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와서도 새벽에 깨는 것이 반복되고 있다. 좀 나아졌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언제 그렇게 미친듯이 일을 했느냐는 듯, 일 안하고 매일같이 쏘다니고 늦잠자고 누워 있고 게으름피우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다... 도대체가 나라는 인간은 애초부터 일해먹고 살게 생겨먹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아둥바둥 일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힘들었나... 흐흑, 일 안하고 살고 싶다. 어디서 화수분이라도 하나 뚝 떨어지면 좋을텐데. 결국 이것도 아주 짧은 기간의 일탈이고 아마 나는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여전히 마음의 안정을 찾거나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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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일어났다. 머리가 좀 아팠다. 자다가 추워서 긴 옷으로 갈아입고 잤는데 기침도 했다. 어제는 공연보고 오느라 빵이든 뭐든 아침거리를 사오지 않았다. 근데 어제부터 비가 와서 오후까지 날씨가 너무 안 좋았다. 일어나기가 너무 싫어서 오래오래 누워 있었다... 결국 배가 고파서 억지로 일어나 씻은 후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화장을 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모든 계획(k갤러리에서 바리쉬니코프 전시 보기, 로모노소프 찻잔 가게 가기 등등)을 취소하고 이 호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아스토리아 호텔 카페에 가서 애프터눈 티로 한방에 밥과 디저트를 해결하기로 호기있게 결심했다.
이 카페에는 전에도 몇번 갔었다. 얼마전 bravebird님과도 함께 갔었다. 예전에 딱 한번 애프터눈 티 세트 먹어봤다. 여기는 디저트 부페 식으로 나오는 러시안 애프터눈 티 세트가 있고 예의 3단 트레이에 나오는 잉글리쉬 애프터눈 티 세트가 있는데 후자가 더 비싸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전자를 먹는다. 여긴 러시아잖아,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잉글리쉬 애프터눈 티 세트 먹어야겠나 싶은 거겠지.
빈속이라 일단 배를 채운 후 디저트를 먹기로 다짐. 오이샌드위치와 쇠고기로 속을 채운 피로슈카(파이), 양배추 파이, 딸기잼 얹은 블린을 먼저 먹었다. 다들 버터가 많이 들어 있고 맛있었다. 블린도 맛있었는데 부페 종류를 다 하나씩 먹어보고자 하는 원대한 야망 탓에 블린은 한장밖에 못 먹었다. 애초부터 부페를 많이 못먹어서 샐러드 바에서도 본전 못 건지는 나에게는 참으로 원대한 야망인 것이다.
이미 배가 불렀지만 디저트를 먹고자 하는 열망으로(ㅋㅋ) 딸기무스 케익과 바닐라 슈를 가져다 먹고... 초콜릿 트뤼플과 잼 얹은 초콜릿 무스, 견과쿠키를 가져왔는데 무스 외엔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안먹어본 게 아직도 남아 있었으나 역시 토끼의 위장은 작았고... 나의 원대한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엉엉) 더 이상 못먹고 초콜릿 트뤼플과 견과쿠키, 그리고 원래 곁들여준 견과얹은 비스코티 비슷한 쿠키는 살짝 티슈로 싸왔다. 아휴... 저걸 다 먹었어야 하는데 엉엉... 토끼도 위장이 4개면 얼마나 좋아!
(심지어 이 배터지는 와중에 산딸기에이드마저 서비스로 가져다줌... 근데 이거 맛있었다)
원래 비오니까 카페 창가에 앉아 애프터눈 티 마시며 우아하게 책이나 읽으려고 도블라토프 단문집과 하루키 책 두권이나 들고 갔는데(나름대로 빨간 립스틱도 칠해주고 조금 치장도 했다만) 결국 책은 하나도 안 읽고 창밖 구경하고 디저트 하나하나 클리어하고 카톡하고 폰으로 이것저것 확인하다 6시가 되었다. 이게 뭐야... 나 왜 책 두권 들고 내려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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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좀 더 앉아서 책 읽어보려 했으나 창밖으로 하늘이 개는 게 보였다. 여기는 날씨 좋으면 무조건 나가야 하는 동네라서(언제 또 비가 올지 모른다 ㅠㅠ) 이미 전시 시간은 놓쳤으니 찻잔이랑 수분크림 사러 나가기로 했다. 내일 블로그 이웃님께서 페테르부르크에 오시기 때문에 같이 밥먹을 곳도 예약할 겸.
