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must have been love, 물이 흘러가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 about writing2023. 2. 12. 19:04
작년 마지막 날 끝낸 글은 일년 동안 썼다. 이 글은 그 앞에 썼던 두 개의 단편과 마찬가지로 90년대 후반, 비오고 눈내리는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당시 내가 페테르부르크의 기숙사 방에서 듣곤 했던 노래들을 들었다. 특히 이 소설을 쓰면서는 세 곡의 노래가 메인 테마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노래, Roxette의 It must have been love이다. 이 노래는 영화 프리티 우먼의 주제곡이었고 실은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보다 몇년은 더 일찍 나왔지만 당시 내가 지낼 때도 뮤비 채널에서 종종 나왔고 라디오에서도 자주 나왔다. 그전부터 좋아했던 노래이기도 했고, 이 소설에서는 단순히 노래 자체뿐만 아니라 몇몇 이유로 주요 테마 곡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노래가 언급된 소설 후반부 몇 페이지를 아래 접어둔다. 그 전에...
이 글의 중반부 일부는 전에 발췌한 적이 있다. moonage daydream :: 쓰는 중 : 백야, 지붕 위에서 햇볕 쬐기, 간이 계단 + (tistory.com
맨 앞 부분도 예전에 발췌했던 내용의 맨 뒤와 겹친다. moonage daydream :: 쓰는 중 : 한밤의 네바 강변을 걷는 게냐, 하와이가 아님 + (tistory.com
소설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노래에 대한 아래 이야기는 4장 말미에 나온다. 주인공 게냐는 1~3장에서는 옛 여자친구 리다와 재회하고, 4장에서는 발레단 스튜디오로 가서 연습을 하다가 퇴근해 홀로 네바 강변을 지나서 궁전광장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나온다. 그리고 지나가는 낡은 자동차를 불러세워 택시를 잡는다. (당시에는 마피아가 운영하는 정식 택시들보다는 이렇게 길거리에 지나가는 일반 자동차를 불러서 흥정을 하고 택시를 타곤 했다) 소설은 아직 화폐개혁(물가 상승이 너무 심해서 98년에 천루블을 일루블로 바꿨다) 전이라 8천, 1만 등의 숫자가 오간다. 택시 기사는 라디오를 틀고 거기서 이 노래가 나온다. 노래와 영화 모두 소설과 연관이 있어서 영화 장면이 나오는 공식 뮤직비디오 링크를 아래 걸어둔다.
글은 아래 접어둔다.
* 이 글을 절대로 무단 전재, 복제, 배포, 인용하지 말아주세요 *
정류장에는 비를 피하려고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이쪽에는 버스가 몇 대 서지 않고 운행 간격도 긴 편인데 마침 운 좋게 트롤리버스가 도착했다. 이 버스를 타면 네프스키 대로 쪽으로 나간다. 알렉산드린스키 공원 앞에서 내리면 운하를 따라 걸어가거나 마을버스를 탈 수도 있다. 나는 판탄카의 그 집을 눈을 감고서도 찾아갈 수 있다. 한두 시간 후면 미샤가 돌아오겠지. 그는 내일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바빴고 해외 출장이 많았으니까 스케줄 조정 따윈 아무것도 아니긴 하다. 볼쇼이와의 급한 미팅이 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는 언제나 그를 찾았다. 볼쇼이에서도, 스타니슬라프스키 극장에서도, 크레믈린에서도. 두 시에 도착해 볼쇼이로 갔다면 오후 늦은 미팅이었을 것이다. 그런 급한 미팅을 소집했다면, 미샤가 당일에 런던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면 최소한 시장이나 문화부 고위직쯤은 끼어 있었을 것이다. 아마 만찬도 같이 해야 했겠지. 자고 오는 게 나았을 텐데. 메트로폴이든 새로 생긴 외국 호텔이든, 아니, 모스크바 강가의 호화스런 별장과 아파트, 요새, 그 어디든. 제대로 된 궁전들. 리다의 어머니는 아르다노프가 지어준 별장을 궁전이라 부른다지만 어쨌든 모스크바 마피아가 훨씬 윗길이다.
머릿속이 멍멍했고 속이 울렁거렸다. 미샤가 오늘 돌아오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트롤리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떠났다.
