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피곤하게 잤던 것 같다. 어제 많이 걷긴 했나보다. 7시간 가량 잔 것 같긴 한데 중간에 안 깨고 잤으니 그 정도면 나에게는 양호한 수면이었음.
영원한 휴가님이 불러주신 덕분에 오늘도 아침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나가서 심지어 백스테이지 카페의 브런치에 성공하여 힙한 빌니우스인의 아침을 보냈다.
그리고는 이딸랄라에 가서 ‘테이스트 맵보다 세배는 연할 걸요’ 라고 하셨던 이곳의 커피를 시도. 플랫 화이트를 시켰는데 확실히 연해서 별로 쓰지 않았다(그래도 설탕은 넣었습니다) 영원한 휴가님은 에스프레소 한잔 드시고 들어가시고 나는 이딸랄라에 앉아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미운 백조들’을 이어 읽다가 노어를 보니 급 당분이 필요해져서 디저트를 하나 추가했다. 사이즈 큰 케익은 과할 것 같았고 안 먹어본 좀 작은 걸 먹고파서 크렘 브륄레를 주문(케익보다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 이렇게 하여 나는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서 그런지 금요일이라 그런지 많이 피곤해 보였던 친절한 젊은 직원을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조그만 홍학 문양들이 이쁘게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는 청년이라 나는 그를 ‘홍학청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 회사에서 내가 데리고 일했던 인턴 직원과 비슷한 스타일이라 어쩐지 정이 갔다.
그런데 우리는 맨첨 주문하면서 ‘플랫 화이트는 안에서 먹을 거고 에스프레소는 테이크아웃으로 밖에서 먹을거에요’ 라고 주문. 안에 자리를 맡아놓은 후 잠깐 야외테이블로 나간 탓에 홍학청년은 두 개의 컵을 들고 야외로 나와야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내가 실내 테이블로 옮긴 후 노어의 압박으로 디저트를 주문하면서 하필 크렘 브륄레를 고르는바람에 홍학청년은 ‘아... 이거 여기서 드실 거죠?’ 라고 물었고 나는 ‘그럼요~’라고 대답. 근데 나는 그때 잠시 이 디저트는 겉을 토치로 그을려 설탕코팅을 해줘야 한다는 것을 망각... 판매하는 원두와 잔을 구경하고 있는데 바 너머를 보니 홍학청년이 열심히 토치로 나의 크렘 브륄레의 캐러멜 코팅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구 우리 인턴 닮은 저 어리고 병약해 보이는 애가 힘들겠구나. 다 되면 저 디저트 접시는 내가 받아서 가야겠다’ 라고 생각해서 바 앞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동선이 안 맞아서 결국 홍학청년은 크렘 브륄레 접시를 들고 한 단을 올라와 내 테이블에 놓아주고 감(심지어 내가 안에서도 테이블도 한번 옮겼음) 시킬 거면 한번에 시키지... 하는 맘이 들었을거야 흑흑... 그래도 내가 이딸랄라 자주 와서 단시간 내 매상 올려줬으니까 그러려니 하렴(홍학청년 : 나는 알바란 말이야! 대체 우리 카페는 어째서 크렘 브륄레 같은 귀찮은 디저트를 파는 거야, 그거 없어도 다른 -비싼- 디저트 많잖아 엉엉)
하여튼 이딸랄라에서는 독서가 잘되므로 ‘미운 백조들’을 10페이지나 읽었다. 그깟 10페이지라 하시겠지만 노어라서 힘들다고요 흐흑... 그래도 카페를 전전하며 조금씩 읽어서 이미 53페이지 진입! 여기까지 읽는 데 이딸랄라가 큰 공헌! 아침에 일찍 나온 덕에 12시 무렵 이미 카페 2곳 클리어하고 브런치에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카페에서 나와 천천히 빌니아우스 거리로 진입했다. 일찍 일어나 나왔기에 좀 피곤했고 일단 방에 좀 가서 정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빌니아우스에선 유로코스에 들러 나뚜라 시베리카의 자매 브랜드에서 나온 핸드크림을 하나 샀고, 이후 게디미나스의 드로가스에서는 오자마자 샀던 핸드크림을 하나 더 샀다. 이 상표 핸드크림이 끈적이지 않고 무난하고 좋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오면 좋겠는데. 록시땅처럼 리치하지는 않지만 손씻고 틈틈이 발라주기는 좋다. 그리고 할인행사 중인 록시땅에도 잠깐 들르고, 숙소 앞 이키에 들러 팀바크 복숭아사과주스를 발견해 그것과 함께 맨날 볼때마다 ‘저건 무슨 맛일까?’ 하고 궁금했던 ‘코리안 바비큐맛’ 볶음컵라면을 사서 방에 돌아옴. 1시 무렵쯤 됐던 것 같다. 청소가 다 되어 있어 뿌듯했다. 흐흑, 이제 돌아가면 청소 아무도 안 해줘, 우렁이 없어. 내가 다 해야돼, 그나마도 토요일에 한번 몰아서 해야 돼. 시트랑 이불도 다 내가 빨고 널고 갈아야돼 흐앙...
