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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8. 23:27

외곽은 아직도 레닌그라드 같지... 2016 petersburg2017. 3. 28. 23:27









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

로모노소프 도자기 박물관 가는 길. 도심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라 황량하고 건물과 주변 풍경에는 잿빛 소련 느낌이 배어 있는 동네다. 레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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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27. 23:49

항상 떠나고 싶으니.. 2016 petersburg2017. 3. 27. 23:49




작년 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사진들 몇장















몸이 아플 때도 안 아플 때도 항상 떠나고 싶으니 현실에 불만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



:
Posted by liontamer







예전에 발췌했던 에피소드 중에 아파트 수도관이 터져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친구인 트로이의 집으로 피신 온 미샤의 이야기가 있었다. 두 토막으로 나누어 올렸는데 하나는 흠뻑 젖은 미샤가 트로이네 집으로 오는 이야기였고 다음 얘기는 잠든 미샤를 바라보는 트로이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링크는 아래.



http://tveye.tistory.com/5524 (수도관 터진 날, 푸쉬킨,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주어진다)
http://tveye.tistory.com/5783 (깊은 잠, 멈춘 육체)



그 파트는 사실 트로이와 미샤가 처음으로 밤을 보내고 육체적 관계를 맺는 순간을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행복한 순간이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그 직후의 이야기이다(공개 블로그라 자기 검열에 의해 둘의 불꽃튀는-ㅋㅋ- 장면은 건너뜀) 덜컥 관계를 맺어버린 후 트로이와 미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사실 내겐 그들의 잠자리보다 이 순간이 더 중요했다.



실지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이야기와 단어와 표현조차 그 순간의 트로이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샤라면, 그는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농담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작가로서의 나는 오직 그의 말만을 믿을 수 있다. 웬 횡설수설이냐고?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작가란 거짓말쟁이이며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인간이다.



발췌한 에피소드 아래에는 이 글을 쓰던 당시 내가 사적으로 남겼던 메모를 첨부했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한참 후 미샤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팔에서 빠져나갔다. 침대에서 내려가 방을 나갔다. 트로이는 잠깐 동안 어둠 속에 누운 채 두려움에 잠겼다. 그가 떠나 버릴까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 두려움이 너무 생생하고 강렬해서 어지럽고 욕지기가 났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일어나 침실 밖으로 비틀거리며 나갔다.



 미샤는 가버린 게 아니었다. 그는 부엌에 있었다. 식탁 구석에 오랫동안 놓여 있던 미지근한 과일주스를 팩 째로 마시고 있었다. 달착지근한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 애였으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트로이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안을 뒤져 맥주 한 병을 찾아냈다. 막 뚜껑을 따고 들이키려는데 미샤가 병을 빼앗아 크게 두 모금 마시고 돌려주었다. 트로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 넌 마시지 마. ”



 “ 왜? 미성년자도 아닌데. ”



 “ 찬바람 맞고 왔잖아. 투어도 가야 한다면서. ”



 “ 폐렴에라도 걸릴까봐? ”



 트로이가 맥주 대신 물을 따라 주자 미샤는 컵을 들고 침실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술병을 거꾸로 들어 끝까지 다 마셨다. 차가운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뱃속까지 단숨에 흘러내려갔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침실로 갔다. 차가운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미샤는 모포를 찾아내 몸에 두르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모포를 뒤집어쓰고 벽에 기댄 채 넓은 침대에 앉아 있는 미샤는 더 이상 격렬하게 그를 포옹할 때처럼 대담하고 강해 보이지 않았다. 사원을 기어오르던 악마도, 끝없이 그를 몰아대며 끌어당기던 젊은 폭군도 사라졌다. 부스스하게 뒤엉켜 사방으로 치솟은 검은 머리칼을 갸름한 얼굴 주위로 종려나무 잎사귀처럼 드리운 채 보풀 어린 모포로 어깨를 감싸고 사춘기 소년처럼 사지를 늘어뜨리고 앉아 트로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 어둠 속의 고양이처럼 세로로 길게 빛나고 있었다. 트로이는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어깨를 안고 베개 위로 눕혔다.



 미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이런 거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



 길 잃은 아이처럼 우울한 목소리였다. 미샤는 베개에 이마와 눈을 파묻고 몸을 웅크렸다.




 충격을 받은 게 당연해. 무경험, 친구의 배신, 충격.


 아니, 사회 윤리와 법률 위반도 있지. 발각되면 체포당할 짓이니까. 넌 항상 그런 규율과 질서를 경멸하는 것처럼 굴지. 하지만 어쩌면 넌 그렇게 강하지 않을지도 몰라.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되었어도 마찬가지야. 넌 아직 애에 지나지 않아. 얕보이지 않으려고 허세를 부리는 애. 그런 상황을 거부할 용기가 없는 어린애. 그건 강간이나 마찬가지였을지도 몰라. 내가 그렇게 한 거야.




 트로이는 공포를 억누르려고 애쓰며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 네 잘못이 아냐. 내가 그런 거니까. 넌 아무 것도 몰랐잖아. ”




 “ 네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 ”



 알리사와 마찬가지였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알아차린 것이다. 미샤는 언제부터 알았던 걸까? 친구들도 모두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알리사는 조교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의 표정과 태도 전체에 선명하게 낙인이 찍혀 드러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오랫동안 감추려고 애썼는데.



 미샤가 눈을 들어 충격에 잠긴 트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다른 애들은 모를 거야. 난 같이 자는 남자들이 많아. 보면 알아. ”



 “ 그럼 다른 것도 알았어?"



 그는 차마 ‘내가 널 원했던 것도 알았어?’ 라고 대놓고 묻지 못했다. 다시 두려움이 솟구쳤다.



 “ 몰랐어. 알고 싶지 않았어. 어쨌든 너와는 자고 싶지 않았어. ”




 “ 교회 첨탑 같아서? ”



 트로이는 억지로 농담을 짜냈다. 미샤는 웃지도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 파트너나 친구와는 자는 게 아니니까. 신뢰가 사라지잖아. ”



 “ 난 나보다 널 더 믿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



 “ 네가 그렇다는 건 알아. ”



 미샤는 그의 얼굴에 뺨을 마주대고 여전히 우울하게 말했다.



