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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발레단 '지젤', 2015. 3. 28

 

* 지젤 : 김지영

* 알브레히트 : 김현웅

* 힐라리온 : 정영재

* 미르타 : 한나래

* 페전트 2인무 : 김리회, 김윤식

 

 

돌이켜보면 내가 국립발레단의 지젤 무대를 정말로 좋아했던 것은 김주원씨가 떠나기 전까지, 그리고 파트리스 바르의 안무가 들어오기 전까지였던 것 같다. 일단 김주원씨는 국내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발레리나였고 특히 지젤 역이라면 최고였다. (물론 김지영씨도 좋아했는데, 옛날에 이 둘이 투 톱일 때 내 마음속에서 '김주원=지젤', '김지영=키트리!'라고 마음 속에 각인되어서 ㅎㅎ)

 

주원씨가 출 때는 그래도 파트리스 바르 안무라도 그럭저럭 참았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바르의 안무는 더더욱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들더라도 자꾸 보면 익숙해져서 괜찮아지기 마련인데 안 그런 걸 보니 파트리스 바르 안무가 정말 내 취향이 아닌가보다..

 

바르는 내 취향보다 너무 분절적이고 중간중간 쓸데없이 과잉 표현을 한다. 그러니까 바르 안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사람의 안무는 내 감정선이랑 안 맞는 거다. 내가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이면 바르의 안무는 툭 끊어지고, 오히려 여기서는 스피디하게 가도 될만한 곳에서는 한없이 늘어지거나 만용을 부리는 느낌이랄까... 나는 드라마틱한 작품들을 좋아하고 성향에도 맞는 편이지만, 이야기나 장면을 늘리는 것은 별로 안 좋아한다. 소설이라면 모를까 발레 무대라면 탄탄한 짜임새와 일종의 여백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타입이다. 두 가지가 좀 모순되는 표현 같긴 한데. 그러니까, 끊어줘야 할 곳에서는 미련없이 탁 끊어줘야 한다는 거다.

 

이 버전에서 특히 내 취향에 맞지 않는 부분은 바로 1막에서 지젤 엄마가 심장이 약한 딸을 가리키며 그러다 죽는다~ 하고 경고하고 지젤이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는 장면인데... 볼때마다 괴롭다. 그냥 이 장면 들어내줘.. 하고 싶다. 지젤의 광란은 예고없이 닥쳐오기 때문에 더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건데 굳이 지젤이 엄마의 경고로 그런 예감과 공포에 휩싸이는 장면을 넣어서 과잉 표현의 예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 내 취향이 이런 걸 안 좋아해서 그런 걸 테고, 또 많은 관객들은 오히려 이러한 복선과 드라마틱한 연출이 마음에 들 수도 있으니..

 

그리고 편곡도 그렇고 조명을 쓰는 것도 내겐 너무 over the top 이란 느낌이 든다. (우리 말로 뭐라고 해야 딱 맞을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과잉이라는 건데... 좀 허세 넘친다 해야 하나) 일단 암전도 그렇고, 지젤 엄마 경고 때도 그렇지만 지젤의 광란 씬에서도 그렇고.. 무대 전체를 암흑으로 물들이며 지젤에게만 조명을 비춰주는 것은 뭐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광란 씬은 지젤이란 무용수 자체가 무대 전체를 지배하는 씬이다. 그녀의 광란과 그녀의 절망, 그녀의 움직임, 이 모든 것만으로도 감정이 넘쳐흐른다. 이러한 드라마와 격렬함이 폭발하는 무대 위에서 굳이 암전과 집중조명은 필요하지 않다는 느낌이랄까. 스탕달이 자기 소설 어딘가에 인용했듯 '어리고 예쁜 소녀가 무도회에 가면서 이미 충분히 발그스름한 볼에 연지를 칠했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난 드라마틱하고 감정 과잉으로 흘러넘치는 무대를 좋아하는 적도 많으니 이건 전적으로 나랑 파트리스 바르 안무가 '그냥' 어딘가 안 맞는 걸지도..

 

..

 

근데 오늘 공연 얘길 해야 하는데 바르 안무 얘길 한참 늘어놨네. 본론보다 더 길겠네.. 하여튼 이제 오늘 공연에 대한 짧은 메모..

 

바르 안무를 별로 안 좋아하니 사실 오늘도 큰 기대 없이 갔다. 김지영씨와 김현웅씨가 추니까 그래도 실망은 안 하겠지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 정영재씨의 힐라리온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 사실 이동훈씨의 알브레히트도 좋아하고, 이분 무대 본 지 꽤 돼서 고민했는데 작년인가 재작년에 이은원씨의 지젤을 봤을 때 너무 내 취향이 아니라서, 내 성향으로는 보다 안전한 김지영 & 김현웅 페어를 선택했다.

 

전반적으로 오늘의 지젤은 최근 몇년 간 봤던 국립발레단 지젤 중 제일 마음에 들었다.

