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수요일 밤 : 아침부터 정신없었음, 엉망진창 자료 때문에 종일 고생, 서러웠던 꿈, 다 읽고 나니 아쉽다, 렘도 있지만 fragments2022. 4. 6. 21:50
평화롭게 밥먹는 나의 동족 토끼 사진 한 장으로 시작하며 지친 하루의 위안을.
재택근무하는 날이었지만 정말 엄청 바빴고 또 아침부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침에 막 일을 시작했을 무렵 어제 면접을 봤던 사람 중 하나가 확진이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제는 상당히 좁은 회의실에서 면접을 했기 때문에 비록 마스크를 쓰고 아크릴판으로 칸막이를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있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부터 목소리가 가고 있었으므로 부랴부랴 자가진단키트를 해보았다. 음성이 나와서 다행이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일단 이번주 금요일까지 재택근무로 전환을 했다. 그래서 내일 사무실 출근하기로 했던 것도 재택으로 바꿨다. 어제 나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한 직원들에게도 모두 키트 검사를 하라고 연락했다.
오전에 줌 회의를 했고 오후엔 내내 숫자와 산식과 씨름하고 엉망진창으로 내깔겨진 자료를 고치고 실무자를 추궁하고 온갖 머리를 굴려가며 논리를 짜맞춰야 했다. 실무자가 너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자료를 만들어와서(숫자도 틀리고 산식도 틀리고 중간중간 곱하기 더하기도 틀리고 하여튼 총체적 난국이었음) 이럴 거면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자료 조사해서 만드는 게 나았겠다는 짜증이 치솟았다. 저녁까지 이 자료 고치느라 다른 일을 못했다. 절반 이상의 시간은 대체 무슨 얘기인지 해석하고 원래 내용을 유추하는 데 소비했다. 이 실무자가 평소 말할 때도 원체 횡설수설하고 정말 말귀도 못알아먹고 논리가 없는 타입이라 자료도 엉망진창이다 ㅠㅠ 나중엔 너무 어깨와 허리가 아파서 조금 남은 건 내일로 미루고 일을 끝냈다.
시계처럼 정확하게 그날이 오긴 했는데 본격적으로 오진 않고 온몸이 아프기만 해서 괴롭다. 이런 경우엔 보통 며칠 동안 되게 아픈데 ㅠㅠ 내일 엄청엄청 아플 것 같다. 그러니 차라리 접촉자가 되어 내일 재택을 하게 된 게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것 같다 ㅠㅠ
새벽인가 아침 꿈에 뻬쩨르에 다시 갔다. 그랜드 호텔 유럽, 즉 에브로파 호텔이 꿈에 나왔는데 속이 상해서 거의 울먹거리다 깼다. 그 이유는 이렇다. 꿈에서 엄마랑 같이 뻬쩨르에 갔고 우리는 에브로파에 묵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이 호텔에 대해 잘 모르셨고 나는 엄마에게 '여기에는 멋있는 카페랑 정말 화려한 아르누보 레스토랑이 있어요' 하고 공연히 자랑하며(마치 우리 집인양 ㅋㅋ) 메조닌 카페와 에브로파 레스토랑을 보여드릴 마음에 들떴다. 그런데 역시 꿈이라서 그런지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분명 메조닌이 나와야 할 곳인데 아트리움 카페였던 실제 모습과는 달리 양옆으로 문닫은 지하상가 가게 같은 곳들만 있었다. 그리고 에브로파 레스토랑도 없었다. 알고보니 둘다 문을 닫은 거였다. 너무 서러워서 막 눈물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곳들인데, 아름다운 곳들인데, 엄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었는데 문을 닫다니 하고 울먹거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마가 계단 내려가다 넘어져서 무릎이 좀 까진 것에 놀라 내가 복도 어딘가에 있는 리셉션 데스크에 가서 열심히 영어로 이 내용을 설명하며 반창고나 약을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런데 꿈에서 외국어는 원래 잘 안되기 마련이라(그렇다고 현실에서도 유창하게 잘 되는 것은 아님 ㅋ) 엄청 피곤했다. 하여튼 꿈에서 엄마는 다치고 영어는 안되고 좋아하는 호텔의 카페와 레스토랑은 다 문닫고 황량하기 짝이 없어져서 슬퍼하다가 깼다. 흑흑흑....
유일하게 좋았던 건 이 꿈속에서 엄마랑 복도를 지나가다 계단 옆에 걸린 큰 거울을 봤는데 우리가 둘다 아주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입은 옷은 검은색의 드레스에 은회색의 백조인지 용인지 하여튼 기다랗고 날개 달린 뭔가의 문양이 수놓여져 있었는데 촌스럽지 않고 굉장히 이뻤다. 그래서 만족해했는데 엉엉(이렇게 차려입고 예쁜 카페랑 레스토랑에 가고 있었는데 문 닫았어 ㅠㅠ + 꿈에선 지금처럼 둥실둥실해지기 전의 모습이었음 ㅋㅋ) 아무래도 나에게 '내가 좋아했던 곳들이 다 문을 닫는다. 여행도 못 가고 그 사이에 다 없어진다' 공포증이 생긴 것 같음.
간밤에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를 결국 끝까지 다 읽고 잤다. 정말 좋았던 소설이다. 이 작가들의 작품들은 그 무엇이 됐든, 아무리 유머가 넘치더라도 결국 어딘가에는 예리한 슬픔과 일말의 절망감이 배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짜 훌륭한 점이다. 다 읽고 나니 너무너무 아쉬웠다. 전집이 번역돼 나오면 참 좋을텐데. 옛날에 뻬쩨르에서 지낼때 돔 끄니기나 부끄보예드 등 서점의 판타지/SF 코너에 가면 스트루가츠키 형제 작품들이 쫙 꽂혀 있었던 게 문득 떠오른다. 그때 다 샀어야 하나... 아니야 그래봤자 다 못 읽었을거야 엉엉... 말장난과 조어가 너무 많아, 너무 똑똑해 흐흑...
몸이 너무 쑤시고 아프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이 무지 많다. 재택이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 아끼고 아꼈던 책도 다 읽어버렸으니 늦지 않게 자야겠다. 그런데 사실 최근 번역된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도 앞의 두세 페이지만 읽고 아껴둔 한 권이 있다. 나는 렘도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렘은 스트루가츠키 형제들보단 좀더 현학적이고 유머도 좀더 엘리트주의 유머라 그만큼 즐겁지는 않다. 그래서 내가 분류한 '자기 전에 편하게 읽는 작가군'에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솔라리스는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이라 종종 다시 읽는다만... 나는 렘이 대놓고 유머를 구사하는 쪽보다는 차라리 솔라리스 같은 쪽이 더 취향에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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