 “ 파트너는 바꿀 수 있어. 친구는 그게 안 돼. 내게 친구는 너 하나 밖에 없어. ”



 “ 주위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쩌고. 극장 동기들은, 이고리는, 타냐는? ”



 “ 친구는 잘 사귀지 못해. 난 사람들을 믿지 않아. ”



 처음으로 트로이는 미샤의 완벽하게 서늘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너머로 깊게 일그러지고 오그라든 어둠을 보았다. 어둠. 불. 추락. 크세니야가 했던 말. 불을 뿜으며 떨어지는 아이. 모스크바 역 좁은 의자에 앉아 공포에 질려 있던 소년.



 “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데. ”



 그는 심각하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팔 안의 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땀이 식으면서 한기가 느껴졌다. 미샤의 몸에는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 세상이란 게 뭔데. 소비에트 연방?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




 
 그는 키로프라고 하지 않고 마린스키라고 했다. 레닌그라드 대신 페테르부르크라고 얘기한 것처럼.



 “ 우리 주위의 모든 것. 전부. ”



 “ 레닌그라드.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단호하게 말했다. 트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레닌그라드. ”



 그는 미샤가 이 도시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에 전율했다. 물 위에 돌로 지어진 도시, 학살과 절망의 도시, 피와 바람의 도시, 허위와 모방의 역사로 가득 찬 옛 수도, 이제는 모스크바의 광휘에 밀려나 퇴색하고 있는 도시를 향해 그런 절대적이고 강력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 나하고 레닌그라드는 같을지도 몰라. ”



 미샤는 트로이의 귓가에 입술을 마주 댄 채 따스한 숨결을 내쉬며 말했다.



 “ 뿌리가 없어. 돌이킬 수 없이 안이 비었어. 파이프처럼. 운하의 검은 물이 그 안으로 차올랐다가 어디론가 빠져나가. 그래서 사람들을 잡을 수가 없어. 친구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 ”



 2년 반 전 갈랴의 집에서 만난 이래 미샤는 단 한 번도 트로이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그럼 나는? ”




 “ 내가 널 잡는 게 아니야, 네가 날 잡아주는 거지. 그래서 나한테는 친구가 너 하나 밖에 없어. 너하고 나는 레닌그라드에 같이 있으니까. ”



 그는 미샤의 말을 절반쯤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는 지금껏 미샤를 이해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에게 있어 미샤 야스민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의 내부에 있는 것이라곤 깊은 사랑과 욕망뿐이었다.



 가슴을 에는 듯한 연민과 애정을 느끼며 안드레이 트로이츠키가 조용히 물었다.



 “ 누구든 사랑해본 적이 있어? ”



 “ 같이 자는 남자들은 많아. ”



 미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트로이의 목을 껴안고 따뜻하게 데워진 몸을 바짝 밀어붙였다. 한쪽 다리를 들어 트로이의 허리를 감았다. 엷은 갈색 털이 성기게 돋아난 트로이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애무하듯 쓸어내리며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키스를 잠시 멈췄을 때 미샤가 입술을 떼지도 않고 말했다.



 “ 좀 안아줘, 안드레이. 한번만 더 해줘. ”



 절망적이고 쓸쓸한 목소리였다. 불을 뿜으며 떨어지는 아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생명체. 낯선 인간. 하지만 트로이는 더 이상 그게 새로 온 존재인지 그들 이전부터 있었던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좀 안아줘, 안드레이. 한번만 더 해줘란 말과 ‘안드레이, 나 좀 잡아줘. 잠시만’ 이란 말이 똑같은 울림과 똑같은 깊이로 밀려나온다는 것뿐이었다. 파이프에서 검은 물이 빠져나오듯, 그렇게.



 그들은 새벽이 될 때까지 시트가 말려 올라간 매트리스 위를 구르며 다시 사랑을 나눴다. 아침이 되었을 때 트로이는 면도도 하지 않고 강의 노트를 챙겨 학교에 나갔다. 그가 나갈 때 미샤는 기침을 하면서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파이프가 터져 엉망이 되었던 아파트는 예상 외로 다음날 곧 복구되었다, 레오니드 핀스키가 아는 수리공에게 보드카를 뇌물로 주며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샤는 3일 후 키예프로 투어를 떠날 때까지 트로이의 아파트에 머물렀다.





...







<2012년 가을의 메모 - 이 소설을 쓰던 무렵>




요즘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텅 빈 일종의 파이프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끔은 그 파이프 안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와 위아래, 양옆으로 물결치는 것 같다. 그 물은 아주 차갑고 아주 검다. 주로 밤에 그렇다. 원래 밤이란 건 그런 시간이다. 


 
옛날에도 가끔 우울증에 시달렸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나 자신이나 주변과 타협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면서 훨씬 나아졌다. 그런데 그건 사실 해결의 기술이 아니라 회피의 기술이다. 파이프에는 별 도움이 안된다.
 


오래 전 글을 쓸 때, 그리고 최근 다시 글을 쓰게 되었을 때, 난 동일한 인물의 입을 빌어서 한 인물의 내부와 외부에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하며 거기에는 어떤 정점도 어떤 바닥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고 우울한 일인지 이야기했다. 난 그 느낌을 안다. 그건 파이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그 인물은 파이프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난 그 느낌을 안다. 


 
어쩌면 내가 다시 글을 쓰기로 했을때 비슷한 성향이지만 훨씬 더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던 다른 인물, 이미 정교한 플롯이 짜여져 있던 다른 이야기를 되살리는 대신 그 음울하고 고통스런 인물을 데려온 것은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주인공은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치기로 한다. 재능을 배신하고 열망을 버린다. 다른 세계로 옮아간다. 그건 기만이며 일종의 회피, 비겁한 행위이다. 딱히 살아남기 위한 열정에서 나온 회피도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말로 나쁜 건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를 이해한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지금껏 내가 만들어냈던 그 어떤 인물보다도 더. 물론 나는 그와 같은 재능이나 매력을 갖춘 예술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


 
어쨌든 파이프가 되는 건 우울한 일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건 더욱 그렇다.



