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3 화요일 밤 : 미리 개봉한 선물, 오십보 백보인가, 사실 녹초가 된 날 fragments2025. 12. 23. 21:22

내일 저녁까지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하루 먼저 뜯어버린 크리스마스 선물. 오늘 몸도 피곤하고 지하철에 사람도 많은데 자리도 안 나고 심지어 평소보다 가방도 하나 더 든데다 구두까지 신어서 무척 힘들었고 종일 비가 주룩주룩 와서 화정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이건 꼭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해야지!' 하고 며칠 동안 아끼고 있던 어드밴트 캘린더를 개봉해버림. (받고 나서 열흘 가까이 버틴 듯) 이렇게 하나만 뜯으면 됐을 것을 역시나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전부 다 뜯어버렸음.
선물 얘기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아래 접어둔다.
이 어드밴트 캘린더는 얼마 전에 일린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것이다. 돌아가기 전날, 일요일에 에릭과 라스가 부산에서 돌아오기 전에 일린이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다고-이번 크리스마스 때는 코펜하겐에 돌아가 가족들과 새해까지 같이 보낸다고 했다- 숙소 바로 근처 백화점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내가 같이 가 주었다. 얘는 엄마도 있고 여동생도 있으니 어쩐지 여자 선물은 내가 잘 봐 줄 것 같다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함(사실 이런 거 잘 못 고르는 인간임) 백화점에도 정말 오랜만에 갔다. 모든 것을 온라인 쇼핑으로 해결한지 오래됐고 원래부터 사람많은 백화점에 잘 가지 못하는 편이라. 간만에 갔는데 일요일치고는 그래도 오전에 가서인지 동네를 고려해볼 때 손님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스운 일은 둘다 서로의 선물을 몰래 샀던 것이다. 짐을 가져다놓으러 잠깐 숙소에 들렀는데 유독 저건 부피가 커서 캐리어에 넣고 가려면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는 업무 출장에 이골이 난 남자들이 보통 그렇듯 기내 캐리어 하나와 노트북 가방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코트는 입고 감. 그거랑 접는 패딩이 외투 전부. 나같은 맥시멀리스트로는 불가능한 일임. 난 여행 갈땐 28인치 트렁크에 기내 캐리어까지 가져가는데 ㅠㅠ 하긴 출장 갈때는 24인치 캐리어 하나만 가져간다만 얘처럼은 안된다. 뭐 남자니까 화장품 파우치에 세면 파우치가 줄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나처럼 온갖 의약품을 다 챙기지도 않을 거고-이건 성별이랑 관계없나- 옷가지 따위도 적겠지...라고 정당화해본다만. 근데 수트를 두벌이나 챙겼던데 그걸 어떻게 그 기내 캐리어에 다 넣을 수 있는지 난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된다. 어떻게 그러지? 재킷만 두 개인가? 기내 캐리어치곤 좀 커보이긴 했다만. (앗, 혹시 24인치인데 애가 크니까 내 눈에 기내 캐리어로 보인 거 아니야???) 하여튼 '이건 네 거야' 하고 줘서 깜짝 놀람.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빡세게 일하고 성탄절도 독립적인 여성으로 혼자 씩씩하게 보낼 거라고 해서 그랬나 ㅠㅠ (쥬인 만날 건데!) 그런데 나도 얘가 남동생 선물 사러 갔을 때(엄마와 여동생 건 화장품이랑 스카프를 내가 같이 봐주긴 했다만 내가 남자용품은 잘 모르니) 얘랑 라스 선물을 살짝 샀었다. 에릭 건 상당히 구하기 힘든 도록과 미술 관련 굿즈를 미리 구해두었고 라스는 예쁜 비니를 샀다. 까만 비니 말고 좀 컬러풀하고 예쁜 걸로 ㅎㅎ

