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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마지막 날이다. 매년 이맘때면 느끼는 것인데 갈수록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만큼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겠지.

 

 

사진은 숙소 창 너머로 바라본 블라디보스톡 바깥 풍경.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방이 아니어서 좀 아쉽지만 가능한한 줌을 당겨서 바다 쪽만 찍어봄. 석양 무렵이었고 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 바다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이 순간 하나만으로 이번 연말 여행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본다. 추웠고 어제는 눈보라도 쳤고 여러번 왔던 곳이라 새로울 것도 없고 역시 혼자 와서 별다른 재미도 없었지만, 가만히 창가 소파에 다리를 뻗고 기댄 채 창 너머로 부드럽게 석양이 내리는 바다와 눈으로 뒤덮인 작은 도시의 작은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올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것은 나름대로 행복했고 또 좋았다. 아마 최근 몇년 간 계속 그래왔지만 올해는 특히 너무 정신없이 살았고 일과 사람들에 치어 무척 시달리고 또 지속적인 환멸로 괴로웠기 때문에 이런 작고 조용한 평온함이 소중하게 느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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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을 먹고 좀 쉬다가 옷을 잔뜩 껴입고(오늘은 영하 20도 전후로 추웠다) 호텔을 나섰다. 추우니까 내일로 미룰까 하다가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니 송구영신의 의미로 빠끄로프 사원에 다녀왔다. 빠끄로프 사원은 오케안스키 대로를 따라 쭉 올라가야 해서 날씨 좋을 때도 다리 아프고 힘들다. 맞바람이 몰아치는 한겨울 날씨에 눈길을 따라 걸어올라가는 것은 물론 아주 힘들다. 그래도 하여튼 낑낑대며 올라갔다. 껴입은데다 양말도 두개 신고 부츠를 신고 마스크까지 썼기 때문에 생각만큼 춥지는 않았다.

 

 

 

 

 

오늘이 더 춥긴 했지만 차갑고 청명한 날씨라 눈보라치던 어제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늘이 새파래서 사원의 금빛과 푸른빛 쿠폴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사원에 들어가 삼위일체 성화와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서 각각 초를 켰다.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했다.

 

 

 

 

사원에서 나와 오케안스키 대로를 따라 걸어내려갔다. 좋아하는 펠메니 식당에 갔다. 올리비에 샐러드는 어제 먹었으니 오늘은 보르쉬와 펠메니를 먹으려고. 그런데 마침 런치 메뉴가 있어 샐러드, 수프, 펠메니, 후식의 조그만 빵이 나오는 세트가 330루블밖에 하지 않았다. 종류도 여럿이라 고를 수 있었다. 시골식 샐러드(과연 이것은 무엇일지 의문했는데 양배추와 오이를 채친 것이었다), 보르쉬, 오징어 펠메니, 감자빵을 골랐고 거기에 허브티를 추가했다. 각각의 양이 적어서 네개 다 먹으니 딱 배부르고 좋았다. 맛있었다. 여기는 재작년에 왔을 때도 12월 31일에 식사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후 좀 다른 쪽 길로 돌아나왔다. 호텔 근처에 새로 생긴 조그맣고 이뻐 보이는 카페가 있어 거기 가보았는데 겉보기만 예쁠 뿐 안이 썰렁하고 먹을 것도 거의 없어서 그냥 나와 예전부터 좋아하던 다른 카페에 갔다. 러시아는 특히 새해가 큰 명절이라 전야를 맞이하는 31일부터는 영업하는 데가 별로 없다. 여기도 6시까지만 한다고 되어 있고 오늘은 요리도 디저트도 안되고 오로지 커피와 차만 된다고 했다. 몸을 녹이려고 마살라 차이 티를 시켜서 마셨다. 좋아하는 카페였는데 오늘따라 오디오 스피커에 문제가 있는지 계속 퍽퍽 소리가 났고 나중에 스피커가 정상이 되자 내가 너무 싫어하는 노래가 나와서 '아 오늘은 아닌 거 같다' 하고 생각하며 30분 정도 앉아 차만 마시고 나왔다.

