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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에 해당되는 글 943

  1. 2016.12.13 생선수프 먹고 있음 4
  2. 2016.12.13 12.12 월요일 밤 : 옛날 기숙사 동네, 프리모르스카야, 까라블레스뜨로이쩰레이 거리, 아주 오랜 추억, 수퍼마켓 다녀옴, 눈 펑펑, 김릿과 료샤 6
  3. 2016.12.13 12.11 일요일 : 로모노소프 도자기 박물관, 마린스키 돈키호테 짧은 메모(커튼콜 두장) 6
  4. 2016.12.13 미네르바 조각상, 깊은 연못, 요 며칠 글을 올리고 있는 이유는 아마 30
  5. 2016.12.11 12.10 토요일 밤 : 잠꾸러기, 나에겐 아침 얘들에겐 점심, 좋은 날씨라 산책, 사내의 허세, 화이트골드와 노란 맥심의 차이 등 10
  6. 2016.12.11 겨울날 아름다운 페테르부르크 풍경 2
  7. 2016.12.10 12.9 금요일 밤 : 국민의 힘, 러시아 박물관 다녀옴, 레냐랑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연주회 다녀옴, 볼레로, 료샤네 놀러옴, 문지기 아저씨 때문에 감동 10
  8. 2016.12.09 극악 날씨, 러시아 박물관 갔다 녹초 되어 뭐 먹는 중 8
  9. 2016.12.09 에르미타주 창 밖으로 본 겨울 페테르부르크 풍경들 4
  10. 2016.12.09 12.8 목요일 밤 : 나쁜 날씨, 돔 끄니기, 료샤가 나한테 삐쳤다가 풀렸다가 도로 삐친 이유 10
  11. 2016.12.08 겨울 왕국 4
  12. 2016.12.08 12.7 수요일 밤 : 꿈, 에르미타주, 운수 좋게 무료입장, 마린스키 '석화' 보고 옴(아주 짧은 메모) 2
  13. 2016.12.07 렘브란트, 반짝이는 것들 6
  14. 2016.12.07 오랜만에 에르미타주 옴 4
  15. 2016.12.07 페테르부르크 상징 세 곳 산책, 저녁에 4
  16. 2016.12.07 12.6 화요일 밤 : 어제의 고생, 수도원과 카페, 도스토예프스키 묘에서, 해 진 후엔 8
  17. 2016.12.06 수도원 다녀오는 길 6
  18. 2016.11.29 너를 사랑한다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19. 2016.11.28 거울 나라 앨리스 생각하며 2
  20. 2016.11.27 백야 8
  21. 2016.11.25 엽님이랑 함께 본 파란 하늘 아래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6
  22. 2016.11.17 체리와 수도원 버섯빵과 혼합견과 6
  23. 2016.11.16 왜 나한테 불 있냐고 물어본 것일까요 4
  24. 2016.11.14 수도관 터진 날, 푸쉬킨,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33
  25. 2016.11.08 녹음 너머 황금빛 푸른빛 사원 6
2016. 12. 13. 19:17

생선수프 먹고 있음 2016 petersburg2016. 12. 13. 19:17




잠 설쳐서 조식 놓치고.. 마지막 날이라 고골에 점심 먹으러 옴. 여름엔 자리 없었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예약 없이도 한적.


생선수프 우하랑 수도원식 생선파이 주문. 여기 우하 맛있네.. 맨날 보르쉬만 먹었는데(여기 보르쉬 맛있다)


파이는 아직 안 나옴. 수프 먹으니 몸이 좀 따뜻해지는거 같다.


아, 내일 돌아가야 하다니 ㅠㅠ

:
Posted by liontamer

갑작스럽게 결정하고 여기 날아온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수요일 아침에 떠난다. 모스크바에서 갈아타야 하니 한국에는 목요일 아침에 도착할 것이다. 생각하니 좀 심란하네 ㅠㅠ


..



어제 박물관이랑 마린스키 다녀오느라 녹초가 되어 정오 다 될때까지 정신없이 잤다. 허리와 등이 아프지 않았다면 더 잤을 것이다. 조식은 놓쳤고... 꼼짝도 하기 싫었지만 창 밖을 보니 하늘이 푸르스름해서 또 저 날씨가 아까워서 기어나갔다.





아침 못먹고 나와서 근처의 단골 카페/레스토랑인 고스찌에 가서 런치를 먹었다. 평일 런치 시간에 가면 380루블(7~8천원)에 샐러드, 수프, 메인과 음료를 먹을 수 있다. 제대로 된 요리를 서빙할떄보다 양은 절반에서 3분의 2 가량이지만 사실 나야 많이 안 먹으니 이 런치 양이 딱 좋다. 파프리카와 오이, 토마토와 양상추가 들어간 야채 샐러드와 진한 토마토 수프, 연어와 대구살 으깬 완자 커틀릿을 먹었다. 먹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



나올 때만 해도 날씨가 좋았다. 어디 갈까 하다가 어제 로모노소프 박물관 가느라 지하철 타고 로모노소프스카야 역에서 내렸을떄 그 동네 풍경이 옛날에 맨첨 페테르부르크 와서 살았던 기숙사 동네랑 참 비슷해서 좀 향수가 치솟아 지하철 타고 거기로 갔다. 프리모르스카야 역이다. 여기는 종점 역이었지.





3~4년 전에 가고 한동안 안 갔었는데 역 주변은 그 사이에 또 많이 바뀌었다. 옛날에 이 역 주변은 황량했고 재래시장이 있었고 길거리에는 목도리 한장, 살충제 한개 등 자질구레한 물건 한두개를 들고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상가 건물들이 잔뜩 들어서 있다. 쥬인과 내가 추위로 얼굴 발그레해져서 장갑 낀 손을 꼭 잡고 그래도 그 동네에서 제일 큰 수퍼마켓(가반스끼 우니베르막...)까지 걸어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쪽 길도 바뀌어 있었다.


..






하지만 기숙사 쪽으로 걸어가는 길은 그대로였다. 쥬인이랑 발 동동 구르며 버스 기다리던 정류장. 얼어붙은 운하. 검은 나무들, 흐루쇼프 시절 지어진 닭다리 아파트들(옛날 우리가 지나다닐때보다야 훨씬 더 낡아버렸다), 운하 건너편 살풍경한 건물들(당시에는 리틀 우즈란 브랜드가 붙어 있었다)...


그래도 이 길에 있는 그 흐루쇼프 시절 지어진 서민용 닭다리 아파트 보러 몇년 전 다시 갔었다. 왜냐하면 그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미샤가 발레학교 들어가기 전에 엄마랑 둘이 살던 동네를 이쪽으로 설정했고 그 아파트에서 사는 것으로 했기 때문이었음... 프리모르스카야의 살풍경한 동네에서 뛰놀던 꼬마 아이. (프리모르스카야는 바닷가라는 뜻이다. 기숙사 뒤로 나가면 바다가 있다. 엄청 추웠다)



(이게 바로 미샤랑 엄마가 살았던 그 아파트 동네... 가느다란 축으로 떠받쳐져 있어 속칭 닭다리 아파트라 불림)




..


나는 얼어붙은 그 길을 걸어서 옛날옛날 기숙사에 가보았다. 지하철역에서 한 3~4 정거장 걸어가면 기숙사가 나온다. 여기도 3~4년 전에 가보고는 안갔다. 10년 전에 다시 갔을땐 딴 동네 기숙사에서 지냈었고.







기숙사 건물은 3동으로 되어 있는데 몇년 전보다 더 황량했다. 사람이 사는 방이 거의 없었고 쥬인이랑 맨날 장보러 가던 기숙사 앞 상가 건물인 '자랴'는 공사 중이었다. 아마 워낙 낡은 건물들이라 기숙사 건물이랑 그 상가 건물을 부수거나 리노베이션하거나 뭐 그러는 모양이었다.


많이 걸었다. 옛날 생각 많이 났다.


바닷가에 가볼까 하고 쭉 걸어갔는데, 몇년 전 갔을땐 공사를 하느라 바닷가 진입로가 막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힘들게 갔더니만 여전히 공사벽이 쳐져 있었다. 그래서 툴툴거리며 다시 길을 건너 버스를 탔다. 엄청 다리 아프고 추웠다. 날은 흐려져 있었고 곧 해가 질 것 같았다(이때가 오후 세시 좀 넘은 시각 ㅠㅠ)


..



기숙사 살때 맨날 타던 7번 버스 타고 가다가 바실레오스트로프스카야 지하철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탔다. 오후부터는 버스가 밀리는데다 특히 궁전다리를 건너 네프스키로 들어가는 그 길이 지옥처럼 밀리기 때문이다. 실은 피곤해서 그냥 호텔로 들어갈까 했는데(많이 걸어서) 곧 돌아가니 수퍼마켓에 가야 해서...


마야코프스카야 역에서 내려서 이 동네에서 제일 크고 삐까한 수퍼마켓 중 하나인 랜드에 갔다. 여기는 블라지미르스카야 역에 붙어 있다. 여름에 왔을땐 이 쇼핑몰 옆에 호텔이 있어서 편했다(그 후진 호텔의 유일한 장점 ㅋ)


그런데 내려서 블라지미르스카야 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눈이 내리기 시작... 으아... 4시였고 이미 어둠이 내리고 눈이 내린다.


수퍼로 가서 자질구레한 것들을 산 후 나왔더니 거의 폭설 수준!!!!




(잉잉 ㅠㅠ 갑자기 눈 많이 오고 그래 힘들어 흑, 짐도 있구만)



정류장까진 꽤 걸어야 한다. 패딩과 어그, 짐 떄문에 뒤뚱거리며 걸어서 네프스키 대로까지 나가 간신히 버스를 탔다.

(저녁에 만난 료샤가 나보고 바보같다고, 그냥 근처 카페에 앉아 죽치고 기다렸으면 자기가 끝나고 그리로 갔을 거 아니냐고 한다. 근데 난 짐도 있었고 너무 피곤해서 빨리 그 패딩을 벗고 싶었단 말이야... 방에 가고 싶었단 말이야 ㅠㅠ)


..



눈을 헤치고 돌아오다 너무 배가 고프고 어지러워서 호텔 한두정거장 거리에 있는 블린 가게인 쩨레목에 가서 제일 좋아하는 블린인 알료샤 뽀뽀비치를 먹었다. 닭가슴살과 채썬 양배추를 스메타나 소스에 재워서 블린으로 돌돌 말아주는 것이다. 그것을 정신없이 흡입하고 회생... 또 눈을 맞으며 간신히 호텔로 돌아갔다.


..



료샤는 오늘 일이 좀 늦게 끝나서 생각보다 늦는다고 했다. 나는 지쳐서 두터운 패딩과 짚업과 내복 대신 껴입었던 기모스타킹을 벗었고 이마에 마구 달라붙은 앞머리를 좀 정리했고 립스틱을 바른 후 좀 얇아진 옷차림으로 호텔 카페에 내려갔다. (그래서 김릿을 마셨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5653)


앉아서 김릿을 한잔 마시고 있자니 료샤가 왔다. 나보고 먼저 밥먹었다고 되게 툴툴댔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난 배고파 미치겠는데. 지가 늦게 와놓고. 그래서 료샤도 그냥 호텔 카페에 앉아 간단한 저녁을 먹었고 그동안 나는 김릿을 마셨다. 료샤가 내 김릿을 한모금 뺏아먹더니 '기집애 맛이다!' 라고 했다. (이게 알콜 탄 아주 시큼한 라임주스 맛이라 약간 레모네이드 같기도 함)


나는 '웃기시네! 이건 필립 말로와 테리 레녹스의 칵테일이야! 남자 중의 남자 필립 말로! 하드보일드 원조 탐정! 너 '기나긴 이별' 안 읽었냐!' 라고 응수했다.


료샤는 흠칫하더니 '필립 말로 실망이야, 멋진 남자였는데 이런 걸 마시다니' 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나는 '뭐 이건 말로가 원래 마시던 게 아니라 테리 레녹스라고 걔 친구가 마시던 거니까' 라고 말해주었다. 료샤는 '기나긴 이별'은 안 읽었고 '빅 슬립'과 '안녕 내 사랑'만 읽었음. 그래도 얘가 읽은 (얼마 안되는 ㅠㅠ) 책이라 필립 말로에 대한 대화는 좀 통한다!


..


방에 와서 료샤랑 디카페인 차 마시고 아까 내가 오래된 카페 세베르에서 사온 소련시절 디저트인 룬노예 케익을 같이 먹으며 얘기를 나눴다. 료샤는 내일 아침에 무슨 조찬 미팅이 있어서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괴로워하며 좀전에 돌아갔다.


조찬 미팅이라니, 뭔가 있어보인다고 내가 놀리자 료샤는 엄청 괴로워하며 '아빠가 잡은 거야!!!! 나였음 절대 안 잡아.. 넘 싫어 아침부터 일하는거' 라고 징징댔다. 그래그래 나도 이해해... 나도 싫어 ㅠㅠ 나도 회사에서 무슨 조찬 미팅이나 이른 아침 회의 있으면 정말정말 싫었어...


('그래도 나는 그 회의들 직접 다 준비했지만 너는 준비해주는 비서가 있잖아! 복에 겨운 줄 알아라 부르주아야!' 해주고 싶었지만 우정을 생각해 그 말은 안했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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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일 하루만 보내면 돌아가야 한다 ㅠㅠ

내일은 눈이 안 오게 해주세요, 내일은 날씨가 좋게 해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어제는 공연 보고 늦게 들어와 뻗어서 메모를 정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간단히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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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엔 도시 좀 외곽의 오부호브스코이 오보로느이에 있는 로모노소프 도자기 박물관에 다녀왔다.