2012.10.19




..








* 사진들은 모두 작년 여름과 겨울에 내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찍은 것. 마지막 사진은 푸쉬킨 동상.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
Posted by liontamer
2017. 3. 17. 22:11

겨울,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2016 petersburg2017. 3. 17. 22:11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복직 며칠 전.

 

춥고 흐린 날이었다. 습한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전형적인 잿빛 페테르부르크 날씨였다.

 

..

 

사진의 저 기념품 가게에서 파란 망토의 목각천사 미하일을 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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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13. 21:36

12월, 얼어붙은 모이카 운하 2016 petersburg2017. 3. 13. 21:36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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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8. 21:13

밤중에 호텔 복도를 지나다 2016 petersburg2017. 3. 8. 21:13




아스토리아 호텔의 색깔과 빛, 붉은색과 푸른색 줄무늬,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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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3. 8. 21:05

나는 그의 말투로 시작했다 about writing2017. 3. 8. 21:05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풍경. 예전의 레닌그라드.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 귓가에 조용히 닿았다가 아무런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목소리. 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흠잡을 데 없이 예의바르고 차분한 태도, 그러나 어쩐지 부아가 치밀게 만드는 어조. 어쩌면 음성학 수업에서나 들을 법한 정확하고 모범적인 발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0여 년 동안 나는 그가 부정확한 어휘를 쓰거나 문법적 실수를 범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무용수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아마 레닌그라드 토박이라서 그럴 것이다. 방송국에서 일했던 그의 아버지나 교정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을 테지만 대놓고 물어본 적은 없다. 사실 미샤가 나 외의 그 누구에게든 자기 부모 이야기를 꺼낸 적이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선동 죄목으로 죽은 가족이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 2012년 9월, Frost ..



..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단편의 이 문단으로 시작했다. 앞부분에는 생략된 대화가 몇 줄 있다.


어떤 글이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 동시에 첫 단어와 문장과 문단을 만들어내는 것만큼 심장을 조이고 또 흥분시키는 일도 거의 없다.


지금은 다른 글을 쓰고 있지만 어느 정도 궤도를 찾으면 나는 저 본편의 우주로 돌아갈 것이다.



:
Posted by liontamer
2017. 3. 5. 20:01

모스크바에 있는 것들, 오직 불길 about writing2017. 3. 5. 20:01






아래 글은 체포된 후 약물 고문으로 피폐해진 미샤가 수용소 클리닉에서 절친한 사이인 스타니슬라프 일린과 면회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예전에 이 소설 일부들을 여러번 발췌해 올렸었다. 소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미샤와 일린의 면회는 마지막 3부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모스크바 토박이이자 그 도시의 대표 극장인 볼쇼이 극장에서 무용수 노릇을 하다 안무가가 된 일린과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토박이이며 역시 그곳 대표 극장인 키로프(지금의 마린스키)의 간판 무용수였던 미샤의 대화이기도 하다.



벨스키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모두 미샤를 후원하던 공산당 고위 간부이다. 전자는 미샤를 수용소에서 빼내 가브릴로프로 보내는 인물이고 후자는 오랫동안 미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온 인물이다.



..




미샤와 일린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볼쇼이, 트레치야코프, 므하트, 아르바트는 모두 모스크바의 명소들이다. 볼쇼이는 다들 아는 그 볼쇼이 극장, 트레치야코프는 미술관 이름이고(여기에 브루벨의 백조공주가 있다) 므하트는 모스크바 예술극장(Московский Художественны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Театр)의 약자이다. 유명한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창립한 극장이다. 아르바트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젊음의 거리이다.







..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그는 병을 집어 남은 물을 한 모금 마셨지만 전부 삼키지는 못했다. 바닥에 반쯤 뱉어버렸다. 에어컨을 꺼 주자 한기가 덜한 듯 목과 어깨에 둘렀던 스카프를 풀었다. 아니면 더워서 그랬던 건지도 몰랐다. 열 때문에 추웠다 더웠다 하는 것 같았다. 눈의 광채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몇 초 사이에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기 때문에 나는 소파로 가서 그 애의 머리와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 여기 의사들도 알아? ”


 
 “ 뭘? ”


 
 “ 아무 약이나 주면 안 되는 거. ”
 


 “ 아는 것 같아. ”


 
 “ 다 말해. 그 올가란 여자에게. 아픈 데 있으면 전부. 약 먹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데 있으면 무조건 얘기하고. 고집 부리지 마. 벨스키에게 들었어, 회복돼야 내보내준다고 했어. ”
 


 “ 친절한 분이시군, 조건을 하나만 걸어놓으신 것처럼 얘기하시다니. ”
 


 “ 가브릴로프 얘기도 들었어. ”
 


 “ 아. 그건 조건이 아니고 벨스키가 결정해놓은 거야. 그 사람은 가을부터 극장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벌써 내년 행사 미션까지 줬어. 거기 가 봤어? ”
 


“  아니. 전에 이그나트가 가봤다고 했어. 좋았다고 했어, 한적하고 공기도 좋고. 온천도 있을지도 몰라. 회복하기엔 좋을 거야. 좀 쉰다고 생각해.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야. ”
 


 “ 어디로? ”


 
 “ 글쎄. 모스크바는 아직도 싫어? ”


 
 “ 거긴 충분히 있었어. ”


 
 “ 겨우 일 년 있었으면서. 모스크바도 좋은데. ”


 
 “ 그건 네가 거기서 태어났으니까 그렇지. ”


 
 “ 그럼 넌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서 거길 좋아하는 거야? 정말 간단한 이유네. ”


 
 “ 그럴지도. ”


 


 미샤의 창백한 얼굴에 잠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고집쟁이, 언제나 한결같고 견고한 마음을 가진 그 애가 사랑하는 도시, 돌아가고 싶은 유일한 도시가 거기 있다는 것을. 그 애를 파리에 남지 못하게 했던 유일한 이유. 물과 돌의 도시,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안개를 딛고 세워진 도시, 네바 강과 발트 해, 그림자와 습기 사이에서 부유하는 도시, 환영으로 축조된 도시.