낡은 지굴리 한 대가 천천히 굴러왔다. 아마도 코앞에서 버스를 놓치고 비에 쫄딱 젖고 있는 사람들을 노린 것 같았다. 어딘지 안나를 좀 닮은 동양계 여자애 두 명이 지굴리를 멈춰 세우고 흥정을 했다. 리고프스키 대로 쪽으로 가는 모양이었는데 우리 말이 서툴렀다. 잠시 자기들끼리 모국어로 뭐라고 의논을 했는데 아마도 택시비가 너무 비싼데 어떻게 할지, 혹은 저 험상궂은 기사를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여자애들이 이 시간에 나라시를 잡을 때의 걱정거리는 비슷비슷하기 마련이니까. 보온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될 방수 점퍼, 허술한 베레모와 백팩을 보니 아마도 유학생들인 것 같았다. 리다라면 이 아가씨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금세 알아맞히겠지. 여자애들이 좀처럼 결정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기사가 욕지거리를 하며 차를 출발시키려고 했다. 나는 앞으로 나가서 지굴리 앞창문을 두들겼다.
“ 엘리자로프스카야, 8천. ”
“ 1만 2천은 줘야지. ”
“ 1만 2천 같은 소리. 메르세데스라도 되나? 8천이면 떡을 치는데. ”
“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입이 왜 이렇게 더러워. 1만에 타든가, 다른 차 알아보시든가. ”
나는 여자애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 1만. 리고프스키 쪽으로 돌아서 쟤들 내려주고 가는 걸로 하죠. ”
“ 대단한 왕자님 납셨네. ”
“ 싫으면 말고. ”
기사는 다시 욕설을 몇 마디 내뱉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밤의 1만 루블이란 거절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나는 뒷문을 열고 여자애들에게 타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가는 방향이니까 중간에 내려주겠다고 했다. 여자들은 주저했다. 기사와 내가 한패라고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빗줄기가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버스가 올 기색은 전혀 없었으므로 결국 용기를 낸 듯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며 차에 탔다.
기사는 40대에서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기름때로 찌든 양복 재킷을 걸치고 얼룩덜룩한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생각지 않은 벌이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이제 욕을 하지 않았고 빙글빙글 웃으며 묻지도 않았는데 막심이라면서 자기 이름까지 말해주고는 ‘그래, 아가씨들은 리고프스키 어디쯤 내려주면 되나?’하고 물었다. 좀 더 말을 잘 알아듣는 쪽인 듯한 긴 머리 여자애가 즉시 외워놓은 문장을 읊듯 ‘대로 진입하자마자 첫번째 횡단보도에서 내려주세요’라고 대답했다.
“ 그쪽엔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도로변인데. ”
“ 아니, 괜찮아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막심은 ‘친구들 좋지. 나도 옛날엔 친구 많았는데’로 시작해 그 나이대 남자들 특유의 횡설수설 웅얼거리는 어조로 자기 옛날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뒷좌석 여자애들은 아마 거의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조금 듣다가 지겨워진 나는 라디오를 켜달라고 했다. 막심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며 투덜댔다.
“ 새파란 애송이가 나보고 아주 길을 돌아서 가라, 아가씨들을 태워라, 심지어 라디오까지 켜라고 하네. 말세야 말세. 이게 다 나라 팔아먹은 고르바초프 새끼 때문이야. 예에, 당연히 틀어드려야지요, 1만을 내기로 하셨으니까요. 요즘은 돈 있는 사람이 왕인데. 젠장, 도통 적응이 안 된다니까. 라디오 틀어주는 값으로 천쯤은 더 달라고 해야 하는데 내가 옛날 사람이라 남세스러워서 그걸 못하네. 에브로파 플류스? 자네 같은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걸 듣지? 양키들 노래? ”
“ 상관없어요. 아무거나. ”
막심이 라디오를 틀었다. 에브로파 플류스였다. 영화 ‘프리티 우먼’의 주제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Lay a whisper on my pillow
Leave the winter on the ground
I wake up lonely, this air of silence
In the bedroom and all around.