그래서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나서 같이 웃고는, 상자를 꺼내보고 좋아하다가(이 록시땅 어드밴트 캘린더는 작년에 나왔던 것은 내가 스스로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기까지 했고 이번에도 살까말까 고민했던 거라서 더 깜짝 놀람) '나 이거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안 뜯고 버틸 거야' 라고 선언해서 일린을 벙찌게 만들었다. '그거 하루에 하나씩 뜯어보는 거 아니야?' 라고 너무나 상식적인 질문을 해서 '맞아, 그건 그런데... 나는 이런 거 하루에 하나씩 절대로 못 뜯어. 한번 뜯으면 한방에 다 뜯어버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브까지 기다렸다가 한방에 뜯을래' 라고 말했고 일린도 '아 그럼 나도 이브까지 안 뜯어볼까' 라고 죽이 맞아서 결국 서로 선물 개봉을 안하고 24일 밤까지 기다리기로 했다만... 사실 난 상자까지는 봤으므로 이게 뭔지는 알고 있는데 일린은 포장지도 안 뜯어봤으니 뭔지 모른다는 걸 생각해보면 걔가 밑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 어쩐지 이것도 쫌 조삼모사 같아.
그런데 결국 오늘 뜯어버림 흐흑... 나 오늘 넘 힘들었어, 어차피 내일 밤에 뜯으나 오늘 뜯으나. 내일은 오늘만큼 힘들지 않을 거 아니야. 맨 위 사진처럼 하나만 뜯은 것도 당연히 아니고 상자 전체 다 뜯음. (사진을 잘 보면 그림 여기저기에 번호가 적혀 있는데 그 부분을 하루에 하나씩 뜯어서 내용물을 꺼내게 되어 있음) 그래서 갑자기 크리스마스 선물로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 록시땅은 좋아, 하나하나 쏠쏠하고 다 내가 좋아하는 제품들만 들어 있고.
그래도 밀려드는 죄책감에 일린에게 좀전에 '미안한데 못참고 뜯어버렸다, 너무 좋아 고마워'라고 전화를 했더니 이 녀석이 '아, 나도 뜯었는데. 난 집에 가자마자 뜯었어. 너무 맘에 들어. 고마워'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 녀석. 그래놓고 시치미 떼고 말 안하고, 내가 뜯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장단 맞추려 한 거야? 곧이곧대로 난 안 뜯고 기다렸는데. 하지만 결국 나도 하루 먼저 뜯었으니 오십보 백보임. 왜 말 안했냐고 물어보니 '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뜯는다 했는데 나는 못 참았다고 실망할까봐' 라고 얼척없는 소리를 하심. 내가 따지려는데 이분께서 '타이 정말 예쁘더라. 잘 어울리고. 뜯은 다음날이랑 어제도 매고 출근했어.'라고 대답해서 그래도 기분이 좋아짐. 눈 색깔에 맞는 세련된 걸 찾으려고 좀 머리가 아팠었음. 옷을 잘 입는 사람에게 타이를 선물하는 건 사실 도박이긴 한데. 라스 비니는 금방 골랐는데... 아니 그렇다고 라스가 옷을 못입는다는 건 아니고... 캐주얼과 정장의 차이랄까 :)
하여튼 서로 고마워하고 좋아하다가, 갑자기 또 좀 부아가 치밀어서 '야 근데 분명히 이브까지 기다리기로 했는데 왜 심지어 집에 가자마자 뜯었어, 약속은 어디 갔니!' 하고 추궁하자(그래봤자 나도 먼저 뜯었지만 그래도 나는 솔직하게 실토했잖아!) 이 조삼모사씨가 '그걸 어떻게 참아. 가방 푸는데 자꾸 눈에 띄잖아. 오늘까지 참은 네가 대단하다' 라고 해서 할말이 없어짐. 그럼 왜 진작에 말 안했냐고 재차 물어보니 '내가 뜯었다고 하면 너도 뜯어버릴 거 같아서 얘기하고 싶은 거 꾹 참았어. 거봐 이렇게 혼내잖아' 라고 하신다. 그러고는 '그래도 네가 오늘 뜯어서 다행이다. 타이 얘기 너무 하고 싶었거든'이라고 카운터 펀치를 날림. 아니 얘는 말로 이기기가 좀 힘들어. 분명히 영어로 얘기해야 돼서 그런 거라 믿어보며ㅠㅠ 어쨌든 너무 고맙다, 조삼모사 친구야. 근데 이렇게 쭉 적어놓고 나니까 실제 조삼모사는 걔가 아니라 나인 것 같아.
.. 라스는 그 자리에서 비니를 뜯어보고는 화요일에 공항 가기 전에 날 봤을 때 그걸 쓰고 있었다. (역시 귀여워 ㅎㅎ) 에릭은 귀국 비행기에서 도록을 탐독하고 굿즈 에코백을 메고 라스랑 교외에 놀러갔다고 한다.
적다 보니 오늘의 메모는 결국 <미리 뜯어버린 크리스마스 선물, 오십보 백보, 조삼모사>인 건가. 하여튼 이 캘린더를 펼친 모습은 아래 사진. 전부 뜯어버리고 내용물을 꺼내놓은 사진도 같이.

쓰다보니 전부 선물 얘기가 됐다만. 오늘 무지 바쁜 날이었다. 새벽 출근해 빡세게 일했고 전체 회의랑 워크숍도 하고...오늘이 셋째 날인데도 몸이 너무 아파서 결국 진통제도 중간에 주워먹었다. 날씨 때문인가봐. 제발 이 비가 그치기를. 내일 새벽 출근할때 길이 얼어있지 않기를. 새벽에 꿈에 시달리다 2시도 안되어 깨어나서 뒤척이다 심지어 약도 더 먹고 잤었어. 그래서 이렇게 힘든지도 몰라. 이렇게 힘든 날이 아니었으면 저 캘린더 안 뜯고 버텼을 거야. 내일 하루 버티면 성탄절이고 쥬인도 보니까 기운을 내서... 곧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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