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일요일 밤 : 꿀꿀한 가을비, 쥬인이랑, 새 운동화, 뒤늦게 주워듣는 지식들, 과거에서 온 알마즈 fragments2022. 10. 9. 20:48
하루종일 비가 많이 내렸고 날씨가 아주 싸늘해졌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반소매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잠자리에 들었을 때 추워서 긴 소매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수면양말을 꺼내 신었다. 이런 날씨는 정말 싫다. 가을비가 오면 뼛속까지 시리고 춥고 싸늘하고 쓸쓸하고 어딘가 부족하고 비참한 느낌이 든다. 이런 날씨가 되면 자동으로 아주 오래 전 맨 처음 러시아에 가서 맞았던 10월이 생각나서 그런 것 같다. 난방은 아직 되지 않고, 매일 비가 오고,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음습한 추위에 계속해서 떨고.... 길은 어두워지고, 돈은 없고, 삶은 팍팍하고, 도착한지 한달밖에 되지 않아 말은 늘지 않는 것 같고, 아직 타국 생활에 적응은 안되고, 소련 붕괴 후 옐친 시대에 혼돈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러시아 사람들은 삶이 힘드니까 언제나 먹구름 같은 표정이고, 첫 한달 간 같이 살았던 룸메이트와는 성격이 맞지 않아 헤어지고, 온갖 어려움을 겪고 등등등...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는 가을에 비가 오면 내가 어디에 있든 항상 그때의 그런 음습하고 어둑어둑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게 되었다. 흑흑... 가을엔 역시 하늘이 파랗고 해가 쨍쨍 나야 하는데... 비오는 날은 너무 싫다. 어느 계절이든 비 오는 날씨는 싫지만 특히 이맘때가 싫다.
사진은 귀가하는 택시 창 너머로 찍은 것.
날씨에 대해 투덜거리긴 했지만 오늘은 쥬인과 만나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어제는 쥬인이 일하는 날이라 오늘 만났다. 쥬인이 저녁에 미용실 예약을 해두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만났다. 내가 새 운동화를 사야 해서 나의 영원한 쇼핑 가이드(ㅎㅎ) 쥬인을 앞세워 몇달 전 성공적으로 운동화를 샀던 그 매장이 있는 쇼핑몰에서 만났다. 일찍 만났더니 쇼핑몰 별다방이 한적해서 그만 거기 눌러앉아 차와 빵을 약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그 후 운동화를 사러 갔다. 매장 점원이 친절하게 잘 안내해줘서 전광석화로 새 운동화를 샀다. 지난번에 산 운동화가 매쉬 소재라 이제 추워서 가을과 겨울에 신을 수 있는 가벼운 녀석을 추천해달라고 했고 그리 이쁘진 않지만 착화감이 좋고 가벼운 나이키 윈플로 시리즈의 러닝화를 무사득템했다.
이후엔 서점과 가게를 좀 구경하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쇼핑몰 공기가 너무 답답하여 잠깐 밖으로 나와 찬 바람을 쐬고 새로 문을 열었다는 커다란 투썸에 가서 또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늘은 쥬인에게서 커피의 종류와 내리는 방법에 따른 구분 등 이것저것 각종 유익한 정보를 획득했다.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하신다면,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사실 기본적인 것밖에 모른다. 그런데 쥬인은 제과제빵 뿐만 아니라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신 분이라(ㅎㅎ) 오늘 이것저것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을 계속 물어보았음. 토끼의 호기심천국 :0 커피빵과 물퍽(? 정확하진 않음)이라는 업계 용어도 들어서 너무 재밌었다. 나는 아무래도 잡다한 지식을 주워듣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보통때는 쥬인과 늦게까지 놀지만 오늘은 쥬인이 미용실 예약이 있어서 5시 반쯤 헤어졌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기분이 꿀꿀해지려고 했다. 그러나 택시 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가 어느 채널인지는 모르지만 올드 팝을 계속해서 들려주었고 디제이도 별 말을 안 해서 좋았다. 게다가 그 노래들 전부 다 아는 노래라는 것이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굿바이 옐로 브릭 로드, 알마즈, 투데이 등 진짜 오래된 노래들을 비롯해 심지어 조지 마이클의 Faith까지 나왔다. 순식간에 중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나의 그 시절보다 더 이전에 나온 노래들이긴 하지만 주로 이런 팝은 학교 다닐 때 아침 라디오로 접하곤 했었기 때문에... 몇년 후 러시아 기숙사에서 지낼 때 내가 가끔 알마즈의 후렴을 부르곤 했는데(이 노래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후렴구는 중독성 있어서 ㅋㅋ) 그러면 쥬인이 '토끼가 또 알마즈를 부르네' 하곤 했다. 잊었던 기억이 문득 떠오름.
돌아와서 온몸이 너무 쑤셔서 욕조에 물을 받는 동안 잠깐 자전거를 탔다. 그래서 겨우 15분밖에 못 타긴 했지만 그래도 안 탄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책을 좀 읽었다. 이제 글을 좀 쓰려고 한다. 어제도 열심히 좀 쓰다가 잤다. 내일 대체휴일이라 정말 다행이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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