나는 오래전에 리다와 함께 이 영화를 봤다. 더빙이 엉망인 복사판 비디오 테이프로, 그때는 아직 아브토보에서 엄마와 바냐와 함께 살 때였다. 바냐는 자기를 끼워주지 않는다고 몹시 화를 냈었다. 비디오 플레이어도 절반은 자기 몫이고 테이프를 복사해온 것도 자기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리다는 단호했다. ‘넌 미성년자잖아. 창녀가 나오는 영화는 안돼’라고 딱 잘라 말하고는 바냐를 쫓아냈다. 바냐는 집 앞으로만 나가도 창녀가 우글거리는데 기껏 할리우드 영화가 안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투덜댔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얘기였지만 어쨌든 우리는 비디오를 구실로 컴컴한 방에 딱 붙어 앉아 애정행각을 벌이려던 참이었으므로 골치 아픈 동생을 끼워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리다가 영화에 푹 빠져버리는 바람에 결국 키스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화가 너무 재미있고 줄리아 로버츠가 너무 예쁘다고, 사운드트랙도 너무 좋다고 종알거렸다. 결국 그녀는 바냐를 시켜서 복사본 테이프를 하나 더 구해오게 했고 프리모르스카야 지하철역 근처 좌판에서 이 노래가 들어 있는 록시트의 테이프도 샀다. 리다는 일본에 가게 되면 가라오케에 가서 꼭 이 노래를 부르겠다면서 가사를 열심히 외웠다. 노트에 일일이 적어가며 외우더니 마치 구술시험이라도 보는 것처럼 내게 자기가 외는 가사가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까지 부탁했다. 하지만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다. 그냥 시를 읊듯이 줄줄이 소리 내어 외울 뿐이었다. 그녀는 ‘우리는 둘 다 음치니까’라고 변명했다. 뭐 절반쯤 맞았다. 리다는 무슨 노래건 간에 음정과 박자가 엉망이었으니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직접 노래하기보다는 잘 부르는 노래를 듣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편이 훨씬 좋았다.
It must have been love,
but it's over now
It must have been good.
but I lost it somehow
It must have been love,
but it's over now
From the moment we touched,
till the time had run out
정작 내게 이 노래를 불러준 건 미샤였다. 아니, 내게 불러준 건 아니다. 그저 둘이 함께 있었던 것뿐이다. 그때 우리는 지붕 위에 누워 햇볕을 쬐고 있었다. 6월이었고 늦은 저녁까지 햇살이 따스했다.
Make believing, we're together
That I'm sheltered by your heart
But in and outside, I turn to water
Like a teardrop in your palm
And it's a hard winter's day,
I dream away
그가 왜 그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겨울 노래인데. 하긴 그는 때와 장소에 구애받는 적이 별로 없었고 우리 노래든 팝이든 가리지 않았다. 게다가 노래 실력이 상당히 좋았다. 방송이나 음악계 지인들이 초청한 갈라 콘서트에서 한두 곡씩 부르기도 했다. 음반 녹음 제의도 여러 번 들어왔었다. 심지어 소니뮤직에서도. 갈런드는 작년에 그가 블록버스터 영화 촬영과 주제곡 녹음 제안이 세트로 들어온 것을 거절했을 때 상심한 나머지 이런 기회를 걷어차다니 마에스트로도 어쩔 수 없는 러시아 영혼이 분명하다, 자기는 이런 건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푸념했다. 미샤는 이건 영혼의 문제가 아니고 철저히 육체적인 문제라고, 그런 영화를 찍으려면 적어도 몇 달은 L.A에 가 있어야 하는데 자기 몸이 하나라서 불가능하다고 대꾸했다. 그 대답에 갈런드는 러시아 영혼에 대한 철학적 절망에서 잽싸게 벗어났고 그럼 노래만이라도 녹음하라고 강권했다. 미샤는 녹음 부스에 들어가는 게 갇히는 기분이라 싫다고 딱 잘랐다. 하지만 며칠 후 예세닌과 마야코프스키의 시를 녹음해달라는 어느 출판사의 요청은 흔쾌히 받아들여 허름한 라디오 방송국 녹음 부스에 온종일 들어가 있었으므로 갈런드는 역시 러시아 영혼이 문제라고 재차 절망하게 되었다. 미샤는 ‘그건 경우가 달라. 시잖아’라고 대꾸했지만 갈런드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나는 어째선지 소니에서 페테르부르크로 건너와 녹음을 하자고 했다면 미샤가 받아들였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미샤는 자기를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좀 약한 구석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뉴욕 보그만 봐도 그렇다. 바쁜 와중에도 모레 봉기 광장과 판탄카 쪽에서 화보를 찍기로 했으니까.