 
 그 애가 레닌그라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벨스키가 어떤 식으로 반대파들을 요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높은 분들에게는 그들만의 방식이 있을 테니까. 그는 미샤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수용소에서 풀려날 거라고, 하지만 재판 결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므로 레닌그라드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에 한동안 연금될 거라고 말했다. 그건 추방 조치나 다름없었다. 그가 미샤를 구해준 것은 맞다, 아마 다른 의원들 몇몇이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그 애의 오래된 후원자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의 권력자들. 
 


 그러나 아무리 벨스키와 스비제르스키, 그 외의 많은 의원들이 미샤를 강력하게 후원했다 해도 해외에서 그토록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 애를 구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자들에게 있어 일개 예술가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하잘것없는 대상일 뿐.
 


 미샤가 옳았다.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 사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미샤는 언제나 옳았다. 그 애가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를 몸서리치게 싫어하고 증오했던 것처럼.
 




 벨스키의 전화를 받고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 마음 속을 꽉 채웠던 것은 미샤의 상태에 대한 걱정도, 그 애의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게르만 스비제르스키에 대한 분노였다. 스비제르스키는 그 애가 체포되어 그 불공정하고 더러운 재판을 받도록, 가혹하게 과장된 죄목들을 뒤집어쓰도록, 그 끔찍한 정신병자 수용소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자가 정말 원하기만 했다면 애초부터 그런 재판을 받지 않도록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자는 아직도 KGB와 사법부 쪽으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높으신 분, 정치국 위원, 무소불위의 권력자 의원께서는 고개를 돌렸고 그럼으로써 그놈들이 마음 놓고 더러운 짓을 할 수 있도록 묵인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자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 애에게 그 정도로 심한 판결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벨스키도, 다른 의원들과 간부들도, 아니, 그 애의 모든 동료들, 심지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비겁하게 행동했다. 모두가 등을 돌렸고 손을 씻었다. 우리는 뒤늦게 일어났을 뿐이었다. 벨스키가 그 애를 위해 노력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파리 시위가 없었다면, 그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해외에서 그토록 지속적이고 격렬한 소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역시 계속해서 침묵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비겁자들이었다. 그러나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는 사악하고 더러운 인간, 모든 비겁자들보다 더 지저분하고 더 비열한 인간이었다.




 
 한때 나는 그자가 그토록 오랫동안 미샤를 놔주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 애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랜 적이 있었다. 그 잔혹하고 더러운 학살자 역시 인간이며 내부에는 부드러운 심장이 뛰고 있어서 비밀스러운 애정을 품을 수도 있을 거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심기가 불편하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샤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스비제르스키와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것은 눈치 채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 자존심 강한 애는 충분히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그 애가 스비제르스키의 호출에서 돌아온 직후 모스크바 강을 따라 뛰고 또 뛰는 것을 보았고 창가에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말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가끔은 거울을 주먹으로 치고 또 쳐서 유리 파편이 박히고 피를 흘리는 것을, 또 언젠가는 욕조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럴 때면 그 애는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춤조차 추고 싶어 하지 않았다.
 




 두 번, 나는 그 애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내 몰래 병원으로 데려갔다. 지난 5년 동안 두 번. 한 번은 페이퍼 나이프를 썼고 다른 한 번은 스카프를 썼다. 그 애가 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여러 번. 그게 스비제르스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더러운 이름이 그 애를 떠밀고 계속해서 길을 잃게 만드는 어둠 속에 존재하는 괴물 중 하나라는 건 알았다. 그자들이 계속해서 그런 짓을 했다. 재판과 판결, 수용소와 고문이 있기 전부터 당과 국가와 체제, 영광과 명예와 의무,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그 애의 심신을 산란하게 하고 고통을 가하고 자꾸만 넘어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건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그저 눈을 돌리고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미샤는 그만큼 무심하고 평온한 심장을 가진 애가 아니었다. 그 침착하고 서늘한 태도, 흐트러지지 않는 또렷한 눈빛 너머로는 오직 불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불을, 그 뜨겁고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을 단숨에 꺼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공포에 떨었다.



 
 아마 게르만 스비제르스키도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 애를 넘어지게 하고 마침내 불을 꺼버리는 그 끔찍한 행렬 맨 앞에 있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것으로 삼고 착취하고 더러운 짓을 하면서. 그런데도 그자는 모른 척했다. 그 애를 자기 수하의 사냥개들에게 그대로 던져주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 음습했던 욕망이 마침내 꺼져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건 비열한 짓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혹은 그런 낭만적인 가장조차 없이 누군가를 지배하고 끊임없는 고통을 가하고 마침내 파괴하고 쓰레기처럼 내버리는 행위보다 더 사악하고 더러운 짓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그자를 그토록 증오하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미샤를 고발하고 억지 혐의를 씌워 수용소로 보낸 자들보다도, 그 애를 고문하고 거의 죽일 뻔 하고 이런 상태로 만들어놓은 자들보다도 더 증오했다.
 



 
 미샤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지? 모스크바 싫다고 해서 그래? ”

 
“ 모스크바도 좀 좋아해줘. 안 그러면 섭섭할 거야. ”

 
“ 좋아할 이유를 좀 대봐. ”


 
“ 볼쇼이. ”


 
“ 그리고? ”


 
“ 트레치야코프. ”


 
“ 이제 므하트라고 할 거지? ”

 
“ 안 통하는군. 그럼 아르바트. ”


 
“ 그 동네 요즘 재미없어졌어. ”

 
“ 나. ”

 
“ 넌 안 떠날 거야? 끝까지 모스크바에 남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

 
“ 그래. ”

 
“ 그럼 모스크바도 나쁘지 않아. ”



미샤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그리고는 내게 기댔던 몸을 떼었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맨 위의 사진은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그리고 이 사진은 네바 강과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배경으로 찍은 페테르부르크 사진. 당시의 레닌그라드.



