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금요일 밤 : 춥고 바쁘고 피곤하고, 일린과 우로니 fragments2026. 3. 6. 20:35

비가 내린 후 날씨가 추워졌다. 음습한데다 바람까지 불고. 카디건, 기모바지, 코트 등 껴입고 나가면서 '오후에 또 더워지는 거 아니야?' 했는데 안 껴입었으면 엄청 떨었을 뻔했다.
바쁘게 일했다. 오후 늦게 반반차를 내고 진료를 받으러 갔다. 회사에서도 멀고 집에서는 더 멀어서 항상 이 날이면 녹초가 되어 귀가한다. 그래도 이제 주말이니 다행이다. 다음주는 엄청 바쁘고 피곤한 일주일이 될 전망이다. 주말에 푹 쉬고 에너지를 충전해야지.
일린과 아까 잠깐 통화를 했는데 좀 풀이 죽어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우로니가 고장났어' 라고 한다. 우로니는... 자기 집 공기청정기에 붙여준 이름이다. 전에 나에게서 우렁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엄밀히 말하면 우렁각시이지만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집사, 램프요정 지니 같은 존재 ㅋㅋ) 자기 공기청정기에 '우로니'(우렁이 발음이 안돼서)란 이름을 붙이겠다고 했었다. 청소하기 너무 싫고 귀찮을 때 공기청정기를 틀어놓고 마치 청소가 다 된 것처럼 자신을 기만하는데 효과가 좋다고 해서 날 벙찌게 만들었는데.. 정말로 우로니라고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을줄이야!
'우로니 왜 고장났어?' 하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른다고 한다. '네가 너무 부려먹어서 그래. 병원에 보내라' 라고 하자 일린이 '그런가봐. 우로니를 너무 착취했나봐' 하고 한숨을 쉬었다. '우로니를 병원에 데려갈 시간이 없다, 바빠서 주말에만 데려갈 수 있는데 의사(=수리 기사)는 주말에 안 온다' 라고 함. 근데 왜 이렇게 웃픈거야...
'그러니까 주말 (전)남친한테 잘해줬으면 걔가 주중에 하루 집에 와서 우로니 수리기사를 부를 수 있었잖아' 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차인지 몇달 안된 애를 더 짠하게 하면 안될것 같아 차마 그 얘긴 못함. (지난 11월 초에 프라하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주말 남친이 있었는데 연말이 되기 전에 헤어지고 그 전남친은 얼마 전에 짐도 다 빼고 고양이마저 데리고 가버렸다고 함. 멋있는 것과 차이는 건 별개인가보다) '나도 1인 가정이라 가전제품 고장나면 그런 거 힘들어' 라고 위로를 해주었음. 사실 이런 거 너무 이입됨. 게다가 나는 그래도 빨리빨리의 나라에 살고 있으니 나은 편이지만 유럽은 분명 수리 요청해도 엄청 오래 걸릴 거야... 모르겠네, 암스테르담은 어떨지... 어쩐지 실용적인 도시일 거 같기도 한다.
일린이 그렇게 풀죽어하는 말투를 듣는 게 처음이라 웃프고 좀 불쌍해서 '야 그냥 그 우로니 수리는 미뤄두고 새 우로니를 사버려! 너 잘 벌잖아. 디렉터가 그쯤은 할 수 있잖아, 비서랑 개인 사무실도 있으면서!' 하고 말하자 '하지만 그 우로니는 아주 충성스러웠단 말이야' 라고 얼척없는 소리를 함. 아니 너 뭐야, T 중의 T 아니었어? N은 더더욱 아니었잖아! 충성스러운 우로니니까 안식년을 좀 주고 새 피를 수혈하란 말이야!
근데 이 통화를 마치고 나니 갑자기 '아, 토요일 아침이면 또 청소를 해야 해. 나야말로 우렁이가 좀 와줘야 되는데. 나도 공기청정기 돌려놓고 자기 기만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함. 그런데 지난 설에 만난 쥬인이 그거야말로 진짜 눈가리고 아웅이라면서 내가 물걸레청소포로 대충 청소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거 그냥 먼지를 잠깐 가라앉히는거지 효과 없어, 진공청소기 돌리거나 비질을 해야 해' 라고 해서 절망했었던 생각이 나고... 흑흑 역시 진짜 우렁이가 필요해.
하여튼 일린에게 '그냥 오후 휴가를 쓰고 수리기사를 불러라' 하고 말해주긴 했다. 그런데 역시나 '오늘 오후에 불러도 아무리 빨라도 다음주 금요일에나 우로니가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라는 대답. 뭐야 짠해. 그래도 나보다 잘 나가는 앤데 내가 더 불쌍한데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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