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무려 8:45에 숙소를 나서서 어제 발굴한 몬 카페(mon.)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영원한 휴가님이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 더블 에스프레소를 드셨고(내가 온 후 크림 든 도넛 추가하시고 조금 남은 커피에 우유 추가하심. 추가 우유는 식물성만 되는듯 오트밀크였다) 9시쯤 내가 합류하였다.
아침 메뉴가 이것저것 있었는데 라클레트, 체다, 그라나 파다노 치즈를 얹어 구운 사워도우 샌드위치인 ‘수퍼 치즈 샌드위치’와 아몬드향 홍차(블랙티는 이것뿐)를 골랐다. 샌드위치가 엄청 컸다! 맛없을수 없는 조합이라 당연히 맛있었는데 너무 커서 반만 먹고 반은 싸옴. 이번 여행에서 카페 아침 첨 먹어봄. 고마워요, 영원한 휴가님!
아침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았다. 귀국해 다시 업무 복귀하면 여기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샌드위치는 치즈 얹어 구워 나와야 하므로 번호표를 줌
내가 다 읽고 영원한 휴가님께 드린 스트루갸츠키 형제의 <세상이 끝나기까지 아직 10억년> 우리는 그냥 10억이라 부른다. 이 책은 빌니우스의 온갖 카페를 다 가보고 있음 :)
좀 늦게 잠들었고 8시 안되어 깨어났다. 욕조에 물을 받는데 좀 받다 보니 미지근했다. 뜨거운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찬물은 아니고 약간 찹찰한 미온수 정도였다. 나는 매우 게으르므로 리셉션에 전화하는 대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간밤에 감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손님이 많은가. 이 시간에 온수를 많이 쓰나? 여태까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오후에도 이러면 얘기를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하여튼 샤워를 함.
오늘은 조식 먹으러 내려가지 않음. 영원한 휴가님이 나의 피나비야 서양배 코티지 치즈 패스트리 타령에 일터에 들르셨다가 피나비야 문 열자마자 그것을 사서 와주심. 흐흐흑 감동. 함께 보내는 시간들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해가 나고 있었기 때문에 ‘앗 그러면 이 패스트리를 밖에 나가서 먹어야지’ 하고는 함께 방을 나섰다. 그런데 구름이 꽉 차 있었고 그것들이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고 있어서 하늘의 파란 구석이 아주 조금밖에 없었다! 바람도 좀 불었다. 일단 채광이 좋은 보키에치우 후라칸에 갔다. 첨엔 테이스트 맵에 갈까 했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열두시 반 즈음이었는데 오늘따라 후라칸에는 손님이 너무너무 많았다. 혹시 후라카나스가 있으려나 그러면 힘들어하겠네 싶었는데 여자 점원 한명이 있었고 줄선 손님들에 쫄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천천히 주문받고 하나하나씩 만들어주었다. 아마 우리 나라 같았으면... (하긴 점원도 두세명은 됐을 거야) 나와 있으면 내가 지금 일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여유의 정도에 대한 기준 자체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기다렸다가 영원한 휴가님의 플랫 화이트, 나의 얼그레이와 메도빅을 시켰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야외 테이블에 앉음. 슬프게도 해가 아주 잠깐 반짝 비추다가 말았음. 그래도 밖에 앉을만했다. 나는 여기 앉아 피나비야의 고대했던 서양배 코티지 치즈 패스트리를 해치우고 메도빅도 먹었음. 맨 위 사진이 아직 차를 따르기 전, 패스트리 개봉하기 전의 후라칸 야외 테이블.
아점을 먹은 후 영원한 휴가님은 귀가하시고 나는 큰 결심 하에 필리에스 거리로 갔다. 해가 좀 나고 하늘이 파래서 용기를 내서... (필리에스 거리 갈 때마다 추웠기 때문에 이번에 와서는 갈때마다 좀 내키지 않는다. 예전엔 여기를 제일 많이 왔는데) 지난번에 스카프와 머그를 찍어두었던 기념품 가게 Local에 갔다. 그리고는 선물용으로는 자작나무 티코스터를 몇 개 사고 정작 내가 갖고팠던 푸른색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울 혼방의 스카프를 샀음. 역시나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근데 바람이 많이 불었고, 또 나는 푸른색을 좋아하고, 스카프를 좋아하고 등등 마구 정당화. 이 스카프 맬 때마다 이 여행을 생각할거야 하고 의미 부여.