..



'장식품, 애완견, 샴페인, 캐비아'라는 표현은 앞부분에서 일린이 미샤와의 대화를 회상할때 나온 것이다. 전에 이 부분에 대해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468



..



사실 이 에피소드의 뒷부분 일부는 예전에 이미 올린 적이 있다. '견딜 수 있을만한 압력, 넘어갈 수 있을만한 더러움'에 대한 문단이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나는 두어가지 주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쓰는 순간만 하더라도 저 부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그랬다. 하지만 다 쓰고 난 후, 그리고 그 이후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내내 나는 저 부분을 떠올렸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전에 저 부분에 대해 했던 얘기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341, http://tveye.tistory.com/2508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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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얼어붙은 네바 강과 찬연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지난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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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14. 21:49

얼음과 빛 2016 petersburg2017. 2. 14. 21:49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운하. 지난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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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7. 22:05

12월 페테르부르크 거리 2016 petersburg2017. 2. 7. 22:05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고, 해는 늦게 떠서 금방 져버리는 계절. 12월. 한겨울, 페테르부르크. 거리는 눈으로 뒤덮이고 사람들은 모자와 두터운 외투와 목도리로 꽁꽁 싸맨채 천천히 걸어간다.


정말 춥고 거친 계절이지만 무척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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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상트 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


이곳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잠들어 있다. 내 인생을 바꾼 사람 중 하나. 나에게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했던 사람. 여전히 나에게는 최고의 작가. '쓰는 자'로서의 첫사랑.


매우 추운 겨울날 오후. 나는 그의 묘를 찾았고 감사와 기도와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그를 찾아온 러시아 여인들의 조용한 송가와 정교식 기도문을 들었고 얼어붙은 눈 위에서 광채를 내뿜는 꽃들과 부드럽게 빛나는 촛불을 보았다.


고마워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이 세상에 와줘서, 그토록 치열하고 강렬하고 아름다운 글들을 써줘서.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제 마음속 1번 작가이고 마지막 작가일 거예요.

사랑해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나의 도씨.








매우 추운 날이었다. 내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파우치 안에 들어있는 립스틱 한개, 그리고 수첩과 볼펜이 전부였다. 초를 살 동전도 없었고 꽃을 사올 정신도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이 수도원에 올때면 심신이 산란한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로지 아주 짧은 편지와 입맞춤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누군가는 촛불을, 누군가는 꽃다발을, 그리고 누군가는 송가와 기도문을 남긴다. 나는 입맞춤을. 그리고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



이날 나의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5633


도스토예프스키와 나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606 (내가 러시아어를 전공하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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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2. 23:44

여유를 찾고 싶다 2016 petersburg2017. 2. 2. 23:44




한달 넘도록 내내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며 일에 파묻혀 있다 보니 두뇌 대부분이 일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져서 사적인 일들이나 쓰는 글, 그외 자신을 위해 꼭 필요한 사고/감상 등에 대한 뇌세포는 거의 활동을 멈춘 상태인 것 같다. 매일 멍하게 돌아와 멍하게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이면 일하러 간다.



책도 읽고 글도 다시 조금씩 쓰고 싶은데 토요일에 잠시라도 여유를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겐 쇼핑이나 수다, 스포츠 같은 것들보다 실은 저런 일들이 더 필요하다. 제대로 쓰고 읽지 못하고 쉬지 못하니 좀 힘들다.


좀 있으면 나아지겠지.


사진은 12월 페테르부르크, 아스토리아 호텔 로툰다 카페. 내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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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30. 20:11

얼어붙은 운하의 비둘기들 2016 petersburg2017. 1. 30. 20:11

 

 

어제의 프라하 새 사진에 이어 오늘도.

 

지난 12월. 페테르부르크.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근처 운하. 많이 추워서 운하 수면은 꽁꽁...

이 근처에는 바다가 있어서 갈매기도 많이 날아온다. 근데 이 사진엔 비둘기들만 있네.

 

 

 

 

 

 

비둘기들아 춥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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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2. 23:38

아아 저기가 그리워 2016 petersburg2017. 1. 22. 23:38





흐흑, 다시 저기로 돌아가서 발라당 드러누워 계속계속 잠만 자고 싶다 ㅠㅠ

일도 없고 자료뭉치도 없고 출근도 엑셀도 없는 푹신한 베개와 시트와 매트리스의 세계로 가고파...

(게다가 아침마다 밥 주고, 청소해주고... : 매우 중요 ㅋㅋ)


그건 그렇고 너무 바빠서 아직 저 스타일 시트와 커버, 쿠션 등을 찾아내지 못했음... (http://tveye.tistory.com/5790 얘기다) 그때 이웃님께서 알려주신 사이트에 잠깐 가보니 괜찮은 것들이 있었는데 이것보단 약간 더 밝고 쨍한 느낌인 거 같기도 하고... 하여튼 설 연휴에 (집에서 일하면서ㅠㅠ) 그 사이트 다시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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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9. 23:48

붉은빛 주황빛 아니면 홍시빛 2016 petersburg2017. 1. 19. 23:48



빨간 불 켜진 신호등. 페테르부르크. 12월 어느날 오후.


근데 난 어릴때부터 생각했지. 빨간 불 파란 불 신호등이라고 하는데 이따금 빨간 불은 주황색으로 보이고 파란 불은 녹색으로 보이고 노란 불은 오렌지색으로 보여.


이 사진에선 홍시 색깔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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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4. 22:45

위험 구역 2016 petersburg2017. 1. 14. 22:45

 

 

페테르부르크. 12월. 아마도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였던 듯.

 

'위험 구역'이라고 씌어 있다.

흠, 광고 전단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드름 위험 구역일 수도 있다. 겨울의 페테르부르크는 원체 춥기도 하고 눈비도 많이 와서 거대한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리니.... 눈이 많이 온 날이면 건물들 앞 여기저기에 빨간 줄을 쳐놓고 옥상에 인부들이 올라가서 고드름을 제거하고 눈을 치우곤 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저거 보고 좀 떨어져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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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2. 22:08

코트 보관표 + 하나 더 2016 petersburg2017. 1. 12. 22:08



에르미타주 박물관.


