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화요일 밤 : 테라사, 수프 비노, 메조닌 카페, 이 도시에서 느끼는 내밀한 공포, 료샤와 대화 2017-19 petersburg2018. 9. 12. 02:44
어제는 많이 피곤했다. 뻬쩨르 와서 내내 기적적으로 비가 안와서 사흘 연빵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오늘도 비가 안왔다. 날씨가 아까웠지만 다리도 너무 아프고 피곤해서 오늘은 가까운 곳 카페와 음식점만 갔다.
원래 한정거장 거리의 돔끄니기 가서 책도 사려 했는데 귀찮아서 미뤘다. 낼 호텔을 옮기는데 사실 돔 끄니기는 지금 숙소에서 더 가깝기 때문에 합리적 행동은 오늘 가는 거였다. 심지어 오늘밤부턴 비도 온다는데.. 그러나 오늘만 사는 토끼는 피곤하단 이유로 그냥 방으로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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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시간 반쯤 잤다. 조식 먹고(스케치대로 보르쉬에 긴쌀밥 말아서 계란말이 대용 오믈렛이랑 연어찜 작은 토막, 올리브랑 양배추볶음 같이 먹음 ㅋ) 근처의 전망 좋기로 핫한 테라사 레스토랑에 갔다. 근데 밖에 앉기엔 이미 추워서 안에 앉았더니 그럭저럭...
테라사는 긴자프로젝트 체인에서 낸 레스토랑인데 이 체인들은 내부 인테리어가 쫌 비슷비슷하다. 넓고 밝고 좀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고 가격이 비싸다. 근데 내 취향엔 지나치게 넓고 지나치게 체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슨 차 한잔이 유럽호텔이나 아스토리야보다 더 비싸.. 빈정 상함.
홍차 마시려다 보랏빛이 이뻐보인다는 이유로 신메뉴란 라벤더티를 주문했는데 망함. 아니, 라벤더에 꿀인지 시럽인지 하여튼 단걸 넣다니 꾸엑.. 게다가 생각했던 이쁜 보라색이라기보단 잉크 풀어놓은 색이어서 실망 ㅠㅠ
사진으로 보면 또 이뻐보이네.. 하지만 입맛 떨어지는 보라색이었다(내 취향 보라색과 좀 다름)
하여튼 테라사에 앉아 폭망한 라벤더 티랑 메도빅(이것도 이쁘게 꾸몄으나 녹색 가루를 뿌려줘서 내 맘에 안듬 ㅠ) 먹으며 스케치를 좀 하고 쉬었다.
그리고는 나와서 십여분 거리의 수프 비노 가서 해물 파스타로 맛없고 비쌌던 테라사를 정화함. 알렉세이가 있었음 더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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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사와 수프 비노는 모두 카잔스카야 거리에 있다. 카잔 성당 뒷길이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길을 거슬러올라오다 카잔 성당에 들렀다. 이 성당 안에 들어온 건 정말 오랜만임. 여기는 밖에서만 보고 안은 잘 안 들어가게 되는 편이라..
하여튼 여기는 성 게오르기 이콘 앞에 초들이 있어서 거기 초를 켰다. 나에겐 언제나 용기와 평온이 필요하니까. 러시아인들이 해석하는 호전적 성 게오르기/성 조지와는 좀 다른 식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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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방에 돌아왔다. 좀 쉬다가 호텔 카페에 내려갔다. 이 메조닌 카페는 예전부터 좋아하던 곳이다. 이 호텔 안 묵어도 한번은 꼭 들렀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그랜드 호텔 유럽이 그랬듯 메조닌 카페도 전같은 충만함을 주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에. (가격은 물가를 반영해 비싸졌지만)
몇년전부터 즐겨 앉던 자리에 앉아 전과 같은 찻잔에 차를 마시고 똑같은 풍경의 아름답고 인공적인 내부를 보면서 문득 뭔가 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든 느낌도 들고...