근데 bravebird님 때도 그랬지만 고골은 오늘도 역시나 며칠 동안 예약이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예약 실패. 여기 왜 이래... 예전엔 올때마다 자리 있었는데... 쯧, 너무 떠버렸어... 두셰브나야 꾸흐냐도 자리 없는데 ㅠㅠ 역시 겨울에 와야 편하게 밥먹는구나... 그나마 아직 고스찌는 자리가 있어서 예약에 성공했다. 고스찌, 너만은 제발... 어흑흑.. 고스찌는 이 동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데 너마저 자리 잡기 힘들어지면 너무 슬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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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9일, 그다음엔 2주로 바꾸고, 그다음에 또 며칠을 연장한 거라서 화장품이 똑똑 떨어졌다. 스킨은 며칠 전에 싼 걸로 하나 샀는데 수분크림마저 떨어졌다. 크림은 스킨이랑 다르니 아무거나 막 사기도 그렇고... 근데 또 원래 쓰는 건 면세점 가격이랑 너무 다르니 덜컥 여기서 그냥 사기는 아깝고... 하여튼 네프스키로 나갔다. 리브 고셰에 갈까 했는데 렌에뚜왈이라는 다른 화장품스토어 체인이 있어 거길 갔다. 여기도 뭔가 브랜드들만 우글거리긴 하는데... 그나마 내가 쓰는 수분크림에 젤 가까운 건 비오템 아쿠아수르스인데 이건 사실 가성비가 안좋아서 굳이 여기서 면세도 아닌데 사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때 친절한 점원 아가씨가 와서 도와주었다. 수분크림 찾아요 했더니 이것저것 권해주어서 '이것보다 좀 더 가벼운 거요, 비오템 수분 젤 비슷한 건데 비오템은 싫어요. 원래 ㅇㅇ 썼는데 여긴 없어서요' 라고 하자 점원은 자기네 체인은 프랑스 체인이라 그쪽 브랜드들과 수입품들을 취급한다고 했다. 하여튼 세상에서 주문하는 걸 제일 두려워하는 나이지만(ㅠㅠ) 점원 아가씨가 잘 도와줘서 이것저것 테스트도 해보고 다 발라보았다. 근데 50밀리짜리라서 더 작은 용량은 없느냐고 했고 다 50밀리라고 해서 '나는 여행왔는데 수분크림이 똑 떨어져서 조금만 있음 되는데요'라고 하자 '아항~' 하더니 여행용 키트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 진작 그렇게 물어볼걸 ㅋㅋ
점원 아가씨가 가져다준 키트에는 아이크림 8.5밀리, 수분크림 25밀리, 메이크업리무버 50밀리 등 딱 나한테 필요한 용량과 필요한 물건들만 들어 있었고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1+1 행사 중이라 같은 걸 하나 더 주었다. 첨엔 두개 사면 하나 더 준다는 줄 알고 나 혼자 쓸거라 필요없다 했더니 원 플러스 원이니 하나 더 가져가면 된다 해서 뭔가 조삼모사처럼 득템한 기분이 되었음. 내친김에 스타킹도 샀다. 스타킹 두개 가져왔는데 하나는 올이 나갔고 하나는 빵꾸나서 ㅠㅠ 스타킹도 원 플러스 원이라 원래 물건 가격이 좀 비싸긴 했지만 두개 산 꼴이 되어 또 그리 나쁘진 않다고 조삼모사 계산을 하였음...
(그리하여 두개씩 가져온 화장품과 스타킹. 조삼모사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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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사는 미션을 성공한 후(헉헉, 물건 사는 건 왜 아직도 이렇게 힘들까... 난 초보 여행자도 아니고 노어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엉엉), 쭉 걸어서 발샤야 코뉴셴나야 거리에 있는 로모노소프 매장에 갔다. 원래 제일 많이 가던 곳은 판탄카 근방에 있는데 거긴 버스 타고 가야 해서. 친구가 부탁한 코발트넷 찻잔 세트를 사고 새로 나온 귀여운 그젤 문양 찻잔과 뚜껑 달린 붉은 수탉 찻잔(저번에 샀던 붉은 수탉 찻잔 깨먹은 회한으로 새로운 수탉 장만)을 샀다. 다른 것도 이쁜거 많았는데(새로 나온 것들이!!!) 진짜 파산할 지경이라 포기했다. 근데 이러다 마지막날 도로 와서 또 살지도 몰라... 가방에 들어갈 자리도 진짜 없는데 ㅠㅠ
찻잔 사진은 나중에.. 일단은 박스를 풀지 않았다. 숙소를 며칠 후 또 옮겨야 하니...
