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토요일 밤 : 송구영신, 쥬인과 함께 보낸 하루, 글쓰기와 들림, 한 해를 보내는 마음 fragments2022. 12. 31. 22:14
2022년의 마지막 날.
거의 십년 전쯤부터 혼자 살게 된 후부터 매년 12월 31일이면 집이든 여행을 가서든 조용히 혼자서 한 해를 반추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 일년 중 가장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날이 아닌가 싶다.
오늘은 쥬인이 놀러와서 이런 고적한 송구영신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옛날에 같이 살 때는 샴페인도 터뜨리고 즐겁게 지냈는데 쥬인이 결혼해서 이사를 나가고 나도 그 이후 두세 차례 이사를 하고, 또 지방 발령도 받아 몇년쯤 기차를 타고 오가는 생활을 해서, 그리고 두어번은 여행을 가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송년과 신년을 맞이하기도 해서 이렇게 12월 31일에 같이 시간을 보낸 것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어제 늦게까지 글을 쓰고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1시쯤 들어갔지만 역시 머리와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히는데 시간이 걸려서 두시 넘어서야 잠들었다. 중간에 몇차례 깨기도 했고 몸이 무척 피곤했다. 10시 좀 안되어 일어났고 새벽배송 온 꽃을 다듬고, 청소를 대충 하고 목욕을 하고 집을 조금 정리하고 나니 정오 무렵 쥬인이 도착했다.
쥬인에게 감바스와 불고기 백반 중 고르라고 했더니 쥬인은 후자를 골랐다. 둘다 밀키트임 ㅋ 옛날엔 정말 하나하나 요리를 다 해서 크리스마스와 새해 테이블을 차렸는데 이제 그럴 기력은 없어서. 그래도 불고기는 맛술과 참기름, 세가지 종류 버섯을 가미해 조금 맛을 더 내긴 했다. 불고기와 구운 야채 샐러드, 미역국과 밥으로 함께 아점을 먹었음. 아침부터 고기반찬.
그리고 어제 종무식에서 받아온 구움과자 디저트 몇알과 과일 조금, 내가 사놓은 딸기와 케익, 에클레어를 이쁜 접시에 차려서 함께 차를 마셨다. 쥬인은 원두를 갈아오려다 까먹어서 집 근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테이크아웃해와 내가 전기포트에 끓인 물을 붓고 아메리카노를 조제해 마셨고 나는 도브라 차요브나에서 사왔던 네팔 일람을 개봉해 우려 마셨다. 차 마시며 너무너무 즐겁고 재미있게 한참 수다를 떨고 또 허리끊어지게 웃으며 너무나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아쉬웠다. 우리 집 오려면 택시 타고 30분 넘게 와야 하고 경기도로 넘어와야 해서 요금도 많이 나오는데, 내일 낮부터 새 직장에 출근도 해야 하는데 여기까지 와주고 새해 전날을 고적하지 않게 함께 보내준 쥬인에게 무척 고마웠다. 쥬인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쥬인이 해질 무렵 택시를 타고 돌아가고, 나는 자전거를 20분 가량 탄 후 설거지를 하고, 집을 좀 정돈한 후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저녁을 챙겨 먹었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오늘이 거의 다 지나갔다. 2022년의 마지막 날.
<글쓰기에 대한 짧은 메모 : 접어둠>
간밤에 글을 마무리했다. 올해를 정말 넘기고 싶지 않았고 적어도 이 글 한편만은 완성하고 싶었는데 정말 끝낼 수 있어서 기뻤다. 약 서너시간 정도 정말 많이 집중해서 썼고 이런 순간은 일종의 '들림'과 같다. 나는 종종 손이 머리를 앞선다고 얘기하고 또 머리가 아니라 손이 쓴다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손과 머리가 합일된 순간이다. 모든 것이 합일되어 내달리는 순간들. 나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이 단어들로, 문장들로, 손 끝에서 내달리는 순간들이다. 그건 어쩌면 종교적이고 또 신비주의적이고, 혹은 중독자들이 말하는 열락의 순간과 아주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드물게 나는 그것을 일종의 오르가즘과 너무나도 유사하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또 육체적으로도 고양되고 긴장되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너무나 집중하는 순간 사라지게 되는 느낌.
