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목요일 밤 : 생각지 않은 작은 즐거움, 피곤한 꿈, 양력 생일, 조삼모사 꿩 대신 닭 fragments2022. 11. 3. 21:17
나는 입맛이 까탈스러운 편이고 호불호가 뚜렷하다.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몸에서 안 받아서 못먹는 것도 있다. 예전에 쥬인은 '토끼는 러시아 안 왔으면 영영 햄버거를 안 먹었겠지' 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정말 신빙성 있는 얘기임. 러시아 가기 전까지는 햄버거, 피자 뭐 그런 걸 아예 입에 안 댔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지내면서 그만 맥도날드에 눈을 뜨고 말았고,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던 러시아 사람들의 '맥도날드=최고의 레스토랑' 공식에 물들어서 매주마다 바실리섬이나 네프스키의 맥도날드 가는 날이면 엄청 행복했다. 그때는 맥도날드의 모든 버거 가격이 똑같았기 때문에(지금은 러시아도 안 그렇다. 하긴 이제 러시아에 맥도날드는 없구나) 같은 값이면 무조건 제일 큰 빅맥을 먹어야 했다. (당시엔 빅맥이 젤 크고 푸짐한 거였음) 사실 지금 먹으라고 하면 빅맥은 내 입맛엔 좀 느끼하고 미국 맛이라 안 먹는데, 그때는 정말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빅맥이 무지 맛있었다. 항상 그것을 먹으며 좋아했다.
뭐 이런 얘기를 쓰려던 게 아니고, 까탈스러운 나의 입맛으로 돌아와서... 나는 양파를 먹기는 하는데 생양파는 매우 싫어한다. 냄새에 민감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익힌 양파와 파는 먹는데 생으로는 안 먹는다. 마늘도 마찬가지. 그래서 수제버거집에 가면 버거에 들어가는 양파를 익혀달라고 요청하고, 프랜차이즈에 가면 양파를 빼달라고 부탁한다(익혀줄 정성을 쏟을 수는 없을테니) 그런데 어떤 브랜드는 키오스크에 양파 빼기 옵션이 있고 어떤 브랜드는 없다. 오늘은 일이 바쁜데다 들러야 할 가게들이 있어 이렇게 프랜차이즈 버거가게에 가서 혼자 점심을 때웠는데, 여기가 바로 키오스크에 옵션이 없는 곳이다. 이러면 주문을 해놓고 얼른 카운터로 달려가 '양파 좀 빼주세요' 하고 부탁을 해야 한다. 이렇게 요청을 해도 종종 그대로 양파가 들어있는 채 나올 때도 있는데 그러면 괴로워하며 냅킨을 모아쥐고 양파를 빼내는 얄미운 짓을 해야 한다 흑흑. 하여튼 주문한 버거가 나왔는데 요렇게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나는 본시 뭔가 이런 걸 적어주면 좀 기분이 좋아지는 하찮은 인간이다. 손글씨면 더 감동하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오 그래~ 고마워요' 하는 기분이 든다 :) 보통은 - onion 정도 적혀 있는데. 이렇게 적어놓으니 상술에 잘 휘말리는 인간 같기도 함.
하여튼 오늘의 생각지 않은 아주 작은 즐거움 얘기였음.
그외에는 뭐... 새벽에 너무 기분 안좋은 꿈을 꾸고 잠깐 깼다가 도로 잤다. 꿈에서 막 울고 속상해했다. 쥬인이랑 어디 갔다가 뭔가 쥬인이 나에게 섭섭하게 대해서 다투고 슬퍼하는 꿈이었다. 왜 그러지, 오히려 그저께인가 쥬인이 내가 보내준 별다방 쿠폰으로 커피 마신다며 고맙다며 톡까지 보내왔는데. 그리고는 도로 잠든 후 그 다음 꿈에서 내 꿈 패턴 중 하나가 반복되었다. 그것은 어딘가로 갔다가 배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데(보통은 그 배를 타고 공항까지 이동해야 함), 그 배는 아주 큰 페리 같은 거라서 겉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마치 건물 비상구 계단처럼 어둑어둑한 콘크리트 계단을 계속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보통은 배를 놓친다. 하여튼 쥬인한테는 섭섭해서 울고, 거대하고 황량한 배를 타려고 아둥바둥하느라 피곤하게 자고 괴롭게 일어나 출근을 했다.