It must have been love,
but it's over now
It's where the water flows,
It's where the wind blows.
그때 미샤는 얄팍한 흰색 리넨 바지 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지붕 위에 사지를 쭉 뻗고 누워 볕을 쬐고 있었다. 이따금 그는 정말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해가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고 붉은색과 회색 지붕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기 시작하면서 어디선가 습하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미샤가 노래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카디건을 건네주었다. 백야의 변덕스러운 소나기를 몰고 올 것 같은 바람이었고 그는 봄 막바지에 폐렴으로 고생했었으니까. 나는 그가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약물 때문에 폐 어딘가에 손상을 입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안나가 말해줬던 것 같다. 내가 콩쿠르에서 미샤와 만났던 이야기를 열띠게 쏟아냈을 때. 안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다리 망가졌다는 건 헛소문일걸. 고문을 받은 건 맞는데 그냥 주사 조금 맞은 거였댔어. 그렇게 막 때리고 부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대. 폐 때문에 무대에 길게 안 올라가는 거랬어’ 다리라도 부러진 양 엄살을 피우며 비싸게 군다는 듯한 그 말투는 묘하게 세레브랴코프와 닮아 있었다. 아마 정말 그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옮겨준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나보다 오랫동안 세레브랴코프에게서 배웠으니까. 무엇이 진실인지는 나도 모른다. 미샤는 절대로,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수용소 얘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아는 건 그가 폐렴에서 회복된지 두 달도 되지 않았고 바람이 불든 소나기가 쏟아지든 그냥 그렇게 계속 지붕 위에 누워있고도 남을 사람이란 사실 뿐이었다. 미샤는 내 카디건을 걸쳤지만 단추를 잠그지는 않았다. 옷을 건네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키스를 했다. 그는 항상 그랬다. 노래를 자기 마음대로 잘라내고 마음에 드는 부분만 불렀고 무엇이든 고마울 때는 키스를 했다. 미안할 때는, 사과를 한 후에 키스를 했다. 하긴 그가 나에게 뭔가 직접적으로 사과할 일을 했던 적은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 앞에서 그가 주워왔던 고양이를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키라에게 맡겨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인사 대신 키스를 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그 지붕 위에서 자주 일광욕을 했고 여름이 지난 후에도 운하의 야경을 보러 올라가곤 했다. 하지만 거기서 사랑을 나눈 적은 없었다. 어쨌든 지붕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옆 건물 어디서든 다른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거실에 달린 커다란 테라스를 통해 지붕으로 나갔고 내려올 때는 침실 쪽의 발코니로 통하는 간이 계단을 이용했다. 둘 다 미샤의 집을 통해서만 오르내릴 수 있었다. 미샤는 가끔 지붕 쪽 문을 잠그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내가 열쇠를 한 벌씩 더 가졌다. 건물 공용 출입문은 옥상 반대편에 있었으니 아래층 사람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다른 건물에서 지붕을 타고 내려오는 도둑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맨 처음 지붕에서 침실로 곧장 내려왔을 때 나는 미샤가 그 계단을 따로 설치한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미샤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있었다고 했다. ‘그거랑 트로이츠키 사원 쿠폴. 그 두 개 때문에 이 집을 고른 건데’라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가 언제나처럼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전망과 비밀 사다리 때문에 판탄카의 고급 주택을 사는 건 아르다노프가 궁전 같은 다차를 짓는 것만큼이나 쉬울 테니까.
나는 키스를 하는 대신 지붕을 가로질러 침실 발코니로 내려왔다. 미샤는 별말도 없이 따라왔다. 간이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세찬 바람이 불어와서 내 카디건이 그의 어깨 위에서 검은 날개처럼 펄럭였다. 그때 나는 발코니에 선 채 그를 올려다보며 단추를 잠그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했던 것 같다. 폐렴에 대해서도. 미샤는 웃기만 했다. 침실로 들어와 커튼을 친 후에야 나는 키스를 돌려줄 수 있었고 그때 미샤가 한 박자 늦은 대꾸를 했다.
