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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4. 22:42

스핑크스 아래에서 만나 russia2013. 10. 4. 22:42

 

 

이전에도 여러번 썼듯 페테르부르크는 작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언제나 환영과 영감을 주는 도시였다. 절대군주의 의지로 늪지대를 갈아엎어 돌을 쌓아 만든 인공의 도시이자 악마의 도시, 언젠가는 홍수에 떠밀려 사라져버릴 운명의 도시라는 이미지는 세월이 흐를 수록 더욱 견고해졌다. 그나마 소련 시절 다시 모스크바가 수도가 되면서 서구적/유럽적/인위적 발전의 도시라는 이미지는 많이 약화됐지만(지금은 모스크바가 훨씬 대도시인데다 혼잡하고 자본과 물류가 집중되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 문학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 풍경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저 스핑크스와 마주칠 때도 그런 느낌이 강렬하게 되살아난다. 어떤 장소가 정말로 환상적이 되는 순간은 바로 이럴 때이다. 일상과 혼재하는 저 이질감. 물론 다른 나라 다른 도시들에서도 그런 장면들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가 근원적으로 갖는 저 문학적이고 아련하고 이계적인 특성 때문에 그 환상적인 느낌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건 내가 러시아 쪽을 전공했으며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여전히 깊은 애정과 문학적 동경을 품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사진은 바로 우니베르시쩻 강변이다. 우니베르시쩻은 노어로 '대학'이란 뜻. 네프스키를 돌아 에르미타주가 있는 궁전광장을 끼고 나와 궁전 교각을 타고 네바 강을 건너면 바실리예프스키 섬이 나온다. ('죄와 벌'에도 등장하는 장소이다) 여기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이 있다. 그래서 대학 강변이다. 푸틴도 이 대학 법학과를 나왔다. 나도 옛날에 잠깐 수업 들으러 다녔던 곳이다.

드보르쪼보이 다리(궁전 다리)와 레이쩨난트 슈미트 다리 사이의 강변에 저 스핑크스 조각상이 두 개 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러시아 제국 시절 들여와 떡하니 장식해놓은 것이다. 문화재 강탈(-_-) 어쨌든 아무 생각 없이 붉은 대학 건물과 네바 강과 건너편의 에르미타주, 해군성 등을 바라보며 쭉 걸어가다 보면 저 스핑크스들이 나타난다. 차가 쌩쌩 달리고 학생들이 버스 타러 터벅터벅 걸어가고 행인들이 스쳐 지나가는 도로변에서 갑자기 저토록 무심하고 비인간적이고 외계 짐승 같은 묵중한 조각상과 마주치게 되면 그 이질감과 환상성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저 스핑크스는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에겐 이미 일상 풍경의 일부이다.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종종 약속을 잡을 때 '그 스핑크스 아래에서 만나' 라고 한다. '푸시킨 앞에서 봐', '로모노소프 뒤에서 만나' 라고 하듯이.

사실 나도 이번에 친구와 만날 때 한번은 그렇게 약속을 잡았다.

" 스핑크스 아래에서 만나. "

 

 

그래서 스핑크스 아래로 걸어가는 길. 근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았다. 게다가 마침 궁전 교각 공사 중이라 레이쩨난트 슈미트 다리 쪽이 너무너무 밀렸다. 네프스키에서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넘어오는 데도 한참 걸렸고 내려서 다시 스핑크스 앞까지 걸어오는 데도 오래 걸렸다. 강 바람은 차가웠다.

그래도, 스핑크스 아래에서 만나~ :)

 

 

 

 

이렇게, 버스와 차들은 무심하게 휙휙 지나가고 스핑크스 두 마리도 무심하게 마주보고 버티고 있다.

..

사족 : 친구는 늦었다 -_-

 

** 비슷한 느낌에 대해 썼던 페테르부르크와 에르미타주에 대한 짧은 글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1369

 

** 페테르부르크의 환상성과 홍수 신화에 대한 글은 여기 : http://tveye.tistory.com/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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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ontamer