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중 - 연고, 미하일 파르포로비치 about writing2022. 8. 27. 18:17
주말에 조금씩 조금씩 써온 글이 이제 정서적인 클라이막스에 진입했다. 이야기 자체의 리듬도, 쓰는 리듬도 빨라지는 구간이라 열심히 쓰고 있다. 쓰는 즐거움이 매우 큰 구간이다. 3장 중간을 좀 넘어갔으니 이 장을 마무리하면 아마 마지막 장인 4장은 금방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희망을 가져본다)
발췌한 부분은 2장 후반부. 프리발티스카야 호텔 카페에서 이야기를 마친 리다가 화장을 고치면서 게냐에게 립밤 연고를 달라고 한다. 게냐는 연고를 건네주고 나서 미샤에 대해 생각한다.
제목과 발췌문의 미하일 파르포로비치(Михаил Фарфорович)는 미샤의 별명 중 하나이다. 파르포르(Фарфор)는 러시아어로 도자기라는 뜻이다. 러시아 이름은 이름 + 부칭(아버지의 이름에 일정한 어미를 붙인다) + 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친한 사이에서는 이름 혹은 애칭을 부르고 존대하는 경우 이름과 부칭을 같이 부른다.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율리야 이바노브나 이런 식) 미샤의 아버지 이름이 세르게이니까 본래대로라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라고 불러야 하지만 여기서는 발레단 무용수들이 그의 외모적 특성을 따서 파르포르를 변형시켜 미하일 파르포로비치라는 별명을 부르고 있다. 우리 말로 좀 부드럽게 옮기면 도자기 미하일님 정도인가(ㅎㅎ) 도자기 인형처럼 피부가 곱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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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다가 잔을 내려놓고는 핸드백에서 조그만 콤팩트를 꺼냈다. 거울로 얼굴 여기저기를 비춰보더니 냅킨 귀퉁이에 물을 적셔서 입술을 닦았다. 짙은 립스틱이라 제대로 지워지지 않아서 입술 주름 사이에 갈색 얼룩이 무늬처럼 남았다. 그녀는 립스틱을 새로 칠하는 대신 내게 연고를 달라고 했다. 나는 코트 주머니를 뒤져 연고를 꺼내주었다. 사귀기 시작하던 무렵 그녀는 내가 계집애처럼 그런 걸 가지고 다닌다며 놀렸지만 내가 ‘우리 학교는 남자애들도 다 이거 써’ 하며 무대에 올라가는 직업이라 두꺼운 메이크업을 했다가 지우는 것이 일상이고 손발도 걸핏하면 짓무르거나 긁히기 마련이라 여기저기 바를 수 있어 좋다고 설명을 해주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소리 내어 웃으며 키스를 해주었다. 그 이후 그녀는 생각날 때마다 내게 연고를 건네받아 자기 입술에 바르곤 했다. 몇 개 갖다주겠다고 했지만 내 것을 바르는 게 좋다고 했다. 그녀의 파우치에는 언제나 키엘 립밤이 들어 있었지만 그저 장식용일 뿐이었다. 예전에 잘 사는 집안 친구가 해외여행을 다녀오면서 면세점에서 선물로 사다 줬는데 아까워서 바르지도 못하고 간직해 놨던 거라 너무 오래돼서 분명 상했을 게 뻔하다고 했었다. 어쨌든 무용수들이 쓰는 게 몸에는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들의 약초처럼.
“ 아직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구나. ”
“ 춤은 계속 추니까. ”
“ 아, 그렇지. 무용수들은 다 쓴다고 했었지. 그 사람도 이거 써? ”
“ 누구? ”
“ 그 야스민 씨. ”
“ 모르겠는데. 그런 건. ”
“ 그 사람은 키엘을 쓸 거야, 아니면 아벤느. 외국물을 많이 먹었으니까. 옛날엔 프랑스 팬들이 그 사람 전용 향수도 따로 만들어줬다던데. 그래서 지금 겔랑 향수 모델을 하는 건가. 그때 백스테이지에서 보니까 그렇게 클래식한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 그래도 화보는 멋지더라. 미남이야, 그 사람. ”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곁눈으로 나를 살짝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손가락 끝에 연고를 조금 짜서 입술에 천천히 발랐다. 그녀는 내가 미샤에 대한 언급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도, 아마도. 물론 나는 미샤가 뭘 쓰는지 알았다. 그는 나와 똑같은 연고를 썼다. 이따금 키엘이나 아벤느 같은 것도 쓸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주머니나 가방 안쪽에 항상 그 연고를 넣고 다녔다. 나와 같은 학교를 나왔으니까. 나처럼 마린스키, 아니 키로프에서 데뷔했으니까. 그러나 나나 다른 애들만큼 연고를 자주 바르지는 않았다.
