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 수요일 : 예기치 않은 땜빵, 완전 녹초, 내일을 잘... fragments2022. 8. 10. 21:19
아침 출근길, 파란 하늘이 반가워서. 이때만 해도 오늘 얼마나 정신없어질지 상상도 못했지.
폭우 때문에 간밤에도 걱정하다 불편하게 잤다. 그리고 아침 일찍, 7시 반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소관 시설의 누수 현황을 체크하고 당직 직원들을 격려해주고 이번주의 큰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 pc를 켜고 파우치를 꺼내 토끼에서 인간으로 둔갑을 시작하려던 순간(아이라인 그리고 립스틱 바르려는 순간) 임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전 함께 차 마신 그 각별한 선배이자 임원인 분이다. 슈퍼갑님이 주재하는 중요한 회의가 모처에서 있는데 본인이 참석을 하셔야 하는데 폭우 때문에 한강 다리가 통제되어 그 다리 한가운데 꼼짝달싹 못하고 갇혀 계신다는 것이었다. 일찍 가시려고 일부러 차를 가지고 나오셨다가 낭패에 빠졌다고 한다(흑흑 왜 그러셨어요) 심지어 회의는 아침 8시 반에 시작하는 거였다. 그러니 나보고 대참을 하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냥 참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회사의 주요사항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임원과 상급 간부, 헤드쿼터 소관부서장만 논의한 거라 당연히 나에겐 사전 공유 전혀 없던 자료)
'아니 그 자리는 아무리 봐도 제가 갈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쟁쟁한 슈퍼갑님과 다른 회사 임원들이 우글바글 모이는 자리인데 어떻게 해요!' 하고 당황했으나, 1. 그나마도 임원을 대신할만한 유일한 인물인 서울 근무 상급 간부(본부장)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 2. 현재 거리 상 갈 수 있는 사람은 나 뿐(다행히 내가 사무실에 이미 출근해 있음) 3. 이 회의의 안건에 대해 그나마 이해도가 있어서 설명을 하고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것도 나 뿐 이라는 것이다 아아아아악! 그도 그럴 것이 본사는 서울이 아니므로 서울에 있는 간부가 몇명 없고, 너무 이른 아침이라 출근해 있는 사람도 나 뿐이었고, 이 회의의 안건 자체가 좀 피곤하고 복잡한 것인데 기존에 이런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사람도 나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순진무구하게도 임원께서 전화 받자마자 '지금 어디?' 하고 물어보셨을 때 곧이곧대로 '사무실에 막 도착했습니다~' 라고 말해버렸기 때문에 '앗, 출근 중이라 시간을 맞출 수 없습니다' 라는 임기응변도 할수 없었다! 아악 나는 왜 이렇게 정직하고 성실하단 말이냐! 임원분도 너무 미안하고 걱정이 되었는지 '토끼야 토끼야 아마 내가 금방 이 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테니 네가 가서 자리만 채워주면 내가 곧 도착할거야. 그러면 발표는 내가 할 수 있을 거야~' 하고 도저히 말도 안되는 희망사항을 늘어놓으심 ㅋㅋ 이 분은 후배에게 일을 떠넘기는 분이 아니므로 진심 그렇게 믿고 또 바라며 얘기하신 거였다. 그러나 온갖 최악의 상황들을 상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향의 나는 그것은 그야말로 희망사항일 뿐 내가 끝까지 다 땜빵해야 한다고 애초부터 예상을 했다(뭐 당연히 이 예상이 맞았다 흐흐흑)
어쩔수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알겠다고 하고 전화로 2~3분 가량 그 발표자료의 주요내용에 대해 휘리릭 설명을 들었다. 회의자료라도 메일로 달라고, 출력해 가겠다고 했더니 시간 없으니 빨리 가라고 하신다, 폰으로 보라고 ㅠㅠ 그래서 나는 정신없이 아이라인과 눈썹 그리기를 30초만에 해치워 최소한의 인간 둔갑을 하고, 후닥닥 사무실에서 뛰쳐나와 지하철을 타러 달려갔다. 택시는 분명 막힐테니... '으앙, 저 오늘 누수 대처랑 행사 준비 때문에 슬리퍼 샌들 신었다고요, 옷도 막 입었다고요' 하고 항의해보았지만 소용없는 현실이었다. 실제로 앞이 다 뚫린 크록스 샌들에 진짜 캐주얼한 린넨 원피스 한장 차림이었다(원피스도 원피스 나름이라 이것은 그야말로 진짜 편한 옷) 그나마도 사무실에 놓고 다니는 검정 카디건이 하나 있어 그것을 걸치고 누가 봐도 '중요한 회의 절대 참석 안 함' 룩으로 달려나가 지하철 안에서 폰으로 받은 메일의 첨부파일을 열어 벼락공부를 하며... 중간중간 모르겠거나 밑자료가 필요한 건 임원께 톡으로 물어봐가며...