“ 어차피 벗을 건데 뭐하러. ”
나는 다시 한번 폐렴에 대해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웃었다. 두 눈에 파란 불꽃처럼 광채가 돌았다. 폐렴과 열쇠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나를 놀려주고 싶은지 모델처럼 어깨를 젖히며 카디건을 벗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에겐 고양이뿐만 아니라 그런 공작새 같은 면도 있었다. 약간 부아가 치민 내가 두 눈과 입술에 키스하며 그 장난스러운 모델 흉내를 막았을 때 미샤는 더 이상 나를 놀리지 않았다. 키스와 포옹이 이어지는 동안 내 뺨과 목덜미에 자기 얼굴을 마주 대고 가볍게 비비며 아주 잠깐, 그 노래의 후렴구를 다시 불렀을 뿐이었다.
It must have been love,
but it's over now
It's where the water flows,
It's where the wind blows.
나는 그에게 여름에 겨울 노래를 부르는 것도 모자라 이런 순간에 이미 끝나버린 사랑에 대해 흥얼거리다니 너무하지 않느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나도, 그도 그런 감정을 믿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그저 그 마지막 소절이 마음에 들어서 되풀이하는 것뿐이었으니까. 물이 흘러가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는 언제나 바람과 구름이 나오는 노래들을 좋아했으니까.
....
에브로파 플류스는 당시 우리가 가끔 듣던 라디오 채널이다. 지금도 있다. 여기서는 팝이 많이 나왔다. 비슷한 계열의 엘도라디오는 좀더 올드 팝에 조용한 계열이었다. 쥬인은 요즘도 엘도 라디오 앱을 깔아서 노래를 듣고 가끔 내게도 들려주는데 저 옛날 나왔던 곡들과 크게 변화가 없다.
사진은 모두 @vkus.kakao
위 사진은 뭔가 백야 시즌에 옥상 지붕에서 일광욕하다가 저렇게 술도 한잔 마시고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막상 미샤는 술을 못 마신다는 게 함정...
....
It must have been love와 Roxette의 다른 곡들에 대해서는 사실 예전에 별도 포스팅으로 올린 적이 있다. 링크는 여기 :
moonage daydream :: Roxette 몇 곡 + 사랑과 추억을 담아, 옛 이야기 조금 (tistory.com)
이 노래의 원래 버전 링크 두개를 아래 달아둔다. 맨첨 페르 게슬레가 이 노래를 작곡했을 때 후반부의 And it's a hard winter's day,I dream away 가사는 사실 it's the hard Christmas day 였고 이건 원래 크리스마스 노래였는데, 영화 주제곡 요청을 받고 이 노래를 떠올려서 가사를 조금 수정했다고 한다. 아래 노래들은 모두 크리스마스로 나온다. 메인 보컬 마리가 부른 노래, 그리고 맨처음 페르가 작곡한 후 자기가 불러보며 데모로 녹음한 버전. 사실 나는 페르의 데모도 무척 좋아한다. (데모는 뮤비가 당연히 없어서 노래만 나옴)
... (사족) 마지막 부분의 가사이자 소설 속에서 게냐가 조금 의역해 말하는 '물이 흘러가는 곳,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을 이 소설 제목으로 붙일까 끝까지 망설였는데 사실 전체 내용에 딱 들어맞지는 않아서 다른 제목을 붙였다. 저 문구가 시적이긴 한데, 좀 아쉽긴 하다. 낙착된 제목은 완전히 반대로 좀 우울하고 일그러진 느낌이라... 지금도 좀 다른 제목이 생각나면 좋겠긴 하다.
'about writ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삭제된 파편들 : 키스, 트렌치코트, 티백, 보위와 또다른 것들 (0) | 2023.03.05 |
---|---|
순간온수기, 여기 + (14) | 2023.02.26 |
일년, 다 쓴 직후 (0) | 2022.12.31 |
쓰는 중 : 한밤의 네바 강변을 걷는 게냐, 하와이가 아님 + (0) | 2022.12.10 |
쓰는 중 : 백야, 지붕 위에서 햇볕 쬐기, 간이 계단 + (2) | 2022.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