그는 거의 언제나 입술이 촉촉했다. 피부도. 특별 피부관리를 받지 않아도 그랬다. 그런 건 타고나는 거라고 분장사가 말했다. 발레단 여자애들은 가끔 그를 미하일 파르포로비치(Михаил Фарфорович)라고 불렀다. 자기들보다 더 피부가 하얗고 매끄럽다고 부러워했다. 주름도 없고 반점 따위도 없다고. 그 애들의 말이 맞았다. 웃을 때 눈가에 살짝 잡히는 가느다란 잔주름 외엔 나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도자기 같은 피부. 하지만 그에게는 흉터들이 있었다. 목덜미부터 가슴을 가로지르는 기다랗고 하얀 흉터, 오른쪽 허벅지에 가로로 그어진 역시 하얗고 가느다란 흉터. 그 두 개는 거의 쌍둥이처럼 보였는데 거의 피부색에 가까울 만큼 하얗게 바래 있어서 바짝 다가가서 보지 않으면 눈에 거의 띄지 않았다. 손목에도 그런 흔적이 여럿 있었다. 미샤는 그것들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굳이 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하얗고 눈에 띄지 않는, 그러니까 안전한 흉터들. 그러나 왼쪽 골반 바로 위에, 훨씬 크고 생생한 흉터가 하나 있는데 그것만은 눈에 띄는 것도,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도 싫어했다. 탈색된 벽돌색과 잿빛이 뒤섞여 작은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돌출된 상처였다. 아마도 실밥을 잘못 뽑았거나 아물 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레이저로 흔적을 제거하기에는 너무 큰 흉터였다. 나는 그 상처에 대해 미샤에게 묻지 않았다. 목덜미와 허벅지, 손목의 흔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수용소에서 생긴 상처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 수용소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회상록이나 인터뷰는 읽었다. 당시 기사들도 몇 개 찾아 읽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그때 일에 대해 입을 여는 적이 별로 없었다. 발레학교 시절 한때 나의 지도 교사였던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는 미샤가 ‘패셔너블한 수용소 훈장’ 덕분에 서방에서 더 잘 먹히는 아이템이 됐다고 뼈 있는 농담을 했다. 하지만 세레브랴코프는 물론 그 흉터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리다가 내게 연고를 돌려주었다. 냅킨 끝으로 손가락에 남은 끈적한 연고를 닦아내고 이제 김이 거의 다 빠졌을 페리에를 한 모금 마셨다. 립스틱 얼룩 위로 연고 자국이 남았다.
키엘이나 아벤느는 이제 흔하게 사서 쓸 수 있는 립밤이지만 이 글의 시간적 배경은 1990년대 후반이라 소련 붕괴 후 온갖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던 리다에게는 키엘 립밤이 지금과는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글에서 언급되는 미샤의 수용소 경험은 1980년대 초라서 이들에게는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후이다. 울리얀 세레브랴코프는 미샤의 키로프 발레단 무용수 시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선배 무용수이다.
글에 어울리는 좀 촌스럽고 호랑이연고 비슷하게 생기거나 아무런 라벨도 달려 있지 않은 약초 배합 연고 같은 사진들을 찾고 싶었는데 게으름의 결과 그냥 예쁜 천연 수제립밤 사진들 몇 장으로 때움. 물론 게냐랑 미샤가 가지고 다니는 건 이렇게 깨끗하고 이쁜 요즘 립밤은 아님. 약초가 배합된 바셀린 연고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아마 이런 느낌일 것 같음 ㅎㅎ 케이스는 이런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꾹꾹 눌러짜는 연고 튜브 같은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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