아, 출근길의 생각지 않은 기쁨 하나 더. 오늘이 사실 나의 양력 생일이다. 태어나 지금껏 몇차례는 이 양력 생일로 바꿔보려고 무진 노력을 하였으나 일단 주민등록에도 음력생일이 떡하니 박혀 있는데다 우리집은 동생 빼고 부모님과 나 모두 음력 생일이라 이게 참 쉽지 않았다. 눈 딱감고 '이제부턴 11월 3일로 한다!' 해도 잘 안됐다. 그래서 항상 흐지부지, 매년 내 생일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고 심지어 운 좋을 땐 세번이나 축하를 받고(1. 주민증 등에 박혀 있는 날짜-실제로는 음력이지만 모두가 양력이라 생각하는-가 있는 9월에 한번-주로 톡 등에 뜨는 정보를 보고 어머 토끼님 생일축하해요~ 인사를 받게 됨, 2. 실제 음력 생일-보통 10월이 되는데 윤달이 끼면 11월이 된다, 3. 아주 드물지만 내 양력 생일을 아는 사람들로부터는 오늘 11.3) 운 나쁠 때는 정말 한두명 외에는 아무도 내 생일을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
하여튼 나이먹으면서는 생일이 별로 즐겁지 않아서('아아 빼박 늙고 있다' 하는 마음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내고 있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 동생과 올케가 연달아 톡으로 귀여운 선물을 보내오고 축하인사를 보내주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들은 10월 생일때 인사를 안 보냈다. 일부러 '진짜' 생일 축하해주려고 했다고 한다. 엄청 고맙고 반갑긴 했는데, 아니, 10월 생일때도 축하해주고 오늘도 축하해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난 '이 자식들이 바빠서 내 생일 잊었나보다 역시 나이먹으면 자기 인생은 자기 혼자' 라고 생각했건만. 얘들아 어쨌든 고맙다 ㅎㅎ
귀가하면서 화정역 세이브존에 들렀다가 코트를 하나 샀다. 사실은 푸른색 계열의 예쁜 더플코트를 갖고 싶어서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비싼 놈을 발견해서 '아아 이 정도 가격이면 과한데... 이건 백화점 가서 입어보고 결정해야겠다' 하며 고민하고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백화점은 멀고, 또 귀엽고 이쁘지만 사이즈가 어떨지도 모르겠고 나이에 안맞는 거 같아서 고뇌에 빠져서 내일 금요일이니까 퇴근하면서 일산 쪽 백화점까지 나가볼까 하던 차에 지하철에서 내려 역과 연결되는 세이브존에 그냥 가보았다. 여기는 이월상품들을 저렴하게 파는 곳이라 트렌디하고 이쁜 건 별로 없다. 당연히 내가 찍어둔 브랜드도 없다. 그런데 지하에서 할인행사하는 이월상품들 중 딱 눈에 들어오는 코트가 있어서 그것을 입어보고 샀다. 아주 약간 희미한 보랏빛이 도는 다크블루의 코트였는데 땃땃하고 얼굴에도 잘 받았다. 이렇게 되어서 원래 사려던 신상의 귀엽고 트렌디한 코트 대신 이월상품에 그냥 무난한 코트(전자와 스타일 완전 다름. 트렌디 없음 그냥 얌전함ㅠㅠ)를 사게 되었다. 가격이 3분의 1이므로 매우 이득이라고 조삼모사 눈가리고 아웅하고 있음. 그래, 하도 둥실둥실해져서 그 비싼 코트는 가서 입어봤어도 어쩌면 안 맞았을지도 몰라 흑흑... 하여튼 둥실둥실해진 건 맞다. 살을 빼야 내가 좋아하는 (비싼) 겨울 코트 몇벌을 다시 입을 수 있는데 흑흑... 차마 옷정리할때도 못 버리고 옷장 안에 모셔둔 두세 벌이 남아 있다. 다이어트로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흑흑... 어쨌든 집에 와서 새로 산 코트를 탈탈 털어 바람을 쐬면서 보니 옷장 안에 모셔둔 그 예전 코트 중 한 벌과 색깔이 거의 비슷했다! 역시 맘에 드는 색, 얼굴에 받는 색 몇 가지가 정해져 있나봐 흑흑... 사실 빨간색 계열이 있으면 사고 싶었는데 요즘은 그런 화려한 색은 잘 안 나오는 것 같다.
내일이 금요일이라 다행이다. 하루만 잘 버텨보자... 일은 뭐 계속 해결해야 할 문제들 투성이... 바쁘고 피곤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내일을 버티면 주말이니까. 이번 주말엔 반드시 가방을 꾸리기 시작해야 한다. 아아 뿅 하면 가방이 다 꾸려져 있고 뿅 하면 비행기 같은 거 안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으면 좋겠다.
'frag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5 토요일 밤 : 좀 늦었지만 달력, 오렌지 장미, 너무 피곤, 겨우 세면도구만, 에릭의 팩폭 (2) | 2022.11.05 |
---|---|
11.4 금요일 밤 : 겨울! 완전 피곤, 이름이 뭘까, 힘든 꿈, 시간이 부족해 (0) | 2022.11.04 |
11.2 수요일 밤 : 아주 피곤한 나날들, 난 정말 우렁이가 매우 필요함, 에릭과 간만에 (0) | 2022.11.02 |
11.1 화요일 밤 : 이제 두 달, 다시 심도깊은 대화, 제습제 왕창 사야 함, 착잡함 (2) | 2022.11.01 |
10.31 월요일 밤 : 가을, 1+1이 별로 솔깃하지 않음, 역시 바쁘고 피곤한 월요일 (2) | 2022.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