 무용수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어를 떠나버렸고 나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미샤가 빠져나갈 방법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난 시즌에 미샤가 보여준 무대들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애호가인 주인은 특별히 그와 세도바의 이름을 거명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내 기억으로 그 때 페테르고프로 가게 되어 있던 무용수들은 미샤와 지나이다 세도바, 그리고 올가 베론스카야와 세르게이 카로빈스키였던 것 같다. 비록 후자의 둘은 확신하기가 어렵지만.

 

그런데 지금, 페테르고프로 향하는 차에 타고 있어야 할 미샤 야스민이 내 곁에 앉아 분수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태평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 못 나가게 하라지. ”

“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미셴카! 널 주시하고 있는 게 다닐로프 뿐만이 아니란 걸 몰라? ”

“ 그래, 저기도 하나 있군. ”

 

미샤가 손을 들어 성당 쪽을 가리켰다. 나는 무심코 성당의 거대한 기둥 쪽을 보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사복을 입은 대머리 남자가 기둥 뒤에 서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키로프 극장 무용수 정도 되면 감시 요원들 얼굴 한둘은 알고 있기 마련이다. 비교적 말썽 없이 지냈던 나 역시 외국 투어를 나갈 때마다 길거리에서 그런 얼굴을 발견하곤 했다. 하지만 대낮처럼 환한 네프스키 거리에서, 단독 감시 요원이라니! 언제 미샤는 그렇게 요주의 인물이 된 것일까?

 

차가운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미샤는 흔히 말하는 편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 그는 누구와도 그런 식의 우정을 나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발레학교를 다녔고 극장에서도 좋은 동료로 지내고 있었다. 키로프에 들어가고 처음 일 년 동안은 함께 아파트를 쓰기도 했다. 그 후 극장 측에서는 공동 아파트에서 미샤를 끌어내 지나이다와 함께 2인 단독 아파트에 살게 해 주었다. 극장 측은 젊은 무용수들이 가정을 이루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내게 류다를 붙여 준 것처럼. 류다와 나는 학창 시절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곧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지만 미샤와 지나이다는 사적으로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무대 위에서 그 둘이 보여준 듀엣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관객들이 환상을 품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따금 나는 지나이다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어쨌든 그는 나의 친구였다. 극히 짧은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몇 명의 지인들과 먼 키예프 부근으로 추방당한 드라마 극장 배우가 스치고 지나갔다. 미샤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게 될까? 그에게는 자기 몸을 보존할 만큼 충분한 공포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질책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 것 같았다. 미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책을 옆에 끼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불쑥 물었다.

 

“ 다닐로프가 몇 시까지 기다려줄 것 같아? ”

 

나는 시계를 보았다. 열시 반이었다.

 

“ 최대한 30분? 극장에 전화를 해. 아니면 차라리 이쪽으로 차를 가지고 오라고 하는 편이 낫겠어. ”

“ 30분이면 걸어가도 충분해. ”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성당 기둥 쪽을 바라보았다. 대머리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      *      *

 

 

우리는 별 말 없이 카잔 성당을 나와 거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보예도프 운하를 지나면서 미샤는 가판대에서 낡은 책을 한 권 샀다. 이번에는 푸시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였다.

 

채색 삽화가 들어가 있는 책장을 넘기면서 미샤가 입을 열었다.

 

“ 누굴 출래? ”

“ 뭐? ”

“ 이걸 안무한다면 누굴 추고 싶냐고. ”

 

나는 잠시 흥미진진한 그 서사시의 등장인물들을 떠올려 보았다. 수염을 기른 마법사 체르노모르, 혼인 잔치 때 마법사에게 납치된 아름답고 활기찬 왕녀 류드밀라. 아내를 찾아 떠나는 정의의 용사 루슬란, 루슬란이 마주치게 되는 황야의 거대한 머리, 루슬란을 돕는 노인, 마녀 나이나. 그리고 류드밀라의 구애자들이자 루슬란의 적 세 명, 루슬란과 싸우다 패해 물에 빠져 죽는 검은 기사 로그다이와 비겁하게 기회를 노리는 파를라프, 그리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반해 평온한 호반의 어부로 변하는 라트미르... 모두가 한 번쯤은 무대에서 재현해 볼만한 역이었다.

