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모이카 운하)
늦잠 자고 싶었지만 9시 알람을 맞췄다. 그 이유는 우체국 소포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_- 오전까지 머문 숙소가 중앙우체국 근처라 소포를 부치려면 오늘 오전밖에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어제 가방을 싸보니 무게보다도 부피 때문에 그 망할 소포를 부쳐야 했다. 여름이고 홍차랑 책 몇권 외엔 별로 산 것도 없는데 왜 가방이 터져나가는 것일까 허헝,,,
10시 반쯤 중앙우체국에 다시 갔다. 어제의 그 마귀할멈 대신 다른 창구로 가서 물어봤는데 거기도 제2의 마귀할멈이 앉아 있었다. 딸론칙을 가져오라며 화를 냈다. 대체 딸론칙이 무엇인가 한참 고민했는데(보통 종이쪽지, 버스표 등을 가리킨다) 알고보니 번호표였다. 러시아도 그동안 기술발전이 물론 있었고... 번호표를 뽑아오면 스크린에 몇번 창구로 가라고 뜨는 것이다. 중앙우체국이라 워낙 크고 창구가 많으니 그런 거였다. 흠, 몰랐던 내 잘못도 있구나. 그건 그렇다치고 엄청 신경질냄. 손님도 하나도 없었는데!
번호표 기계로 갔는데 뭔가 엄청 복잡했다. 소포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나는 저렴한 소포를 부치고 싶었으나 도대체 몇번을 눌러야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마침 내앞에서 번호표 뽑는 나이든 아저씨가 계셔서 물어보니 너무나 친절하게 '이건 비싼거고 저건 싼건데 어떤걸로 할거니?' 라고 물어봐줘서 '싼거요~' 했더니 그럼 이 메뉴를 누르라고 알려주심. 아저씨 복받으실 거에요 흐흑... 그래, 시민들은 친절한데 관료들만 불친절한 것이야 허헝...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창구에 번호가 떠서 상자를 가져갔더니 새로운 마귀할멈 3이 막 화를 냈다, 왜 상자를 봉해왔냐는 것이다. 원래 여기는 소포 포장을 할때 안의 내용물을 모두 검사한다. (예전엔 CD 같은 건 반출 못했는데 아마 지금도 그러려나..) 그래서 '어제 다 검사해서 저쪽 창구 아주머니가 봉해준 거에요. 근데 쉬는 시간이라 다 놀아서 난 시간이 없어 오늘 다시 온 거에요' 라고 설명하고 다행히 어제 상자 포장해준 아줌마가 한쪽에 있어서 그분이 '응, 그거 어제 내가 다 봤어' 라고 확인해 주었다(유일하게 약간 친절했던, 마귀할멈 아닌 사람이었음 ㅠㅠ)
그리하여 1700루블을 내고(3만원 정도) 선박 운송을 선택하여 망할 소포를 부쳐버리니 살 것 같았다. 기껏 4킬로 더 쑤셔넣고 오버차지 내지 그랬냐고 하신다면... 가방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ㅠㅠ 그리고 근력 따위 없는 나에게 4킬로 추가란 엄청난 짐!!!
(보기에는 아주 웅장하고 아름다운 중앙우체국. 그러나 오랜 옛날부터 나에게는 고생과 원망의 장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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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를 해결한 후 방에 돌아와 가방을 마저 싸고 체크아웃을 했다. 2시 반 택시 예약을 한 후 이제야 가벼운 맘으로 부셰에 가서 오믈렛 아점을 먹었다. 맛있어서 기분이 나아졌다
오늘도 엄청나게 날씨가 좋았고 하늘이 파랬고 햇살은 따가울 지경이었다. 진짜 눈부셨다. 돔 끄니기에나 갈까 하고 쭈욱 걸어올라갔다. 원래 목표는 돔 끄니기에서 책을 한권 사서 카잔 성당 분수 앞 벤치에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책 읽는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코스라서 옛날에 미샤를 초창기에 등장시켰던 illuminated wall 에서도 미샤는 처음에 카잔 성당 앞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근데 잠깐 와이파이 연결이 필요해서 유럽호텔 로비로 가서 폰을 좀 봤다.
그리고는 카톨릭 성당에 들러 다시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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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 끄니기에 가서 새 지도를 샀다. 구글이나 앱이 있어도 나는 아날로그라 옛날부터 보던 종이 지도가 편한데 한 2~3년 쓴 지도가 너무 헐어서 찢어지고 말았다. 새 지도를 산 후 글쓰기에 필요해서 7~80년대 레닌그라드 시절 도시 현황과 거리 이름 등이 기재된 책이 필요하다고 점원에게 물었으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책장을 뒤져 페테르부르크 거리 이름 유래에 대한 책을 샀다. 이건 제정시대부터 지금까지를 다 아우르는 거라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아닌데 ㅠㅠ 나중에 구글링으로 찾는 게 빠르겠다.
