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중 - 기사도와 샴페인 + about writing2022. 9. 18. 20:57
명절 연휴와 이번 주말 동안 많이 써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붙지 않아 아직 3부에 머물러 있다. 이야기 자체는 좋은 흐름을 타서 풀어나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데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집중하는 것이 좀 힘들다. 옛날에는 일하면서도 매일 퇴근하고 돌아와 쓰곤 했는데 확실히 이젠 체력과 집중력이 모자람 ㅠㅠ 그래도 매일은 아니더라도 주말이나 휴일에 조금씩 써나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자가 위안을 해본다.
아래 발췌한 부분은 지금 쓰는 3부가 아니라 2부 후반. 생략된 앞부분에서는 왜 만나자고 했는지 게냐가 묻자 리다가 한동안 그 이유와 목적을 쭉 늘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둘다 약간 흥분하지만 리다가 설명을 끝냈을 무렵에는 좀 진정이 된 상황이다. 리다는 카페 바텐더에게 물을 추가로 주문한다. 장소는 아직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2층 카페. 발췌문은 접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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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얘기를 늘어놓은 리다가 숨이 차는 듯 잠시 입을 다물더니 바텐더를 불렀다. 페리에와 생수를 각각 한 병씩 더 주문했다. 바텐더는 심심했던 건지 아니면 슬며시 우리 얘기를 엿듣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리다가 손짓을 하자마자 달려왔고 기적적인 속도로 물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는 마개를 열어서 내 앞으로 생수병을 밀어주고는 자기 페리에도 직접 따서 새 얼음 잔에 따랐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병을 집어 들고 물을 절반쯤 마셨다. 찬물이 들어가자 머리가 좀 식었고 그제야 리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마개를 따줬어야 했는데.
“ 괜찮아.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아. 넌 항상 따줬으니까. 의자도 빼주고. 물도 따라주고. 매너 있는 남자라고 친구들한테 자랑했었지. ”
“ 그랬어? ”
“ 그랬어. ”
그녀는 탄산수가 든 잔을 입술로 가져갔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유리잔으로 입을 반쯤 가린 채 복화술 인형처럼 덧붙였다.
“ 난 그런 기사도가 좋았어. 주변에 그런 남자들이 없었으니까. ”
“ 나는, 배웠기 때문일 거야. 학교에서. 여자들이랑 춤을 춰야 하니까. 발레는 옛날 춤이니까. ”
“ 아, 그래. 옛날 것들만 있어서 답답하다고 했었지. ”
나는 리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그런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했을지도 모른다. 극장에 있는 내내 그런 고민을 했으니까. 하지만 리다는 내 춤에 관심이 없었고 어차피 자기 전공이 아니니 이해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피상적인 이야기들, 최소한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질문들, 리다가 궁금해하는 화제들, 그러니까 발레학교나 극장 구내식당의 식단이라든지, 단독 대기실을 받을 수 있는 급수라든지, 평소의 출연료와 해외 투어 출연료의 차이, 무대 의상 피팅, 발레리나들이 쓰는 분장용 화장품과 일반 화장품의 차이 뭐 그런 얘기들 뿐이었다. 춤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리다는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았다. 가느다란 휘파람을 불며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 그날 네가 그랬거든. 완전히 새로운 걸 봤다고. 너무 대단했다고. 옛날 것들만 있어 답답했는데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다고. 그건 아직도 기억나. 넌 그런 말 안 하던 애였으니까. ”
“ 언제? ”
“ 메달 따왔을 때. 넌 콩쿠르랑 상에 대해선 거의 얘기하지 않았어. 온통 그 말만 했지. 완전히 다른 것. 새로운 것. 그 사람은 다르다고. 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 난 샴페인을 준비했었는데 넌 그거 입에 대기도 전에 이미 취해 있었지. ”
그녀는 그때 화를 냈던 것 같다. 아니, 화를 냈다기보다는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나 그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도. 우리 관계는 그 당시 이미 막바지로 치닫는 중이었고 리다는 걸핏하면 성을 내고 토라졌다. 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돌아왔을 때 리다가 우리 집에 왔었던 것 같긴 했다. 아니, 리다네 집에 갔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샴페인은 더더욱 기억나지 않았다.
“ 그때 난 알았어. 네가 떠날 거란 걸. ”
“ 극장을? ”
“ 나를. ”
“ 떠난 쪽은 너였잖아. ”
“ 뭐가 다르다고.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다는 제대로 된 논쟁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차였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몇 달 동안 아르다노프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는 것, 그와 곧 결혼할 거란 얘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화가 났던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 너무 지쳐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배신당하고 걷어차인 남자답게 당연히 화가 났겠지만 무의식적으로 그 기억을 모두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를 떠올리면 회색 안개에 파묻혀 있는 기분이 들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대에 올라갔던 건 기억났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돌아오자 대우가 나아졌고 주역을 맡는 횟수도 늘어났다. 그때 데지레 왕자를 받았고 발란신의 스코틀랜드 심포니도 췄다. 심지어 두어 달 후 감독은 나를 1 솔리스트로 승급시켜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순간들조차 군데군데 회색 안개로 가려져 있었다. 이따금 붉은색과 오렌지색 불꽃처럼 명멸하는 격렬한 감각들이 있었던 건 확실했지만 그건 극장과도, 그리고 리다와도 관련이 없었다.
...
샴페인과 와인 잔이 뒤섞여 있다만, 하여튼 맨 위 사진은 켐핀스키 빌니우스 호텔, 바로 위 사진은 아스토리야 호텔 sns에서 가져옴. 리다가 준비한 샴페인이야 이렇게까지 근사한 스타일이 아니라 그냥 집에서 식탁 위에 차려놓은 거였겠지만. (심지어 게냐는 기억도 못하고 ㅠㅠ 의문의 1패하는 리다, 아니 샴페인...)
리다가 언급하는 '그 사람'은 미샤를 가리킨다. 콩쿠르와 샴페인에 대한 리다의 이야기는 이 글의 배경인 1997년으로부터 3년 전인 1994년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게냐는 당시 마린스키 극장 무용수였고 모종의 국제 콩쿠르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돌아오는데 미샤는 당시 그 콩쿠르의 심사위원이었다. 게냐는 미샤에 대해서라면 발레학교와 극장의 까마득한 선배라는 것, 국제적으로 유명한 무용수이자 안무가, 발레단 감독이라는 것 등의 객관적인 정보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사석에서 친해진 것은 아니고 시상식 이후 뒤풀이 파티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안면을 튼 정도. 1년쯤 후 게냐는 미샤의 발레단으로 이적한다. 리다와 게냐는 1994년 겨울에 헤어졌고 리다는 곧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마지막 문단에서 게냐가 언급하는 '아르다노프'가 현재 리다의 남편으로 노브이 루스키 사업가이다.
그냥 마무리하기엔 좀 아쉬워서, 어쩐지 춤 사진을 하나 넣어야 할 것 같아서 빠질 수 없는 블라지미르 슈클랴로프의 라 바야데르 3막, 망령의 왕국 씬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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