 

 

방으로 돌아와 씻고서 창가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저께 사왔던 에클레어가 한개 남아 있어서 그것을 곁들여 차를 마시며 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후에 돌아왔으니 글을 좀 써볼까 했지만 소파에 앉아 창 너머를 바라보며 쉬는 게 좋아서 석양이 어두워질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저녁을 대충 챙겨 먹은 후 티비를 틀어보니 마침 새해 단골영화인 '운명의 아이러니'를 해주고 있었다. 거의 도입부였다. 이 영화는 러시아어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유명한 영화이다. 마치 크리스마스 시즌에 헐리우드 영화로 나홀로 집에를 해주는 것처럼, 소련 시절 빅 히트를 친 새해 영화라 이 시즌이면 꼭 해준다.

 

 

 

 

내용은 12월 31일에 친구들과 바냐(러시아 사우나)에 갔다가 취해버린 남자 주인공이 인사불성 상태로 레닌그라드행 비행기를 타면서 모든게 꼬이는 로맨틱 코미디이다. 즉, 이 남자는 모스크바의 모 거리 모 번지 모 아파트 ㅇㅇ호에 사는데 알고보니 레닌그라드에도 똑같은 거리 똑같은 주소 똑같은 아파트 똑같은 방이 있으며 심지어 내부 구조까지 똑같고 열쇠마저 잘 맞는 것이었다. 영화 시작할때 너무나도 소련다운 이런 상황에 대해 풍자 영상도 나온다만 기본적으로는 완전 로맨틱 코미디이다. 졸지에 레닌그라드에 온 이 남자는 자기 집인줄 알고 취해 잠이 들고... 그러다 원래 집주인인 아리따운 여인이 등장하고.... 등등. 러시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이 영화를 좋아하는데, 특히 후반부에 여주인공인 나쟈가 눈 펄펄 내리는 레닌그라드 시내를 배회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그냥 앞부분만 대충 볼까 하다가 오랜만에 보니 재밌어서 결국 끝까지 다 봤다. 사실 집에 이 영화 dvd도 있는데 ㅎㅎ 이 영화를 보면 항상 오랜 세월 전 새해 휴가 시즌에 쥬인과 함께 기숙사 방에 앉아 조그만 브라운관 티비로 이걸 재밌게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추운 방과 허름한 부엌에 있던 법랑 냄비, 좁고 불편한 침대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어느새 올해가 한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는 서울보다 한시간 빠르다. 창 너머로는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추운 날씨에 며칠 동안 두꺼운 차림으로 쏘다니다 보니 몸이 피곤해선지 벌써 너무 졸려온다. 그래도 카운트다운은 봐야지. 오늘은 따로 준비한 샴페인도 없고 초도 없다. 대신 들어오면서 사온 과일즙(콤포트)을 유리잔에 따라서 마시면서 러시아 방송으로 제야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 옛 가수들(알라 푸가쵸바도 방금 나와서 노래를 불렀음)도 나오고 심지어 아까 광고를 봤을땐 니콜라이 치스카리제가 무용수들과 함께 나와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렇게 2019년이 다 갔다. 원래 한 해를 마무리할때는 좀 진득하게 앉아서 일년을 반추해보고 이것저것 적어보는 편인데 오늘은 여행을 와 있기도 하고 또 생각지 않게 추억의 영화를 보는 바람에, 그리고 졸려오기도 해서 찬찬히 생각하기가 어렵다. 올해는 주로 일 때문에 힘들었다. 초기에 새로 맡은 일과 주변 상황 때문에 너무 힘들고 우울하고 괴로울 때 아주 짧은 단편을 하나 쓰고 조금 나아졌는데 돌이켜보니 최근 몇 년 사이에 처음으로 완성한 단편이라 아주 작고 가벼운 글이지만 그게 나에게 많이 소중하다.

 

 

내년에는 좀더 여유있고, 좀더 용기있고, 좀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송구영신.

 

 

여기 들러주시는 모든 분들도 얼마 안 남은 2019년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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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