그리고는 스티클리우 거리로 접어들 무렵 바람 불어 춥자 얼른 이 스카프를 둘렀다. 내가 좋아하는 작은 정교 성당에 들러보려 했는데 오늘도 문이 닫혀 있었다. 매일 열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후에 왔는데도 닫혀 있는 걸 보니... 하여튼 그래서 나는 스티클리우 거리를 좀 걷다가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 러브 스토리 카페에 들어갔고 라떼를 한 잔 마신 후 나왔다. 그 다음엔 디조이에서 보키에치우 거리로 들어와서(이 루트를 제일 자주 다니는 것 같음. 거기 더해 엘스카가 있는 필리모 거리) 이딸랄라에 들어가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두 카페 얘기는 따로 올렸으니 생략.
이딸랄라에서 나오니 4시 즈음이었다. 오늘은 웍에서 밥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라떼와 레모네이드 때문에 배가 덜 꺼져서 시간이 좀 애매했고 그렇다고 테이크아웃해가자니 그건 싫고(밥도 식고 또 날씨가 맑으니 빨리 들어가기 아까움. 한번 들어가면 게으른 나는 안 나올 게 뻔함) 근데 바람은 불고 어떡하지 하며 뭉기적대며 보키에치우에서 빌니아우스 거리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영원한 휴가님께서 일 때문에 나왔다가 구시가로 내려오셔서 몬 카페에 가신다고 하셔서 ‘어머 잘됐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카페인데. 거기 갔다가 나오면 저녁 먹을 시간도 되겠네’ 하고 좋아하며 도로 빌니아우스에서 보키에치우로 거슬러 올라가 미칼로야우스 거리의 몬에 갔다. 몬에 대해서도 따로 올렸으니 생략.
영원한 휴가님은 아이들을 픽업하러 가시고 나는 이제 적당히 저녁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빌니아우스 거리의 웍으로 갔다. 걸어가는 길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좀 추워졌기에 식당으로 들어가니 따뜻해서 좋았다. 오늘은 새롭게 타이바질 치킨 덮밥을 먹을까 했는데 향신료 맛이 강하려나 싶어 그냥 돈부리를 시켰다. 역시 맛있었다. 그리고 역시 한국인은 쌀밥이 분명해. 밥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짐.
밥을 먹고 나오니 해가 지면서 거리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홀리 도넛에 가서 벨리니를 마시거나 숙소 바로 근처에 있다는 영화관에 딸린 백스테이지 카페 2호점에 가보고 싶었지만 바람 불어서 추웠고 더 이상 뭘 먹기란 불가능했으므로 길을 건너 호텔로 돌아왔다. 귀가하는 도중 제일 가까운 나르베센 키오스크에서 물을 한 병 샀다. 여기는 0.5리터만 판다. 그리고 확실히 리미나 이키보다는 좀 비싸다. 넵투나스보다 10센트 저렴하기도 하고 또 궁금해서 나르베센 상표가 붙어 있는 걸로 사봤는데 마셔보니 그냥 별 맛이 없는 중립적이고 가벼운 물이다.
방에 돌아와 먼저 온수부터 틀어보니 뜨거운 물이 잘 나와서 만족했다. 리셉션에 얘기하는 것도 귀찮은데. 그래서 온수 목욕을 하고 머리도 감고 말리고 빨래도 하고... 그런 다음에는 한시간 가량 업무 메일들을 확인하고 몇 가지에는 답신을 해주었다. 좀 골치 아픈 건들이 있긴 한데... 돌아가서 생각해야지. 그리고는 오늘의 카페 이야기들과 메모를 적으니 또다시 벌써 열 시네. 이제 목금토일 남았어 흑흑... 월요일도 오후 3~4시까진 머무르니까 4일 반 남았네. 가방은 내일 저녁부터 조금씩 꾸려야겠다. 먹을 거라든지 소모품은 대충 많이 없어졌는데 내가 옷을 세벌이나 사고 스카프도 사고 나뚜라 시베리카에서 샤워젤을 두 병이나 샀다 ㅎㅎㅎ 뭐 그래도 돌아갈 때의 짐 꾸리는 건 덜 힘드니까. 아아아아 근데 가방 꾸리기 싫어, 여행 끝나는 거 싫어.
남은 날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계획이 아직 없다. 안 가본 카페가 한둘 있으려나. 좋아하는 카페에 가고 그냥 이렇게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오늘도 무척 좋은 하루였다. 여행 와서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좋은 순간들이다.