 

“ 당연히 루슬란이지. 주인공이잖아. ”

“ 난 루슬란에게 주역을 주지 않을 건데? ”

“ 그럼 누구? 류드밀라를 출 생각은 아닐 테고. ”

“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지만 난 로그다이를 출 거야. ”

“ 잘 어울리는데 그래. 막판에 물의 요정에게 끌려가는 걸로 끝나겠군. ”

“ 내 발레에는 네 명 밖에 안 나와. 루슬란, 로그다이, 파를라프, 라트미르. 그게 전부야. ”

“ 그리고 주인공은 로그다이고 말이지? ”

“ 그래. 주인공이 아니어도 루슬란을 춰주겠어? ”

 

내 머리 속에는 그 책의 중반부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루슬란의 칼에 찔려 검은 강물로 떨어지는 로그다이, 깊은 물속으로부터 올라와 젊은 기사의 싸늘한 시체를 품에 안고 만족한 듯 웃으며 사라지는 물의 요정...

 

“ 그래, 물론이지. 네가 안무를 한다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

“ 조만간 할 거야. ”

“ 아사예프가 가만히 있을까? ”

“ 아마 극장 레퍼토리에 들어갈 수는 없을 거야. ”

 

생각에 잠긴 얼굴로 미샤가 말했다. 나는 그가 안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레학교 시절에도 그는 종종 짧은 춤들을 고안하곤 했다. 극장에서도 역할의 해석을 놓고 아사예프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다반사였다.

 

미샤는 운하를 지나 방향을 틀었다. 계속해서 루슬란과 로그다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나는 문득 우리가 궁전 광장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 미셴카! 이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 저쪽으로 돌았어야지! ”

“ 저쪽? 저쪽에 뭐가 있다고. ”

“ 농담이 아니잖아, 극장으로 가려면 반대편으로 갔어야 하잖아. 이쪽은 에르미타주라구! ”

 

물론 내 얘기는 헛된 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샤는 나와 마찬가지로 레닌그라드 토박이였고 누구보다도 도시 골목골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극장엔 안 가. ”

“ 다닐로프는? ”

“ 말했잖아. 그건 다닐로프의 문제야. ”

 

미샤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검은 눈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부드러운 에메랄드 청록색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지나 궁전 광장으로 걸어가면서 미샤가 말했다.

 

“ 그 돼지 같은 놈들 앞에서 춤을 추라고? 뭐가 좋아서? ”

 

가슴이 답답하게 당겨왔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를 찾았다. 눈에는 띄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 미샤에게 그런 고집을 부리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별장에 불려가 춤추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나름대로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무용수였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는 얘기긴 했지만 발레리나들과 밤을 보내기 위해 무용수들을 부르는 역겨운 나리님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미샤는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문제는 다닐로프가 아니었다.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같은 지도부와 미샤의 마찰은 만성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샤는 본능적으로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 말은, 불같은 성격의 다닐로프조차도 미샤를 극장에서 쫓아낼 생각까지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 권력자들의 분노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아는 미샤는 타협하지 않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순간 고집을 부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궁전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꼭대기에 천사상이 조각된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가 엷은 핑크색을 띤 하늘에 반사되어 어렴풋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미샤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 하루뿐이잖아. 네가 전에 그런 곳에 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

“ 그래, 이제 그만둘 때가 됐어. 레냐, 그만둘 때가 됐다고. ”

 