(이게 유로코스랑 드로가스에서 산 나의 소박한 기념품 핸드크림 ㅎㅎㅎ)
방에 돌아와서는 간단히 씻고 그 코리안 바비큐맛 볶음컵라면을 먹어보았다. 아니 이게 무슨 코리안 바비큐야. 간장 냄새가 물씬 나고 어딘가 잡채와 나물 양념 맛이 약간 나고.. 끝맛은 비빔면 맛도 조금 났는데 하여튼 맛이 없었다. 흐흑... 그래서 반밖에 못 먹음. 여기서 먹어본 한국 스타일 붙인 음식들 중에선 아침의 김치 오믈렛이 제일 나았던 걸로 결론.
그리고 가방을 아주 조금 꾸렸다. 꾸린 것도 아니고, 이제 며칠 안 남았으니 안 입을 것 같은 옷 일부를 미리 개켜서 트렁크 속 압축가방 안에 넣어두고 책 두세권, 며칠 전에 샀던 리넨 기념품을 넣어둔 게 전부임. 근데 두꺼운 옷들은 전부 남아 있으므로 꾸린 거라고 할 수도 없다만. 나머지는 내일이랑 모레!
이후 방에서 좀 쉬었다. 내가 머무르는 호텔은 사실 레스토랑이 유명한 곳이다. 호텔 자체보다 동명의 레스토랑과 시그니처 메뉴가 유명함. 소련 시절인 1959년에 게디미나스 대로에 오픈한 이래 빌니우스의 유명 레스토랑으로 역사적인 곳 운운 하고 호텔 책자에 적혀 있는데, 호텔의 자기 자랑만은 아니고 유서깊은 곳은 맞는 것 같다. 좀 어르신들이 오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는 키예프식 치킨 커틀릿(영어로는 그냥 치킨 키예프라고 한다. 아 이제 키이우라고 해야 하나ㅜㅜ) 나는 이 식당에서 매일 조식을 먹으므로 굳이 식사를 따로 해본적은 없었는데 막상 갈 때가 다가오니 ‘아니 근데 유명식당이 딸린 호텔에 25일이나 묵었는데 시그니처 메뉴를 안 먹어본 것도 아쉽지 않나’ 하는 생각에 저녁을 먹어보기로 했다. 토요일에 갈까 했는데 토요일은 이미 만석이라 오늘 이른 저녁으로 당일예약을 함.
그래서 영원한 휴가님과 함께 5시에 유서깊은 네링가 레스토랑에서 시그니처 메뉴인 치킨 키예프, 그리고 내가 좋아하지만 음식점마다 편차가 있는 비프 스트로가노프(소련 때부터 있었던 레스토랑이면 맛있을 것 같아서), 거기에 화이트 와인 한잔과 핑크 레모네이드 한잔 주문. 담당 서버는 나의 주문에 ‘엑설런트 초이스’라고 했다. 주변 테이블에서도 치킨 키예프 주문이 대세였으니 시그니처는 시그니처인가보다. 그리고 새우 플랑베 요리가 있어 두어번 근처 테이블에서 불쇼가 펼쳐짐. 아 저거 때문에 저녁에 환기시키려고 내 방 창문 열어놓으면 막 연기랑 맛있는 냄새가 올라온 건가!