오늘은 10,655보. 6.6킬로. 생각보다 많이 걸었네. 반경 자체는 여러 군데가 아니었는데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런가 보다. 하긴 게디미나스에서 필리에스로 곧장 가면 직선 코스라 금방인데 보키에치우에서 디조이를 거쳐서 가면 돌아서 가는 거긴 하지. (근데 이것도 지도로 다시 계산해보면 비슷한 거리일지도 몰라, 나는 방향치 공간치라서)
필리에스와 스티클리우 거리 갔다가 나오는 길에 찍은 디조이 거리와 구시청사 일부. 여기가 항상 하늘이 제일 파랗다. 그러니까 여름엔 힘들었나보다. 지금은 좋은데.
몬(mon.)은 미칼로야우스 거리에 있는 카페이다. 거리 이름 발음이 정확한지 잘 모르겠네. 아이고 헷갈려. 미콜라유스 미칼로야우스 흐흐흑... 이 거리는 보키에치우 거리에서 좁은 골목처럼 이어져 있다. 여기 말고 좀더 넓은 트라쿠 거리도 있다. 트라쿠 거리에는 컵룸 카페가 있고 거기를 따라 올라가면 필리모 거리로 가서 엘스카로 갈 수 있다. (으앙 지리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뿌듯해... 방향치라서. 여행에서 뭔가 지식이 남은 것 같아)
여기는 영원한 휴가님이 아침에 아이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신 후 이따금 들르신다고 했었다. 궁금해서 얼마전 구글맵 리뷰를 검색해보니 '크게 색다를 건 없지만 깔끔하고 좋은 카페입니다. 화장실에서도 좋은 향이 납니다' 라는 리뷰가 인상적이었다. 색다르지 않아도 깔끔하고 좋은 카페 찾기가 은근히 어렵고, 화장실에서 좋은 향이 난다니까 그래? 정말? 무슨 향이 날까 하고 호기심 발동. 그래서 가기 전에 한번은 들러봐야지 하고 있던 터에 오늘 오후에 영원한 휴가님이 여기 들르신다 하여 나도 가보았다.
여기는 스타일을 보면 컵룸 카페를 좀더 크고 고객친화적으로 만든 느낌이었다. 하지만 디저트와 빵이 은근히 많았고(에클레어와 케익과 크루아상, 도넛 등이 카운터 위에 매우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점원이 매우 친절했다. 나는 이미 홍차, 라떼, 레모네이드를 마셨고 저녁도 먹어야 했으므로 콤부차를 시켰다(콤부차 있는 것도 신기신기. 빌니우스 카페들은 콤부차, 말차, 말차라떼 같은 것들을 많이 내놓는다. 그런데 왜 홍차 종류는 별로 없는지 여전히 나에게는 미스터리 ㅎㅎㅎ)
그런데 이때 나는 또 아우구스타스 때처럼 헷갈림/물고기 기억력. 콤부차랑 다른 차를 헷갈려서 철석같이 이것은 따뜻한 차라고 믿음. 그런데 지금도 무슨 차랑 헷갈렸던 건지 모르겠다. 점원이 무슨 맛 무슨 맛 있다고 말해주는데 순간 나는 '응?' 하는 상태가 되어 '추천해주세요' 라고 말했고 홀리 바질 맛을 추천해줘서 그것을 시킴. 차가운 탄산 콤부차를 마시면서 '으응?' 하는 상태가 됨. 아 근데 콤부차 안 마셔본 것도 아닌데 나는 무슨 차랑 헷갈렸던 걸까??? 아직도 기억이 안 남. 흑흑 물고기 기억력.
하여튼 막 콤부차를 받아서 자리에 앉았는데 미니멀리즘 같으면서도 의외로 의자가 편했고 예상보다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리뷰에서 '색다를 건 없지만 깔끔하고 좋은' 이라고 한 게 이해가 됐다. 오 이런 카페 사무실 근처에 있으면 자주 들를 것 같다.
영원한 휴가님이 곧 오셔서 우리는 야외로 나갔다. (더블 에스프레소 시키신 것으로 추정됨) 이 카페는 안뜰이 있는 건물에 입주해 있었고 그 안뜰에는 지붕도 조그맣게 있고 뭔가 아늑했다. 야외 테이블들이 여럿 있었고 한쪽에는 난로도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지만 그렇게 춥지 않았다. 여기도 엘스카처럼 흡연자 친화적인 카페로 보였다. (테이스트 맵은 커피부심이 강력한 카페라 야외 테이블을 많이 놓긴 했지만 거기서 흡연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함) 자리에 앉아 콤부차를 마시면서 가방에 넣어두었던 미니 킨더 초콜릿을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문을 열고 안뜰의 야외 테이블로 나오는 손님들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드디어 피우고 싶은 담배를 피울 수 있다!' 하는 기대감과 충족감으로 가득한 표정 같았다. 행복해보여서 보는 것도 좋다.