좀 고생하며 갔지만 간 보람이 있었으니 도자기들의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 앞에서 나는 넋을 잃고... 이것도 저것도 다 갖고 싶어 진열장을 깨고 싶었고.. 역시 돈과 노동력을 마구 부리고 착취했던 제국주의 시대의 도자기가 아름답고 화려할수밖에 없구나, 소련 시절 나온 디자인들은 괴롭구나(그래도 소련 것들도 또 보다보니 은근 매력 있음. 하긴 코발트넷도 소련 시절 디자인임)








샵에서 파산할뻔 했지만 꾹꾹 참고 찻잔 두개와 꽃병 하나만 샀다. 싹쓸이해오고팠다. 게다가 이미 전시실의 고색창연하고 어마어마한 황실 사용 도자기들을 보자 이제 샵에 있는 찻잔도 눈에 안 들어올 지경!!


아 나 이 박물관에 취직하고프다!! (그리고는 밤마다 몰래 찻잔 꺼내 차 우려 마시고 ㅋㅋ)



..





돌아와선 옷 갈아입고 료샤와 마린스키 근처의 The Repa에 저녁 먹으러 갔다. 이곳 빵과 양배추 수프가 은근히 맛있다.


..




먹고 나서 돈키호테 보러 갔다. 어제 배역은 바질- 안드레이 예르마코프, 키트리-옐레나 옙세예바, 투우사- 콘스탄틴 즈베레프 등이었다. 원래 키트리 역이 옥사나 스코릭이었는데 아픈 건지 옙세예바로 교체됨. 나는 키트리라면 스코릭보다 옙세예바가 더 마음에 드는 타입이라 오히려 더 좋았다.






예르마코프 바질은 반은 좋고 반은 아쉬움. 나는 예르마코프와 즈베레프를 둘다 무용수로서 꽤 좋아한다만, 예르마코프는 의외로 희극 연기도 괜찮고 파트너링이야 원래 좋았지만..



아무래도 바질이란 역 자체가 좀더 민첩하고 새처럼 날아다니는 무용수가 더 어울리다보니 키큰 예르마코프는 어딘가 자꾸 투우사였음 더 좋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 솔로에서도 점프나 주테가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예르마코프가 추는거 봐서 좋긴 했다.



즈베레프 투우사는 매우 멋졌으나 옥의 티는 의외로 망토 간지나게 돌리는게 좀 약했다!!!! 이 사람 스메칼로프 발레들에서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툭하면 망토 늘어뜨리고 나오는데 어째서인거냐 ㅠㅠ 차라리 3막 선술집에서 망토 없이 추는게 더 어울렸다. 어깻짓을 좀더 하며 좀더 거들먹거려도 좋았을텐데 :)



옙세예바 키트리는 이따금 피루엣이나 테크닉에서 삐끗할 땐 있어도 타고난 키트리 연기를 잘해서 보기 좋았다. 딱 키트리 느낌이란 게 있는데 다소 과장돼 보이지만 그게 정말 잘 어울려서 최근 무대에서 본 키트리들 중 가장 맘에 들었다. 슬며시 옛날 타치야나 체레호바 생각이 좀 났다, 테크닉보단 외모적으로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다.


다른 무용수들과 공연 리뷰는 나중에 따로.. (언제 ㅠㅠ)




마린스키 돈키호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극장 레퍼토리 중 하나라 보고 나면 행복해진다. 이것으로 이번 페테르부르크의 짧은 일정에 포함된 공연 끝.. 발레 두개랑 연주회 하나 뿐이라 무척 아쉬웠다.


..




늦게 돌아와 완전히 뻗음.


:
Posted by liontamer




아래 이야기는 4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해서 가장 먼저 썼던 단편  'Frost'에 삽입된 에피소드이다. 원래는 노어 제목을 달고 있는데 번역하면 '서리', 영어로는 프로스트였다. 공산당 고위간부 드미트리 마로조프와 키로프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미샤가 파리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주축으로 그들의 과거에 대한 회상이 끼어드는 형식이었다. 전에 부분부분 몇번 올린 적이 있다.


아래에 발췌한 에피소드는 마로조프가 예전에 자기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배경은 1975년 여름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 아주 오래 전 내가 썼던 미샤에 대한 단편인 'illuminated wall'과 시간/배경상 연결되고 있다. 그 단편은 전에 이 about writing 폴더에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맨 아래에 링크를 덧붙여 두었다.


공산당 고위간부이며 정치국의 위세등등한 멤버인 드미트리 마로조프는 교외의 아름다운 별장에서 열리는 동료들과의 모임에 키로프 무용수인 미샤와 지나이다를 부른다. 표면적인 이유는 와서 춤을 추라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다른 이유도 있다. 미샤와 지나이다는 그곳에 간다. 이것은 그 다음날 아침의 이야기이다.


이 단편은 그때도 지금도 나에게는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내밀하고 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아마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숨을 쉬는 방법을 익히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가는 방식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 발췌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인 빛, 맞잡을 수 있는 손의 온기, 그리고 내부의 불꽃. 그 세가지 중 마지막.



... 위의 사진은 순서대로 페테르부르크의 레트니 사드, 지난 여름에 엽님과 같이 갔을때 찍은 연못 사진. 그리고 아래는 지난 9월 찍은 프라하의 말로스트란스카 역 앞의 연못. 깊이가 얕긴 하지만.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1975년 7월, 페테르고프



 밤새 쏟아진 비로 잔디가 젖어 있었다. 비를 흠뻑 맞은 장미들이 순식간에 피어올랐고 정원은 자욱한 향기로 가득 찼다.


 나는 맨발로 잔디를 밟으며 정원을 거닐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공식적으로는 정치국 멤버들의 회동이 있어 별장에서의 휴가를 이틀 더 늘린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아내나 나나 관심이 없었다.


 미샤는 정원에 없었다. 수영장도 비어 있었다. 뒤뜰 연못가에 새로 들여놓은 독일 설치작품을 보러 간 모양이었다. 그는 지나이다와 함께 전날 밤 도착했지만 우리의 파티가 늦게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걸 보러 갈 시간이 없었다. 나는 그를 불러 앉혀 놓고 진지하게 할 말이 있었지만, 과음으로 일찌감치 뻗어버린 에멜리야노프와 구신스카야를 제외한 멤버들이 돌아간 것은 새벽 세시였고 미샤는 보이지 않았다. 이 별장에야 여러 번 와봤으니 마음에 드는 침실을 골라 자러 들어간 게 뻔했다. 어쩌면 지나이다와 함께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놀랍게도 심장 한구석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나이가 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정원으로 내려오기 전에 지나이다를 2층의 터키 풍 침실에서 발견했다. 그녀는 전날 밤 우리 앞에서 보여준 작은 공연 때문에 피곤했는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쿠션 사이에 몸을 묻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옆자리에는 자고 일어난 흔적이 없었다. 붉은 머리 타래를 녹색 실크 쿠션 위로 펼치고 태아처럼 웅크린 채 홀로 자고 있는 지나이다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어이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뒤뜰은 햇살이 모자라서인지 아직 장미가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간 잡초 손질을 등한시했다는 증거로 조각상들 주변에 드문드문 하얀 풀꽃들이 피어 있었다. 그 번지르르한 대리석 조각상들을 볼 때마다 박물관에 기증해버리고 싶었지만 아내의 취향이 확고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지인들은 레트니 사드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농담하면서도 은근히 그 오래된 제국주의의 유물들을 부러워했다. 오로지 미샤만이 내 투덜거림에 정면으로 반응했다. 지난 가을에 그는 정원에서 쇠갈퀴를 들고 와서 미네르바 조각상 한 개를 박살냈다. 내가 화를 내자 미샤는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 제게 감사하셔야죠. 가장 흉물스러운 조각상이었다고요. ”


 망가뜨린 걸 치워놓으라고 명령하자 미샤는 쇠갈퀴로 낙엽을 끌어와 박살난 조각상 파편 위에 대충 무덤처럼 쌓아놓고는 수영을 하러 가 버렸다. 나는 겨울이 올 때까지 그 낙엽 더미를 방치했고, 조각상이 사라진 받침대는 아예 치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갈퀴에 찍힌 기다란 자국 외에는 텅 비어 있는 받침대를 볼 때면 혈관 속에서 핏줄기가 뜨거운 강물처럼 거세게 내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젖은 풀잎들이 달라붙어 있는 그 받침대를 지나 독일 설치작품 쪽으로 눈을 돌렸지만 미샤는 보이지 않았다. 연못가도 비어 있었다. 아마 내가 놓치고 지나간 침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 아이는 항상 늦게 일어나곤 했다.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나는 갑자기 연못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미세한 소음이 일었다. 마치 분수의 물방울이 튀는 소리 같았다. 새가 연못 위로 내려앉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 순간 완벽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 했다. 창백한 푸른빛 하늘과 잎이 무성하게 뻗어 있는 나무들, 짙은 청록색 그림자가 가득한 연못 수면까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내가, 드미트리 마로조프, 눈과 피의 마로조프, 레닌그라드의 소리 없는 지배자, 얼음성의 사나이가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다. 손발이 저려오면서 현기증이 났다. 이해할 수도 없고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파도처럼 쇄도했고 나는 마비되어 서 있었다.



 대리석 받침대 위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손목 살갗 위로 벌레가 기어가듯 미지근한 공기가 스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함을 지르며 연못가로 달려 내려갔다.



 수면은 차갑고 매끄러운 녹색 금속처럼 단단하게 응고되어 있었다. 한겨울이었다면 얼어붙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못은 별장을 짓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수심이 어느 정도로 깊은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내는 아이들이 그쪽으로 가는 것을 절대 허락한 적이 없었고 생각날 때마다 그 연못을 메워버려야 한다고 우겼다. 내심 그 연못이 뒤뜰에서 가장 볼만한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그래 메워야지'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며 넘기곤 했다.



 수면 아래에 하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두텁게 얼어붙은 네바 강 아래로 물고기가 흐느적대며 헤엄치듯, 거기 그 연못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한가운데에, 짙은 청록색으로 뭉쳐진 수면 아래 하얗고 거대한 짐승 같은 형체가 위아래로 가만히 들썩이고 있었다. 펄럭이는 흰 그림자 위로 검은 해초 같은 머리털이 천천히 나부꼈다.



 맨 처음에 난 그가 헤엄을 치러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수영을 잘 하는데다 겁이 없는 애였으니까. 그저 물 속 깊이 잠수했을 뿐이다. 더운 날씨였으니까.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셔츠와 바지를 벗어던지고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물은 생각보다 찼다. 심호흡을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전날 밤 지나이다와 춤췄을 때 입었던 하얀 루바슈카 셔츠를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파자마 같은 흰색 바지와 슬리퍼마저 벗지 않았다.



 나는 연못 한가운데로 헤엄쳐 들어가 그 아이의 어깨를 잡고 끌어올렸다. 미샤는 내게 어깨를 잡히자 격렬하게 몸부림치더니 작살에 꿰인 고래처럼 순식간에 물 위로 튀어 올랐다. 응고된 수면이 폭발하듯 깨지며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미샤의 몸을 연못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 깊은 곳에서 벗어난 후에는 거의 발길질을 하며 떠밀어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연못가로 올라온 후 나는 한동안 헉헉거리며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구멍과 콧구멍으로 펄펄 끓는 듯한 물이 쏟아져 나왔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간신히 숨을 고른 후 고개를 돌리자 미샤가 1미터 쯤 떨어진 곳에 누운 채 목과 입에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경련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 곁으로 다가갔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거칠게 몇 차례 내리쳤다. 미샤는 새파랗게 질렸다가 물을 토해내더니 무섭게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몸에서도 그나마 남아 있던 힘이 몽땅 빠져나갔다.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랫배가 아프고 머리가 멍멍했다. 벗어던졌던 셔츠로 대충 얼굴과 몸의 물기를 훔친 후에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 다시는 이러면 안 돼. 아침부터 물에 뛰어들기엔 난 이제 늙었어. ”


 그건 사실이었지만 내가 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을 터였다. 나는 다시금 온 힘을 쥐어짜 미샤의 몸에서 흠뻑 젖은 루바슈카를 벗기고 이미 축축해진 내 셔츠로 목덜미와 가슴을 거칠게 문질렀다. 미샤가 기침을 몇 번 하고 다시 물을 조금 토해낸 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나도 모르게 그 호흡을 따라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숨이 턱에 닿았다. 그는 수차례 심호흡을 반복했다. 무겁게 깜박이는 속눈썹 주위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미샤의 얼굴에 희미한 붉은 기가 돌아왔을 때에야 나는 일어설 수 있었다. 타월과 마른 옷을 가지러 집 쪽으로 몇 발짝 걸어가다 다시금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불쾌함을 느끼고 멈춰 섰다. 내가 정신 나간 주정뱅이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 안 돼. 혼자 놔두면 안 돼. 절대로. ”




 
 내가 돌아왔을 때 미샤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물기를 짜낸 루바슈카를 기다란 베일처럼 머리와 어깨에 두르고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채 연못에 이는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모양이었다. 미샤는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 이제 얘기하셔도 좋아요. ”


 “ 뭘 말인가, 만취한 상태로 연못에 다이빙하지 말라는 것? 오늘 자네가 극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물론 돌아갈 수 없겠지, 내가 저 빌어먹을 연못을 메우게 해줄 테니까! 저 오래된 돌덩어리들을 몽땅 처넣든 삽질을 하든 상관 안 해. 저걸 다 메워버릴 때까진 못 돌아갈 거야! ”



 그르렁거리는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밤중에 산짐승이 우는 것처럼 나직하고 어쩐지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나는 계집애처럼 오한을 느꼈지만 곧 자신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건 미샤가 목과 가슴을 울리며 웃는 소리였다. 폐에 물이 들어간 게 분명했다.


 “ 그냥 방수포를 덮으면 될 거예요. ”


 내 눈에는 그가 머리와 어깨에 뒤집어쓰고 있는 루바슈카가 방수포처럼 보였다. 그건 익사체 위에 씌워놓은 하얀 천이 될 수도 있었다. 온 몸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 더 심해졌다. 오염된 연못물 탓에 피부에 두드러기가 생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미샤의 머리에서 루바슈카를 잡아채 내팽개쳤다.