음식이 나왔다. 레스토랑 조명도 그렇고 원래 얘네들이 옛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요리인데다 소련 시절 생긴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음식 비주얼은 안 이뻐보이지만... 치킨 키예프 맛있었다. 이 레스토랑은 사진과 같이 커틀릿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주는 게 특징인 것 같다. 커틀릿을 가르자 치킨 키예프의 상징인 버터기름이 주르륵 아주 풍성하게 흘러나왔다(맨첨 러시아에서 이거 시켰을 때 이 기름 흘러나오는 것에 기절초풍했었음 ㅋㅋ) 그런데 느끼하지 않았고 맛있었다. 아쉽게도 비프 스트로가노프는 소스에 너무 토마토가 많이 들어가서 소고기 자체에서 나오는 녹진한 갈색 소스 맛이 덜했다. 양도 많아서(식전빵에 가니쉬 야채랑 감자 등등까지 먹느라) 스트로가노프는 남김. 그래도 배부르게 잘 먹고 만족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호텔의 유명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도 클리어하여 오늘은 아주 뿌듯한 하루가 되었다.
영원한 휴가님이 귀가하시고 나는 목욕과 머리감기, 말리기 등 귀찮은 일을 마치고 조금 늦게 오늘의 메모를 쓰고 있다. 아 이제 주말 이틀 지나면 월요일 저녁에 떠나야 해. 흑흑... 그래도 정말 충만한 여행이다. 내일은 해가 잠깐 난다는데(원래 오늘 해 난다고 했는데 안 났음) 부디 잠깐이라도 햇살이랑 파란 하늘 볼 수 있기를.
오늘은 7,951보. 4.8킬로. 보키에치우 거리 왕복 정도에 저녁도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어서 오늘은 어제의 절반 가량만 움직였음.
나머지 음식 사진 몇 장으로 마무리. 근데 먹느라 사진 진짜 대충 찍었음. 흐흑 원래 비주얼도 그렇게 이쁘진 않답니다. 맛있으면 되지...
이게 비프 스트로가노프와 가니쉬. 토마토 맛이 너무 강해서 아쉬움.
이건 곁들여준 야채. 익힌 거 달라고 해서... 근데 저렇게 콩을 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음. 중간은 자두 조림. 이건 맛있었다.
주르륵! 치킨 키예프! 이것을 치킨까스나 코돈부르 돈까스 같으리라 상상하고 시키는 분들은 첨엔 좀 놀랄 수 있습니다.
어제 백스테이지 카페가 가는 족족 만석이라 포기하고 숙소 근처 영화관에 딸린 분점에 갔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오늘 어떻게 자리가 있어서 이 인기많은 카페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오늘도 8시 전에 깨어났는데,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야겠지 하며 뒹굴고 있는 중 영원한 휴가님이 나와서 아침 먹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나는 '그럴까, 어차피 깼는데' 하고 혹해서 얼른 씻고 방을 나섰다. 원래는 몬에 다시 가서 이번엔 간단한 크루아상 같은 빵을 먹을까 싶었는데 영원한 휴가님이 몬이 아니라 우리가 예전부터 조우하는 장소로 잘 활용한 돈 폰타나스(보키에치우 거리의 분수에 우리가 붙인 이름. 예전에 아이들이 이 분수에서 동전을 주웠기 때문에 돈 분수라는 뜻으로 ㅋㅋ)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어딜 갈까 하다가 바로 앞에 있는 백스테이지 카페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설마 9시밖에 안됐는데 벌써 만석이겠어? 하면서.
