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5 목요일 밤 : 눈 펑펑, 다행이다, 조삼모사, 이게 바로 도씨 등장인물의 행태, 하기 싫은 일, 빨리 오심 fragments2022. 12. 15. 21:31
오전부터 눈이 펄펄 내렸다.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점심 시간이 끝나갈 무렵 다시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눈 내리는 모습은 참 예쁘다. 그러나 계속해서 퇴근길 걱정, 부모님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얼마 전 아버지가 넘어져서 디스크가 재발해 수술을 앞두신 터라 길이 미끄러우면 지레 걱정이 됨) 하여튼 사무실 근방 골목과 가게 앞에 눈내리는 사진 몇 장 찍어두었다.
오늘도 바빴지만 그나마 어제나 그저께보다는 나았다. 아침에 아주 일찍 출근해서 예전 건강검진 결과 메일들을 뒤적여보고는 두가지를 깨달았다. 첫번째, 이번에 조직검사를 해 간 위염은 처음 생긴 게 아니라 이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만성위염 증상 중 하나구나 하고 까먹어버린 것 같다. 여기서 사고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1. 전에도 있던 거고 새로운 것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니 별 걱정하지 말자. 원래 끼고 살던 거니까 2. 아니 전에는 조직검사를 안했는데 왜 이번엔 한 걸까, 정말 모양이 이상하고 의심되어서였을까? 처음엔 1로 생각하다가 점점 2가 득세... 이것이 바로 잔걱정 많고 온갖 상상력이 풍부한 자의 특징 ㅜㅜ (맞습니다, 저는 엄청난 N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깨달은 건 거의 항상 열흘만에 결과가 왔지만 재작년 딱 이맘때 받았던 검사 결과는 거의 한달만에 왔다는 것이다. 연말에 그것도 서울에서 받으면 워낙 검사자가 많으니 늦어질수밖에 없나보다, 그러면 어차피 오늘이나 내일 나오지는 않겠네 포기해야겠다 하고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좀 나아졌다. 아마 한참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뭔가 회피모드가 발동한 것 같다.
그런데 오전에 내년 사업과 관계된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한시간 가량 회의를 하고서 자리에 돌아와 점심 먹을 준비를 하는데 그때 톡으로 검진 결과가 나왔다는 알림이 왔다. 딱 열흘만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클릭해 결과지를 읽었는데 다행히 조직검사 결과는 그냥 심한 만성위염이었다. 이것도 좋을 게 없다만(ㅜㅜ 심지어 지난번 처방해줬던 약보다 더 센 걸 줬으니) 그래도 이런저런 걱정으로 많이 불안했었으므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외 걱정했던 몇 가지도 생각보다는 나았다. (상대적인 기준임) 전반적으로는 예전보다 몸 상태는 안 좋아졌다. 초음파 결과 기존에 있었던 결절에 이어 다른쪽에도 결절이 생기고. 이미 체중과 체지방률 증가, 혈압 상승 등은 현장에서 확인했으므로 충격이 덜했다. 안 좋아진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식이조절을 더, 규칙적으로 제대로 하고, 운동 시간을 더 늘려서 감량을 하고 좀더 몸을 돌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놓고는 갑자기 편해진 마음으로, 아침에 싸온 죽을 내팽개치고 눈오는 골목으로 나가서 수제버거를 한개 해치우심. 완전히 조삼모사임 ㅠㅠ 이렇게 하고 말겠다! 하고 다짐한 후 돌아서자마자 정반대되는 극단의 행동. 이것이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 등장인물들의 행태임 ㅜㅜ 하지만 약과 식이요법 덕에, 그리고 인후염/손목통증약 복용이 끝나서 속이 부대끼던 것이 나아진 후에도 내내 죽만 먹고 불안에 떨며 우울해했던지라 나도 모르게 그만 폭발... 오늘 하루 뭐 어때! 하면서 ㅠㅠ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이 가동되어 따뜻한 페퍼민트티와 함께 먹었다. 그리고는 소화를 시키기 위해 골목들을 좀 걸었다. 참회의 기분으로 적어둠. 그래도 저녁엔 계란찜과 밥 조금, 두부국 등 기존 식단으로 먹긴 했다(눈가리고 아웅!)
집에 돌아오면서 끄라스느이 우골과 기도, 그리고 퇴근길 힘들다고 싫어했지만 어쩌면 오늘 내린 눈이 그런 마음의 응답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바쁘게 일했지만 숫자와 단가를 맞추고 문구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유도 알고 있다. 아직 며칠 기한이 있는데다 너무 하기 싫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윗분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고 이 자료를 가지고 가서 헤드쿼터 본부와 논의를 할때도 나는 탁 터놓고 이것을 반영해주지 않아도 된다, 우선순위 아래로 내려달라고 할 작정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당연히 뭔가 최선을 다해 빨리빨리 작업할 의욕 따위가 생길 리가 없음.
하여튼 그래도 3분의 2 가량은 마쳐놓고 퇴근했다. 오늘 눈이 많이 온다고 해서 제일 따뜻한 어그부츠(엄마가 호주 여행에서 사다주셨었던 것으로 이것을 신고 영하 20도의 블라디보스톡에도 두번이나 갔었음)를 신고 왔는데, 이 부츠도 몇년 동안 신어서 늘어났는지 헐거워져서 발이 너무 아프고 걷는게 힘들었다. 어쩌면 너무 추울 때 양말 두개 껴신고 신다가 오늘은 기모스타킹만 신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하철역 계단이 너무 미끄러워서 조마조마했다. 하여튼 무사히 귀가했다. 이 부츠는 이제 수명이 다 됐나보다. 아깝다. 안의 털은 아직 따뜻한데.
붉은 군대가 오늘 저녁 도래하셨다. 약간 빠르게 오셨으나 오차 범위 이내였다. 아마 여행 다녀오느라 피곤했고 직후 몸도 아팠고, 또 업무 스트레스에 검진 스트레스가 겹쳤다가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가 싶다. 그래서 오늘의 굳건한 결심에서 식이조절도 운동도 다 사라졌음. 늦지 않게 자야겠다. 버텨보려다 좀전에 약을 먹었는데 아직 아프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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