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금요일 밤 : 이제 주말, 말보다는 글, 울렁증, 포용 fragments2022. 3. 11. 22:00
아주 지난했던 일주일을 마치고 이제야 주말을 맞이한다. 중간에 하루 빨간 날이라 쉬었지만 그날 제대로 쉴 수 있었던 사람이 어떤 진영이든 관계없이 몇이나 될까 싶다.
오늘 아주아주 바쁜 하루였다. 체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작년 사업 실적에 대해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질문을 받는 아주 피곤한 일정이 있었다. 나는 진행 같은 건 잘하는 편이지만 사실 이렇게 점수를 받기 위해 나서서 발표하는 것에는 상당히 울렁증이 있고 힘이 들고 겉보기에 비해 훨씬 긴장을 한다. 윗분이나 울부서 직원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 어떻게든 잘 숨기고 있다...라기보다는 많은 연습과 준비를 하고 엄청난 가면 모드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준비 과정에서 엄청 심장이 답답하고 벌렁벌렁하고 머리가 멍멍하고 아프고 쾅쾅 울려대고 등등 온갖 불안의 증후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발현된다ㅠㅠ 작년 이맘때 이 프리젠테이션을 하는데 그날 워낙 위급한 업무들이 뻥뻥 터진 상태라 정신적으로 좀 피폐해진 상황이긴 했지만 하여튼 줌으로 얘기하다가 좀 유체이탈되면서 스스로도 '아 내가 지금 버벅거리고 있구나' 라는 자각에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사회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실제로 이렇게 망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만 하여튼 작년에는 망쳤고 그나마 나중에 문서에 대한 질의응답을 받아 거기 답변하는 2차 과정에서 만회해서 큰 실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나와서 아예 발표 원고 노트를 따로 썼고 빈 회의실에 들어가 수차례 읽어보며 주어진 시간을 맞추고 좀더 이해가 잘되는 표현들로 고쳤다. 우스운 것은 '10분 동안 얘기하세요' 라고 했을 때 그냥 말로 하면 시간을 딱 맞추기가 좀 어렵지만 원고를 쓰면 글의 흐름에 따라 얼추 '이 정도면 10분 안으로 들어오겠군' 이라는 감이 있다. (글의 분량을 물리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글 자체의 흐름으로 잰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써본 첫 원고를 소리내어 읽어보니 9분이 나왔다. 말의 속도와 리듬, 추임새, 중간중간의 휴지부를 감안해 다시 읽으니 10분이었다. 역시 말보다는 글이 편하고 감각도 더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는 거지. 근데 사실 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은 전반적으로 좋고 때로는 너무 예민해서 탈인 편이긴 하다.
하여튼 이렇게 사회초년생처럼(ㅜㅜ) 프리젠테이션 원고를 수차례 소리내어 읽고 고치며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그 사이사이 많은 일들을 처리했다. 발표는 그냥저냥 무난하게 마쳤는데 중간에 줌 마이크에 문제가 있어 좀 힘이 들었다. 줌은 여러 모로 대면과는 좀 다른 측면으로 피곤하다. 이후에도 남은 일들을 처리하고 직원들의 담당 사업들의 진행상황을 체크해주고 재택근무를 교대로 진행하고 있는 윗분께도 전화해서 몇가지 일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정보들을 전달해 드렸다. 그러다가 결국 평소보다 좀 늦게 퇴근했다.
오늘의 유일한 낙은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지하철에 자리가 있었고 저녁엔 늦게 퇴근해서 사람이 많았는데도 자리가 금방 나서 앉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뒤 수식어들이 일찍 출근 늦게 퇴근이라 이 작은 행복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지난 설 연휴 때 부모님이 집에 와 계셨고 정치 얘기를 하다가 내가 무심코 '옛날엔 막상 어렸는지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이제와서 생각하니 DJ가 참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네요. 그런 사람이 나오기 참 힘든 것이었어요' 라고 하자 엄마가 '그 사람은 용서를 했지. 그것이 정말 대단하지' 라고 말씀하셨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그리고 어제와 오늘 그 말이 문득문득 다시 떠오른다. 용서를 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진심이든 전략이든. 양쪽 다 쉽지 않다. 이미 판은 바뀌었고 일어난 일들은 받아들여야 하니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내 맘에 안 들고 미워도 새 정부가 정말 삽질 안했으면 좋겠고, '진짜 다 말아먹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괜찮다. 남의 말도 들을 줄 안다'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분쟁 대신 좀 포용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 사람들 죽어나가고 소모적인 보복이 이어지는 것에 이제 진저리가 난다. 0.7%가 의미하는 건 거의 절반만큼의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는 거고 그걸 적으로 남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같이 가야 하는 사람들, 결국은 포용하고 최소한 그 의견에 귀를 기울여는 봐야 하는 사람들로 대우해주면 좋겠다. 그런데 사실 촛불정부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닥 잘한 게 없고 갈수록 온갖 타락과 위선의 행태를 보여주었으니 이런 소망을 품는 것이 너무 나이브한 것 같다. 그래도 소망은 할 수 있잖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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