하여튼 내려서도 마구 뛰어서 나는 늦지 않고 회의장에 도착을 했다. 갔더니 역시나 역시나 양복 입으신 지긋하신 분들이 주욱 앉아 있고, 슈퍼갑님도 위풍당당 가운데 앉아 있고... 내가 뭐 실제 연차든 업무 경력이든 적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올 군번은 당연히 아닌지라 정말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뭐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행히 큰 책상이라 슬리퍼 샌들 신은 발을 숨길 수 있었고 '마스크 써서 다행이다' 란 생각을 첨으로 했다. 왜냐면 마스크를 벗으면 누가 봐도 토끼 한마리라서. 그나마 발표 순서가 중간이라 앞 회사들이 발표하는 동안에도 드문드문 더 내용을 체크하고, 내 생각으로는 그냥저냥 무난하게 발표를 넘겼다. 그런데 각 발표를 마친 후 슈퍼갑님과 갑님들이 하필 우리 회사에 대해서만 좀 까다로운 사항들에 대해 묻고 잘못된 의견을 피력하시는 것이었음. 아니 여러분 저한테 왜 이러시나요 저는 땜빵이라고요 흑흑. 그래도 쫄지는 않고 이럭저럭 답변을 드렸다. 어휴...
그리하여 어찌됐든 땜빵으로 참석한 회의를 마치고 갑님과 인사를 나눈 후 회의장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카페에 잠깐 들어갔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서. 긴장해서라기보다는(사실 의외로 긴장은 별로 안 했다. 내용이야 금방 이해를 했던 거고, 아마 슈퍼갑, 갑님들과 연관된 일들을 예전에 실무자로서 많이 해봐서 그런듯) 아침에 빈속에 너무 뛰고 빡센 일정이었어서 진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홍차 한 잔, 조그만 빵 한 조각을 시켜서 두어모금 마시고 빵 한두입 먹은 후 아직도 꼼짝 못하고 차들 사이에 갇혀 계시는 임원께 전화를 드려 회의 내용을 보고드리고, 본사에서 동동 구르고 있던 이 안건의 소관 부서장(이분도 절친한 선배임)에게도 전화를 해주었다. 그러고 나니 정말 너무너무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기만 했다. 하지만 일이 많으니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다.
이 모든 일이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져서 사무실에 복귀하니 11시 반이었음. 그러나 이것이 원체 중요한 회의였던 탓에 오후 내내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말로 설명하는 것과는 또 다름) 공유해주느라 또 진이 빠졌다. 사실 이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고, 우리 부서의 제일 중요한 행사는 내일이라 그거 준비하고 상황 체크하느라 또 정신없었다. 제발 내일 비가 많이 안 와야 하는데 다시 비구름이 올라온다니 걱정이다...
빡세게 일하고 녹초가 되어 퇴근했다. 다리가 너무 아프다. 원래는 이번주 중 내일이 제일 빡세고 어렵고 힘든 날인데, 오늘 이렇게 예기치 않은 땜빵 역할을 하느라 이미 녹초가 되어버렸음. 그래도 내일을 잘 넘기면... 금요일에도 또 빡센 면접심사가 있지롱! (으아아아아앙) 기운을 내자 기운을 내자... 아아아아아 내 땜빵해줄 우렁이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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