 “ 일단 들어가서 몸을 말려야 해. ”



 미샤는 전신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파자마 바지가 흰색 페인트를 칠한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연못 위로 이는 잔물결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 원래 하시려던 얘기가 있었을 텐데요. ”



 그 아이의 팔을 잡아 일으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연못으로부터 내 쪽으로 돌려세우는 것은 힘에 부쳤다. 미샤가 정말로 원하지 않는다면 그를 육체적으로 제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 그래,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안 해. 자네 취기가 가시면 그때 얘기하지. ”


 “ 취하지 않았어요. 술을 마시지 않았거든요. ”


 “ 똑같은 거야, 마셨든 안 마셨든! ”



 나는 연못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입술은 아직 파랬다. 까만 눈에 이글거리는 섬광이 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살가죽이 벗겨진 야수처럼 괴로운 표정으로 두 눈을 숯처럼 불태우며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건 같은 게 아니죠. 당신이 이곳으로 날 부른 이유가 5월과 달랐던 것처럼. 같은 건 하나 뿐이에요. 변함없는 것. 이곳의 주인들. 당신들. ”



 그가 말한 대로였다. 나는 그에게 할 얘기가 있었다. 어젯밤의 파티는 2주 전 유보되었던 것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당 간부들이 종종 별장에서 파티를 열 때 무용수들이나 가수를 부른다. 나는 다른 무용수들에 비해 미샤를 자주 부르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1년에 한두 번 뿐이었다. 물론 쿨리마코프나 스비제르스키 같은 발레 애호가들도 미샤와 지나이다를 부른 적이 있다. 그들 중에는 미샤의 팬도 있고 단순히 키로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스타를 부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자리에 오고 싶어 안달인 무용수들도 많았다. 확실한 후원자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기도 했다. 크셰신스카야가 요즘 발레리나였다면 황제 대신 브레즈네프의 정부가 되었을지 누가 아는가.



 완벽한 이성애자이자 발레광인 쿨리마코프는 첫 해부터 미샤의 춤에 푹 빠졌고 1년 이내에 키로프의 모든 고전 레퍼토리 주역을 섭렵하게 해주겠다고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쿨리마코프처럼 드러내놓고 미샤를 옹호한 적이 없었다. 발레학교 학생 시절부터 가끔 만나고는 있었지만 그건 물론 비밀스런 관계였다. 그는 자기 실력만으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충분했고 나는 낯간지러운 후원자 정부 노릇은 질색이었다. 나도 볼쇼이나 키로프 오페라의 몇몇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후원 입장을 밝힌 적이 있었지만 그들과는 잠자리를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2주 전 나는 별장에서 정치국 동료들을 불러 중요한 파티를 열었다. 비밀회의는 밤 10시에 시작해 1시간 만에 끝났고 그 이후부터는 밤새 파티가 계속될 예정이었다. 여러 가지 민감한 문제들이 있었고 그 중 두어 가지에 대해서는 쿨리마코프의 지지가 필요했다.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미샤를 포함해 키로프에서 네 명을 불렀다. 


 
 미샤는 그날 밤 별장에 오지 않았다. 무단이탈이었다. 당시 행정 책임자였던 다닐로프가 겁에 질리고 풀이 죽은 채 직접 나머지 세 명을 데리고 왔다. 다닐로프는 미샤가 전날 백야 축제 공연을 마친 후부터 몸이 아파서 집에 누워 있다고 둘러댔다. 물론 나는 다닐로프와 나머지 무용수들의 태도에서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눈치챘지만 그 자리에서 문제 삼지는 않았다. 파티는 그럭저럭 흘러갔고 공연도 나쁘지 않았다. 쿨리마코프가 좀 툴툴거리긴 했지만, 어차피 그 얼간이는 미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쾌유를 비는 카드와 꽃을 보낼 게 뻔했다.


 아프다는 건 물론 다닐로프의 거짓말이었다. 게다가 미샤에게는 이미 감시 요원이 딸려 있었다. 다음날 나는 미샤가 밤새 네프스키 거리와 궁전 광장, 사도바야 일대를 쏘다녔으며 그건 의도적 이탈이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다. 요원의 말에 따르면 미샤는 페테르고프 출발 시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시내에서 마주친 발레단 동료 핀스키의 설득을 가볍게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반정부적 표현이 있었다. 심지어 파티가 시작될 시각에는 궁전 광장의 딱딱한 돌바닥 위에서 내키는 대로 춤까지 췄다. 이쯤 되면 보안위원회가 미샤를 소환해 무단이탈과 반체제적 행동에 대한 심문을 진행한다고 해도 억울할 게 없었다.


 나는 보안위원회 담당자에게 이 문제는 내가 처리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다닐로프가 미샤에게 한 달간 페스티벌을 포함한 모든 공연의 출연을 취소시켰으며 가을 시즌 개막작으로 잡혀 있던 라 바야데르의 주역에서도 하차시키겠다고 협박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 아이는 이미 겨울 베를린 투어 때에도 숙소를 이탈한 적이 있어 이번 여름 시즌의 해외 투어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나는 열흘 동안 극장이나 미샤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노심초사한 다닐로프는 급기야 내 비서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지난 번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별장에서 다시 파티가 있으니 미샤와 지나이다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처음으로 나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별것 아닌 농담 때문에 동료들에게 밀고당해 유죄가 된 남자, 정신교화 수용소에서 꺼져버린 희미한 불꽃.



 한숨을 내쉰 후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이었나? 미친 짓을 하고 싶을 만큼? 다시는 자네를 이곳으로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받고 싶어서? ”


 “ 아니에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물론 당신이 앞으로는 그런 무가치한 파티 때문에 절 부르지 않겠다고 약속해준다면 더 좋겠죠. 파티보다는 섹스가 더 나으니까요. ”



 미샤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 정말 그런 약속을 해 줄 생각이 있었어요? ”


 “ 아니. ”



 그 아이는 다시 산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낚아챘다. 햇살 때문에 물기는 거의 다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차갑게 미끌거리는 그 몸을 꽉 붙잡아 끌어당겼다. 두개골이 쪼개질듯 아팠다.



 “ 이유를 말해봐. 다닐로프 때문인가? 아사예프와 맞지 않아서? 아니면 런던에 가지 못하게 돼서? ”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하마터면 ‘원하는 걸 얘기해봐!’ 라고 소리칠 뻔 했다. 다닐로프나 아사예프 따위는 별것 아니었다. 세레브랴코프를 비롯한 선배 무용수들의 텃세 때문이라면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손봐주겠다고 권력 자랑을 하기 직전이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그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에게 있어 나는 그저 ‘당신들’로 지칭되는 거대한 권력의 일부다. 여러 개의 아파트와 별장들, 좋은 차들을 소유하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오가며 정치라는 것을 하는 지위 높은 인물일 뿐이다. 저 스무 살짜리 풋내기 사내애는 내가 실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이 꼬마를 자기 아버지처럼 교도소로 보내 망각의 암흑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재판이니 수용소니 하는 절차 따위는 생략한 채 목을 조르거나 뒤통수에 총알을 박아 넣어 죽이고 캄캄한 네바 강 바닥에 가라앉혀 버릴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도 더러워지는 것은 내 손이 아닐 것이다. 이유를 말해준다면 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



 미샤는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한 팔로 나를 껴안고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조용히 속삭였다.



 “ 전 알아요, 당신이 학살자라는 걸.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 해도 뼛속까지 그런 사람이란 걸. 하지만 그런 걸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게 있어요. ”




 
 나는 그를 놔주었다. 미샤는 내 곁을 지나 연못으로부터 멀어졌다. 어두운 수면으로부터 마침내 시선을 돌린 채 그 아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 내 안에 어둠이 있고 밖에도 어둠이 있어요. 뭔가 다른 게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래서 춤을 추는 거예요. 올라갈 수가 없을 때는 내려가야 해요. ”



 두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미샤가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뭉쳐져 있는 잡초들과 텅 빈 대리석 받침대, 군인처럼 열을 이은 조각상들을 지나쳐 걸었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바지 때문에 평소보다 보폭이 좁았다. 무용수의 우아한 몸놀림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쪽 다리를 무겁게 끌었다. 연못에 뛰어들었을 때 발목을 다쳤을지도 모른다.



 나는 미샤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가 샤워 부스와 욕조 수도꼭지 양쪽을 틀었다. 여름이었지만 그 아이도 나도 뜨거운 물이 필요했다. 미샤는 내 도움을 받지 않고 파자마와 슬리퍼를 벗었다. 왼쪽 발목을 다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살점이 조금 찢겨나간 자리에 피가 고여 있었다. 허리 아래에도 보라색의 커다란 멍이 들어 있었지만 그게 연못에 빠지면서 다친 것인지 연습 도중에 생긴 멍인지, 혹은 무분별한 사랑의 밤들이 남긴 자국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각자 말도 없이 끈적거리는 연못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냈다. 씻고 나서 미샤는 욕조에 걸터앉아 발목에 연고를 발랐다. 나는 그에게 가운을 하나 주었다. 그 루바슈카와 파자마, 슬리퍼는 모두 불태워버릴 생각이었다. 욕실을 나왔을 때 그는 내 뒤를 따라왔다. 에멜리야노프나 구신스카야, 지나이다가 깨어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미샤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침실 문을 잠가야 했다. 미샤는 침대 위로 올라갔고 가운을 벗지도 않은 채 누웠다. 재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찰나 뜨겁고 힘센 팔이 뻗어 나와 내 머리와 어깨를 끌어당겼다. 사랑을 나누는 내내 그 아이는 침묵했다. 이후 살풋 잠에 빠졌을 때 아주 잠깐 몸을 떨며 외마디 비명을 토해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꿈속에서조차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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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레트니 사드의 미네르바 조각상. 올빼미랑 있으니 미네르바 맞는 거 같은데 긴가민가... 이것도 지난 6월에 엽님이랑 같이 갔을때 찍었음.

뭐 이 미네르바야 아름답지만.. 미샤가 두들겨부순 미네르바 조각상은... 글쎄 잘 모르겠다. 미샤가 흉물스럽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마찬가지로 레트니 사드.

레트니 사드에는 이렇게 대리석 조각상들이 많다. 그래서 마로조프의 지인들이 그의 별장에 이런 조각상들 많다고 레트니 사드 같다고 부러워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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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 frost는 전에 몇번 발췌한 적이 있다, 그 링크들은 아래 :

마지막 동작이 완성되지 않은 춤, 운하를 건너는 미샤 : http://tveye.tistory.com/4485

그가 읽었던 불가코프의 문장, 비행기에서, 거장과 마르가리타 :  http://tveye.tistory.com/4572

미샤의 신입 시절, 싸움의 이유, 붉은 장미와 하얀 눈 : http://tveye.tistory.com/5469


미샤가 마로조프의 부름을 무시해 페테르고프에 가지 않고 네프스키를 쏘다니다 궁전광장에서 춤을 췄던 이야기는 전에 단편 전문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링크는 아래 :

illuminated wall : http://tveye.tistory.com/3385
레냐에게 궁전광장에서 춤추는 미샤에 대해 해준 이야기 : http://tveye.tistory.com/4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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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에 와 있고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고 아름다운 거리를 거닐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산란하다. 평온을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 정상일 것이다. 어쨌든 다음주에 여기서 떠나면 나는 회사와 지방으로 돌아가게 될테니까. 그래서 요 며칠 여기에 예전 글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공허한 어딘가를 채우기 위해? 아니면 숨을 쉬고 수면으로 올라가는 방식을 다시 떠올리기 위해. 아마도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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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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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아흑 얼마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냐)



피로가 쌓이고 또 쌓였는지 정신없이 잤다. 아무래도 해도 일찍 지는데다 두꺼운 옷에 두꺼운 부츠를 신고 걸어다니다 보니 같은 거리를 걸어도 체력 소모가 심한 것 같다. 회사 꿈을 계속 꿔서 피곤했다... 마음속엔 여전히 아직 고민과 괴로움이 남아 있나보다.


간밤에 미리 '나 늦게 일어난다'고 선포했지만... 정오까지 자는 걸 보고 결국 레냐는 찡찡대며 나를 깨우러 왔다. 료샤는 내가 불면증이 있는 편이라 한번 잠들어서 오래 잘 수 있을땐 그냥 놔둬야 하거니 하고 있었지만 레냐는 '쥬쥬는 다음주에 또 한국에 가버릴 건데 우리는 조금밖에 같이 못 있는데 저렇게 잠꾸러기처럼 잠만 자면 언제 나랑 놀아' 하면서 반쯤 울먹거리며 나를 깨웠다. 흑, 난 더 자고 싶었는데 ㅠㅠ


료샤와 레냐는 이미 일찍 일어나 아침도 먹고 셰퍼드 네바 데리고 산책도 다녀오고...


샤워를 하고 머리 말리고 있는데 레냐가 오더니 '쥬쥬 머리 곱슬곱슬해서 좋아' 라고 한다. 파마는 거의 풀렸지만 그래도 감고 나면 아직 웨이브가 남아 있다.


나 : 어쩌지, 나는 원래 곧은 머리인데 레냐는 곱슬머리가 좋은가보구나.

레냐 : 곧은 머리도 좋아. 나는 긴 머리가 좋아! 울 엄마는 자꾸 머리 짧게 해서 안 예뻐져.

나 : 너네 엄마 되게 예쁜데. 엄마가 원래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야. 

레냐 : 아니야! 울 엄마가 예쁘긴 하지만 머리 길때가 더 예뻐. 머리 짧아서 지금은 덜 예뻐. 지금은 쥬쥬가 더 예뻐.