글을 마친 것은 오늘 새벽 12시 20분 전후였다. 올해를 넘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기도도 했는데 현실로 이루어져서 무척 기뻤고 충만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폰으로 간단하게 죽 훑어봤는데, 어제 쓰고 나서 너무 내달리며 써서 역시 명료함이나 논리가 좀 부족하니 많이 손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막 나간 부분은 없었고 전체적으로 잘 들어맞아서 좀 놀랐다. 어쨌든 오늘은 다시 손볼 시간이 없을 것 같고, 아직 제목도 못 정했으니 내일과 1월 중에는 양생을 시키고 퇴고를 해야겠다. 그리고 그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해야겠다. 아직 어떤 글을 쓸지 정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구상해 놓은 단편이 있긴 한데 아직 잘 모르겠다.
..
이제 두어시간 후면 올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온다.
올해는 바쁘게 일하며 보냈다. 사실 작년 12월 31일이 바로 어제 같고, 또 그전 12월 31일도 마찬가지라,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는 말이 정말 맞다. 일에 치어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지난 2년과 비교하면 올해는 여름과 겨울에 여행을 갔다. 빌니우스와 프라하에 다녀왔고 둘다 서로 다른 의미로 충만한 여행이었다. 다녀오니 몸이 너무 힘들어서 이제 장거리/경유 여행을 하는 게 좀 버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좀 슬펐지만.
맡은 일은 지치고 피곤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아주 어려운 과업들'은 예전보다 상대적으로는 좀 적었다. 아마 이 부서를 맡아 운영한 것이 어느덧 3년차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만큼 경험과 연륜이 쌓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 자체보다는 사람들에서 오는 스트레스, 그리고 생각지 않았던 온갖 문제들이 겹쳐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매일매일 구멍 뚫리고 무너진 네덜란드 둑 위에서 불난 호떡집들이 계속 증식하는 형상이라 엄청 피곤했다. 그래도 이정도면 어쨌든 일은 그럭저럭 선방하며 버텨냈다.
몸은 여러 모로 좀 안 좋아졌다. 내년에는 내 몸을 잘 돌보고 정비해야 한다. 이것을 내년의 주요한 목표 중 하나로 삼으려고 한다.
내년, 당장 다음주부터는 회사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고 아마도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다음주와 다다음주는 보고서 지옥에 파묻혀야 하니 내가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할 것 같고, 거기에 큰 변화가 더해지니 어떻게 버틸지 좀 막막하지만 걱정하면 심란해지기만 하니 용기를 내고 그냥 하나하나 부딪쳐가며 타협과 중용의 방식들을 찾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올해는 부모님과 조금 더 많이 대화를 했고 거의 매일 통화를 하며 지냈다. 가족들과 나의 건강과 행복을 깊이 바라고 기도하며 올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의 소중한 벗들을 위해서도.
송구영신.
2022년 안녕.
여기 들러주시는 모든 이웃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크리스마스와 새해 트리를 따로 사거나 꾸미지는 않았지만 매주 주문하는 꽃들에서 푸른 잎사귀 달린 장식용 나뭇가지들과 식물들만 추려내 이렇게 모아두니 나름대로 트리 느낌도 난다. 동물 인형들아, 너희도 같이 새해 복 많이 받으렴 :)
'frag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 월요일 밤 : 신년 같지 않은 그냥 월요일, 바쁘고 피곤, 기도와 마음 (2) | 2023.01.02 |
---|---|
1.1 일요일 밤 : 새해 첫날, 퇴고는 아직, 파도가 닥쳐올 때는 (2) | 2023.01.01 |
12.30 금요일 저녁 : 기념 꽃, 어느새 여기, 급속히 사라진 반차, 끝내려고 했는데, 하루 전의 꿈 (0) | 2022.12.30 |
12.29 목요일 밤 : 작별 쿠키, 선배와 잠시, 역시 약기운으로 버텼던건가, 이제 이틀 (0) | 2022.12.29 |
12.28 수요일 밤 : 스스로 선물, 다가올 시련에 대해, 얍! (4) | 2022.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