 

국립발레단의 군무는 예전에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강수진씨가 감독으로 부임한 후 발레단의 전체적 무용의 질이 향상된 것 같다. 약간 삐걱대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내가 앞줄 사이드에 앉았으므로 군무의 전체적 균형을 감상하기에는 불편함이 있었다..

 

내가 지젤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미르타의 등장과 그녀의 독무인데, 사실 우리 나라 발레단 공연에서 맘에 드는 미르타를 본지가 오래됐다. 미르타를 잘 추는 게 상당히 어렵다. 춤 실력도 좋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와 기품, 서릿발 같은 매서움을 갖춰야 한다. 오래 전에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잠시 췄던 마리야 알라쉬의 미르타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미르타를 춘 무용수는 한나래씨였는데,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전체를 장악하는 카리스마, 상체의 움직임 등은 좀 아쉬웠지만 지난번보다는 좋았던 것 같다.

 

힐라리온! 전에도 몇 번 얘기했지만 난 언제나 힐라리온 동정파이며 알브레히트 죽일놈을 부르짖는 사람이고 다시 태어나 발레리나가 된다면 기필코 미르타가 되어 못된 알브레히트놈을 응징하고 말겠다는 소망이 있다 :) 힐라리온 너무 불쌍하지 않나... 가엾기도 하지. 게다가 오늘의 힐라리온은 내가 언제나 좋아했던 정영재씨. 이 사람 힐라리온 추게 하는 건 아깝지만.. 그러나 잘 추고 연기도 잘한다. 표정 연기도 풍부하고...

 

그러나 오늘 무대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무용수들 얼굴을 생생히 보면서 느낀 점은... 아아, 저 힐라리온 왜 저리 쓸데없이 잘생겼지? 어쩐지 손호준을 연상시키는 정영재씨의 힐라리온 ㅎㅎ 물론 귀족다운 기품과 풍채를 갖춘 김현웅씨의 알브레히트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저 힐라리온 잘생기고 열정적이구만... 지젤 바보 ㅠ 그냥 힐라리온 받아줬으면 행복했잖아 엉엉... (또다시 시작된 나의 힐라리온 변호욕구!)

 

페전트 2인무. 김리회씨와 김윤식씨가 췄는데, 이들은 각자 솔로를 출 땐 좋았고 둘이 출 때는 어딘가 삐끗거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실수를 하거나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내 느낌이 미세하게 좀 그랬다.

 

그리고 지젤과 알브레히트에 대해서.

 

김지영씨의 지젤은 언제나 기본 이상이기 때문에 내겐 항상 안전한 선택이다. 물론 김지영씨도 이제 나이가 있어서 옛날처럼 파워풀하거나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신 원숙하고 정확하다. 필요한 동작 하나하나를 깔끔하게 박아넣는다. 그리고 연륜에서 우러난 깊이가 있고 연기도 좋다. 지젤은 사실 아주 어려운 배역이다. 1막과 2막 지젤의 성격도 다르고, 표현해야 할 감정의 스펙트럼도 넓다. 발레리나의 햄릿과 다름없는 역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발레리나가 키트리나 호두까기 마샤를 잘 추는 것과 지젤을 잘 추는 것은 꽤 다른 문제다.

 

오늘 김지영씨는 1막 광란씬이 특히 좋았다. 청순하고 가냘프고 불쌍한 소녀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지젤은 정말 넋을 놓고 미친 여자처럼 보였다. 정신줄을 놓은 표정부터 몸놀림 하나하나가 다 그랬다. 이따금 섬뜩할 정도였다. 처량하기보다는 처절했다.

 

2막의 윌리도 언제나처럼 좋았지만 오늘은 1막 광란 씬이 제일 마음에 들엇다. (2막에선 지젤이 윌리로 등장해 춤출때 전보다 확실히 화려함이 줄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살짝 슬프기도 했다 ㅠㅠ)

 

그리고 김지영씨는 베테랑이기 때문에 항상 파트너와의 호흡이 좋다. 이동훈씨와도 좋았지만 오늘 김현웅씨와는 정말 감정선이 살아 있었다. 아무래도 동훈씨와 출때는 누나 동생 같은 느낌이 좀 있었는데 김현웅씨도 연하이긴 하지만 후자가 훨씬 귀족적이고 남자다운 스타일이라 그런지 둘의 페어에는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김현웅씨의 알브레히트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현웅씨의 알브레히트를 본 건 아마도 2011년이었다. 그땐 김주원씨와 췄던 것 같다. 난 예전부터 김현웅씨를 좋아했고 작년부터 다시 국립 무대에 올라와줘서 매우 반가웠는데, 작년에 돈키호테 바질을 췄을 때는 '아, 좋긴 한데 바질을 추기엔 살짝 묵직해보인다..'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 무대를 보면서 느꼈다. 이 사람에겐 타고난 알브레히트다움이 있구나!