(이걸 고마워해야 되나, 아님 레냐 엄마인 이라를 불쌍해해야 되나... 아들이 이런 말하는 거 알면 또 나보고 '여우같은 기집애!' 하면서 폭발할텐데 ㅠㅠ 이라가 나 싫어한다 엉엉... 근데 객관적으로 보면 이라는 키크고 늘씬하고 멋있는 미인이라 내가 동경하는 스타일인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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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씻고 화장을 대충 하고 나자 레냐가 배고프니 점심먹자고 난리였다. 나는 오랜만에 본 네바랑 좀 더 놀고 싶었지만... 료샤도 배고프다고 했다. 분위기를 보니 이것들이 또 내가 밥해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전에 료샤네 가면 두세번 한식으로 밥해줬는데 둘다 좋아했었음. 그래서 내가 잽싸게 '나 피곤하다~ 우리 나가서 먹자~' 하고 선수쳤다. 나도 피곤하지만 않았으면 장봐서 밥이랑 레냐가 좋아하는 찜닭이랑 미역국 끓여주고 싶었지만 가뜩이나 해도 짧은 겨울인데 오늘 오랜만에 날씨가 맑아서 너무 아까웠다.




나는 옷도 갈아입어야 했고 료샤랑 레냐에게 줄 먹거리도 가져와야 했으므로 일단 료샤 차로 우리 호텔에 갔다. 차를 거기 세워놓고 가까이 있는 일식덮밥과 라멘집에 갔다. 여름에 생겼는데 저렴한 편이고 그나마 우리 나라나 일본에서 종종 먹을수 있는 라멘과 덮밥 맛이 나는 곳이다(일본사람들이 함) 료샤랑 레냐는 처음 와본다고 했다. 나는 텐동을 시켰고 레냐는 가라아게동, 료샤는 차슈라멘을 시켜서 먹었다. 여기 와서 첨으로 흰밥을 먹어서 살거 같았지만 역시 일어나자마자 튀김덮밥은 좀 거해서 약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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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확 추워졌다. 그래서 어제 눈녹아 엉망이었던 진창은 도로 얼어붙어서 그나마 길은 좀 깨끗해졌고(미끄럽지만) 하늘이 맑았다. 차라리 이런 날씨가 낫다. 내가 늦게 일어난 결과... 해질때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서 우리는 운하와 강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레냐는 나보다 훨씬 잘 걷고 미끄러지지도 않고 팔짝팔짝 뛰어댕긴다. 내가 가끔 뒤뚱거리면 내 손을 잡아주려고까지 한다!!!! (그러다 둘다 자빠질 뻔해서 료샤가 툴툴거리며 뒤에서 우리 둘을 한꺼번에 잡아줘야 했음)


차갑고 쨍한 날씨였다. 바람이 찼다. 나는 짚엎 후드에 패딩 후드까지 두겹을 덮어썼고 목도리로 입과 코 절반을 감쌌다. 레냐는 털방울모자를 썼고 빨개진 뺨으로 좋다고 뛰어댕기고(안 춥다고 한다. 부럽다),


료샤는 분명 추울텐데도 얇은 비니 하나만 쓰고 패딩점퍼에 붙어 있는 털후드를 절대 쓰지 않는다. 사실 얘는 보통 차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옷을 그리 두껍게 입지 않는 편이다. 기모스타킹에 기모바지 입은 나와는 다르다 ㅠㅠ


그 비니 얇아서 하나도 보온 안되는데... 사내랍시고 안춥다고 얇은 비니에 내복도 안입고 청바지를 입고 으쓱거리며 걷는다. 내가 '분명 추울텐데... 그 후드 쓰는 게 어때, 강바람 찬데' 라고 하면 이놈은 사내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나는 페테르부르크 토박이다! 안춥다!' 하고 허세를 부린다. 뻥치시네,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원래 좀 바람불고 추우면 모자부터 쓰는데! 머리에 바람들어간다고!! 우산은 안써도 모자는 쓰는데!!


하여튼 우리는 모이카 운하를 따라 산책했고 해질 무렵 청동기사상과 네바 강변을 따라 걸었다. 내가 네바 강변에서 석양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고마운 녀석들... 그리고 에르미타주와 궁전광장을 지나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료샤가 재채기를 했다.


나 : 거봐!!! 비니랑 청바지 때문이야!

료샤 : 재채기 하면 '부찌 도브리!' 해줘야지 왜 타박이야!

(러시아에선 재채기 하면 저 말 해줘야 함. 영어로 블레스 유랑 비슷)


하여튼 나때문에 산책하다 재채기하고 있으므로 좀 미안해져서 방에 같이 가서 비장의 무기인 맥심 화이트골드를 주었다. 얘가 맥심 모카골드를 너무 좋아하니 쥬인이 새로 나온 화이트골드 한반 가져다줘보라 해서 사온 것이다.


레냐가 양갱과 붕어빵 과자를 껴안고 좋아하는 동안 료샤에게 화이트골드를 한잔 타주었다. 료샤는 엄청 좋아했고 '하쟈이까(쥬인)에게 축복 있으라!' 하며 덕담을 했다. 몸이 녹는다고 좋아하더니만... 결론은 그래도 맥심 모카골드가 낫다는 것이다. 화이트골드가 맛있고 달달하긴 한데 뭔가 좀 다르다면서 노란 맥심이 클래식이라 한다. 나는 커피 안 마시니 도대체 그게 정말인가 싶어 쥬인에게 톡으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쥬인이 화이트골드는 좀 부드럽고 달달하니 노란 맥심이 클래식이란 료샤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한다 ㅋㅋㅋ


..




호텔 로비의 카페에 내려와 레냐는 핫초콜릿, 나와 료샤는 홍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레냐가 어제 늦게까지 연주회도 다녀오고 오늘 산책하며 너무 방방 뛰어다녀서 피곤했는지 깜박 잠들었다. 그래서 료샤가 레냐 안고 내 방에 올라갔다. 그동안 나는 카페에 앉아 오늘의 메모 적고 있음. 근데 레냐 내 방에서 저렇게 재우면 자고 간다고 또 찡찡댈텐데 ㅋㅋ 내 약혼자 아직 미성년자(8세)인데 내 방 더블침대에 같이 재워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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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6. 12. 11. 00:04

겨울날 아름다운 페테르부르크 풍경 2016 petersburg2016. 12. 11. 00:04


오늘은 많이 추웠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겨울날이었다. 운하와 강변 산책하며 찍은 사진 몇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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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국민은 살아 있고 그 힘도 살아 있다. 


시차 때문에 자고 일어나면 결과가 나와있으려니 했는데 하필 새벽부터 호텔 전체 와이파이에 문제가 있어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처음엔 내 방만 안되는 줄 알고 괴로워하며 조식 먹으러 내려가서 거기서 와이파이를 잡았다. 마침 그때 다 고쳐져서 연결이 되었는데 나는 다음이나 네이버 실시간 기사만 확인하다 보니 늦었다. 그래서 쥬인에게 톡을 해서 결과를 실시간 중계(ㅋ)로 들었다. 생각보다 크게 찬성표가 나와서 다행이다. 물론 그 동네 인간들이야 자기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겠지만 그래도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건 정말로 국민의 힘이다. 왜 그런지 234표래 하는 메시지에 갑자기 눈물이 좀 나왔다. 어휴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어 ㅠㅠ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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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씨도 극악이었다. 비가 내리다 눈으로 바뀌었다. 길바닥은 재앙이었다. 쌓였다가 얼었다가 녹아 흐르는 눈은 진창과 살얼음으로 변했다. 정말 이거야말로 보보경심 려! 자빠질까봐 뒤뚱뒤뚱!!!


(이것이 바로 엉망진창 거리!!! ㅠㅠ)



날씨가 너무 안좋아서 눈물을 머금고 오늘도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버스 타고 네프스키로 나가 러시아 박물관 갔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긴 한데 오늘은 이상하게 몸이 안 좋았다. 배란통인지 꼭 그날처럼 아프고 허리와 배와 다리가 당겨왔다. 그래서 전시도 좋아하는 작가들 위주로 보고 나머지는 지나쳤다.


박스트의 supper는 아직도 투어 중이었고 아이바조프스키 그림들도 화가 120주년이라고 트레치야코프에 가 있었다... 게다가 레핀 그림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대한 '사드코'도 어디 투어 갔는지 없었다 흐흑... 대신 전에 보지 못했던 그림들이 꽤 나와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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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보고 나오는데 너무 힘들어서 박물관에서 제일 가까운 곳인 그랜드 호텔 유럽에 갔다. 2층 메자닌 카페에 가서 진통제를 한 알 먹고는 비프 스트로가노프 시켜서 먹었다. 오후에 방에서 료샤랑 레냐를 만나기로 했는데 힘들어서 도저히 방까지 갈수가 없었다.


나 : 친구야, 힘들어서 유럽호텔 카페에서 밥먹고 있어... 거기로 와.

료샤 : 박물관 간다더니 그럴줄 알았어!!!!

나 : 흑... 미안하다 먼저 밥 먹는다...

료샤 : 고기 먹어!!!

나 : 비프 스트로가노프 드신다!


(료샤는 어제 삐친 거 다 풀렸다. 아침에 전화해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제 아빠네 집 갔더니 자기랑 나따샤 빼고는 평균연령 60대였고 전부 부부동반 분위기였고 게다가 보드카 부어라마셔라 분위기라 내가 왔으면 엄청 뻘쭘하고 피곤했을 거란다. 자기는 나타샤와 아빠의 합동공격에 지쳐 보드카를 막 마시고 평소보다 빨리 취하는 전략을 구사해 두어시간 만에 침대로 기어들어갔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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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고 모르스 마시고 있자니 료샤가 레냐를 데리고 왔다. 털방울 모자에 하늘색 패딩 입고 발그스름한 뺨으로 달려오는 레냐 왜 이렇게 귀여운가.. 어흑..


레냐가 2층 카페로 향하는 빨간 카펫 깔린 호텔 계단 올라오면서부터 큰소리로 '쥬쥬~' 하고 소리를 쳐서 료샤가 '쉿, 조용히 해야지!' 하고 주의 주는 소리까지 다 들림.


레냐는 프라하에서 자기가 사준 펜던트를 내가 하고 온 걸 보고 엄청 좋아했다. 잽싸게 내 옆에 앉으며 료샤를 구석으로 밀어냈다. 료샤가 아들새끼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고 투덜거렸다. (너 어제 너네 아빠 생일파티 가기 싫다고 궁시렁거렸던 건 생각 안하냐!!!)


료샤와 레냐도 카페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원래 오늘 나는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드뷔시 라벨 브람스 연주에 가려고 표를 끊었었는데 레냐도 요즘 피아노 배우고 클래식 음악도 곧잘 듣는 편이라 마침 내 옆자리 표가 기적적으로 남아 있어 그걸 추가로 더 끊었다. 문학이고 클래식이고 모두 담쌓은 료샤는 잘됐다는 듯 나보고 레냐 데리고 가라고 함. 자기는 숙취 때문에 좀 자고 오겠다고... (아빠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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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냐 손을 잡고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연주를 들으러 갔다. 메인 연주홀이 그랜드 호텔 유럽 맞은편에 있어서 가깝다. 레냐는 들떠서 팔짝팔짝 뛰다 미끄러져 자빠질 뻔 하고...


자리는 그리 좋지는 않아서 1층 사이드 칸막이 맨 뒤쪽이었지만 레냐는 엄청 좋아했다. 밤에 콘서트홀에 클래식 연주 첨 들으러 왔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8살짜리라 연주회 가도 토욜이나 일욜의 낮 연주회에 갔을 거고 어린이들이 듣기 편한 연주회에 갔을 것 같다. 그리고 레냐의 엄마도 별로 연주회나 발레, 오페라 등을 좋아하지 않아서...


놀랍게도 레냐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 자기 말로는 나랑 발레 보러 가서 좋았고 차이코프스키도 좋았다고, 그래서 수업시간에 발표했더니 선생님이 피아노 배워보라 권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머나 기특해라~~~ 심지어 레냐는 드뷔시와 라벨도 알고 있었다!!!!


오늘 지휘자는 안타깝게도 테미르카노프는 아니고 베른 심포니의 마리오 벤자고였다. 전에 서울시향 연주때 내한한 적 있었다. 이분도 괜찮지만 나는 테미르카노프를 원해 흐흑 아까비... (테미르카노프는 12월 중순 이후에 연주한다...)


오늘 곡은 드뷔시의 바다, 라벨의 볼레로, 브람스 1번 교향곡이었다. 실은 앞의 두개 듣고 싶어서 끊은 거고... 내가 개인적으로 브람스는 별로 안 좋아한다 ㅠㅠ 레냐가 열심히 듣는데 내가 브람스 듣다 졸면 어쩌나 싶었음(컨디션이 안좋아서)


내 곁에 앉은 레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들떠서 방글방글 웃었고 재잘거렸다. 그래도 연주회 시작하자 얌전하고 조용하게 앉아 잘 들었다. 어린아이가 연주 들으러 와서 얌전하니 기특하다고 뒷자리 옆자리 할머니들이 막 귀여워해주며 초콜릿도 주었다.


라벨의 볼레로를 오랜만에 실제 연주로 들어서 무척 좋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볼레로는 정말로 실제 연주와 레코드로 듣는 게 많이 다르다. 훨씬 섬세하고 다층적이고 또 관능적이라서.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잘 연주하는 걸 들으면 온몸이 찌릿찌릿하다. 아마도 라벨의 볼레로가 매우 육체적인 음악이라 그런 것 같다. 나는 항상 이 곡이 사랑을 나누는 곡이라고 느꼈다.


드뷔시와 라벨은 참 좋았는데 브람스는 연주 자체는 괜찮았지만 내가 딱히 좋아하는 곡이 아니었기도 하고 피곤이 몰려오기도 하고, 또 마음속으로 회사 생각도 좀 나서 좀 멍때렸다. 레냐는 내 손 꼭 잡고 앉아 있었는데 막판에 좀 졸고 있는 걸 봤다. 근데 마냥 귀엽다... 그냥 라벨까지만 듣고 쉬는 시간에 일어날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앵콜곡도 안해줬거든, 흑흑...