그런데! 출입구에 또 줄이 가득 늘어서 있고 우리 앞의 영어를 쓰는 두분은 우리에게 '사람이 너무 많네요' 하고 아쉽게 웃으며 포기하고 떠났다. 나는 '에이 그럼 미련없어요. 우리 몬이나 테이스트 맵에 가요' 라고 했는데 안에 잘 보니 뭔가 비어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우리 앞에 줄선 사람들은 자리를 맡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조그만 빈 테이블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빌니우스 도착 22일만에 백스테이지 카페 입성 성공. 아니 여기 이렇게 어려운 곳이었다니! 예전엔 몰랐었네.
여기는 브런치 메뉴가 많다. 그런데 브런치에 김치 오믈렛이 있어서 전부터 궁금했다. 크루아상이나 하나 먹지 했었던 나는 '김치 오믈렛 궁금하니 도전해보겠어요~' 라고 마음이 바뀌었다. 다른 브런치에도 사이드메뉴로 김치를 3.5유로엔가 내주고 있었다. 신기신기! 그래서 김치오믈렛과 페퍼민트 티, 영원한 휴가님은 플랫 화이트와 체리파이를 주문.
김치오믈렛이 나왔다. 앗 생각보다 김치가 그래도 그럴듯한 볶음김치야... 막 맛있고 잘만들고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볶음김치였고 심지어 많이 넣어줌! 계란은 2개와 3개 중 고를 수 있었는데 나는 2개로 만들어달라고 했다. 거기에 빵 한조각과... 이게 뭐지? 하고 처음에 혼란을 일으킨 소스 같은 게 나왔으니... 소스 치고는 묽은데, 아니 이거 설마 참기름인가? 냄새를 맡아보니 참기름이었다! 참기름을 마치 올리브유나 발사믹처럼 종지에 상당히 많이 담아줌. 우리는 깜짝 놀랐다. 어, 참기름 비쌀텐데... 참기름 이렇게 먹는 거 아닌데... 우와, 비싼 식재료 이렇게 막 써도 되나?
하여튼 그래서 나는 심지어 빵을 참기름에 찍어먹기도 해보았다. 괴식은 아니었고 먹을만은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참기름 너무 많이 줌. 그럼 여기 사람들은 저 참기름을 다 닦아먹는건가? 우리는 '저 참기름이면 간장계란밥이 몇그릇이야...' 하며 웃었다. 김치 오믈렛과 체리 파이도 나누어 먹었는데 나름대로 맛있었다.
먹는 동안에도 손님이 좀 빠졌다가 또 꽉 차기를 반복했다. 로컬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았다. 여기는 빌니우스의 카페라기보다는 활기찬 분위기가 좀 미국이나 뭔가 프렌즈 같은 시트콤에 나오는 카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제각각 무리지어 신나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뭔가를 먹고 마시고, 카운터와 바에 있는 점원들은 젊고 예쁘고 활기차고. 좀 업되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영원한 휴가님은 여기는 모여든 사람들끼리 좀 큰소리로 얘기를 하는데도 각자의 대화는 또 잘 들리고 나름대로 작업도 잘 되는 것 같다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손님들이 몰리는 것 같다고 하심.
그리하여 나는 삐쳐있었던 백스테이지 카페 보키에치우 거리 본점에도 재입성에 성공하게 되었다. 김치 오믈렛과 카페 사진 몇 장.
디저트가 많지는 않다. 전에 먹었던 티라미수와 쿠키는 별로였는데 오늘 체리 파이가 달지 않아서 의외로 괜찮았음. 커피는 묽고 맛이 그냥저냥이라고 하신다.
이게 체리파이.
두둥. 김치 오믈렛, 빵, 그리고 참기름!
오믈렛 위에 치즈를 갈아서 뿌려줬다. 깨도 뿌려주고 ㅎㅎㅎ 김치도 저렇게 아낌없이 넣어주었다. 근데 이 김치가 리미 김치보다 훨씬 낫네. 타마고는 차라리 여기를 벤치마킹하라, 계란밥을 브런치로 내주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