러시아는 박물관이든 극장이든 들어갈때면 두터운 코트를 맡겨야 한다. 코트 보관소는 러시아어로 가르제로브 라고 한다. 박물관은 그나마 나은데 극장 같은 경우는 공연 끝나면 다들 코트 찾느라 가르제로브 앞에 줄을 서서 인산인해를 이룸... 이것은 마린스키도 미하일로프스키도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도 예외가 아님.


이건 12월에 에르미타주 갔을 때. 하나는 코트 보관표. 하나는 가방 보관표 :)


사진을 찍어놓는 이유는 기념 때문이 아니고... 혹시라도 잃어버릴까봐 소심해서 항상 이렇게 표 받으면 사진 찍어놓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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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11. 22:10

이 겨울 도시의 색채가 좋다 2016 petersburg2017. 1. 11. 22:10




페테르부르크. 12월.

모이카 운하 따라 걷다가.


얼어붙은 운하의 회백색, 엷은 노란색과 창백한 에메랄드 녹색 건물들, 검정 다홍 잿빛 빨강 자동차들. 이 모든 색채들이 아름다운 겨울의 도시. 나는 이 도시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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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9. 08:08

얼음과 눈의 도시, 황금빛 사원 2016 petersburg2017. 1. 9. 08:08

 

 

 

모스크바 쪽은 지금 영하 30도 아래로 떨어져서 120년만의 성탄절(정교) 추위라고 한다. 유럽 쪽은 한파가 장난 아닌 듯. 예전에 페테르부르크 있을때 영하 30도 아래 경험해봤는데 정말 괴로웠는데...

 

페테르부르크도 지금 모스크바 정도까진 아니지만 꽤 춥다고 한다.

 

사진은 페테르부르크, 이삭 성당.

 

..

 

새벽에 잠이 안와서 결국 좀 일찍 출근했다. 한시간 넘게 일찍 나왔는데 이제 와서 졸려온다. 이럴 거면 그냥 새벽 기차 타고 내려올걸... 어제 일찍 내려왔는데 집은 인터넷도 안되고... 푸르르...

 

오늘 할 일이 많다. 근데 몸이 벌써 무겁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진하게 우려서 카페인 충전 중... 카페인 없이 버티기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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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7. 00:10

2016 petersburg2017. 1. 7. 00:10

 

 

 

 

2016년 12월. 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 걷다가. 하늘 높이 날아가는 녀석들 보고서.

 

많이많이 높이높이 멀리멀리 날아가렴.

 

오늘 밤에도 날아가는 꿈을 꾸면 좋겠다, 대신 쫓기며 나는 게 아니라 그냥 편안하고 자유롭게 날고 올라가고 활강하는 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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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5. 22:53

24시간 식료품점 2016 petersburg2017. 1. 5. 22:53


페테르부르크.


편의점이라는 이름 대신. 그냥 '쁘라둑띄, 24시간'

쁘라둑띄는 노어로 식료품이란 뜻이다. 지금은 그래도 자본주의 세상이 되어 별의별 간판이 다 생겼지만 옛날 소련과 러시아 시절엔 가게 간판엔 그냥 '먀소'(고기), '쁘라둑띄'(식료품), '흘롑'(빵), '프룩띄'(과일), '끄니기'(책) 뭐 이렇게만 씌어 있었다.


물론 이 쁘라둑띄 24시간 은 우리의 편의점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 편의점은 참 편하고 고객지향적이지만... 보통 러시아에서 이런 '쁘라둑띄' 간판의 가게에 가면 카운터에 점원이 서 있고 물건은 그 뒤에 있어서 이거이거, 저거저거 주세요 라고 말해야 하는 옛날 시스템인 경우가 매우 많음. 그래서 주문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가급적 아주 급할때가 아니면 이런 쁘라둑띄 시스템의 가게는 잘 안 가고 카트로 밀고 가서 내가 주워담을 수 있는 조금이라도 큰 수퍼에 가곤 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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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몇년 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겐 오랫동안 쓰지 않고 묻어두었던 여러 소재와 인물들이 있었다. 다시 글을 쓰려고 기억을 되살려내고 노트에 메모를 시작했던 순간만 해도 내가 페테르부르크와 미샤에게 되돌아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거의 당연한 듯, 혹은 마법처럼 그들이 나를 불렀다. 나는 이전에 구상했던 여러가지 플롯들과 소재들을 쭉 적어나가다 자신도 모르게 미샤의 간단한 연혁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왔다. 혹은, 페테르부르크가 되살아났다.


두세달 쯤 후 나는 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다. 약 2년 반만에. 그리고 겨울이 아닌 페테르부르크에 다시 간 것은 5년만이었다. 그때 내가 그곳으로 간 것은 글을 다시 쓰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도시를 무척 많이 돌아다녔다. 내게 친숙했던 장소와 7~80년대 레닌그라드의 미샤가 돌아다녔을법한 장소들을 이곳저곳 쏘다녔다. 그것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후 나는 매년 그 도시로 갔다. 운이 좋을땐 일년에 두번, 아니면 최소 한번은 갔다. 다른 아름다운 도시들 대신.


아래 발췌한 글은 트로이와 미샤가 등장하는 그 장편의 후반부 에피소드이다.


이전에 이 이야기의 바로 앞 에피소드도 발췌한 적이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1976년 가을. 몇가지 이유로 두달간의 휴가를 받고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어깨 치료를 받고 온 미샤가 트로이가 강의하는 학교(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지금의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로 불쑥 찾아온다. 여기서 미샤는 학교 식당 밥을 먹으며 간만에 좀 재잘거리기도 하고, 트로이는 미샤의 멋진 옷차림을 보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에피소드를 먼저 읽으려면 여기 : http://tveye.tistory.com/3183 (흙탕물 색깔 재킷과 기름기 많은 수프)


위의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것이 이 글이다. 둘은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교정을 나와 네바 강변을 걷고 다리를 건너간다. 이 강변의 이름은 '대학교 강변'이란 뜻으로 '우니베르시쩻스까야 나베레즈나야'라고 불린다. 이 에피소드는 둘이 강변을 걷다가 미샤가 다리 난간에서 춤을 추고 트로이가 혼비백산하는 상황에 뭔가를 조금 더한 이야기다.