쉬는 시간에 레냐 손 잡고 북적거리는 홀의 카페 쪽으로 가서 주스와 케익을 사주었다. 레냐는 내옆에 찰싹 앉더니 비밀을 고백하듯이 말했다.


레냐 : 있잖아, 쥬쥬랑 둘이만 오니까 좋아.

나 : 나도 레냐랑 연주회 오니 참 좋아. 근데 아빠가 들으면 섭섭하겠다.

레냐 : 아빠한테는 비밀이야 ㅠㅠ 

나 : 레냐야, 아빠한테 벌써 비밀 가질 거야?

레냐 : 아빠는 놀린단 말이야!

나 : 알았어. 레냐가 싫으면 비밀로 해줄게. 근데 아빠는 네가 귀여워서 그러는거야. 널 사랑해서.

레냐 : 나도 아빠 사랑하지만 그래도 나도 비밀은 좀 있어야 돼.


아이고 8살짜리 아들이 벌써 이러고 있는 거 료샤가 알면 삐칠텐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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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 마치고... 필하모닉 연주홀은 언제나처럼 엄청 붐볐다. 코트 보관소도 터져나갔다.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기 위해 레냐랑 둘이 한동안 앉아 있다가 늦게 나왔다. 옷을 입고 나왔더니 료샤가 기다리고 있었다. 레냐는 계속 놀고 싶어했지만 이미 열시가 넘어 있었다. 료샤는 레냐에게 이제 자야 하니까 내일 놀자고 했다. 레냐는 다시 찡찡대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료샤네 집에 와 있다. 레냐는 나한테 옛날 이야기 해달라고 졸라대서 결국 나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를 해주었고 레냐는 좋아하다가 잠들었다. 배고파서 귤이랑 초콜릿 먹었고 료샤가 윷놀이 하자 해서 좀 해주었다. (프라하에서 가르쳐준 윷놀이에 아직도 필받아 있는 료샤... 빽도 표시는 지가 지워버렸음 ㅋㅋ)


내가 자꾸 하품을 해서 료샤가 그만 자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기 전에 메모 남기는 중. 나 내일 늦잠 잘테니 깨우지 말아달라고 했더니 료샤가 '너와 게으름은 한몸이란 걸 나도 알고 레냐도 안다' 라고 대답했다. 맞긴 맞는데 왜 좀 짜증나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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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러고보니 오늘 유럽호텔 나오는데 나이드신 문지기 아저씨가 날 알아보는 거였다.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왜 안왔어요? 라고 하면서... 이제 페테르부르크 와서 사나요? 하고... 어머나 2년전에 왔었는데... 그때 나랑 잠깐 얘기 나누긴 했지만 세상에 날 기억해주다니.. 손님들 엄청 많이 볼텐데... 내가 한국에서 온것도 기억했다... 잠깐 놀러왔다 하니 우리 호텔에서 묵냐고 물어봐서 아쉽지만 아니라고, 대신 카페에 왔다고 했더니 또 오라고 하며 포옹해주었다. 무지무지 반갑고 또 찡했다. (역시 난 이런것에 약해...)


료샤가 나에게 '너는 인사를 꼬박꼬박 하니까 아마 기억할거야' 라고 말했다. 그런가? 문지기 아저씨랑 메이드들이랑 마주칠때마다 항상 인사를 하긴 하지... 하여튼 고마워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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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투표 결과 궁금해서 잠 설치고, 히필 방 와이파이가 갑자기 안돼서 조식 먹으러 내려와 실시간 확인. 생각보다 찬성표가 많이 나와 다행이다!


오늘도 눈과 비가 온다 어흑.. 나와서는 결국 이 날씨에 유일한 해법이 될수 있는곳 =박물관 결론 내리고 버스 타고 러시아 박물관 감.


브루벨과 금발의 가브리엘 다시 본건 좋은데 오늘 몸이 좀 아프다. 배란통인가.. 전엔 그런거 없었는데 최근 몇달 전부터 생겼어 ㅠㅠ 걷는데 아파서 좀전에 진통제도 결국 한알 먹음.


사진은.. 브루벨의 날아가는 악마 두상 조각. 그리고 이 날씨가 어떤지 여실히 드러내주는 예술광장의 진창과 눈.. 불쌍한 까마귀, 푸쉬킨 동상에 바쳐진 꽃.





오후에 료샤가 레냐 데리고 오기로 했는데 내가 몸이 힘들어서 전시를 좀 일찍 본후 바로 옆의 유럽호텔 메자닌 카페 옴.. 더 멀리 걸을수도 없어ㅜ

먹은게 부실해서 아픈거 같아 애들 오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밥 시켜서 먼저 먹기 시작. 친구와 약혼자는 이해해줄거야 흐흑.. 먹고 있음 오겠지 허헉..


(료샤는 삐친거 풀렸음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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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워낙 넓어서 창문도 많다. 전시 보다가 지치면 창가의 벨벳 의자에 앉아 잠깐 쉬기도 하고 창 너머로 바깥 풍경 구경하는 것도 좋다.


어제 전시 보다 중간중간 창문 보며 찍은 사진들 몇장. 에르미타주는 궁전광장, 밀리온나야 거리, 겨울운하, 네바 강 등을 면하고 있어 전시실을 따라다니면 여러 방향 풍경들을 볼 수 있다.













추워서 창문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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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박물관에 공연까지 좀 무리해서 그런지 오늘은 많이 피곤했다. 잠도 많이 못 자서 졸렸지만 억지로 일어나 조식을 먹고 나섰다. 겨울이라 해가 짧기도 하고 이번에 머무는 일정이 그리 길지 않고, 또 돌아가면 이제 곧 지방 본사와 새로운 집2로 가야 하기 때문에 어쩐지 시간이 아까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오늘 진눈깨비가 내렸고 날은 아주 흐렸다. 차라리 춥고 눈오는 게 낫다... 기온이 영하 1도~영상 1도를 오락가락하자 길에 쌓였던 눈이 녹아 진창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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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돌아다닐 수 있는 날씨가 아니었기 때문에 버스 타고 네프스키 대로로 나가 돔 끄니기로 직행. 도블라토프 책 두권과 페테르부르크 출신 락뮤지션이자 작가가 쓴 레닌그라드에 대한 책을 샀다. 도블라토프는 사실 전에 샀던 두꺼운 책에 들어 있는 단편들인데 두껍고 무거운 하드커버 책은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가 어려워서 그냥 얇은 페이퍼백으로 분권되어 있는 걸로 두권 샀다. 실은 도블라토프 작품들은 거의 다 가지고는 있는데 역시 하드커버는 집에서 집중해 읽기가 힘들어서... 막 들고 다니며 읽는 페이퍼백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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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을 열시쯤 먹고 나왔기에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날씨가 워낙 안 좋아서 돔 끄니기 2층의 카페 singer에 가서 차 마시고 책 읽을까 했지만 창가 자리가 다 차 있었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그러면 차라리 케익이 더 맛있는 고스찌에 가기로... 그전에 정류장 근처에 있는 예카테리나 카톨릭 성당에 가서 다시 초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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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고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로 와서 고스찌 1층에 갔다. 여긴 2층은 레스토랑, 1층은 카페이다. 점심시간에 가서 저렴한 런치도 가능했지만 배고프지 않았기 때문에 얼그레이와 메도빅(페테르부르크 최고의 메도빅. 여기 거랑 아스토리아 카페 것)을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차 마시고 케익 먹으며 친구들과 잠시 톡을 하고 책을 좀 읽었다. 그리고 료샤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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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샤는 일요일에 코펜하겐 쪽에 출장을 갔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왔다.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오기로 결정하고 마일리지 표를 끊고 호텔 예약한 게 지난 금요일이라...

주말에 얘기했더니.. 깜놀 + 기뻐하면서 이 녀석이 하는 말...


료샤 : 드뎌 그만뒀구나!!!

나 : 아니야 ㅜㅜ 돌아가기 전의 마지막 일탈이야.

료샤 : 어휴 바보!

나 : 나 바보 아니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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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찌에서 기다리자 오후에 료샤가 왔다. 피곤해 보였다. 그래도 수트 대신 편한 티셔츠와 패딩점퍼, 청바지 차림이었다.



나 : 그래도 집에 들렀다 왔구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네. 잘했어.

료샤 : 응. 근데 저녁에 아빠가 오라 했어. 그래서 옷 있다가 또 갈아입어야 돼. 아 가기 싫다...

나 : 무섭고 근엄하지만 멋있는 너네 아빠~~

(* 료샤네 아빠 좀 숀 코너리 닮음. 소련 붕괴시 노브이 루스끼로 부를 축적했던 벼락부자 미노년 ㅋㅋ 전에 한두번 본 적 있고 그 집에 가본 적도 있음. 경호원 있는 저택에 살고 계심!)


료샤 : 야! 너 우리 아빠 넘보지 마! 내 아들 하나로도 모자라냐!

나 : -_- 안 넘봐! 글고 너네 아빠 부인 너보다 어리잖아!

료샤 : 쳇. 하여튼 가기 싫어라...

나 : 근데 왜 갑자기? 너 원래 아빠한테 잘 안 가잖아. 사업이 잘 안되니?

료샤 : 오늘 아빠 생일 ㅠㅠ

나 : 아 그렇구나. 축하한다고 전해드려.


료샤 : 너 나랑 같이 갈래?

나 : 싫어!!!! 가기 싫은 자리에 혼자 가지 왜 나까지 끌고 가!

료샤 : 아빠는 맨날 잔소리한단 말이야 ㅠㅠ 근데 아빠는 너를 좋아해. 그니까 너랑 가면 잔소리 안할지도 몰라. 그래도 울아빠는 여자 앞에선 나 안 혼내.

나 : 너네 아빠가 나 좋아해??? 나도 너네 아빠 멋있었어 ㅋ

료샤 : 똑똑하다고 ㅠㅠ 내 돼먹지 못한 친구 중 너만 보기 드물게 인텔리겐치야래 ㅠㅠ

나 : 어마나 나 똑똑! 나 인텔리겐치야!! 너네 아빠 짱 멋짐~

(생각해보니 몇년 전 료샤 아빠네 갔을때 서재에 있는 책들 보고는 불가코프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 있었음. 료샤는 불가코프 안 읽었음 ㅠㅠ)


료샤 : 그니까 같이 가자 ㅠㅠ 아빠가 잔소리할때 실드 좀 쳐줘

나 : 싫어 싫어 ㅠㅠ 너네 아빠네 집에는 경호원도 있고... 도베르만도 있고(개는 다 좋아하지만 도베르만은 무서워)...너네 아빠 부인 무서워...

료샤 : 나도 싫어, 나타샤... 못되게 생겨서 입술은 맨날 시뻘개... 가슴만 왕 커!

(나타샤 : 료샤 아빠의 어린 아내. 금발 글래머 미녀. 몇번째 아내인지 기억도 안남 ㅋ)

나 : 야! 여자를 그런 식으로 판단하지 마! 그리고 너 글래머 좋아하잖아!

료샤 : 나타샤는 싫단 말이야! 목소리도 째지고 맨날 헐벗고 있고! 옷인지 속옷 쪼가리인지!!!!

나 : 나타샤 이쁘던데...

료샤 : 나타샤랑 아빠랑 편먹고 나 공격할 거란 말이야 아....



료샤가 불쌍해서 하마터면 넘어갈뻔 했지만... 나도 무지 가기 싫었다! 나타샤는 딱 한번 봤는데 목소리도 정말 크고 째지고(프렌즈의 재니스랑 비슷한 목소리 ㅠㅠ) 이쁘긴 한데 사람을 무지 깔본다(그때도 내가 청바지랑 운동화 차림으로 갔는데 왕 무시했음 ㅠㅠ) 그리고 료샤네 아빠가 멋있긴 하지만 경호원과 도베르만 있는 집에 가기 싫었다.



나 : 친구야, 가주고 싶지만 나도 (불여우 같은 ㅋ) 나타샤 무서워. 그리고 너네 아빠 생일이면 가족끼리 모이는 자리잖아... 사업 파트너들도 올 거 아니야. 백번 양보해서 간다 쳐도 나 봐라, 어그 부츠에 패딩! 명품 입고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 이러고 가라고!!! 나타샤가 얼마나 비웃겠냐!   

료샤 : 그건 그렇지만... 아 가기 싫어...

나 : 레냐도 데려가?

료샤 : 아니, 레냐는 지난주에 이라랑 따로 가서 아빠랑 밥먹었어.

나 : 하긴... 애기니까 저녁에 술마시고 만찬 먹고 할땐 좀 그렇겠다.


료샤 : (곰곰 생각...) 야, 울집에 여자 드레스 있는데 너 그걸로 갈아입고 가면 되지 않을까?

나 : 뭐야, 싫어!!!! 내가 왜 남의 옷을 입고 가니!!! 글고 나한테 맞지도 않을 건데...

료샤 : 하긴 길어서 너한텐 안 맞겠다. 아...

나 : 그래도 여자 옷이 있는 걸 보니 요즘 데이트 생활은 좀 잘되나보구나 ㅋㅋ

료샤 : 아니야!!!! 접때 그 망할 그 여자가 놔두고 간 거야!

나 : 앗, 그 여자랑 뽀뽀도 안 하고 헤어졌다더니 ㅋㅋ

료샤 : 그 여자가 그냥 놔두고 갔어!!!!! 간악한 여자!!! 그래놓고 막 브 콘탁테에 자기 옷 내 소파에 걸어놓은 사진 올리고!!! 악마 같은 여자 ㅠㅠ

(얼마 전 료샤는 어떤 여자를 사귈뻔 했으나... 좀 이상한 여자라서 두어번 만나고 말았지만 이 여자가 동네방네 이상한 소문을 내고 다녀서 얘는 자기 sns 계정도 다 폐쇄했음. 무서운 불여우 같은 여자라고 혀를 내두르고 있음 ㅋ)


나 : 뭐 그냥 놔두고 간 거든 역사가 있었든 상관은 없다만... 너 나보고 그 여자가 입었던 옷 입으라는 거야 지금!!!!!