(이게 오늘 산 책과 지도 두 종)
별거 안 했는데도 카잔 성당 분수 앞 벤치에 앉아 책 읽을 시간이 없어졌다. 호텔까지 걸어내려가는 시간이 있으니(버스는 밀림) 그냥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돔 끄니기 앞 아이스크림 수레에서 에스키모 플롬비르 초콜릿 아이스크림 바를 사서 먹으면서 혼잡한 네프스키 대로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 대신 모이카 운하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갔다. 햇살이 눈부셔서 운하의 수면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붉은 다리와 푸른 다리를 건너 호텔로 돌아왔다. 택시를 타고 네번째 호텔(하루 묵었었으므로 실제로는 3개째의 호텔)로 와서 체크인을 했다. 근데 저번보다 방이 안 좋네... 하긴 급하게 방을 예약했고 제일 저렴한 방으로 했으니... 그때보다 좁고 침대도 트윈을 두개 붙여놓은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 방은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는데 이번 방은 안쪽 마당인 중정 방향이네. 그래도 뭐...
이 호텔은 그래도 프린트를 공짜로 할수 있어서 오늘 지젤 티켓과 새로 끊은 항공권 이티켓을 프린트했다. 그리고는 피곤해서 좀 늘어져 있다가 컵라면 대충 먹고 원피스로 갈아입은 후 마린스키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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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연이 이곳에서 머무는 3주 동안의 마지막 공연이다. 원래 매진이었는데 우연히 표가 몇개 나와서 급히 득템했던 것으로, 바로 슈클랴로프가 알브레히트를 추는 지젤이었다. 오오...
공연은... 사실 내가 지젤을 진짜 좋아하는데 이번 공연은 작품 자체보다는 슈클랴로프 보느라 넋을 놓아서 ㅠㅠ 지젤 보면서 안 울었던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아나스타시야 마트비옌코가 지젤로 나와서 좀 이입이 덜 되기도 했다만...
슈클랴로프의 알브레히트는 완벽했다... 이 남자의 타고난 기품과 동정심을 자아내는 눈빛과 애절한 춤. 10년 전 그의 알브레히트가 생각났다. 이반첸코 대신 나와서 '저거 누구야!' 하고 짜증냈던 걸 떠올리니 참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감개무량 ㅋ
사진은 따로 올려보겠다. 리뷰도 따로 써보겠다. 근데 이걸로 총 8개의 공연을 봤는데 제대로 리뷰 쓴 건 거의 없네 어헝...
(커튼 콜 사진과 또 짧은 메모는 여기 : http://tveye.tistory.com/4835)
내 자리가 간신히 득템한것까진 좋은데 1층 베누아르 완전 사이드의 게다가 2열이었다. 앞사람 머리에 너무 가리고 왼쪽 무대는 잘 안보여서 진짜 괴로웠다. 슈클랴로프가 출땐 반쯤 엉거주춤하게 서서 봤다(내 뒤에는 사람이 없어 다행...) 나중엔 꼭 기합받는 듯.. 허벅지 쥐나는 줄 알았다. 흐흑... 내 앞에 앉은 사람들 다 키 크고 머리 컸어 엉엉...
샵에서 파루흐 루지마토프의 희귀한 옛 사진 세장(아마 베자르 작품 췄을 때인듯)과 테미르카노프가 지휘한 호두까기 CD를 샀다. 그리고 내친김에 CD 파는 아저씨에게 레인골드 글리에르의 청동기사상 음악 있느냐 물었다. 이번 마린스키에서 올린 그 발레. 아저씨는 안타까워하며 다른 작품들만 있다고 했다. 그 음악 정확한 제목이 뭐냐 물으니 청동기사상 맞다고 한다. 하긴 발레음악으로 만든 곡이니... 네프스키의 다른 샵에 한번 가보라 한다. 그 음악 구하고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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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클랴로프의 우아하고 애절한 알브레히트 춤과 사랑스러운 커튼 콜 인사 때문에, 그리고 마린스키 구관의 지젤이라는 것 때문에, 또 마지막 공연이란 생각 때문에 좀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나왔는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이럴줄 알고 우산 가져왔다!!!!! 요 며칠 너무 날씨가 좋았어!
근데 진짜 엽님 운 좋으셨습니다~ 가시자마자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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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쓰고 호텔까지 15분 정도 걸어야했다. 오다가 수퍼에 들러 자두 세알과 체리 300그램, 새로 나와서 궁금해진 구운 고기맛 감자칩(ㅋㅋ), 물 1.5리터를 샀다. 방에 와서는 배고파서 체리와 감자칩을 조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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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제 4일 남았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우울함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래도 슈클랴로프의 알브레히트는 아름다웠다. 외모 얘기가 아니고(외모도 뭐 예쁘지만) 그의 춤과 표현력, 무대 자체가 아름다웠고 때로는 그런 아름다움이 마음을 뒤흔들고 감동시키고 또 위안과 평온을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도스토예프스키 말이 맞다. 때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