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로호바야 거리, 이름들 about writing2019. 12. 6. 21:52
11월 초, 해질녘 페테르부르크 고로호바야 거리. 날씨가 흐려서 석양이나 아름다운 푸른빛은 아쉽지만 없었다. 걸어가면서 폰으로 찍었더니 조금 흔들렸는데 색감도 그렇고 어쩐지 옛날 소련 느낌이라 레닌그라드 시절이라고 최면 주문을 외며 사진 올려봄. 뭐 레닌그라드 시절엔 저런 별 모양 전선 장식은 없었을 것 같지만.
이 거리는 상당히 길게 뻗어 있다. 쭉 따라서 올라가면 사도바야 거리와 이어진다. 아래로 계속 내려가면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말라야 모르스카야 거리를 가로질러 해군성 공원에 이른다. 네프스키 대로와도 가깝다. 내가 쓴 글들 몇편에 등장하는 트로이가 이 거리 어딘가의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도바야 쪽보다는 발샤야 모르스카야 거리와 좀더 가까운 방향에. 소련 시절 이 거리는 제르진스키 거리로 불렸다. 하지만 내 입에는 고로호바야가 더 붙어 있어서 소설 속에서도 딱히 이름을 수정하지는 않았다. 알고 있으니 필요할 때는 언제든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어떤 퇴고 버전에서는 이름을 모두 수정해놓기도 했다.
그러니 이 소설들 역시 이 거리의 지난한 역사들과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면을 띠게 된다. 어딘가에서는 고로호바야가 되고 또 어딘가에서는 제르진스키가 된다. 아마도 이 거리가 몇년 동안 가졌던 이름인 코미사로프스카야로 불리는 버전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들이야 모두 달라지겠지만. 이것은 소련에 존재하는 다른 무수한 거리들과 도시들, 극장과 건물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페테르부르크가 페트로그라드가 되었다가 레닌그라드가 되고 다시 페테르부르크가 되는 것처럼, 마린스키 극장이 키로프가 되었다가 다시 마린스키가 된 것처럼. 이름이 바뀌고 또 돌아오는 과정들은 너무나도 이 나라의 역사나 삶과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 또한 어떤 면에서는 렌즈이기 때문이다. 소련 시절 니넬이라는 여자 이름이 유행했던 것처럼. (니넬은 '레닌'의 철자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이름이 어떻든, 이 거리는 현실 속에서 내가 매년 오가며 자주 걷는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산책 루트와도 겹치고 주로 묵는 숙소와도 가깝다. 동시에 이 거리는 허구의 소설 속에서 트로이와 미샤가 셀수 없이 걷는 곳이다. 트로이는 자기네 집이 이 거리에 있으니까, 미샤는 트로이네 집을 뻔질나게 드나드니까(게다가 여기서 극장까지 도보로 이동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고) 그래선지 이 거리에 대해 나도 애정을 품고 있다 :)
..
(사족) 그러고보니 레닌그라드 시절이라면 도로에 차가 저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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