료샤 : 어, 생각해보니 그것도 좀 그렇긴 하다. 생각해보니 그 여자 170 넘었는데 그 옷 너한텐 맞지도 않겠다.

나 : (-_- 어쩐지 나 의문의 1패한 것 같음 ㅠㅠ) 근데 그 여자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 옷은 왜 안 돌려줬어?

료샤 : 무서워서... 옷 돌려주려면 연락해야 하잖아, 또 무슨 거짓말을 꾸며내고 브 콘탁테랑 인스타에 사진 올릴지 어떻게 알아 ㅠㅠ

나 : 그럼 나같으면 그 옷 버렸다! 아님 불우이웃한테 기부했거나!

료샤 : 청소 아줌마한테 버리라고 했는데 아줌마가 안 버리잖아 ㅠㅠ

나 : 네가 버리면 되잖아!

료샤 : 손대기도 싫단 말이야! 보기도 싫어!


난 가끔 얘의 행동 양태가 이해가 잘 안되지만... 하여튼 료샤는 기가 세고 목소리 크고 위압적인 여자를 매우 무서워하므로 그러려니... (성차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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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그래서 우리는 고스찌에서 좀 앉아 있다가 내 방으로 와서 한동안 얘기 나누었다. 그리고 료샤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슬픈 눈으로 아빠 생일잔치에 갔다. 불쌍했다.


하도 풀죽고 불쌍해보여서 한 45% 정도 '그냥 같이 가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음. 그러나 료샤가 나한테 옷 때문에 신경쓰이는 거면 가다가 괜찮은 데 가서 한벌 사주면 되지 않냐고 해서 확 열받아서 45%는 0%가 되었다.


아니 도대체 내가 왜 친구가 사주는 옷까지 입고 부르주아 생일파티에 가야 되냐!!!!!!!!! 나는 기모바지랑 보세 니트랑 베어파우 어그 신고 패딩 입고 그냥 걸어서 쏘다니고 방에서 유니클로 티셔츠랑 파자마 입고 편하게 쉴 거다!!!!


그래서 료샤는 슬퍼하며 6시쯤 방에서 나갔고... 나한테 좀 삐쳤지만 아빠네 가다가 전화해서 '옷 사준다 해서 화나서 안 간다 한 거지? 안 그랬음 갔을 거지? 미안해 친구야' 하고 사과했다.


그래서 나는 '옷 사준다 해서 열받은 건 맞는데, 안 그랬어도 안 갔을 거야. 45 대 55였어'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료샤는 다시 좀 삐쳐서 '쳇 친구 맞아?' 하고 전화 끊음.


삐치면 안되는데... 내일 레냐랑 같이 보기로 했었는데 ㅠㅠ 친구야 삐치지 말고 아빠 생일잔치 잘 다녀오고 무서운 나타샤 어택도 잘 이겨내렴 ㅠㅠ (왜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공연히 잘못한 것 같지 ㅠㅠ)


..





하여튼 료샤는 가기 싫은 아빠네 집에 가고. 나는 샤워를 하고 유니클로 티셔츠와 파자마를 입고, 볶음김치와 참치와 누룽지로 저녁을 먹고, 그저께 호텔 로비 카페에서 준 크리스마스 쿠키를 뜯어서 에르미타주에서 사온 컵에 디카페인 차 우려 마시고 방에 비치된 잡지를 읽으며 평화롭게 밤을 보내다 이제 오늘의 메모 쓰는 중. (료샤는 나에게 '울 아빠네 안 가면 너 뭐할건데!' 라고 해서 '나는 샤워하고 파자마 입고 한국에서 가져온 인스턴트 밥 먹고, 쿠키랑 차 마시면서 잡지 볼거다!' 라고 했더니 엄청 부러워했었음 ㅋㅋ)


근데 이렇게 써놓고 나니 료샤 좀 불쌍해. 그냥 같이 가줄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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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8. 17:02

겨울 왕국 2016 petersburg2016. 12. 8. 17:02


화, 수요일에 산책하며 찍은 사진들 몇장.

사진으로 보면 분위기 좋지만... 얼어붙은 눈과 진창 밟으며 걷는 건 힘들지.


네프스키 수도원.




여기도 네프스키 수도원





말라야 코뉴셴나야 거리.


궁전광장과 해군성 건물


해군성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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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날씨가 흐리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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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어제 너무너무 피곤해서 자정 전에 뻗었고 새벽에 몇번 깨긴 했지만 그래도 8시간 넘게 잤다. 꿈이 좀 정신사납긴 했다. 동생, 쥬인도 나오고, 회사사람들도 나오고... 나중엔 초현실적인 귀신 같은 것도 나왔다(숄을 두른 아주머니의 몸이지만 목이 없고 그 몸 위로 머리 대신 기도하는 모양의 손이 떠 있었음!) 오늘 에르미타주에서 달리 특별전을 보려는 계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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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기어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아아... 바깥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고 매우 흐렸다... 날씨는 아주 별로였다. 고로 이런 날씨에는 박물관에 가야 한다 ㅠㅠ


언제나처럼 러시아 박물관(루스끼 무제이) 갈까 하다가 호텔에서 그래도 가까워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의 에르미타주에 간만에 가자 싶었다. 최근 2~3년 동안은 안 갔었다.


싸락눈 맞으며 얼어붙은 눈과 진창을 밟으며 뒤뚱뒤뚱(많이 껴입고 양말도 두개 신어서ㅠㅠ) 걸어서 에르미타주에 갔는데~ 행운이었다. 오늘이 에르미타주 설립기념일인 듯!!! 첨엔 러시아인만 공짜인가 했으나 모두가 공짜! 티켓 사면서 돈 냈더니 공짜라는 거였다. 아니 이게 웬 떡이냐! 원래 외국인 요금은 더 비싼데~!!! 살다 보니 이런 일이!!!!


그래서 신나게 들어갔고 무거운 코트와 목도리, 장갑, 우산, 카메라, 화장품 파우치 따위를 모두 코트 보관소에 맡기고 전시 보러 올라갔다. 내가 항상 보러가는 3층 전시(인상주의, 마티스, 루오, 피카소 등등... 인상주의는 별로 안 좋아한다만 같이 있음)는 잠시 제너럴 스태프 빌딩으로 옮겨갔다고 했는데 피곤해서 오늘 그리로는 안갔다.


대신 그 3층에서 살바도르 달리와 초현실주의 특별전시를 하고 있어 매우 좋아하며 안내원 여럿에게 길을 물어 그 전시실에 갔다(에르미타주가 원래 미로 같아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 찾기가 참 힘들다) 그런데 아쉽게도 달리 그림은 대여섯점, 조각 두어점 뿐이고 나머지는 초현실파 다른 화가들 그림이었음... 뭔가 사기당한 기분... 달리는 사춘기 때 좋아했던 화가인데 아직 마음이 남아 있긴 했으나... 그림 넘 조금 왔음 흑... 뭐야!


그래도 공짜니까...


오늘은 특별전시가 여럿 있었다. 각국 동전의 역사 전시도 있었는데 이것도 재밌었고, 러시아 왕궁 인테리어 특별전도 있었다. 물론 나는 이게 재밌었다.. 샹들리에, 가구, 램프, 의상 등등(ㅜㅜ)


에르미타주는 자주 왔던 곳이라서 2층의 서양미술 메인 전시들은 대충 지나갔다. 루벤스, 푸생 등 좋아하던 화가 그림 좀 다시 보고... 마지막으로 가장 좋아하는 전시실인 렘브란트 방에 갔다... 오랜만이에요, 렘브란트. 오랜만이에요, 하만, 다나에, 이삭,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예수님, 그리고 돌아온 탕자 안아주는 아버지.


다 보고 뮤지엄 샵에 들렀다가 카페에서 까르또슈까 한개와 그린필드 티백 담가주는 홍차 한잔으로 에너지 보충하고 나왔다. 이미 오후였고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문까지 줄이 늘어서 있었다. 무료입장이라 그런거였다! 낮에 일찍 가서 줄 안섰던 거였음. 오오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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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창을 밟으며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마린스키 공연까지는 시간이 약간 있어서 좀 쉬고 컵우동으로 대충 저녁 먹었다.


추워서 기모스타킹 두개 껴신고 울스커트와 니트 스웨터, 패딩 차림으로 버스 타고 마린스키에 갔다.







마린스키에서는 어제 유리 그리고로비치 90주년 + 프로코피예프 120주년 기념으로 석화(돌로 만든 꽃, 까멘느이 쯔베똑)를 오랜만에 다시 올렸다. 그리고로비치도 어제는 나왔던 모양... 어제가 프리미어였고 오늘은 둘쨰날이었는데 난 갑자기 오게 돼서 첫날 공연은 아니고 둘째날 표 있는 걸 득템했다. 사실 며칠 후의 라 실피드 볼까 하다가 무대에서 본 적 없는 석화를 택했는데...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갔다.  


석화 리뷰는 내일이나 모레쯤 따로 올려보겠다. 그냥 간단한 인상은...


음, 역시 난 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는 취향에 맞지 않아. 어쩐지 내겐 공허하고 단조롭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동작들은 격렬하고 아크로바틱한 경우에도 그냥 도식적으로 느껴지고... 시대적 영향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나는 그리고로비치 취향이 아니다. 예외는 백조의 호수 정도인데 그것도 무대 미술과 로트바르트(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역할 확장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백조의 호수는 유일무이한 차이코프스키 음악이라는 엄청난 무기가 있지)


그리고 사랑의 전설과 석화는 여러 모로 비슷한 느낌이었다. 좀 성격 다른 형제나 자매 같았음.


그래도 주인공인 석공 다닐라를 내가 귀여워하는 알렉세이 티모페예프가 춰서 반가웠다. 연인 카테리나는 옐레나 옙세에바, 산의 여왕은 예카테리나 체브이키나, 악당 세베리얀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프. 그러나.. 슬프게도 이 발레는 내용 자체가 단조롭고 인물들도 너무 전형적이라... 인물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아 아쉬웠음. 뭐 그래도 하얀 루바슈카에 파란 바지로 러시아식 의상 입고 팔짝거리는 티모페예프는 귀여웠다...(슬프지만 우아한 맛은 없음...)


** 커튼콜 사진 몇장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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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걸어가며 폰으로 찍은 마린스키 구관과 신관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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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버스 타고 돌아왔다. 해가 빨리 지니 캄캄한데다 기온이 좀 오르자 눈이 막 녹으면서 진창과 얼음밭으로 변해서 밤중에 운하 따라 걸어오기는 위험해서.


씻고 정리했더니 어느덧 자정이 다 되었다. 박물관과 극장에 다녀왔더니 꽤 피곤하다... 이 메모만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내일도 눈이 온다고 예보가 나왔는데... 눈아 오지 마라 흐흑... 길이 너무 진창이야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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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7. 22:06

렘브란트, 반짝이는 것들 2016 petersburg2016. 12. 7. 22:06




세시간쯤 전시 보고 녹초가 되어 에르미타주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는 중.

거의 2-3년만에 다시 왔다. 요즘은 러시아 박물관에 더 자주 가서..

오랜만에 렘브란트 봐서 반가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세 그림, 하만이 자신의 운명을 깨닫다, 십자가에서 내려온 그리스도, 돌아온 탕자. 그리고 하나 덧붙이면 다나에.

렘브란트 중 내가 진짜 좋아하는 그림은 다 여기 있다, 네덜란드가 아니고.





그리고..

아아 난 반짝이고 화려한 거라면 다 좋지 ㅠㅠ 저 샹들리에, 사모바르, 앤틱 책상 갖고파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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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7. 18:47

오랜만에 에르미타주 옴 2016 petersburg2016. 12. 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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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오늘이 에르미타주 생일이라 입장 공짜!!

눈 와서 그냥 박물관 가자 하고 왔는데 공짜표 득템 :)) 아이 씐나!!

3층에서 살바도르 달리 특별전을 한다! 미로 같은 전시실을 돌아 안내원에게 두번 물어 이제 전시실 앞에 옴. 달리님 보기 전에 잠깐 앉아 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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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3시 반쯤 되면 해가 지고... 이 사진은 4시~4시 40분 사이에 찍은 것들임.

카잔 성당.


알렉산드르 푸쉬킨. 예술광장.

오늘은 도씨에게 먼저 가느라 좀 늦었어요,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 : 야!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선밴데! 나한테 먼저 와야지!

토끼 : 맨날 당신한테 먼저 왔잖아요! 아직 표트르한텐 가지도 않았어요.

푸쉬킨 : 시인이 황제보다 우선하는 게 당연하지!

토끼 : 맞아요 사랑합니당~


(표트르 : 청동기사상 ㅋㅋ)


그리고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그리보예도프 운하는 얼어붙었고 눈이 쌓여 있었다. (추웠다.. 체감온도 영하 15도라고 나왔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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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양말 두개 신어야지... 어그부츠 신었다고 방심해 양말 하나만 신었는데 오늘 발 시려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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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굉장히 고생했다. 모스크바까진 순조롭게 왔는데 폭설이 내렸다. 페테르부르크도 마찬가지로 눈폭풍(ㅠ)이 쳤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국내선 기다리는데 비행기들이 줄줄이 결항 또는 지연되기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까지야 한시간 십여분 거리라 뜨겠거니 했는데 20:20 뱅기가 21:00 출발로 변경되었다. 이때까진 그러려니..


뱅기를 탔는데 한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질 않았다. 첨엔 눈 때문안가 했으나 기체 어딘가 문제가 생긴 거였다.. 10시 반쯤 모두 내리라 함. 텅빈 벌판에는 눈보라가 쳤고 버스가 와서 우리를 싣고 도로 터미널로 감..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 화도 안냄 ㅠ 딱 한명 아저씨만 항의..


