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0 화요일 밤 : 조그만 꽃, 피곤, 도블라토프 전파 중, 폭력적인 걸 좋아하는 토끼인가 fragments2025. 12. 30. 20:44

라이스 플라워가 많이 시들어서 아쉽다. 이렇게 작고 동글동글한 꽃들-안개꽃, 아스틸베, 미스티블루(리모늄) 등도 좋아하긴 하는데 이런 꽃들은 금방 말라버리고 자잘하게 떨어져버리는 게 항상 좀 아깝다.
어제 당일치기 왕복 출장으로 매우 피곤했다. 7시간은 넘게 잤는데도 온몸이 너무 쑤셨다. 오늘은 바쁘게 일했고 오후에 외근도 다녀왔다. 피곤해선지 왼쪽 턱 위에 작은 뾰루지가 나서 사흘째 없어지지 않는다. 내일 휴가를 냈으니 쉬면 나아지기를 바라며...
일린이 내가 추천해준 도블라토프의 <여행가방>을 다 읽었다고,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고 감상을 나누었다.
수록된 8편 중 뭐가 제일 재미있었느냐고 물어보니 제일 첫번째 단편인 <핀란드산 양말>과 후반부에 수록된 <겨울 모자>라고 한다. <핀란드산 양말>에는 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 네프스키 거리의 엘리세예프스키 상점과 아스토리야 호텔이 언급되는데, 일린의 어머니가 이 단편을 함께 읽다가 옛날에 소련 시절 젊었을 때 딱 한번 레닌그라드에 가서 엘리세예프스키 상점에 구경을 갔으나 비싸서 아무 것도 사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한다. (이번에 왔을 때 일린에게서 러시아-당시로 치면 소련 출신인 어머니 얘기를 좀 들었다. 이분은 70년대에 잠시 망명 붐이 일었을 때 핀란드를 거쳐서 나오셨다고 한다. 그러니 정말 도블라토프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오신 듯함. 연령대를 생각하면 정말 그럴 것 같다) 그러고는 '아스토리야는 기억나. 우리 같이 차 마셨던 데 아닌가, 그 롤렉스씨랑' 이라고 말했다(내가 아스토리야 로툰다로 얘들을 데려가 같이 차를 한번 마신 적이 있음. 롤렉스씨는 료샤. 이 별명은 에릭과 일린이 붙여준 건데 료샤는 이 사실을 모름. 알게 되면 발끈하며 지금은 다른-더 좋은- 시계 찬다고 하겠지) 아니 근데 혹시 자기가 아는 곳이 나와서 그 단편이 제일 재밌었던 건가? ㅎㅎㅎ
<겨울 모자>는 읽고 있자니 남자들의 심리가 너무 잘 느껴져서 재미있었다고 한다. 음, 그렇구나 :) (이 단편에선 눈길에서 술취한 남자들이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고, 또 사촌 형제끼리 여자들을 두고 찌질하게 굴기도 한다. 남자들의 허세도 굉장히 잘 드러나고)
그러고는 얘가 나에게도 '너는 뭘 제일 재미있게 읽었느냐'고 물어봐서 나는 <근사한 더블버튼 수트>랑 <장교 벨트>라고 했더니(사실 8편 모두 훌륭해서 읽을 때 기분에 따라 달라지긴 한다만)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닌가.
나 : 왜 놀라?
일린 : 그거 납땜 벨트로 머리 후려치는 거. 그게 제일 재미있었다니, 하하하. 너 의외다.
나 : 그거 엄청 재밌지 않아?
일린 : 재밌긴 했는데, 너 폭력적인 거 좋아하는구나! 상상도 못했네.
나 : 왜? 너 전에 나보고 내가 쓰는 글이면 엄청 어둡고 등장인물 다 다크하고 비참해질 거 같다며.
일린 : 그거랑 좀 다른데. 이건 납땜 벨트로 사람 머리 후려치고 피 뚝뚝...
나 : 나 레이먼드 챈들러 좋아해. 추리소설도 엄청 읽었는데, 옛날에.
일린 : 아... 나도 좋아하는데. 챈들러는.
그래서 그는 좀 납득을 하고(납득한 거 맞아?) 나한테 도블라토프 다른 소설도 추천해달라고 했다. ‘<여행가방> 스타일이 좋아 아니면 좀 다크한 게 좋아?' 했더니 '네가 재미있게 읽은 거'라고 해서 그럼 <우리들의>를 읽어라, <여행가방>이랑 좀 통한다고 말해주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장교 벨트' 읽으면서 추릴린이 납땜 벨트로 주인공 머리를 내리갈긴 게 큰 충격이었나보다. 겨우 그런 걸 가지고, ㅎㅎㅎ 아니면 내가 엄청 온순해 보였나??? 그런데 챈들러를 좋아한다고? 이 친구야말로 의외임. 그런 소설 같은 건 별로 안 읽었을 것 같은데. 낼 통화하면 챈들러 장편들 중 뭘 제일 좋아하냐고 물어봐야지. 보통은 <안녕 내 사랑> 아니면 <기나긴 이별>이던데. 기나긴 이별을 좋아한다고 하면 나중에 혹시라도 다시 보게 되면 김릿 마시러 가자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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