미샤는 기념비를 둘러싼 울타리에 한 손을 대고서 여전히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언성을 높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우린 아직도 20년을 기다려야 할 거야. 어쩌면 20년이 지나고도 아무 것도 오지 않을지도 몰라. 페테르고프 별장의 주인들은 단지 그 이름만 바뀔 뿐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뱃속으로 그곳에 머무르면서 우릴 부를 거야. 당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우리에겐 아무 상관없는 얘기야. 다닐로프더러 별장에 가서 춤을 추라고 해. 이런 밤에는 그 자들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

 

미샤는 엷은 핑크빛 띠가 드리워진 듯한 파르스름한 하늘을 가리켰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당에 대한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귀를 막고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에메랄드 청록색 에르미타주 궁전 기둥 너머로 대머리 남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맙소사, 그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샤가 더 이상 과격한 말을 내뱉지 않기를 빌었다. 그들이 나를 호출한다면 지금 들은 모든 이야기는 그를 시베리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스크나 카프카즈 등지로 보내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심문 앞에서 침묵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공포에 질려 나는 미샤가 입을 다물어 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때 그가 말했다.

 

“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 ”

 

나는 그가 들어 올린 손끝을 보았다. 한밤의 여름 하늘이 부드러운 붉은 보랏빛과 푸른빛 광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름의 레닌그라드 밤하늘이었다. 눈부신 빛으로 흘러넘치는 하늘.

 

미샤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권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손을 허리 뒤로 하고 한 손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채, 기념비 원주 주위를 돌며 천천히 춤추기 시작했다.

 

광장을 거닐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미샤는 고개를 가볍게 젖히고 두 팔로 원을 그리며 춤추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에 그의 검은 머리칼이 비단 스카프처럼 나부꼈고 딱딱한 돌바닥을 스치는 두 발은 흰 섬광 같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것이 무슨 작품에 나오는 춤인지 떠올리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제 미샤는 그늘진 쪽으로 옮겨가 격렬한 스텝으로 도약하고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역광이 그의 젖혀진 목덜미와 가슴을 따라 기묘한 십자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기념비 기둥 위의 천사상을 보았다. 한 손에 십자가를 든 천사상을.

 

로그다이. 나는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로그다이.

 

사방에 빛이 있었다. 미샤는 광채를 발산하며 춤추고 있었다. 궁전 광장은 흘러넘치는 빛들로 가득했고 미샤는 두 손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어루만지며 춤추는 것 같았다. 어둠의 장막을 두들기는 검은 기사처럼. 백야의 부드러운 빛으로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을.

 

나는 미샤가 보이지 않는 루슬란과 마지막 격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미샤가 홀로 춤추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앞에 있는 루슬란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홀린 눈으로 나는 보이지 않는 루슬란의 모든 동작과 스텝을 따라갔다. 마치 그 보이지 않는 기사의 춤이 내 온몸에 지도를 그리고 도장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로그다이의 최후가 왔다. 미샤는 가슴을 움켜쥐고 빙그르르 돌더니 뭔가에 거세게 떠밀린 듯 앞으로 넘어져 무릎을 꿇었다. 천사상의 손에 들린 십자가가 황금빛을 내쏘며 그의 어깨와 등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검은 강물에서 올라온 물의 요정이 싸늘한 두 팔을 벌려 죽은 기사의 몸을 뒤에서 안고 있는 것처럼.

 

갈채와 환호가 내게 정신을 차리게 했다. 몰려든 사람들이 원을 이룬 채 박수를 치고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무수한 극장의 무대들을 밟았지만 나는 그토록 경이에 찬 환호와 갈채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주 작은 환호였고 작은 갈채였지만 그 한순간을 위해서라면 내가 지금껏 올라간 모든 무대와 지금껏 받아온 모든 꽃다발과 찬사를 아낌없이 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빛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미샤는 천천히 일어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타는 듯한 열기가 어린 시선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들을 집어 들었다.

