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수요일 밤 : 송구영신, 2025년과 작별, 새해 전야의 필립 말로 fragments2025. 12. 31. 21:53

한 해의 마지막 날 밤이 되면 항상 차분한 기분으로 일 년을 돌아보고 송구영신의 마음을 가져보려 한다. 또다른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정결함. 그래서 매년 12월 31일 밤 메모의 제목은 보통 송구영신이라고 붙인다. 구식이긴 하지만 사실 이 표현만큼 잘 맞는 게 없다.
오늘은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었다. 가급적 12월 31일은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려는 것도 위에서 적은 이유와 비슷하다. 작년엔 일이 너무 많아서 마지막 날 밤까지 빡세게 일하고 탈탈 털려서 돌아왔었지만 오늘은 쉬었다. 새벽까지 글을 쓰고 많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다. 휴식을 취하며 2025년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올해는 정말 힘든 한 해였다. 사적인 일보다는 회사 때문에 힘들었다. 특히 최고임원이 너무 폭주를 하고 강압적으로 굴고 온갖 과도하고 무리한 일들을 지시하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정말 포악하게 굴어서 여름에는 심적으로 아주 큰 위기를 맞아서 휴직을 할 결심까지 했었는데 여행을 다녀온 후 스스로를 다잡고 어떻게든 버텨왔다. 추석을 앞두고도 이분 때문에 너무 어렵고 힘들었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 내년에는 좀더 나아지기를.
올해는 하반기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했다. 그건 작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글쓰기가 멈춘 것과 최고임원의 부임, 이분의 폭주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긴 한데, 그래도 11월에 다시 프라하에 다녀온 후 좀 다른 방식의 글을 시작해서 12월은 거의 매일 밤 꾸준히 쓰면서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나아진 것 같다. 글을 다시 쓰면서 일과 앞날과 마음의 어려움을 많이 잊을 수 있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 글쓰기는 일종의 중독이자 환각제에 가깝다. 좋은 면이든 나쁜 면이든.
오랜만에 친구들도 다시 만났다. 그것도 감사한 일이다.
오늘의 메모는 짧게 마친다. 12시 종 치는 걸 보고 잠들겠지. 어쩌면 글을 쓰다가 잠깐 텔레비전이나 유튜브를 틀어서 볼 지도 모르겠다. 오늘 구해온 샴페인인 양 하는 스파클링 와인은 추천해주는 걸 샀는데 상당히 맛있어서 기분이 좋다 :) 혼자 새해 전야를 보내는 건 혼자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는 것보다 더 쓸쓸한데, 오늘은 좀전에 일린이 전화를 해주고 에릭과 라스에게서도 연락이 와서 비록 시차는 있지만 그래도 쓸쓸한 마음이 많이 가셨다. 그래서 샴페인도 두 잔 따랐음 ㅎㅎㅎ 일린에게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소설 중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어봤는데 '새해 전야에 필립 말로라니' 하고 웃더니 '나는 <빅 슬립>'이라고 말해서 나에게 큰 점수를 따셨음. 오, <빅 슬립>이라니. 혹시 이 녀석 영화를 좋아하나, 그래서 <빅 슬립>인가? (영화 빅 슬립에는 험프리 보가트가 나온다) 나도 말로 소설들 중에선 <빅 슬립>을 특히 좋아한다고 대답한 후 '그래도 <하이 윈도>의 말로를 제일 좋아해' 라고 대꾸하니 자기는 <하이 윈도>는 안 읽었다고, 읽어보겠다고 한다. 흠, 이래서 나의 새해 첫 독서는 챈들러 다시 읽기가 될 것 같다 :)
사진들 몇 장과 함께 2025년 마지막 날 밤의 메모를 마친다. 안녕,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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