찻잔을 산 후 무거운 가방을 들고 걸어서 돌아오다 부셰에 들러 내일 아침 먹을 빵을 샀다. 저녁 무렵이라 줄이 엄청 길어서 꽤 기다렸다. 그리고는 근처 가게에 가서 물과 컵라면을 샀다. 근데 요즘 왜 도시락 컵라면이 안보이지... 이상한 러시아 컵라면이 있어 닭고기맛을 일단 샀다.
물 2리터, 찻잔 4개, 화장품, 카메라 든 가방을 들고 호텔까지 걸어오는데 무거워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깨랑 손목 다 나가는 줄 알았다. 으흑, 근력 부족... 게다가 더워서(뭐야, 오후까지 비오고 추웠는데) 땀을 삐질삐질 흘림. 생각해보니 돌아오는 길에 고스찌에 자리 예약도 했구나.
돌아와서 보니 내가 카페 가서 읽으려 했던 책 두권을 그대로 들고 다녔던 것을 발견. 으악, 그러니까 무거웠지...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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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는 씻은 후 빨래를 좀 하고 배고프고 느끼해서(단걸로 아점저를 먹었으니..) 문제의 컵라면을 끓여서 볶음김치와 먹어보았다. 이상하게 스프에서 카레 냄새가 나네 했는데 다 익고 나서 먹어보니 그것은 카레 냄새가 아니라 조미료 수프 냄새였음 -_- 우왝, 진짜 느끼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도시락이 히트를 친 거야!! 애액, 도시락 어데갔어... 도로 갖다놔요 엉엉...
하여튼 배고파서 볶음김치의 힘으로 맛없고 느끼한 러시아 컵라면을 꾸역꾸역 먹었다. 국물은 거의 안 먹고 버렸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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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샤와 레냐는 그저께 밤에 각각 다른 이유로 나에게 삐쳤다.
먼저 레냐는, 어제(월) 저녁에 나랑 다시 만나 놀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어제 마린스키 공연이 있었다.
나 : 레냐야, 나 마린스키에 공연 보러 가는데 다녀와서 이번주에 다시 보자.
레냐 : (정색)아뺘찌 슈끌랴로프!!! ('또' 슈클랴로프야!) 싫어 슈클랴로프! 진짜 싫어!
나 : (헉) 너 전에 그 사람 춤 잘추고 잘생겨서 좋다며... ㅠㅠ 나랑 곱사등이 망아지 볼때 좋아했잖아!
레냐 : 싫어 싫어 슈클랴로프 싫어 힝힝... 쥬쥬가 좋아해 힝힝...
나 : (헉, 이 녀석이 이제 드디어 이성에 눈떴나, 질투라는 것을 하나!!!) 착하지 레냐야 양갱 줄게.
그리고 비장의 무기 양갱 10개들이를 주었다. 그러자 레냐는 금세 해해 웃었고 나보고 공연 잘보고 와서 또 놀자고 한다. 음, 약혼자가 너무 단순한 거 아냐... 양갱 주니까 금세 풀어져서 약혼녀가 멋있는 남자 무대 보러 간대도 웃고... 이거 기뻐해야 돼 슬퍼해야 돼...
그런데 이것이 료샤의 삐침을 유발했다. 그 이유는..
료샤 : 야, 너 레냐 양갱은 챙겨오고 나 줄거 안 챙겨오고..
나 : 미안해 친구야... 나 너무 급하게 날아오느라 네걸 못샀어 ㅠㅠ 미안해..
료샤 : 레냐만 챙기고 난 안중에도 없어 ㅠㅠ
... 료샤가 원하는 것은 맥심모카골드 믹스커피임... ㅠㅠ 그 노란색...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거... 접때 먹여줬더니 껌벅 죽고는 그렇게 맛있는 커피 첨 먹어본다 해서 이후에는 러시아 올때마다 레냐 양갱이랑 얘의 맥심모카골드 노란색을 사왔던 것이다. 근데 이번엔 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그나마 양갱도 간신히 사왔다 ㅠㅠ
그래서 레냐는 양갱으로 무마해서 질투심이 풀렸는데 맥심모카골드를 못 먹게 된 료샤는 아직 조금살짝 삐쳐있는 것 같다. 어흑, 내가 너네 집 가서 인스턴트 커피에 프림이랑 설탕 잔뜩 타서 다방 커피 타주면 되겠냐... 나 다방커피 잘 탄다... 이게 참 미스터리인데 난 커피를 안 마시는데 이상하게 내가 타는 다방커피가 아주 맛있다며 아저씨들이 항상 좋아했었음.
결론 : 레냐는 아직 먹을 것 앞에선 질투가 뭔지 모르는 순진남이고 료샤는 노란 맥심을 좋아하는 아재 입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