 

“ 가자. ”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어디로? ”

블린이나 먹으러 가자. 센나야 광장 쪽에 카페가 하나 생겼는데 블린을 잘 만들어. ”

 

나는 에르미타주 궁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복 차림의 대머리 남자가 기둥 곁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역시 사복 차림의 키 큰 금발 머리 남자가 함께 있었다.

 

나는 미샤와 함께 궁전 광장을 나와 센나야 쪽으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도 나는 두 남자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미샤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호출이 언제 있을까 하고 의문했다. 다닐로프에 대해, 심문에 대해, 내가 해야 할 대답에 대해 생각했다. 엷은 핑크빛을 띤 하늘에 대해, 투명해진 어둠의 장막에 대해, 십자가를 든 천사상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까? ‘흘러넘치는 빛이야, 레냐. 흘러넘치는 빛이야’ 라는 미샤의 말을 그들에게 옮길 수 있을까?

 

우리는 센나야 광장 뒤편에 있는 카페에 가서 블린을 먹었다. 미샤가 옳았다. 블린은 무척 맛있었다.

 

  

 

2002.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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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가 카잔 성당 분수 앞에서 읽고 있었던 소설은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단편 '비행'이다. 이 글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에 '러시아 일기'에서 쓴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98

 

루슬란과 류드밀라는 언급했던 것과 같이 푸시킨의 유명한 서사시이다. 혹시 안 읽어보셨다면 정말 재미있으니 한번 읽어보셔도 후회 없을듯.

 

어제 올렸던 그 장편 후반부에서 나는 미샤가 저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안무해 키로프 극장 무대에 올리는 이야기를 삽입했다. 그건 일년 후인 1976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로그다이가 주인공이라는 미샤의 말과는 달리 실제 작품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균일한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무대에서 미샤는 로그다이를 춘다. 그리고 루슬란은, 여기서 약속한대로 레냐에게 준다 :) 물론 이것은 가상의 작품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누가 좀 안무해 줬으면 좋겠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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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 장. 2012~2014년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 찍은 것들이다.

 

먼저 미샤의 비밀 장소인 카잔 성당 앞 분수. 네프스키 대로 한복판에 있다. 시민들의 휴식처. 명소이다. 맞은편에는 돔 크니기와 그리보예도프 운하가 있다. 물론 소련 시절 카잔 성당은 성당이 아니라 종교 박물관이었지만...

 

 

 

 

 

 

분수 앞에 이렇게 벤치들이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쉰다.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돔 크니기.

 

이때가 7월 초. 소설의 배경과 같은 시즌. 다만 사진 찍은 건 이른 오후.

 

 

 

 

이 벤치가 미샤가 앉아 책 읽던 자리 :)

 

 

 

나무들 너머로 보면 이렇다. 왼쪽 벤치.

 

 

 

그리고 궁전광장. 예전에 여러 번 올렸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옛 겨울 궁전) 앞 광장이라 궁전광장이라 불린다. 가운데의 저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도 페테르부르크의 상징적 풍경. 미샤는 저 기념 원주 앞에서 춤을 춘다.

 

 

7월, 자정 직전의 하늘. 천사상.

 

미샤는 조금 더 이른 7월 초에 춤을 춘다. 그래서 하늘은 이것보다 훨씬 핑크빛 석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에는 이렇다.

 

 

 

궁전광장.

 

사실 저 돌바닥 위에서 춤추면 발이 꽤 아팠을 듯...

 

 

 

 

알렉산드르 기념 원주를 둘러싼 울타리. 엄밀히 말하면 저 울타리 앞에서 췄다.

 

 

 

 

 울타리 가장자리에 서 있는 가로등. 왼편으로 이삭 성당, 오른편으로 해군성 첨탑이 보인다.

 

..

 

그럼 이제 심기일전해서 다시 쓰던 글로 돌아가야지...

 

 

 

** 2015년 7월에 찍은 카잔 성당과 분수 사진들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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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