맨 위 사진은 트로이츠키 사원. 그 아래 사진은 내가 찍었던 우니베르시쩻 강변의 석조 난간과 네바 강 사진.


* 고로호바야 거리는 트로이의 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



작년에는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 올해는 좀 달랐으면 좋겠다. 나는 미샤처럼 다리 난간 위에서 춤을 추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나만의 방식으로 춤을 춰왔고 때로는 멈췄다. 올해는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숨을 쉬고 나아가는 방법이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학교를 나와 강변으로 걸어가면서 트로이가 말했다.


 “ 얼굴은 훨씬 나아졌네. 모스크바에서 사람들 많이 만났어? ”



 “ 만났지, 의사랑 물리치료사. 아무 데도 못 갔어. 열흘 동안 요양소에 갇혀서 치료만 받았어. 주는 대로 먹고. 완전히 사육당했어. 머리까지 잘라주던데. 원장이 지나랑 다닐로프와 한통속이더라고. 외출 금지에 창문에는 쇠창살까지 쳐져 있었어.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 ”



 “ 그래도 어깨는 좋아졌겠네. ”



 “ 아, 이제 다 나았어. ”



 미샤가 어깨를 유연하게 돌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강물 위를 스치듯 날아가는 갈매기를 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흑빵 조각을 쪼개서 휙 던졌다. 새가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빵조각을 채갔다.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 갈매기는 물고기를 먹어. ”



 “ 잘만 먹는데, 빵. ”



 “ 그래도 원래는 물고기를 먹어. ”



 “ 여긴 소련인데 뭘 기대해, 흑빵이라도 감지덕지해야지. 줄 안 서는 것만으로도. ”



 “ 넌 줄 안 서잖아. ”



 “ 그런가. 갈매기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는 것 같긴 하네. ”



 미샤가 석조 난간 위로 훌쩍 올라갔다. 난간 폭은 꽤 넓었고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았지만 트로이는 너무 놀라서 펄쩍 뛰었다.


 “ 뭐해, 빨리 내려와! ”



 “ 왜? 설마 떨어질까봐? 이렇게 넓은데? ”



 미샤는 돌로 된 난간 위에서 몇 발짝 뛰어올랐다. 꼭 맞는 옷을 입고도 무대 위에서처럼 춤을 췄다. 빵조각을 채간 갈매기의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해 추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지만 트로이는 그 재능에 놀라거나 감명을 받을 겨를도 없었다. 그는 난간에 몸을 바짝 기댄 채 두 팔로 미샤의 허리와 골반을 감아 바닥으로 홱 끌어당겨 내렸다. 아마 안드레이 트로이츠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잊은 드문 경우였을 것이다. 트로이는 균형을 잡는 데는 별 재능이 없었으므로 하마터면 미샤와 함께 돌바닥에 넘어질 뻔 했다. 미샤가 재빨리 몸을 뒤로 젖히며 한 손으로 난간을 짚고 한쪽 다리로 트로이의 무릎을 떠받쳐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싸늘하고 약한 바람이 불어와 미샤의 머리칼이 검은 깃털처럼 공중으로 가볍게 나부꼈다. 



 
 “ 봐, 위보다 아래가 더 위험해. 넘어질 뻔 했잖아. ”


 “ 너 그 위에서 헛디뎠으면 강으로 떨어졌을 거야. ”


 “ 강이야 헤엄치면 되지만 이건 돌바닥이잖아. ”


 “ 괜찮아, 넌 내 위로 떨어졌을 테니까. ”


 “ 미쳤어? 제대로 넘어질 줄도 모르면서. 뻣뻣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거짓말이 아냐, 안드레이. 위보다 아래가, 강보다 바닥이 더 위험해. 넌 머리가 깨졌을 거야, 뼈가 부러졌거나. ”



 미샤는 화를 내고 있었다. 까만 눈을 뜨겁게 태우면서 입술을 떨었다. 자기는 그렇게 위험한 짓을 밥 먹듯 하는 주제에 기껏 그가 뒤로 자빠질 뻔한 것을 가지고 화를 내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트로이는 그 말을 그대로 해주었다.


 미샤는 다리를 건너는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근처로 접어들었을 때 어떤 남녀가 그를 알아보고는 사인을 해달라고 매달렸다. 미샤는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고 그들을 물리치고 빠른 보폭으로 길을 건넜다. 평소에는 팬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었으므로 트로이는 그가 정말 화가 났거나 키로프 무용수 노릇에 넌더리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앞까지 왔을 때 트로이는 그를 따라잡았다. 고로호바야로 가려면 이곳에서 함께 안쪽으로 접어들어야 했다.



 “ 너 어디로 갈 거야? ”


 “ 러시아 미술관. ”


 “ 벌써 다섯 시가 넘었는데 무슨 러시아 미술관. 문 닫았잖아. ”


 “ 돔 크니기. 피의 사원. 판탄카. 블라지미르 사원. 쿠즈네츠느이 시장. 스타로 칼린킨 다리... ”


 “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기지 마. ”


 “ 신경 꺼. 전부 갈 거니까. ”




 
 트로이는 그의 팔을 낚아채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로 접어들었다. 미샤가 조금 끌려가다가 완력으로 버티며 그 자리에 멈췄다.



 “ 너 정말 왜 그래? 우리 집에 가려고 학교로 온 거 아니었어? ”


 “ 넌 머리가 깨졌을 거야, 뼈가 부러졌거나. ”



 미샤는 네바 강변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눈 아래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한순간 그렇게 창백해질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검은 머리가 흩어져 있는 얼굴이 루빈슈테인 병원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을 때처럼 조그맣고 하얗게 보였다.