 

그게 그런 게 있다. 잘못하면 선입견이 되기 때문에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으나, 남자 무용수들의 속성 중 '프르미에르 당쉐르'다움이라는 것. 그냥 수석무용수 말고. 그러니까 왕자다움이라는 건데. 김현웅씨는 우리 발레계에서 그런 속성을 가진 얼마 안되는 무용수다. 이건 내 느낌만이 아니고.. 예전부터 발레계에서 그에 대해 하던 말이다. 좋은 무용수는 많아도 '왕자' 무용수는 정말 찾기 힘들다... 물론 발레 전통이 두터운 러시아나 서구 쪽에 가면 사정이 다르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일단 남자 무용수 자체가 부족한데다 신체 조건부터 시작해 딱 왕자다운 특질을 갖춘 무용수 찾기가 아주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것이 발레 자체가 서양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고... 그래서 현웅씨가 불미스럽기도 하고 불운하기도 한 일로 우리 발레계를 떠났을 때 더 상실감이 컸던 거고.

 

물론 지금이야 우리 나라 발레 팬들도 더 늘어나고, 무용수들도 늘어나고 좋은 남자 무용수들도 늘어나서 전보다는 훨씬 낫지만. 어쨌든 김현웅씨에게는 진짜 '왕자다운', 혹은 '귀족다운' 아우라가 있는데 사실 알브레히트에겐 그게 필요하다. 그 아우라를 갖췄느냐 갖추지 않았느냐에 따라 알브레히트의 무게가 달라진다.

 

오늘 현웅씨가 추는 알브레히트는 근사하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이 사람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점프나 앙트르샤는 예전보다 좀 처지는 느낌이었지만 대신 동작 하나하나는 깔끔하고 유려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의 연속 앙트르샤 대신 무대를 가로지르며 춰줬으면 더 어울렸을 것 같긴 했다. 점프나 앙트르샤는 확실히 이동훈씨 쪽이 더 화려한 것 같다)

 

사실 알브레히트의 춤은 다른 고전발레에 비하면 복잡한 테크닉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만큼 연기력과 기품이 뒷받침되어야 더 멋지게 느껴진다. 나는 이른바 복잡한 고전발레 테크닉들로 이루어진 정연하고 곡예같은 춤들보다는 알브레히트나 로미오 류의 감정선을 끌어올리는 춤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오늘 김현웅씨는 춤도 좋았고 연기도 좋았다. 그리고 김현웅씨는 발레 무용수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자 무기인 무용수다운 육체적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몸의 선도, 동작도 근사하고 시원하다. 사실, 저 알브레히트라면 사랑에 빠질만하다.

그래서 오늘 지젤은, 파트리스 바르라는 장애물(ㅜㅜ 바르 안무 좋아하는 분들 죄송.. 하지만 난 도저히 이것을 극복할 수가 없..ㅠㅠ)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었다 :) 오늘 제일 마음에 든 건 김현웅씨~ 솔직히 말하면, 이제껏 본 현웅씨 무대들 중 오늘이 제일 멋있어 보였다!

 

 

 

똑딱이 들고 갔었는데 커튼콜 때 몇 장 찍었으나 밝은 조명과 윌리들 흰 옷 때문에 다 번져서 전부 망하고... 쉬는 시간에 찍은 기둥 사진이나 하나.. 이것도 번졌지만 ㅠㅠ

 

 

 

.. 그 엉망으로 번진 망한 사진 ㅠㅠ 그래도 아쉬우니 윌리들 사진 하나.. ㅠ

 

 

막판에 커튼 앞으로 나와서 옳다구나 하고 찍었으나 역시나 조명 때문에 다 번지고... 지영씨 뒷모습(번짐 ㅠㅠ)과 현웅씨 옆모습 그나마도 건진 것 ㅠㅠ 흑흑..

 

* 태그의 지젤을 클릭하거나 블로그 내에서 '지젤' 혹은 '알브레히트'로 검색하면 그간 올렸던 이 발레에 대한 여러 리뷰나 메모, 마린스키를 비롯한 발레단이나 무용수들 동영상, 그리고 내가 쓴 글 발췌 부분 등을 볼 수 있다~

 

** 사족

국립발레단 지젤 볼 때 느끼는 것...

바틸드 나올 때 그 개 두마리 안 데리고 나오면 안될까.. 난 개를 무지 좋아하긴 하는데.. 개 때문에 자꾸 신경이 쓰여서 무대에 집중이 안된다. 저 개들이 뛰어가면 어쩌지, 응가라도 하면 어쩌지 등등.. 그거야 훈련받은 개들이니 괜찮겠지만.. 근데 오늘은 특히 바틸드가 개를 잘 못 다뤘다. 끈을 잡아당겨도 개들이 버티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ㅠㅠ

 

** 사족 2

2월에 연말정산 때문에 화딱지나서 썼던 지젤 + 연말정산 패러디 : http://tveye.tistory.com/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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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