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중 : 키라와 갈런드, 마에스트로와 여왕님 about writing2022. 11. 12. 22:21
조금씩 계속 쓰고는 있는데 원래 여행가기 전에 마무리하려 했지만 오늘도 짐을 꾸리느라 이제야 컴 앞에 앉은 터라 아무래도 다 끝내지 못하고 비행기를 탈 것 같다 ㅠㅠ 나는 왜 이렇게 느려졌을까... 주말에밖에 못 쓰는데 기껏 그래봤자 하루 한페이지나 한페이지 반이 전부... ㅜㅜ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인데 못 끝내고 가려니 너무 아쉽다. 이 글을 끝내기 위해 노트북을 챙겨가야 하나 싶지만 사실 여행가면 그날그날의 메모 남기는 것도 벅차서 글을 집중해 쓸 시간이 오히려 없고, 또 겨울옷이 들어가 가방도 여유가 없으니 그냥 내일까지 쓸 수 있는만큼만 쓰고 미루려고 한다.
게냐와 그의 발레단 동료들, 그리고 주변인물들에 대한 이야기 계속. 바로 지난번에 올렸던 근위대장 갈런드와 일린의 뉴욕 아파트 에피소드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스튜디오에 남아 연습하던 게냐와 야근 중인 갈런드, 그리고 키라와 미샤, 아주 조금 지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발췌문은 아래 접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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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콜릿을 먹으며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갈런드는 반주 테이프를 앞으로 다시 감아놓고 피아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서류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런 걸 보면 꼭 무용수 같았다. 무용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군대 경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도 갈런드는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언제 퇴근하려나 궁금해하고 있는데 그가 불쑥 공항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 이 시간에 공항은 왜요? 급한 출장이라도? ”
“ 아니, 마에스트로를 데리러. 키라 모이세예브나한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좀 망설이더라고. 너도 끼면 갈 것 같아서. ”
나를 포함한 발레단 남자 무용수들은 모두 갈런드가 키라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는데, 그의 능력과 선량한 성품을 인정하더라도 역시 ‘우리 키라 누님’이 아깝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쩌다 갈런드가 키라와 언쟁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라고 쿡쿡 웃곤 했다. 키라는 운영국장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갈런드가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큘러하게!’따위의 영어로 무대 미술 작업에 간섭할 때면 ‘우리 말로 얘기하라고요!’ 하며 버럭 화를 냈다. 갈런드는 그렇게 러시아어에 유창하면서도 키라와 얘기를 할 때는 단어를 까먹거나 말을 무척 더듬었고 자기도 모르게 영어가 계속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나는 갈런드의 이 드문 순진한 모습에 웃었을 거고 ‘그럼 같이 가죠’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귀에 들어온 건 키라가 아니라 마에스트로라는 단어였다.
“ 미샤는 내일 오기로 되어 있지 않았어요? ”
“ 원래는 그랬지. 근데 볼쇼이랑 급한 미팅이 잡혀서 오늘 두 시에 도착하는 모스크바 비행기로 바꿨어. 미팅이야 잘 마쳤고, 그쪽에선 자고 가라고 붙잡았는데 마에스트로는 그 동네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냥 밤 비행기로 돌아오기로 했어. 간단하게 저녁 먹고 공항으로 가면 시간 딱 맞을 거야, 열 시 도착이거든. ”
키라는 갈런드를 딱히 맘에 들어 한 적이 없고 낯을 가리는 타입이니 내가 끼면 같이 갈 거라는 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 갈런드가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자기 혼자서라도 미샤를 데리러 갈 것이다. 키라는 미샤가 운전대를 잡으면 질색을 했다. 옛날에 가브릴로프에서 미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숲 멀리 나갔다가 나무를 들이받고 죽을 뻔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기 직업이 화가인지 무대 미술가인지, 그것도 아니면 미샤의 운전기사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다른 사람이 미샤를 태워다 주면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미샤는 이 도시에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마피아가 모는 택시를 겁 없이 잡아타고, 혹은 그냥 걸어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우리 발레단 사람들은 다들 어떻게든 그를 돌봐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너도나도 운전대를 잡아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잠자리를 봐주고 차를 우려다 주고 스카프와 코트를 받아주려고 몰려들었다. 지나는 그런 건 좀 타고나는 것 같다고, 아주 옛날부터 주변 사람들 모두 그랬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곧 나가봐야 한다고, 미샤가 일찍 돌아올 줄 몰랐다고 둘러댔다. 갈런드는 눈에 띄게 상심한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에게 지나이다가 언제 돌아오는지 물었다.
“ 아, 우리 팅커벨 여왕님은 모레 오후 비행기야. 아침에 통화했는데 파리는 이제 지겹다면서 어찌나 보르쉬 타령을 하시던지. ”
“ 지나는 제가 데리러 갈 수 있어요. ”
“ 마에스트로 대신 여왕님을 모시겠다 이거지. 현명한 판단이야. ”
때로 나는 갈런드의 농담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건 미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냥 입을 다물었다.
...
사진은, 아무 것도 안 올리면 섭섭하니까 그냥 대충 올렸음. 둘다 2017년 10월에 페테르부르크 갔을 때 찍었다. 엄청 날씨 안 좋던 때라 여행 가 있던 내내 비가 왔었다. 이 글이 11월초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까 날씨는 좀 비슷하구나 싶어서 올려봄. 맨 위는 모이카 운하. 바로 위는 풀코보 공항에서 모스크바행 아에로플롯 비행기에서 이륙 기다리며 찍음. 이때도 비가 왔다. 비행기 사진을 올린 이유는 미샤가 모스크바에서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고 이 글에서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기 때문에 ㅎㅎㅎ
마에스트로는 갈런드가 미샤를 부르는 별명(이전 발췌문에 언급했지만 미샤는 이렇게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팅커벨도 갈런드가 지나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그러나 정작 사모하는 키라에게는 말도 못 놓고 부칭까지 꼬박꼬박 붙여 부르고 있음.
마지막에 언급되는 팅커벨 여왕님 지나는 이 글이 전개되는 시기에 파리 출장을 한 달 동안 가 있다. 이 글 이틀 후를 배경으로 하는 '눈의 여왕' 에서 게냐는 정말로 지나를 픽업하러 풀코보 공항에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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