이야기 나누느라 카페 안쪽이랑 안뜰의 야외 사진은 별로 못 찍었지만 그래도 맘에 드는 카페라 따로 남겨둔다. 생각날 것 같은 카페라 잘 들러본 것 같다 :)
출입문도 미니멀리즘 느낌.
내부는 이렇다. 뭔가 휑해보이는데 의외로 안에 들어가 앉으면 그렇게 썰렁한 느낌은 아님. 의자가 편해서 그런가.
우드 톤이라 덜 차가워보이는지도 모르겠음. 하여튼 쿠야와 콤부차. 맨 위 사진보다 이 사진이 좀더 카페를 길게 잡았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올려봄.
이번 빌니우스 여행에서 엘스카 다음으로 자주 간 곳은 이딸랄라 카페, 그리고 그 다음은 후라칸이다. 그런데 후라칸은 여러 지점이 있고 보통은 야외에 잠깐 앉았던 터라 역시 투 톱은 엘스카와 이딸랄라이다. 둘다 밝고 환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딸랄라는 손님들로 북적거려서 산만하고 복잡한 편이지만 운좋을 땐 괜찮은 자리에 앉을 수 있고 해가 날 때는 야외에 앉을 수 있다. 그리고 참 묘하게도 손님들이 많아서 웅성웅성 시끌시끌한데도 나는 이 카페에서 독서가 참 잘된다. 엘스카보다도 더 집중이 잘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말로 된 책 말고.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 말이다. 아마 외국인 손님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음에 민감해서 노래도 우리 말 가사가 들어오면 힘들어하는 편인데(그래서 연극이나 뮤지컬, 오페라보다 발레와 클래식 연주를 더 좋아한다. 락음악은 좀 예외) 여기서는 여러 나라 말들이 백색 소음으로 들려와서 그런 것 같다. 생각해보면 카페 에벨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하여튼 그래서 여기 오면 의외로 책 읽는 게 좋다.
오늘은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 카페에서 나온 후 조금 걷다가 이딸랄라로 갔다. 엘스카에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게다가 햇살까지 드니까 더욱) 동선도 그렇고 여기가 오늘은 더 편했다. 이미 후라칸에서 얼그레이, 아우구스타스에서 라떼를 마셨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레모네이드 주문. 목이 마르기도 했다. 레모네이드는 그냥저냥 무난한 맛이었다. 달달했다. 자리가 꽉 차 있었고 중간 복도 자리는 싫었는데 창가 그네 바로 뒤에 큰 단체 테이블이 있어 거기 앉았다. 여기는 등받이 없는 의자라 좀 망설였으나 막상 앉으니 편했고 또 볕도 잘 들어오고 책읽기도 좋았다. 옆에는 혼자 와서 열심히 노트북으로 일하던 젊은 남자(랩탑 옆에 업무다이어리 같은 걸 여러개 쌓아놓고 그 위에 빈 카푸치노 잔과 물컵을 올려두고 집중...), 그리고 열띠게 얘기를 나누던 독일 여자분 두명이 앉아 있었다. 나중에 노트북으로 일하던 청년이 나가서 그 자리로 옮겼음. 책을 여러 페이지 읽어서 그래도 이 소설을 이제 40여페이지 가량 읽었다. 아아 이거 한국 돌아가면 과연 이어서 쭉 다 클리어할 수 있을까?