사실 페테르부르크에 오면 이런 기분이 약간 들때가 있다. 종류는 좀 다르지만... 주로 마린스키 등 극장 갔다가 밤에 버스 타고 운하변을 지나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의 어둡고 고요한 건물들을 지나칠때 그러는 편이다. 시간이 흘러가는것에 대한 깊고 조용한 공포가 있다.
이것은 내가 시간이나 영원성을 받아들이는 시선과도 조금 통해 있다. 혹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생각 같은 것. 사랑하는 도시이지만 그 사랑만큼 어딘가 깊은 곳에는 익숙함과 무관심, 검은 운하의 물과 침묵과 쇠락에 대한 공포가 존재한다. 이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또 누군가와 소리내어 공유하고 공감하기도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몇년 전 글을 쓸때 미샤의 입을 빌어 바닥 없는 운하, 검은 물이 지나가는 파이프에 대해 썼다. 그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면, 존재의 깊은 공포가 없다면 이 도시는 내게 이토록 유의미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돌아오고 또 돌아오는 곳도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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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조난 카페에 한시간 반쯤 앉아있자니 일을 마친 료샤가 들렀다. 나는 그날 직전이라 그런지 몸도 피곤하고 입맛도 없고 자꾸 버거나 자극적인게 먹고팠다.
그래서 호텔에서 젤 가까운 버거킹에 감. 버거킹은 2집 동네에도 있어서 맥도날드가 더 땡겼지만 거긴 거리가 애매했다. 차 세우기도 안 좋고 그렇다고 버스 타고 또 걸어서 갈만큼 먹고픈것도 아니어서. 료샤는 맥도날드보단 부르게르낑(ㅋ) 파라서 좋아했다. 얘는 부르조아인데 입맛은 안 그래서 버거킹이랑 하리보 젤리 그런거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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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와 며칠전 수퍼에서 사온 미니사이즈 아이스와인을 따서 나눠 마시고(료샤가 술이 너무 달다고 짜증냄. 내 입맛에도 너무 달긴 했다. 대신 독하지 않으니까 ㅋ) 이야기를 좀 나눴다. 오늘따라 노어가 힘들어서 버벅댔다. 영어 섞어서 말하는데 이것도 힘들다.
료샤는 나보고 언어 문제라기보단 옛날에 첨 봤을때보다 덜 총명해진거 같다고 반쯤 놀림 + 반쯤 진담으로 말했다. 야! 두뇌노화는 어쩔수 없단 말이야 ㅠㅠ
그래도 이넘은 내가 삐칠까봐 덧붙였다.
“ 맨첨에 봤을땐 진짜 무지 똑똑했단 말이야. 하여튼 그렇게 보였어. “
“ 그래, 한때 똑똑했다고 해줘서 고맙구나 ㅠㅠ “
“ 근데 그때도 щ 발음은 잘 못했어 ㅋㅋ 우다례니예(강세)도 좀 틀리고. “
“ 야! 우리말엔 그 발음 없단 말이야 흐헝... 우다례니예도 없어어 ㅠㅜ “
료샤는 역시 립서비스로 마무리했다.
“ 근데 억양이 좋으니까 쫌 커버돼. “
고맙다 친구야 흑흑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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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샤는 집에 가고 난 내일 숙소 옮겨야 해서 가방을 대충 꾸렸다. 아직 물건들 산게 거의 없어서 괜찮았다. 집에 갈때가 문제지 ㅠㅠ
밤중부터 비온다는데 안오면 좋겠다.
오늘 메모는 무지 길구나. 노어 버벅거리곤 대신 우리말로 길게 썼나... 이번엔 노트북 안가져와서 사실 폰으로 글쓰는게 어렵다. 폰으로 쓰면 어휘도 문장도 어그러진다. 나는 글을 머리와 손을 같이 사용해서 쓰는 편이라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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