그나마도 11:55 뱅기 하나를 수배해 우리를 태웠으나 실제 출발은 12시 반에나.. 페테르부르크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한시 사십분.. 원래 밤 10시 도착 예정이었다.


딴거보다 호텔에 픽업 요청해놔서 아거 때매 계속 전화하고 정신없었다. 기사를 만나 넘 미안하다 사과하자 기사가 괜찮다며 오늘 하루종일 비행기들 다 지연되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눈폭풍 왔다고 한다..


호텔 도착해 체크인하니 새벽 세시가 다 되어 있었다. 옷이랑 세면도구만 꺼내고 씻고 쓰러져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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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이 10시까지여서 자다가 놓침. 근데 새벽 넘 늦게 도착해 어쩔수 없었다.


10시에 해뜨고 3시 즈음 해가 지기 때문에 밝을때 무조건 나가야 하는데 오늘은 11시에 일어나고, 씻고 화장하고 가방 푸느라 12시 반쯤에야 나섰다.


무지 추웠지만 하늘이 파랬다. 쌓인 눈이 얼어있었다. 예보를 보니 주중 맑은 날이 오늘뿐인거 같아 무조건 수도원에 갔다. 배고프고 추웠지만 일단 27번 타고 네프스키 수도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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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도착해선 정신없이 지하 카페로 갔다. 배고프고 꽁꽁 얼어서.. 추워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여름엔 한산한데.. 다들 설탕 넣은 차와 수도원 빵을 먹는다. 나도 티백 홍차 한잔, 쌀과 버섯 든 빵, 양귀비씨빵 시켰다. 총합 110루블, 약 2천원!!


자리가 없어 합석함. 나 빼곤 다들 나이 지긋하신 분들. 기도하러 왔다 카페에서 차 마시고 맛있고 저렴한 수도원 갓 구운빵들 사가는 어르신들이 많다.


너무 추워서 오로지 러시아에서만 하는 짓.. 차에 설탕 투하. 안 그럴수가 없었음. 설탕 넣은 차랑 빵 먹었다. 빵이 정말 너무 맛있었다. 쌀과 버섯 든 빵이야 당연하고, 양귀비씨빵 이제껏 먹은것중 이게 제일 맛있었다. 가득 든 양귀비씨가 고소하게 톡톡 터지고 솔솔 뿌려진 설탕이 달콤했다.


따뜻한 빵, 설탕 녹인 달고 뜨거운 홍차.. 그리고 머릿수건 쓴 할머니들과 성호 긋는 할아버지들 사이에 앉아 투박하게 채색된 수도원 장식접시와 이콘 보는 기분, 그 따스하고 소박한 분위기는 형용할수 없다...



몸 녹이고 배 채운 후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이콘을 보고 초를 켰다. 오늘의 기도는 전보다 간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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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수도원 묘지에 갔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 프티파 등의 무덤에 인사했다.


도스토예프스키 무덤 앞에 서자 눈물이 나왔다. 나이든 부인 둘이 무덤 앞에 오랫동안 서서 묵념하고 한 여인이 찬송가 같은걸 불렀다. 아마 정교에서 고인에 대해 부르는 송가 같았다. 얼어붙은 눈, 차가운 바람, 서서히 넘어가는 태양, 도씨의 어쩐지 슬픈 얼굴이 조각된 묘비. 흰 눈 위의 꽃다발들. 그리고 여인이 켠 초와 그 노래가 어우러져 순간 성스러운 곳에 있는 듯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땅에 키스하고 무덤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아 인사를 하고 키스자국 찍은 쪽지를 남겼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나의 도씨. 내 인생 바꿨던 사람.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에게도 오랫동안 인사했다. 불행하고 불행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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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탔다. 너무 추워서 배가 아프기까지 했다. 중간에 내려 그랜드 호텔 유럽에 들름(화장실 가려고 ㅠㅠ 그래도 전에 몇번 묵었으니 너그러이 봐줘요 카페도 자주 갔구먼)


나와선 맞은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에 갔다. 마침 이틀 후 라벨과 드뷔시 연주가 있어 남은 얼마 안되는 표 중 젤 싼 표 끊었다. 약 2만원 정도.. 하지만 내한 오면 엄청 비싸지지.. 안타깝게도 테미르카노프는 내가 떠난 후에야 지휘 일정이 잡혀 있었다 흐흑.. 그래도 드뷔시의 바다와 라벨의 볼레로를 들을 수 있다.


4시였고 이미 해는 져 있었다. 예술광장 가서 푸쉬킨에게 인사하고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쪽 갔다가 운하 따라 네프스키로 나와서 쭉 걸어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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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배고파서 고스찌에 갔다. 젤 먼저 가는 곳이니 젤 좋아하는 곳이겠지.. 따뜻한 보르쉬와 생선구이 먹었다. 생선은 이름 생소한 흰 생선인데 남자 점원의 추천대로 먹었는데 부드럽고 맛있었다.


먹고 나와서 호텔까지 걸어왔다. 방에 가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로비 카페에 잠깐 내려와 차 마시고 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해 뜨는대로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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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6. 23:31

수도원 다녀오는 길 2016 petersburg2016. 12. 6. 23:31




눈은 그쳤는데 너무 추웠다. 영하 10도 체감 영하 15도라고.. 하여튼 꽁꽁 싸고 수도원 다녀옴. 왜냐하면 오늘 날씨가 맑았고.. 조만간 또 눈이 올거 같기 때문이지ㅠㅠ 날씨 좋을때 무조건 수도원이랑 강변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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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지금은 몸이 너무 얼어서 단골 카페/음식점인 고스찌에 옴. 따뜻한 보르쉬 한그릇 먹고 이제 생선 기다림.. 아이고 추워라. 해는 이미 세시 반에 졌음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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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9. 22:12

너를 사랑한다 표트르의 창조물이여 2016 petersburg2016. 11. 29. 22:12

 

백야. 6월 한밤의 페테르부르크.

제목은 푸쉬킨의 '청동기사상' 첫 연에서.

 

6월 22일 밤. 공연 보고 엽님과 이 청동기사상 앞에서 다시 만나 석양과 황혼과 백야의 어스름 구경.

 

내게 있어 백야의 네바 강변을 걷는 것처럼 아름답고 환상적인 기억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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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8. 22:57

거울 나라 앨리스 생각하며 2016 petersburg2016. 11. 28. 22:57

 

여기는 페테르부르크의 그랜드 호텔 유럽 1층 로비 바.

유럽 호텔은 아르누보 장식이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는 곳이다. 비수기 때(운좋을때) 여기서 몇번 묵었는데 최근엔 일정도 안 맞고 역시 비싼 곳이라 훨씬 저렴한 곳에서 묵으면서 여기는 카페나 바에만 잠깐 갔다. 이곳 카페, 바, 레스토랑 모두 훌륭하다.

 

이건 지난 6월에 료샤랑 갔을때.

우리가 앉은 자리가 제일 안쪽이었는데 벽 한면이 거울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맞은편 창가와 거기 앉은 분 모습이 대칭으로 비치고 있다. 거울 나라 앨리스 생각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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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27. 20:57

백야 2016 petersburg2016. 11. 27. 20:57

 

6월. 페테르부르크.

백야에는 자정이 넘어가기 전까지는 바깥이 훤하다. 잠깐 캄캄해졌다가 두어시간 후 다시 하늘이 밝아져 온다. 암막커튼을 빽빽하게 쳐도 새벽이면 아주 작은 틈으로 빛이 스며들어온다. 나는 베개 옆에 안대를 두고 자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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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페테르부르크.

 

이날은 페테르부르크에 짧게나마 놀러오셨던 엽님과 함께 판탄카 운하를 지나 레트니 사드에 갔다가 마르스 광장을 가로질러 이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이 있는 그리보예도프 운하로 걸어왔다.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그 며칠전까진 계속 비왔는데 엽님은 정말 날씨 운이 좋으셨다. (그다음날 귀국하신 후 다시 페테르부르크엔 비가 왔음 ㅋㅋ)

 

스파스 나 크로비 사원 사진이야 전에도 여러번 올렸지만... 오늘은 좀 부분부분 찍은 사진들. 근데 내 키가 작아서... 구도가 다들 좀 삐꾸임. 어쩔수 없어 흐흑...

 

 

 

먼저 젤 전형적인 관광엽서 구도로 한컷~ 이 구도는 전에도 몇번 올렸음. (뭐 갈때마다 이 구도로 몇장씩 찍는다 ㅎㅎ)

 

 

 

 

 

 

이건 마르스 광장 걸어가며 찍은 사진. 하늘이 저토록 파랬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함께 보낸 건 이틀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엽님, 즐거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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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7. 22:02

체리와 수도원 버섯빵과 혼합견과 2016 petersburg2016. 11. 17. 22:02

 

그저께인가 간만에 타워버거를 먹었는데 항상 내겐 양이 많은 버거였는데 그땐 워낙 먹은 게 없기도 했었지만 게눈감추듯 한방에 해치우고는 그래도 배가 고파서 딴게 먹고 싶었기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이웃님께서 아마 내가 입맛이 돌아오고 예전처럼 잘 먹을 수 있게 되어 그런 걸 거라고, 좋아져서 그런 거라고 따뜻한 글을 달아주셨는데 그러고보니 그런가보다 하는 맘도 들고 고마웠다(감사해요)

 

생각해보니 한참 못 먹을땐 저것이 그나마 간신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6월. 페테르부르크.

 

매일 체리를 먹었고, '딕시'라는 체인의 수퍼마켓에서 파는 혼합견과를 한봉지씩 사서 며칠 동안 조금씩 꺼내먹었다. 그래도 저날은 그전날 수도원에서 사온 버섯빵이 있어서 그거랑 같이 아점 먹었다. 조식 뷔페는 거의 항상 걸렀다.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메뉴도 부실해서 별로 먹고 싶은 맘이 안 들었었다.

 

 

이때 머물렀던 호텔은 작고 허름해서 접시가 없었다. 그래서 티슈를 깔아놓고 빵과 견과를 먹었고 유리컵에 체리를 담아 먹었다.

 

그 견과 봉지는 마린스키에 갈때도 싸갔다. 배고플 때 먹으려고. 막간에 몇알씩 먹었다.

 

근데 의외로 저 혼합견과가 별로 비싸지도 않았고 맛있었다. 돌아올때 한봉지 사왔었는데 곧 다 먹어버렸다.

 

..

 

그런데 지금은 타워버거 한개 홀랑 해치우고는 '뭔가 더 먹고 싶다..' 이렇게 되었음!

좋은 거긴 한데 이럴 거면 몸에 좋은 걸 많이 먹어야 더 좋을텐데 뭔가 찜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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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림스키 코르사코프 거리.

저날 저녁 나는 러시아 박물관에 다녀온 후 이삭 성당 앞쪽 카페에서 차를 한잔 마시고 숙소가 있는 저 림스키 코르사코프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6월이었지만 이날은 날씨가 흐리고 쌀쌀했다.

 

이 사진에 나와 있는 키큰 남자는...

 

횡단보도에서 신호 기다리고 있는데 내 곁으로 오더니 너무나 허물없이 '아가씨, 불 있어요?' 라고 물었다.

 

나 : 어, 음... 전 담배 안 피우는데요.

남자 : 아쉽구만요. 피우면 좋을텐데.

 

그리고는 아직 빨간불인데도 불구하고 긴 다리로 휘적휘적 길을 건너가더니 어째선지 저 자리에 멈춰서서 하염없이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신호가 바뀐 후 길을 건넜고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아픈 다리를 끌며 숙소로 혼자 돌아갔다.

 

다음날 료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 : 나 담배 피울 것처럼 생겼어? 

료샤 : 아니.

나 : 근데 그 남잔 왜 나한테 불 달라 그랬지? 생각해보니 전에 공원에 앉아 있을때도 어떤 애기 엄마가 나한테 불 있냐고 물었는데.

료샤 : 해골옷 입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나 : 결론은 맨날 해골이니 ㅠㅠ

 

 

..

 

근데 이상하게도 불 없다고 하니 아쉽다고 한 후 무단횡단해 휘적휘적 건너가 길 맞은편을 바라보던 저 남자 뒷모습이 한동안 기억에 남았다. 쓸쓸해 보였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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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전에 여러번 발췌한 소설의 전반부에 포함된 에피소드이다. 1974년 3월. 미샤는 키로프에 입단한지 일년이 채 안된 시기이다. 우중충한 진창으로 가득한 음습한 3월의 어느날, 한밤중에 미샤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친구인 트로이의 아파트로 찾아온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3월 초였다. 날씨는 좀 풀렸지만 거리는 진창과 감기 환자들로 가득했다. 트로이는 일 년 중 이 시기를 가장 싫어했다. 오후 강의에도 감기로 빠진 학생이 세 명이나 있었다. 우중충하고 습한 날씨 때문인지 그날따라 학생들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영문법을 따라가지 못해 쩔쩔 맸고 짧은 테스트에서도 무더기로 오답을 냈다. 마침내 트로이는 다음 주에 있을 시험을 거론하며 학생들을 협박해야 했다.

 

 강의를 마친 후 트로이는 녹초가 되어 학교를 나왔다. 그는 자신의 수업 방법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학생들이 나이 차이가 대여섯 살 밖에 나지 않는 젊은 강사를 만만하게 여겨서 그러는 것인지 의문하며 길을 건너 버스를 타러 갔다. 평상시 같으면 다리를 건너 집까지 걸어갔을 테지만 그러기엔 녹은 눈 때문에 길거리가 너무 지저분했다.

 

 아직 이른 저녁이었지만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사흘 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가야 했는데 아직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몇 시간만 매달리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요 며칠 동안 그는 독감에 걸린 듯 머릿속이 뿌옇고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어쩌면 얼마 전 다시 만난 톨랴가 그에게 퍼부어댄 원망 섞인 욕설 때문일 수도 있었다. 톨랴는 아직도 그가 청혼할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전구가 나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텅 빈 집으로 들어갔다. 지난 여름에 어머니가 재혼해 떠난 후 트로이는 아파트를 혼자 쓰고 있었다. 좁고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네프스키 대로 근처였고 방 두 칸과 거실, 부엌과 욕실이 딸려 있었으므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몇 번은 아기가 태어난 갈랴의 집 대신 그의 집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집 주인의 요리 솜씨가 형편없었기 때문에 갈랴 부부의 집만큼 인기는 없었다.