책을 읽다가 4시 좀 안되어 일어났다. 떠나기 전에 한번쯤은 더 들를 것 같은 이딸랄라 카페. 뭔가 산만한데 어째선지 뭔가 편한 곳이다. (하지만 비싸다!)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의 러브 스토리 카페(너무 이름이 길어서 제목엔 그냥 사람 이름만 넣었음)는 스티클리우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스티클리우 거리는 좁은 골목인데 디조이 거리에서 진입하는 쪽에는 천사 조형물을 달아두었고(시즌별로 장식 조형물을 바꾼다), 이 카페와 바로 근처의 포뉴 라이메(오래된 전통의 과자/케익 카페)가 어마어마한 꽃장식으로 시선을 잡아끈다. 그런데 포뉴 라이메가 내가 도착했을 무렵 공사를 하며 기존 장식을 뜯어내길래 뭔가 또 새로운 엄청난 장식을 하려나보다 하고 기대 아닌 기대를 하였으나 기본 베이스인 거대 마카롱 장식 외엔 추가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아서(아마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새 장식을 하려는 듯하다) 이 아우구스타스 바르보라 카페만 아주 독보적으로 화려하게 보인다. 그래도 가을이라 이 색상과 장식은 한결 나은 것 같다. 재작년에 왔을 땐 온통 분홍분홍 꽃장식이 가득해서 너무너무 부담됐었다 ㅎㅎㅎ 이 컬러는 나쁘지 않다.
몇번이나 이 앞을 지나가면서도 내가 요즘 선글라스나 변색렌즈 안경을 쓰고 다녀서인가 색깔 구분을 정확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 색채를 검정과 주황이라 착각하고는 '아니 저것은 너무나도 러시아의 성 게오르기 무공훈장 문양과 컬러 아닌가, 여기는 우크라이나 지지하는 곳인데 어떻게 저리도 대담하게...' 라고 걱정했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저것은 녹색과 오렌지색이었음. 흑흑... 여기가 그늘진 곳이라 그랬을 거야 엉엉...
여기도 일종의 명소 카페이고 관광객들이 저 화려한 장식 앞에서 사진찍는 스팟이기도 한데 지금은 관광 성수기가 아니다 보니 카페가 전처럼 북적이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재작년 6월에 왔을 때 새벽의 문에 다녀왔다가 너무 지치고 더워서 여기 들어가 아페롤 스피리츠와 케익을 시켜서 먹었는데 스피리츠는 괜찮았지만 케익이 너무 작은데 돼먹지 않게 비싸고(8유로!) 게다가 맛이 별로라 크게 실망하여 올해는 여기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외부의 분홍장미 장식도 너무 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또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자 '아 그런데 또 안 가보면 나중에 섭섭할 거 같다... 다시 가보면 또 좋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에 오늘 오후에 가보았다.
여기는 여름보다는 좀 싸늘할 때 오는 게 더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카페가 작고 테이블이 몇개 없고 조명이 어두우며 커피와 차 외에도 칵테일이나 알콜 등 바 메뉴들이 있고, 테이블에는 초를 켜준다. 혼자 오는 것보다는 커플이 오는 쪽이 잘 어울리는 카페이다. 나는 이번에는 그냥 라떼를 주문했다. 케익은 주문하지 않음. 라떼는 매우 연하고 부드러워서 나도 마실만 했다. 커피의 진한 맛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좀 싱거울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만족함(진하면 힘들어하는 자) 어둑어둑한 겨울에 연인과 함께 오거나, 온기와 작은 빛을 찾아 잠깐 몸을 녹이고 가고 싶은 손님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재작년에 비해 이미지가 상당히 만회되었음. 역시 카페는 한번 가서 판단하면 안되는 것 같다.
아우구스타스와 바르보라는 리투아니아의 로미오와 줄리엣 비슷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카페 이름도 이렇게 로맨틱하게 붙인 것 같다. 케익도 아우구스타스 왕자, 바르보라 공주 뭐 이런 이름들인데 나는 전에 바르보라 공주를 먹었다가 실망했던 것 같음. (아닌가, 왕자였나? 가물가물... 기억에서 지웠나보다)
사진 몇 장. 내부가 어두웠고 역광이 들어서 많이 찍지는 못했다. 쿠야도 데려갔는데 이녀석도 역광을 받아서 생각보다 이쁘게 나온 사진이 없음. 쿠야는 역시 엘스카에서 제일 이쁘게 나오는 것 같다.
저 장미들은 당연히 모두 조화입니다. 저게 자나 장미를 많이 닮았다. 나는 이따금 자나 장미를 주문했었는데(작고 동글동글한 화형이 귀여워서) 재작년 이후엔 자나 장미만 보면 이 카페의 조화 장식이 생각나서 '가짜 꽃...' 하는 느낌에 주문을 거의 안 하게 되었다. 자나 장미는 웬 날벼락인가 ㅠㅠ
재작년엔 웨슬리 스나입스를 닮은 남자분이 고독하게 독주를 드시고 계셨는데 오늘은 또 누군가 어떤 배우를 연상시키는 이 분이 혼자 앉아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