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문 너머, 가지 않았던 곳 2022 vilnius2022. 6. 28. 22:51
새벽의 문 아치 아래를 통과해서 나오니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부지런한 관광객, 정석의 여행자였다면 아마 첫날 새벽의 문에서 시작했을 것이고 여행서에 나온 사원들과 명소를 모두 가봤을 것이다. 그런데 근 8일 가량 빌니우스에서, 그것도 구시가지에서만 놀면서도 새벽의 문은 떠나기 이틀 전 그것도 '아 그래도 거긴 제대로 보긴 해야겠지' 하는 의무감으로 갔고 별 감명이 없었다. 문을 통과해 나오자 완전히 다른 전경이 나타났는데 이때 너무 덥고 힘이 들고 카메라가 무겁고 종탑 전망대 후유증이 뒤늦게 엄습해 이 동네를 가보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니 못내 아쉽다.
트라카이 안 간 건 별로 아쉽지 않은데 이쪽 동네 안가본 건 어쩐지 아쉽다. 왜냐하면, 이 풍경이 너무나 미묘하게 낯이 익어서 오히려 친근했고 어디든 걸어가면 그냥 쉽게 '도시' 라는 생각이 들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의 도시란 최첨단의, 문명의, 메가폴리스의 뭐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는 길을 잃든, 혹은 버스에서 그냥 내린 곳이든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도시이다. 그건 유럽 여러 나라들에 산재되어 각기 비슷하면서도 자기들만의 아기자기한 개성을 숨기고 있는 구시가지와는 다르다. 나에게 구시가지는 구시가지이지 '도시', 혹은 город가 아니다. 그리고 이 도시란 잘 개발되어 매끈해진 신시가지도 아니다.
이쪽을 바라보니 어쩐지 블라디보스톡의 스베틀란스카야 거리 가는 방향이 떠올랐다. 색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너무 쨍하고 더워서 역광이 들었던 이 날 찍었던 이 사진 몇 장을 보니 마치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몇몇 계정에 올라오곤 하는 소련 도시들의 옛날 사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진 세장은 폰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로 찍어서 과다노출이나 폰 사진 특유의 화사함이 없다) 아마도 이 나라 이 도시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들으면 기분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방인이고 타자니까.
나는 돌아서서 저 여인처럼 이 문을 다시 통과해 사원들과 관광객들과 매장들이 있는 구시가지 중심지로 돌아갔다. 가지 않은 길, 가지 않은 도시와 장소를 남겨두고.
그러니 저 동네를 조금이라도 산책이라도 해보고 아무 가게나 카페라도 그냥 들러봤으면 좋았을걸. 조금 더, 그리고 조금 더 가서 구시가지 자체를 벗어나고 어떤 가장자리나 뒷길로 가봤어야 하는데. 이렇게 해서 다시 가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된다.
... 그런데 막상 가보면 여전히 구시가지 테두리 안에서 그냥 비슷비슷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ㅎㅎ 딱 저 반경 안에서 떠올렸던 건 베를린과 헬싱키에서 버스 잘못 타서 내렸던 때나 비엔나에서 프라하로 가는 버스 타러 갔다가 시간이 남아 근처의 다른 실내터미널에 들어가고 주변을 걷던 때의 느낌들이다. 물론 똑같은 풍경들은 아니다. 어쩌면 그건 역이나 터미널, 정거장 주변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장소성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떤 색깔. 냄새. 공기. 정작 역이 어느 쪽에 있는지도 결국 파악하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식일지도 모른다. 그저 단 한 순간, 저 짧은 반경 안에서의 기분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상과 현실은 일치하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다.
그건 그렇고 두번째 사진은 아무리 봐도 블라디보스톡 생각이 자꾸 난다. 왜 그런지 정확히는 모르겠음. (뻬쩨르 생각은 나지 않음!) 블라디보스톡은 언제 다시 갈 수 있게 될까. 내가 좋아했던 카페와 식당과 가게들은 아직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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