 

 

 밑단이 흙투성이가 된 바지를 벗어 빨래통에 처박은 후 그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서 끈끈하고 음습한 레닌그라드의 3월 공기를 씻어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아주 진한 커피를 한 잔 타 마시며 전날 알리사가 카페에서 사다 준 양귀비씨 빵으로 저녁을 때웠다. 결혼 후에도 알리사는 종종 들러 그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곤 했다.

 

 

 커피를 한 잔 더 내린 후 그는 책과 논문 뭉치를 들고 식탁으로 가서 발제 원고를 마저 쓰기 시작했다. 부엌의 조명이 가장 밝았기 때문이다. 그는 음악도 틀지 않고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 서너 시간 동안 원고를 썼다.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다. 머리를 식히려고 손에 닿는 의자에 놓여 있던 푸쉬킨 시집을 집어 아무렇게나 펴고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읽었다.

 

 

지금은 나의 계절, 나는 봄이 싫다.

눈 녹는 철은 지겨워, 악취와 진창도. 봄에는 앓게 되네.

몸 속의 피는 방황하고 감정과 예지는 우수에 사로잡힌다

엄동설한이 내겐 훨씬 좋다.

 

Теперь моя пора: я не люблю весны;

Скучна мне оттепель; вонь, грязь — весной я болен;

Кровь бродит; чувства, ум тоскою стеснены.

Суровою зимой я более доволен,

 

 

 

 악취와 진창을 얘기하는 푸쉬킨은 진정한 러시아인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트로이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하고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졌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 곱슬머리의 가무잡잡한 시인이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모를 만나지 않았다면, 리체이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래도 위대한 시인이 되었을까? 아니, 어쩌면 더 위대하고 더 사랑받는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재능은 유일무이한 것이며 불멸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은 축복이며 특권이었다. 아무도 그의 곁에 있던 친구들과 이류 시인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리 짙지도 않은 어둠 속으로 명멸해 사라진 자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네바 강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없었을까?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모임은 다음 주였고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혹시 알리사가 들른 걸까 싶어 트로이는 현관으로 나갔다.

 

 

 “ 누구세요? ”

 

 “ 나야. 들어가도 돼? ”

 

 

 트로이는 문을 열었다. 미샤가 가방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도 시커먼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 어떻게 된 거야? ”

 

 “ 수도관이 터졌어. 집이 물바다야. ”

 

 

 트로이는 미샤를 안으로 들여놓고 가방을 받아 내려놓았다. 미샤가 물을 뚝뚝 흘리며 재채기를 해댔다. 트로이가 타월을 가지고 왔을 때 그는 신발과 재킷과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 현관 바닥에 내팽개치고 있었다.

 

 

 “ 바닥 더러운데 나한테 줘. ”

 

 “ 괜찮아, 어차피 빨아야 돼. ”

 

 

 타월로 머리의 물을 떨어내며 미샤가 거실로 들어왔다. 바지도 엉망이었다. 가방 지퍼를 열어 마른 옷을 꺼내며 그는 다시 재채기를 했다.

 

 

 “ 온수 나와? ”

 

 “ 응, 아직은 나올 거야. 빨리 가서 씻어. 파이프가 터졌으면 잽싸게 튀어나올 것이지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한 거야? ”

 

 “ 고칠 수 있을 줄 알았지. 반쯤 고쳤는데 레냐가 뭘 잘못 건드렸어. 삽시간에 펑 터지잖아. 집 밖으로 나왔는데 거기서도 또 터졌어. ”

 

 

 졸업하고 기숙사에서 나온 후 미샤는 극장 동료 세 명과 함께 사도바야 거리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하나는 동기였고 둘은 선배였는데 트로이는 미샤가 레냐라고 부르는 레오니드 핀스키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레트니 사드의 아폴로 조각상을 닮은 핀스키는 트로이가 유일하게 아는 미샤의 발레학교 동기였다. 극장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의 집을 구해줬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나마 친한 친구와 같이 쓰게 되어 다행일지도 몰랐다.

 

 

 “ 그래서 다른 애들은 어떻게 됐어? ”

 

 “ 다 짐 싸서 뿔뿔이 피난갔지. 난 그나마 나아, 레냐랑 발로쟈 방은 직통으로 터져서 옷이고 책이고 다 잠겼어. ”

 

 “ 대신 물에 빠진 생쥐가 됐잖아. ”

 

 “ 뭐 몸으로 때우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

 

 

 미샤는 나무 바닥과 카펫 위에 더러운 물을 떨어뜨리면서 욕실로 갔다. 가는 내내 재채기를 했다. 트로이가 등 뒤로 물었다.

 

 

 “ 그런 몰골로 버스를 탄 거야? 같이 있는 애들한테도 차가 없어? ”

 

 “ 아무도 없어. 급료가 짜거든. 버스는 안 탔어. 경찰한테 잡혀갈 것 같아서. ”

 

 “ 그럼 걸어왔어? ”

 

 “ 알잖아, 운하 따라 오면 얼마 안 걸려. ”

 

 

 트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시궁창에 구른 듯 흠뻑 젖은 상태로 운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걸어오는 게 정신이 제대로 박힌 무용수가 할 만한 짓인지 꾸지람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갈랴처럼 굴고 있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렌지에 주전자를 올려놓았고 찬장을 뒤져 그나마 깨끗한 컵을 한 개 찾아냈다. 제대로 된 찻잔은 하나도 없었다, 지난번 모임 때 오랜만에 새 소설을 탈고한 쥬진스키가 신이 나서 찻잔들을 가지고 무슨 퍼포먼스를 하다가 깨뜨렸기 때문이다.

 

 

 식탁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았던 원고와 책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끓는 물과 찻잎을 컵에 붓고 있을 때 미샤가 나왔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가방에서 스웨터를 꺼내 티셔츠 위로 뒤집어쓰며 미샤가 투덜댔다.

 

 “ 중간에 더운 물 끊겼어. 우리 아파트만 그런 게 아니었나봐. ”

 

 “ 이쪽으로 와서 차 좀 마셔. ”

 

 진하게 우린 차에 얇게 썬 레몬 두 조각과 설탕을 한 숟갈 부어 넣으며 트로이가 의자를 가리켰다. 미샤는 잠깐 눈썹을 찌푸렸지만 두어 차례 몸을 떨더니 트로이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 직접 설탕을 더 퍼 넣었다.

 

 “ 더 넣어. 그래야 몸이 녹을 걸. ”

 

 “ 이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심장병을 일으킬 분량인데. ”

 

 

 미샤는 제대로 젓지도 않고 컵을 입에 가져갔다. 뜨거운 차를 연달아 두 잔 마시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식탁 구석에 쌓여 있는 원고와 책들을 보았다.

 

 

 “ 강의 준비해? ”

 

 “ 아니, 금요일에 모스크바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

 

 “ 아, 나도 금요일부터 투어 가. ”

 

 “ 어디로? ”

 

 “ 키예프, 사라토프, 아마 페름까지 갈 거야. 너 사라토프에 할머니 계시다고 하지 않았어? ”

 

 “ 아직도 기억하는구나. 우리 할머니 극장 좋아하니까 너 보러 갈지도 모르겠다. ”

 

 “ 그래, 오신다면 내가 앞자리 부탁해 놓을게. ”

 

 

 미샤가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끌어왔다. 개켜놓은 옷들 사이를 뒤져 발레슈즈와 작은 천 지갑 같은 것을 꺼냈다. 자세히 보니 지갑이 아니고 바느질 도구가 들어 있는 주머니였다. 벽에 등을 기대고 식탁에 다리를 걸친 채 능숙하게 발레슈즈에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미샤가 물었다.

 

 

 “ 나 자고 가도 돼? 여자가 오기로 한 거 아냐? ”

 

 “ 무슨 여자? ”

 

 “ 여자 생겨서 바쁘다며. ”

 

 “ 깨졌어. ”

 

 “ 유감이네. ”

 

 “ 그냥 금요일까지 여기 있어. 우리 엄마가 쓰던 방 비어 있으니까. 파이프 터진 건 금방 고친다 해도 물 빠지고 치우는데 한참 걸릴 걸. ”

 

 “ 그래,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 ”

 

 

 트로이는 매혹되어 미샤가 발레슈즈를 기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바느질을 할 줄 아는 것도 신기했다.

 

 

 “ 신발은 극장에서 다 대주는 건 줄 알았는데. 스타가 이런 걸 직접 하다니. ”

 

 “ 주긴 하는데 몇 켤레 안 줘. 그리고 아직 스타가 아니야. ”

 

 

 아마 미샤는 인민예술가 정도는 되어야 스타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트로이에게 강의와 모스크바 세미나에 대해 물어보면서 신발 세 켤레를 순식간에 기웠다. 그리고는 세 켤레를 돌아가면서 신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그 모든 동작은 완벽하게 기계적이고 효율적이어서 군인을 연상시켰다.

 

 

 “ 투어는 며칠 정도야? ”

 

 “ 3주. ”

 

 “ 뭐가 그렇게 길어? ”

 

 “ 버스로 간대. 집단농장들도 들르고. ”

 

 “ 키로프라고 그렇게 화려한 게 아니구나. 버스로 투어 가고 급료도 짜고 직접 신발도 기워야 하고. ”

 

 “ 당연하지, 트로이츠키 동무. 여긴 평등의 사회인걸. ”

 

 “ 크류코바도 같이 가? ”

 

 “ 아니, 니나 정도 되면 계급 위에 존재하지. 그리고 니나랑 같이 가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거야. ”

 

 “ 왜? ”

 

 “ 더 미움 받게 된다고. 투어에 니나 예전 파트너가 둘이나 같이 가거든. ”

 

 

 미샤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트로이는 극장 내부의 위계질서가 얼마나 엄격하고 경쟁이 얼마나 심한지 타냐에게 조금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수직으로 급상승하고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된 젊은 신입은 아마 선배들 사이에서 눈엣가시나 다름없을 것이다.

 

 

 “ 쓰던 거 계속 써. 나 연습 좀 할게. ”

 

 “ 테이프 챙겨 왔으면 음악 틀어놓고 해도 돼. ”

 

 “ 괜찮아, 몸만 풀 거야. 근육이 좀 뭉쳤어. ”

 

 

 미샤는 거실 쪽으로 나가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트로이는 다시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도저히 미샤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리를 옮겨 거실에서 등을 돌리고 책과 원고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미샤는 책장과 창틀을 잡고 다리를 길게 뻗으며 트로이에게는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동작을 연속으로 연습하고 있었다. 근육만 조금 푸는 동작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완전히 몰입하여 음악도 없이 좁은 공간에서 생소한 춤을 추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가도 모를 것 같았다. 트로이는 푸쉬킨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유일무이하고 불멸하는 재능.

 

 그는 고개를 돌렸고 원고를 이어 쓰기 시작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논리가 약해지면서 횡설수설로 변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다른 논문들을 인용하고 논지를 가다듬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주제를 잘못 택한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내용을 바꿀 수는 없었다.

 

 

 

...

 

 

얼마 전 드미트리 마로조프의 시점으로 서술된 이야기를 짧게 발췌한 적이 있었다. 투어에서 돌아온 미샤가 폐렴에 걸린 얘기(http://tveye.tistory.com/5469 )였는데 그것이 위 에피소드에서 미샤가 말하는 '키예프, 사라토프, 페름'의 버스 투어였다. 시간적으로는 위 에피소드가 1974년 3월, 투어에서 돌아와 폐렴에 걸리는 것이 4월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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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시는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가을'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리체이는 소년 시절의 푸쉬킨이 다녔던 기숙학교이다.

 

미샤가 차에 설탕 타면서 얘기하는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그의 발레학교 시절 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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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관 터져서 난방 끊기고 물벼락 맞고 집에서 달려나온 미샤의 이야기는... 사실 내 경험에서도 좀 가져왔다. 나는 다행히 물벼락까진 안 맞았지만... 예전에 러시아 기숙사에 있을때 동네 수도관이 다 터져서 길바닥에선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하필 혹한이 몰아닥쳐서 얼어죽는 줄 알았었음.

 

그런데 그때 기숙사에는 그저 벽에 '기술적 문제로 난방 안됨'이라고만 씌어 있었고...

'그 망할놈의 기술적 문제! 맨날 저 문구야!' 하면서 덜덜 떨며 뜨거운 물을 끓이면서 텔레비전을 틀어보니 뉴스에 어디어디 수도관 터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우리 동네였음 ㅠㅠ


 

그보다도 더 예전에 있을땐 겨울에 온수 안 나올때가 많아서 가스렌지에 물을 끓이기도 하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기도 해서 그걸로 간신히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은 적도 있었음. 그러니 소련 시절인 1970년대의 미샤와 트로이네 집은 당연히 더 심했겠지 ㅠㅠ (저 에피소드가 벌어질 당시 미샤는 아직 극장 근처의 좋은 아파트를 얻기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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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예술광장의 푸쉬킨 동상.

 

 

 

루돌프 누레예프.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사진은 alex gouliaev.

이번 뮌헨 바이에른 극장 무대에서 데뷔했던 존 크랑코의 로미오와 줄리엣 리허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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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이 에피소드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5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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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6. 11. 8. 21:41

녹음 너머 황금빛 푸른빛 사원 2016 petersburg2016. 11. 8. 21:41

 

 

페테르부르크. 니콜스키 사원.

 

마린스키 극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나온다. 황금빛과 푸른빛이 무척 아름다운 사원이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태그의 니콜스키 사원을 클릭하면 이곳에 대해 전에 올렸던 포스팅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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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