 ‘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그대로야. 좋아진 척 하고 있었을 뿐이야. 아스케로프 말이 맞아. 정신이 나갔어. ’



 트로이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미샤의 팔을 움켜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하지만 놔주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미샤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 머리 좀 깨져도 안 죽어. 정말 그것 때문에 성질내고 있는 거야? 앞으로는 조심할게. 됐지? ”


 “ 나 때문에 넘어지지 마. ”



 그 말이 지나치게 낮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안드레이 트로이츠키는 칼에 찔린 듯 깊은 통증을 느끼며 미샤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완전한 어둠이 내려와 그의 곁에 그림자가 돌아와 있었다면 미샤의 그 부드러운 음성은 침실에서 속삭이는 밀어처럼 들렸을 것이다.



 트로이는 헛기침을 했다. 미샤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 들면서 갑작스럽게 거칠어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 연습할 때마다 넘어지는 주제에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집에 가자. ”


 “ 나는 넘어져도 일어나. 넌 안 돼. 넘어지지 마. ”


 “ 내가 뻣뻣한 건 알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좀 기분 나쁜데. ”


 “ 넌 교회 첨탑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거대하고 우아한 것들은 한 번 넘어지면 일어나기 힘들어. 큰 나무와 비슷한 거야. 그러니까 넘어질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 꼼짝도 하지 마. ”




 
 지금껏 미샤가 그렇게 사적인 말을 거리에서, 그렇게 간절한 눈빛으로 속삭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그런 표현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트로이는 현기증과 함께 지독하게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억지로 웃었다.



 “ 태어나서 우아하다는 표현은 처음 듣는데. ”


 “ 왜? 모든 사원은 우아하고 쓸쓸해. 교회 첨탑도 마찬가지야. ”



 미샤가 움직였다. 그의 곁을 지나쳐 빠르게 걸었다. 트로이는 거대한 회색 거미처럼 긴 다리를 뻗어 그의 뒤를 쫓아갔다. 미샤는 곧장 고로호바야 거리 쪽으로 꺾었고 아파트 건물 앞에 도달했을 때에야 멈춰 섰다. 트로이가 정문을 열자 미샤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여전히 가볍고 나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집까지 올라가는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아마 20년 쯤 더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하지만 트로이는 20년 더 나이를 먹은 미샤 야스민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10년조차도.


 


..



전에 이 글 쓰고 나서 미샤가 춤췄던 우니베르시쩻 강변 석조 난간과 이 이야기에 대해 짧은 메모를 쓴 적이 있다.

그 얘긴 여기 : http://tveye.tistory.com/1840 (우니베르시쩻 강변의 석조 난간)



그때 올렸던 사진이긴 한데 하여튼 미샤가 춤췄던 난간 사진 한장 더.

(이 에피소드 쓰고 나서 여기 난간 사진들 많이 찍어놨는데 그 사진들은 전부 화정 집 데스크탑에 있네...)




이것이 트로이츠키 사원. 성삼위일체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즈마일로프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 결혼한 사원이다. 전에 한두번 쓴 적 있지만 트로이의 이름과 성은 여기서 따왔다. 트로이의 본명은 안드레이 트로이츠키인데 그 트로이츠키는 무엇보다도 이 사원의 이름, 두번째는 네바 강에 있는 트로이츠키 다리에서 가져온 것이다.


트로이츠키 다리와 트로이 이름에 대해 전에 쓴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1746 : 트로이의 이름 유래 중 하나 : 트로이츠키 다리


트로이츠키 사원은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무척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푸른 돔에 그려진 금빛 별이 총총 빛나고 있다. 눈에 덮여 있을때도, 석양에 반사되었을때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트로이츠키 사원 사진 몇 장 더. 사진들은 내가 찍은 게 아니고 페테르부르크 사진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하지만 미샤의 말대로, 모든 사원은 우아하고 쓸쓸하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트로이는 언제나 교회 첨탑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이다. 혹은 그러기를 바랄 것이다.


이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사원.




여기는 외곽의 다른 사원. 이름이 생각이 안 나네... 러시아는 곳곳에 작고 아름다운 정교 사원들이 많다.




화려한 네프스키 대로 너머로 카잔 성당의 돔이 보인다.




어쨌든 미샤는 춤추는 아이니까 무용수 사진 두 장으로 마무리.

아르춈 옵차렌코.



그리고 연습실의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



..




글에 대한 이야기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그리고 제 글은 여기서만 읽어주세요. 절대로 복사하거나 가져가시거나 인용/도용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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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2017. 1. 4. 22:16

얼어붙은 도시의 석양 2016 petersburg2017. 1. 4. 22:16


한겨울, 오후.

석양 보러 해군성 공원을 가로질러 네바 강변으로 나갔다. 

이 도시의 겨울 석양과 어스름을 렌즈에 담는 데는 아무런 필터도 필요없다. 사실 어떤 렌즈와 어떤 필터도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동기사상을 지나서..


안녕, 표트르. 안녕 황제. 환상의 도시를 세운 사람, 지나간 시대의 제왕.





서서히 몰려드는 석양과 줄지어 늘어선 기다란 가로등 램프들은 이 도시를 더욱 환상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네바 강은 얼음과 흰 눈으로 두텁게 뒤덮여 있고..


얼음과 눈과 추위, 물과 돌의 도시. 북국의 싸늘한 아름다움. 이것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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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


12월. 그리 늦지 않은 오후.

이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오랜만에 가서 전시를 본 후 궁전광장에 나왔다. 아침부터 쏟아지던 눈이 광장 전체를 얄팍하게 뒤덮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창문들 너머로는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두터운 외투 차림의 페테르부르크 토박이들과 몇몇 관광객들이 광장을 가로질러 천천히 걷고 있었다. 

겨울의 궁전광장은 당연하게도 관광객들보다는 토박이들이 훨씬 많다. 그러나 그 숫자조차도 여름에 비하면 무척 적다. 빛과 활기로 넘치던 광장은 어스름과 눈과 바람, 추위에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두터운 외투 차림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검은 그림자들에게도. 

너무 춥지만 않다면,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는다면 겨울의 궁전광장을 천천히 걷는 것 역시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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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